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은 남한 동해안 위쪽의 항구로 38도선에서 약 50마일(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큰 시멘트 회사 오노다는 한국에 많은 공장을 세웠는데, 삼척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부 북한에 있었다. 다른 곳의 공장과 마찬가지로 815일 공장노동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가 즉각 공장을 접수했으며, 그 결과 모든 것을 한국인들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오병호의 지도로 몇 달, 몇 년 동안 공장을 관리했다.

 

오병호는 1943년 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들어왔고, 전쟁 중에 일본인 기술자 6명이 군대로 징집되면서 빠르게 승진했다. 이는 식민지 시기 막바지에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오병호는 공장의 기술과장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실무를 익혔다. 신타로는 식민지 이주민 2세대로 1928년 북한의 승호리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진주의 지주 가문 장남이던 오병호는 1945년에 겨우 25살이었다.

 

공장의 숙련노동자였던 우진홍은 1920년 삼척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서울의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우연히도 나(브루스 커밍스)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43년 우진홍은 기술과의 숙련노동자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공장에 흔히 길게는 3년까지도 머물렀던 북한과 달리 삼척 공장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즉시 한국인들이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이동했다.

 

915일경 미군정 민정팀의 채프먼이라는 대위가 공장을 방문했고,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먼저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기 팀의 본부로 썼다. 얼마 후 오병호는 서울로 가서 미군정에 공장 가동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얻었고, 공장은 101일에 한국인 기술자와 공장노동자로 완전히 재가동되었다. 다음달 좌파-자유주의적인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에서 온 조직자들이 오노다에 지회를 설립했다. 우진홍에 따르면 노동자의 70%좌익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노동조합을 원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194512월 미군정은 명령 제33호를 발포하여 모든 공장의 자치위원회를 금지했다. 명령은 또한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 공공재산과 사유재산, 즉 큰 공장을 전부 포함하여 약 3000개의 재산이 군정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임명했다. 오노다의 관리자로 임명된 사람은 유한상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부재 관리인으로서 1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서울에서 임명한 다음번 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누군가의 친구이자 부재 관리인이었다.

 

1947년 마침내 미군정은 좌익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이 전평을 불법 단체로 규정한 지 이미 1년이 넘었지만, 전평은 자치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번창했다. 공장위원회의 지도자 전부를 포함하여 이른바 좌익분자와 빨갱이 30명이 체포되었다. 우진홍의 기억에 따르면 몇 년에 걸쳐 노동자 정치는 서서히 역전되었다. 1950년대에는 70%가 이른바 우익이었다. 이들도 노동조합은 갖지 못했다.

 

19506월 재래식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치위원회 출신자들은 대부분 공장노동자로 복귀했다. 일부 관리자와 기술자는 부산방어선으로 피신했으나 전부 다 달아나지는 않았다. 1950년 가을부터 19524월까지 남한군과 북한군은 서로 여러 차례 공장을 빼앗았고, 결국 석 달 연속으로 공장을 가동했던 북한군이 완전히 떠난 뒤로는 남쪽 사람들이 공장을 확보하여 보유했다.

 

1957년 마침내 이승만의 친구들은 서울에서 지명한 다섯 번째 부재 관리인 강직순에게 공장을 매각했다. 공장이 전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자재 일부를 도둑맞았고 주 크레인이 파괴되었지만 나머지는 멀쩡했다), 미국은 국제연합 구호기금으로 공장에 632000달러를 배정했다. 매각은 그 후 4년 만의 일이었다.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기술을 배웠으며 남한 시멘트 기술자의 최고봉이었던 오병호는 1960년대 좌익이자 빨갱이라는 오명을 썼다. 이른바 좌익이었던 우진홍은 삼척에서 시멘트 관련 사업체를 소유했다.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논점은 많다. 20세기 중반 한국사를 풍부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곳은 단지 하나의 시멘트 공장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필연의 정치, 즉 결정되던 그날(즉 채프먼 대위가 도착한 날)에는 작아 보였지만 나중에는 매우 크게 나타나는 정치적 선택에 관한 것이다.

