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베트남과의 관계가 점차 좋아지면서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이슈가 된 문제다. 1990년대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한 발언을 꺼낸 이례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는 한국인들에게 많이 각인되었다이에 따라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이 많이 강해졌으며사실상 주류적 흐름이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의문을 표하는 집단들도 있다이는 인터넷 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그들은 대게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증거가 없다.”, “베트콩이랑 민간인이랑 구분이 안 된다.” 그리고 월맹군이나 베트콩도 학살을 많이 했다.”로 요약이 된다.

(후에 학살 이후 시신을 발견한 후에 민간인들, 문제는 여기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규모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미군의 폭격과 남베트남군의 보복에 의한 것인지 확실히 진상규명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경우 증오비나 위령비가 있을 정도로 베트남 내에서도 증거가 결코 없다고 할 수 없으며과거 하미 마을 학살 추모비를 세우는데 돈을 보탰던 한국군 참전용사들이 기록삭제를 요구하려 했던 행동들이 드러났었다.(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p.204)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군의 학살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과 민간인 자체가 구분이 없는 게릴라전인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군의 학살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그 이유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기본적으로 양민들의 지지를 받으며전쟁을 전개하기 때문이다이는 퐁니 퐁넛 학살에 대해 증언한 베트남전 참전용사 류진성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는 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베트콩들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하고 사라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증언했다.(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뉴스1, 2021년 11월 16)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며그 규모가 크다고 한다결론부터 말하자면그들에 의한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는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구조상 좌익의 학살이나 테러가 우익보다는 작을 수 밖에 없다또한 이들은 적어도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앞서 보았듯이 제네바 협약은 호치민에게 베트민군 전체를 남부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그러나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베트민을 지지하는 수십만의 게릴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각기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여전히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그래서 디엠의 테러 정책은 곧바로 보복 테러를 당했다그러나 디엠의 폭력 행위는 그가 적으로 간주한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반면 베트민은 디엠의 앞잡이들만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거의 아무도 테러 당한 앞잡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이처럼 디엠은 농민을 멀리했고베트민은 가톨릭 신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았다.”(호치민 평전 p.280, 2001년에 출간된 호치민 평전으로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베트콩이 학살이 있다그것은 바로 후에 학살(Massacre of Hue)그러나 이 후에 학살의 특징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한 것이 강조 받는 한편 도시의 70%를 파괴한 미군 폭격에 대해선 입을 닫는 다는 점에서 정보의 편향성이라는 문제점과 여론조작 및 각색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예를 들면 닉 터스(Nick Turse)가 2013년에 쓴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따르면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폭격과 함포사격 그리고 포격 및 미군의 화력에 의해 죽었으며, 11만 6,000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1960년대 중반 베트콩에 의해 가족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한 아이의 사진)

 

후에 학살은 보통 월맹군이 2,500명에서 최대 6,000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또한 과장되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터스는 후에 학살을 언급한 부분에서 각주로 여러 자료들을 인용했는데거기 인용된 각주에 따르면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은 후에 학살로 월맹군에게 죽은 희생자는 300~400명이며수천 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Kill Anything That Moves p.306) 그 외에도 노엄 촘스키나 에드워드 허만 그리고 가레스 포터 등이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과 미국의 여론조작을 폭로한 저서들이 다수 있다노엄 촘스키는 저서 <여론조작>에서 후에 전투를 취재했던 영국의 사진 기자 필립 존스 그리피스(Philip Jones Griffiths)의 주장을 인용하며, “후에 탈환으로 발생한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미국의 무차별적인 화력 사용으로 죽임을 당한 뒤 공산주의자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로 탈바꿈되었다고 증언했다.(여론조작 p.371)

 

월맹군에 대한 학살 및 테러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것으로는 미국의 친미성향의 역사학자 권터 루이(Guenter Lewy)의 <America in Vietnam>이 있다책에 따르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총 3만 6,725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America in Vietnam p.272~273) 이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도 미군의 전쟁범죄 피닉스 작전과는 별개로 이 숫자를 인용하며, “전쟁 초기에는 어림잡아 약 3만 7,000명이 게릴라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69)고 서술했다이러한 숫자가 과연 정확한지는 다소 의심을 품을 만 하다그런 의심과는 별개로 권터 루이의 책에선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바디 카운트로 죽은 민간인이 22만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 있다.(America in Vietnam p.450~451)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에 의한 희생보다 1/6 내지는 1/7 수준으로 적다는 것이다이러한 추산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의 학살과 우익의 학살을 비교했을 때나타나는 수치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2011년에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국인의 감수성에는 크게 불편하겠지만기록은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이를테면 한 곳에서는 지주 8다른 곳에서는 경찰 14명 같은 식이었다)을 보여준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76~277)

 

이러한 커밍스의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호치민 평전의 저자 찰스 펜의 주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권터 루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의 숫자를 어느 정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그러한 이유는 바로 촘스키나 허만 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들의 학살과 테러에 대한 보도가 미국 언론에 의해 조작되고 각색되는 사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일본인 기자인 가츠이치 혼다는 사이공의 미군 총정보국에서 나온 베트콩의 테러활동이라는 제목의 주간 보고서를 조사했었는데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발견했다.

