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 의혹은 국내에서 제법 얘기가 된 주제다미국의 세균전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북한과 중국에서 조사를 벌이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국제과학조사단 미국이 조선과 중국에서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결론지었다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북한의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으며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 1 28일과 3 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고 밝혔다북한이 미국의 세균전을 규탄한 시점은 1952년 초부터로 확인된다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세균전에 대해 언급하며미국을 비판하는 공개 발언을 했다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니덤 보고서, 국제과학자협회 조사단이 북한에서 조사한 미국의 세균전 관련 공식 문서다.)

 

“1월 28일 적 군용기들은 조선에서 종전에 보지 못하던 세 종류의 벌레들을 이천·동남·농소동·용수동 등 지구에 대량적으로 산포했는바그 첫째 종류의 형태는 검은 파리와 같으며 둘째 종류의 형태는 벼룩과 같으며 셋째 종류의 형태는 빈대와 같다. 2월 11일 적군 비행기들은 철원 지구의 아군 진지에 대하여 벼룩·거미·모기·개미·파리 및 기타의 작은 벌레들이 가득 찬 종이통과 종이 봉지를 투하했다시번리 지구에서는 파리를 대량적으로 투하했으며 또한 평강 지구에서는 벼룩·파리·모기·귀뚜라미들을 대량적으로 뿌렸다.”(박헌영 평전 p.555~556)

 

현재 북한은 미국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엿다고 주장하고 있다아래의 인용문은 북한의 조국전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p.88)

 

미국의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세균전이라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주장했다그가 쓴 <한국의 민중봉기>라는 책에 따르면미국은 1947년부터 생물학전 무기를 개발했고그 당시 메릴랜드 주 데트릭 기지가 미군 세균전의 중심지였으며, 1951년부터 1953년 회계연도에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에 3억 4,500만 달러를 사용했고이는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배치한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었다.(한국의 민중봉기 p.209)

(아랍계 언론 알자지라의 미국 기밀문서 해제)

 

미국의 이러한 세균전 자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실제로 미국은 마루타 부대로 유명한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줬다그를 살려준 주체는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에는 이에 못지않게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 당국이 악명 높은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일본군 장교와 연구자들에게 비밀리에 완전 면책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그 대가로 미군은 만주에서 죄수 3,000명을 상대로 일본군이 실시한 인간 생체실험 관련 자료를 넘겨받았다.”고 나온다.(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5)

 

반면 현재까지의 미국 공식 입장은 세균전이 없었다는 것이다즉 북한과 중국이 지어낸 것이라는게 현재 미국의 입장이다정말 그러한 것일까미국의 공식적 입장과는 달리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북한과 중국 자료 뿐만 아니라 미국의 공식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은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

(세균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폭탄)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매카시즘이 한참이던 1953년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다.

(북한에 투하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

 

그 외에도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은 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이 책은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

 

2010년에는 아랍계 언론인 알자지라(Al Jazeera)’을 통해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한 사실이 문서로 증명됐다알자지라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를 공개했고, 1951년 9월 21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미 합참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특정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음을 밝혔다. 1951년 9월 21일자 문서였으며당연히 미국 측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미국 문서였다.(“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세균전 관련 중국의 프로파간다)

 

2015년에는 미국이 세균전 방법을 일본으로부터 배위 한국전쟁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니덤 보고서가 원본 전문이 최초 공개됐다.”는 기사가 나왔다니덤 보고서는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1952년 작성한 것으로 보고서에는 미 공군이 일제 강점기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에게 기술을 건네 받아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세균전을 치른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이 전문은 조사 내용만 670페이지나 된다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참고자료로 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 일대에 뿌려진 벼룩 사진해당 지역의 주민 사진세균을 뿌리다 잡힌 미군 포로의 수기 진술서미군의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등 세균전을 뒷받침할 증거가 200장 가까이 수록됐다.(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세균전이 없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미국의 기밀문서나 영국의 조지프 니덤 등이 조사한 자료가 보여주는 증거가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존재했고규탄받아 마땅하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안재성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2009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4.27시대. 20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년 독일에서 만든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의 초반부를 보면서독의 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서독의 젊은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고경찰은 이를 강경진압으로 대응한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이 쏜 총탄에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에서는 급진적인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창설되기에 이른다당시 서독의 젊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한 이유는 바로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 샤(Pahlavi Shah)가 서독을 방문을 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란의 샤가 도데체 어떤 인물이기에서독의 좌파 대학생들은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던 것일까?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 나오는 1967년 이란 샤의 서독 방문 반대 집회)

