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마지막 해에 올리는 글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195010월 중국이 이 전쟁에 참전한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으로 후퇴했고, 19511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줬다. 중공군 참전 전후로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 병력을 보충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른바 국민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이 내려짐에 따라 전국적으로 남한에 있는 청년들은 영장을 받지 않았음에도 닥치는대로 소집 장소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소집명령은 당연히 강제적인 방법이 동원됐다.


1950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세에서 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병력이 대략 5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많게는 68만 명이 소집되었다고 한다. 그중 42만 명 이상이 서울과 경기, 강원, 인천에서 소집됐고, 소집된 장정들은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200~300명씩 중대 단위로 편성해 도보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인솔했다고 한다. 막대한 예산이 편성되었으나, 1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이나 군복 하나 안주고 소집 장소만 하달했을 정도로 방위군에 대한 정부의 대우는 최악이었다. 12월 특성상 겨울이었는데, 이런 혹한기에 장정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말이다.


예산횡령이 횡행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서북청년단 출신이자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인 김윤근이라는 사람을 준장 계급에 임명했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전투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다.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고, 신성모의 비리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김윤군은 방위군을 유지하기 위해 받은 비용을 뒤에서 챙겼고, 기생집에 가서 원하는 만큼 돈을 쏟아부으며 사용했다. 김윤근을 포함한 4명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 양곡 52천 섬에 달했다. 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5천만 원의 현금과 5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1인당 1일 양곡 4, 취사연료비 40, 잡비로 10원을 책정해서, 3개월 예산으로 209830만 원이 배정됐는데, 그중 최소 1/10 이상을 김윤근을 포함한 4명이 착복한 셈이었다. 거기다 실제로 집행한 액수가 130억도 안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지만, 이들이 잡은 군인에 대한 대우가 가장 처참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들이 책정한 1인당 1일 양곡 4홉은 하루 5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대우였다. 그리고 모집된 국민방위군의 숫자를 생각해보자면, 어떤 부정이 없었다 해도 1인당 실제 집행액이 원래 계산만큼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심지어 난방비와 피복비는 아예 책정조차 하지 않았고, 엿공장은 생산 능력 대비 소비됐다면서 쌀 양이 계획안보다 6배가 넘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엄청난 뒷돈을 상층부가 챙긴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250대를 구입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20대밖에 구입하지 않았다. 명태는 386만짝을 구입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구입한 양은 4,000짝뿐이었다. , 국민방위군의 예산은 상층부가 뒷돈을 챙기기 위한 수법으로 진행됐다. 위에서 언급한 현금 횡령뿐만 있던 게 아니다. 현금 횡령이 235,000만 원이었다면, 양곡횡령이 202,710만 원이었고, 예하 공금 횡령이 288,328만 원이었다. 728,000만 원이나 횡령한 셈이다. 근데 이마저도 김윤근을 포함한 수뇌부만 해 먹은 것으로 공식적으로 드러난 액수일 뿐, 얼마나 횡령을 많이 했는지는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최소 100일 동안 자국 군인이 대량으로 아사 및 동사 그리고 병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소문으로는 최소 5만 명에서 10만 명가량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는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50만 명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추산했다. 심지어 뉴라이트 출신으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찬양하는 정치학자 유영익마저도 이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선, “9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노무현 정권 당시 활동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른 추산은 대략 5만 명에서 8만 명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그 한국전쟁 당시 국회조사에 따르면, 사망자 상당수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고,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 아사, 도주 등 이유로 전체의 40%에 달하는 27만여 명이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한 셈이다. 보통의 경우 7만 명에서 12만 명 사이로 보는데, 이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아무튼, 자국 정부의 방산비리로 최소 1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아사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생했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사망자가 14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인데, 그것보다 조금 적은 숫자가 방산비리로 아사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김윤근을 포함한 지도부 4명은 결국 사형해 처했고, 국민방위군은 해산됐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연루자 16명 중 실형 4, 파면 10, 무죄 2명으로 판결이 났다. 특히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가 선고됐는데, 국민은 판결 소식이 들리자 극도로 분노했다. 특히 부통령 이시영이 이 사건에 대해 분노를 표하면서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통령인 이승만마져도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국방장관 신성모를 경질했으며,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앉혔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으로는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했으며, 여론을 의식하여 김윤근을 포함한 지도부 4명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왜 한국군의 대우가 역사적으로 안 좋았는지다. 그러나 열악한 군인 대우의 시작은 결과적으로 군인에 대해 아무런 배려의식이 존재하지 않던 이승만에서 시작한다. 이승만 정부가 군인에 대해 제대로 된 대우를 안해줬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이 자의적으로 대중을 죽이고 패가며 만든 이승만 정부에게 있는 셈이고, 또 그 점에서 이승만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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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12-31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천인공노할 사건입니다. 평화로운 때도 아니고 전쟁 중에 방산비리라니... 썩을 놈들 욕이 다 아깝네요. 올려주시는 글들 읽으면서 새삼 공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GiKim 2022-12-31 23:46   좋아요 1 | URL
