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애니 제이콥슨 지음, 이동훈 옮김 / 인벤션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 영화 마블(Marvel)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악역 하이드라(Hydra)’를 대충 알 것이다. 영화 주인공인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가 처음으로 맞서 싸운 대상이 바로 이 나치 소속인 하이드라였고, 이 하이드라는 다음 시리즈에서도 캡틴 아메리카의 적으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이 하이드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였던 이들은 70년 뒤인 미국의 여러 정치 및 군사 그리고 연구기관에 침투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지난 2023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제작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의 마지막 시리즈인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Indiana Jones and the Dial of Destiny)’를 보면, 여기서 인디아나 존스의 적으로 등장한 악역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나치 과학자 위르겐 폴러(Jürgen Voller). 영화 설정을 보면, 위르겐 폴러는 1969년 아폴로호 착륙에 크게 기여한 미국의 과학자로 등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나 세계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적 설정이 바로 달 착륙에 기여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10대 시절부터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에 기여한 과학자가 베르너 폰 브라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 과학자 출신인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마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소방서(사회복무요원)에서 근무 도중 유튜브(Youtube)를 통해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 바로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다큐멘터리에선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에 협력했지만, 그리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따라서 아주 적극적인 나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매체들을 통해 알 수 있거나 유추해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바로 적잖은 나치 협력자들이 미국에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311월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는 도중 제목부터 아주 재밌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책이 바로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Operation Paperclip)이었다. 책을 보자마자 나는 도서관에서 읽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챕터 2장까지 읽었다.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아 상당히 지적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학업이라는 본업과 사회운동 그리고 여러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완독을 하는 데는 좀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읽으면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일부러 SNS 및 컴퓨터에 메모하며 완독했으니 만족한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책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이른바 나치 과학자들을 어떻게 이주시켰는지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어떻게 미국의 군사 및 과학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이들 중 대다수가 과거 히틀러와 나치에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중 대다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에도 크게 기여하기까지 했다. , 전범으로서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를 한 이들이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정착했고, 미국인이 되었으며 이후 후세대들에게 훌륭한 과학자로 기억 속에 남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 착륙에 기여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에 대해 얘기해보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너 폰 브라운은 분명히 나치 소속의 과학자였다. 폰 브라운은 나치 소속의 과학자로서 미사일 개발에 많은 기여를 했고, 실제로 나치의 최신 미사일을 개발했다. 19449월 나치는 영국 런던에 이른바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는데, 당시 사용된 무기가 바로 V-2 로켓 미사일이었다. 그것을 제작한 인물이 바로 폰 브라운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미사일을 만든 공장은 독일 노르트하우젠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 부대가 이 노르트하우젠에 입성하여 나치 독일의 무기 공장을 탐색했다. 그 결과 V-2 로켓미사일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수천 명의 노예노동자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있는 수백 구의 노예노동자 시신도 현장에 있었다.

 

, 폰 브라운은 노예노동자 수천 명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적잖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이 있었다. 당시 베르너 폰 브라운은 나치 친위대 돌격대 지도자였다. 군 계급으로 치자면 대략 소령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전쟁 말기 나치 독일은 V-2 미사일은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 점령 지역에 발사했는데, 이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대략 7,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숫자의 노예 노동자들이 폰 브라운이 실질적 책임자로 있던 군수공장에서 죽어나갔다. 그리고 폰 브라운에겐 이 노예노동자들이 반항하면 총살할 권한까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내용이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 앞에서 폰 브라운이 보인 행동도 정말 놀라웠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겠다.

 

공포의 V-2를 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미군에 체포되었다는 것은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될 엄청난 소식이었다. 그들은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으며 모두 미소 지었다. 폰 브라운은 V-2개발과 관련하여 으스댔다. 자신이야말로 V-2 발명가이자 독일 과학자들의 리더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미육군 제44사단 방첩대의 일부 인원들은 폰 브라운의 자만심을 눈치 챘다. 한 방첩대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미군 장병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사진 속에서 폰 브라운은 미소를 짓고 미군들과 악수를 하며, 호기심이 많은 표정으로 미군들의 훈장을 가리켜댔죠. 전쟁포로라기 보다는 유명인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병사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치 군부대 시찰 나온 국회의원마냥 상냥했습니다."”

 

애니 제이콥슨, 이동훈 옮김,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인벤션, 2016, 117~118.