 

채프먼 대위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잘하고 있군요, 미스터 오. 계속 잘 하도록 하시오. 나도 조합원이요.” 이러한 처리 과정에 중립이나 공평, 불간섭을 요구하는 정중한 항변, 자신들의 점령정부에서 순진한 방관자로 남는 미국인 따위는 없었다. 채프먼 대위와 서울에 있는 그의 정치적 상관들이 무엇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결국 미국인들이 잊힌 전쟁으로 알고 있는 그 내전을 초래한 것은 바로 오래전 따뜻한 9월의 그날들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미국인과 러시아인, 한국인이 했던 선택이었다.

 

출처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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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제1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맥아더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만주의 핵공격을 주장했다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다.)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은 한국전쟁에 있어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작전이었다이 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는 인민군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으로 역전되었고, “미군의 군사개입이 강해지기 전 전쟁을 끝내버리겠다는 북한 측의 목적을 말 그대로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이러한 군사작전이었기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인천상륙작전은 역사교육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인기는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아직도 인천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동상이 버젓이 서있는가 하면박근혜 정권 말기에는 고증이 엉터리인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2016)’이 개봉하여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받으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물론 태극기 부대 아저씨들의 단체관람 같은 주작질과 반공홍보질이 있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전국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은 민중들의 손으로 부서지거나 철거됐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에는 헌화가 대대적으로 바쳐졌다. 4.19 혁명 이후 한국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맥아더와 그가 전개한 인천상륙작전은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비록 반공주의적 교육의 효과이긴 했지만 말이다따라서 이번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낙동강 전선, 당시 인민군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 38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한 북한의 인민군은 불과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낙동강 전선까지의 인민군의 진격은 말 그대로 연전연승이었다심지어 7월 초에 투입된 미군 제24 사단의 1개대대도 남하하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참패를 당하고 패주했었다분명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즉각적이었음에도 미군은 인민군에게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할 때까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1950년 8월부터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이른바 워커라인(Walker Line)을 형성했는데8군 사령관(조지 패튼 장군의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던)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낙동강 전선이었다. 1950년 8월부터 형성된 낙동강 전선은 말 그대로 전선 전역이 피바다였지만전세는 점차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갔다특히나 9월에 있던 총 공세에서 인민군의 전력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더욱이 식량 보급은 정량의 절반 또는 1/3 이하로 줄어들었다거기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낙동강 전선에 있던 미8군 또한 반격 여건이 조성되었다또한 한국군과 유엔군측은 임시수도 부산을 통해서 병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형 상으로 보기엔 인민군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인민군의 거의 모든 전력은 낙동강 전선에 있었다그리고 이미 인민군은 남한 땅의 90%를 접수한 상태였다지형 상의 형식과는 달리 인민군의 사정은 힘들었다무엇보다 미군이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16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대량살상을 기반으로 한 폭탄을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이다거기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인 포항의 경우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인민군의 진격이 어려웠다.

(인천상륙작전 상륙 전개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엄청난 화력을 부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피비릿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사이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사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은 전쟁 발발시점 4일인 6월 29일이었다고 한다그가 판단하기에 북한군의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상대편 배후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한국의 서해는 갯벌도 있고 수심도 얕아서 해상작전을 하기에는 부적합 했다.

(상륙작전 당시 동원된 미군 전투기, 아마도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로 추정된다.)

 

일단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컸고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비록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상륙을 위한 LST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수심이 50m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썰물 때는 불가능했다따라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려면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7월 초 맥아더는 미 극동사령부 작전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을 합동전략작전기획단장으로 임명했고유엔군 사령부는 7월 23일에 상륙작전계획을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명명했고, 7월 말부터 인천항 일대의 해양 상태와 경계태세를 조사하는 등 상륙작전 준비를 서둘러 시작했다이렇게 8월과 9월을 거치며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할 준비를 마무리 하기에 이르렀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측 지도부가 아예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그들 또한 인천항에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하지만 기뢰를 부설하는 데는 실패했다아무튼 그들 또한 미군의 반격을 예상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한국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이 작전에 총 270척의 함대와 8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벙력을 포함하고 있었고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총 병력은 13,000명에 달했다당시 상륙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필리핀 레이테만 상륙작전에서 해군지휘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유엔군에게 항복한 인민군)