제 PBS 베트남 전쟁 그 긴 리뷰를 열심히 읽고 계시니 참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꼬마요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3, 미국에 묻다
허호준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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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3일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대의 봉화가 타올랐다. 43일에 시작된 봉화는 19549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며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843일에 시작된 봉기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동반됐다. 4.3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인구의 1/1030,000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산이다. 현재 북한에서도 30,000명 이상으로 추산하며,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도 대략 3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진상조사로 확인된 사망자만 하더라도 최소 10,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더 높은 사망자 추산도 존재한다. 1949년 당시 제주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사망자가 6만 명이라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2016년 제주4.3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추산을 종합해보자면, 제주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60,000~80,000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1/5에서 1/4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주도 인구의 4명 중 1명이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있었던 무차별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주 4.3사건은 명명백백하게 국가가 국민에게 무차별 적으로 행한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 호로위츠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국가기구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로위츠가 규정한 정의를 고려해서 보자면,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무수히 많은 죽음들은 명명백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가 학창시절인 이들은 단체관람 했던 영화 중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헐리우드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면, 캄보디아인 주인공 디스 프란은 크메르 루주가 세운 강제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사람들의 시신과 해골로 이루어진 곳을 목격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 영화를 국민들에게 단체 관람하도록 한 목적은 반공주의를 합리화하기 수단이었고, 실제로 이런 영화를 통해, 북한에 대한 대북적대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절 똘이장군이나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를 보며, 반공주의적 의식을 길렀지만, 정작 우리 현대사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우리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인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였으며, 피해자들은 반공이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제주 4.3사건이 국민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87년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이며 수많은 진상조사와 활동들을 통해 현재는 적잖은 국민들이 인식하는 비극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자리까지 올랐다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제주도를 방문했고, 첫날에 제주 4.3 박물관을 가족이랑 함께 들렸다. 당시 제주 4.3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지만, 학살의 과정과 잔혹성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경악했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들 중에는 도저히 남로당 게릴라라고 판단될 수 없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있었다. 도저히, 남로당측의 봉기군이라 판단할 수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 4.3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학살을 주도한 세력은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경무부장인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들이 파견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 대원들이었고, 이들이 바로 제주도 대학살을 주도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파견된 경찰과 우익 청년단 그리고 군대는 말 그대로 제주도라는 섬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자행했고, 학살의 피해자는 순전히 제주 민간인들이었다. 심지어 학살 피해자의 80~90%는 이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에는 또 다른 책임자가 존재했다.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대학살에는 소위 미국이라는 존재가 아주 깊숙이 개입해있었다. 허호준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 관련한 영상물에서는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 연락기, 미군 함정이 내뿜는 해안의 검은 연기, 낯선 이방인이 산야를 누비며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옆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려운 눈빛의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이라는 존재가 제주 4.3사건에 얼마나 깊이 개입했는지 알 수 있는 방증일 것이다.

