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42
김태완 지음, 주경훈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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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호치민이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 일독을 권한다. 나름 균형있게 서술한 것이 잘보이는 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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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강철 권력 문제적 인간 9
로버트 서비스 지음, 윤길순 옮김 / 교양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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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이 탱크와 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못하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출처: 스탈린 강철권력 p.480에서 1933년 노동절 행사 때의 스탈린 연설문을 발췌

 

이오시프 스탈린!! 그는 대숙청으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대학살자라는 타이틀과 공업화를 성공시켜 소련을 미국과 경쟁하게 했던 위대한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나 스탈린 정권에 의해 피해를 적잖게 본 우크라이나나 발트3(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핀란드의 경우 그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지 않다. 현재 북한하고 대립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었고, 지금도 긍정적인 평가보단 부정적인 평가가 훨씬 앞선다. 그러나 한국에서 있던 그에 대한 비판은 북한과의 대립 속에서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비판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생겼고, 보다 자세히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이다.

 

1. 일국사회주의의 빛과 그림자

 

1924121일 소련의 위대한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했다. 1920년대 초부터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점차 정치에서 멀어졌고, 그로인한 공백은 레온 트로츠키를 비롯하여 니콜라이 부하린이나 카메네프, 지노비예프같은 인물들의 경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트로츠키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자 레닌은 이것을 일부분 견제하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스탈린의 권력또한 조금씩 막강해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소련에서는 정권을 두고 당내 투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연설이 매우 뛰어났던 레온 트로츠키 대 다른 지노비예프와 같은 다른 당내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이는 트로츠키도, 지노비예프도, 부하린도 아닌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1928년 최종 권력에 도달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가 행하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제15개년 계획이라고 하여 경제재건에 나선다.

 

그와 동시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국제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일국사회주의를 표명하는데, 이는 향후 국제정세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일국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일국사회주의란 국제사회주의와는 달리 세계적인 국제 혁명과는 달리 한 나라 안에서의 역량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1926~27년 스탈린이 주장했다. 즉 이는 국제혁명 없이는 사회주의 건설이 없다고 주장하던 레닌의 주장과는 분명 다르다.

 

일국 사회주의를 표명한 이후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제대로 된 타격을 받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제1차 국공내전에 휩싸였던 중국과 1936년 파시스트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패인 내전이다. 1920년대 중국의 지도자 손문의 지도아래 전개된 제1차 국공합작에서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스스로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1927년 장제스는 중국의 상하이와 광저우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1936년 진보주의자들이 선거로 정권을 잡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일어나게 된 스페인 내전에서도 이오시프 스탈린은 크나큰 실책을 범한다. 1936년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나치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프랑코를 도왔고,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은 프랑코에 맞서는 반프랑코 세력을 도왔다. 그리고 해외에 있는 수많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반프랑코 세력을 지원했었고, 이들 중에는 스탈린하고 맞지 않는 사회주의 세력들이 있었다. 초반에는 그들이 협력하여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싸웠지만, 반스탈린계열 사회주의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스탈린은 그들에게 무기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반스탈린 계열 사회주의자들에게 총구를 겨눠 같은 세력들 끼리 전투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939년 파시스트 프랑코의 승리였다.

 

즉 그가 표명한 일국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비극과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는 무조건 틀렸던 것일까? 이 또한 아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던 1930년 대 초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등장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경제적인 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1931년 정권을 잡은 일본 군부들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고,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며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소련은 극동에서는 일본을 상대해야 했고, 유럽에서는 나치독일을 상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중공업 위주의 경제개발과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내세운 일국사회주의는 참으로 효과적이었고, 이후 나치독일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2. 대숙청과 굴라그

 

스탈린 통치시대 가장 큰 인권유린을 논하자면 대숙청이라 할 수 있다. 공업화라는 과정에서 스탈린은 1935년 키로프 암살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대숙청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받았고, 엔카베데(NKVD)는 스탈린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견해를 들어내면 언제든지 체포하고 구금하거나 강제 수용소인 굴라그로 보낼 수 있었다. 마치 박정희 전두환때 반대파들에게 했듯이 말이다.

 

대숙청이라는 기간 동안 NKVD는 공식적으로 75만 명을 살해했고, 그 시기 굴라그로 끌려간 인민들이 수백만이 넘는다. 그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 코요야칸에서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비극적으로 살해되기 까지 했다. 이는 분명 스탈린 시기 공포정치의 치부다. 물론 치부이기는 하나 그 시기 희생자의 수치를 필요이상으로 늘려 악의적으로 악마화를 하는 것은 분명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인 사람이 2천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인데 이는 분명 과거 서방주의자들이 하던 프로파간다를 반복적으로 읊는 것 밖에 안 된다.