 

책에서 폰 브라운 외에 주목한 나치 신봉자는 대략 21명이다. 그 중 폰 브라운을 포함하여 오토 암브로스, 테오도르 벤칭거, 쿠르트 블로메, 발터 도른베른거, 지크프리트 크네마이어, 발터 쉬버, 발터 슈라이버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등과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독일의 권력 체계에서 과학자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인물들이었다. 21명 중 15명은 나치의 헌신적인 당원이었고, 또 그중 10명은 나치당 산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와 친위대(SS) 대원이었다. 이들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게시한 이른바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다.

 

이 페이퍼클립 작전의 목적은 나치 과학자와 기밀 군사계약을 맺고 그들을 미국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던 19455월부터 미국 정부를 위해 연구를 재개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대략 1,600명이나 되는 나치 협력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됐다. 놀랍게도 이들 중에는 베르너 폰 브라운과 같이 미국인들에게 영웅으로 기억에 남은 이들도 상당히 많다. 물론 전쟁 이후 냉전 초기 이들에 대한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이 기밀 처리되었고, 냉전을 거치며 포장작업을 거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을 데리고 오자 미국 내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당시 미국이 보인 태도는 이들에 대한 비호였다. 아래 책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어느 익명의 정보원은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1,000명 이상의 독일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그들 모두 자발적으로 미국과 계약했으며 이들의 적응기간은 보통 6개월이고, 그 후 시민권을 신청하고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 <뉴스위크> 역시 이 기밀군사 프로그램의 이름이 페이퍼클립 작전임을 폭로했다. 육군부는 이 기사를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중들에게 기밀을 제외하고 프로그램 전체를 알리기로 했다. 즉 라이트 항공기지의 과학자 중 몇 명을 선발해 언론 및 라디오방송, 사진을 통해 알리고자 했다. 기지 개방 행사도 기획되었다. 물론 상세한 정보의 개방 수위와 사진촬영의 정도는 육군의 검열을 받았다. 행사의 목적은 미국에 들어와 있는 독일 과학자들이 결코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애니 제이콥슨, 이동훈 옮김,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인벤션, 2016, 336~337.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이른바 나치 전범들을 재판정에 세웠다. 나치 지도급 인사들은 사형 혹은 무기 징역을 받았지만, 전쟁범죄를 실질적으로 자행했던 이들 중 일부는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미국인이 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나치 행적은 침묵되거나, 서류상 기밀 처리됐다. 미국은 이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를 원했고, 특히나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행적을 묻지 않으려 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이들이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지하 벙커를 설계한 기술은 페이퍼 클립을 통해 온 설계관여자에 의해 냉전시기 미국의 핵 대피소 기술로 사용됐다. 나치의 의학 기술이나 과학 기술이 미국의 의학 및 과학 기술에 크게 관여했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에 온 나치 협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더글라스 맥아더가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주고, 731 부대가 확보한 연구 결과가 미국으로 갔던 것을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치의 기술이 이런 식으로 미국에 가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에 정착하게 된 나치 과학자들은 미국의 독극물 개발에도 기여했다. 미국은 냉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대표적으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가 그 예시였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와 파트리스 루뭄바를 암살하기 위해 독극물을 사용했는데(이러한 미국의 암살시도는 실패했다.), 그 독극물 종류가 나치 과학자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맹독성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의 경우 나치에 협력한 과학자가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총 4,315만 리터 이상의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국토의 전체 면적 24%에 뿌려졌다. 고지대와 삼림 500만 에이커, 경작지 50만 에이커가 초토화되었다. 이는 매사추세츠 주 만한 면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나치 과학자 출신 인물들은 미국 과학기술 및 군사기술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영역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이 나치에 협력한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년 전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를 외쳤고, 이러한 러시아의 주장은 푸틴의 선전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역사를 들어다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했었고, 이 과정에서 스테판 반데라나 로만 슈케비치, 디미트리 돈초프,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인 학살 및 인종청소로 악명높은 나치들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소련에 맞선다는 이유로 이 나치세력을 반소-반공투쟁에 이용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기존의 소련사회에서 억눌려있던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왔는데, 이들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번창했다. 이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유로마이단을 전후해서였다.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로마이단을 획책했고, 돈바스 내전에서 강력한 군대로 탄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인 마리우폴 포위전 당시 우크라이나군의 주력부대였던 아조프 대대(Azov Battalion)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돈바스 내전 당시 미국과 NATO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군의 주력부대가 된 군대였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 나치과학자들을 데리고 온 역사와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지원이 상당히 오버랩 됐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파시즘을 물리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치독일 패망과 일제 패망에 있어 미국의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련과의 냉전을 시작하면서 미국은 페이퍼클립 대상자와 같은 파시스트 지지자 및 협력자들과 결탁했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라는 명분 아래 합리화됐다. 당시 미국이 소련에 맞서기 위해 그랬다면, 현재는 러시아를 상대로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 제이콥슨의 책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은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책이다. 간만에 지적 희열을 최고조로 느낄 수 있고,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는 책 한권을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은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문제에 대해 보이는 태도라는 측면에서도 상당히 깊은 교훈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맨 마지막 장에는 질문과 토론주제목록이 있다. 이를 공유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1. 이 책에서 애니 제이콥슨은 전후에 미국 정부가 히틀러의 과학자들을 밀입시키려 했던 노력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책을 읽기 전에 페이퍼클립 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는가? 이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가? - P.714