 

이렇게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그 다음날인 16일 유엔군이 인천을 탈환하며 성공으로 끝났다인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인민군 2천 명은 거의 전멸했고이것은 인민군에게 위기로 다가왔다방어가 워낙 미약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거의 사상자 없이 인천 시가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상륙작전과 인천 탈환까지 전사한 유엔군은 222명 정도였다인천에 상륙한 부대들은 수도 서울을 향해 전투를 전개해 나갔고얼마 안지나 낙동강 전선에 있던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에게 총반격 명령을 내렸다총반격에 나선 유엔군은 대구와 김천대전수원 라인을 통해 북상했다인천에 상륙한지 13일 뒤인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접수하면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마주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받게 된 인민군 중 몇 만 명은 전라도 지리산 지역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벌였다그게 바로 우리가 많이 들어본 빨치산이었다물론 이 빨치산에는 1948년 여순항쟁 당시부터 싸워온 이현상 부대도 있었다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전개하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결국 이들은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체게바라와 그의 혁명군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2016년 박근혜 정부 말기에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수 704만 명을 동원했다. 물론 이것은 어버이 연합과 같은 그쪽 분들의 개때관람의 영향력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또한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 국가적으로 기억되고 홍보되던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그러나 그 이면엔 또 다른 진실도 있었다그것은 바로 월미도 포격같은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5일전인 9월 10일 미국 항공기들은 월미도를 폭격했다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군항공기들은 95개 네이팜 폭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비판하는 월미도 폭격 희생자 유족들)

 

이 집중폭격으로 월미도 동쪽지역의 건물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그로 인해 최소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또한 여기서 희생된 이들은 미라이 학살이나 노근리 학살처럼 여성과 아이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물론 이런 무고한 희생은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일어났다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월미도 폭격 또한 그 일부였다따라서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을 당시유족들은 영화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이기도 했었다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일부분만을 기억해온 결과의 산물일 것이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정길현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현실문화, 2017

 

세계 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정토웅가람기획, 2010

 

한국전쟁박태균책과함께, 2005

 

월미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군은 왜 다 죽였나오마이뉴스, 2020년 3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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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 지음 / 두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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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참으로 역동적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에서는 여러모로 슬픈 일도 많았고, 황당한 일도 많았으며, 잔인한 역사도 많았다. 해방 이후 미소냉전에 의한 남북분단과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자유당 독재와 박정희의 유신 독재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비판적인 역사적 고찰을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학살과 독재 그리고 국가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악순환의 어디서부터가 시작일까?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다보면 이와 같은 필연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비판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시점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으로부터 찾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강화도를 침략하던 조선후기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1965년에 사망했다. 그는 904개월 동안의 삶을 살았다. 경력으로만 보자면 그는 남부럽지 않은 권위와 인생사를 가지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조선 후기 그는 독립협회의 지도자인 서재필의 지원 및 도움을 받아 초기 개화운동에 나섰고, 이후 미국에 유학가서 지금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수준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1919년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총령 즉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었고, 대한인동지회와 구미위원부의 총 책임자였으며, 해방 이후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또한 대통령에 있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을 겪었고, 이후 10년 동안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상당히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적 이면에 숨겨진 이승만의 실체는 엄청난 비리와 만행 그리고 악행의 대명사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과 만행은 1907년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친일친미제국주의자 스티븐슨 처단에 대한 재판에서 변호를 거부한 것부터 시작해서 1960년 혁명 당시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수백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다치게 한 것으로 끝난다. 즉 이승만의 무수히 많은 악행은 무려 50년 동안 그가 저질러온 인생사이기도 하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은 이명박 정권이 끝나가던 2012년에 독부 이승만 평전을 집필했었다. 친일파 문제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주화운동가의 생애를 재조명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민족주의자 김삼웅 선생이 평가한 이승만은 말 그대로 기회주의자이자 악의화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건설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은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하려는 친미 뉴라이트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했다.

