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생각에 큰 전환과 충격을 갖다 준 책 한권이 있다그 책은 1950 6 25일에 일어났던 6.25전쟁 즉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국내에 알려준 저작이었다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다. 1960년대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특히 한국전쟁 관련 연구에 많은 노력을 했다또한 1970년대에는 북한을 방문했으며북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다즉 이런 연구를 통해 그가 만든 작품이 바로 한국전쟁의 기원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전쟁의 기원은 영문으로 대략 1,000페이지가 넘는 그의 방대한 연구서이며, 1권과 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의 해방정국을 분석했고, 2권은 1947년 해방정국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까지를 분석했다한국전쟁의 기원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이 받은 충격은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못지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한국전쟁에 관해 깊은 연구를 했던 그의 저서는 국내에서 이적표현물이 되었고이에 따라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 책을 탄압한 이유는 분명했다한국전쟁의 기원이 당시 정부가 제시하는 한국전쟁관과 전혀 다른 해석을 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는 반공주의에 위배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 대해 깊게 연구하며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그는 한국전쟁의 발발 시점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했다는 부분에 중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국전쟁을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찾았다그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도부였던 김일성과 주류 인사들이 193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반면남한 지도부들 특히 군부의 경우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대립구도(친일파vs독립운동가)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보았을 때한국전쟁이 북한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다.

(브루스 커밍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누가 먼저 일으켰느냐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전쟁의 구도와 성격 그리고 맥락을 중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봤다물론 1990년대 동구권 붕괴 이후 박명림 교수나 국내의 몇몇 사학자들이 커밍스 교수의 자료를 반박하는 시도를 감행했고커밍스의 주장이 반박당하기도 했으나이것이 커밍스가 제시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한 완벽한 반박이 된 것은 아니었다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던 2010년 브루스 커밍스는 The Korean War: A History라는 한국전쟁 관련 신간을 출간했고그 신간은 2017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번역됐다물론 이 책에서도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으며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가지고 있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브루스 커밍스가 제시한 민족해방전쟁론은 좌우 할거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그러나 나는 이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완벽한 반박을 하는 반공주의자들을 본적이 없다그저 낡은사관이라는 말만 얼버무릴 뿐커밍스가 제시한 근거(친일파vs독립운동가 등등)를 완벽히 반박하는 사례는 못 봤다오히려 이승만 정부부터 반복된 침략자 김일성이 나쁜거니 한국전쟁은 다 김일성 책임이야와 같은 주장들만 반복될 따름이다이것은 개인적 입장부터 학계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사학 전공자로써 나는 브루스 커밍스의 민족해방전쟁론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커밍스의 민족해방전쟁론은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보면 그 구도는 명확해진다.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은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중국을 상대하는 것이었고대만해협에서는 장제스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를 지원하여 호치민의 독립운동을 막는 것이었다따라서 이런 국제적인 구도에서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며한국전쟁을 김일성과 호치민 그리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국제연대라는 시각에서 연구 성과물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앞으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이쪽으로 깊은 연구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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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전쟁 2년째인 1952년 초 불거졌다그해 2월 22일 북의 박헌영 외무상은 미군이 세균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박 외무상은 세균을 지닌 다량의 곤충이 1월 28일부터 북측 지역 상공에서 미군기로 살포되었다면서 전 세계 인민에게 간섭주의자들의 불법행윌르 조사할 것을 호소했다이틀 뒤인 2월 24일엔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미국에게 세균전 중단을 촉구했다저우언라이 총리는 또 미군 비행기가 2월 29일 이래 중국의 화북과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3월 8일 거듭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당시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표가 유엔 총회에서 북과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 반면 미국의 대표인 벤자민 코헨(Benjamin Cohen) 대사는 그들의 주장은 진실성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미국정부는 이런 불성실하고 경우 없는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부인했다.

(스티븐 엔디콧의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렇게 불븥은 미국의 세균전 논란은 파문을 일으켰다세균(생물할)무기는 1925년 6월 체결된 제네바의정서(Geneva Protocol)에서 화학무기와 함께 이미 전쟁 때 사용이 금지됐다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생체실험을 벌이고 세균전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결국 전쟁범죄로 규정되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은 터인데 다시 불거진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논란이 식지 않자 미국은 유엔을 통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적십자사의 현지 방문조사 등을 제안했지만 북과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세계보건기구는 당시 북·중국과 교전 중인 유엔의 기구였고 또 국제적십자사의 경우 유력 회원인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가스 수용소의 존재를 은폐한 전력이 있었다더욱이 당시 ICRC위원장은 바로 문제가 된 2차 대전 당시의 적십자위원이었다.