 

19484월 말에서 5월 초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과 유격대를 지휘한 김달삼 사이에서 잠시나마 휴전 및 총성을 멈추기 위한 평화협상이 있었다. 물론, 글쓴이는 이 협상이 지켜질 것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노력을 단번에 산산조각을 내버린 존재가 바로 하지가 이끄는 미군정이었다. 하지 사령관이 제주도에 보낸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이다.”라는 태도로 토벌작전에 임했다. 양측의 협상이 깨진 것도 바로 브라운 소령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제주 4.3을 대하는 미군정과 미국의 태도는 항상 일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뿌리 뽑아야하고, 제주 4.3은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와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창조해낸 냉전이라는 이분법적인 반공주의 사고방식이 결국 제주도를 양민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미국의 이런 반공주의 정책은 제주도 사태를 강경진압을 추진한 이승만이나 우익세력들과 항상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 국가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미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이었다.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들에게 있어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인권이 유린되든 말든 무조건 죽여 마땅한 존재였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은 이 사건에 개입하여 진압하는 데에도 아주 열정적이었다. 미국은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과 군대에게 물자와 장비를 지원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극우 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키는 것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군대 안에도 장교 출신의 미군고문단들이 적잖게 배치됐고, 실제로 이들은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며,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사살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투입된 미군들과 그 미군들을 지휘하는 미군정 및 주한미군사령부 등은 진압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진압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강경진압을 막는 그 어떠한 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학살을 군사작전 상에서 적극 지원하고 도왔다. 그들에게 있어 진압군이 죽이고 체포하는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일 뿐이며, 이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파괴하려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트루먼식 반공의 논리는 공산주의자 민간인은 대량으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미군들에게 심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48년 당시 미군정이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책에 있는 내용을 보자.

 

“5.10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제주도 사태는 미군정 수뇌부의 직접 개입뿐 아니라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딘과 워드의 제주도 동시 방문과 군정 수뇌부의 제주도 현지회의 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전면적인 유격전(full-scale guerrilla warfare)’으로 보고 진압을 강화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63

 

아래는 진압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미군정 주도 하에서 전개된 토벌작전의 절정은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 파견이다.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고문관은 물론 제주도 주둔 경비대와 경찰의 작전을 지휘통솔하는 명실상부한 제주도 총사령관이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80

 

2003년에 나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발언도 나온다. 아래 인용된 책의 내용을 보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35

 

위의 세 가지 인용문만 보더라도 제주 4.3사건에서의 학살에 미군정과 미군 그리고 미국 정부가 크나큰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1949년에도 지속됐고, 195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은 제주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데에도 열정적이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여수와 순천에서, 진보적 성향의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무차별 폭력과 제주 4.3학살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진압에 아주 열정적이었다. 여순사건은 군사고문단이 채택한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시험무대였는데, 한국군이라는 파트너에게 적절히 충고와 자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 미국은 이 여순사건에 아주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진압작전을 수행중인 송요찬의 부대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살극을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작전은 중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이 모택동의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통령 이승만이 19481117일 이른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에도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학살극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반공국가의 수장으로 치켜세웠고,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작전을 수행한 군인들에게 훈장 및 상을 줬다.

 

제주 4.3사건 당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서북청년단을 비호한 것도 바로 미국이었다. 사실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을 경찰과 군인에 편입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노력을 보인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이들의 작전으로 적의 사살자 숫자와 무기의 숫자가 불균형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토벌을 고무 및 장려했다. 심지어 미군들은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유격대의 집결지와 사령부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속속히 알려줌으로써, 학살극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래에 있는 책 인용문을 보자.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조장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22

 

