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의 만주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1931 9 18일 일본이 시작한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만주에 들어왔고, 1932년이 되었을 당시 일본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부터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중국 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결코 적진 않았다이들의 저항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시작했었고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분명한건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전개했던 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민생단을 이용했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한마디로 일제의 어용단체였던 것이다.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자가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다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하기에 이르렀다반민생단투쟁 당시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갔었던 한 조선인 유격대 지휘관이 있었다그가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

 

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20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김일성은 10대 시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탐독했었던 열혈 사회주의 청년이기도 했었다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구국군으로서 항전했는데당시 조선인 당원들도 거기서 활동했다.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安图)에서 구국군 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의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이것이 김일성이 최초로 조직한 항일 유격대였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1933년 2월은 김일성은 왕칭(왕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이른바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는데그는 여기서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여기에는 김일성이 중국인 중학교에 다닌 경력이 힘을 발휘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고실제로도 그러했다그가 왕칭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1933년 6월이었다또한 3개월 뒤 김일성은 둥닝 전투(둥닝현성 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구국군의 스중헝과 스중헝의 부대를 구출하는 전공을 만들었다그 이후 김일성은 중국 최고의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또한 반민생단투쟁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김일성 또한 민생단원으로 몰려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고 투옥되었었다물론 감옥생활은 길지 않았고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다김일성이 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구국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은 억울한 숙청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거기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김일성이 유죄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중국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둥닝전투에서 스중헝을 구출해줬던 김일성은 당연하게도 살아남았고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을 회복했다.

 

반민생단투쟁사건으로 조선인 431명이 밀정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처형됐다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주 한인들의 유격투쟁은 크게 위축되었고그런 가운데 남만주에서는 1933년 기존의 유격대들을 모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건립되었다이 부대의 규모는 최소 300명 정도였고사장은 중국인 양정우참모장은 조선인인 이홍광이었으며부대의 1/3은 조선인들이었다또 동만주에서도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성립되었으며사장은 조선인인 주진이 맡았으며병력의 2/3는 조선인이었다또한 북만주의 밀산에서도 1934년 밀산유격대와 중국의용군이 통합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4이 편성되었다.

 

1934년 6월 김일성은 동만의 유격대를 통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저우바오중의 수녕반일동맹군 그리고 구국군과 함께 나자구 전투에 참가할 때 지휘부의 일원으로 복귀했으며그해 9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민생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 시점이었다이후 김일성은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 보고 이후 공산당의 정치노선이 이른바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로 바뀌면서 이에 영향을 받았고민생단 사건도 최종적으로 종결되기에 이른다또한 여기서 김일성은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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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 중소논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중국 측으로 기울었다. 1962년 10월의 중인(중국과 인도)분쟁에서는 네루정부를 ‘침략자’로 비난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려 했다가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최후통첩을 던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북한은 흐루쇼프의 미사일 철거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2년 12월 북한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대의 현대화, 전군인의 간부화 등 4대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3년 6월 최용건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류샤오치(유소기)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정책을 평화공존정책에 가둬놓으려는 소련의 처사에 대해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월 25일에는 미영소 공동으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조인했는데 북한은 중국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가장 공공연한 소련 비판은 가을에 나왔다. 김석형 등 3인의 역사가가 소련 과학아카데미판 『세계사』의 조선사 기술에 대해 비난하는 소책자를 제작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맑스-레닌주의 사학의 기본적 요구에 배치되는 중대한 오류’ ‘조선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오는 왜곡, 위조와 날조’ 등의 표현이 실렸다. 1964년이 되자 북한은 더욱 공공연히 소련을 비난했다. 『로동신문』의 1월 27일자 사설은 ‘현대 수정주의자’와 ‘모종의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인민에게 반제투쟁을 그만두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경제 세미나는 소련을 비난하는 장이 되었고, 자력갱생의 자주경제 건설과 평등호혜, 주권존중의 경제협력 등을 주창하는 평양선언이 채택되었다. 7월 27일자 『로동신문』은 일본공산당의 내부분열을 기도하는 소련 당의 행위가 ‘대외배외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소련과 대립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 되었고 그 때문에 1961년부터 개시된 7개년 계획 수행이 난항을 겪었다. 1964년에 흐루쇼프를 대신해서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권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자, 북한은 이에 즉각 응했다. 1965년 2월에는 코시긴과 셸레핀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3월에는 북한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석유를 제공받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출처: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p.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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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통일 세대 - 미래 세대를 위한 북 바로 알기
김이경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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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고, 내 페친이기도 한 김이경 선생의 <우리는 통일 세대>를 읽었다. 내가 북에 대해 좀 더 북의 관점이나 반공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애초에 대학교 1학년을 시작하던 2014년은 박근혜 정권 1년차라 시대적 분위기가 극우세력들의 힘을 얻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점부터 갑자기 뉴라이트에서 마구잡이로 집필한 이승만 미화물이 줄줄이 출간했고, ‘국제시장’, ‘태양의 후예’,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등과 같은 반공정신을 고취시키는 영화나 드라마가 대대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박근혜와 뉴라이트를 싫어하면서도 북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나마 북한을 보다 이성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군복무 말기인 2018년이었다. 그때 읽은 신은미 선생의 책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쓴 책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을 읽으면서 보다 북한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개최되던 2019년 초 당시 나는 북미정상회담이 잘 마무리 되면 종전협정과 남북 자주 왕래가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협상의 결과는 결렬이었다.