 

독소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9월 영국과 소련은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이란을 침공해 강점한 뒤 레자 샤를 해외로 쫓아내고 당시 22살 밖에 안 된 아들 샤를 이란의 왕으로 앉혔다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이이란은 원유가 풍부한 나라였다사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이란의 원유에 눈독을 들여왔고영향력을 확대했었다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은 이란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했다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미국 회사들이 이란의 원유에 눈을 들였다면소련의 스탈린은 이란 북부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이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두려워했다일단 이란의 국경은 소련으로부터 북쪽으로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물론 스탈린은 이란에 영국 및 미국에 허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원유 관련 이권을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2차 세계대전 당시 들어간 군대를 이란에 주둔시켰다반공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대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처칠은 1946년 3월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소위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여소련을 자극했다이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이란 석유회사 브리티시 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은 수익의 84%를 차지하며이란인들에게는 기껏 16%만을 돌려주었다놀랍게도 관련 세금도 이란이 아닌 영국에 납부했으며실제로 이 화사가 본국에 납부한 세금이 이란의 로열티로 가져간 액수의 2배가 넘었다즉 영국이 이란 원유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대다수의 이란인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당시 유전 노동자들은 일당이 50센트도 안 되었으며다른 혜택이나 유급 휴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란의 진보적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

 

이란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1950년이었다이란에 진출한 미국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디 원유에서 얻는 수익의 50%를 주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랑 계약을 맺으면서였다당시 미국은 이란이 중동 원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기 때문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당시 이란의 총리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는 영국 이란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권을 박탈하고자 했다그 외에도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모사데크는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심지어 이란 주대 미국 대사는 본국에 모사데크는 이 나라 국민 95~98%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보고를 올렸을 정도였다그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란 민중은 이에 열광했던 것이다.

 

모사데크가 반기를 들자 역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영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금지하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막았다미국 용인하에 잉글랜드 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이란에 대한 대출 및 거래를 중단했으며이란의 경제는 점차 어려워졌다. 1951년 10월 윈스턴 처칠과 보수당은 선거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처칠은 이란에 대한 군사개입 압력을 높여갔고이에 대한 대응으로 모사데크는 영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추방했다이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가 이란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가 주도한 이란 쿠데타 당시 샤를 지지하는 동원된 군중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는 CIA를 통해 모사데크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했다모사데크는 사회의자가 아니었다다만 좌파 조직인 이란 대중당(Tudeh party)와 관계가 좋았다따라서 미국의 아이젠 하워 행정부는 모사데크를 극단주의자로 봤으며막후에서는 CIA가 비밀공작에 들어갔다. CIA는 이른바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행했다놀랍게도 이 작전의 지휘자는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였다영국 정보부 MI6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이란의 왕 샤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미국의 이란 쿠데타 공작이 시작된 것을 안 모사데크는 샤가 쿠데타 음모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외로 추방했다.

(이란의 왕 샤와 그의 일가족들)

 

미국 CIA의 공작은 치밀하고도 사악했다. CIA는 이란의 언론인종교인군경 간부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한 뒤이들을 통해 CIA의 지시에 따라 반정부 여론을 조장했다심지어 CIA는 이슬람 전사들(Warriors of Islam)’의 폭력까지 돈을 주고 동원했다. CIA가 공작한 쿠데타 역사를 정리한 한 연구서에 따르면 이들은 극렬 테러리스트 깡패 집단이었다. 1953년 8울 루스벨트는 수도 테헤란에 폭도를 풀어 혼란 상태를 만들기 시작했으며우선적으로 모사데크가 공산주의자이며 유대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1953년 이란 쿠데타 관련 포스터)

 