(반공 역사학자 더글라스 파이크의 저서,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저서 중 하나인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는 1980년대 운동권이 읽던 불온서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친미주의적 입장에서 베트남사를 연구한 인물이다.)

 

놀랄 만큼 야만적이고 지속적인 테러가 정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테러는 사이공의 정보통제에 의해 일반의 조사로부터 사실상 은폐되고 있었다살인사건이 결코 베트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곧 드러났다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격화하는 베트남 전쟁의 무대 뒤에는 비밀스럽게 숨겨지고 있던 '끔찍한 사실'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미국 대외정책론 p.417)

 

1970년 10월 북베트남의 포탄이 안호아에 있는 한 고아원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그런 사건이 일어나자 ABC의 조지 왓슨(Geroge Watson)은 겁에 질려 아무도 이 학살에 대비하지 못했다이것은 북베트남인이 안호아에서 저지른 비이성적인 살인이다.”라는 논평을 했었다그러나 민간인 사상자는 압도적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발생했다하지만 텔레비전이 지적한 책임 소재는 7/10의 비율로 적군에게 돌아갔고, ‘계산적인 테러작전은 미군의 작전에 의한 불행하지만 정당한 부작용과는 대조를 이루었다.(여론조작 p.344~345) 1968년 미군이 자행하여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에는 일부 생존자들이 남베트남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이 수용소가 파괴되면서 미라이 학살 생존자들이 사망했는데이는 베트콩의 테러로 왜곡되었다촘스키와 허만이 쓴 미국 대외정책론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사실들이 단순한 사고로서 등장하기도 하였다한 가지 특히 기이한 예를 들자면미라이 학살 사건의 생존자들이 강제 소개되어 있던 수용소가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이 파괴는 통상 그렇듯이 베트콩의 테러로 돌려졌다이 사실은 그 지역에 있던 퀘이커 봉사단원에 의해 폭로되었다.”(미국 대외정책론 p.417)

 

그 외에도 술에 취한 남베트남 정부군 병사가 자신들끼리 언쟁을 벌이다가 수류탄을 던져 옆에 서 있던 구경꾼들을 죽인 것도 이른바 베트콩의 테러행위로 보도됐었었다.(미국 대외정책론 p.417) 이러한 사실들을 보았을 때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테러와 학살은 많은 부분에서 조사와 의심을 해봐야 할 사항이며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로 알려진 후에 학살만 보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의구심과 조작 그리고 과장이 있었으며맥락적으로 도시 70%가 미군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국과 남베트남의 화력에 의해 죽은 것에 대해선 언급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여론조작>, 이 책은 미국 정부가 어떤 식으로 여론을 조작하는지 분석한 책이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후에 학살이나 몇몇 베트콩의 테러행위를 언급하며,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한국군 보다 민간인 학살을 더 많이 저질렀다.”는 위로아닌 자신들 만의 위로를 하고 있다이러한 주장에는 이러한 반론도 가능하다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캐나다군이 민간인 60명을 학살했는데이는 인민군이나 좌익이 한 규모에 비해 작으니캐나다군은 잔인하지 않은 건가?(캐나다군의 양민학살 관련 자료는 <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캐는 프라이스 교수한겨레, 2005년 8월 11>가 있다.)

 

학살의 규모가 어떠하든 캐나다군의 학살은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나 한국의 국민 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그 개입의 성질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잏후에 등장한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정책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누가 전쟁을 먼저 일으켰느냐와는 다른 문제다베트남 전쟁의 부분도 마찬가지다만약에 친미주의자 권터 루이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군이 양민 9,000명을 학살한 것보다 좀 더 크다 할지라도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의 개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 부정될 수는 없다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한 혁명적 테러리즘과는 별개로 한국이 제국주의적 전쟁에 참전하여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선 당연히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대한 테러와 학살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다수 미국이나 남베트남 측의 조작 및 각색 그리고 본질적 맥락 생략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있다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검증과 비판 없이 미국과 남베트남측의 자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사료를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학살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은 기본적 맥락 생략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후에 학살을 언급할 때단순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대한 언급만 할 것이 아니라미군의 가공할 만한 화력으로 죽은 민간인에 대해서도 언급해야한다적어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 학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선 그러한 시도를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략 200~300만의 민간인을 죽였다사망자 대다수는 폭격과 고엽제 그리고 미군 군사작전에 의한 것이다.(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p.197~198) 1968년 베트남 국영 출판사에서 출판한 <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에서는 1967년 1월 기준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25만 명의 남베트남 아이들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1967년 1월 램파트 잡지(Rampart Magazine)에 뉴욕 머시 칼리지의 아동기관 위원이었던 윌리엄 페퍼(William Pepper)에 따르면, “총 25만 명의 남베트남 아이들이 미군 화력에 의해 사망하고 또 다른 75만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p.20)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을 주장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부정론자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그것은 바로 반공주의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에 주요모순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문헌