 

비록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는 결렬이었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부터 시작된 남북화해무드는 이명박근혜 시절 대립과 적대주의로 포장되었던 한반도 정세에 평화라는 한 줌의 희망을 가지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북한을 새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런 정세를 거치고 변화를 보면서 나 또한 북한이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싶었고, 실제로 자기검열이라는 차원에서 반북주의를 최대한 배척하고자 많이 노력해왔다. 2년 전 사회학 교수인 김귀옥 교수님의 수업도 북에 대한 그런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는 이 전무후무한 질병에 발목이 묶인 상태다. 해외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시대다. 북한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초기인 20201월 국경을 원천 봉쇄했다. 따라서 북한을 공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는 죄다 막힌 셈이다. 물론 1월부터 국경을 원천 봉쇄했기에, 북한은 현재도 2021년 새해에 평양에 모여 신년축하행사를 그것도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만약에 북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다면 구호물자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한은 현재 내부 시스템 안에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를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하면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거나 주장을 한 이를 친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의심하고 본다. 즉 북한이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나빠야 하고 불행해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기원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 이전부터 반공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민주화를 거치면서 예전만큼의 반공주의는 보편적으로 희석되긴 했지만, 북에대한 인식은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하다. 쉽게 말해 우편향적이다. 이러한 영향에는 저자가 주장하듯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에서 퍼뜨린 거짓뉴스의 영향이 크다. 책에 나온 저자의 주장을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회이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사회도, 절대 나쁜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북녘을 뿌연 잿빛의 나라, 가난함과 절망이 흐르는 땅으로 알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인 북이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이를 극단적인 이분법, 빨갱이라는 잣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나라에서 살아온 우리는 사회주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분단 체제에 편승해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수구적폐 세력은 온갖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북을 악마로 만들어왔다. 북 고위층 인사가 처형되었다는 남녘의 언론 보도 후 다시 그들의 건재가 확인되어도 오보를 낸 언론은 반성하기는커녕 정정한 적이 없다.”

 

출처: 우리는 통일 세대 p.7~8

 

저자가 주장처럼 우리가 언론을 통해 받아들이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서구편향적 혹은 반공적으로 가공되는 정보가 많다. 또한 우리는 북한이라는 대상을 인식할 때, 독재나 굶주림과 같이 미국 부르주아지들이 타국가를 침략할 때 사용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구실들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북한이라고 해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사악한 경제제재의 합리화 논리로 사용된다는 점을 적어도 인지해야 한다 생각한다. 특히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책의 제목 우리는 통일 세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미래의 통일 세대와 현재 통일을 준비하는 세대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한 북한을 알려주고자 책을 쓴 것 같다. 책은 북한 청소년들의 교육과정이나 성장기, 북한 인민들의 일반적인 삶, 북한의 종교활동, 북한의 의료 정책, 북한의 경제 활동 등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북한의 근현대사와 더불어 북한의 문화예술 그리고 부록으로 수도 평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처음 알기도 했다. 얘를 들면 북한의 김일성 대학 교수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매주 한 번씩 금요노동을 자발적으로 나간다는 내용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이 점에선 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가 쿠바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했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다. 심지어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2005년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제작 공장 시설 건설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저자와 한국의 기술자들이 런닝 바람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분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을 읽은 나 또한 이 부분에서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그리고 무상주택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틀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에는 토착 자본가가 없다. 물론 북한에도 빈부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빈부의 차이가 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돈을 자본의 형태로 투자하여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즉 자본가가 없다는 것은 땅, 건물, 공장과 같은 사회의 공공재들이 개인 소유가 아니며, ‘자산소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별 초과이익은 기업소 노동자들에게 배분된다. 또한 북한의 회사나 사회 시스템은 상명하복식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불편함을 겪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기도 하다.