2. 연합국 정보요원들이 전후 나치 과학자들의 처분에 있어 맞닥뜨린 가장 주된 질문 중 하나는 누구를 고용하고 누구를 처형할지였다. 당신은 이 질문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 P.714

3. 전후의 미국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정말 나치 과학자들이 필요했는가? 오히려 나치 과학자들의 고용이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았는가? - P.714

4. 페이퍼클립 작전은 대중에게 선한 얼굴을 띠고 있었지만, 과학자들의 전시 행적에 대해 진실은 기밀로 처리되었다.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는가? 미국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공개해야만 했는가? - P.715

5. 이 책을 읽고 미국 정부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달라졌는가? 과거의 정부기밀 프로그램 공개가, 오늘날 어떤 정부 기밀 프로그램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 P.715

6. 페이퍼클립 작전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 P.715

7. 1951년, 독일 주재 미국 고등판무관 존 J. 맥틀로이는 유죄를 선고받은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사면하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풀어주었다. 당신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가? - P.715

8. 책에서 저자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는 독일속당 "누구나 과오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를 독자들에게 몇 번 환기시킨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 말은 옳은가? - P.715

9. NASA는 논란이 되는 베르너 폰 브라운, 쿠르트 데부스, 아르투르 루돌프의 전시 행적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들의 전기를 수정해야만 했는가? - P.715

10. 개인적인 신념과 직업상 의무의 충돌로 인해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적이 있는가? 책에 나오는 어느 순간이 당신이 처했던 상황과 유사한가? - P.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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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은 나치독일 부역자들과 결탁해서 그들을 ‘세탁‘한 다음 ‘자유를 위해 싸우는 반공주의 투사‘로 둔갑시켰고,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실무에 밝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그대로 등용해서 ‘친미파‘로 변신시킨 후 이들을 ‘공산당 때려잡는 열렬한 반공투사‘로 만들었죠. 미국은 나치 독일 부역자들과 한국의 내로라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엄벌하기는 커녕 이들을 ‘실무에 밝다‘는 이유로 그들과 결탁하여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극대화‘라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 만화작가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를 정말 재밌게 읽었었다. 당시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드 편을 재밌게 읽었었는데, 당시 책에 등장한 동독의 이미지는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동독은 항상 서독에 비해 무언가 부족한 나라였다. 베를린 장벽을 넘어 자유를 찾아 나서는 동독인들의 모습과 소비재 부족으로 인해 서독 관광객으로부터 생필품을 갈취하는 동독 경찰의 모습이 만화에서 묘사됐다. 그리고 동독이라는 나라는 자유가 억압당하며, 공산당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뭐 그런 나라로만 보였다. 이것이 단순히 이원복이 쓴 만화책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8년 독일에서 개봉한 영화 ‘벌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동독 체제에 불만을 가진 가족이 서독으로 도망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통일하면 독일식 흡수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동독에 대해 이런 식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동독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시각이다. 동독이 세운 업적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 문제를 보면 그렇다. 동독사 연구자인 카트야 호이어에 따르면, 서독은 나치 출신을 공직계·교육계·문화계, 심지어 경찰 조직에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독일민주공화국은 반파시즘을 기본 신조로 유지했다. 소련 군정 하에서의 동부 독일과 동독 정부는 미군정 하에서의 서부 독일과 서독 정부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탈나치화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경제에 타격이 있어도 그 과정을 거쳤는데, 공학자와 경찰이 사라진 자리는 미숙하더라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덜한 사람들로 채웠다.


