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NL계열 운동권 사이에서 북한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쓴 또 하나의 祖國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라는 책이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던 윤이상이라는 음악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민전이 전개한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도 린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와 더불어 린저는 1980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일성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어렵게 인터넷을 통해 구매했고, 완독은 아니어도 몇몇 부분을 조금씩 읽어봤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내용은 북한의 교화소 관련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으로 드는 소재 중 하나가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관련한 내용이다. 이른바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은 과거 솔제니친이 묘사한 스탈린 시절 소련의 굴라그나 빅터 프랭클이 묘사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른바 서방 진영에서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박연미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 서구에서 그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보는 북한의 수용소에 대해 창 살 없는 교화소라고 책에 대놓고 묘사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묘사는 미국이나 제1세계의 프로파간다라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유린을 묘사하는 내러티브가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산디니스타가 통치하는 니카라과의 모습을 악마화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친미국가들이 자행된 인권 유린들, 예를 들어 피노체트 하의 칠레의 강제 수용소 등은 항상 외면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주제를 다시 루이제 린저로 돌리자면, 그녀가 남긴 북한 관련 기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교화소 문제도 그렇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을 무려 10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이미지는 이른바 밝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독재국가다. 아래의 린저의 발언을 통해 보도록 하자.

 

저는 북한이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김일성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분명 한 지도자가 영구적으로 통치하는 독재 국가이지만, 그녀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나 그런 체제를 이식받은 동유럽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린저가 보기에 북한은 서구 보다 가난하더라도 인민들이 어둡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북한에서 맛본 과일과 아채를 순수한 그대로의 맛, 기름지고 무해한 북한의 토양에서 우러나온 맛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기게 맑다고 얘기했다. 린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현대적인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 린저는 북한 사회가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이 서구보다 훨씬 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린저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서독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그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아무래도 1960년대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린저는 친환경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저가 주목한 밝은 독재라는 개념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독재라고 분석한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 봤다. ,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라는 식으로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전통적인 유교의 산물이라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평화를 원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 , 미국 제국주의의 군사적 무력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린저는 분석했다. 미국은 핵무력을 포함한 온갖 군사적 무력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적인 자유가 제한받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두 가지 지점을 통해 린저는 북한체제가 개성이 용인되지 않은 독재국가라 봤다. 그러나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비록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요, 구금, 추방이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또한, 린저는 권력자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국민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이 만연하는 현상도 북한에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핸 린저는 북한의 교화소를 직접 방문했고, 거기서 담장, 감시탑, 가시철조망, 쇠창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린저는 이에 대해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북한의 수용소는 교화소가 있고, 정치범 관리소가 따로 있다. 교화소는 주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의 폭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빈말이겠으나, 북한의 방침 자체가 주로 교화 및 갱생에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열악함이나 그 내부에서의 폭력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1세계가 묘사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정치범 수용소식 묘사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의 경우 실제로 교화소에 갔다 온 한 탈북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90년대 교화소의 경우 구타와 같은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경우 1~2개월 교화소 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했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이 아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마져도 일각에서 떠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허구라고 말했으니, 글쓴이는 신동혁이가 묘사한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거짓이라고 본다.

 

물론 이와 같은 증언과는 상충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라는 사람은 2014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되어, 북한 교화소에서 212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이후 밀러는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얘기했으며,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증언하기 까지 했다. 또한 밀러는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교화소 시설은 분명 다를 테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북 내러티브만으로 북한의 처벌과 교화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들어가 교화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1세계가 퍼뜨린 북한의 수용소 내러티브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화소의 실상이 어떻든 간에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모습은 독재국가이지만 법과 물리력에 의한 강제로 통제 및 검열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자기통제와 자기검열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또는 자본주의 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회로 본 데에는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서구 좌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 체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당시 체게바라나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저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북한과 김일성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린저의 인식과 사유는 긍정과 오류를 떠나 서구 지성사의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루이제 린저의 동양 호기심과 밝은 독재국가 북한, 그리고 윤이상, 동방학지2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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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을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소련이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무려 2,700만 명이나 사망했고, 2,500만 명에 달하는 소련 사람들이 집을 잃었으며,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즉, 히틀러와 나치가 일으킨 파멸적인 전쟁으로 소련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살육과 인명살상 그리고 파괴와 초토화를 경험했다. 사망한 소련 사람 2,700만 명 중 1,000만 명은 군인이었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이와 같은 민간인 사망자 수치는 나치가 소련에서 저지른 학살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역사적 수치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사망자 대다수는 소련과 폴란드 측 유대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치가 소련에서 벌인 전쟁은 파괴와 대량학살 그 자체였다.


나치는 이와 같은 학살과 파괴를 벌였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나치의 주력부대를 전면적으로 상대했던 나라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1941년에서 1942년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200~300개 사단이 넘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상대한 독일군은 4~5개 사단 정도였다.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하여 제2전선을 연 것이 1944년 6월 5일이었음을 생각해보자면, 사실상 소련 혼자서 독일을 상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베를린 공방전까지 스탈린이 지휘한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또한, 제3제국의 심장에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게 한 것도 소련이었다. 오늘은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을 맞이하여 베를린 공방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으로 진격을 재개한 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러서였다. 소련군의 이 대공세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마무리될 시점에 개시됐다. 이 작전이 바로 비스와-오데르 작전이었는데, 소련의 붉은 군대는 폴란드를 휩쓸고 동프로이센과 동부 독일로 진격했다. 1945년 2월 공세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붉은 군대의 선발 부대들은 독일 수도에서 80km 지점까지 도달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220만 명의 병력에, 4,500대의 탱크, 5,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붉은 군대는 하루에 25~30km 속도로 진격하면서 총 14만 7,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5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을 파괴하거나 거의 파괴할 수 있었다. 비스와-오데르 작전은 2월 말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크림반도에서는 얄타 회담이 진행됐다.