 

로버트 서비스의 경우 스탈린이 저지른 인권유린에 대해 비판은 하되 최소한 그런 과장된 수치를 사실인 냥 쓰지는 않았다는 점은 나름 괜찮게 평가할만 하다.

 

3. 스탈린 경제개발과 박정희 경재개발의 차이

 

이오시프 스탈린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까지 행했던 경제 성장을 예시로 들며 성과물을 얘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얘기가 있다. 그게 바로 1960년대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경제성장 노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또한 스탈린이 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따라했고, 그 결과는 어마무시한 경제성장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또한 그런 경제 성장을 통해서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고, 이는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서운 속도의 경제 성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박정희와 스탈린은 비슷하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 성장과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은 분명히 다르다. 박정희의 경우 동맹국 미국이라는 크나큰 지원 세력이 있었다. 거기다 1960년대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견함으로써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 들일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박정희의 경제성장에는 미국이라는 지원세력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지만, 스탈린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스탈린의 경우 오히려 미국과 서방으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이라는 상황에 놓여있었고, 적백내전 시기 수백만이 굶어 죽는 대기근까지 겪었던 나라였다.

 

박정희와 스탈린 둘다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이었고, 농촌을 희생시키는 전략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이 달랐다. 박정희의 경우 경제성장에 있어서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었지만, 스탈린의 소련은 수십억 혹은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대기업도 없었고, 자본가 계급도 없었다. 즉 스탈린의 소련은 국유화라는 정책을 통해서 사적소유를 철폐한 사회였다는 점에서 박정희 하고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스탈린과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국민들 복지라는 점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전태일 평전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박정희 시대의 여공들은 말 그대로 무자비학 착취를 겪었었다. 여공들은 햇빝이 안들어오는 공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했고, 19세기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가들의 탐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스탈린의 소련도 착취를 기반으로 성장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박정희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여성들의 월경휴가를 예로 들 수 있다. 비록 스탈린의 경제 개발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 규율이 강화되긴 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등이 실행되었으며 5개년 경제 계획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8시간 노동제가 실행되었다. 특히나 무상 교육의 실시로 인하여 스탈린의 소련은 문맹률이 매우 현저하게 낮아졌다. 비록 양질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인민들의 주거와 복지 의료가 상당히 보장되었다. 따라서 대기업과 자본가들 위주로 투자하며 인민들 복지는 생각지 않는 박정희의 성장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기에, 스탈린의 경제 성장과 박정희의 경재 성장을 똑같다고 하거나 박정희 경제성장을 보다 더 대단하다 보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로버트 서비스의 경우 스탈린의 경제 성장이 분명 소련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필요하다는 점과, 실제로 성장을 하였다는 점은 인정을 하지만, 정작 스탈린시기 어떤 정책이 실행됐는지에 대해선 문맹률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선 얘기하지 않았다. 그 점은 로버트 서비스 책의 치명적인 한계다.

 

4. 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일국사회주의를 논하는 파트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는 동양과 서양에서 파시즘이 부상하는 시대였다. 그렇게 탄생한 파시스트 국가들은 결국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고, 1940년과 41년에는 유럽 영토의 75%를 점령했다. 일본의 경우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0년에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으며 1941년에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스탈린의 경우 초반에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으나, 그 조약이 히틀러와의 군사적 동맹을 맺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를 통해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차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들의 불가침 조약은 1941622일 히틀러의 300만 대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파기됐다. 탱크 3천 대와 항공기 2천대를 동원했던 히틀러의 군대는 2차세계대전 초기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전략을 구사하여 수십만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고 소련군 항공기 1800대를 지상에서 격추시키는 등 러시아 영토로 진격해 나갔지만, 동장군의 힘을 빌렸던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과 1942~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전세는 다시 소련군에게로 돌아왔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영국과 중국 뿐만 아니라 소련에게도 랜드리스라하여 수많은 물품들을 지원했고, 이는 소련이 반격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이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나 러시아 중부에 있는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공장은 가성비 좋은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어마무시하게 생산해냈다. 독소전쟁 초반인 1942년만 보더라도 6개월 동안 소련이 생산한 항공기가 15000, 탱크가 13000대였다. 이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성장은 히틀러에 맞선 반파시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432월 독일의 프리드리히 파울르스가 자신이 이끌던 25만 명의 병사와 함께 소련군에게 항복하면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1943년 소련은 지상 최대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 1941년 스탈린은 대숙청 당시 자신이 범했던 실책을 빨리 인정했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종심 방어 전술 위주의 전략을 토대로 작전을 세울 수 있게 했으며, 비록 연설을 자주하지느 않았지만, 소련인민들에게 반파시즘 항전의 명분을 명확히 제시했다. 따라서 스탈린 또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있다.

