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19506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1953727일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의 영향은 2021년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분단 7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움직임은 분명 있었지만,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한반도를 냉전의 마지막 보루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많은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현재 북한이 강력한 반미주의 국가가 된 것이나, 한국이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가 된 것도 이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 설명이 가능할 정도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미소냉전시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쟁이기도 하다. 비록 스탈린이 이 전쟁에 정규군대를 보내지는 않았으나, 북한의 김일성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신속히 군사개입을 했으며, 50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한반도에 파병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은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었다. 한국전쟁이 또 다른 의미에서 특수한 전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전선의 급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은 남한 땅 90%를 점령했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북한땅 90%를 점령했었다. 서로가 거의 먹힐 뻔했던 상태에서 전세를 역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은 내전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나 서울 수복 이후 남한지역에서 벌어진 부역자 학살이나 북한지역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그 규모나 잔인성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했다. 1951년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전개를 보면 김종원이 지휘하는 한국군에 의해 총 1,400명이 학살당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여성, 아이, 노인이었다.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고, 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에서 미군은 최소 300명에서 600명의 민간인을 전투기 기총소사와 기관총과 소총 난사로 학살했다. 전쟁 초기 우익 군경에 의해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의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이승만은 대학살자 혹은 코리안 킬링필드(Killing Field) 주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분명 냉전(Cold War)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일어났다. 이 냉전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의 핵공격 계획이다. 미소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과정이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핵무기를 투하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특히 이 계획은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적극 추진하려 했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과 이에 대한 스탈린의 맞대응이 무서웠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공로를 쌓았단 매슈 리지웨이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아마도 1949년 소련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수소폭탄을 우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사회에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기억되는 한국전쟁(Korean War)은 과거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 국가였던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기 매우 힘든 주제였다. 브루스 커밍스나 박명림, 정병준, 박태균 등 그 외의 여러 학자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단행했고, 여러 연구 성과물을 만들어 냈지만,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아주 편협한 틀에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반공주의라는 영역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과 국가 보안법이라는 일제 치안유지법의 후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55주년에 맞춰 박태균 교수가 집필한 책 <한국전쟁>은 학계의 여러 평가 및 분석을 다루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이전의 통일 운동이나, 민간인 학살, 미국의 정책, 이승만 암살 시도, 미국의 세균전, 박헌영 숙청, 남북한 정권의 강화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뤘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다소 힘든 학술서가 아닌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탈반공주의화를 위해 여러 부분에서 시도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태균 교수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시각을 전부다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내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맥락에선 일치하는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저자 또한 반공주의를 벗어던지려는 여러 노력들을 책에서 보여줬다. 북한은 무조건 나쁜놈과 같은 과거 반공주의 프레임을 최대한 많이 벗어던지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책을 읽으면서 만족스러웠다.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김태우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1953년 휴전협정을 조인할 때까지, B-29 폭격기를 포함한 미공군의 최신식 항공 폭격에 시달렸었다. 수도 평양을 포함하여, 원산, 청진, 함흥, 신의주 등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달의표면(Surface of the Moon)’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미공군의 폭탄세례를 받았었다. 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제공권에서만큼은 단한번의 헤게모니를 잃지 않았던 미국의 전쟁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압도적인 화력공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전쟁 3년기간 동안 북한을 폭격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20만 톤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소이탄과 같이 터질 때 2,000도에서 3,000도의 폭발력을 지닌 폭탄들이 대거 투하됐으며, 19453월에 있던 단 하루 동안의 폭격만으로도 10만 명의 민간인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터뜨린 폭탄은 전쟁 3년 기간 동안 총 635,000톤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공습 당시 미국이 투하한 폭탄에 3배 이상에 달했다. 물론 이런 폭격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있었으며, 여기에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사실 전쟁 초기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미국방부의 기본 지침이었던 군사시설만을 폭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이후 맥아더는 폭격의 전략전술을 바꿨고, 그로 인해서 미국은 단순히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시설들까지 대규모 융단 폭격을 감행하게 된 것이었다. 1950118일 미공군이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었다. 대략 100대의 미군 항공기가 투입되어 신의주를 집중폭격했는데, 이날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문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고,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었다. 충격적이게도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5,000명 중 80%에 달하는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라는 점에서 소름끼치는 학살극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잔인했으며, 당시 미공군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의 표현을 빌리자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얘기다. 비극적이게도 이후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미군에 의한 대량의 민간인 살상 혹은 대학살이 일어났다 사실에서,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똑같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군의 폭격이 한참이던 1951년 용감한 여성들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고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덴마크, 체코슽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그리고 베트남으로 이루어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북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는 용감한 여성들의 연합체였다.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들이었으며, 여성차별이라는 시대적인 한계를 자신들의 역량과 능력으로 극복한 이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 단원들이었다.