(2010년 아랍 언론계 알 자지라에서 방영했던 한국전쟁 세균전 관련 내용 보도)

 

대신 북과 중국은 1952년 3월 29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의회에 중립적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조사단 구성과 그를 통한 현지조사를 제안했다세계평화의회 집행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소련 등 6개 국적의 지명 과학자 7명으로 된 국제과학위원회(위원장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를 파견했다국제과학위는 그해 7월부터 두 달 가까이 중국과 북에서 현지조사를 벌이고 피해자와 목격자그리고 미 공군 포로들을 직접 인터뷰했으며 중국과 북측 보건의료 관계자들도 만났다국제과학위는 현장 방문 결과와 수집 자료 등을 토대로 670(요약문 64쪽과 부록 605)에 이르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 사실 조사보고서(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for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약칭 니덤 보고서라 불린다)’를 작성해 중국에서 발간했다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조사단(국제과학위원회)은 결론적으로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그것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야밤을 통해 비행기로 강남지방으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 야간 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기의 사실로 보아 조사단은 탄저열균을 가진 곤충과 거미는 3월 12일에 요동지방의 이 작은 도시 가까이에 적어도 1대의 미국 항공기에서 적어도 1개의 특수한 용기를 통해 투하되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북조선과 중국의 인민은 실제로 세균병기의 목표가 되었다이들 병기는 목적에 따라 대단히 다종다양한 방법을 구사하는 미군 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이들 방법에는 일본군(저자 주:731부대)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했던 것을 개발한 것도 있을 것이다조사단은 일보일보 전진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그것은 마지못한 가운데 이루어졌다왜냐면 조사단원들은 이런 비인도적인 기술이 세계 인류의 비난을 무시하고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즉각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반발했다메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미국동군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의)온갖 악의에 찬 거짓선전 중에서도 세균전 주장은 미국인들과 자유세계에 대한 가장 터무니없는 경고라고 반박했다.

 

반면 북은 미군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북은 또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해외보도가 지난 2010년에 나왔다그해 3월 17일 아랍권 위성채널 <알 자지라>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며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실험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1년 9월 21일자 문서를 공개한 것이다이 문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한다미군의 세균전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밝힌 <조선전사> 27권이 출간된 시점이 1981년이다세균전에 관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미군의 비밀문서가 30년 만에 한 아랍계 언론의 탐사보도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살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들)

 

작전단계는 1952년 5월 하순부터였다고 한다특히 이때엔 조산빈더 중부를 횡단하는 한 개의 감염지대를 설정하고 이 지대에 일상적으로 세균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염병을 만연케 하여 우리의 후방공급이 이 감염지대에서 차단되여 전선에 도달되지 못하게 하려는 악랄한 목적을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실행 지도)

 

북은 세균 공격이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한다북은 “1953년 1월 9일 함경남도 혜산군 장락리에는 1평방메타당 1만 마리의 파리거미개미딱장벌레들이 투하되였으며 3월 10일에는 북청군내 19개 리와 신창군의 8개 리함흥시 주변 3개 리에 파리벼룩거미개미 등 12종의 새균독충들이 산포됐고, “2월 14일부터 4월 24일까지 2개월 동안에 평안북도 곽산군태전군녕변구느 정주구느 박천구느 황해도 안악군황주군옹진군금천군토산군재령군 등지에 20여 회에 걸쳐 거미파리모기딱장벌레 등 9종의 세균 독충이 산포되였다고 주장했다.

 

북은 이런 미군의 세균전이 오랜 세균전의 경험을 가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협력 밑에 감행됐다고 본다즉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 침략전쟁에서 미제 침략자들에게 야만적인 세균전 계획 작성을 적극 도와주었으며 일본 령토를 세균전의 공격기지공급기지로 내맡기였을 뿐 아니라 세균무기 연구와 세균탄 제작그리고 세균전 감행방법 등의 경험과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제공해주었다고 단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규탄하는 중국 측 선전물)

 

북은 미군이 화학전도 벌였다고 주장했다주로는 전선과 그 린접 지대들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시작은 “1951년 5월 6일 평안남도 남포시에(미공군기가)일반 폭탄과 함께 독가스탄을 투하한 것이라는데 이로 인해 1,370여 명의 주민이 사망했다고 한다같은해 7월 6일과 9월 1일엔 원산시 풍포리와 황해도 여러 개 지구에 최루성 및 질식성 가스탄이 투하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듬해인 1952년 1월 9일 강원도 문천군 울림면 학성리의 수십 호 농가들에 “5발의 질식성 가스탄을 투하하여 평화적 주민을 즉사시키고 83명을 중독시켰다고 했다또 그해 2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2개월 동안엔 미군 보병부대들이 질식성 및 최루성 가스탄을 41차에 걸쳐 아군 진지에 발사하는 등 화학공격은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강조했다.