그해 3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분쇄하면서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으로 진격했는데, 소련군의 본격적인 독일 본토 진격은 4월 16일에 개시됐다. 1945년 4월 16일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베를린 동쪽에 있는 젤로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였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큰 피해를 보긴했지만, 그 다음날인 17일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젤로 고지를 우회하여 다른 전선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소련군의 전방 부대가 베를린의 동쪽 교외에 이르렀으며, 소규모 공격 집단을 이용해서 방어자들을 한 구역 한 구역 뒤로 밀어 붙였다. 이때부터 소련군은 베를린을 대상으로 포격과 폭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베를린 공방전을 통틀어 공세에 가담한 소련군은 총 250만 명이나 됐다. 이중 206만 명이 전투병력이었고, 15만 5,900명이 소련과 함께 진격하는 폴란드군이었다. 소련은 탱크와 자주포 6,250대, 화포와 박격포 41,600문, 항공기 7,500대를 공방전에 투입했다. 반면에 소련에 맞서는 독일군은 1,519대의 탱크와 돌격포, 9,303문의 화포와 박격포로 무장했으며, 병력은 최소 75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4월 19~20일 사이 소련의 붉은 군대는 95km를 진격했고, 다음 날 초센 지역에 있던 독일 총사령부를 점령하여 독일군에게 남아 있던 작전 수행 능력을 제거해버렸으며, 베를린 남쪽 교외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4월 22일 해가 질 무렵, 중부 지구에서는 소련군 선견대가 독일 수도의 남부에서 슈프레 강에 도당해, 교두보를 확보했다. 24일에는 추이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이 리발코가 이끄는 병력과 함께 베를린 남동부에서 결합하여 베를린 남동쪽 베스코프 부근의 독일군을 포위했다. 25일 소련군은 미군과 연결하여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 됐다. 소련군과 미군의 만남이 있는 동안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순군은 오데르 서쪽 강을 건너 서안의 독일군 방어진을 돌파했고, 베를린 포위를 더욱 좁혔다. 히틀러는 슈타이너군집단이 베를린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망상에 있었지만, 결국 완전한 패배임을 인정하게 됐다.


주코프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는 4월 26일 공식적으로 베를린 돌격을 개시했고, 베를린 시가지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 과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들이 엉켜있는 곳에서 양측의 총격전과 포 사격이 벌어졌다. 1945년 4월 30일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 수비대를 4개로 나누어 고립시켜 버렸고, 각개 격파에 들어갔다. 또한 소련군은 제국의 심장의 상징과도 같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그곳에 낫과 망치가 들어간 붉은 깃발을 게양했다. 같은 날 히틀러는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자살을 했다. 그러나 베를린 공방전은 종결되기 까지 며칠이 더 걸렸다. 베를린 공방전은 결국 1945년 5월 8~9일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면서 소련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


베를린 공방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군 잔존 병력을 박살냈고, 10만 명 이상이 독일군이 전사했으며, 소련군은 48만 명이나 되는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소련 측의 피해도 컸는데, 소련군은 전사자 8만 명을 포함하여 36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탱크도 거의 2,000대나 파괴됐고, 항공기도 900대나 격추됐다. 폴란드군의 경우 2,800명 정도 전사했다고 한다. 민간인 피해도 제법 컸다. 최소 2만 명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베를린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가장 희생이 컸던 전투는 도시보다는 베를린으로 가는 진입로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시가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보다 훨씬 짧게 진행됐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소련군은 분명히 파시즘을 무찔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소련의 공로가 매우 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소련군에 의한 전시 강간은 전쟁 이후 냉전을 통틀어 서방 진영이 가장 많은 공격과 비판을 가한 주제이기도 하다. 서구의 학자들은 이 시기 소련군이 강간한 독일 여성이 200만 명이라 추산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반박도 있다. 사실 글쓴이도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을 글로 쓴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pfbid02e2rspvSVoWpLw9oFtwKWYWrkeDqD2xGb7sgFieGY54vzJ4TYPEqkWALBwFmUSQwfl&id=100001070470657


앞서 공유한 글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전시강간 문제는 숫자가 심각하게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베를린 공방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그러나 히틀러 정권의 붕괴가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은 아니었다.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과 독일 본토에서 만나고, 제국의 심장에 붉은 깃발을 꽂으며 승리를 쟁취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본의 오키나와 섬을 두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고, 6월이 되어서야 미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 미 공군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폭격했지만,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몰락한 이후 소련 또한 과거 루스벨트 대통령이 원했던 소련의 대일참전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사망했고, 그의 후임자 해리 트루먼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트루먼은 극성 반공주의자였고 소련을 경계했다. 사실 트루먼이 일본이 저항의지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던 그 날 소련은 만주에서도 진격을 게시했고, 불과 열흘 남짓한 사이에 만주와 남사할린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항복시켰으며, 70만 병력을 자랑하던 관동군을 섬멸했다. 수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하고 60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따라서 소련은 히틀러를 몰아낸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공로도 분명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진행되면서 서방 진영에 의해 부정당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권도승 외 옮김, 『독소전쟁사 1941~1945 - 붉은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 열린책들, 2007.

로버트 서비스, 윤길순 옮김, 『스탈린, 강철 권력』, 교양인, 2007.

