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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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외 지음, 이희수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20세기 위대한 휴머니스트 체게바라

체게바라(Che Guevara)!

난 이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예수와도 같은 얼굴을 한 이 인물은 정말 예수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혁명가였다. 미국의 포악한 독점자본이 착취와 유린을 일삼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체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체는 한손에는 총과 다른 한손에는 의약품을 들고 혁명에 투신했으며, 그의 삶은 19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마감됐다. 그의 마지막 혁명은 분명 실패였다. 혁명가를 두려워한 제국주의 앞잡이와 미국은 그를 총살했고, 시신은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비밀리에 매장됐다. 하지만 체는 전설이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젊은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를 외쳤던 젊은이들은 이들의 위업을 받들어 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규탄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파괴적인 살육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이 미군의 최신식 화력과 무기에 대량학살 당하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호치민과 쿠바의 체게바라였던 것이며, 실제로 서구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체게바라가 총을 들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의대생 체는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제국주의가 저지른 폭력과 억압을 두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연합과일회사를 비롯한 미국의 독점 기업들은 자국의 초과이윤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개처럼 취급했고, 미국에 협력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민중을 착취하며 호의호식했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체는 바로 그걸 묵과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 혁명만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라 굳게 믿게 됐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동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마약과 매춘, 부정부패가 창궐했고, 소수의 자본가들만이 미국의 자본가들과 더불어 부를 독점했다.

쿠바 혁명은 그런 제국주의 체제를 종결시킨 혁명이었으며,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 제국주의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시키고, 치료시키며 집을 주었다. 쿠바의 사례가 성공했듯이, 체는 이러한 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싶어했다. 그래야만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볼리비아에 체게바라가 잠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CIA와 육군 특수부대 그린베레를 투입하여 어떻게든 체를 죽이고자 했다. 미국은 체게바라를 죽였지만, 그의 순고한 혁명 이념까지 억압받고 유린받던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책 <만화 체게바라 평전>은 인간 체게바라가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혁명가가 되는 과정부터, CIA가 동원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는 최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간 중간에 국제정세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체의 인간적인 심오한 고민을 만화의 형태로 잘 담아낸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내가 체게바라를 처음 읽은 건 6~7년 전 군대가기전에 했던 일반휴학 시절이었다. 그때 읽은 <체게바라 자서전>과 어록, 평전 그리고 감상한 영화와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숭고한 신념을 가진 그를 존경하게 됐다.

체게바라가 꿈꾸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아직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체가 가졌던 그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수많은 체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에 있다는 사실은 현재 그곳에 확산되는 반미 반자본주의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체가 목격한 억압받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체게바라의 혁명적 위업과 신념은 여전히 유호하다.

라틴아메리카에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사회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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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10-26 미국의 위기, 눈뜬 장님 한국 >

미국채가 위험하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미국채가 위기에 빠진 것은 금리인상 때문이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8할이 우크라이나 전쟁때문이다. 미국채를 사지 않으면 미국 재정은 붕괴한다. 이미 적자재정이기 때문에 국채를 발행하지 못하면 국가운영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미국채를 구매할 수 있는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과 일본이 가장 많이 국채를 샀다. 그러나 이제 중국과 일본이 국채를 매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채를 가장 많이 사모았던 중국은 이제 서서히 그 비중을 줄이고 있다. 중국은 미중간 대결구도가 형성되면서 미국채 매입을 중지하고 비중을 줄여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압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중국은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들의 외환보유고가 압류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히 서서히 팔아서 위험에 대비하고자 할 것이다. 특히 미국이 대만사태를 빌미로 중국의 외환을 동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국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수록 달러의 기축 통화지위는 약화될 것이다.

일본도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미국 채권을 매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국내 환율이 비정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환율을 방어하기위해서는 미국채를 구매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을 것이다. 있는 것도 팔아서 외환시장에 개입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대규모로 미국채를 매입할 국가는 별로 없다. 유럽은 거의 빈사상태다. 한국도 여유가 없다. 경상수지 적자 상태라 하루하루가 바쁜 지경이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금리인상을 한다고 했지만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금리인상으로 잡을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패권 경쟁으로인한 공급망 왜곡이다. 필자같은 문외한도 처음부터 지적할 정도로 상식적인 문제다. 공급 문제로 발생한 인플레인션을 소비를 억제해서 잡으려 하는 것은 진단과 처방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금융/재정 전문가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과 얼마전까지 공급문제를 지적한 전문가들도 소수에 불과했다. 미국은 물론 한국의 전문가들도 대부분 금리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고 했고, 금리인상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필자 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도 수요억제가 아니라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 단순한 사태를 지금까지 오로지 금리인상으로 끌고간 이유를 유럽을 약화시켜 미국의 생산능력을 강화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전혀 무리한 해석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미국채 매입을 할 수 있는 국가가 없어서 그런 의도도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미국채를 매수할 수 있는 국가가 없으면 국채가격이 떨어지고 이율은 올라간다. 미국 정부의 금리부담은 점점 더 커지고 재정은 위기에 처한다. 이미 미국 재정적자도 위험한 상황이다. 미국가부채가 이미 31조달러를 넘었다.