 

미국 세균전의 숨은 그림찾기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의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한 국내외 언론과 학자들의 분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선구적 역할을 한 이는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그러자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는데 파월은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파월은 세균전 문제 추적을 계속해 1980년엔 2차 대전 직후 미국 정부가 일본 세균전 전범과 거래한 증거가 담긴 맥아더 사령관 관련 비망록을 입수해 <참여 아시아 학자 회보(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에 폭로하기도 했다여기엔 세계에서 처음 실시된 주요 생물학전 프로그램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었다맥아더와 비망록을 주고받은 이들은 정보 보좌관인 찰스 월러비 소장법률 고문 알바 가핀터 등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세균전 커넥션의 절정은미국이 1947년 마루타로 악명 높은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 출신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를 얻기 위해 그들과 직접 거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이는 2005년 8월 14일 당시 일본 가나가와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이찌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해제 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알려졌다당시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 조건으로 15~20만 엔을 주고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한 것으로 드러났다이 금액은 현재 2000~4000만 엔(약 2~4억원)에 이른다.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전쟁범죄에 대한 사면을 서면으로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이다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는데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두 저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진과도 인터뷰를 했다.

 

국내 연구물로는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1996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에서 10번째 주제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을 다뤄 주목받은 바 있다.

 

출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8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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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였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시끄러웠던 그해 10월 국내 인터넷상에서 중국의 발언에 크게 불쾌함을 느꼈던 국내 네티즌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그 이유는 바로 중국의 시진핀 정부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항미원조라는 표현을 썼고이를 중국 사람들이 옹호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런 문제가 한국 연예계까지 퍼지며 상당히 큰 사회적 논란으로 까지 번졌었다물론 나는 중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다소 타국이나 타인에게 무례한 행동을 안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또한 타국 역사나 문화에 대한 중국의 역사왜곡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다.

(항미원조 중국 포스터)

 

예를 들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김치 및 한복을 자신들의 고유문화로 설명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큰 불쾌감과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그것이 당연히 잘못됐다고 본다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중국의 문제점이 그들이 표현하는 항미원조와 묶이며항미원조라는 표현까지 역사왜곡으로 묶어서 보는 국내의 언론이나네티즌들의 입장과 태도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며항미원조라는 표현 자체가 근거 없는 역사왜곡이 아니라고 본다.

(시진핑의 역사왜곡?????)

 

많은 사람들이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전쟁 즉 한국전쟁은 얼마든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한국에서는“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한다반면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그리고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즉 한국전쟁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의 차이이지 역사왜곡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 국내에서 보도된 뉴스)

 

그렇다면 중국에서 얘기하는 항미원조전쟁이라는 표현이 과연 어떻게 해서 역사왜곡이 아니고 틀린 표현이 아닌 것일까그 이유는 20세기의 아시아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의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고, 1949년 공산당이 승리했다승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고중국은 이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을 대신해서 참전했다.

(국내에 출판된 항미원조 관련 서적)

 

이들이 참전한 이유에는 미국의 군사적 전략과도 연관이 있다우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 아시아 라인은 한반도와 일본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까지 연결되어 있었고미국은 한반도와 대만 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 북부 지역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 전략적 방법이었다특히 인도차이나의 경우 미국은 프랑스의 식민주의 전쟁을 지원했고그것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호치민 정부를 군사적으로 탄압했다마찬가지로 대만에서도 미국은 장제스를 지원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게 됨에 따라 미국이라는 세력은 중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 왔다.

 

즉 이런 부분에서 보았을 때시진핑이 항미원조를 운운하며 미국의 제국주의를 격퇴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다오히려 이것은 한국전쟁을 단순히 김일성의 침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합리화 하려는 이들이 다양한 역사적 예시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실제로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였고트루먼 독트린은 그 제국주의적 행위의 시발점이었다따라서 필자는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중국이 항미원조 전쟁을 주장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왜곡된 시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필자는 중국 네티즌들이 BTS와 같은 한국측 연예인들에게 어떤 무례를 범했는지와는 별개로중국의 항미원조론 자체가 역사왜곡이라는 시각은 논리적으로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따라서 항미원조는 역사왜곡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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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폭격하고 있는 미공군의 B-29 폭격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개됐던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으로 끔찍하고도 처참한 전쟁이었다남북을 합쳐 수십만의 병사가 사망했고, 3만 6,000명 이상의 미군과 20만 이상의 중국군이 전사했다민간인 사망자는 남한과 북한을 합쳐 최소 150만에 달하며많게는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은 남북한 전역을 초토화시켰고민중들의 삶도 피폐하게 만들었다이 전쟁을 파괴적인 전쟁 그리고 대량살상적인 전쟁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이 침략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너무나 즉각적이었는데전쟁 초기부터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일부지역을 폭격하기에 이르렀다미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당시연합군에게 막강한 화력을 지원했다이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고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또한 미군의 폭격은 1950년 10월 25일에 참전한 중공군에게도 공포를 안겨주었으며이것은 중공군이 주간보다는 야간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반격하여 다시 전쟁이 원점으로 돌아온 시점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폭격은 1951년 휴전회담이 시작되는 시점에도 지속됐고사실상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까지 지속됐다심지어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심양이나 단동과 같은 중국 영토에도 미공군의 폭격이 있었다쉽게 말해 전쟁 당시 북한은 미공군의 폭격을 3년 동안이나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북한 지역)