 

북한은 쿠바와 더불어 무상의료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 비하면 기술이나 설비부분에서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무상의료다. 일례로 의도치않게 탈북하여 한국에 온 김련희씨의 경우 한국 생활 초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그냥 나왔다가 길거리까지 간호사가 달려와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무상의료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7년부터 사회보험법을 제정하여 일단 노동자와 사무원, 임산부와 3세 미만 아동까지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1월 무상의료의 범위를 개인상공업자와 개인농을 제외한 전 인민으로 확대했으며, 전후복구를 완수한 1958년에는 개인병원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은 무상의료제도를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지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의료는 진단, 검사, 치료, 수술, 입원 등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부담을 국가가 부담한다는 뜻이다. 책 저자에 따르면 북한은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에 무상의료 체제를 다른 나라의 일반의료 수준으로 올려놓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주제를 얘기하자면 북한의 군대 관련한 얘기다. 대한민국에 사는 남성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최소한 면제를 받지 않으면 말이다. 우리는 군복무 2년만 해도 사회의 불만이 많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북한은 군복무를 10년씩이나 해도 내부의 불만이 생각보다 없다. 이런 궁금증은 개인적으로 항상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궁금증이 풀렸다. 책에 따르면 북한이 완벽한 징병제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일단 북한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단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 모집 대상으로 검토되고 직장에 취업한 지 3년이 넘으면 모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신체검사 불합격자, 적대계층 자녀, 과학기술산업 관련자, 예술교육 종사자, 특수 영재학교 학생, 부모가 고령인 독자 등은 처음부터 제외된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당 간부의 자녀일수록 군 복무가 필수사항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부모가 군 복무를 반대하면 입대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런 점에서 우리하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인민들이 군대를 인식하는 것도 우리하고는 다르다. 북한에서는 군대가 주민들에게 선망 받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1932년 만주에서 시작된 항일 유격대에 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인민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역사적으로 항일투쟁을 했고, 소련, 중국과 더불어 조국해방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이런 점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이나 베트남의 베트민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북한에 대해 정말 다방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쉽고 재밌게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의 그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일부 내용들은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 부분들은 솔직히 학계의 교차검증과 더불어 팩트체크가 필요하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보다 앞서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나, 평양의 단군릉 혹은 북측 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동강 문명 등은 솔직히 역사학을 공부한 나로썬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 해서 책 자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굳이 책의 내용에 대해 내가 얼마만큼 공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80%는 공감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아까 전에 지적한 그런 부분은 나머지 20%에 해당한다.

 

부록에서 평양 설명하며 다룬 릉라도의 곱등어관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하자면, 책에는 곱등어란 돌고래의 일종이라고 나온다. 사실 돌고래를 얘기했을 때 떠올리는 대부분의 돌고래는 큰돌고래(혹은 병코 돌고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국내에 많이 서식하는 돌고래는 남방큰돌고래인데, 책에 첨부된 사진을 봐서는 남방큰돌고래보단 큰돌고래 그러니까 병코 돌고래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추측으론 아마 북에서 얘기하는 곱등어는 병코 돌고래를 뜻하는 것 같다.(어디까지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게 나을 것이다.) 한가지 사실을 더 붙이자면 물개쇼에 등장한 물개는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바다사자(강치)가 분명하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북에 있는 느낌도 살짝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남북교류가 형성되면 나 또한 공식적으로 북을 방문해보고 싶다. 그것이 평양이 됐던 개성공단이 됐든 금강산이 됐든 말이다. 아무튼 책 내용이 대체로 좋다. 저자가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공감된다. 나 또한 평양에 놀러 가보고 싶다.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말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양의 동물원과 곱등어관도 방문하고 싶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항일 유적지도 답사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에 대한 얘기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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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당시 북한에서 발행한 몽양 여운형 우표)

 

무릇 인생길에는 곧을 정()자도 있고 갈지()자도 있다고들 말한다그러나 나는 여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행운아였던가 싶다내 나이 고희에 이르러 새삼스레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특히 나의 인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 감회 깊이 추억하게 되었다민족 수난의 시기에 태어나 망국의 설움을 안고 파란만장의 풍운을 헤쳐온 나의 아버지 여운형(呂運亨)은 이 나라의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수많은 반일 애국 열사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여러 차례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와서 김일성(金日成주석을 만나보았다나와 동생 원구는 1946년부터 김 주석 댁에 살면서 공부하였고또 다른 동생 영구도 평양에 와서 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전쟁 때 죽었다난구 언니와 아저씨(이만규)는 1948년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때 평양에 왔고어머니와 동생 봉구는 전쟁 때 이북으로 왔다결국 우리 가족은 시기와 경로는 달라도 모두 이북에 모여 김주석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살았다그래서 나는 나와 우리 가족을 감히 김 주석과 한 식솔로 여기는 데 버릇이 들었다.