 

서방세계에서 이른바 반공주의(Anti-Communism)가 팽배하던 냉전시기 이 단체는 소련의 어용단체라는 비난과 오명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어간 인사들 중에는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었으며,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의 경우 좌파와는 거리가 먼 인사였으며, 덴마크에서 온 이다 바크만(Ida Bachmann)은 조사위원들 중 가장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여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정보국에서 일했던 미군 고위급 장교였었다. 물론 소련 대표단이었던 마리아 디미트리예브나 옵샨니코바(Maria Dmitrievna Ovsyannikova)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대령으로 복무한 인물로 열혈 친소주의자였지만, 상대적으로 단체의 성격은 보수주의 보단 당연히 반식민주의와 반파시즘 성격을 뗬다.

 

1951년 이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보고 조사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거나,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전쟁의 참혹함이었다. 이 전쟁의 참혹함에는 미군의 폭격, 폭격으로 인한 죽음과 파괴,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의한 대량 민간인 학살의 흔적, 전시 성범죄 그리고 궁핍한 경제적 현실 등이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군의 폭격을 실로 파괴적이고 잔혹했다. 이 국제여맹 조사단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조사하기 위해 시민들을 취재했는데, 여기서 부정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유엔군과 한국군의 점령 시기 북한에서는 이들에 의해 만긴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증언들을 이들은 들었고, 실제로 조사에 나섰다. 황해도 지역에서만 대략 12만 명의 민간인이 이 시기에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학살 생존자들이 이들에게 증언한 이야기는 믿기 힘들 정도로 추악하고 잔혹했다.

 

물론 20세기 역사에서 이러한 학살과 잔혹행위는 전쟁에서 많이 발발했으며, 21세기 미국이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도 보고가 된다. 예를 들면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잡는다는 명분하에 이라크측 포로를 포로 대우도 하지 않으며 온갖 가학적인 잔혹행위를 일삼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시체에 오줌을 누는 등의 행위를 보이기까지 했었다. 예를들면 국제여맹 측 조사단에게 북측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한 것들 중에는 미군이나 한국군이 여성의 유방을 도려내거나, 민간인의 목이나 신체부위를 절단하는 행위를 수도없이 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자행되었었다.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났던 제주4.3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소름끼치는 학살과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북측 여성들에게 들었던 유엔군과 한국군의 잔혹행위들과 똑같은 일이 거기서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과 한국전쟁 초기 남한에서 일어났다.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에서 40만 이상이 집단 학살당했으며, 1951년 거창양민학살에서도 갓난아기 어린이 노인 여성 할 거 없이 일본군 출신 김종원이 지휘하는 군대에게 무차별 학살당했다.

 

따라서 그런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북한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신천양민 학살 사건의 경우 총 35,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국제여맹 조사단 또한 미군과 그의 하수인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 내렸었다. 신천양민 학살은 북한에서 얘기하는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로 미군과 미군 휘하의 한국군이 한 것으로 북한에서는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서북청년단과 같은 현지 우익 청년단 등이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 또한 이 학살은 우익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미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미군이 이들을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미국이 학살은 한 것이라 봐도 맥락적인 의미에서 크게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조사했던 중에는 전시 성범죄도 있었다. 적잖은 북한 여성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을 증언했었고, 일부는 북한 지역에도 그들을 위한 성노예 즉 위안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언들을 했다. 사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위안부나 유엔군 측 위안부 등은 일본군 위안부만큼 심각한 전시 성범죄의 영역에 있는 문제다. 즉 북한 지역에서도 이들이 진주하는 동안 여성들은 강제로 납치되어 감금된 뒤 원치 않은 성관계를 했어야 했고, 일부는 군대가 습격하여 강간당하는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한국전쟁 시기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한 북한 지역의 성폭력은 매우 심각했으며, 당연히 여기에는 제국주의라는 문제가 빠질 수 없다.