 

나는 김삼웅 선생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을 박근혜가 국정 교과서를 추진하던 2015년에 읽었었다. 당시 이 책을 완독했던 나는 왜곡된 독립운동가이자 독재자인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들을 보면서 치를 떨었었다. 왜냐하면 책에 나온 내용들은 과거 내가 알고 있던 이승만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그 관료집단들의 이해관계 및 정세판단에 발맞추기 위해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는 망언을 했던 그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 나라의 독립을 위한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 외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과정에서 저지른 일들은 상식적인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저자가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승만에 대해 광신적인 찬양을 일삼는 서적들은 이미 국내에 널려있다. 대게는 이승만을 참된 반일 독립운동가나 건국의 아버지 그리고 부국의 아버지로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책들이 대다수다. 이러한 이승만 찬양 흐름은 이른바 박근혜 정권을 끝낸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COVID-19가 한참인 올해에도 엄마라는 단어를 빙자한 극우 반공 세력이 쓴 엄마가 들려주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같은 똘이장군식 논리를 보유한 책들이 적잖은 인기를 끌기까지 했었다. 나 또한 서점에 들렀다가 엄마의 이름을 모욕하고 빙자한 그 책을 보고 충격과 분노를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런류의 책들이 이승만을 미화하기 위해 주장하는 논리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즉 좌편향으로 물들어 있는 좌익 빨갱이 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며, 북한을 옹호한다는 식의 수준 낮은 공격이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들은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책을 쓴 김기협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북한의 성취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역사의 대목 대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의 역사로만 해석해야 하는 편향성이며,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실패할 운명의 나라로, 자본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한을 성공할 운명의 나라로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문법에 맞지 않는 쉽게 말해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래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원리주의 성향의 유사종교가 떠오르는 것이다.”

 

출처 : 뉴라이트 비판 p.186

 

쉽게 말해 이들은 역사를 종교의 영역 즉 이승만교로 접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아들 부시 대통령 시기 부통령을 지낸 인물인 딕 체니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가 바로 바이스(Vice)’. 영화 바이스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의 이라크인을 죽이고, 명분없는 전쟁을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했던 딕 체니의 일생사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전개한 명작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쿠키 영상은 영화를 본 일부 미국인들의 토론 및 소감을 보여준다. 거기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성향의 한 백인 남성은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모든 게 다 좌편향이에요. 다 좌익 편향된 시각에서 만들어진거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이 답변을 들은 한 젊은 남성은 전부 다 팩트 잖아요.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쳤을 것이고요. 사실인데 진보 보수가 무슨 상관이에요!”라고 말하자,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남성의 답변은 이러했다. “빨갱이 새끼 지랄하네! 너는 힐러리나 지지하겠지!”

 

상당히 흥미로운 구절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팩트를 얘기해도 좌편향이고, 팩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인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말 그대로 성스러운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하면서, 팩트에 입각하여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하면 영화 바이스에 나온 트럼프 지지자 아저씨처럼 그런식의 반응을 보인다. 물론 이런 반응은 말 그대로 개인적 감정에 기반을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기도 하지만, 학술적인 영역에서도 반공무쌍을 찍어가며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승만에 대해 좌편향, 종북, 빨갱이, 남로당 사관과 같은 용어를 사용해가며 이상한 비난을 하는 뉴라이트들의 이승만 옹호 및 찬양 논리는 그러한 논리를 기반에 두고 있는 것이다.