 

박주희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 캐는 프라이스 교수한겨레, 2005.08.11. https://m.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56791.html#cb

 

이장호"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뉴스1, 2021.11.16. https://www.news1.kr/articles/?4495022

 

저자 불명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Gial Phong Publishing House, 1968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University, 1978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임채정(), 미국 대외정책론일월서각, 1985

 

찰스 펜김기태(), 호치민 평전자인, 2001

 

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유문화사, 2002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정경옥(), 여론조작에코리브르, 2006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박태균베트남 전쟁한겨레 출판, 2015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비엣 타인 응우옌부희령(),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더봄, 2019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어깨걸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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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9세기 당시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등 사실상 모든 분야를 섭렵했었다. 따라서 그가 천재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유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에게는 자신을 재정적 그리고 철학적으로 보조해주는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가 바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첫 만남을 가졌던 것은 184211월 어느 날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의 벗이자 동지가 되었다. 오늘은 바로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생애를 다뤄보고자 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201128일 프로이센의 바르멘(Barm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방적공장의 소유주였다. 당시는 산업혁명이 한참이었기에, 이러한 공장 소유주는 당시 대 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한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또한 엥겔스의 아버지는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엥겔스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엄격한 부르주아적 행동규범과 정통 신앙 아래에서 자식들을 키우고자 했다. 엥겔스가 17살이 되던 해 그의 부친은 공부하는 아들을 억지로 집으로 불려 들여 가업을 돕게 했다. 부친의 뜻을 크게 거부하지는 못했으나 엥겔스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철학, 물리, 화학 등 과학적 지식과 역사 그리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 무려 10개 국어를 익혔다. 당시 엥겔스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아버지인 헤겔의 저서들이었다.

 

1841년 엥겔스는 21살의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이 시기 엥겔스는 자주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청강했고, 청년 헤겔파의 한 사람이었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당시 바우어는 마르크스와도 매우 친한 관계였고, 엥겔스 또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르크스를 알게 됐다. 당시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트리어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마르크스를 찬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42년 엥겔스는 부친에게 밀려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맨체스터로 갔다. 물론 그가 영국에 간 것은 아버지 회사를 경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사를 상속받기 위한 훈련을 받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기회를 틈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당시 영국 맨체스터는 1842년 총파업의 중심지였고, 차티스트를 비롯한 온갖 선동가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엥겔스는 산업자본주의의 실상을 목격했으며, 이때부터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처음 만난 것은 184211월에 일이었다. 당시 엥겔스는 독일 쾰른에 있는 라인신문사무소를 방문하여 마르크스를 만났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만남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뜨거운 악수나 포옹 같은 것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담배 한 대조차 권하지 않았다. 그냥 한번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이것이 엥겔스와 마르크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엥겔스가 독일-프랑스 연보에 보낸 토마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서평과 정치경제학 비판때문이었다.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읽은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천재의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두 번째 만남은 18448월 어느날이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두 번째로 만나기 위해 영국에서 파리로 찾아왔다. 이번 만남에서는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진실성과 솔직함을 보았음을 인정했으며,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격려하는 것을 느꼈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절친이 되었고, 10일 동안 파리 노동자 집회에 참석하는 등 여러 활동과 만나며 친분을 쌓았었다. 또한 이들은 저서를 공동집필했는데, 바로 신성가족(The Holy Family)였다. 1845년 마르크스는 벨기에에 있었는데, 경제 사정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자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로 와서 이웃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함께 투쟁하는 전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공동 작품 하나를 집필했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 이데올로기(The German Ideology)였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청년헤겔학파에 맞서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상가인 바이틀링이 주도하던 독일 망명가들의 비밀 조직인 의인동맹(der Bund der Gerechten)’에 들어갔으며, 1847년에는 이 조직을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공개된 혁명조직으로 바꿨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새로운 구호가 이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18471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동맹이 영국에서 연 제2차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3개윌 후인 18482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동으로 초고를 쓴 저서를 발간했는데, 그것이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신라인신문을 발간했다. 다만 이들이 의도했던 독일 전역에서의 혁명은 무마됐고, 반란 선동죄로 마르크스는 18495월 독일에서 추방당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도와 영국 런던에 정착하도록 재정적으로 도왔다.

 

이후 엥겔스는 부친과 타협하여 맨체스터의 한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점부터 대략 10년간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가 모두 3,000여 파운드를 보내 주었다. 이 돈 덕분에 마라크스의 가족은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엥겔스는 1850년에는 독일 농민전쟁(The Peasant War in Germany)1852독일에 있어서의 혁명과 반혁명(Revolution und Kontrarevolution)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64년에 이른바 제1 인터내셔널(The First International)을 결성했고, 3년 뒤인 1867년에 나온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집필을 도왔다.

