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은 정통성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두고 있으므로, 국군도 독립군 또는 광복군에 정통성을 두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군사에서 군사영어학교나 국방 경비대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있어도 광복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미약하다. 국군은 미군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까지 국군의 고위 지휘관은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이었다. 군은 반민족행위처벌법도 어쩌지 못하는 성역처럼 취급되어 악질 친일 경찰의 도피처가 되었다.

 

주한미군은 1945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광복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초급 장교들을 주로 선택했다. 다음 해 4월에 폐지된 이 학교는 통역과 관련해 군사영어교육에 치중했으나, 국군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 학교 졸업자 110명은 교육 기관 중 임관되어 육군 군번 1(이형근)부터 110번을 부여받아 대개 30대에 별을 달았고, 20대에 별을 단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육군 참모총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군 요직을 독차지했다.

 

미군이 창설한 국방경비대는 정부 수립 후 육군으로 재편되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통신학교, 공병학교, 보병학교, 포병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교육 과정이 확대되면서 1952년에 4년제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열어 11기가 신입생이 되었다. 미국의 육군지휘참모대학을 본뜬 육군대학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미국의 국방대학원을 본떠서 만든 국방대학원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미군은 장교 교육을 시켰다. 각급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야전 훈련장에서도 미군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백선엽처럼 정보장교들이 정보 교육을 받기도 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첫 번째로 정부 수립 직전인 1948811일 이형근, 장창국, 이한림 등 6명이 국군 창설자라는 애칭을 가진 하우스만 대위의 노력으로 포트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했다. 이형군은 1949년 준장 진급(28)과 동시에 주미 대사관 초대 무관 발령을 받았다. 전쟁 발발 직후 33세에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19517월 강문봉 소장(27)과 함께 미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며칠 뒤 유재흥 중장, 양국진·송요찬·이성가·백인엽·함병선·김종갑·박임항·오덕준·백남권 소장과 최경록 준장 등 3명의 준장, 2명의 대령 등 14명이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1951년부터 대규모로 미국에 위탁교육을 보냈다. 19519월에 165명이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들어가기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김종필, 길전식, 강상욱 대위 등도 있었다. 1952년에는 594, 1953년에는 829명이나 갔다. 박정희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현지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의 황국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자료에는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 4,729, 해군 920, 공군 1,503명 등 7,000여명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정부 각 부처 관리들의 미국 유학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고, 같은 시기 도미 유학생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군 지휘관중 자래가 보장되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노태우 대위는 결혼 며칠 뒤인 19596월 결혼식 사회를 본 전두환 대위와 함께 도미해 육군특수전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은 유학생에게 군사교육 못지않게 정신교육을 시켰고,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했다. 위대한 미국을 찬탄해 마지않던 유학생들은 반공정신에 투철했고, 미국의 안보와 국가 이해를 한국의 그것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희박했고, 민족의식 또한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0대 초반에 대장이 된 백선엽, 이형근과 37세에 대장이 된 정일권 사이에 파벌 갈등을 조장해 군을 장악하고자 했다.

 

1950년대 말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송요찬과 유재흥 등을 요직에 발탁했다. 그러나 세 명의 대장 중 적어도 한 명은 이승만보다 미국에 마음을 더 두었고,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1960419일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친미적인 송요찬은 4월혁명 후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5.16 군부 쿠데타 후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부부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은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여서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자 예편원까지 냈는데, 뜻밖에도 19612월 미국의 입김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5.16 군부 쿠데타의 성공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미국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19615.16 쿠데타와 197912.12 쿠데타, 19805.17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군부 통치 시대를 열었다.

 

참고자료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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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북한 김일성이 기습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 우방이 참전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켰다.”로 요약이 된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1950625일만 놓고 본다면 북한이 먼저 시작한 것은 맞는 이야기라고 본다. 1990년대 들어 박명림 교수나 정병준 교수 등이 찾아낸 소련측 기밀문서는 김일성이 1950625일에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한에서 진행된 이쪽 연구는 1980년대 당시 소위 남침유도설로 대표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1950625일이라는 날짜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아주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성과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커밍스의 책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진행되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커밍스의 저서는 한국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적 징크스를 벗어던지려 했던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만큼이나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 책을 읽었던 뜻있는 대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점을 자각하면서, 해방 후 국가 정통성 면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그런 영향을 주었던 커밍스 교수의 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자, 반박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동구권의 붕괴 속에서 흐름을 같이 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상황은 남한의 경제력은 88 올림픽을 전후로 상승했던 반면 북한의 경제력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및 교류가 끊기면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참사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거기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1991년에 해체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은 단순히 사회주의는 실패 자본주의는 생존이라는 정형화된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셈이다. 1990년대 우고 차베스와 같이 사회주의를 시도하려는 중남미의 움직임과 미국의 패권에 맞서려는 이들의 진보적인 투쟁 등은 이 정형화된 틀 속에서 외면 받았다.