이처럼 미국은 제주 4.3사건에 깊이 개입했고, 학살과 진압작전을 도왔으며, 군사적인 측면에서 진압군을 적극 지원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제주 4.3학살은 미국의 학살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러한 학살을 지휘하고 돕고 지원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허호준의 4.3, 미국에 묻다COVID-19가 한참이던 2021년 초에 출간됐다. 따라서, 기존에 제주 4.3사건 관련 자료에서 찾지 못했던 미국의 개입 관련 최신 자료들도 제법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규명하고,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추론했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를 직접적으로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몇몇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책의 저자인 허호준은 김익렬과 김달삼 간 평화협상과 그 이후 사태 전개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시 내용, 미 국무부와 군부의 제주도 사건 관련 지시 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사료가 더 발굴되야한다고 역설한다. , 이 말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선 앞으로도 발굴되고 연구되어야할 자료와 사건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온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전후로 미국 및 서방권 언론들이, 자신들의 경쟁자인 소련 및 사회주의권을 악마화하기 위해, 근거 없이 퍼뜨렸던 가짜뉴스들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보도된 내용만 따진다면, 제주 4.3사건은 소련이나 북한에 의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근거를 밝히지 못했으며, 당연히 가짜뉴스였다. 아니 오히려 제주 4.3사건 관련해서는 소련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1950년 당시 소련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 고문관들의 명령에 의해 남한 정부가 35,000여 명의 주민들을 죽이고 1만여 채의 집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거기다,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이 제주도에서 했던 정책들을 보면, 미국이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시킬만한 일들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6년부터는 제주도에다가 과거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경찰들을 임명했고, 19473.1사건에서 시민 6명 이상을 죽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극우성향의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했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에서도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정책을 추진했고, 가뜩이나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던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연히 민생은 제주 4.3을 거치면서 더 악화됐다. 19504월 기준으로 대략 10만 명이나 되는 제주도민들이 심각한 기아에 빠져 풀을 뜯어먹고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제주도 정책이 얼마나 반민중적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다.

 

저자 허호준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한 박사학위논문을 쓴 인물이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이 개입했던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과거에는 그리스 내전 그리고 미래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리스 내전 당시에도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그리스 민간인들이 좌파 게릴라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대량 강제이주, 노조파괴, 체포, 구금, 네이팜탄 투하가 동원된 폭격 그리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가족을 살해한 데 대해 미군들은 그들은 게릴라의 친척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콩에 동조적이었으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분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했다. 이것은 초기 미군사고문단 개입시절에 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과 남베트남의 평정작전 이론은 농민들을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양민학살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022년이 끝나가고, 2023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바빴다. 그래서 예전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화 및 다큐멘터리 감상도 그러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시간을 내어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읽은 것은 여러모로 많은 지적 호기심을 제공하고,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를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자행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 이렇게 용기 있는 책을 써준 점에 대해 저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끝까지 완독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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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0월에 발발한 여순항쟁(YeosuSuncheon Uprising)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대학살이었다. 여순사건의 원인은 1948년 제주 4.3항쟁이었으므로,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보내질 예정이었던 병력이 진압을 거부하고 봉기를 단행하면서 시작됐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여순항쟁은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미군정의 잔혹한 진압으로 종결됐고, 최소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발견된 희생자의 시신은 총 3,384구로 실제 희생자보다 일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여순항쟁은 제주 4.3 항쟁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반란사건이나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 , 이 사건이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폭압적인 폭력과 억압적인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 항쟁이었다는 사실관계는 손쉽게 무시당해왔던 것이다. 여순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이승만은 당연히 이 사건을 공산주의의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순사건에 대한 교과서의 정의는 이와같은 이승만식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교육은 수십 년간 국정제도로 운영되어 왔다. 학살극의 당사자인 이승만은 당연히 국정교과서를 발행했으며, 비록 교과서에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여순항쟁을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1960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서자, 당시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1961516일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또한 국정 교육을 단행했다. 특히나 1972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는 1974년 신학기부터 주체적 민족사관에 투철한 국정교과서를 내놓았다고 말했으며,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한 역사교육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여순항쟁이 교과서에 처음 언급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 체제하의 제3차 교육과정 때부터였다. 1976년에 발행된 국사 교과서에는 제주 폭동과 여순 반란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서술했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제4차 교육과정을 거치며 두 사건에 대한 서술의 양을 늘렸다. 당시 교과서에 나온 여순사건은 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아래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고 나온 점에서 박정희 정부 당시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시절과는 달리, “공산주의자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서술이 추가됐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 이 두 사건은 폭동과 반란으로 표현됐지만, 노태우 정권 하에서 단행된 제5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도의 경우 4.3 사건으로 표기되었지만, 여순은 이전과 똑같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표현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개정된 제6차 교육과정의 교과서에서는 제주도 4.3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보는 것은 여전했지만,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다고 하며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을 언급했다. 하지만 여순의 경우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반란으로 표기됐다.