 

2020년 들어 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우울하고 힘이 빠질 시기, 위에서 언급한 엄마를 빙자한 이승만 찬양물이 나온 것은 그 우울함과 분노를 자극시켜주는 것 같다. 그 외에도 기파랑 출판사나 뉴라이트 세력들이 낸 이승만 전기가 시중에서 도는 것은 그러한 감정을 더더욱 부채질 한다. 이런 과정에서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독부 이승만 평전의 개정판을 8년 만에 출간했다는 소식은 여러모로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에 개정판을 읽게 된 나는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뉴라이트 세력들이 주장하는 천박한 친미 제국주의 논리 그리고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에 나온 독부 이승만 평전개정판은 사실 내용면에선 8년 전에 나온 책하고 큰 차이는 없다. 또한 책의 성향도 저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우파적 민족주의 성향과 백범 김구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아주 강력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들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나 자신과는 분명히 안 맞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훌륭한 이승만 비판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내에 출판된 이승만 평전중에 이만큼이라도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게는 뉴라이트 성향의 미국사 교수 이주영이 쓴 건국 대통령 이승만 평전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따라서 내가 이 개정판을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에 대해 좀 더 얘기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이승만 또한 책 저자가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혹은 그 이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승만은 미소냉전에서 반소 반공의 지도자로써 통일운동을 지향하지 않고, 오로지 분단정부만을 고집했던 그 사람의 행적은 사회주의나 적어도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를 원했던 70% 이상의 민중들의 염원과 바램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수립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극을 벌여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동안 이승만이 학살한 보도연맹원만 해도 30만 명을 넘긴다. 말 그대로 이승만은 코리안 킬링필드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에서 대대적으로 강조한 바와 같이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들과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지만,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그중에서 가장 천인공노할 만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표현은 조금은 과격할지는 몰라도 도올 김용옥이 말한 바와 같이 몇 년 전 스페인 내전을 일으키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 권력을 행사한 파시스트 프랑코처럼 파묘를 당하는 수준으로 우리 또한 그를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5년 반제국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의 권력자이자 독재자이기도 한 응오딘지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지향했던 길은 반민족 반민중 친외세 그리고 반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응오딘지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과거 프랑스와 미국에게 빌붙었다가 미국으로 도망친 해외 망명자 일부만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유난히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작업이 힘을 얻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친일과 친미제국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반민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돌고 있는 와중에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 같은 중남미에서는 좌파와 사회주의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즉 이승만이 추구하던 자유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이 가장 사랑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COVID-19 대처에서 가장 무능하다는 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아옌데 정권 3년 동안 사회주의를 경험하다 17년간 피노체트 군사독재를 겪으며 신자유주의를 경험했던 칠레는 올해 10월 피노체트 헌법을 국민의 투쟁으로 폐지했다. 코로나 감염이 크게 번진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회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처럼 이승만이 추구했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무튼 세계는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칠레에선 민중의 힘으로 피노체트의 잔재를 무너뜨렸다. 우리 또한 이승만의 잔재들을 4.19 혁명 이후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무너뜨려야 한다. 김삼웅 선생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개정판은 읽는 이에게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타락하고 무능했으며,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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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인 올해는 민족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했던 이 전쟁은 사실상 휴전으로 끝난 전쟁으로, 한반도의 분단정부가 그대로 유지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대중적인 인식이나 국가적인 인식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지원을 받아 무력남침을 개시한 전쟁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경제원리가 가미된 논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는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비단 버락 오바마와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자칭 민주당 계열 인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수 진보 할 거 없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이와 같은 버락 오바마의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굉장히 반북반공적인 동시에 서구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다. 즉 냉전 시기 공산주의 러시아를 바라보던 미국의 편협한 시각과 인식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은 많은 부분에서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한국이 공유하고 있는 이런 반공주의적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무시하여 한반도의 긴장관계를 초래했고, 1994년 전쟁 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네오콘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런 인식과 관점을 20019.11 테러 이후 이른바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발언을 통해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냈다. 비록 핵무기를 가지고 있던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 미국이 침공했던 이라크를 생각해보면 이런 편협한 관점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관점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다.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사실 한국전쟁 자체를 대한민국과 유엔의 승리 혹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스탈린은 나쁜 놈과 같은 그들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싶어 하는 인식과 관점은 역사적으로 그다지 정확한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전쟁의 민중적 구도를 본다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35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8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좌우연합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이것을 강제로 해산시켜 점령군을 자칭했던 집단은 바로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트루먼의 미국이었다. 여기서부터 남북분단의 구도가 명확해졌다. 미국은 친일경찰을 등용했고, 그 친일경찰과 친일인사들은 친미주의자인 이승만을 등에 엎고 분단정부 수립에 나섰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한 듯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여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방화와 학살을 저질렀다. 따라서 트루먼 독트린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제국주의 합리화 수단이었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한반도에선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김구의 남북협상 등이 실패로 끝났고, 대구와 제주 그리고 여순에서 미군정이 지휘하는 광란의 학살극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남북의 통일과 사회주의 그리고 항쟁들의 주체는 바로 남한 민중이었다. 그에 비해 반공을 내세우는 집단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을 지원하는 지배계층이었다. 즉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전부터 이런 내전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아주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고위직을 차지했던 인물들 대다수를 보면 그 뿌리가 독립운동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일에 있었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인 백선엽부터 해서 채병덕, 정일권 등 이들 대다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결국 한국군은 미제국주의에 지원을 받은 구일본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이 했던 일들을 보면 매우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었다. 무엇보다 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한국군과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 저지른 것이었다. 이들의 학살로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했다. 많게는 100만 이상도 잡는다. 또한 9.28 서울 수복 이후 한국군이 저지른 일 또한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아래 자행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살은 38선 돌파 이후 북한지역에 들어가서도 계속됐다. 대표적으로 신천양민학살사건은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극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 즉각적으로 군사개입하며 끌어들인 유엔군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제국주의 군대다. 이것은 마치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끌어들인 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등이 제국주의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군대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유엔군의 핵심인 미군도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융단폭격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한 폭탄이 20만 톤 안팎이었는데, 한국전쟁 3년 동안 한반도에 투하한 폭탄의 량은 63만 톤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네이팜 폭탄을 추가하면 665000톤이 된다.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세력들의 광적인 학살극이었고, 민중은 이에 맞서 싸우는 구도였다. 물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판가름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사실관계일 뿐이다. 마치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썸터 요새를 누가먼저 포격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한국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미제국주의에 맞선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듯이 이와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친일파 결집세력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던 것이다.