리처드 오버리, 류한수 옮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풍경, 2003.

오키 다케시, 『독소전쟁 -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1.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https://blog.naver.com/seed_0815/22344151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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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4-05-0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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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소련 붉은 군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라는 말에서 보듯, 나치독일과 일제를 몰아내어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맞서 인류를 지켜낸 소련 붉은 군대의 희생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도차이나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
이재원 지음 / 홍문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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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려 했던 나라들이 있었다. 바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과 태평양 일대를 식민지 지배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등장했고, 과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탈식민화라는 흐름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나라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프랑스의 경우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치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다. 프랑스와 알제리의 역사 문제는 현재까지도 양국의 국제적 이슈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대규모 전쟁을 치렀음에도 프랑스 사람들이 관심을 크게 가지지 못한 전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대략 8년간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프랑스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이들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19458월 베트남 전역을 혁명을 통해 장악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고,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11월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습하면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적인 무력충돌이 발상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서막이었다.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최신식 탱크와 전투기, 군함, 대포 등을 투입했다. 누가 봐도 프랑스의 군대가 베트민보다 훨씬 더 강해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니었다. 바로 베트남이었다. 호찌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베트남인들의 대중적인지지 속에서 해방구 및 세력을 확장했고, 1950년부터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대의 정규군화에도 성공했으며, 베트남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록 프랑스의 군대가 베트민보다 숫자가 적었지만,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다.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11,000명 이상이 베트민의 포로가 됐다. 베트남은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 지배를 지속하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쟁은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호찌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신식 군대와 무기를 궁극적으로 격퇴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군사사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쾌거이며 업적이다. 이와 같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다룬 서적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한국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경우 주로 자신들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 집중을 하다 보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선 전자보다 연구를 덜 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재원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저서 인도차이나 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을 완독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이 책의 시작은 베트남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과 19453월 일본이 일으킨 쿠데타부터다. 책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대해 차분하게 분석하며, 이후 냉전의 열강이 되는 미국과 소련의 정책을 다룬다. 책이 가장 중심적으로 보는 것은 당시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어떻게 인식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책은 전쟁 시기 여론의 변화를 살피기도 하며, 수많은 프랑스 측 사료를 통해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책은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대한 찬성과 더불어 이에 맞서는 목소리도 보여준다.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반대한 세력으로 주로 언급되는 세력 중 하나가 프랑스 공산당이다.

 

글쓴이는 책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존재에 대해 많이 주목해서 읽었던 것 같다. 물론 프랑스 공산당이 처음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전면적인 반대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점에는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프랑스 연합이라는 틀 안에서 베트남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6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는 전면적으로 프랑스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실 프랑스 공산당이 초기에 중립적인 노선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전선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 인민전선 틀 안에서 이들과의 연합 내지는 연대를 통해 베트남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는 당시 이탈리아와 더불어 공산당의 지지가 가장 강력했던 서유럽 국가였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이들 또한 정치 내에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들은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노선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 기간을 통틀어 반전운동을 주도했다. 특히나 부두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파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위를 벌인 노조나 주체들을 보면 프랑스 공산당과 연관이 있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프랑스 공산당이 가장 광범위하게 반전운동을 주도한 사례는 아마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일 것이다.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원 출신 군인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반대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인도차이나로 갔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에 가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실체를 깨닫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단순히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뿌렸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에 대한 석방운동이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놀랍게도 프랑스 공산당은 이 사건을 통해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반전운동 반식민주의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모호한 장 폴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시, 음악, 만화, 연극 등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과 논지를 전파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자면, 프랑스 공산당은 이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저지른 짓은 매우 잔혹하고도 추악했다. 베트남 민중의 절대다수는 호찌민과 베트민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의 무장저항에 시달렸다. 프랑스 군대는 베트민이 은거한 마을로 의심되는 곳을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전쟁범죄를 적잖게 자행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민가에 투하했다. 이들은 포로를 재판 없이 처형하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적을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악마화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자신들의 동원한 외인부대에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군이 포로로 붙잡은 나치 독일군을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 중에는 유럽 전역에서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를 자행한 SS 출신들도 제법 많았다. 어찌 보면 프랑스 군대가 인도차이나에서 학살을 벌인 것도 이 부분과 전면적으로 분리해서 보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가 보낸 군대는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학살과 만행을 자행했지만, 본국의 프랑스 사람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2월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당시 시사 문제에 일반인들보다는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중에, 32%가 인도차이나와 관련된 소식을 전혀 읽지 않았고, 45%아주 가끔씩”, 23%꾸준히읽는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같은 여론조사에, “인도차이나에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인들은 점점 더 호찌민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나아가서 인도차이나를 포기할 것(42%)”을 요구했다. 단지 7%가 무력 사용을 지지했고 단지 1%만이 미국의 개입을 원했으며, 29%나 되는 많은 인원이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지 알지 못하면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다. , 디엔비엔푸 전투가 발생하기 한달 전의 여론조사를 보아도 무관심의 비율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디엔비엔푸 전투는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베트민과 민중이 이룩한 위대한 승리였고, 프랑스에게 있어서 이는 참패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프랑스의 언론들은 통킹의 베르됭인 디엔비엔푸는 4만 명의 베트민의 총공세에 맞서 영웅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 및 미화를 극대화한 기사들을 개제했다. 또한, 프랑스의 지도부는 이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프랑스 지도부는 미국의 지도부들과 함께, 이른바 미군 폭격기가 공습을 가하는 독수리 작전을 논의했고, 심지어 전술핵 투하도 논의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이 열렸고, 19547월에 성사됐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인도차이나 연합 국가의 대표들이 시작한 이 회담은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국가의 독립과 통합을 인정하고 군대의 철수를 약속했으며, 국제적 통제하의 자유로운 총선거는 2년 이내로 계획했다. 당시 프랑스의 지도자가 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경우 1950년부터 인도차이나에 관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프랑스의 군사 교전 중단을 촉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1954년까지 베트남과의 접촉 재개를 위한 노력을 끈기있게 지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부 구성 직후 중국 외무부 장관 저우언라이와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인 팜반동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궁극적으로 1954720~21일 밤에 협정이 체결되면서 8년간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는 반식민주의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에 소모적인 시련의 위험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자칫하면 식민지 전체를 잃는 다는 것이 그가 가진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본 목적은 반식민주의가 아닌 아시아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를 지키자!”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허망한 망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또 다른 강대국인 미국이 이 나라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미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인도차이나 문제에 개입했지만, 제네바 회담 이후 미국은 프랑스가 유지하고자 했던 베트남 남부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가톨릭 신자 출신의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이라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내세워 미국은 베트남의 분단을 획책했고, 제네바 회담에서 약속한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거부 및 파기했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군대는 1956년까지 베트남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주둔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도 사이공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완벽히 인도차이나 문제에서 발을 빼게 됐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장기화 되고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프랑스가 이 제국주의 전쟁을 어떻게 포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 당시 프랑스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프랑스의 전쟁 노력을 찬성하는 쪽의 경우는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프랑스 내에서는 지지하는 정파가 좌익일수록 전쟁의 책임이 프랑스와 국제 자본주의에 있다고 생각한 반면, 지지하는 정파가 우익일수록 그 책임을 베트남과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돌렸다. ,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이념 전쟁으로 둔갑시켜 선전했다.