 

따라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 등의 연구 또한 이런 시대적 흐름속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절대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특히나 전쟁의 기원을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 맞추어 북한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에서, 기존의 한국사회가 주장하던 김일성 침략자, 북한에게 아주 큰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보다 많은 근거를 통해 세련되게 다진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논리는 오히려 한국전쟁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 접근과 다방면적 시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사건들 중에는 그러한 논리로만 접근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생각해보자. 미국은 1950629일부터 1953727일까지 이른바 북폭을 단행했다. 미국은 대략 65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북한에 투하했고, 남한 또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북한에서만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도 남북한 전역에 투하됐다. 이런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한국전쟁 기간 자행됐고, 미군 폭격은 한국전쟁 민간인 사망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을 과연 김일성의 침략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을까? 이는 당연히 억지논리를 양산해내기 쉽다. 그 외에도 국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나 북한 지역에서 반파시즘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활동하던 국제여맹의 활동, 북한과 중국 베트남의 사회주의 반미 국제연대 등은 앞에서 언급한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시도를 당연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필자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공화국 전면적인 침공에 대해서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의 기간을 1950년이 아닌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분단이 획책된 시점부터 따진다면, 그런 북한의 주장에는 다소 부정하기 힘든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평화적으로 협력해야할 대상이 아닌 무력으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통일관은 정복주의적 통일관이었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8선을 중심으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히 있었고, 이러한 교전들 중에선 남한에게 전쟁책임을 물어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호림부대의 정탐행위가 그렇다.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아 출범한 이 특수부대는 여순항쟁 이후 지리산으로 숨은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도리어 북한 지역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원도 양양군에 침투했으며, 실제로 조선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결과 106명이 인민군에게 사살됐고, 44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게 됨에 따라, 미군은 북한관련 자료들을 노획했는데, 미국이 노획한 북한측 비디오 중에는 호림부대 재판 관련한 자료도 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모란봉극장에서 공개로 진행되어 사형이 선고됐으며, 침투되었던 이들 중 탈출하여 남하한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호국군에 편입됐다.

 

호림부대 사건은 현재 북한이 주장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의 침략행위라는 점에 있어서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을 토대로 보았을 때, 한국전쟁 발발을 1950625일에 맞춰 모든 책임을 북한에게만 전가시키는 행위는 너무나도 정형화된 사고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있던 이른바 작은전쟁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기 진행된 작은전쟁에서 최소 1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이들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홀거 하이데라는 학자는 그 수를 2배로 측정하여 1945년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2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하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며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것은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대로 전쟁의 책임을 북조선에게 떠넘기는 데 기여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만 맞춰 보기에는 오류가 많은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사회는 한국전쟁의 그 모든 책임을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떠넘기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듯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세련된 반공주의적 관점을 뛰어넘어야 할 시점이며, 그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많이 넓혀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자꾸 1950625일 북한의 침략이라는 일부 사실 관계에만 맞추려는 점은 앞으로 우리가 극복해야할 사안인 것이다. 이제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야 한다. 앞으로는 보다 더 많은 연구가 나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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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7-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박명림 정병준 둘 다 읽어본 입장에서 그 둘의 책의 의의와 시사점을 너무 좁고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건 아닌지

NamGiKim 2022-07-27 16:22   좋아요 0 | URL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서 읽어봤지만, 사회주의의 실패를 지엽적으로 강조하죠. 그 분들의 연구 성과가 없다는 것이 아닌 한계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415일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대한민국 해병대 73주년 기념 게시물이 포스팅 됐다. 이 포스팅은 “73년 전 오늘!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을 비롯한 380명의 정예병력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으며, 해병대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고, 북한의 불법공격인 연평도 포격전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해병대가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내세우는 인물은 신현준은 어떠한 인물일까? 오늘은 대한민국 자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이 누구인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힌민국 해병대를 창설한 신현준이 정복 사진)

 

대한민국 해병대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칭송하는 신현준은 일제시대 당시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 요원이었다. 그는 193812월부터 194012월까지, 19434월부터 19448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34개월간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란 무엇인가? 간도특설대는 1938915일 일본이 세운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의 하나로 창설이 결정돼 그해 12월에 탄생한 부대로, 19393월에 정식으로 발족된 부대다. 만주군 산하의 특수부대로는 아사노 부대와 이소노 부대, 회교부대, 오로촌 부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도 이 중 하나다.