 

1112일은 서방에서 베테랑 데이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에선 이날에 자국의 전쟁영웅들과 군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이러한 흐름에 입어 올해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유엔군들을 기억하는 영상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영상을 본 필자는 정말이지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 자체가 한국전쟁에 대한 총체적 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4.3을 항쟁으로 추모했던 대통령 문재인 또한 한국전쟁날이나 이런 베테랑 날이 되면 이승만과 우익 그리고 미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던 이들은 금방 잊은 채, 반동적 군대를 추모하고 치켜세우기 바쁘다. 물론 대한민국 현실정치라는 맥락에선 이해가 가능한 일일지라도, 상당히 이율배반적 행위라고 본다. 왜냐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추모한 보도연맹 희생자들은 한국군에 의해 생긴 것이었고, 그런 학살을 저지른 한국군을 다른날에 동시에 추모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볼 때 생기는 모순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만 나오면 진보와 보수 할 거 없이 그저 반공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행위는 베트남 전쟁 시기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던 남베트남을 추모하는 일부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행위와 크게 다를것이 없다. 이걸 그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입하자면 우리는 베트남을 분단시킨 미국을 자유의 용사로 내세우는 것이고, 미국이 내세운 괴뢰 앞잡이 고딘디엠(응오딘지엠)이 최고사령관으로 있는 괴뢰군대를 자유와 민주라는 수식어로 합리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전쟁에서 우리국군혹은 자유를 위해 희생한 유엔 참전용사따위의 소리는 이처럼 어이없고 몰역사적인 시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놓치거나 무시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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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29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전쟁에 민족해방적 성격과 미제와 이승만 정부에 맞서는 민중의 구도로만 보는 것 역시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관념화하고 단순화한 이해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으며, 그 수는 (물론 미군과 국군에 의한 수보다는 적지만) 결코 무시할만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반공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한 명이기에, 다시금 유치한 ‘그래도 미군과 국군이 더 낫지‘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북한과 좌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간과해서는 한국전쟁 기 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을 읽으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간인 상호 간의 학살이 일어난 원인과 유형은 뚜렷하게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전쟁을 계기로 이전부터 서로에 가졌던 분노가 폭발했다 정도만 얘기할 수 있죠.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는 당연히 매우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박명림과 장병준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미 논파당한지 오래된 견해들이 많습니다. 한국전쟁의 성격 같은 경우가 그렇죠. 장병준의 <한국전쟁>이나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 등을 읽으면, 민족해방적 성격의 전쟁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는 지점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 저는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미군과 국군, 이승만 정부가 행한 그 모든 범죄를 미화할 마음 없습니다. 오히려 뼛속으로 증오합니다.