독일의 경제 또한 그렇다. 물론 동독이 서독 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못사는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1990년 기준 당시 서독과 동독의 1인당 GDP를 비교해보면 그렇다. 당시 서독의 1인당 GDP는 15,300 달러였고, 동독은 9,679 달러였다. 당시 소련이 대략 9,100~9,200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동독의 경제력은 결코 낙후되지 않았었다. 물론 이원복 또한 동독이 전후재건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비교적 잘 살았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문제는 ‘사회주의=가난’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데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하면 무조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은 동독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굶주렸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동독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독재자’ 혹은 ‘권력가’라는 단어로만 해석한다. 소위 한국에서 민주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 또한, 현실 사회주의권 지도자나 제3세계 지도자를 보면 항상 그 수식어로만 보는 경향이 크며, “이승만이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처럼 독재한 사람일 뿐이다.”는 매우 지엽적인 편견에 빠져있다. 구사회주의권 지도자들이 이른바 ‘서기장’이나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을 들어 그저 장기집권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독재자라고 단순무식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4년이나 5년에 한번 씩 대통령을 선출해야만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빠져있기도 하다.


물론 1당 독재도 엄밀히 말해서 독재는 맞다. 그러나 그 독재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전혀 보지 않는 것이다. 정말 이 체제가 무슨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을 대량 학살한 체제인지 박정희 정권처럼 치마 길이까지 검열하는 체제였는지, 경찰의 공권력이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던 시절 대한민국 만큼이었는지를 진지하게 분석조차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리비아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에 대해 독재자 혹은 망나니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카다피의 정치통치 방식인 자마히리야의 적용을 보면, 소위 서구가 주장하는 민주화(라고 쓰고 색깔혁명 혹은 폭동이라 읽는다.) 이후보다 선거제도와 지방자치제도가 자리 잡혔었다. 자미히리야(인민의회)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과 소수민족이었던 만큼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의 이승만 독재나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 이렇게 존재한다. 이런 리비아가 “과연 박정희나 전두환 보다 비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폭압적인 독재통치라고 말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이들은 한국 사회에선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도 이러한 접근이 과거에 존재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게도 필요하다. 즉, 단순히 지도자가 1당독재를 했다고 해서 1인체제를 유지했다고 해서, 소위 미국이라는 세력의 우산 아래 있던 친미 성향의 자본주의적 독재자와 같은 선상에서만 놓고 보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동독의 경우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하면, 억압·자유의 부재·검열·통제·생필품 결핍 등 절대 긍정적일 수 없는 요소들만 생각하지만, 동독의 사회를 들어다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서 리비아의 사례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그것과 단순히 비교해서 “독재 통치일 뿐이다.”는 식의 관점도 어찌 보면 단순도식화다.


따라서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분석도 단순히 독재자라는 식의 관점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본다. 호네커 시절 동독 사회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호네커 시절 동독은 나름 청소년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서방의 의류 등을 수입했고, 음악에 대해서도 풀어주며 서독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서독 문화가 크게 금지됐던 것고 아니고, 정부의 일부 정책에 반하는 행동이 전면적으로 금지가 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삼는 행위는 금지가 됐는데,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국가들도 같은 선상에서 막는 부분이다. 참고로 에리히 호네커의 전임자인 발터 울브리히트의 경우도 서구의 시각에선 동독의 독재자로 규정받는데, 울브리히트는 1971년 수상직에서 사임했다. 이것이 무슨 이승만처럼 4.19 혁명과 같은 일로 사임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다. 


호네커 시절의 동독은 여성인권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는 동독의 여성 취업자 수치를 보면 명확하다. 동독의 여성 취업자 수는 1989년 기준 130여만 명으로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나 비생산 영역에선 여성 취업률이 1950년대 50% 수준, 1960년대 60% 수준, 그리고 1970년대 이후 70% 수준을 넘어가면서 남녀 동등한 비율의 취업률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고용률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독 사회의 여성 고용률을 살펴보면, 괄목할만한 변화를 알 수 있다. 동독이 탄생했던 1949년 전체 취업인구 731만 3,000명 중 여성이 298만 9,000명으로 40.9%를 차지했으며, 취업인구에서 차지하는 남녀 비율은 60:40이었다. 이러한 비율은 1970년대 말에 들어 여성 비율이 50%를 넘기면서 남녀 간 완전한 고용평등을 달성했다. 비록 1980대를 거치며 하락하여 1989년에는 40% 수준에 머물렀지만, 여성 고용률 50% 달성은 비생산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1949년 비생산 영역 취업활동 인구 90여만 명 중 여성이 54만 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1949년부터 1989년까지 비생산 영역 취업인구는 180여만 명으로 두 배 정도 증가했다. 즉, 이런 나라가 어떻게 해서 박정희 시절 훅은 전두환 시절의 독재정권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가 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이 든다.