그가 동원한 깡패들은 대중당 당원인 척하면서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이슬람 사원 한 곳을 파괴했다폭도들 중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모사비 호메이니도 있었다나중에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그 호메이니다. 8월 19일 이란의 테헤란은 무정부 상태가 극에 달했다루스벨트는 파즈롤라 자헤이 장군을 CIA가 마련한 은신처에서 빼냈으며자헤디는 당시 이탈리아에 가 있던 샤가 자신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고 선언했다총격전 끝에 쿠데타 음모 세력은 모사데크를 포함한 모사데크 지지자 수천 명을 체포했고일부는 처형했다결국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됐다이후 샤는 테헤란으로 돌아왔으며커밋 루스벨트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왕좌는 신과 나의 백성나의 군대 덕이오그리고 선생 덕이기도 합니다.”

 

이란의 지배자가 된 샤는 이후 25년간 이란을 통치했다샤의 통치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선거 조작이 있었으며,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의 반대파 탄압 책동이 있었다샤가 이란의 통치자가 되자미국은 이 부패한 동맹세력을 위해 돈을 풀었다미국 석유회사들은 이란 원유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지분의 40%를 차지했다미국은 샤에게 금고도 열어줬다쿠데타 성공 2주 만에 미국은 샤에게 긴급원조 6,800만 달러를 제공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이것이 바로 쿠데타를 통한 미국의 친미정부 건설 과정이었다결국 이 친미 정부는 1978년 극단적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터닝 포인트 포스터, 이 포스터는 9.11 테러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제법 잘 담아낸 것 같다.)

몇 일 동안 안보던 넷플릭스 다큐인 터닝 포인트를 봤다. 지난 번에 내가 쓴 리뷰를 보면 다큐가 ˝소련 침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본인들이 키운 탈레반에 대해 여성인권 운운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썼다. 또한 미국의 애국주의를 다소 강조하는 부분에 불편함을 느낀 것도 글에서 낱낱이 드러냈다.

나는 그러한 감정을 잠시 내려놓은 뒤, 몇 일 전 보다가 말았던 2화를 오늘 다시 봤다. 2화는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얘기를 보다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9.11 테러 당시 뉴욕 현장에 있던 이들과 워싱턴 펜타곤에 있던 이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던 부시의 측근들까지로 말이다.

1시간 정도의 러닝 타임을 자랑하는 이번 편에서는 당시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인들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보여준다. 즉 미국이 어떤 식으로 전쟁에 들어가게 됐고, 정서상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다큐는 9.11 테러를 당한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지옥같은 현장으로 뛰어 들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헌신을 있는 힘껏 보여준다. 군복무를 소방서에서 했던 나로서, 위험한 현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희생한 경찰과 소방관 그외 직원들의 희생정신은 당연히 공감한다. 9.11과 같은 테러 현장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생활전선에서 소방관 대원들의 극한직업을 체험해봤기에, 그들의 희생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행동과 잘못된 분노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이걸 많이 강조하고 싶다. 다큐는 9.11 테러의 현장과 긴박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신속히 넘어간다. 전쟁 초기 탈레반과 내전 중이던 북부동맹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대다수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점령했다. 여기까지가 2화의 내용이다.

나는 이 다큐가 미국에서 만든 다큐로서, 9.11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애한 것에는 크게 불만이 없다. 다만 지나친 피해자성 부각에 약간의 불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얘기에서의 결정적인 문제점이 아직까지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그 문제점이 뭔지는 총평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그래도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가 어떤지는 제법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이 점에서 미국인들이 1991년 걸프전쟁을 통해, 소위 베트남 증후군을 이라크 사막에다가 뭍어버렸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튼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잊어버린 이들이 결국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라는 실수를 반복했음을 유의하면서 감상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2003321241,500명의 미군과 3만 명의 영국군,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이 이라크 영토에 진입했다.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단기간에 이라크의 정규 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렸으며, 개전 3주만인 49일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Iraq War)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그로부터 2년 전 미국은 21세기가 시작됨에 따라 9.11테러로 충격을 받았다. 9.11테러는 미국에게 새로운 전쟁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미국은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략했다.