 

5. 한국전쟁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한때는 파시즘세력에 맞서는 동맹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 하는 자신들의 패권 경쟁에 나섰다. 1940년대 중후반에는 유럽이 동과 서로 나뉘었고, 특히 전범 국가였던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경우는 달랐다. 전범 국가였던 일본을 분할해야 했지만,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분할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분할로 인하여 3년 후인 1948년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등장했고, 1950625일 김일성의 북한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처음 시작은 북한군이 우세하여 한국땅 90%를 차지하였지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고, 그러던 중 중국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한국 전쟁은 1953727일 휴전으로 끝나면서, 남북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적화시킬 야욕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458월 한반도에 소련군이 입성했을 때부터 한국전쟁때 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은 한반도 문제에 그리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동유럽에서의 패권 경쟁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남침을 허가해달라고 했을 때 여러번 거절했다. 마지막에 허용한 것도 미국이 군사개입을 하기 전 까지 끝낸다는 전제하에 허락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에 대신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렇다면 왜 적잖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스탈린까지 얘기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비록 한국전쟁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스탈린이었지만, 북한에게 탱크와 비행기 야포를 지원했던 것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기 때문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를 근거로 한국전쟁 파트에서 스탈린에게 한국 분단 책임이 있다는 듯이 서술한다. 이는 한국현대사의 기본적인 맥락을 빼놓고 하는 얘기이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스탈린보다 미국에게 더 있다. 비록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하더라도 말아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남부로 들어온 미국이 친일파들을 앞세워 분단을 고착시켰고, 여운형과 같은 통일세력들을 탄압했으며 사회주의를 갈망하던 남조선의 노동자 농민을 패죽이며 분단주의자 혹은 미제국주의자인 이승만이 권력을 잡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 아니라 미제국인 것이다.

 

6. 결론

 

10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로서트 서비스의 책인 스탈린 강철권력은 분명 스탈린에 대해 많이 연구한 결과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굉장히 서구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재작년에 읽은 올레크 홀레브뉴크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책에 비하면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체로 서방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 많이 느껴졌다. 즉 올레크가 쓴 평전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기본적으로 편향된 서구적인 시각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본다.

 

필자는 스탈린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주의자로서 그가 이룬 업적과 그가 저지른 과오를 균형있게 볼 뿐이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재자적인 부분이 있고, 대숙청으로 혁명동지들을 숙청한 폭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적소유를 철폐함으로써 역사적 전진을 이룩하고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을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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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3-0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쓴 다른 스탈린 평전도 있던데, 이 책과 같은 책인가요? 다른 책인가요?

NamGiKim 2021-03-06 01:09   좋아요 0 | URL
같은 책이에요. 솔직이 이 책은 너무 극우적이라 생각합니다. 올레크 흘레브뉵은 이것보다도 못하고요. 흘레브뉵 책은 노경덕 교수가 쓴 글만 훌륭합니다.

Redman 2021-03-06 02:12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전역한 김남기가 아닌 복학생 김남기입니다.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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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3-08 0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남기님 복학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19-03-08 16: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3.1운동 100주년 특집: 3.1운동의 주역 몽양 여운형>

2019년 3월 1일인 오늘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3.1운동은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무단통치라는 무자비한 통치에 대한 반감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기대에 부흥하여 조선민중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전개한 비폭력 혁명이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혁명은 진압되었지만, 그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대다수의 조선민중이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비폭력 민중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에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잊혀진 주연이다. 1886년 경기도 양평의 소론 집안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었던 인물이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을 하게 된 여운형은 현재 터기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결성한 터키 청년당에 감명을 받아 1918년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그는 당시 상하이에 와있던 윌슨의 측근인 찰스 크레인에게 청원서를 보냈고, 1919년 파리에서 있을 강화회의에 독립운동가인 우사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 독립을 청원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국내외 지역에서 활동하며 해당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했다. 그 결과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공표된 것이었다. 이처럼 몽양 여운형은 3.1운동의 불씨를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이는 1919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3.1운동에 있어서의 그의 공로를 크게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던 인물인 몽양 여운형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는 해방 후 그가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을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대한민국에 반공주의라는 광기를 퍼뜨린 모종의 세력들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잊혀져 왔다. 이제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몽양 여운형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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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정상회담 단상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모든 게 이루어질거라는 나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그들이 엄청빨리 관계 회복에 나설거라는 생각은 지나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의 제제가 앞으로 펼쳐질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도널드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과 밀당이 뛰어난 장사치다. 즉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신이 북한에게 무조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지기반을 닦으려는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그가 여러번 말했듯이 언제든지 대화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그렇다. 트럼프는 언제든지 북한과의 대화를 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따라서 제작년 처럼 화염과 분노와 같은일은 매우 낮다고 본다. 이번 회담이 기대와는 다른 결과라 해서 겁먹을건 없다. 아직 기회는 있고, 현 정부또한 북한과의 접촉을 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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