(신현준의 행적을 추적한 오마이뉴스 동영상 스크린샷)

 

간도특설대의 창설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집단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당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간도특설대의 존재 목적이었던 것이다. 간도특설대는 193931기 지원병 훈련이 끝난 후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이들은 항일무장세력들을 토벌했다. 당시 만주에는 김일성이 복무했던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들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휘하의 팔로군들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팔로군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도와 활약한 독립군이었다.

(2022년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가 올린 홍보물, 놀랍게도 대한민국 해병대는 친일 매국노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같은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여 친일 매국행위를 하고 있을 당시, 조선과 만주에 있던 뜻있는 젊은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은 1915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하얼빈 보통학교에 편입한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다음해인 19322월 하얼빈 난강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를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르고 입대했다. 17살 때 일본군에 자진입대한 것이다. 신현준은 자신의 회고록인 <노 해병의 회고록>에서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2,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신현준이 복무했던 14사단은 북만주 지역을 전전하며 항일 세력과 전투를 벌였으며, 19341월까지 일본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신현준은 19353월까지 1년간 만주군 5관구 고문부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엔 펑톈 군관학교에 지원해 5기생으로 들어가 193712월 말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이후 박격포 중대, 교도대 등에서 복무하다가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에 관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현준은 박정희와 더불어 광복군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946510일 미군 LST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창군 작업을 급속도로 진행했는데, 신현준은 이 과정에서 남조선해안경비대로 들어가 손원일 소령의 도움으로 해군 장교로 변신했고, 이후 해병대 창설 임무에 관여했다.

(미군과 백선엽, 신현준 또한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 덕분에 대한민국 군에서 해병대 사령관까지 될 수 있었다.)

 

1948년 여순항쟁이 일어나자 신현준은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으며,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95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했으며, 신현준은 대한민국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 4.3항쟁 시기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했으며,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했다.

(신현준 추모제,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꽤나 있는 듯 하다.)

 

이처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은 일제시절 간도특설대에서 친일매국행위를 한 인물이며, 해방 이후에는 제주와 여순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목아래 진압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독립운동가 이현상 사령관이 이끄는 빨치산을 토벌했다. 2022415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러한 인물을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칭송한 셈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한반도 이남의 역사와 현실이다. 과거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며 무수히 많은 독립군을 토벌한 이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통해, 한국전쟁의 제국주의적 모순성은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며, 신현준의 존재는 백선엽과 더불어 이를 입증한다.

 

참고자료

 

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김종훈,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오마이뉴스, 2020.04.06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621448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글>, 2022.04.15.

https://www.facebook.com/rokmc.mil/posts/pfbid02KYFe9tErArh42b2KFHkS2wHcMKd6roUyZmPgrqqZyQPxZw2rsPsdQkkC2aB5dd2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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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추축국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폭격을 진행했다나치 독일과 일본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됐다드레스덴 폭격이나 도쿄 폭격은 미공군의 폭격이 얼마나 많은 대량살상을 불러일으키고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는 행위임을 보여준다이러한 폭격의 양상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며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의 사용 빈도도 급증하게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대량 37만 5,000톤의 네이팜 폭탄을 동남아시아에 투하했다이들이 베트콩 게릴라를 붙잡는다는 명분을 들어남베트남의 농촌과 밀림에서 했던 행위들은 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다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곳들 대부분은 마을과 농촌 그리고 숲이 우거진 밀림이었고대부분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이었다한 마디로 미국은 아시아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따라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가 속출한 것이었다베트남 전쟁 이전 미국은 또 다른 전쟁에서 이러한 잔혹행위를 자행했다바로 한국전쟁이다.

(B-29기의 폭격 장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대로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현재까지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억 속에서그 본질이 왜곡되어 왔다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은 쉽게 외면 받는다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폭격의 책임이 있는 커티스 르메이는 절대로 저평가 받지 않는다오히려 북한을 폭격해서 군사적 효율성을 높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극우들의 기억 속에서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침략자 북괴군을 몰아내자.”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가까운 수준이다.