 

1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이후 연합 내의 격렬한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렸으며, 특히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의견차이가 격렬했다. 결국 바쿠닌파의 분파 활동으로 조직 내의 갈등이 심화되고 파리코뮌의 와해로 탄압이 강화되자 더 이상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제1 인터내셔널은 1879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엥겔스는 1878년에는 반뒤링론(AntiDühring)1884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 1886포이에르바하론등을 집필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중 사망함에 따라, 자본론2권과 제3권을 출판했다. 3권은 1894년에 집필이 완결됐다. 그러던 189585일 엥겔스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작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이었다. 당시 엥겔스는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이었고, 그의 유해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와 더불어 그 시기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철학자아자, 경제학자 그리고 사상가였다. 정치·철학·역사·과학·자연·가정·인종·언어·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또한 그는 대부르주아지의 아들로써, 프롤레타리아트 세상에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쳤다. 그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유물론 철학의 토대를 세웠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변증법적으로 분석한 자본론을 완성시킨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분야의 많은 분석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은 전통적인 가족관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되는 가족관에 대한 비판을 담았으며, 새로운 역사적 분석을 내놓았다.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엥겔스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더불어 지금도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으며,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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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에드워드 허만(Edward S. Herman)이 공동집필한 책 여론조작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오스에서도 정치적 해법을 외면했다이는 그레이엄 파슨스(Graham Parsons) 대사가 국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나는 연립정부의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16년간 노력했다.” 미군의 임무는 민간인 뒤에 숨어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장군을 앞세워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으며미국이 라오스를 지원한 데에는 이 나라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지원 규모는 라오스가 미국으로부터 군 예산의 100%를 지원받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였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여론조작,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이 쓴 책이다.)

 

이런 와중에도 라오스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치러진 공정 선거를 통해 1958년에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미국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쉽게 좌파의 승리로 끝났다파테트 라오(Pathet Lao: 라오스 애국전선약칭 NLHS) 게릴라군이 내세운 13명의 후보 중 9명과 중도좌파(파슨스는 그들을 동행자라고 불렀다) 4명이 국회 의석을 점령했다. ‘공산주의자나 동행자가 경합을 벌인 21개의 의석 중 13개를 차지한 것이었다그리고 득표수를 가장 많이 얻은 파테오 라오의 총수 수파누봉 공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곧 미국의 압력(가장 중요한 지원 철회 위협을 포함한)으로 친서방 중도파’ 인물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자유세계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그는 연립정부를 성공적으로 구성한 협정을 파기함으로써 파테트 라오를 해산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하지만 그는 CIA의 비호를 받는 초강경우파인 푸미 노사반 장군에 의해 축출되었다미국에 우호적인 선거감시인들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서슬 시퍼런 1960년 총선거에서 친미정권이 승리하자 곧 내전이 발발했다이는 미국이 지원하는 극우파와 실제로 정치 영역 전체로 세력을 뻗어나가던 연립정부를 지원하는 소련과 중국 간의 전쟁이었다오스트레일리아의 맹렬한 반공주의 기자 데니스 워너(Denis Warner)가 언급한 대로미국 정부는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1만여 개 마을 대부분을 총괄하는 조직이 구축된” 농촌 지역을 수중에 넣은 “NLHS가 1961년 봄 무렵 전국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이러한 상황은 이제 익숙한데바로 미국과 친미정권은 군사적으로는 강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약하다는 것이다.

 

자국의 정책이 벼랑 끝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한 미국은 1962년에 새로운 해법을 제안할 예정인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그러나 협정은 순식간에 결렬되었고내전은 베트남전의 확산에 편승해서 진용이 달라지고 미국과 그 우방의 개입이 증가한 상태로 재개되었다미국의 비밀 군사작전은 1961년에정기적인 폭격은 1964년 초에 시작되었다그리고 북부 라오스를 목표로 한 배럴 롤(Barrel Roll) 작전은 정기적인 북베트남 폭격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64년 12월에 시작되었다북부 라오스에 대한 폭격은 1966년에 한층 강화되었고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중지’ 명령(실제로는 폭격의 재분배와 같아서 전투기들은 라오스로 방향을 돌렸을 뿐이었다)이 내려진 1968년부터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폭격한 라오스 지역을 나타낸 지도)

 