NamGiKim 2020-11-29 00:39   좋아요 1 | URL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사회주의자이기에 한국전쟁이라는 구도를 당연히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맥락에서 봅니다. 베트남 전쟁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전쟁 시기 좌익에 의한 학살 분명히 있었죠. 그걸 전면부정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김민우님께서 글에서 잘 밝히고 있기에 민우님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좌익의 학살은 상대적으로 우익들과 한국전쟁을 논하는데 있어 국가적으로 많이 과장되어 왔고, 반공주의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쟁이라는게 특수한 상황이기에 일일이 학살의 주체를 따지는건 매우 힘든일입니다. 이건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도 그렇죠. 다만 한국전쟁도 베트남 전쟁도 좌익세력의 경우 우익에 비해 숫자가 적었던 것도 있고 최소한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을 했었죠.

정병준 교수나 박명림 교수의 경우 냉전의 종식 이후 1990년대 학술적인 연구 성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죠. 그러나 다른 측면에선 제가 본문에서 얘기한 부차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또한 그 자료들은 보리스 옐친시기에 공개된 자료들이라 자료 취사선택이라는 부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그리고 그 두분의 주장이 수정주의적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그 구도(친일파vs독립운동가와 같은 모순점) 자체에 대한 반박이라 보진 않습니다.

일단 전 분단 책임에 있어서 미국이 가장 크다고 보고, 사회주의적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합니다.

주장과 생각은 다르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댓글이라 생각해서 긴 답변 남깁니다. 이런식의 답변도 좋습니다.ㅎㅎ 소개해준 두권의 책은 안읽어봤습니다. 조만간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dman 2020-11-29 09:37   좋아요 1 | URL
NamGiKim님의 견해 잘 정말 들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저도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좋은 글이었습니다.

ps. 댓글에선 적는 걸 깜빡 했지만, 저도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와 인정 없는 추모는 이율배반적이라는 데에 적극 동감합니다.

NamGiKim 2020-11-29 09:40   좋아요 1 | URL
사회주의자가 다 이렇게 보는건 아니지만요. 저도 김민우님의 의견을 잘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뿐만 아니라 그 학살이 반복된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도 반성해야겠죠.^^
 

(최근에 전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8년만에 개정판을 낸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분단을 추구했고반소 반공의 지도자로 부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아래에 있는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자신의 환영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남북한 정치지도자 중에서 나온 최초의 분단정권수립론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가히 폭탄선언이었다비록 탁치문제로 좌우가 분열되고소공위가 성과없이 결렬 상태에 놓였으나 아직 누구도 분단정권을 세우자고 나서지는 못한 상황이었다영구분단으로 갈지 모르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소공위가 장기 휴회로 들어가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일반 민중과 정치지도자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어떤 이유에서도 분단정권의 수립을 막아야 한다는 충정에서였다이런 시점에서 이승만의 단정수립 주장은 정치인들과 국민에게는 충격과 분노’ 그 이상이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에는 배경이 있었다이승만의 발언이 있기 전부터 미 군정 측에서 간헐적으로 단정관련 발언이 제기되었다다음은 4월 7일 미국 발신으로 국내 한 신문의 보도 내용이다미국과 미 군정은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거나 뜻을 전달받고 정읍발언을 했을지 모른다.

