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이 한참이던 2015년 국내에 있는 오월의 봄 출판사에서는 좌파계열 미국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책 <한국의 민중봉기>를 번역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봉기를 재조명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로 저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의 자료와 분석을 적절히 비판 및 분석하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책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9506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War of National Liberation)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전쟁을 북한과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인정하는 역사관은 단순히 조지 카치아피카스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를 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박명림 교수를 중심으로한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했지만,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나 또한 과거 커밍스가 쓴 저서를 읽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최근에 보게 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는 커밍스보다 훨씬 더 과감한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아니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관점을 좌파적 입장에서 여러 근거를 밝혀가며 비판한다.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1968년 당시 이른바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가 미국 FBI에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광주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러 사회운동과 역사학적인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전남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보내기도 했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의 훌륭한 학자라면,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적 성향을 가진 좌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625일에 일어나고 난 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첫 라디오 연설은 바로 한국과 미국이 포기한 지역에서 즉각 인민위원회를 재건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627일부터 민중들은 연백에서 15인 인민위원회를 세웠고, 한달 안에 수백 개 마을에서 비슷한 선거가 이루어졌으며, 선출된 대의원들은 읍·, ·, 도 단위 정부 당국의 대표자들을 뽑았다고 한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에 주둔한 미군 항공병력의 출격이 없었다면, 조선 인민군이 해방자들을 환영하는 대중적지지 속에서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한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공군 개입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생각은 틀리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초기에 개입한 미군 공군 병력은 북한의 원산과 평양 등에 전략폭격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남한의 보수 논객들은 대부분 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지만, “어떻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침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1950625일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날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고 한다. 우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항상 한반도 전체의 통제를 약속했고, 그 밑의 장군들은 계속해서 38선 너머로 북한군에 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1949년 한 해에만 북한군 병사 수백 명이 살해된 2,617건의 공격이 있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이미 전쟁이 1950625일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커밍스가 가진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다.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 하에서 5년간 무려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른바 작은전쟁을 통해 학살당했다. 심지어 홀거 하이데라는 인물은 이것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인 2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해석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육해공에서 체계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한 것과는 달리, 북한군 병사들은 대부분 규율이 잡혀 있었고 잔인한 공격을 자제했다고 한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조선인민군 장교의 80% 이상이 중국에서 활동했고, 1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투 경험을 했다고 추정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10만 이상의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 혁명에 동참한 이후 북한에 파견되어 조선인민군이 되었음을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강조한다. 더 나아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한정하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을 길게 인용하겠다.

 

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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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 혹은 휴양지로 손꼽히는 제주도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한 현대사를 경험했다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들이 제주도를 군사기지화 혹은 요새화했고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혹한 대학살이 일어났는데그것이 바로 제주 4.3항쟁 혹은 제주도 대학살이다많은 사람들이, 4.3사건을 4.3항쟁이라 부르기도 한다과거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에는 4.3 폭동이라 칭했지만민주화 이후에는 제주 4.3 사건 혹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르게 됐다나 또한 4.3을 제주 4.3항쟁이라 자주 부른다그러나 이 글에서는 제주도에서 자행된 학살에 초점을 두었기에일부러 제목을 제주도 대학살이라 표현했다.

(제주 4.3 70주년 카드뉴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상륙했다해방 이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주적으로 설립됐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아래서 72개의 화학 및 제조업 공장이 제주도에 세워졌는데일제가 패망한 이후 며칠 만에 72개 기업 모두가 접수되어 인민의 자주적인 관리를 통해 운영됐다그러나 이런 자주적인 활동은 미군이 상륙하면서 제지당했다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인 9월 23일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됐고이 인민위원회는 남한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사실상 평화롭게 행정과 치안을 이어나갔었다.

 

1945년 11월 9일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도 제주도 지역은 잘 운영됐고심지어 1947년 10월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는 제주도는 코민테른의 별다른 영향 없이 인민위원회가 평화적으로 통제하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그러나 이런 평화적인 단체와 지역을 피로 물들이고 억압을 행사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을 기반으로 행정과 경찰력을 증원했다이러한 조치는 당연히 제주도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8월 미군정은 제주도를 독자적인 도로 분리했고우익출신 경찰들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증원했다.

