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제1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맥아더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만주의 핵공격을 주장했다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다.)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은 한국전쟁에 있어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작전이었다. 이 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는 인민군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으로 역전되었고, “미군의 군사개입이 강해지기 전 전쟁을 끝내버리겠다”는 북한 측의 목적을 말 그대로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군사작전이었기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인천상륙작전은 역사교육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인기는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인천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동상이 버젓이 서있는가 하면, 박근혜 정권 말기에는 고증이 엉터리인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2016)’이 개봉하여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받으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물론 태극기 부대 아저씨들의 단체관람 같은 주작질과 반공홍보질이 있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전국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은 민중들의 손으로 부서지거나 철거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에는 헌화가 대대적으로 바쳐졌다. 4.19 혁명 이후 한국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맥아더와 그가 전개한 인천상륙작전은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반공주의적 교육의 효과이긴 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번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낙동강 전선, 당시 인민군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 38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한 북한의 인민군은 불과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 낙동강 전선까지의 인민군의 진격은 말 그대로 연전연승이었다. 심지어 7월 초에 투입된 미군 제24 사단의 1개대대도 남하하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참패를 당하고 패주했었다. 분명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즉각적이었음에도 미군은 인민군에게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할 때까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1950년 8월부터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이른바 워커라인(Walker Line)을 형성했는데, 미8군 사령관(조지 패튼 장군의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던)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낙동강 전선이었다. 1950년 8월부터 형성된 낙동강 전선은 말 그대로 전선 전역이 피바다였지만, 전세는 점차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갔다. 특히나 9월에 있던 총 공세에서 인민군의 전력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더욱이 식량 보급은 정량의 절반 또는 1/3 이하로 줄어들었다. 거기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전선에 있던 미8군 또한 반격 여건이 조성되었다. 또한 한국군과 유엔군측은 임시수도 부산을 통해서 병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형 상으로 보기엔 인민군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인민군의 거의 모든 전력은 낙동강 전선에 있었다. 그리고 이미 인민군은 남한 땅의 90%를 접수한 상태였다. 지형 상의 형식과는 달리 인민군의 사정은 힘들었다. 무엇보다 미군이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16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대량살상을 기반으로 한 폭탄을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인 포항의 경우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인민군의 진격이 어려웠다.
(인천상륙작전 상륙 전개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엄청난 화력을 부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피비릿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사이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은 전쟁 발발시점 4일인 6월 29일이었다고 한다. 그가 판단하기에 북한군의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상대편 배후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서해는 갯벌도 있고 수심도 얕아서 해상작전을 하기에는 부적합 했다.
(상륙작전 당시 동원된 미군 전투기, 아마도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로 추정된다.)
일단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컸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비록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상륙을 위한 LST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수심이 50m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썰물 때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려면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7월 초 맥아더는 미 극동사령부 작전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을 합동전략작전기획단장으로 임명했고, 유엔군 사령부는 7월 23일에 상륙작전계획을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명명했고, 7월 말부터 인천항 일대의 해양 상태와 경계태세를 조사하는 등 상륙작전 준비를 서둘러 시작했다. 이렇게 8월과 9월을 거치며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할 준비를 마무리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측 지도부가 아예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인천항에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기뢰를 부설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무튼 그들 또한 미군의 반격을 예상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한국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에 총 270척의 함대와 8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 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벙력을 포함하고 있었고,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총 병력은 13,000명에 달했다. 당시 상륙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필리핀 레이테만 상륙작전에서 해군지휘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유엔군에게 항복한 인민군)
이렇게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그 다음날인 16일 유엔군이 인천을 탈환하며 성공으로 끝났다. 인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인민군 2천 명은 거의 전멸했고, 이것은 인민군에게 위기로 다가왔다. 방어가 워낙 미약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거의 사상자 없이 인천 시가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상륙작전과 인천 탈환까지 전사한 유엔군은 222명 정도였다. 인천에 상륙한 부대들은 수도 서울을 향해 전투를 전개해 나갔고, 얼마 안지나 낙동강 전선에 있던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에게 총반격 명령을 내렸다. 총반격에 나선 유엔군은 대구와 김천, 대전, 수원 라인을 통해 북상했다. 인천에 상륙한지 13일 뒤인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접수하면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마주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받게 된 인민군 중 몇 만 명은 전라도 지리산 지역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벌였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많이 들어본 빨치산이었다. 물론 이 빨치산에는 1948년 여순항쟁 당시부터 싸워온 이현상 부대도 있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전개하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결국 이들은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체게바라와 그의 혁명군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2016년 박근혜 정부 말기에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수 704만 명을 동원했다. 물론 이것은 어버이 연합과 같은 그쪽 분들의 개때관람의 영향력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또한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 국가적으로 기억되고 홍보되던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또 다른 진실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월미도 포격같은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5일전인 9월 10일 미국 항공기들은 월미도를 폭격했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군항공기들은 95개 네이팜 폭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비판하는 월미도 폭격 희생자 유족들)
이 집중폭격으로 월미도 동쪽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최소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한 여기서 희생된 이들은 미라이 학살이나 노근리 학살처럼 여성과 아이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무고한 희생은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월미도 폭격 또한 그 일부였다. 따라서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을 당시, 유족들은 영화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이기도 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일부분만을 기억해온 결과의 산물일 것이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 정길현, 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세계 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 2010
『한국전쟁』, 박태균, 책과함께, 2005
「월미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군은 왜 다 죽였나」, 오마이뉴스, 2020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