즉, 이와 같은 변화가 에리히 호네커 시절 동독에서 있었다. 노동 시간에서도 선진적이었다. 이해영이 집필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에 따르면, 동독에서는 근로자의 약 75%는 1주에 43.75시간을 근무했고, 16세 미만의 청소년과 임산부의 경우, 야간작업이 금지되었으며 6세 미만의 자녀를 가진 여성과 돌보아야 할 식구를 거느린 근로자는 야간작업을 거부할 수 있었다.시간 외 근무는 예외적인 경우, 노동자위원회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며, 연간 20~26일의 휴가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노동의 권리(Recht auf Arbeit)는 인간 기본권으로써 헌법으로 보장받았다. 그러니까, 근로기준법 조차도 없었고, 노동자를 굴리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민주화 된 이후에도 주 120시간 노동을 지껄이는 윤석열이 집권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무작정 독재자 프레임을 씌우는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전혀 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네커는 단순히 군사독재에 복무한 사람이거나, 과거 나치에 협력하며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에리히 호네커는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가였고 투사였다. 1920년대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30년대 국제레닌대학교에서 유학하며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을 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1935년 투옥되어 1945년 소련군에 의해 독일이 해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 쉽게 말해,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저항한 열렬한 혁명가였던 것이다. 도데체 어떻게 해서 호네커라는 인물이 이승만이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과 같은 이들과 동일선상의 독재자 프레임으로 엮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지금까지 “에리히 호네커를 단순히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라 독재자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독재를 생각하며 같은 선상에 일단 놓고 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그렇게 했을 시 생기는 오류가 분명히 있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이런 관점이 진지하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이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 따라 억압의 강도가 강할 수 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니 자본주의 국가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사회주의 국가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리히 호네커를 단순히 ‘동독의 독재자’ 프레임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에리히 호네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선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에 다뤄볼 예정이다.


참고문헌


이해영,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푸른숲, 2000.

정재훈·박수지, 『동독 사회보장제도: 역사와 변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7.

카트야 호이어,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Honecker Erich, From My Life, Pergamon Press, 1981.

Murphy Austin, The Triumph of Evil: The Reality of the U.S. Cold War Victory,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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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낡아빠진 ‘반공주의‘ 사상이 낳은 산물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우리 머릿속에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다‘, ‘억압적 통치가 이루어진다‘라는 의식이 너무 뿌리깊게 (반공주의에 찌든 나머지) 박혀있지만, 사회주의 국가 중에도 동독과 같이 잘 사는 국가도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 중에 가난한 나라들(과테말라, 필리핀...)도 꽤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에게 한 것 보다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맥아더 사령부가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대공 방어막이 전혀 없던 이곳엔 지옥이 펼쳐졌다. 그날 미군 B-29 폭격기 70대를 포함한 100대 이상의 항공기가 8만 5,000발의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총 3,017호에 달하는 신의주 공공건물 중 2,100호가 파괴됐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16개의 초등학교와 14개의 중등학교, 15개의 교회와 2개의 병원도 이날 폭격으로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당일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즉,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80%는 여성과 아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했던 참극의 역사였다. 놀랍게도 당시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전쟁 내내 지속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영토는 개전 초기의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러나 1951년부터 전쟁이 다시 38선 인근에서의 전투로 전개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북한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로 미군의 폭격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면서 내세웠던 기준에 따라 보자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700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실제로 미 합동참모본부는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핵 공습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영토 위로 감시 비행 활동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방위에 관한 상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남한의 공군과도 공유했다. 1958년 1월 말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재래식 포 자산으로 방비가 삼엄한 미군 기지를 포격하는 것 말고는 잠재적 핵 공격에 대응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반도의 힘의 균형은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미군 첩보기가 북한 영공을 비행했으며,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 10대 이상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석방된 인질들을 데려왔다. 당시 미국의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행위를 집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1958년부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반공 정부의 프로파간다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과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북한에서 나온 남조선혁명론과 1968년 김신조 사건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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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실을 부정하는 분단Yuji세력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정치검찰파쑈독재정권은 허구한 날 ˝선제타격!˝만 외쳐대고 허상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여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있죠...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사망했다. 올해 2024년은 레닌 서거 100주년이다. 20세기 레닌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이후 등장한 수많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레닌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이론가로서 존경받았다. 레닌이 죽고 난 다음 소련 공산당에서 최종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었다.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당내투쟁이 있었다. 트로츠키(Trotsky), 부하린(Bukharin), 지노비예프(Zinoviev) 그리고 스탈린이 경쟁했는데, 스탈린이 승리했다.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트로츠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난할 때 사용하는 소재 하나가 있다. 바로 ‘레닌의 유언’이다. 즉,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거나,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들도 잘만 인용 및 이요하며 스탈린을 헐뜯기 바쁘다. 이 부분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연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레닌의 유언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사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해 안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898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 러시아 대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3년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이후 당 내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파가 분리됐다. 당시 레닌이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다수파를 의미하는 볼셰비키라 불렀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소수파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라 부르게 됐다.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을 비방하고 헐뜯는 멘셰비키파에 있었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로 노선을 바꾼 것도 1917년 러시아로 귀국한 다음이었다.


