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광주의 대학살자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광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광주에서 수백 수천 명을 학살하고,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박정희가 했듯이 잡아다 고문하고 반병신 만들고 죽인 그가 그리고 수만 명을 삼청 교육대로 보내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그가 오늘 죽었습니다. 그는 끝끝내 반성하지 않았고, 마르지 않는 29만 원으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원해준 세력은 누구인가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을 승인했고, 그 결과 광주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주 학살은 사실상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5.18에 미국이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포트를 지원했고, 니카라과의 대학살 세력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으며, 대한민국 신군부를 지원했습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전두환이 죽은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의적절하게 제가 쓴 책의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인용합니다.

카터 정권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에선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여기서 카터 정권이 방관한 대한민국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겠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에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유신 독재 그리고 1979년 12.12 쿠데타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존재했다. 1979년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살해된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군부가 이른바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이러자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는 전라도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16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이른바 폭도 내지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전두환이 보낸 군대의 잔혹함이 극에 달하자, 광주시민들은 총을 들고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1871년 당시 파리코뮌에서 압제자에 맞서 봉기했던 파리의 시민들처럼 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대규모의 군대와 탱크까지 동원하면서 아주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소 수백 명이(많게는 수천 명)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여기서 미국의 카터 정부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시민군을 진압하기를 원했으며, 신군부 세력의 진압 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 P216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런 시각은 2005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잘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나온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았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광주 미문화원으로부터 군인들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네요.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저도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진압이 무자비하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사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군대 투입에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만약 한국 국민이 전국적으로 군부를 반대하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군부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이 사태를 진정시킬 겁니다.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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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는 무엇일까아마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대표되는 고엽제 살포일 것이다. 100~150만 명 이상의 군인과 200~3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주체는 바로 남베트남의 민간인일 것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공격받자, 3월부터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하여 이른바 북폭에 나섰다군사적 교리상 전략폭격이었지만현실은 무차별 융단 폭격이었다따라서 북베트남 전역이 미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그에 따른 인명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최소 수십만 이상이 이 폭격으로 죽거나 부상자가 됐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고 있는 미군 항공기)

 

남베트남은 북폭 이전부터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됐다그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허가한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그 작전이 바로 랜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이다랜치 핸드 작전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10년간 베트남 주둔 미군이 진행한 군사작전이다이들의 목표는 베트콩이 숨어있는 정글을 없애는 동시에베트콩의 군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남베트남 농촌 일대에 고엽제를 투하하는 것이었다제초제를 담은 55갈론 드럼통을 두른 띠 색깔에 따라 에이전트 블루에이전트 화이트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로 불렸고특히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농촌과 마을 그리고 밀림에 투하됐다특히나 이 고엽제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에이전트 오렌지였으며이 에이전트 오렌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이라는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UH-1 헬기)

 

다이옥신은 치사량이 0.15g인 청산가리의 1만배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진 맹독 물질로다이옥신 1g이면 2만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다또 이 물질은 잘 분해되지도 않고용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극히 적은 양이 흡수됐다고 해도 점차 몸속에 축적돼 각종 후유증을 일으키게 되며그 영향은 후세대에게 까지 이어진다폐암후두암전립선암 등 각종 암은 물론말초신경병버거씨병당뇨병 등 각종 질환을 불러일으키며이러한 고통은 노출된 인간에게는 평생의 고통을 주게 된다따라서 인체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 바로 고엽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고엽제를 뿌렸지만비극적이게도 고엽제에 노출된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은 미군의 고엽제 살포를 환영했다왜냐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은 1960년대 초부터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에 파괴적인 네이팜 폭탄이 투하됐고이러한 폭격을 남베트남의 농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965년 미군이 대규모 지상부대를 파병하면서폭격의 빈도도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일단 고엽제를 뿌리면 나무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적어도 이틀 동안은 미군이 폭격을 중지했다따라서 남베트남의 민간인이 고엽제 살포를 환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고엽제가 살포된 남베트남 지역)

 

당연히 이러한 독성물질을 살포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다그러나 1954년부터 제네바 협정과 같은 국제적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던 미국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제정된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는 것 또한 손쉬운 일이었다에이전트 오렌지는 대략 10년 동안 총 7,200만 리터가 살포됐다이는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투하한 셈이라 할 수 있다이 고엽제는 남베트남 전역의 농촌과 밀림 그리고 베트콩의 보급 역할을 하던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와 라오스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집중적으로 투하됐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고엽제 살포로 사망한 남베트남인은 최소 40만 명 이상을 넘는다기형아 사망자를 포함한 각종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일일이 따지면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1995년 기준으로 최소 20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피해자의 숫자가 350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으며많게는 400만에서 48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의 피해자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고엽제로 인해 말라버린 남베트남의 밀림)