(제주 4.3 당시 산간지대로 피한 민간인들)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발발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군과 우익 경찰에 의해 죽고 체포 당하는 일이 생겼다제주도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없었지만, 1947년에 들어서면서긴장이 고조됐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도 3.1절 집회가 열렸다최소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결집했고평화시위가 벌어졌다군중들이 결집하자미군정은 경찰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다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시위군중은 경찰이 탄 말에 인명피해가 생겼고이에 항의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저항했다그러자 경찰은 총을 사용했다경찰이 발포한 총에 최소 6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더 많은 수가 부상 당했다이에 항의하기 위한 차원으로 시위 군중은 일주일 후에 경찰에게 항의 시위를 했고경찰의 또 다른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3.1절 시위로 최소 16명이 살해됐고, 22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미군 소식통은 보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을 선포하여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반공주의적 지원을 강화했고이러한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는 제주도민이 미군정에 맞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그 결과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발생한 전국적 파업에서 제주도는 가장 저항의 격력한 곳으로 변모했다. 1948년 3월 1일에는 이승만과 미국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청년 2,500명이 경찰에게 체포당했고체포당한 젊은이들이 고문당했다거기다 미군정의 무책임하고 살인적인 정책으로 쌀 세금이 폭등했다적어도 1947년보다 5배 이상 쌀 세금이 폭등했다이런 모순과 불합리성이 겹치면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봉기를 일으켰다이렇게 해서 제주 4.3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자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신속했고매우 잔인했다미군 부대가 부산에서 증파됐고경찰 1,700명이 추가로 파견됐다남로당측 봉기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들 간의 전투가 격화됐다초기 전투에서 진압군 측 김익렬과 게릴라 지도자 김달삼은 평화협정을 마련했지만우익 측에서 빨치산을 학살하여 협정은 무효화 돼버리고 유혈은 더 격해졌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주도의 투표 참여율은 당연히 저조했다양측의 교전은 멈추질 않았고학살도 발생했다학살의 절대다수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를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박차를 가했다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저주도 전역을 적성지역으로 설정한 뒤병력을 보내 진압했다계엄령은 1948년 11월 21일에 선포됐다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에 있던 국군 병력이 역으로 봉기하기도 했으며이것이 바로 여순항쟁의 맥락이었다여순항쟁에서도 살인적인 유혈극이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도 제주도에 파견됐다.

(이후 발견된 학살자의 유해)

 

광란의 학살극이 자행됐다특히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으며희생된 민간인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 노인 심지어 갓난아기였다진압측에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며적대지역으로 선포된 마을을 불태웠다그리고 이런 잔혹한 진압을 최종적으로 뒤에서 지휘했던 주체는 바로 이승만과 미군정이었다미군정의 브라운 대령과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경찰총장의 지휘에 있으며 강경진압을 자행했던 조병옥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 등은 제주도민 전부를 빨갱이로 규정해놓고일부를 제외한 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해놓고 학살을 자행했다특히나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학살은 정말 끔찍하고추악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당시 서북청년단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아주 잘 나와있다.

(제주 4.3 학살에서 희생된 희생자 분포 지도)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271

 

제주도 대학살에서 벌어진 학살은 무수히 많지만또 다른 대표적인 학살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1949년 1월 17일 제주도 북촌리 근처에서 진압군 2명이 봉기군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군인 2명이 사망하자진압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에 난입하여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근처 밭에서 학살했다이 학살로 최소 4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러한 크고 작은 학살들은 당시 제주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변모했고제주도에 있는 가옥 중 70%가 파괴됐다총 39,285가구가 파손되고 400개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고 한다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진압군에 의해 강간당했고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상 당했다또한 최소 4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당시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피난가기도 했다.

(현재 제주 4.3 평화공원 및 박물관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비)