트로츠키가 1917년 10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한 공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가 스탈린에게 전혀 없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스탈린 또한 적백내전에서 소련의 붉은군대를 지휘했다. 특히나 1919년 5월에는 유데니치가 지휘하는 백군에 맞서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한 전권을 볼셰비키로부터 물려받았다. 또한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그는 붉은군대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3년 동안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레닌 다음의 2인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2년 4월 23일 레닌의 추천에 의해 총서기장에 임명됐고, 당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직국 위원이자 볼셰비키 공산당의 총서기장이었던 인물은 스탈린이 유일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고 자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레닌의 건강상태를 알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1년 뒤인 1918년 8월 러시아 사회혁명당원인 핀야 카플란의 암살 시도 때문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1922년 4월 23일 총탄들의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1달 뒤 그의 오른쪽 손과 발이 마비됐다. 1922년 12월 16일 레닌은 두 번의 위험한 발작을 겪었고 12월 23일에 또 한 번의 발작이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은 새로운 발작 때문에 신체 절반이 마비되었고, 언어 능력도 앗아갔다. 그렇게 해서 레닌은 더 이상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24년 1월 21일 사망했다. 따라서 레닌은 1922년부터 생과 사를 오갔으며, 유언을 작성했다. 그 유언으로 알려진 문서가 있는데, 이 유언이 작성된 문서의 시점을 볼 필요가 있다.


소위 ‘레닌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문서는 1922년 12월 23일과 31일 사이에 구술됐다. 1923년 1월 4일에 한층 보충되었으며, 이는 그가 발작을 겪어 건강상태가 안 좋던 시기였다. 특히나 공산주의의 적들이 ‘레닌의 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1922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의 기간 동안 구술된 것이다.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선별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 전화로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를 힐책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화 통화가 크룹스카야로 하여금 카메네프에게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불평하는 글을 쓰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 내지는 작가들은 레닌의 유언에 집중했다. 여기서 서구 학자들은 레닌이 유언에서 트로츠키를 위해 스탈린의 제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벨기에 왕립군사학교의 명예 교수인 앙리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정상적으로는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했어야 했다.... (레닌은)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 레닌은 스탈린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출처는 어디일까? 바로 트로츠키 자신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탈린이 당에 숨긴 레닌의 유언과 관련해 분개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23일과 1923년 1월 5일 사이에 레닌이 구술한 서신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나는 중앙위원회의 신망을 두텁게 하기 위해, 우리의 행정 기구를 충분히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중앙위원회 분파 간의 갈등이 당의 미래에 과도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당이 노동계급 출신에서 50명에서 100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요구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분열을 막는 방책’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회의 그러한 위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진술한 전문을 보면,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태도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레닌은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1923년 3월 5일 새로운 서신을 구술했다.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귀하는 전화상으로 나의 아내를 호출하여 질책하는 무례함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저질러진 일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아내가 당한 것이 또한 내가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귀하가 말한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는 지, 혹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귀하가 신중하게 숙고하기를 요청합니다. (레닌)”


레닌은 이러한 구술 서신을 남겼지만, 역사학자 이안 그레이에 따르면 크룹스카야는 비서에게 그 서신을 스탈린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에게 전달이 안됐던 것이다. 거기다 레닌이 진술한 유언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비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10월 혁명(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 동안에 했던 실수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반면에 스탈린에 대해선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무례함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실수들을 했다는 것에 대한 단 한마디도 없었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말년에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앞서 언급한 벨기에 제국주의자 앙리 베르나르는 이와 같은 트로츠키의 억지주장을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추가하며 책에 서술했다.