(딕 체니)

 

9.11 테러를 주도한 인물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핵심 인물 19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중 16명은 미국의 중동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바로 중동 여성의 해방과 민주주주의 전파였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허구였다. 미국의 진짜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권 장악을 통한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이란에 대한 군사적 견제였다. 이라크 침공의 목적은 말 그대로 석유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2,590억 배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적대국인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1,120억 배럴로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3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실질 매장량이 4,000역 배럴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다.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전역을 장악한 미국이 우선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라크 측 국영기업들을 해체해 석유 부문을 석유 관련 다국적기업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2004년 딕 체니가 소유주로 있던 핼리버튼은 12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남부 석유시설 재건 계약을 따냈고, 미국은 자신들이 세운 이라크 정부에게 지지부진한 석유화학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딕 체니가 CEO로 있는 기업 핼리버튼)

 

핼리버튼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에서 이윤을 긁어모았다. 이라크에만 4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던 핼리버튼은 200824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윤 대다수는 의문스러운 수의계약을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미군 군납업체 순위 19위에서 1위로 등극했다. 미국 상원 의원 패트릭 레이히 상원이 당시 부통령이자 핼리버튼 회사 소유주인 딕 체니(Dick Cheney)에게 핼리버튼 회사의 부당한 폭리 추구에 이의를 제기하자, 딕 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좆 까 이 새끼야(Fuck yourself)!”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번 돈)

 

핼리버튼과 자회사 KBR은 여러 차례 발주처에 비용을 부당하게 과다 청구했다. 이들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혼란을 통해 막대한 자본과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이라크의 상황은 악화됐다.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인민들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폭탄 테러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교적 교리 갈등도 더 심각해졌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이라크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 전사자가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까지 최소 4,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는 급증하여, 이라크인 65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라크의 여성들은 미군에게 강간당했으며, 양민들은 미군의 직접적인 학살과 드론 공습 그리고 무차별 헬기 사격의 공포와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재생산한 빈곤에 고통받았다.

(영화 바이스)

 

따라서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이렇게 끔찍하고 무책임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놓고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남에게 총을 쏘고도 사과하지 않는 인성을 가진 딕 체니는 당연하게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자신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을 옹호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주 뻔뻔스럽게 잘먹고 잘살고 있다. 딕 체니는 자신의 자본가 동료인 럼스펠드와 콜린 파월을 따라 이승탈출하길 기원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워싱턴 불렛 - CIA, 쿠테타, 암살의 기록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심태은 옮김, 국제전략센터 감수 / 두번째테제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통틀어 무수히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대략 1,000만 명이 사망했고, 2,000만 명이 부상당하는 이 끔찍한 전쟁은 191811월 독일 제국이 항복할 때까지 4년간이나 지속됐다. 1차 세계대전이 전쟁을 학살로 바꾼 이유는 신무기의 등장 때문이었다. 탱크, 잠수함, 항공기, 지뢰 그리고 기관총과 같은 고도로 기술화된 무기가 인명 살상을 급증시켰다. 무엇보다 기관총의 등장은 살인적이었다. 솜 전투만 하더라도 하루에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할 정도의 학살극이었다. 기관총에서 발사된 총탄은 병사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부상자로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기관총이 발휘한 대량 살상과 후유증은 분명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에 이런 짓을 했던 나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국이다. 1776년 건국이 되었다는 미국은 20세기에 구제국주의의 길을 걸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신제국주의(Neo Imperialism)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현재도 그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폭력적이고 살인적이며, 타국에게 극심한 후유증을 유발한다. 미국은 자신들의 패권에 대립하는 나라에게 경제력을 토대로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가하고, 군사적 압박을 가하며, 내부 쿠데타를 종용해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즉 체제전복을 일삼는다. 그리고 미국의 이러한 행위들은 타국에 대량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야기시킨다.