 

미군의 고엽제 살포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던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의 경우 현지 소수민족들이 이러한 피해를 아주 극심하게 본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미군편에서 싸웠던 소수민족들 남성들과 그들의 부족과 마을 주민들은 고엽제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렸다태어나는 아이들 중에 절반 이상이 기형으로 태어났으며어떤 아이는 등이 굽은 채 태어나서 걸음걸이를 하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당연하게도 이것은 남베트남에서 살던 베트남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고엽제 피해 1세대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많은 사산을 경험하였고다이옥신 농도가 높을 때는 아예 아이가 생겨나지를 않았다시간이 지나 체내에서 농도가 조금 낮아졌을 때 아이를 낳지만 거의 기형아가 태어났으며, 2009년 기준으로 베트남 정부 통계에 의하면 1년에 5만 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을 둔 부모에게서 태어난 기형아)

 

이러한 피해는 단순히 남베트남의 민간인과 베트콩 그리고 북베트남군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 당시 고엽제를 살포했던 미군들과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의 군인들 또한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보았다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한국의 경우 참전한 병사 31만 명 중에 최소 2만 명 이상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겪게 됐다그 외에도 라오스에서 반공산주의 작전에 이용된 소수민족인 몽족 또한 이 고엽제 피해에 시달렸다한마디로 고엽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모든 이들에게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이러한 일을 생각해보았을 때과연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한 미국의 전쟁범죄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있을까?

 

참고자료

 

김성모고엽제란?"인류 역사상 최고 맹독 물질 중 하나"조선일보, 2011.05.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19/2011051901409.html

 

배보람다이옥신에 노출된 350만 명... '그런 전쟁'은 계속 되고 있다오마이뉴스, 2021.04.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742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송필경고엽제 태아 이야기경향신문, 2009.03.02. https://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14

 

주영재생태학살도 국제 범죄가 될 수 있을까?경향신문, 2016.11.30.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611301043001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어깨걸고, 2021

 

황성환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민플러스, 2018

 

위키피디아랜치 핸드 작전, ko.wikipedia.org/wiki/랜치_핸드_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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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생일에 맞춰 나온 베트남의 포스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지도자인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은 베트남 전쟁 당시 서구 좌파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호치민 서거 3일 뒤인 19699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에선 히피족(Hippie)’으로 대표되는 대학생들이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나와 그를 추모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한참이던 1968217일 독일의 서베를린에선 국제 베트남 회의가 열려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지원하며, ‘! ! 호치민!’을 외쳤다.

 

이처럼 호치민은 1960년대 서구 좌파들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좌파들에게 남아있다. 2019년 칠레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참일 때, 거리로 나온 칠레인들 중 일부는 호치민의 노래(Bài Ca Hồ Chí Minh)’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호치민은 단순히 베트남의 국부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좌파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까지도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현재 좌파의 영향력도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한 인물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사례는 아마 20세기에서는 호치민 말고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좌파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 응에안 성(Nghệ An)에서 태어났다. 2016년부터 하노이 일월대학 총장을 지냈던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호찌민-민족해방과 도이모이에서 그의 출생 년도가 미스터리하다고 밝혔으며, 1891년이나 1893년생일 수 있다고 했다. 후루타 교수에 따르면 그의 생일인 519일도 사실은 1941519일 즉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Viet Minh) 창설일을 생일로 표기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호치민의 출생일을 1890년으로 표기했으며, 베트남 측 자료가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관리였고, 아버지를 따라 당시 수도였던 후에(Hue)로 가서 공부했다. 17살이 되던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반프랑스 시위를 했다가 퇴학당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당시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로 대표되는 반프랑스 독립운동이 일어났었다. 호치민 또한 판보이쩌우의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그러던 1911년 사이공으로 가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했다.

 

19116월 만 21세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났으며, 30년간의 길고 긴 해외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다. 서방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1세대 연구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이러한 호치민의 행적이 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마오쩌둥과의 큰 차이점이라 주장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호치민은 그 해 7월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해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체험했고, 알제리, 튀니지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돌아다녔다. 젊은 시절 그는 미국에도 있었는데, 뉴욕과 보스턴에도 있었으며 보스턴의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도 정착했었고,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호치민은 프랑스사회당에 입당해 안남애국자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찾아가 8개 항목으로 구성된 안남인민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결사와 집회의 자유보장 등, 베트남인과 프랑스읜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의 청원은 프랑스 당국 인사들과 서구 열강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에서 3~4년간 머물렀는데, 2018년에 밝혀진 문서에 따르면 김규식 조소앙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19207월 프랑스사회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민족문제와 식민지 문제에 고나한 테제 원안이 게재됐다. 이 글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에게 감명받아 같은 해 12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호치민은 1960년 그가 쓴 나를 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에서 자신이 어떻게 레닌을 신뢰하게 됐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호치민은 이 글을 읽고 울고싶을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후루타 교수는 호치민이 레닌주의를 애국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은 명백하지만 레닌주의의 수용으로 호의 민족주의도 민족독립을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호치민은 레닌의 논문에서 민족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을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독립 전사가 됐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억압받던 식민지 민족과 혁명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다.