 

그런데 1994년에 갑자기 김 주석이 별세하였다내 머리에 흰서리 내리도록 주석님 앞에서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지난날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 내가 오늘까지 곡절도 풍파도 모르고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라온 것이 누구의 덕이었는가를 날이 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된다그리고 떠나가신 지 반세기가 되었으나 오늘도 영생의 광망(光芒속에 살고 계신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해 보게 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현재는 미래를 예언한다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한 생이 보다 값있고 아름답기를 바란다사람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놓고 아버지의 지나간 인생 행로를 파헤쳐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선뜻 펜을 들었다그러나 정작 쓰자고 보니 어려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워낙 졸문인데다 수집된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몽양 여운형 선생 가족분들)

 

아버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한창 벌이던 젊은 시절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철이 들어서는 아버지와 함께한 기간이 너무 짧았다내가 알고 있는 자료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생활 외에 아버지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친지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전부다그것도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이 유실되고 삭막해졌다아직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더듬고 되살리고 모아서 쓰다 보니 아쉬운 것도 많고 공백도 많다나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대하여 밝히고 싶다.

 

첫째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초기부터 풍파 사나운 이국 땅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구김새 없이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가.

 

둘째일제통치의 가장 엄혹하던 시기에 숱한 선각자들과 유명인사들이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포기하며 일제에게 아부굴종할 때 아버지만은 독야청청하면서 마지막까지 민족적 지조를 견지하여 나갔는데과연 그러한 힘의 원천그 강의한 신념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셋째지난 시기에 나온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글들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되고 축소된 것들을 바로잡고 보충하고자 하였다.

 

자식인 내가 인생 황혼기에 아버지의 인생 행로를 더듬어 보게 되는 것은 자못 감회가 깊은 일이다나는 아버지가 길지 않은 인생 길에서 남들보다 곡절도 풍파도 괴로움도 많이 격었지만 뜻을 바로 세우고 끝까지 깨끗하게 열렬하게 산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비록 미숙하나마 이 글이 아버지 여운형의 지향과 포부의지와 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미흡한 점에 대하여 독자들의 사려 깊은 양해를 빌면서.

 

평양에서

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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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왈북의 유튜버 홍강철 선생의 sns에서 퍼왔습니다.)

쿠바혁명 이후 미국으로 도망간 쿠바 사람은 200만명이 훨씬 넘는다.
참고로 2018년 기준 쿠바 인구는 1134만이다.
베트남 통일 이후 베트남을 떠난 보트피플은 140만이 넘는다.
2018년 기준 베트남인구는 9554만이다.
올해 9월 기준으로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33,718명이라고 한다.
그중 올해 9월까지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195명, 이중 북에서 떠나서 중국에 머무르지 않고 님한까지 곧장 오는 사람은 몇명 되지도 않는다.
대부분이 중국에서 살다가 오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때문에 국내 입국 탈북민이 줄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주성하의 말에 의하면 지난 4월 하나원을 나온 탈북민은 4명이라고 한다.
4월이어서 4명이 퇴소한 건 아닐 것이다.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배출까지는 태국이민국에서 4주, 국정원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12주, 하나원에서 12주, 모두 28주가 소요된다.
그렇다면 지난 4월 하나원을 퇴소한 사람들은 적어도 작년 9월경에 태국이민국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때는 코로나 사태가 있기 훨씬 이전이다.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 국내 입국 탈북민의 수가 줄어든다는 건 잘못된 주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등졌지만 쿠바나 베트남은 망하지 않고 지금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북에 대해서 만은 망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어떤 분들은 탈북자 수의 급감에 대해 김정은위원장 시대에 와서 국경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정은위원장 시대에 와서 국경을 특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경에 배치된 병력은 내가 복무하던 그때와 꼭 같고, 근무방식도 꼭 같다.
그런데 뭘 보고 국경통제가 심해졌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젠 올 사람은 거의 다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에 3만 3천명의 탈북민이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북은 사람 못살 사회, 인간생지옥이라고 하는데 남한에서 해외로 이민가는 사람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 분들이 이민간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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