 

여기에는 프랑스가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속셈이 있다. 1949년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국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돕게 만든 계기였다. 1952년에는 미국이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이 수치는 더 상승하여 1954년에는 80%까지 상승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프랑스가 세운 꼭두각시 정권인 바오다이 정권의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이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 베트남 국군을 창설하고 1952년까지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하여 베트민과의 싸움에서 프랑스군을 대체하려 했다. , 이를 통해 인도차이나 전쟁의 내전화를 노리고자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적 성격이 전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냉전이라는 흐름 속에서 프랑스가 자신들의 속성과 본질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는 이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벌어졌다. 1968년북베트남군이 감행한 구정 대공세로 미국과 서유럽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격화되었는데, 1969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닉슨은 이른바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고자 했다. 닉슨의 구상은 남베트남 티우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통해, 베트남인들의 내전화를 노리는 것이었다. , 20년 전 프랑스가 노린 것을 20년 후에 미국이 똑같이 반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미국의 베트남 전쟁도 너무나도 명백히 베트남인들의 독립전쟁이었고, 미국은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반성하지 못했다. 자유우방을 돕는다는 표면적 명분을 내세웠던 박정희 정부는 남베트남 정권이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었음에도 미국을 따라 한국군을 파병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는 베트남인들의 피와 한국의 가난한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피를 통해 마련된 비극의 서사였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 본질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교수는 한국 내에서 최초로 베트남 전쟁을 호찌민의 독립전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내러티브가 한국인들 인식 속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는가를 생각하면 글쓴이는 회의적이다. 글쓴이의 경우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 전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베트남 전쟁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 베트남 전쟁은 리영희 교수가 주장한 바와 같이, 19세기와 20세기를 통틀어 베트남인들의 거대한 저항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필요가 있다.

 

, 그 전쟁이 일어나기 전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고, 미국이 식민지 국가 프랑스를 도왔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 사실을 안다면 박정희 정권이 주장한 베트남 전쟁 내러티브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침략전쟁인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관련한 국내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이재원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거기다 그 당시 프랑스 쪽 내부상황도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한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기까지 하다. 그런 점에서 일독을 적극 권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언급한 소련의 반식민주의 관련해서도 꼭 언급하고 싶다. 소련이 호찌민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50년이 되어서지만,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소련은 여러 국가들에게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많은 도움을 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레닌이 주장한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전파했고,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혁명가들도 이 영향을 받았다. 이는 스탈린 시기도 마찬가지며, 소련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와 같은 측면을 보자면 소련의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제는 이와 같은 사실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할 때라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도 소련의 긍정성은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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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최종진지를 함락시킨 베트민)


올해 5월은 베트남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해다. 왜냐하면 베트남 현대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 Battle of Dien Bien Phu) 승전 7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313일에 시작되어 57일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전투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던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나라에게 전쟁에서 패전한 전무후무했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서구의 지배계층들은 이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 반면에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투는 영광스러운 승리 그 자체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기 때문이다.

 