 

한국군 위안부의 진실을 최초로 학술적으로 밝혀낸 김귀옥 교수는 반공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월남인들이 자신의 고향인 북한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을 회고할 때면 인민군과 한국군에 대해정반대의 증언을 하였다.”고 주장했는데, “인민군의 경우 강간사건을 경험한 경우가 거의 없었던 반면, 한국군의 경우 내가 조사했던 월남인들이나 대부분의 한국전쟁 관련 구술자들로부터 거의 빠짐없이 증언되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귀옥 교수는 중국군의 경우 여성에 대한 강간은 즉결 처분감.” 이었지만, “미군은 광범위하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강간을 자행하였다.”고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김귀옥 교수의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실제로 쿠바 혁명 시기 카스트로나 체게바라의 혁명군이나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민이나 베트콩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등은 아녀자를 강간할 경우 그날로 총살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도 마찬가지였으며,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에서도 이러한 빨치산의 현실이 아주 잘 묘사된 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책에서 강조하는 김귀옥 교수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에 근거한 주장이다.

 

국제여맹 조사단 또한 북한 지역을 조사하면서 미공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중국에서 북한국경을 넘으면 이들은 평소에 걸리는 시간보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주간에는 미공군의 폭격으로 차량이 이동할 수 없었고, 야간에도 조명을 끄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군의 극심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받았던 원산을 방문했었는데, 조사하는 와중에도 미공군의 폭격에 직면해야 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항공 폭격의 무서움이 어떠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몰입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폭격>의 저자이자 한국 현대사학자인 김태우 교수가 올해 집필한 책이다. 특히나 냉전에 의해 한국사회와 서방세계에 은폐되고 감추어진 국제여맹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즉 많은 이들이 모르는 감추어진 역사를 재조명하는 하나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함으로써 김태우 교수는 지금까지 반공주의적 콤플렉스가 외면해온 또 다른 역사를 사실관계에 입각하여 밝혀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우익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는 주제다. 즉 한국 정부 피해자론에서 한발자국 나아가기 힘든 주제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는 한편, 그 이면에 있는 역사적 현실은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미군의 폭격과 전시 성범죄 그리고 민간인 학살 등을 조사했던 국제여맹 조사단의 활동은 당연히 레드컴플렉스에 의거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김태우 교수는 상당히 훌륭한 연구작을 내놓았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의 대중서로 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크게 지적하고 싶었던 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전시 강간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성폭행 부분을 다루면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그 이후 소련군의 강간을 다루고 있다. 또한 그 수치가 200만이나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출처를 확인해본 결과, 우익성향의 전쟁사학자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였다. 앤토니 비버의 저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D-Day> 그리고 <스페인 내전>등을 포함하여 국내에도 상당수 번역됐다. 그러나 비버의 경우 기본적으로 우편향 성향의 학자로 그의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저작들은 학계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소련군이 200만이나 되는 독일 및 동유럽 여성을 강간했다는 주장의 1차 출처는 독일 극우성향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그것이 앤토니 비버에 의해 재생산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보복성 전시 강간이 하나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스탈린과 소련 정부가 강간을 막으려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강간당한 그 수치는 다소 각색되고 과장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나톨리 칼린(Anatoly Karlin)이 쓴 붉은 군대의 독일 여성 강간은 괴벨스의 작품이다.’라는 자료에 따르면, 벨라루스 제1전선의 경우 422일부터 55일까지 90만 명의 붉은 군대 가운데 총 124건의 범죄 중 72건만의 강간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탈린이 소련군의 강간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1945119일 스탈린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내린 명령에서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강간은 반공주의적으로 과장 및 각색되었다는 사실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방 연합군의 강간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일의 게브하르트 교수의 경우 소련군 전시 강간 피해자가 50만이었던 반면 서방 연합군에 의한 강간은 86만 명이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따라서 소련군의 전시강간은 맥락적으로 이러한 근거와 같이 봐야할 문제이며, 그러한 주장에 서방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도 받았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각한다.

 

서평에서 책에 나온 소련군 강간 사례를 다소 길게 얘기했는데, 이러한 얘기를 서평에 언급하는 것은 그래도 이 책이 나름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언급한 것이다. 물론 이런 약간의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김태우 교수가 쓴 책이 아주 훌륭한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국제여맹의 성격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책에 따르면 이 국제여맹 조직이 냉전에서 사회주의권 국가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은 국제여맹의 반식민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여맹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를 상대로 저지르고 있던 식민지 침략전쟁에 대해 아주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프랑스 어머니들에게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내지 말라는 반전반식민주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었다. 또한 알제리에서의 프랑스 식민 정책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따라서 이 국제여맹 본부가 그 시기 파리에서 동베를린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치른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혹은 프랑스-베트민 전쟁) 또한 호치민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김일성과 연대를 표명했다는 사실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던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국제여맹이 조사하고자 했던 한국전쟁 또한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즉 한국전쟁 또한 반식민지 투쟁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맑스-레닌주의를 추구하는 좌파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런 식민지적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현재 4호선인 혜화역에 있는 그 로터리다.)에서 한 인물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그는 한평생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 이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Lyuh Woon Hyung)이다.