 

폭격은 참으로 끔찍했다이 분야를 깊게 연구한 김태우 교수의 저서 <폭격>에 따르면 당시 미공군은 평양원산흥남함흥청진나진성진 등의 대도시들을 주로 폭격했다그 이유는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못 가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와 도로 및 철도 그리고 병력 이동로 및 숙소 등에 폭격 전쟁 수행의지를 꺾기 위함이었다쉽게 말해 전략폭격을 한 것이다물론 이것은 말이 전략폭격이었다. 1950년 7월 6일과 13일에 있었던 원산폭격은 그 피해는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대량 확산된 양상을 보였다. 7월 13일에 있던 폭격으로만 원산에서 1,249명의 민간인이 희생됐고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 125명은 어린이였으며, 122명은 노인이었다미군의 폭격을 초기에 받았던 항구도시 원산은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폭격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미군의 폭격은 북한 북부지역에 있는 신의주에서도 발생했다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한지 2주정도가 되던 1950년 11월 8일 미공군은 신의주를 폭격했었다당시 미군 소속 항공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 폭격했다이 폭격은 신의주를 향한 최초의 공중폭격이었는데당일 폭격으로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됐다또한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호가 파괴되었다. 11월 8일에 있던 폭격으로 최소 5,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고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최근에 출판된 김태우 교수의 <냉전의 마녀들>에는 북한지역을 조사했던 국제여맹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그 내용을 인용하겠다.

 

“ “전쟁 전에는 어디에 사셨죠?” 누군가가 물었다.

 

이 부근에 살았어요.” 그녀는 흑갈색의 빈 공터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 세개의 제대로 된 집이었는데모두 불타버렸어요그 안에 있는 것들까지 모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아요.”

 

운이 좋다고요?”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심중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에 따스함이 서렸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주 온전하잖아요화재를 피해 달아날 때 비행기들이 기총소사를 했어요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죠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정말 행운이었죠.”

 

이 여성 외에도 많은 신의주 시민들이 소이탄 폭격으로 당시의 저공 기총소사(strafing)에 대해 증언했다조사위원들은 이 기총소사로 인해 신의주 시내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불타버린 것으로 파악했다.”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1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미공군은 1950년 6월 29일부터 휴전 발효 1분 전까지 끊임없이 폭격을 했는데이 전쟁 기간에 이북 지역에 투하된 폭탄은 총 47만 6천 톤이라고 한다브루스 커밍스가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기간 동안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여기에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추가되어 총 66만 5,000톤에 달하는 폭탄을 한국전쟁에서 투하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으로 일본의 60개 도시가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마을 지역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1952년 당시 매슈 리지웨이를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마크 클라크는 그해 6월부터 북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게시했다이때 북한의 수풍댐이 연속공격을 받아 북한은 전력의 90%를 잃었고, 7월에는 평양공습이 하루에 1,254회에 달했다고 한다당시 북한의 평양 방송은 7,000명이라고 보도했었다미공군의 이 공습은 효과적인 폭격 성과를 만들기 위해 중국 국경도 침범했었으며항공모함 4척과 5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됐다당시 파괴된 수풍댐에는 900톤에 달하는 폭탄이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총 100만 명에 달하는 북한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것보다 더 많이 전사자를 추정하는 통계도 있다이런 3년간의 폭격으로 북한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초토화 됐다또한 민간인 사망자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미공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공습에 사용한 폭탄보다 3배나 많은 양의 폭탄을 북한 폭격에 사용했다미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공군의 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출처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73~74

(가족을 잃고 애타게 울고 있는 북한 여성)

 

이처럼 북한을 향한 미공군의 폭격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그러나 여기서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그것은 바로 이런 미공군의 폭격이 단순히 북한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했다고 한다그 외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도 빈번히 발생했고당연히 이런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있던 폭격으로 인근 지역 민간인 피해자들도 속출했었다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김태우 교수의 신간 <냉전의 마녀들>)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출처이현상 평전 p.386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남한과 북한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 피해와 살상을 야기했다따라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이라는 주제는 절대로 제외할 수 없으며한국전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할 주제이다.