 

미점령당국은 남조선만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한다조선의 미 군정당국은 남조선 정부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고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이승만 박사는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는데 미측이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제의한 중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①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② 미군의 복원계획으로 조선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그 수가 희소하여 지는 것.”

 

실제로 이승만과 그의 측근은 정읍발언’ 이전에 몇 차례 단독정부 수립론을 언급했다이승만은 5월 10일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가자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 (주석 28)고 발언하였다또 하지의 정치고문이자 이승만의 로비스트인 굿펠로는 5월 24일 귀국에 앞서 가진 회견에서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미 1946년 초반부터 미·소 협력의 불가를 내세워서 단정노선북진 통일노선을 측근들에게 공언했다. 5월초에는 미·소공위가 휴회되면 단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공위가 휴회된 지 한 달 만에 공개적으로 단정 수립을 주장했다미 군정 내부에서는 4월 초에 단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미 군정의 정치 고문 겸 이승만의 로비스트였던 굿펠로는 5월 말에 남한을 떠나면서 단정을 주장했다이승만굿펠로우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단정을 주장했고미 군정은 공식적으로 단정론을 부정했다.

 

이승만의 일련의 발언은 미국(군정)의 의도를 어느 정도 꿰고서 한 것으로 풀이된다굿펠로를 통해 하지의 의중을 읽은 것이었다하지만 이즈음만 해도 미국의 한반도 기본 정책은 소련을 적대시하지 않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의 수립 쪽이었던 것 같다러치 군정장관은 6월 11일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만일 이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이승만의 단정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 하지는 1946년 6월초 서울에 온 이승만의 측근인 올리버를 만나 이승만이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끊임없는 그의 반소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될 어떠한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정수립 쪽으로 노선을 정한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정행보에 매진하였다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을 물러나고정읍발언으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다시피한 이승만은 탈출구를 찾았다방법은 모스크바 3상회의 철회와 남한 단정수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성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다이것은 국내의 정치적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미 군정은 해방 직후 이승만을 자신들의 대리인처럼 지원하였으나 차츰 그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중도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크게 의가 상하게 되고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12월 5이승만은 미 군정에서 제공한 미 군용기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방미는 유엔총회에 조선실정을 호소한다는 명목이었다도쿄에 들러 출발을 하루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맥아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면담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유엔총회는 이미 폐회 상태에 있어서 한국문제 호소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하였다그의 실제 방미 목적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그의 방미 기간에 국내의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같은 해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10.1항쟁 등 민중항쟁으로 남한 정국이 크게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계와 정계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자신의 로비활동 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였다보다 강력한 대소련 정책과 반공주의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었다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6개항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제시했다.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그 후 즉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2. 한국에 대한 미소 양국간의 협상에 구애됨이 없이 임시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임시정부는 한국의 점령 및 기타 현실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3. 남한의 경제재건을 원조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4. 한국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하여 안정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5. 타국과 동등한 원칙에 입각하여또한 어떤 국가에 대한 편중이 없이 완전한 통상권한이 한국에 허용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주석 36)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맥아더를 치켜세우고 하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하지가 좌익을 편애하고 우익을 탄압하는 반면에 맥아더의 대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선전하였다대소 강경론과 냉전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또 이것은 국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소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다미국 언론과 조야에서 이승만의 반소반공주의가 트루먼독트린을 이끌어 낸 원동력인 것처럼 보도되었다미국 사회에 이승만은 단번에 아시아의 반공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셜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이번 방미가 그 자신에게는 권력획득의 길이 되고국가적으로는 분단정권 수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고민족사적으로는 비운이 되었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재차 동경을 방문해 맥아더를 만났고국빈으로 중국에 들러 상해와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났다이승만은 4월 21일에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장개석이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이승만은 아시아 최고의 반공 지도자인 맥아더장개석을 만났고그들의 전용기를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청산리전투의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동반했다맥아더는 하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귀국을 승인했다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그 자체로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나 변화를 주지 못했다그러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대한원조 계획 등 미국의 대한 정책에 생긴 변화를 자신의 외교성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출처 이승만 평전 p.18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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