 

여운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인물로 애국계몽운동부터 중국 유학, 신한청년당 당수, 3.1운동의 불씨제공, 고려 공산당 활동 및 중국 혁명 참여, 조선중앙일보 사장 그리고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까지 상당히 돋보이는 이력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1922년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기도 했으며, 손문과 장제스 그리고 마오쩌둥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던 호치민하고도 만났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여러 미군정 인사들이나 소련측 인사들도 그롤 높게 평가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 인사들과도 협의하는 유연한 행동력과 친화력을 보였던 인물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이었던 김용중은 1946년 초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라고 얘기했는데, 당시 여운형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다 암살당한 그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죽음은 1948년 남북분단 정부 수립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제주4.3학살과 여순학살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서중석 교수나 정병준 교수 그리고 박태균 교수를 포함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사학자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입장에 동의하는 바이며, 따라서 그의 암살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운형의 암살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단정부를 수립하고자 온갖 테러와 악행을 일삼던 이승만과 그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에게 있어서 여운형의 존재는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여운형은 친일파들이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설 때, 끝까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대중적인 인기도 컸으며, 미국과 소련을 아우르는 통합력과 통일력을 소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제국주의적인 분단정부를 세우기 위해선, 이승만과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은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오늘은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719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719일은 친미 제국주의자 이승만이 늙어서 죽은 날이기도 하며,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이 북한에서 처형당한 날이기도 하고, 버마의 독립지도자 아웅산이 암살당한 날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719일에 여운형과 이승만의 추모제가 동시에 서울지역에서 거행되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 지지자들이 여운형 추모제 근처에 와서 소음공해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이제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인 남북분단을 허물어 버려야할 시점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대로 분단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의 영화들을 정말 많다. 2004년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천만관객이라는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영화도 있다그 외에도 한국전쟁 관련 드라마 또한 적잖게 있다이러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항상 설정해 놓는 것이 있다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에 대한 묘사다한국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정치성향과는 상관없기 중공군에 대한 묘사는 일치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온 중공군 물량 공세)

 

예를 들어 드라마를 보자면, 2010년 MBC에서 방영했던 반공 드라마 로드 넘버원에서 나온 중공군들은 숫자에 의존한 공격을 퍼붑는 것으로 나온다드라마 상에서 나온 중공군의 평양 탈환작전이나주인공 부대와 한미 연합군이 치르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이들을 압박하지만미공군의 항공지원으로 간신히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2006년 KBS에서 방영했던 해방전후사를 다소 진보적인 시각에서 다룬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도 중공군의 공세를 66화에서 아주 짧게나마 다루는데여기서도 중공군은 숫자로 한국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영화도 마찬가지다앞에서 언급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고지전등에서도 중공군은 물량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국내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대중매체는 중공군을 단순히 인해전술에만 의존한 군대로 묘사한다그렇다면이러한 묘사는 사실적인 묘사일까내가 내리는 답은 물론 아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싸움이자내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해방전쟁적인 모순점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던 전쟁이었다이 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된 것은 1950년 10월 25일의 일이었다.

 

한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수도 서울을 수복한 시점까지만 해도 중국은 참전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었다그러한 이유는 중국이 내전을 끝낸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이승만의 염원에 따라 북진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은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했는데그 다음날인 10월 2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참전 관련 편지를 보냈고, 10월 13일에 참전을 결정했다. 10월 19일 한미 연합군은 평양에 입성했는데이 시점에 마오쩌둥이 보낸 중공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팔로군들)

 

이렇게 되면서 10월 25일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참전한 중공군은 여기서 유엔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이후 중공군은 팽덕회(펑더화이)의 지원 아래 초기에 최소 30만 명이 참전했다참전 규모는 이후 100만에서 150만까지 증가한다이들은 곳곳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을 격퇴했고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말을 몽상으로 바꾸어 놓았다중공군은 북한의 조선인민군과 연합하여 12월에 다시 평양을 탈환하고 1951년에는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그 이후엔 수원과 용인 그리고 충청북도 주변까지 진격했다이후엔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38선 부근까지 후퇴했고그곳에서 2년간 고지전을 치르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 쓴 전술로는 흔히 인해전술이 많이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물론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쓴 경우가 있었는데대표적으로 유엔군이 철수하게 된 장진호 전투에서였다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과 유엔군 2만 명이 교전을 벌였고중공군은 4만 명 그리고 유엔군은 2,500명이 전사했다당시 중공군은 미군을 밀어붙이기 위해 물량에 의존했었고당시 참전했던 미군들이 이후 인해전술로 불릴만한 증언들을 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공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인식의 시작점이었다.