 

놀랍게도 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폭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은 2019년 베네수엘라에서 후안 과이도를 내세워 반혁명을 일으켰으며, COVID-19 이전엔 이란의 솔레이마니 장군을 사살하여,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까지 만들었었다. 물론 미국의 이러한 시도는 베네수엘라와 이란에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국가들에 대한 살인적인 경제제재와 내부공작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도 미국은 그러했다. 무수히 많은 나라에서 쿠데타와 전쟁 그리고 정치공작을 일삼았고, 그 결과는 친미주의 정권 및 국가 수립으로 귀결됐다. 일단 친미국가가 되면, 사우디아라비아 같이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여성의 인권은 개판이어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20019.11테러 당시, 테러를 주도한 알케에다 인사 19명 중 16명이 사우디아라비아인이어도, 미국의 자본만 만족시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팍스 아메리카나 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가차없는 범죄와 살인 그리고 총탄을 발사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 미국이 하고 있는 전 세계를 향한 행위다.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는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인 <갈색의 세계사><3세계의 붉은 별>은 국내에도 번역됐다. 이 책들은 20세기 제3세계 민중의 혁명적인 투쟁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했으며,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혁명사의 의의와 최신의 자료들을 담고 있다. COVID-19가 시작되던 2020년 비자이 프라샤드는 새로운 책 한권을 집필했다. 그 책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저지른 무수히 많은 범죄행위를 정리했다. 그리고 20221월 국내에서 두 번째 테제출판사가 번역했다. 그 책이 바로 <워싱턴 불렛>이다.

 

<워싱턴 불렛>20세기부터 2020년까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저지른 폭력과 학살 쿠데타 그리고 경제제재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저자는 미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타국의 진보적인 정권을 전복시키고, 미국 중심의 질서에 반대하는 세력과 국가에게 어떠한 협박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고발한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는 진보적인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Juan Árbenz)CIA의 비밀작전 PB포츈(PB Fortune)을 통해 정권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미국은 과테말라에 친미 독재정부를 수립했으며,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받은 군사독재 정부는 과테말라 인민 20만 명을 학살했다. 저자 비자이 프라샤드는 CIA정권 교체 매뉴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정권 교체 매뉴얼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여론을 공작하라

2. 현지에 적임자를 임명하라

3. 군 장성을 준비해라

4.경제가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라

5. 외교적으로 고립시켜라

6.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

7. 청신호

8. 암살 연구

9. 부인하라

 

이것이 바로 미국이 레짐 체인지를 하는 방식이다. 앞에서 언급한 과테말라의 비극은 1970년대 초 칠레에서 반복됐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만 보더라도 미국은 이 정부에 대한 경제제재와 군사 쿠데타를 감행했으며, 친미 인사들을 위장취업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고 아옌데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그리고 온갖 수단이 통하지 않자, 군부 인사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켜, 칠레에 친미 정부를 세웠다. 놀랍게도 칠레의 반동 쿠데타는 1973911일에 있었고, 이는 2001WTO 건물을 타격했던 9.11 테러가 있기 28년 전의 일이었다. 즉 미국은 9.11 테러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9.11 테러의 가해자였던 셈이다.

 