1.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한 설명

(디엔비엔푸 야경, 글쓴이가 직접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디엔비엔푸는 베트남 북쪽 디엔비엔 성의 성도로 길이 20km, 6km 분지 지형인 므엉타인(Mường Thanh)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라오스 국경이랑 워낙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디엔비엔푸 시내는 라오스 국경이랑 대략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대략 8만 명 정도며, 베트남 주 민족인 킨족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다. , 베트남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한 지역으로 타이(Thai)족과 몽족(Hmong), 시라(SiLa)족 등이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시골이며,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전혀 아니다. 지난 20231월 글쓴이는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숙소와 공항의 거리가 말 그대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놀랐었다. 디엔비엔푸로 가는 교통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10~12시간 이상 버스나 봉고차를 수도 하노이에서 타고 가는 법이다. 두 번째는 그것보다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하노이에서 출발하는 디엔비엔푸 국내선 비행기를 예매하여 비행기를 타고 가는 법이다. 비행기로 가는 경우 대략 1시간 정도 걸리며, 운항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이 곳이 유명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하기 이전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 과정에서 일어났다.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보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저항의 역사다. 1850년대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다낭에 상륙하면서 베트남을 식민지 지배했고, 대략 1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다. 인도차이나라 불린 지역을 북부 통킹, 북부와 중부 안남, 남부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로 나누어 지배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말 그대로 그 지역 민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1941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의 문맹률은 90% 이상이었고, 병원이나 학교가 매우 부족했으며, 그와 반대로 술집과 아편 흡인장소 그리고 매춘이 프랑스 식민권력에 의해 창궐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것에도 열정을 다했다. 1930년 베트남 북부와 중부에서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프랑스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전투기도 동원했다. 적잖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체포되고 죽었으며, 베트남 공산당이 봉기를 주도했던 응에안 성 소비에트의 경우 프랑스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20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 측 시위대를 전투기로 진압했다는 사실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의 지배 및 통치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접수했다. 일본은 나치가 앞세운 비시 프랑스 정권과 함께 인도차이나를 통치했다. 이들의 통치도 매우 가혹했다. 1945년 일본의 공출로 베트남에선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40만 명에서 많게는 200만 명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한 베트남 독립운동 단체가 구세주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

(보 응우옌 지압 장군, 베트남의 명장으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무찔렀다. 2013년 10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베트민은 1941년 초 중월국경지대에서 창설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단체를 창설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Ho Chi Minh)이었고, 그 군대를 지휘한 장군이 바로 보응우옌지압(Vo Nguyen Giap)이었다. 베트민은 창설시점부터 프랑스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45년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베트민은 일본군의 곡식창고를 습격하여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따라서 베트민은 민중의 대대적인 지원 및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458월 일제가 패망하자 전국적인 총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19459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호찌민은 이른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베트남은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베트남에는 장제스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당군과 더글라스 그레이시(Douglas Gracey)가 지휘하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됐다. 이건 1945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른 결과였다. 물론 영국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차이나를 프랑스 측에게 양도했다. 반면에 국민당은 1946년 초 자국 내의 내전을 대비하여 철수했다. 인도차이나에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 지배할 궁리를 했다. 호찌민이 독립을 선포하기가 무섭게 베트남에는 옛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입성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써,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고자 했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충돌은 사실상 예고된 것이었고, 여기서 발발한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항불전쟁)이었다.

 

194611월 프랑스는 하이퐁을 포격 및 폭격하여 당일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포격 및 폭격으로 발생한 민간인 부상자는 25,000명 정도에 달한다. 하이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를 그해 12월에 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항불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주로 베트남 북부와 통킹 지역에서 치러졌다. 어쨌든 전쟁 초기 프랑스는 최신식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군함과 대포로 무장했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민을 상대로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베트민은 항불항전 전략을 1·2·3단계로 이론화했다.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총비서인 쯔엉찐은 1947년에 쓴 글에서 방어에 치중해야 하는 1단계, 아군과 적군이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2단계, 아군이 총반격에 나서는 3단계로 설정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현재까지도 베트남 사람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69년 미국에 맞서 싸우던 중에 생을 마감했다.)

 

실제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전투는 그렇게 전개됐다.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워 이른바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을 실행했다. 이들은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여 수천 명의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그러나 작전에서 목표로 했던 호찌민을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프랑스는 1950년까지 전선이 교착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으며 해방구를 확장했고, 1950년에는 중월 국경지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련이 핵개발을 하면서 미소냉전이 보다 격화됐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과 소련이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 프랑스는 반공을 내세우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식민지 전쟁을 반공주의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고 획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아래 장인 4장을 통해 보도록 하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전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베트남인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베트민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던 전쟁이었다. 베트남인들 대다수는 프랑스의 군사적 행동을 식민지 지배라고 생각했다. 당시 호찌민의 연설을 보면, 이 전쟁의 성격은 너무나도 분명해진다.

 

베트남 혁명의 주요한 과업은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는 것이며,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고 베트남을 재통일하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봉건적 착취를 일소하고, 논을 경작자에게 돌려주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혁명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의 적들은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입니다. 혁명의 창끝은 그들을 겨냥해야 합니다.”

 

1950년부터는 국제정세 및 전황이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우선 19501월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마오쩌둥은 베트민을 위해 군사고문단 파견과 장비 및 물자를 지원했고, 이에 따라 베트민의 무장력도 강해졌다. 1950년 가을 베트민은 중월국경지대에서 프랑스 정예군 1만 명을 격퇴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중월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동케 전투의 경우 프랑스 최정예 부대인 외인부대를 포함하여, 프랑스군 300명이 전사하고 적잖은 탄약과 무기를 확보했었다. 베트민이 전개한 중월국경지대에서의 총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동케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호찌민)

 

이와 같은 중월국경지대 전투가 있은 직후인 1951년 초 베트민은 홍강 삼각주와 하노이를 향해 공세를 가했다. , 앞서 언급한 3단계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물자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큰 전투에서 네 차례나 패전했다. 결국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 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베트민은 그 이후 다시 승기를 잡았다. 195110월 초 프랑스군 15개 연대가 두옌하, 훙난 그리고 띠엔 훙 지구에서 베트민과 대규모 전투를 시작하여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여기서 베트민이 승리했다. 꽁호와 안미 그리고 안빈 이 세 지역에선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기도 했었다. 1952년 베트민은 호아빈에서 벌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정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1952년 겨울 라오스 쟈로 평원과 1953년 삼네우아 해방, 1953년 나산 전투에서의 승리 등으로 다시 승기를 잡았다. 또한 베트민은 베트남의 중부지대와 중부 고원지대 그리고 남부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53년으로 접어들면서, 서구 열강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휴전회담을 통해 합의를 보려고 했으며, 인도차이나 또한 그러했다. 19535월 앙리 나바르 장군이 프랑스극동원정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프랑스 측의 전황은 암울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라오스의 저항조직 파테트라오를 지원했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프랑스가 세운 괴뢰국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라오스 국경지대에 대규모 요새를 세웠고, 이게 바로 디엔비엔푸였다.