 

참고문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김성보 기광서웅진지식하우스, 2004

 

이현상 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 2007

 

폭격김태우창비,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저), 정소영(역), 창비, 2018

 

냉전의 마녀들김태우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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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25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본 KBS다큐영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일본에서 제조한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영상을 봤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읽지 못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다니 놀랍네요.
 

1. 들어가며

(1945년 연설하는 여운형, 일설에 따르면 그는 연설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중에는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 조선도 있었고, 1940년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 까지 5년간 일제의 통치를 받았던 베트남도 있었다. 많이들 한국과 베트남이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한 얘기들의 근거는 아무래도 한국과 베트남이 남북 분단되어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하노이 바딘광장 연단에 오른 호치민,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로 상당히 탁월한 정치능력과 대중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반면, 베트남은 1975년에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면서 분단을 극복해냈다. 이 점이 바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졌으나, 일본이 패망한 해방정국 시점에서 두 국가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려 했는지에 대해선 제법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국가 모두 주체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1945년 당시 해방정국을 주도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Ho Chi Minh)의 활동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또한 여운형의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호치민의 조직 베트민을 비교함으로써, 전자는 왜 실패했고 후자는 왜 성공했는지도 분석해보려는 목적도 있다.

 

2. 여운형과 호치민의 간략한 생애

 

여운형과 호치민은 그 시기 각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시점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조국의 명망높은 독립운동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주체적인 독립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도 선명하게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얘기를 하기 위해선 우선 여운형과 호치민이 어떠한 생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양평 몽양 여운형 생가, 현재는 경의중앙선인 신원역에 위치해있다. 몽양 여운형 생가 및 박물관은 201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만능 스포츠인이자 조선의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은 화려한 생애를 가지고 있다. 여운형은 1886525일 경기도 양평의 몰락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1900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제학당에 입학했던 그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을사조약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집안에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대담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은 여운형은 일제의 식민지배 초기 중국 난징에 있는 금룽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여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등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한 사건이다. 이 사건 또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던 여운형이 주도했다.)

 

이후 임시정부에 들어간 그는 일본 고관들과의 회담에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며,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직접 만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도 투신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에도 가담했었으며, 국제적으로 여러군데를 다니고 여행한 인물이었다. 1929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점부터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뛰어난 국제정세 판단력을 가졌던 인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1944년 건국동맹을 만들어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으며, 194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했다.

(조선건국동맹 깃발)


(배우 신구가 연기한 여운형,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다.)

 

1945년 일본의 패망한 이후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만들어 해방정국을 주도했으며, 한반도 북부에 소련군 남부에 미군이 들어온 상태에서도 민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에는 분열된 좌우의 합작과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으며, 괴한들의 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응에안 성에 있는 호치민 생가, 호치민은 1890년 여기서 태어났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의 응에안 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을 돌아다니다 프랑스가 세운 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1911년 프랑스 측의 상선 보조로 취직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프랑스와 미국, 영국,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등을 여행했다. 그러던 1917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한 길을 걷게 되었으며,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던 때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안남민족 8개 요구를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직접 제출했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호치민)


(베트남 독립 동맹 대원들, 1941년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다.)

 

1920년부터는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23년 모스크바로 넘어가 소련 코민테른에서 훈련받았고, 이후 중국 광저우에 정착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 및 교육 활동 그리고 조직 창설활동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호치민은 1930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했다. 1930년 반불봉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엔 다시 소련에서 유학하다 중국으로 돌아왔고,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하여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 베트민을 창설하여 항불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나중에는 미국 OSS하고도 협력하여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했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 패망 시점에 맞춰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켰고, 194592일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호치민은 이 승리를 통해 프랑스를 몰아냈다.)

 

그 이후에는 프랑스가 다시 쳐들어오자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의 100년 식민 지배를 종결시켰다. 그 이후 미국이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주의적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세워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미국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다. 그러던 19699279세의 나이로 서거했으며, 호치민 전기를 쓴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의 표현대로 그의 연설과 글들은 베트남이 미국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따라서 여운형과 호치민 둘 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진보적인 색채를 가진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 그리고 강제해산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한 것은 1945817일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 2일만의 일이었고, 초기 해방 정국을 몽양 여운형이 주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1944년 그가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바탕을 둔 조직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194248일 미국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둘리틀 공습을 도쿄에 가했을 때, 여운형은 이를 직접 도쿄에서 목격했다. 또한 그는 당시 이승만이 하고 있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었었고, 일제가 은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전황과 해외 독립운동의 상황을 주변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이런 이야기는 급속히 확산됐고, 그는 결국 1942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1943810일 조동호·이상도·이상백 등과 같은 인물과 만나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직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의했는데, 이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1년뒤인 19449월에는 새로운 단체로 확장 및 탄생했다. 그 조직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810일 서울에 있는 현우현의 집에서 건설됐다. 건국동맹은 ‘3불맹서라는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했고, 두 달 뒤인 108일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 용문산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 여운형은 또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 바로 농민동맹이었다. 농민동맹 또한 조선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고, 징병 및 징용자들을 도피시키고 그들을 반일운동을 전개하게끔 활동하고자 했다. 건국동맹의 규모에 대해선 다소 논란이 많다. 여운형에 대해 가장 방대한 연구서를 집필한 이정식 교수는 건국동맹 단원이 수만 명이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며, 일제말기의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파업을 하고 있었다면 모르되 수만이 아니라 수백 명의 맹원을 가진 단체마저도 조직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어쨌든 조선건국동맹은 조직적으로 활동했고, 여기에는 이후 한국의 통일운동가 이기형 선생이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토너인 손기정도 관여했다.