미국은 타국의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학살하는 데도 열정적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의 사례가 그렇다. 194592일 베트남 독립 동맹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은 수십만의 인파가 모인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치민과 그의 베트민 동지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너무나도 옳고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은 수십년 간 프랑스 제국주의가 착취하고 수탈한 부를 보다 공평하게 이용하고자 했고, 제국주의가 착취하던 잉여가치를 베트남 인민들에게 보다 정당하고 공평하게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프랑스-베트민 전쟁, 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호치민과 베트민 동지들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8년간 항전했다. 이들의 영웅적이고 전인민적 항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제국주의에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베트남이 항쟁을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킨 것이다. 당연히 미국에게 있어서 베트남 인민의 반식민지 항쟁은 공산주의의 팽창이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물러난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한국의 이승만과 같은 반공민족주의자 고딘디엠 즉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그 나라를 분단시키고,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그 나라 인민 수백만을 최신식 무기로 학살했고, 또 다른 수백만을 강제 수용소에 정치범으로 수감했으며, 남북베트남의 국토를 폭격으로 파괴했다. 미국은 네이팜 폭탄을 포함한 온갖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베트남 민간인에게 테러를 저질렀다. 또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불리는 맹독성 고엽제를 무차별 살포하여 수십만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480만 명의 베트남인을 고엽제 후유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미제국주의의 폭력과 범죄에도 베트남 인민들은 끝까지 저항했고, 1975년 미국과 친미 꼭두각시 정부를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했다. 베트남 전쟁만 보더라도 미국은 범죄에 가까운 무력행사를 사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범죄에 가까운 무력은 1991년 걸프전쟁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사용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300~500만의 베트남인을 학살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고, 이라크에서는 65만 명에서 100만 명의 이라크인을 학살했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전에 있던 한국전쟁에서 100만 명의 남북한 민간인을 폭격으로 학살했다. 미국이 이러한 국가들에게 무차별 폭력과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2011년 리비아의 색깔혁명을 생각해보자. 1969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던 리비아의 카다피는 자마히리야라고 불리는 이른바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했다. 카다피는 여러 좌파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통해 리비아의 산업과 경제를 성장시켰고, 밑바닥을 달리던 리비아의 여성인권을 중동에서 가장 여성인권이 발달한 국가로 바꿨다. 1981~85년의 5개년 개발 계획 동안 리비아는 산업 생산의 연간 22,6%의 성장률과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그리고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를 보여줬으며, 이는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룬 성취였다. 이것이 리비아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으나. 2003년 리비아가 핵포기를 선언한 이후 리비아의 경제는 2009년 기준으로 1인당 GDP15,000불에서 17,000불에 달했다. 거기다 전기와수도세를 포함한 공과금은 모두 무료였다. 당시 한국이 2만 불을 조금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가 제3세계 인민들의 발목을 얼마나 잡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2011년 리비아에서는 미국 CIA가 주도한 색깔혁명이 일어났다. 애초에 카다피는 자유주의 기준으로 보아도 독재자라고 얘기하기 좀 애매모호한 지도자였지만, 서방의 여론조작은 카다피를 히틀러와 같은 악마로 포장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NATO군 형태로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전투기들이 리비아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카다피에 대한 흑색선전의 대부분 출처는 미국의 친미언론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왜곡보도가 대부분이었다. 리비아의 사태는 미국 CIA의 정치공작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는 예시다. 리비아 내전이 끝난 이후 리비아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석기시대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 인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이 전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은 미국의 독점기업들이었다. 미국의 독점기업은 리비아 내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또 미국은 이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겨 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이 바로 서방에서 말하는 자칭 민주화의 실태다.

 

이처럼 워싱턴이 기관총 단위로 발사하는 총알은 미국 질서에 대항하는 나라와 집단에게 무차별 테러와 범죄를 가한다. 이 기관총에서 발사되는 총알의 파괴와 살상 및 범죄행위는 2022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미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보는 우리가 못느낄 뿐이다.

 

비자이 프라샤드가 집필한 <워싱턴 불렛>은 앞에서 설명한 사례들을 정리한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 사람들이 읽기 쉽다는 장점이 있으며, 여러모로 잔혹한 미제국주의의 실체를 아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200페이지 안팎이라 읽는데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미제국주의의 실체를 폭로한 최신의 자료들이 담겨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을 중심으로 역사학에서 적잖은 연구 성과를 만들어낸 이의 저작이라, 공신력도 제법 있다. 나 또한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을 쓴 저자이지만, 여러모로 공부가 됐다. 특히나 과테말라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으며, 미국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아주 잘 드러냈다고 본다.

 

책의 저자 비자이 프라샤드는 한국의 상황도 절대 외면하지 않았다. 저자는 1979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미국의 유착관계를 책에서 폭로한다. 그리고 한국의 반공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낱낱이 폭로하며, 1961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이 어떤 계급을 대변했는지를 보여준다. 제국주의식 경제 논리의 변형된 변태인 박정희 경제 신화에서 많은이들이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아이티의 친미 반공독재 정부나 토마스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 등을 이 책을 통해 새로 공부했다. 읽으면 얻어가는 것이 많은 책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책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들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미국은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없이 칠레(1973)와 시리아(2021)에 공격을 가했다. UN 헌장이 외국을 상대로 한 공격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만큼 칠레 쿠데타와 시리아 공습은 모두 불법이다. 칠레의 경우 리처드 닉슨(공화당)이 청신호를 보냈다면, 시리아의 경우 처음에는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그 다음에는 조 바이든(민주당)이 여러 차례 시리아 공습을 승인했다.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양당 모두 미국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했다. 세계 여러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일 앞에서는 미국 자유주의나 보수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워싱턴 불렛》의 핵심 주제이다. - P9