 

3. 디엔비엔푸 전투의 전개과정과 승리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19531120일 오전 630, C-47 정찰기 1대가 디엔비엔푸 마을을 선회하며 폭격을 가했고, 이후 64대 이상의 프랑스군 정찰기에서 공수부대가 투하됐다. 당시 이들이 낙하한 곳에는 베트민 2개 중대가 있었으며, 양측의 전투가 발생했다. 프랑스군도 최소 4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베트민의 2개 중대도 적잖은 병력이 손실됐다. 이후 앙리 나바르는 이 디엔비엔푸에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고, 최소 11,000명 이상의 병력을 디엔비엔푸에 배치했다. 디엔비엔푸 요새를 세운 프랑스군 중 일부는 이 요새에 겁먹은 베트민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망상과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프랑스군의 망상이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망상은 당시 프랑스 여론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공수부대의 투하가 프랑스에 알려지자 로로르라는 프랑스 신문은 1면에 앙리 나바르가 베트민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했다. 수천 명의 공수부대원이 디엔비엔푸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군대의 용맹과 지도자의 권위를 확인했다.”라는 표제를 달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프랑스는 베트민의 군사적인 능력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딩인비엔푸 전투를 회고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소련제 트럭을 활용했고, 5만 명의 병력과 2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동원했으며, 산길을 지나 물자와 화기를 운반했다. 이들은 중포와 방공포도 운반해 기지에 배치했다. 베트민 병사들은 직접 포탄을 머리에 이고 날랐으며, 대포를 맨손으로 끌고 갔다. 당시 어떤 베트민 병사는 대포를 옮기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말 그대로 베트민에게 있어 이것은 총력전이었다. 전 민중이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결했다. 당시 베트민 부대들은 프랑스군의 항공기가 정찰하면, 풀숲이나 밀림에 숨었으며, 정찰기가 사라진 이후 다시 진격했다.

(대포를 운반하는 베트민 병사들을 표현한 모형, 글쓴이가 디엔비엔푸 박물관에 들렸을 때 직접 찍은 사진이다.)


(디엔비엔푸 베트민 사령부가 있는 곳, 글쓴이가 직접 현장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프랑스군 디엔비엔푸 요새에 대한 본격적인 제1차 공격은 1954313일에 시작됐다. 밀림 속에 잠복해 있던 베트민군의 대포가 계곡 바닥에 모여 있는 프랑스군에게 분당 50발의 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1차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활주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물자보급과 병력 보급은 프랑스군의 항공기로부터 낙하산 투하에 의존하게 됐으며, 프랑스군 포대 지휘관인 피로트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 충격을 받아 스스로 자살했다.

 

1954315일에는 프랑스군의 요새 가브리엘과 앤 마리 이 두 곳이 베트민군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다음 날인 16일 프랑스군은 병력을 증강했으며, 전투를 통틀어 총 16,200명의 프랑스군 병력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327일 베트민은 프랑스의 엘리안느 1기지를 확보했으며, 활주로 중앙에 포탄을 퍼부었다. 330일 베트민은 이른바 A1 고지라 불린 엘리안느 2기지에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A1 고지에 견고한 지하 벙커를 건설했으며,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를 배치해 항공기의 폭격 지원을 받으며 진지를 지켰다. 베트민군은 330일부터 43일까지 5일간 연속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며 고지의 절반을 차지했다.

(베트민 측 대공포 부대)

 

이후 A1 고지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있다가 51일 다시 시작됐다. A1 고지가 완벽히 점령당한 것은 195456일 베트민 부대가 프랑스군의 철통같은 방공호에 1,000kg의 폭탄을 터뜨린 다음 고지를 점령하면서였다. 다음 날인 57일 오후 4시 반에 완전히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비밀 터널을 굴착하고 1톤의 지하 폭발물을 설치하여 진지 대파 후 최후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들은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베트민은 1차 공격을 실행한 이후 프랑스군의 거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베트민은 대공 방어 진지를 증강했으며, 프랑스군 수비대의 방어 진지는 점차 감소했다. 1954329일 베트민은 비행장 동쪽과 남쪽 그리고 남영강 동쪽 고지를 점령했으며, 야포와 박격포 사격을 가한 뒤 4개 주요 진지를 점령하고자 지뢰밭과 철조망 방어 지대를 지나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희생이 급증하자 신병들은 밀림 속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41일 지압 장군이 디엔비엔푸에서 직접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당시 프랑스군의 막강한 항공 화력 및 공세로 베트민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압 장군은 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하여 적은 인원으로 프랑스군 진지에 바짝 다가가서 참호를 부수는 작전을 사용했다.