“나는 이와 같은 사건의 경과를 어느정도 상상해본다. 레닌은 1923년 2월 말에 독약을 요구했고, 겨울이 다가오자 레닌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햇으며 그의 언어 기능은 돌아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권력의 다음 차례였다. 그의 목적이 가까워졌으나, 레닌으로부터의 나오는 위험은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때에 스탈린은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겨야 되는 결심을 해야 했다. 레닌이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레닌에게 독약을 주었는지, 아니면 스탈린이 보다 직접적인 수단에 의존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애초에 1923년 3월 6일부터 레닌이 죽을 때까지,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그의 누이 그리고 그의 비서들은 그의 침대 곁에 있었다. 즉, 레닌은 그들 몰래 독약을 먹을 수 없었으며, 스탈린이 암살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이를 받아 적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따라서 무슨 레닌이 자신의 후계자를 트로츠키로 임명했다거나, 레닌이 그의 유언을 통해 스탈린을 공격하는 등 반스탈린 투쟁을 했다는 주장이나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사하로프라는 러시아 학자가 잘 반박했으며, 이는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유명한 스티븐 코트킨 또한 높게 평가하는 자료다. 스탈린에 대한 얘기 중 하나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엉터리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빌 블랜드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세계의 지도적 맑스주의자로서 레닌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서기장의 자리로부터 스탈린의 제거에 대한 그의 유언에서의 요구는 소련 공산당 제13차 대회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그 문서가 쟁점이 된 환경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이 당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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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은 친일 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설립된 이래로 한반도 이남에선 역으로 친일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특히나 하지가 이끌던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가 친일경찰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친일파 청산을 향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이던 윌리엄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됐다.

 

194885일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었는데, 정부 수립 공포 다음날인 8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안이 상정되었고, 91일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이른바 반민법은 친일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가 살포됐다. , 여기서부터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반공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 속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족됐다. 위원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이, 특별재판부는 독립운동을 변호했던 김병로, 특별검찰부에는 권승렬이 임명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으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한 노덕술과 하판락 등도 체포됐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이와 같은 반민특위 활동에 분노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끼던 수도경찰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고문왕으로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항일운동,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그는 장택상의 눈에 띄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했으며,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노덕술은 본인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할 것 같자,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국회 내 반민법 관련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노덕술의 암살 리스트에는 극우인사인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이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백민태라는 인물이 검찰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간부들을 불러 항의했으며, 2월에는 반민특위 내의 특별경찰대(특경대) 폐지를 요구하는 강경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이승만이 펼친 논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 와해는 1949517일 노일환과 함께 소장파 리더 격이었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이 구속되면서 일어난 연쇄사건 속에서 발생했다. 이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 당국의 방조를 받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531일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세 의원 석방동의안에 가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은 88명의 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반민특위 그 자체였다. , 여기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한 이다.


 

이들은 63일 반민특위로 쳐들아가서,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민특위 측은 이들을 체포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잇단 시위의 배후에 친일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있음을 파악한 다음 최운하를 포함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66일 중부경찰서장이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고 직원들을 연행해 고문했다. 당시 이 습격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장경근 또한 일제시기 친일을 한 사람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다음 날인 67일 대통령 이승만은 한 발 더 나아가 AP통신 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자신이 특경대 해산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국회가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831일로 단축하면서 종결됐다. 특히나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안두희의 김구 암살을 겪으며 친일파 청산은 정말 물거품이 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검거활동을 시작했는데,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이었다. 이 중에 체포가 305, 미체포 193, 자수 61, 영장취소 30,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 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그 결과 남한에서 처벌한 친일파의 숫자는 말 그대로 0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기술, 학계 및 여러 분야에서 암약할 수 있었고, 부를 더 축적하여 재벌 및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최소 90% 이상이 일제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미국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과 그의 정권은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닌 남한 사람 거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에게 평판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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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이승만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응징한 전명운, 장인환을 변호하는 것을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