 

1945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거침없는 진격을 하자 일본은 긴급히 협상할 대상을 찾았다. 처음에는 우익 민족주의자 고하 송진우와 접선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총독부는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회담에서 여운형은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1.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 생활지인 경성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하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의 추진력인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라.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케 하라.

 

엔도 총감은 이 조건들을 아무런 이의없이 다 승낙했고, 이것이 바로 여운형이 8.15 직후의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치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중책을 맡게 되었던 배경이었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방송이 있자,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있던 계동으로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운형의 딸인 여연구 여사의 회고록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 따르면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방안과 마루, 마당에 사람들이 꽉 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816일 여운형은 현재 휘문중학교에 가서 우렁찬 연설을 했다. 연설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하는 여운형)

 

조선민족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어제 15일 아침 나는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중략)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했습니다.(중략)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라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고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분란의 단결로 나아갑시다.”

 

다음날인 817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했다. 여운형은 첫째로 치안을 확보하고, 둘째로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을 일원화하고, 셋째로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을 우선적으로 강구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건국준비위원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확히 알렸다. 이에 따라 건준은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조직된 지방 건준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한반도 전역에 창설됐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하기 며칠 전부터 한반도 이북에 들어왔는데,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창설되자 이들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는 그 지역 좌파들도 있었으나 우익 성향의 고당 조만식과 같은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이북지역에서의 건준 및 인민위원회 활동은 2006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묘사된 적이 있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부,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초기 전국적으로 설립됐다.)

 

건준이 창설됨에 따라 각 지방의 유지들은 치안대, 보안대, 또는 유사한 이름의 단체를 구성하여 경찰관들을 밀어내다. 8월 말에는 남북을 통틀어 전국 145개소에서 건준의 지회 또는 분회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건준 활동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광범위했기 때문에, 199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다. 건국치안대의 경우 청년학생 2,000명을 동원하여 서울의 치안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지역별 및 직장별 치안대를 조직하여 각각 그곳의 치안을 유지케 하고, 중요 자재 및 기관사들과 특히 수원지 등을 보호케 하였으며, 전기회사 및 철도국과 연락하여 교통 원활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소련군 사령관을 만난 고당 조만식)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치안대 본부는 후에 중앙에서 파견된 인원에 의하여 조직된 것과 현지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중앙의 추인을 받은 지부가 전국에 걸쳐 162개나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 남북을 아울러 좌우연합체로서 결성된 건준은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청산 작업에 착수하기도 했다. 실제로 초기 북한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이 구금되거나 처형되고 그리고 대다수가 남으로 도망친 이유에는 이러한 작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항복했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있었고, 친일파들을 청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기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어쨌든 해방정국 초기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준이 활동하면서 친일파와 일제의 힘은 약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준은 좌우연합체였다. 그러나 건준은 초기에 몇몇 문제를 겪기도 했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대거 편입되면서 생긴 좌경화 현상이었다. 당시 건준의 핵심 멤버였던 안재홍과 같은 우익인사들이 박헌영을 포함한 조선 공산당 인사들의 참여하면서 탈퇴했고, 좌우연합의 색체가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건준은 좌익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좌파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우익적인 인사들을 축출하고 해게모니를 장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좌우연합이라는 문제에선 아닐 것이다.

(서울에 진입한 미군들, 이것은 또다른 점령의 시작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여운형은 9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94598일 첫 미군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했고, 남한 땅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다음날인 9일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미 제7사단에 있던 총지휘관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렸던 존 리드 하지였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을 갖고,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린 뒤 성조기를 올렸다. 이로써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점령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포고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2.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3.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여운형이 건설한 인공하에 있던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탄압하고 짓밟는 대신, 친일파들이 몰려있던 한민당과 일제 경찰출신과 군인출신인 이들을 해방 정국의 행정요인에 앉혔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주도했던 해방정국의 헤게모니는 건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갔고, 미군정이 주도하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마오쩌둥 1차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 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했던 에드가 스노(Edgar Snow)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4. 베트민의 8월 봉기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탄생

 