김대중 정권 들어서 시행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 4.3과 여순에 대해 사건이라 표기했으며, 제주 4.3의 경우 진압과정에서의 무고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반면 여순사건에 대해선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일대를점령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 시점까지도 여순에 대해선 제주 4.3과는 달리 본질적인 문제를 교과서에서 꺼내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나온 교과서에서도 여순에 대해선 여수 주둔 부대 내 좌익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나 봉기로 표현하는 교과서들이 제법 많았다.

 

지금도 여순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이 여순사건이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와 잔혹한 학살에 반대하여 자주적인 통일정부와 반외세 정부를 달성하고자 했다는 점은 항상 거세당해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교과서적 서술이 한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을 얼마나 각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의 땀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중의 피를 요구했다. 그 유혈의 역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부정적 역사를 미래를 위한 긍정적 지양분으로 바꿀 수 업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교과서에서는 여순항쟁의 본질이 언급되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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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사례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찾기 쉽다. 특히나, 나무위키를 비롯한,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사이트는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 놓고, 어떻게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네이버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검색해보면, 나무위키식 주장에 영향을 받은 글들이 제법 보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문서들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고자이 학살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고자이 학살을 묘사한 벽화,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물타기에 가깝다.)


고자이 학살은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성 떠이선현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얘기에 따르면 주민 380명을 모아놓고, 한 시간 만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학살을 겪었던 대다수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은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 소속 맹호 부대로 규정하고 있다. 2007년 오마이 뉴스에서 연재했던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한 기사를 보면, 당시 한국군이 어떻게 학살을 벌였는지 나와 있다.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씨, 2016년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도 나왔고, 2015년에 학살을 증언하러 한국을 방문했었다.)


(응우옌떤런씨와 구수정 박사)


(빈딘성 박물관에 있는 고자이 학살 희생자의 사진.)


1966년 2월 26일 아침. 평화로운 베트남의 한 마을에 포탄이 날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헬기가 마을의 하늘을 가득 메웠으며, 녹색 전투복을 입은 한국군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됐고, 모두 380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 베트남 관리는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국군은 주민들을 언덕위에 몰아 놓은 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끈으로 묶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고, 어린이들의 몸을 찢어 손과 발을 나무 위에 내던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고자이 학살이 있던 곳에는 전쟁 이후 마을 주민들이 만든 큰 위령비가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는 희생자 380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침략자 미국에 대한 원한을 깊이 새긴다.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군대가 미제국주의 지도하에 380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학살을 부정하려는 이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지역에 그려진 벽화를 문제를 삼고 있다. 그 이유는 벽화에서 묘사한 한국군의 군복 마크가 한국군의 맹호부대가 아닌 당시 남베트남군이던 레인져 부대의 마크라는 것이다. 한국군의 맹호부대 마크는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이지만, 벽화에 그려진 마크는 당시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인 레인져 부대가 사용하던 흑표범 마크다. 즉 그러한 점을 들어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맹호부대 마크와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 마크, 이걸 가지고 학살 부정론자들은 한국군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며, 이는 나무위키 같은 반공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 함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론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할 뻔한 피해자가 굴뚝 개수를 잘못 기억한다고 해서, 나치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즉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면피용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조사가 아직 이루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건 올바르지 못하다.

(빈안 학살 50주년 추모제)


그렇다면, 학살에 대한 묘사는 과연 거짓이고,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로부터 무고한 것일까? 이러한 얘기는 한국군이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을 보면, 베트남인들이 증언한 한국군에 대한 묘사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의 경험이 있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만 하더라도 제주 4.3 사건에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인물이다. 즉 박정희 정부의 월남 파병은 그러한 연속성을 가진 상황에서 진행된 역사다. 따라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 부정이다.