(제주 4.3 사건 관련한 만화책)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85~90%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좌익들에 의학 보복 살해는 대부분의 경우 우익 경찰과 진압군과 그 일가족에 한해서 벌어졌다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참혹한 무차별 학살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휘를 받는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보통의 경우 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 시민이 학살당한 것으로 본다당시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희생된 이들은 많게는 6만 명까지도 본다그러나 한국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2016년 당시 제6회 제주 4.3 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자료에는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했다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많게는 8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소위 작은전쟁을 통해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그리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인명이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다이런 천인공노할 제주도 대학살을 벌인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을 자행하여 적잖은 제주도민을 예비 검속한 뒤에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이처럼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런 학살극의 중심에는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다이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학살은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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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미군정 통치를 거치면서, 과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들은 친미파가 되어 신분세탁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들은 학계와 정치, 군사, 경찰, 행정, 기업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내에서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그러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단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시킨 주체는 바로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19491월 반민특위는 한 사람을 체포했다. 그가 바로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18996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했으며, 졸업 후 일제 말단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순사부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여 경남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경찰에 있으면서 상승 가도를 달렸는데, 당시 일본인도 달기 힘든 경부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일제가 원하는 데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죽이고 잔인하게 고문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의 악질적인 고문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1927년 일제의 신간회 탄압이 있자, 노덕술은 신간회 간부인 박일향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신간회 탄압 당시에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아 죽은 독립운동가는 3명이나 된다. 노덕술의 고문 방식은 아주 다양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그의 고문은 일본인 형사들도 기겁할 정도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경찰이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28년 반일 학생모임인 혁조회를 적발하여 이들 회장 김규직 등 9명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리고 잡아들여 고문한 9명 중에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이에 동참한 고등학생들을 2차례에 걸쳐 구속하여 모질게 고문했다. 193251ML(Marx-Lenin)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May Day)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노덕술은 그를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구타와 함께 숱한 고문을 했으며, 그가 통영에서 1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잡혔고, 또 고문당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노덕술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나온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노덕술은 1933년에는 경부가 됐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에는 경시자리까지 올랐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식민 지배를 통틀어 21명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악질적인 친일 경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또 부패한 경찰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 이래로 노덕술은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으며, 일제 공훈 기록으로만 따져도 노덕술은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841938년에서 1940년에는 104회에 달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0만 원이나 되는데,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일 인사로 지목되 구금당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으며, 미군정 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는 정책을 실행하게 되면서,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날개를 피게 해줬다. 194646일 우익 거물인사인 송진우 암살범들을 검거한 공로로 노덕술은 경찰 수뇌부에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에 있던 정판사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놀랍게도 이관술은 노덕술에게 일제시대때 총 3번이나 고문을 당했다. 그 외에도 노덕술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여운형 암살 배후에 있던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약산 김원봉은 19472월 자택에서 볼일을 보던 중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명분은 바로 미군정 포고령 위반이었다. 해방 된 땅에서 악질 친일 경찰이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탄압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노덕술은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자, 노덕술은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를 찾아, 반민특위와 연관된 이들을 사전에 죽이려 했다. 노덕술이 사전에 죽이려 했던 인물들 중에는 김병로나 신익희 그리고 김상덕과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던 반면,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극우 반공주의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백민태라는 인물이 반민특위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은 체포당했다. 노덕술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그를 지원해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대통령 이승만이다. 결국 이승만의 도움으로 그는 풀려났고, 반민특위도 이승만에 의해 해체됐다. 이승만은 노덕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한국전쟁이 있던 1950년 노덕술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중령이 됐고, 육군 제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 주한 미대사 무초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서한에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그랬던 노덕술이지만 1955년 돌연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가 밀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노덕술은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으며, 1960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호의호식 하다가 19684169세의 나이로 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덕술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만든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덕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모순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박처원과 이근안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 친미파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고,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악질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킨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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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과 이승만, 본인 스스로 백두산 호랑이라 칭하던 김종원은 이승만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이 말하는 애국이란 이런 학살자들과 친일파들을 앞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우익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한국전쟁에서만 대략 70만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국민 보도연맹 학살만 하더라도 최소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과 그 지지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에서는 1948년 여순항쟁 시점부터 소위 빨치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여순항쟁 이후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인 이유는 분명했다이승만과 미국이 여수와 순천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던 김종원은 1948년 여순항쟁 당시진압군을 지휘한 김종원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민간인들을 뫃아놓고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그는 직접 나서서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즐겨 벳고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쏘아 죽였다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김종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었던 것이다.

(최덕신,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같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나서도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이승만 정부는 또 다시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고, 38선을 돌파하여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이러한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발생했으며특히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 지역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1951년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재점령하며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을 하던 시기또 다른 양민학살이 한국군과 우익들에 자행됐다그것이 바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다.

(거창양민 학살 당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시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일대로 숨었고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순창·정읍·남원·장성·구례등 호남일대와 거창·산청·함양·합천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한국군의 단독적인 38선 돌파 이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2일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빨치산 출몰 지역에서 토벌에 나섰다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숨어있던 빨치산들은 신원지서를 습격했었으며 이에 따라 경찰과 군인 몇 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학살을 나타낸 박물관에 있는 모형)

 

이에 따라 한국군은 거창과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이른바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했고, 2월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195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진입했고인근 지역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여기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류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동시에 마을 집들도 모두 불태웠다놀랍게도 이러한 전략은 만주에서 일본군이 했던 전략이고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과 왕당파들이 했던 전략이며제주 4.3 항쟁 당시 한국군이 했던 전략이다또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거창에서만 719명이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은 전부다 죄없는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노인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심지어 1~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여성이 51.3%였고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이외에도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학살당했으며총 1,424명이 학살당했다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최덕신이었다그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다가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월북했다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경남 거창에 있는 희생자들 묘비)

 

그러나 한 달 후인 1951년 3월 학살 소식을 들은 신중목은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으며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결코 덮지 못했다여순항쟁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던 김종원도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그는 자신의 병력을 빨치산으로 위장하여조사단에게 따발총(PPSH-41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상조사 초기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지만결국 진상조사를 실시했고오익경한동석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을 선고했다그러나 총 책임자인 최덕신은 처벌받지 않았으며김종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으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 1년 내로 석방됐다이 사건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민주화 이후에 다시 조명됐다.

 

참고문헌

 

김삼웅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임기상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인문서원, 2015

 

임종금대한민국 악인열전피플파워, 2016

 

손호철'작전명령 5'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프레시안, 2021.03.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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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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