1919년 6월 28일 국제연맹규약이 조인되었다. 그러기 2개월여 전인 1919년 4월 13일, 영국군은 잘라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 인도 암리차르)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곳에서 권위주의적인 인도방위법(Defence of India Act, 1915년 시행)을 반대하는 대중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4월 13일 단 하루에만 평화 시위를 벌이던 집회 참가자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이들을 죽인 것은 바로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였다. ‘인도‘가 연맹 회원국이었음에도 이러한 만행이 벌어졌다. - P32

소련의 방패는 주로 반식민주의, 민족해방 문제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팔레스타인 투쟁에서 남로디지아의 투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해방 투쟁에서 베트남 해방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해방 과정을 수호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곳은 바로 소련이었다. - P48

1959년 쿠바 혁명은 거침이 없었다. 토지개혁부터 전기 및 주택 가격 통제까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신생 혁명 정부가 취한 모든 조치는 합리적이며 논리적이었다. 쿠바 정부가 취한 이러한 합리적인 정책을 하나씩 실현할 때마다 지주, 쿠바의 자산 소유자, 미국의 다국적 기업은 저항했다. - P70

미국 해병대는 1962년 7월 태국에 도착했다. 이 군대의 목적은 CIA로부터 훈련 받은 반공 민병대와 태국 경찰을 보강해 전쟁을 벌이고, 인근의 라오스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 라오(Pathet Lao)와 1961년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한 태국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막 임무를 마친 전직 CIA 외교관 존 퓨리포이를 태국으로 파견해 작전을 감독하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야전 원수가 이끄는 군부가 집권할 수 있게 만들도록 했다. - P81

쿠데타는 절대로 쿠데타여서는 안 된다. 쿠데타라고 불리게 되면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전복하거나 최소한 타국에 개입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쿠데타는 다른 이름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반독재 대중 봉기로 시작하여, 민족주의적인 군대가 개입해 상황을 해결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이 과정은 ‘정권 인수’ 또는 ‘과도적 단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쿠데타를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 P101

과테말라나 인도네시아, 1967년 남베트남에서 진행된 피닉스 프로그램으로, 미국 정부와 동맹국은 현지의 지배계급과 군부 내 친구들을 부추겨 좌파를 완전히 살육했다. 피닉스 프로그램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수행되었다. 1968년에 기록된 CIA 비망록 <피닉스 프로그램 평가>에서는 프로그램의 세 가지 목표 중 하나가 "VCI(베트콩 인프라의 약자) 1만 2천 명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평가 문서에서 CIA는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베트남 민족해방운동 간부가 약 8만 2천 명에 이를 것으로 보았다. 이들 중 미국과 남베트남 내 동맹 세력이 1968년에 살해한 사람들의 수는 11,066명으로 그 가운데 83.5%가 "마을 또는 부락 단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 P115

아이티에게는 기회가 아예 없었다. 1804년 마무리된 혁명 이래로 아이티는 항상 위협적 존재로 취급당했다. 민주주의는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혁명을 빌미로 아이티로부터 220억 달러를 강탈했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뒤발리에 가문이 1950년부터 30년간 독재를 한 탓에 나라는 황폐화되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준 군사 조직인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s)는 미군에게 훈련을 받고 이 기간 동안 5만 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했으며, 공포와 거짓으로 사회 내 반공 및 반민중 정서를 심화했다. - P179

경제정책연구센터(Centre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8월부터 베네수엘라에서 트럼프의 제재로 인해 4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식료품과 의약품 접근성이 떨어졌다. 이러한 제재는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 P191

한편 이란에서는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자국민을 위한 앱을 개발했지만, 구글은 앱스토어에서 이 앱을 삭제했다. 이 또한 미국 제재의 영향이다. - P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