2016년 방송채널인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을 보면, 빈딘성 박물관에서 해설하는 한 베트남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진은 1965년에 뀌년(Quy Nhon) 항구에 상륙했던 한국군의 모습입니다. 이때부터 빈딘성에서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뀌년하고 빈딘성에 들어온 후, 한국군들은 북베트남군을 다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없애고, 깨끗이 죽인다’는 전략으로 굉장히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한국군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나서 음부에 칼을 꽂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서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군들은 후잉티본 할머니 집의 방공호에 숨어 있던 17명의 주민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후에 이 방공호 안에 침투하기 위해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밀어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제주 4.3 사건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군이 이러한 잔혹행위로부터 무고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자이 학살을 반성했던 참전용사 이우석씨)


(고자이 학살 희생자 380명의 명단)


이후 채명신이 집필한 자서전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도 1966년 당시 한국군의 학살 피해의 그늘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66년 1월에서 3월까지 대략 6주동안 벌인 작전으로 총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걸 빈안 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빈안 학살은 모두 15개 지점에서 벌어진 학살로, 1966년 2월 26일에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그 중 일부다. 채명신 장군은 회고록에서 1966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맹호부대의 번개작전을 회고했다. 아래는 <베트남 전쟁과 나> 288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갑연대의 이번 작전지역인 빈케군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부락은 거의가 베트콩의 전략촌이기 때문에 사살자가 민간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교전 중 사살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작전상 맹호부대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기록된 베트콩 사살 숫자에 비해 노획된 소총 숫자가 불과 4정 밖에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채명신은 민간인이 아니라고 확신적인 발언을 했는데, 채명신 입장에선 학살의 가능성을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콩과 민간인의 구분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전과보고는 정직하지 못했다. 사살된 시신만 가지고 전과를 보고하는 바디 카운트(Body Count) 방식인데, 당연히 여기에는 폭격으로 몸이 산산조각 나거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시체는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적군 사살이 비교적 적게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빈안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수정 박사)


또한 앞에서 말한 민간인 희생을 생각해보더라도, 380명의 민간인이 죽었음에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높다. 당장 1년간 미군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만 보더라도,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지만, 전과보고는 120명의 베트콩 사살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자면,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규정해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일각에서는 고자이 학살 지역에 한국군이 있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지만, 이것은 2017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켄 번즈(Ken Burns) PBS Vietnam War만 보더라도 반박이 가능하다. 아래는 PBS Vietnam War Episode 4에서 나왔던 내용 중 일부다.


“주월미군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2만 명으로 구성된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을 보내, 빈딘성 지역을 휩쓸어 적과 그들의 보급선을 찾아내고자 했다. 먼저 전단을 뿌리고 대형 스피커로 방송하길 “헬기에 사격을 가하면 가혹한 운명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라고 권고했으며, 항복하는 베트콩에게는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고는 공군과 포병대를 불러 마을을 산산조각 냈다. 이 전쟁 최초의 대규모 베트콩 토벌 작전이었다. 공격은 42일간 지속됐고, 미 육군 보고에 따르면 적 2,389명이 죽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기뻐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미군이 화력을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도 북베트남 정규군 대부분이 중부고원 지대로 도망간 것을 우려했다. 이 작전은 민간인 10만 명을 고향에서 쫓아냈다.”