194592일 하노이 바딘광장은 수만 명 혹은 수십만 명의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조국의 탄생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하노이 바딘광장에는 한 인물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그는 빛을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시작과 같았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꾸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중월국경지대 까오방에 있는 팍 보 동굴, 호치민은 이곳에 있던 산봉우리를 마르크스 산봉우리라 했고, 시냇물을 레닌 시냇물이라 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베트남 인민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했던 호치민은 1941년 조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중월국경지대에 있는 팍 보(Pác Bó)라 불리던 동굴에서 한 조직을 창설했다. 그 조직의 명칭은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1940년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베트남을 점령했다. 당시 베트남의 일부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을 해방자로 맞이하는 큰 착각에 빠졌었지만,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달랐다. 19415월 베트민의 권리 호소문을 보면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1. 전민단결!

2. 무장궐기!

2. 항불항일!

4. 베트남 독립!

 

이런 점에 있어서 호치민은 선경지명이 뛰어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하여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19439월에 석방됐다. 이 시기 호치민은 전설적인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에게 베트민의 군대를 양성하도록 했는데, 이에 따라 194412월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그리고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미국과 협력하여, 베트민 부대들 중 일부를 OSS에서 훈련받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초래된 대기근으로 150~200만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하자, 베트민은 일본군 창고를 습격하여 쌀을 농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OSS와 호치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와 호치민의 협력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룬 서적이다.)

 

실제로 OSS와 협력관계를 구축한 베트민들 중 일부는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소련군의 베를린 해방과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을 기점으로 급변했다. 특히나 19458월 원폭투하와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베트남 정국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5개월 전 기존 프랑스 정권과 협력하던 일본은 3월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황제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는데, 기근으로 민심이 이반되자, 민중들 대다수는 독립세력인 베트민을 지지하고 있었다. 8월이 되자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혁명을 준비했다. 당시 혁명을 준비하며 했던 호치민의 발언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온 힘을 모아 일어서자!

 

전 세계 수많은 피압박 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다투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진! 전진! 베트민전선 깃발 아래 용감하게 전진합시다!”

 

당시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의 군대는 급속히 성장했다. 194412월 몇 백 명의 대원으로 시작했던 베트민의 군대는 1945년 초중 순에 수천 명 단위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군대의 숫자는 혁명 과정을 거치며 민중이라는 파도 속에서 더 급속히 증가했다. 1945812일 총봉기를 결정한 호치민의 부름에 따라 베트민은 봉기를 준비했고, 천황 항복 다음날인 816일에 혁명을 시작했다. 이 봉기를 이른바 8월 혁명(Augus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신속히 진행됐다. 북부에서는 하노이. 중부에서는 후에, 남부에서는 사이공에서 베트민이 주도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전국적으로 총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819일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8월 혁명으로 베트민 깃발이 걸린 하노이, 8월 혁명은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하여 급속히 전개됐다.)


(바오다이 황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더 나아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823일에는 바오다이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이에 따라 베트민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시위대는 농촌인민과 도시인민이 섞여 제국주의자 타도, 프랑스 식민주의자 타도, 베트남을 베트남인에게, 모든 권력을 베트민으로등과 같은 혁명적인 구호를 외쳤다. 이 시기 베트민은 지역권력을 장악하고 인민혁명위원회를 수립했으며, 권력까지 장악했다. 북부 하노이와 중부 후에에서의 봉기는 사실상 무혈봉기에 가까운 승리였다. 다만 남부의 경우 까오다이와 같은 친일조직과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월 말 바오다이 폐위 결정에 따라 825일에는 남부의 중심도시 사이공까지 베트민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장악하게 됐다.

(응우옌 칵 비언이 쓴 베트남사, 1990년대에 나온 이 책은 베트남 통사로써 전반적인 베트남 역사를 다루고 있다.)

 

8월 혁명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학자 응우옌 칵 비언(Nguyễn Khắc Viện)“1945년 당시 8월 혁명은 80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시켰고, 군주제를 폐지시켰으며,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했다.”<베트남 오래된 역사, Vietnam A Long History>에서 주장했다. 팜마이흥(Pham Mai Hung)“19458월 혁명은 베트남 민족의 영광스런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는 몇몇 역사의 장 가운데 중요한 한 장.”이었다고 평가 내렸다. 1971년 베트남 전쟁 당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전 세계에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에서 북까지 통일됐다.”