 

이후 호치민은 1922년 르 파리아(Le-paria)라는 언론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베트남 지배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 그리고 만화를 게재했다. 그러던 19236월 프랑스에서 도망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고, 코민테른 휘하의 기관인 극동국에서 근무하며 그해 12월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 있으며, 호치민은 혁명가로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이후 소련의 육군 원수가 되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등을 만났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전의 레닌은 만나지 못했고, 1924년 그의 장례식에 손수참가했다고 한다.

 

1920년 레닌의 논문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주의자의 삶을 살게 됐다. 소련에서 중국 광저우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향해 전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의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1930년 영국 식민지이던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이 당명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이 개정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후 1930년 베트남 국민당이 단행한 대규모 봉기에 가담했고, 특히 응에안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 An-Ha Tinh Soviet)를 이끌었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강령에 따라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됐다. 실제로 베트민 활동시기 호치민은 팍 보(Pác Bó)동굴에 있으면서,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로 시냇물을 레닌으로 이름을 지었다. 레닌주의자가 된 호치민은 이 레닌주의를 소위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반제국주의 투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4년 호치민이 쓴 레닌 추모글인 레닌과 식민지 민족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참고문헌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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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경 미 국무부는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고, 그를 배제한 어떠한 해결 방안을 통해서도 확실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며", 그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장악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이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하는 명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합의한 대로 전쟁 비용의 80%를 부담했고,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마련했다. - P309

디엠은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반대의견을 억압했는데, 그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막대한 달러로 간단하게 이런 일을 해치웠다. 그 돈은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오래전에 축출당할 뻔했던 한 남자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다. 디엠의 중요한 지지자들은 자유 베트남이 아닌 북아메리카에 있었다. - P310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총 사망자 수가 400만 명 이상에 달했고(각주 1), 국토와 사회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각주 1) 폴 퀸저지(Paul Quinn-Judge)는 1965년 이후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해도 3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보도했다.(Far Eastern Economic Review, Oct. 11, 1984.) - P313

평화 정착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킨 미국과 그 꼭두각시 정권은 수십만 명을 투옥하고 또 그만큼의 인명을 살해하면서 내적인 탄압에 착수했다. 디엠의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국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주요한 탄압 대상은 반프랑스 저항세력과 베트민이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들이 폭력에 의지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는 많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농민을 규합해서 NLF를 재조직하는 데 성공한 베트민을 견제할 유일한 대응책은 폭력뿐이었다. 미국에게는 활동무대를 취약한 정치 분야에서 무력 분야로 변경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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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점점 인기를 잃어가면서 정부 내부 인사나 정부와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동의의 테두리를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예는 대니얼 엘스버그였다.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엘스버그는 해병대 장교를 지낸 뒤 미국 정부를 위해 주로 기밀사항인 특별연구를 수행하는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에서 일하고 있었다. 엘스버그는 국방부의 베트남 전쟁사 집필을 도왔는데, 같은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앤서니 루소의 도움을 받아 일급 기밀문서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사이공에서 만났는데, 각기 다른 경험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사를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이제는 미국이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행동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엘스버그와 루소는 근무를 마치고 매일 밤 한 친구의 광고대행사에서 7,000쪽에 달하는 문서를 복사했다. 엘스버그는 이 사본을 여러 하원의원과 뉴욕타임스국방부 문서라 알려지게 된 이 사본의 일부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닉슨 행정부는 대법원에 출판금지신청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그것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사전 제약(prior restraint)’이며 따라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정부는 국가기밀 문서를 승인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는 이유로 엘스버그와 루소를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을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배심원단의 심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무효심리를 선고했다. 당시 밝혀지고 있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검찰 측의 부당한 관행이 낱낱이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엘스버그는 이런 대담한 행동을 통해 정부 내의 반대론자들이 정책상의 작은 변화를 기대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자기 의견을 억제하는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깨뜨렸던 것이다. 한 동료는 이제 엘스버그가 접근통로를 가지게 됐으므로 정부를 떠나지 말라고 권했다. “너 자신을 잘라내지 마. 네 목을 자르지 말라고.” 엘스버그는 대답했다. “인생은 행정부 바깥에 존재하는 거야.”