(작렬하는 네이팜 폭탄)

 

극우세력들의 믿음과는 달리베트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인명피해는 공산주의 진영이 아닌 미국에 의해 발생했다그 이유는 미국이 한반도 민중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북한의 전쟁 3년 동안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미군의 B-29 폭격기가 북한의 수도 평양을 폭격했고당일 폭격으로 6,000~7,000명의 평양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이 때 1만여 통의 네이팜 폭탄과 6만 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조사활동 및 국제연대 활동을 벌였던 국제여맹 인사들은 이후 자신들이 북한에서 본 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충분히 보았다.(We had seen enough)”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4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이 겪은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3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대략 90만 명에서 100만 명의 북한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폭격의 피해는 남한 안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됐다.

(폭격으로 파괴된 현장)

 

글쓴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안양이나 수원도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한 조사에 의하면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이후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본격화되는 1951년 2월 말 킬러작전(Killer Operation) 이전까지 약 3개월간 미 공군은 한국전쟁 전 시기에 소요된 폭탄의 40%네이팜 폭탄의 2/3를 사용했다고 한다물론 이 기간에 사용된 폭탄의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 사용되었지만남한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실제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네이팜 폭탄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초토화 작전(Wildness of Scorched Earth)’을 시행했다미군은 중공군과 인민군의 반격에 밀리자북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의정부·원주 등에서 네이팜 폭탄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고그 결과 수많은 마을이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951년 1월 19일에는 실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에선 미군 공수부대의 요청으로 공중폭격이 실행됐다작전상 이는 성공적인 사례로 보고됐지만적잖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물론 이 폭격 과정에서도 네이팜 폭탄이 사용됐으며전투기들은 50구경 기관총으로 기총소사를 마을에 갈겼다이 폭격으로 136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사상자 중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당시 남자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나무를 하러 갔지만여자들은 마을에 모여 명주를 짜다가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빨치산들 또한 미군의 폭격과 소탕작전을 경험했다. 1951년 당시 미군이 지리산 인근 지역에 항공기를 투입한 이후 적잖은 빨치산 대원들이 재귀열이 발병했으며미군은 이현상이 지휘하는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지리산에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네이팜 폭탄 투하로 죽은 빨치산이나 인근 마을 주민들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심지어 미군은 상주군 화북면 운홍리에서 동네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을 벌였다따라서 이 지역에 잠시 들어온 빨치산들은 주민들에게 신고당하지 않았었다.

(네이팜 폭탄을 투하한 미군 무스탕 전투기) 


이처럼 남한 내에서도 미군 폭격은 항상 있었다특히나 한국전쟁 초기 미군은 남한의 무수히 많은 지역을 폭격했다낙동강 전선에서도 이러한 폭격은 있었으며당시 북한의 종군 기자였던 리태준은 1950년 8월 16일 B-29 폭격기의 폭격에 대해 글을 남기기도 했다경북 칠곡에 있는 왜관에서는 농장과 주택이 있는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고최소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당시 리태준이 묘사한 폭격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섰고당시 폭격으로 죽은 최소 131명 이상의 희생자 수를 파악했다이 공식적인 희생자 외에도 피난민의 피해까지 합하게 되면 200명이 죽었다는 리태준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950년 9월 2일 미군의 B-29 25대는 김천과 고창 그리고 진주에 225kg 폭탄 803발을 투하했으며다음날에는 안동과 성주의성합천고령상주영동제천 전선 부근의 병력과 장비를 공격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들을 폭격했다. 1950년 9월 14일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B-29기 17대는 전선과 무관한 대전과 안동을 폭격했으며인민군이 점령했던 포항 또한 네이팜 폭탄의 폭격을 받았다. 1950년 8월 29일 포항 칠포리에서는 미군의 네이팜 폭격으로 최소 수백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됐다이 폭격은 미공군의 기록에 따르면 마을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고 나온다당시 죽은 민간인들 대다수는 여성과 노인 아이와 같은 인민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들이었다.

 

2000년대 당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고 진상규명해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기 위원회 활동 조사 기간 동안 접수된 미군 폭격 관련 사건은 530건이었다하지만 이중 진실규명된 경우는 120건으로 규명률은 22.6%에 불과하며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의 규명률에 비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예비검속과 대구 10.1 사건은 100%,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98.9%, 부역혐의 학살은 87.5%, 군인·경찰에 의한 학살은 80.1%,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은 80.3%, 여순사건은 75%,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45.9%의 규명률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한국전쟁기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 사건의 규명률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도쿄 폭격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전쟁범죄에 크나큰 책임이 있는 인물인 커티스 르메이는 의외로 한국 내에서 큰 비판이 나오고 있지 않다한국전쟁 시기 커티스 르메이가 실행한 폭격에 의해 무수히 많은 남한 민중이 살해되고 학살당했지만현재 사회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범죄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미국이 한국을 구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그러나 남한의 국토 대다수를 폭격으로 대량 파괴한 것이 과연 한국을 구한 것일까나는 이점에서 매우 회의적이다미군의 전쟁범죄는 반드시 규탄해야 하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시기 남한 민중을 폭격으로 대량 살상한 미국은 자신들이 자행한 역사에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기광서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4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