 

1954410일 이후 잠시나마 디엔비엔푸 전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는데, 그 동안 프랑스 공군은 디엔비엔푸에 병력을 증강하고 탄약과 식량을 공중 투하했다. 대략 4,000명 이상의 최정예 공수부대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중에 증원됐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급품은 번번이 베트민 쪽에 떨어지기도 했다. 지압은 휘하 병력 35,000명과 압도적인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대공 화기로 프랑스군 참호를 격파했다.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이 마지막 공세에 나선 것은 1954429일에 이르러서였다. 5월 초부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의 외곽 방어선까지 돌파했으며, 내부의 프랑스군 요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의 내부 방어진지가 하나씩 함락되었고, 앞서 언급한 A-1 고지도 그렇게 함락됐으며, 디엔비엔푸의 지휘관 드 카스트리가 있던 지휘부 요새도 백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지압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5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 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 509번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이에 대해 호찌민은 다음과 같은 축하서한을 보냈다.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함락된 프랑스군 참호 실제 사진)

 

결과적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종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293명 전사, 6,650명 부상 그리고 1,729명이 실종됐다. 대략 11,721명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으며, 미군 2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베트민의 경우 최소 4,020명에서 많게는 8,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략 1만 명 정도 전사했다고 추산하는 경우도 있다. 병력 55,000명 중에 대략 25,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디엔비엔푸에서만 최소 62대의 프랑스 측 항공기를 격추시켰고, 그 시기 다른 전선에서 베트민은 177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 병사들이 보인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당시 적이었던 프랑스군 지휘부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던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을 마음속으로 존경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베트민에게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군 포로 행렬)

 

그들은 사냥총과 같은 치졸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전쟁 준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분대에서 중대로, 대대에서 연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사단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베트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보병이었다고. 이 인내심 강한 병사들은 운동화에,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km를 행군했다. 그리고 전투에 임해서는 군가를 불렀다. 이처럼 뛰어난 보병이었기 때문에, 디엔비엔푸에서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병력에서 수적으로 열세였고 프랑스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미군도 격퇴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보병이었다.”

 

4. 미국 제국주의의 프랑스 식민지 전쟁 옹호 및 지원

(디엔비엔푸 전사자 묘역)

 

디엔비엔푸 전투는 100년간 베트남에서 지속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는 사실에서 아주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라는 역사에는 주목해야할 또 다른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제국주의의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이다. 사실 미국이 처음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9년 미소냉전이 본격화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게 됐다. , 여기서 반공의 논리가 작용했으며, 프랑스도 이 전쟁을 반공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 했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 전쟁이라는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반공과 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라는 자신들이 가진 모순 그 자체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1,490억 프랑에서 1952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년에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1954년에는 이 수치가 대략 80%까지 상승했다.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미군 정규군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사실상 미국이 이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규모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와중에도 확인이 된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및 프랑스 지도부는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것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술핵무기 3발을 사용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옵션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회고록 내용을 보자.

 

“19544월 초순,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기지에 병력을 증원하기위해 미국에 전투기 대대와 중폭격기 대대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 투입으로도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으며, 국내외 여론의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앞서 언급한 전술핵 관련 부분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미 공군 참모총장 네이선 트와이닝)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멀쩡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한 미군도 있었다. 이들은 민간업자로 위장한 CIA 요원이었으며, 이들 중 2명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중 한 명은 2004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맥거번 2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민간 조종사로 CIA에 고용된 인물이었다.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식민지 지배자 프랑스를 돕기 위해, 비밀리에 CIA 요원을 민간업자로 위장시켜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했던 셈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부터 프랑스의 부도덕한 식민지 유지 전쟁을 반공이라는 논리로 포장하면서 도왔던 것이다. 따라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은 마땅히 규탄 받고 강력히 비판 받아야할 역사적 사실이다.

 

5.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의 현재성

(디엔비엔푸에 있는 승리 기념상)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은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식민주의적 지배에 맞서 다시 한번 저항해야 했지만, 디엔비엔푸 전투가 제3세계 인민들의 탈식민화 운동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특히나 프랑스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경우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962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시기 미제국주의자들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영웅주의를 칭송했다면, 소련과 중국은 베트민 전우들의 승리를 환영했다. 어찌됐든 디엔비엔푸 전투는 냉전시기 탈식민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앞으로도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다.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열병식)

 

2024년인 올해는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되는 해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글쓴이는 페이스북에 베트남 친구들이 많은데 이 중 한 사람은 열병식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친구들의 페이스북에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기념하는 여러 포스팅들을 쉽게 확인하고 있다. 이제 70년도 더 지난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과연 현재성이 없을까? 글쓴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3세계 나라에선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맞선 항쟁들과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맞선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영미 제국주의자들이 후티를 축출한다는 명분을 들어 예맨을 폭격했지만, 이들의 저항 앞에 제국주의자들은 먼저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 2023년 여름 니제르에서 시작된 반프랑스 봉기는 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거쳐 거세게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고 있다. 이처럼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움직임에 훼방을 놓고 간섭을 하는 주체는 미국 제국주의 자신이다. 마치 이들이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 전쟁을 도왔듯이 말이다. , 지금도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에 맞선 저항이 이른바 서구 일극패권체제에 반대하는 나라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전은 지금도 의미하는 바다 크다.