라오스에 대한 초기의 언론 보도는 때때로 상당히 많았다펜타곤 페이퍼의 분석가는 1961년에 <뉴욕타임스>가 베트남보다 3배가량의 기사를 내보냈다고 평가했다하지만 그 내용은 터무니없었다예를 들어, 1958년에 라오스에서 선출된 정부를 미국이 전복시키는 데 핵심이었던 원조 삭감은 전국의 언론에 의해 단 한번도 보도되지 않았다.” 이들은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다가 워싱턴의 거짓말이 담긴 잘못된 논평을 실었다버나드 폴은 중요한 위기를 연출하고 미국이 타이(태국)와 인도차이나에 더 깊이 개입하도록 만든 선동적인 조작극을 포함한 더욱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을 자세하게 소개했다대부분 조작된공산당의 군사 작전에 관한 조셉 앨솝(Joseph Alsop)의 보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베트남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라오스는 딘 러스크의 말대로 베트남이라는 돼지 몸에 난 사마귀이거나월터 헤이니(Walter Haney)가 나중에 캄보디아를 빗대어 한 말처럼 부수적인 전쟁이 되었다이 부수적인 전쟁이 확대되는 동안 언론 보도는 반대로 점점 줄어들었다미국의 전쟁은 명확히 세 종류만이 있었다즉 남부의 호치민 루트에 대한 폭격미국 정부가 남베트남의 전쟁과 무관하다고 밝힌 북부 라오스 농촌에 대한 폭격그리고 CIA가 지휘하는 산악 부족으로 구성된 용병과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미국이 타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용병들을 지원하는 것과 같이 파테트라오 사이의 비밀 전쟁이 그것이다남부 라오스에 대한 폭격은 다양하게 보도되었다그러나 비밀 전쟁과 북부 라오스에 대한 폭격은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고 터무니없이 표현된 북베트남의 침공과 관련한 기사와는 달리 보도되지 않았다.

(파테트 라오의 선전 포스터)

 

1968년 7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동남아 통신원 자크 드코르노이(Jacques Decomoy)는 폭격당한 북부 라오스 지역을 직접 목격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긴 기사를 썼다. “······소리 없는 세상이었다주변의 마을들이 사라지고주민들은 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위험해서 낮이고 밤이고 몸을 노출할 수 없다.” 모두가 적의 점령지를 과학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무차별적인 폭격 때문이었다기자는 1965년 2월에 미군의 폭격을 처음 당한 삼누아 지방의 중심지에 널린 숨죽인 폐허와 버려진 가옥들의 모습을 전달했다그는 이 인구밀집지역은 대부분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며 최근의 폭격도시 여기저기에 패인 거대한 탄공”, “무너져 내린” 교회와 집들민간인 사상자 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투하된 파편폭탄의 잔해를 목격했다고 덧붙였다드코르노이의 보도 이후 공군이 북부 라오스의 민간인 마을에 살인적인 공격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었다그러나 끔찍한 파괴의 모습들이 담긴 그의 기사들은 계속 언론의 관심을 자극했으나 결국 무시되었다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예 은폐되었다나중에 실제 전쟁에서 비밀 폭격으로 묘사된 미군의 공격은 정말로 비밀이 되었는데이는 흔히 말하는 정부의 이중성뿐만 아니라 언론의 공모에 그 원인이 있었다.

 

언론은 방어력이 없는 민간인 마을을 공격한 정보를 보도하거나 직접 추가적인 조사를 벌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주 드물게 폭격 사실이 언급될 때에는 부정확한 변명조의 기사를 내보냈다. 1969년에 라오스에 대한 폭격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그것은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들어가는 침투 경로(일명 호치민 루트’)를 목표물로 삼았다는 주장그리고 나중에는 미군 전투기가 북베트남 침공자들과 교전하는 정부군을 전술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드코르노이가 목격하고 보도한 내용과 사뭇 다른 이 주장들은 수용할 수 없는 사실을 수용할 수 있는 사실로 바꾸어놓았다.

 

<뉴욕타임스>의 경우만 하더라도 1968년 한 해 동안 파테트 라오의 불평을 보도하는 작은 기사들(1968년 12월 22, 23)외에는 폭격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1969년 5월 18일에는 미군의 라오스 폭격을 보도하면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으로 병력과 물자를 전달하는 이른바 호치민 루트가 목표물이라고 주장했다. 6월 14일에는 미군 전투기의 폭탄은 라오스 전역특히 라오스의 공산당 저항운동을 주도하는 파테트 라오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으로 적의 물자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호치민 루트에 조준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7월 16찰스 모어는 미군 폭격은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통하는 라오스의 침투 경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7월 28일에는 북베트남군을 목표물로 삼고 매일 폭탄을 탑재한 200대의 전투기가 라오스 북동부로 출격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8월 2헤드릭 스미스는 미국이 라오스의 북베트남군 기지를 폭격하고 있다는 워싱턴 발 기사를 덧붙였다. 8월 25올먼(T. D. Allman)은 북베트남군과 싸우고 있는 정부군을 전술적으로 지원하고, “라오스 북동부 전역의 공산당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뒷내용은 용인될 보도의 범위를 슬쩍 넘어서고 있다전술적 지원과 북베트남군의 보급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미군에 관한 9월 7일자 보도에 이어 울먼은 라오스에서 전례 없는 가장 강도 높은 폭격의 지원을 받은 타이 병사들에 의해 증강된” 병력에 힘입어 정부군이 성공적으로 방어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9월 18또한 워싱턴과 비엔티안에서 미 공군이 북베트남 보급로 폭격과 더불어 정부군의 교전을 위한 전술적 지원을 하고 있다고 확인하는 워싱턴과 비엔티안 발 보도도 있었다.(9월 19, 20, 23, 24, 30특히 미군 전투기의 파테트 라오 지역 폭격을 알리는 AFP의 특전(9월 23)은 폭격이 보급로와 전투작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암시를 주었는데이는 파리와 비엔티안에서는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보도되지 앟았다.