 

김태우폭격창비, 2013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서중석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20

 

김태우냉전의 마녀들창비, 2021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초토화 폭격뉴스타파, 2021.07.27. https://www.youtube.com/watch?v=keasLxTpL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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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상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미군정 시절의 남조선 경제는 피폐했다. 19469월 부산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이른바 9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대구 10.1 항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군정 하에서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물가도 폭등했다. 물가는 1944년에 비해 1946년에는 92배나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455월 물가지수가 233일 때 노동자임금지수가 233이었는데, 19465월 물가지수 77,39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는 6,015였다. 19461월 소매로 16kg180원 하던 쌀값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상승하는 초 인플레이션 현상이 미군정 하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미군정에 맞서는 시위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거기다 미군정은 이 땅에 상륙한 시점부터 친일 인사들을 자신들의 정권 하에 대거 등용했고, 최소 80% 이상이나 되는 경찰과 공무원이 친일인사들이었다. 경찰의 경우 그냥 10명 중 9명 이상은 친일경찰들이었다. 이런 모순점들이 격해지면서, 결국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은 미군정이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등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하에서 최소 10(20만 명이라는 수치도 존재한다.) 이상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고, 비슷한 규모의 정치범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수감됐다.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한 모두 국토가 초토화 됐다. 국토 초토화의 원인은 당연하게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모습)

 

1948년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이승만 정부의 경제체제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체제였다. 물론 이승만 정부는 민생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군인 10만 명이 방산비리로 아사하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던 사회가 바로 이승만 정부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50년에 대한민국 국민총생산(GNP)15.1%나 감소했고, 1951년에는 6.1%나 감소했다. 물론 1952년과 1953년부터 차츰 회복세를 보여 성장률 2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던 1954년부터는 5.2% 감소 1955년에는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가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은 정말 놀라울 수준의 규모였다. 전쟁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213.5%를 찍었는데,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최소 4년 동안 평균 4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이른바 원조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만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재정에서 미국 및 외국의 경제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430%, 195544.3%, 195752.9%, 195851.5%에 달했을 정도다. 쉽게 말해 미국 없이는 나라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한 너무나도 가난한 나라였다. 반면 3년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은 비록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유럽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장 자체적으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에 이룩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1960년에는 세계 49위의 경제규모에 달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와 너무나도 비교가 됐다. 즉 이승만 정부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 북한 경제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미국의 원조액은 1958년부터 감소했는데, 이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19578.7%에서 19595.2%, 19602.3%로 떨어졌으며, 물가지수는 1958143%, 1959년에는 146.7%, 1960162.5%수준까지 상승했다. 실업률은 8.2%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6년에 80.5달러, 1957년에는 84.3달러, 1958년에는 85달러였다가 1959년에 84.3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독재 정권은 폭정과 무능 그리고 부패만 일삼았다. 이승만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이러한 배경은 결국 1960년 한국의 4.19 혁명의 원인이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감행하여 집권하게 될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는 101위였던 반면, 북한은 49위였다.

(1950년대 판자촌의 모습)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한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나라였다. 사실상 주한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법한 나라다. 당시 국민들은 미군들이 먹다남은 음식인 이른바 꿀꿀이 죽을 먹었고, 소위 보릿고개를 경험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부대찌개는 사실상 이 시대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가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음식이다. 당시 한국의 거리에는 굶은 아이들과 노숙자가 넘쳐났고, 잘먹고 잘사는 이들은 대다수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빌붙어 먹던 이들과 친일파들이었다. 이승만의 2인자인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하자, 민중들은 그들이 살던 집에 쳐들어갔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귀하던 설탕이 집안 곳곳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시대의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 수준이었으며, 잘해봐야 1973년 신자유주의를 극대화 시킨 피노체트 정부 보다도 훨씬 더 못한 수준이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의 동력을 받은건 사실상 불법적인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이른바 자본주의식 국가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하게 되면서였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들이 침마르게 칭찬하는 이승만식 자유주의 경제는 최빈국 수준의 것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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