PBS Vietnam War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은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1966년 2월 26일날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주도한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 Campaign) 과정 중 일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고자이 학살은 이 군사작전 중 일부였으며, 군사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이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빈딘성 박물관 해설사의 내용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개했던 삼광작전”과 같은 비슷한 군사작전이 진행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 지도부는 이러한 경험을 일본군과 한국군에서 쌓은 인사들이었으며, 채명신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었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으며, 한국군의 이러한 학살은 과거 일본군에서 벌인 학살과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벌인 학살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봐야한다. 그리고 한국군에 있었다던 광복군 출신들도 엄밀히 따지자면, 양민학살이라는 측면에선 일본군과 크게 차이가 없는 중국 국민당군 출신들이었다. 중국 국민당군 출신이자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한국전쟁 당시 거창 양민학살을 자행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고, 고자이 학살도 한국군에 의한 것이었음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군의 잔혹성을 보인 케이스며, 남베트남군이 했다는 변명은 물타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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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제주도에선 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를 막고자 했다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책은 제주도를 피바다로 물들이는 정책이었고이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숫자가 다소 적게 추산되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며, 6만 명 정도가 이들에 의해 죽었다는 통계도 있고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그 숫자가 8만 명일 수 있다고 2016년 제주도에서 열린 학술 포럼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방문하여 진압군을 사열하는 대통령 이승만, 당시 이승만은 제주도 진압을 명분으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제주도 인구 최소 1/4이 학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학살당한 이들의 수치가 보여주둣이제주도는 1948년부터 1949년 내내 섬 전체가 피바다였다그러나 제주 4.3 사건 당시 크게 얘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그것은 바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 지휘관들의 출신성분이다놀랍게도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주요 지휘관이었던 박진경최경록송요찬함병선유재흥 등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었다일본군 출신인 이들은 일본군에서의 경험 덕분에 진압군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제주 4.3 봉기를 진압했던 이들이 했던 발언)


(현재 제주4.3평화박물관에 있는 묘지)

 

박진경은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에 제주도에 구축된 진지구조와 지형에 익숙했다박진경이 암살당한 이후 부임한 11연대장 최경록은 일본군 지원병 1기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실전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확인된다그는 일본군 제78연대에서 하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뒤 군조 대 일본 육사시험에 합격해남태평양의 뉴기니에서 전투를 하다 종전이 돼 준위로 귀국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1989년 주일대사로써 일본 산케이신문에 기사를 기고 했는데그 기사에는 일본은 자위대의 명칭을 일본국군으로 바꾸고 당당히 군사력을 강화해 아시아의 방파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던 인물이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 사령관이던 유재흥, 놀랍게도 한국말을 잘 못했다고 한다.)


(4.3 사건 당시 암살당한 박진경을 대신해 부임한 최경록, 이후 주일본대사관을 지냈던 그는 1989년 일본 자위대를 칭송하는 글을 산케이 신문에 실었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 때 이승만의 진압 명령을 거부했던 송요찬의 경우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지원병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다가 조장(상사)까지 진급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다2연대장 함병선도 제주도 토벌작전을 전개한 전임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며낙하산 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일본군 준위 출신이다. 2연대 출신 최갑석은 함병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함 연대장은 국내 전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참가한 군인이었다그는 국군에 들어와서는 여순사건제주4.3사건옹진지구 전투홍천 전투춘천 수복 전투, 6.25전쟁 등 한국군의 전장에는 반드시 그 복판에 있었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일본군 준위와 상사 출신은 사관학교 출신보다 실전 경험이 많고그래서 전쟁의 난국에는 머리 좋은 장교들보다 이들의 용맹성·효용성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함 연대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토벌을 지휘한 유재흥은 일본 육사 55기로 일본군 대위 출신이며해방 이하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유재흥은 대위 시절인 1943년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로 친일파 출신 장교였다주한미대사관은 그를 말과 행동이 너무 일본식이기 때문에 한국적 방식에 적응할 수 없지만동급의 한국군 장교들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 구사하고 이해한다고 평가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 적색지역으로 설정한 곳에서 속출한 희생자들을 나타내는 지도)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 4기로 1947년 9월 10일 졸업한 황인성은 임관과 동시에 동기생 4명과 함께 9연대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1948년 1월 광주의 4연대 지불관으로 전출될 때까지 제주도 주둔 9연대 1소대장으로 근무했다그에 따르면당시 육사에서는 일본군의 보병조전’, ‘작전요무령등을 사용했고미군의 야전교범도 조금씩 번역돼 사용되기 시작했다일본군과 미군의 군사교육이 혼합된 체제였던 것이다.

(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발견된 학살로 희생된 이들의 유골)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제주 4.3 봉기 당시 미군정이 도왔던 토벌군 지휘관들이 일본군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결국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쌓은 전투경험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데 이용됐고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무엇보다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자들 중 90%가 이들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허호준그리스와 제주비국의 역사와 그 후그리스 내전과 제주4.3 그리고 미국선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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