(북한에서 만든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그린 그림)

 

실제로 중공군의 주된 전술은 인해전술이 아니었다이들의 주된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중공군은 과거 제1차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에서 그랬듯이게릴라전에 익숙한 군대였다마오쩌둥이 키운 중국의 홍군은 게릴라전을 기반으로 성장한 군대였고, 1935년 대장정 뿐만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도 일본군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약탈하고죽인다.”는 삼광작전을 펼친 것도 팔로군의 게릴라전술에 대한 대응이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장제스에 맞선 전쟁에서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주로 화력보단 게릴라전술에 의존했다내전 초기 국민당군이 430만 대군이었던 반면 공산당은 120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에서도 국민당이 3.5배나 많았다화력에서도 국민당이 미국의 탱크와 항공기를 지원받았기에 압도적이었다따라서 중공군은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인해전술식 군대가 아니었다.

 

특히 국공내전 시기 동북해방전선에서 활약한 이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도 국민당군을 굴복시킨 전술을 참전 초기에 사용했다이들은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고립된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야간을 이용하여 산을 타고 내려온 부대들을 통해 이들의 후방을 차단했다따라서 당시 적잖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진영의 포로로 붙잡혔다결국 이러한 전략전술을 통해 중공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고수원과 용인을 넘어 충청북도 인근까지 진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에게도 한계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이었다우선 유엔군은 막강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거기다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보충한 강력한 기갑부대도 있었다특히나 항공화력은 북한 전역을 초토화 시킬 정도로 무서운 수준이었다이러한 화력지원을 토대로 맥아더 해임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이된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이에 따라 양측 모두 더 싸우기 보단 휴전협정을 앞당기는 쪽을 택했다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공군의 전략적 뿌리는 게릴라전에 있었다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이 인해전술에 의존했다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방정국은 한국 현대사의 시작점을 알리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는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남쪽 지역에는 미군이 들어와 38선을 기점으로 사실상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시점까지만 해도 남과 북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은 있었으나, 1948년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러한 길까지 막혔고,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에 수립됐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됐고, 북한하고는 다른 이른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물론 자유주의 국가도 아니지만)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정부수립 과정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이대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두한과 같은 우익깡패 조직들이나 족청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이들이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보였다. 독소전쟁 초기 소련을 침공했던 히틀러 파시스트 군대 중 그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둘렀는데, 그런 역할을 바로 서북청년단이나 이범석의 족청 그리고 김두한의 우익깡패조직들이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의 주된 지지층은 한민당과 같은 지주계급으로 친일적 성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정국 초기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며 해방 정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이 한반도 이남 전역에서 실행이 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써 들어온 것을 뜻했다. 당시 미군정의 포고령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으며,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이나 하판락 그리고 간도 특설대 대장이던 백선엽 등이 미군정에 빌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진우가 창설한 극우익성향의 한민당 또한 미군정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에 이른다.

 

미군정이 실행된 지 1달 뒤인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는데, 사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점부터 태평양 전쟁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강력한 반소반공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글라스 맥아더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이승만은 해방 후 일본 도쿄에서 미군정사령관인 하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지원을 받아 미군 C-47 항공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민당 측에선 그를 환영하는 환영식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미군정과 한민당 그리고 친일경찰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놓고 회담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삼상회의였다. 여기서 소련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런 사실은 반대로 왜곡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소련의 입장(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했던 박헌영 측의 조선 공산당은 매국노로 몰리고, 이에 덩달아 이승만과 김구는 연합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이후에 신탁통치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반탁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이 반탁시위는 사실상 해방 정국의 한 면을 장식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 내려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으나, 이는 역으로 미군정의 반발을 사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국내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좌우합작운동은 남한내의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이승만 지지파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은 조선 공산당과 더불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이었다.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이 탱크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적잖은 사람들이 미국과 이승만 지지세력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됐다. 이 시기 남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러한 목소리를 막은 것은 결국 미국이었고, 미국은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민중을 적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에서 이승만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1947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당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 그리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간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 내전의 성격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이 과거 나치 협력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적인 성격이 아주 강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그리스에 고문단과 군사원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정책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이승만을 보다 더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47년부터 확실한 지원을 받게 된 이승만은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박차를 가했고, 미군정은 유엔에게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진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광란의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미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민간인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해방 이후 미국과 이승만의 정책은 폭력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적이었고 광란의 대학살극이자 유혈극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