(수파누봉 왕자와 호치민, 라오스의 수파누봉은 호치민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이후에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요컨대 북부 라오스에 대한 테러 공격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인데도 의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의 보도되지 않거나다르게 보도 되었다하워드 엘터먼은 좌파 주간지 <내셔널 가디언>이 실제 상황을 광범위하게 보도한 사실을 제외하면 1969년 한 해 동안 라오스와 캄보디아 전쟁은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한다.

 

1969년 1, <뉴욕타임스>의 울먼은 마침내 전쟁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기사 한 건을 보도했다그는 현재 미국의 주요 목표물은 반군의 경제적·사회적 토대이며미국의 폭격은 낮 시간 동안 주민들을 동굴과 굴속으로 몰아넣어 파테트 라오가 점점 더 줄어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민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또한 현재로서는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미국의 폭격기가 도시마을적군이나 민간인의 집결지 등을 원하는 대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제한적인 평화 운동의 테두리 내에서는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주류 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던 이러한 사실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CIA 비밀 부대는 앞서 몇 달 동안 자르 평원을 모조리 휩쓸어 남은 주민들을 부근의 비엔티안 지역으로 내몰았다이들의 비참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는 알려졌으나 미국에서는 대체로 무시되었다라오스 주재 미국 대사 윌리엄 설리번(William Sullivan)은 라오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인 월터 헤이니가 난민들의 증언을 꼼꼼하게 수집해서 엮은 기록을 두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준비되었다고 설명했다헤이니는 라오스에 있는 한 유엔 관리의 증언을 인용하며 이는 폭격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미국 CIA가 전개한 라오스 비밀 전쟁을 규탄하는 쿠바의 프로파간다)

 

“1968년의 폭격은 인근 마을에서 생명체가 전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1969년에 폭격기들이 매일 날아와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 하면서 폭격이 절정에 달하자 마을 사람들은 외곽으로 빠져나가거나 숲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들었다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주민들은 참호나 토굴 혹은 동굴에서 연명했다그들은 밤에만 농사를 지었다밀고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전쟁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폭격은 주민들의 물질적인 기반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데 주력했다.”

 

케네디 분과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미군 폭격의 주요 목적은 파테트 라오 점령지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이는 실제 기록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어떤 서방 기자는 북부 라오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미국이 아닌 해외에서 보도한 적도 있다올먼은 1971년 말에 자르 평원으로 날아가 목표 지역은 그곳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사용된” 네이팜탄과 B-52의 집중 폭격에 유린된 채로 텅 비어 있다고 보도했다또한 모든 식생이 자취를 감추었으며탄공은 말 그대로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고 연이은 폭격으로 끝없이 파헤쳐진 땅에서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같은 시기에 <워싱턴포스트>는 공군차관 로버트 시먼스(Robert Seamans)의 증언을 보도했다그는 북부 라오스에서는 무차별적인 폭격의 증거가 전혀 없고”, “거친” 것은 바로 북베트남 사람들이며라오스 국민은 미국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라오어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존 에버링엄(John Everingham)은 1970년에 “CIA를 믿을 만큼 순진하고” 지금은 CIA의 비밀부대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돌아오지 못할 헬리콥터 탑승을 제안받는 먀오족(몽족)의 죽어가는 마을을 여행했다그는 폭격으로 인해 라오스 전역의 절반이 검은 폐허의 땅으로 뒤바뀌어 사람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정도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물려줄 건물이나 살아 있는 것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 보도했다소규모 반전 언론을 제외하면 미국의 언론은 그의 기사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야 먀오족을 공산주의자의 희생자로 묘사하면서 그곳의 끔찍한 참상을 안타까워했다. 1970년 <방콕 월드>(10월 7일자)는 미군의 폭격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는 AP의 보도를 기사로 내보냈다.