 

지난 20231월 글쓴이는 베트남을 여행하며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디엔비엔푸 승전 박물관과 A1 고지,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한 베트민 사령부 진지 및 프랑스군 사령관이 항복한 참호까지 두루 관광했다. 글쓴이는 베트남 민중의 항쟁 유적지를 돌아보며 깊이 감동했다. 현재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세는 점차 반제국주의 진영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항쟁이 보여주듯이, 디엔비엔푸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또 다른 국가에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제3세계 해방전사들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는 막대하다. 이 글이 많은 이들에게 반제항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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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195457일 디엔비엔푸 요새의 함락과 프랑스 식민지 제국의 해체, 프랑스사 연구48, 한국프랑스사학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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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 서강학술총서 103
이재원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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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랑스 제국주의 비판인가?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Imperialism)‘ 하면,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19세기 시대의 서구 열강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도 제국주의가 존재한다고 얘기한다면, 그 말부터 의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위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은 알지만, 그 제국주의 열강이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 다른 국가들에게 했던 일에 대해선 상당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국을 한번 보자. 많은 사람들이 대영제국이라는 말은 알지만, 정작 그 대영제국이 20세기와 21세기에 했던 일에 대해선 잘 모른다.

예를 들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출처 불명의 명언 주인공으로 알려진 처칠이 인도와 케냐 그리고 말레이시아 등에서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전쟁을 벌인 장본인이었고, 그리스 내전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영국이 21세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리비아에서 부당한 침략전쟁을 벌인 사실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영국과 함께 세계 분할에 앞장섰던 프랑스는 어떠할까? 프랑스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태평양 일대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렸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등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다 패배했다. 또한 프랑스는 드골 정부 하에서 개발한 핵폭탄의 성능시험을 한때 자신들이 점령하게 된 식민지에서 100번이나 넘게 수중실험을 벌였고, 단연컨데 그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과 환경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21세기 들어 리비아에서 침략전쟁을 수행했고, 코트디부아르에서도 전쟁을 벌였다.

쉽게 말해 프랑스 제국주의라는 주제는 분명히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성을 가지는 주제임에도 국내에 관련연구를 다룬 저서를 찾기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관련 연구자이자 학자인 이재원의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책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서문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프랑스 제국주의를 다룬 저서들 중에 국내에 출간된 것들도 있다. 마르크 페로의 <식민주의 흑서>나 질 망스롱의 <프랑스 공화국 식민사 입문>이 있다. 이 책들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정복과 착취 그리고 지배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그러나 이재원의 저서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은 이전에 국내에 번역된 책들과는 달리 프랑스 제국주의의 사회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프랑스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합리화 했고, 그런 부분들이 교육, 언론, 박물관, 일상 등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본 것이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영역 중에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보게되는 서구 영화들 중에 과연 그런 식민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요소가 들어간 것이 없을까?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영화 ‘300‘만 보더라도 곳곳에서 오리엔탈리즘적 요소와 미국의 대이란 정책과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는 부분이 많이 드러났다.

이런 문제는 비단 영화 ‘300‘만의 문제는 아니다.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디즈니 애니 라이온 킹에서도 드러난다. 아래의 책의 내용을 보자.

˝오늘날 오모 미크로(Omo micro)와 같은 세제 선전이나 정글북(The Jungle Book)과 같은 만화영화에서, 그리고 몇몇 영화에서 원숭이가 흑인을 대체하긴 했지만, 식민지적 수사는 그대로이다. 예를 들어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영화 「라이온 킹」(1994)의 비비 원숭이 라피키(Rafiki)의 경우, 프랑스말로 더빙하면서 억양이 강한 아프리카인의 목소리를 사용했다. 반면에 아랍인은 몇몇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유머가 있고, 뤽 베송(Luc Besson)이 제작한 「택시」(1998)에서처럼 현대 도시 우화의 일종의 광대이자,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현대의 새로운 ˝원주민˝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재원,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237~238쪽.

그렇다면 우리가 놀러가는 놀이공원과 같은 여가 시설들은 어떠할까? 그런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일까? 아래 책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놀이공원의 시초‘이며 진정한 ‘환상의 세계‘였던 1931년 식민지박람회는 대중들을 초대하여 ˝하루 동안의 세계 일주˝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 상상으로의 여행을 통해 유럽의 ‘문명화된‘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꾸며낸 세계에 대한 믿음이, 항상 서양에 유리하고 불평등한 식민지적 관계의 사고방식이, 5대양에 걸쳐 1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위대한 프랑스˝라는 의식이 확산되게 되었다. 건축물과 장식의 아름다움과 장대한 정경들은 프랑스인들이 오랫동안 기억할 ‘식민지 환상‘에 기여했던 것이다.˝

이재원,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186~187쪽.

이러한 부분을 보았을 때, 프랑스 제국주의적 유산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 저서가 다루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사회 문화적 측면은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뽑자면, 1930년 프랑스 식민지 박람회의 인간 동물원과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 그리고 반식민지 박람회와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이다.

전자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면 후자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움직임을 다룬다. 후자에서 보다 주목하게 되는 점은 프랑스인들의 반식민주의 투쟁이다. 특히나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프랑스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인 인도차이나 전쟁에 맞섰던 앙리 마르탱의 존재도 감명깊었지만,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갇힌 그를 석방하기 위해 전개된 반전운동과 석방운동도 감명깊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선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대중운동을 잘 주도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공산당의 활동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필자는 이 책의 가치와 의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해 학술적으로 비판한 저서를 국내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프랑스 제국주의를 보게 되니, 현재 2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왜 서구가 주도하는 대러제재에 동참하지 않는지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현재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서방세계와 자유를 지키자˝고 말하는데, 이게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를 받은 이들에게 공감될 리가 없다. 이렇게 보자면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니제르를 포함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구 편을 안드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과거 프랑스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한 국가들이 현재 NATO 대 러시아의 싸움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절대로 NATO편을 안드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면에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백인 우월주의적인 지배가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문제는 분명히 현재성을 가진 주제다. 필자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앞으로의 세계는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한 세계가 되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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