 

따라서 호치민과 베트민이 주도한 8월 혁명은 이런 점에서 의의가 정말 큰 하나의 혁명사적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연설하는 호치민)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에서 해방정국을 주도한 베트민은 92일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민주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이었다. 194592일 이미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만든 붉은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4592일 오후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치민은 미국 자동차를 타고 하노이 바딘광장으로 향했으며, 도착하여 자신이 준비한 베트남 독립 선언(Declaration of Vietnam Independence)을 낭독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에게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있다. 1776년 미합중국 독립선언문에 둥장했던 불멸의 문구입니다. 더 넓게 해석한다면, 모든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살 권리, 행복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다는 말입니다.(중략)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는 세상을 향해 엄숙히 선포합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사실상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민족이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이로써 베트남에는 호치민의 주도로 독립국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하노이시는 붉은 깃발이 뒤덮었고, 베트남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러로 쓴 슬로건을 적은 현수막이 길거리마다 내걸렸다.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 프랑스 식민주의 타도, 독립 아니면 죽음, 임시정부를 지지하라, 호치민 주석을 지지하라, 연합국 사절단 환영등과 같은 구호를 담은 현수막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북위 16도선으로 가르고, 북부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했다. 이 과정을 틈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베트남을 침략해 들어왔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식민주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호치민과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됐다.

 

5. 해방정국에서의 여운형과 호치민 차이점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의 여운형과 호치민의 활동을 정리했다. 19458월 일본의 항복은 여운형도 호치민에게도 큰 기회였고, 두 인물 다 해방정국을 주체적으로 주도했다. 여운형은 1944년 자신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시켜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며, 남과 북 좌와 우를 망라했다.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는 145개의 지부와 분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전 대통령인 김대중 또한 젊은 시절에 가담했을 정도로 유명하고 대중적인 조직이었다.

(YMCA 건물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때 강연하는 여운형)

 

호치민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고, 실제로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미국 OSS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황 속에서 신속하게 8월 혁명을 주도했으며,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를 단기간에 장악했다. 이런 대중적 기반을 통해 호치민은 19459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8월 혁명에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기반과 행정이 잡인 국가 탄생으로 이어졌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그리고 혁명동지들)

 

여운형과 호치민은 해방정국을 단기간에 주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결정적인 차이점이 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여운형의 경우 무엇보다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조직적인 군대가 없었다. 건준 조직도 어디까지나 치안대였을 뿐, 일본군 자체를 자력으로 무장해제 시킬 정도의 역량은 없었다. 조만식이 주도했던 북조선의 건국준비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초기 한반도 북부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사실상 전투를 치르며 진격해나간 소련군이 했다. 따라서 194598일 미군이 상륙하여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자 무력하게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을 선두지휘하는 양복입은 보 응우옌 잡 장군, 베트민은 독립운동 단체이자 강력한 군사조직이었다.)

 

반면에 호치민은 초기부터 군대양성에 주력했다. 이미 1945년에 1만 명 가까이나 되는 정규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8월 혁명 과정에서 일본군 무장 해제를 베트민의 군대를 통해 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군대를 지속적으로 양성했고,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당원의 숫자도 늘었는데, 보 응우옌 잡에 따르면 “1945년 총봉기의 날에는 당원이 단지 5,000명에 불과했으나, 1951년에는 760,0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군대의 성장도 이런 식으로 증가했다. 그 얘기는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


(한때 분단되었던 베트남)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19459월 미군정이 들어와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무기력하게 해산되었던 것에 반해, 중국 국민당군과 영국군 그리고 프랑스군이 들어왔음에도 호치민은 주도권을 외세로부터 빼앗기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까지도 베트민과 프랑스측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민은 외세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었던 반면, 한반도의 운명은 미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됐다. 물론 여기에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이 군대를 양성하는 인물보다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정치인이라는 점도 작용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의 운명은 미군정의 염원에 따라 한국의 응오딘지엠인 이승만이 주도하는 판국이 됐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여운형과 호치민 두 인물 다 진보적이고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았느냐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6. 마치며

 

이 글은 여운형과 호치민 누가 더 훌륭한가?’ 혹은 누가 더 옳았는가?’를 평가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차이점과 과정이 있었기에 해방정국의 판도가 한쪽은 집권성공 한쪽은 집권 실패로 갔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사람들이 비교적 역사부분에서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 부분을 재조명 내지는 재해석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따라서 내 주관적 관점도 많이 투영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여운형과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좋아하고 있고, 두 인물을 깊이 존경하기에 이러한 비교분석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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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찰스 펜, 김기태(), 자인, 200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

 

여운형 평전, 이기형, 실천문학사, 2004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여운형, 이정식,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프레시안북, 2009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 2013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몽양 여운형 평전, 김삼웅, 채륜,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26일 동안의 광복, 길윤형, 서해문집, 2020

 

Vietnam a long history, Nguyen Khac Vien, The Gioi Publisher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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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15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브루스커밍스 읽었습니다.
페이퍼가 논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NamGiKim 2021-08-15 10:02   좋아요 1 | URL
논문형식을 따르고 있죠?ㅎㅎㅎ a4로 10페이지 이상 분량입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