 

1972년에는 미국의 언론에도 가끔씩 그런 기사가 출현했다그리고 나얀 찬다(Nayan Chanda)는 자르 평원을 찾아가 하늘에서 보면 그곳은 폭탄으로 뚫린 구멍들 때문에 달 표면을 연상케 하는데이는 미국의 폭격기가 6년 동안 비밀폭탄을 계속 투하하면서 이 지역의 사람과 건물을 모두 제거한 명백한 증거이다땅에서 보면 예전에 무시당했던 난민들의 말처럼 죽음과 파괴의 징후가 훨씬 더 만연해 있으며성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

 

전쟁 중에 활동한 자원봉사자들과 라오스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미국인 구호단원들은 전후 라오스에 관한 정보를 언론에 알리려고 노력했으나 거의 소득이 없었다. <뉴욕타임스기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생략하거나 객관적인 증언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밝혀온 적도 있다.

 

미국정부는 이 모든 사실들을 공식적으로 부인했고그것들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진 이후에도 기만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라오스에서 벌인 전쟁을 성공’(제이콥 자비츠(Jacob Javits)와 스튜어트 시밍턴(Stuart Symington) 상원의원혹은 눈부신 성공’(전 CIA 라오스 지부장 토머스 매코이(Thomas McCoy))으로 여겼다.

 

규모와 관심에서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는 젊은 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그곳 난민에 관해 보고한 내용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결과가 크메르 루주의 점령 이후에 서방에서 대대적으로 공개된 캄보디아 난민에 관한 연구 결과보다 더 심각하다모두 미국이 진행하는 아주 끔찍한 작전들과 아주 잘 들어맞는 이야기들이었다그러나 이 자료들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주류 언론에서는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순식간에 잊혀졌다테러의 주체가 자기들의 원칙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언론은 1968년에는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정보를 보도하지 않았고그것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화엥 놓인 1969년 말에도 추가적인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덕분에 대중은 성공적으로 기만당했고 파괴 작전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ABC 뉴스의 논평자 해리 리즈너(Harry Reasoner)는 라오스와 그 유순한 민족이 “CIA의 어릿광대짓과 북베트남의 사악한 침공” 이후에 평화적인 방안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자신의 희망을 표했다. “CIA의 어릿광대짓으로는 북부 라오스의 반군들의 경제·사회 기반시설” 파괴와 더불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살해당한 알려지지 않은 수의 인명 희생, CIA의 명분에 참여했다가 쓸모가 없어지자 버림을 당한 먀오족 등을 꼽을 수 있다그러나 북베트남의 사악한 침공” 탓으로 여기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없다. 1968년 3월 북베트남 폭격과 미국이 주도하는 용병들에 의한 북베트남에서의 작전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된 북베트남 국경 부근의 한 미군 레이더 기지에서 12명의 미 공군 병사를 살해한 정도의 잔학행위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크레이터가 생긴 라오스의 국토)

 

<뉴욕타임스>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 라오스 전쟁을 검토하면서 인구의 1/10이 넘는 35만 명의 인명이 살해되었고또 다른 1/10은 외부인과의 전쟁을 함으로써 비극적인 비율로 증가된 동족간의 싸움에서 희생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이 동족간의 싸움은 외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1958년에 연립정부에 의해 중단되었을 것이다미국은 전반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이는 몇 가지 오도된 논평을 제외하면 역사적인 분석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이처럼 뒤늦게까지도 <뉴욕타임스>는 미군 폭격이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겨냥한 것이라는 주장을 그 외의 사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계속했다실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 역시 배제되거나 크게 잘못 표현되었다이후의 보도들 역시 폐허를 만든 미국의 역할을 삭제하고 전후 문제를 공산주의자의 탓으로만 돌렸는데이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회피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영광스럽지 못한 언론의 기록은 선전모델에 의해 아주 잘 설명된다.

 

출처여론조작 p.41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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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만주를 침략한 수만 명의 일본군은 1932년에는 괴뢰황제 푸이(Puyi)를 내세워 이른바 자신들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State of Manchuria)을 세웠다그러나 만주사변을 전후로 만주 지역에선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됐으며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싸우던 이들 중에는 만주에서 살던 혹은 만주로 결집한 식민지 조선인들 많았다이에 따라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게시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 초부터 1935년 봄까지 간도 지역에서만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 이른바 대토벌을 벌였다여기에는 일본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하천용 군함까지 동원되었으며총 10만 이상의 병력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11월 중순에 있던 일제의 2차 대토벌에서만 보병과 기병 그리고 포병으로 구성된 6,000명의 병력과 항공기가 동원됐다.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도 자행됐다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마오쩌둥을 취재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쓴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도 중국의 붉은 혁명 연극에서도 일본의 만주 침공과 학살을 다룬 장면이 언급된다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만주사변 시점부터 혁명 세력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혁명가 웨이정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에 전사했다. 또한 그는 민생단 사건의 피해자들을 막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김일성을 도왔다.)

 

일본은 간도에서 이른바 친일 단체를 이용한 공작을 감행했다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이용했었고그것이 바로 민생단이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어용단체였다당시 친일파 조선인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을 설득해 동만지역의 항일무장세력에 대항할 민생단을 결성했다이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연합을 분열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러나 민생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일본은 1932년 괴뢰정부 만주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주국이 내세운 5족협화(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한족·몽고족·일본인·조선인)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6개월 만에 단체를 해산시켰다.