 

반전운동은 성장 초기부터 낯설고 새로운 지지자들을 발견했는데,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수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민권운동을 통해 각성하게 됐고, 또 다른 몇몇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 아래 횡행하는 빈곤과 불의를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으로 현실에 눈뜨게 됐다. 1967년 가을,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 신부(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으로 성요셉 신부회 사제였다)는 화가 톰 루이스(Tom Lewis)와 친구인 데이비드 에버하트(David Eberhardt), 제임스 멘겔(James Mengel)과 함께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병무청 사무실로 가서 징병기록을 피로 흠뻑 적시고는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재판에 회부된 그들은 2~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5월 필립 베리건(볼티모어 사건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다)은 예수회 사제이자 북베트남을 방문, 미국의 폭격이 야기한 결과를 직접 목격한 친형 대니얼(Daniel Berrigan)과 함께 두 번째 행동을 벌였다. 베리건 형제와 다른 일곱 명은 메릴랜드 주 캐튼스빌(Catonsville)에 있는 병무청 사무실에 들어가 기록을 꺼내 나와서는 기자와 구경꾼들이 있는 가운데 징병서류에 불을 질렀다.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들은 캐튼스빌의 9(Catonsville Nine)’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대니얼의 애칭) 베리건은 캐튼스빌 사건 당시 이런 묵상을 적어뒀다.

 

훌륭한 벗들이여, 순조로운 질서를 깨뜨린 데 대해, 아이들 대신에 종잇장을 불살라버린 데 대해, 납골당 정문을 지키고 있는 당직병들을 성나게 한 데 대해 사죄를 구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는 살인은 무질서이며, 생명과 온화함과 공동체와 이타심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질서하고 말합니다. 그런 질서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선량한 이름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공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순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던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감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을 때 대니얼 베리건은 종적을 감췄다. 연방수사국이 추적하는 와중에 대니얼은 자신이 교편을 잡고있던 코넬 대학의 부활절 축제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방수사국 요원 수십 명이 군중 사이에서 그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무대에 올라섰다. 그 순간 조명이 꺼졌고, 무대에 있던 빵과 인형 극단의 커다란 인형 속에 몸을 숨긴 대니얼은 트럭에 몸을 싣고 인근 농가로 도망쳤다. 대니얼은 4개월 동안 지하에서 머물면서 시를 쓰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극비 인터뷰에 응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교회에 갑자기 나타나 설교를 한 뒤 다시 사라지는 등, 연방수사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나, 한 밀고자가 편지를 가로채 그의 소재를 고발함으로써 결국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다.

 

캐튼스빌의 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전에 수녀였던 메리 모일런(Mary Moylan)역시 연방수사국에 자진출두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은 모일런을 결코 찾아내지 못했다. 지하에서 쓴 글에서 모일런은 자신의 경험에 관해,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입장에 다다랐는지에 관해 되돌아보았다.

 

우리 모두는 결국 감옥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 칫솔을 가지고 갔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작은 옷상자를 꺼내 간이침대 밑에 밀어 넣고 침대로 올라갔다. 볼티모어 군 교도소에 있는 여자들은 전부 흑인이었다. 백인이라곤 딱 한 명뿐인 듯했다. 여자들이 나를 깨우더니 물었다. “왜 울지 않지요?”, “왜 울어요?” 여자들은 말했다. “당신 지금 감옥에 있는 거예요.” 나는 대답했다. “, 나도 여기 올 줄 알았어요.”

 

그 여자들 둘 사이에 끼어 잤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 보면 팔꿈치를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나에게 말하곤 했다. “밤새도록 자더군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내 인생에 정치적 전환점이 온 것은 우간다에 있을 때였던 듯하다. 미국 비행기들이 콩고를 폭격하던 와중에 그곳에 있었는데, 콩고 국경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비행기들이 국경을 넘어 날아와서 우간다의 마을 두 곳을 폭격한 일도 있었다. 도대체 미국 비행기들이 왜 거기까지 온 것일까?

 

그 뒤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탄자니아의 수도)에서도 조금 머물렀는데 저우언라이가 그곳에 왔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이 사람이 더러운 공산주의자이므로 미국인은 절대 거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뒤 워싱턴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의 상황, 즉 경찰의 미친 짓거리와 야만행위, 그 도시의 시민 대부분(70%가 흑인)이 영위하고 있는 삶에 마주쳐야만 했다.

 

그리고 베트남, 네이팜탄과 고엽제, 폭격 등이 있었다.

 

나는 약 1년 전에 여성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캐튼스빌 사건 때눈 감옥에 가는 게 의미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흑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토록 많은 흑인들이 항상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옥에 가는 게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걸 원치 않는다. 197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일 것이고, 나는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거기서 신비로운 경험이나 어떤 다른 경험을 하든 간에 그렇게 그들을 소모시키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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