 

민생단이 해산된 이후인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인물이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고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간행물인 민주조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민생단 주구들이 우리 당과 청년단에 침투했다부녀자와 아동들도 예외가 아니다틈만 있으면 민생단이 다 파고들었다적색구역과 백색구역적색 유격대 할 것 없이 민생단원투성이다토비와 농민들 중에도 민생단원이 있다.”

 

소위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논리가 먹혀 들었다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돼 형장이나 감옥으로 끌려갔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이 민생단 사건의 조선인 희생자는 최소 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유격대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1933년 코민테른이 파견한 양쑹은 당시 반민생단 투쟁에 관여했던 저우바오중을 통해상황을 보고 받고 경악했다 이에따라 하얼빈시 서기 웨이정민을 동만 지역에 급파했으며웨이정민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의롸 체포구금살인을 불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민생단 사건은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불신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1935년 8월 제7차 코민테른 대회(Seventh World Congress of the Comintern)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가 천명한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이 채택되면서사실상 종결됐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동지인 저우바오중 가족이 48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일가와 찍은 사진.)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이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만주에 있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연합하여 더 가열차게 투쟁을 벌였고이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1930년대 초중반 만주를 피의 숙청으로 몰고간 반민생단 투쟁(민생단 사건)은 또 다른 인물을 체포했다가 항일 영웅으로 만들었는데그가 바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Kim Il Sung)이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김일성은 1932년 이른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구국군에서 조선인 항일 유격대인 왕청항일유격대를 이끌었다이들은 일본군의 대토벌에 맞서 전투를 치렀으며, 1933년 9월에는 동녕현성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했었다그러나 김일성 또한 민생단 사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하여감옥에 수감되었었다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스중헝은 김일성같은 위대한 애국자가 절대로 민생단일 수 없다.”고 하며 그의 신원을 보증하여 김일성은 풀려날 수 있었으며재판으로 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까지 회복했다이후 김일성은 만주 항일투쟁의 붉은 별(Red Star)로써,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고7차 코민태른 대회 이후엔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김명호중국인 이야기 3한길사, 2014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한성한국의 레지스탕스생각정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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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소련의 친선을 강조하는 포스터)

 

북한 정부의 수립 과정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 형성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소련군이 해방자를 표방하며 직접 주둔했고소련의 영향력 아래 사회주의자들의 힘이 강화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압박을 받으며 결국 힘이 약화 되었다토지개혁 등 북한의 제반 개혁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막상 북한은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국가 형성전쟁전후 경제 복구 등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북한은 점차 독자 노선을 표방하는 주체의 국가로 부상했다이 차이점은 어디에 연유하는가북한은 위성국가에서 자주국가로 뒤늦게 변모한 것인가아니면 처음부터 자주적인 국가였는가이에 대하여 균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당시 소련의 동아시아와 북한에 대한 정책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간주하여 이곳에 소련군의 역향을 대부분 투여한 다음군사력을 바탕으로 점령정책을 실행하면서 소련에 충성하는 국가들을 세우는 데 깊이 개입했다그에 비해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가급적 미국 등 다른 연합국에 협조하는 가운데 자신의 국가이익을 보장받는다는 수세적인 자세를 취했다소련의 본래 동아시아 구상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의해 통일될 중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일본 점령에의 동참한반도의 신탁통치 참여 등이었다하지만 그 구상은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미국의 일본 단독점령한반도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광범한 반대로 인해 근본적으로 뒤틀렸다결국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의 공상화와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일본의 반공국가화는 소련의 애초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동아시아 내부의 혁명 대 반혁명의 충돌과 이에 대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된 것은 동아시아 내부의 반제국주의 반봉건 국가 건설의 흐름 속에서 국가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소련은 국경을 같이하는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으며이에 북한 지역을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적극적인 원조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있던 일본의 공장과 기업소를 전리품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버리고중요산업 국유화 조치를 통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소유임을 확정해주었다그리고 이들 시설의 재가동을 위해 적극적인 원조를 했으며더 나아가 북한 스스로의 군사력 강화엘리트 양성 등에 체계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1949년에 중국혁명이 달성되자 소련은 동아시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맏형으로 인정해주었으며한국전쟁 때는 직접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이 북한을 후원하게 했다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이후 중소분쟁이 발생하면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3세계와의 관계 확장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처럼 북한 정부는 소련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수립되었으나그렇다고 초기 북한을 단순한 위성국가로 볼 수는 없다북한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율성을 지녔으며소련은 북한의 든든한 후원국가였다북한 집권층은 소련을 비롯한 국제 공산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후 경제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었으며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외압에 대처하면서 1950년대 후반 시점에는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요컨대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출처북한의 역사 1 p.24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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