아무리 전문적인 영역이라도 일반적인 상식을 위배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원료, 식량의 급격한 가격상승, 중국 견제로 인한 상품의 미국 유입 감소 등에 따른 것이다. 아무리 소비를 억제하더라도 먹어야 하고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차도 타고 다녀야 한다. 생활에 필수적인 서비스와 상품을 소비만 억제한다고 어떻게 줄어들 수 있겠는가?

며칠 남지 않은 11월 FOMC는 미국의 정책과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금리를 높이 올리면 재정이 파탄나고 금리를 제대로 올리지 못하면 경제가 파탄난다. 미국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것이 미국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외정책의 잘못으로 위기를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노스스트림파이프 파괴, 크림대교 폭파, 카홉카 댐 파괴 및 우크라이나의 더러운 폭탄 사용 우려 같은 문제는 모두 미국이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닌가 한다. 당장 11월8일의 중간선거와 같은 미국내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만일 전쟁이 겨울을 지나가면 유럽의 정치 상황이 급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제반 경제적 문제는 러시아로서는 이미 사전에 예측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별 특별한 전문지식이 없는 필자도 전쟁발발과 동시에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군사 경제 이중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수없이 말했다.

시간은 러시아 편이다. 러시아는 최소한 2025년까지는 지금의 상황을 끌고 갈 생각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러시아 중앙은행의 보고서는 2025년까지 대러시아 제재는 유지될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2025년이 지나면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도 상황이라도 경제를 회복한다고 전망하고 있다.

만일 이런 상황이 2025년까지 계속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러시아는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미국 금융과 재정은 파탄이 불가피하고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유럽은 제3세계 수준으로 위상을 추락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희생을 바탕으로 어찌어찌 혼자 살아나가는 방법을 찾을 지 모르나 과거의 제국이라는 위상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동맹국의 이탈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지 모른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격변의 시기를 경험하는 것 같다. 몇백년 동안 일어날 일을 몇십년만에 보고 있다. 소련이 붕괴하고 또 연이어서 미국도 붕괴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미국이 붕괴하면 한국도 위기에 빠진다. 한국의 기적적인 성장은 미국의 힘에 기댄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이 약화되면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아남고 번영하려면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살아 남기 어렵다. 현재의 한국은 급변하는 대외환경에 별관심이 없는 것 같다. 국내에서의 정치싸움에 눈이 팔려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fPWF5g5vZQEqDShGoUGYUiurRxVPCTEiHWyhB9nkqP6HxsrezAcQfxxF3M5xE7eyl&id=10003343486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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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43-Plus My Lais of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이 글은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워싱턴과 제3세계 파시즘)』에 나오는 내용의 번역본을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얘기하지만, 1980년대 국내 번역본은 한국군을 동맹군 혹은 용병이라 번역을 했더군요. 그래서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한국군은 1965년 존슨 행정부와의 협정에 의하여 남베트남에 도착해서 1973년까지 주둔했었다.(각주 59) 1965년과 1966년의 뉴스 보도는 미국의 동맹군인 한국군을 ‘용맹’하고 ‘강력하다’고 표현했지만, 1970년 1월에는 그들의 강력함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됐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각주 60)


하지만 1972년이 될 때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당연히 이것 역시도 언론에서는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그 살상은 ‘조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각주 61) 베트남어를 하는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들의 조사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a) 남베트남인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임대군인(rented soldiers)’인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과 규모면에서 비슷한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00여 명 정도가 죽은 각각 별개로 나눠진 12건의 학살사건이 존스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한국군은 이밖에도 20~3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은 수십 건의 또 다른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 밖에 헤아릴 수도 없는 각각 별개의 살인, 강도, 강간, 고문, 그리고 토지 및 민간인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파과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한국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는 총 수천 명 단위에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존스는 이들 ‘연합군’에게 ‘평정된’ 지역 중 임무지역만을 조사했던 것이었다. 


(b) 이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징집연령에 해당되는 남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거나 사이공 정부에 소집되었고 또는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c) 이러한 대량학살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한국군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또는 그러한 기습 공격에 대한 경고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각주 62) 요컨대 한국군이 장악한 전 지역의 민간인들은 그들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d) 이러한 대향학살은 오랜기간 동안 심지어 1972년까지도 행해졌으며 미군당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각주 63) 미국 관리들이 이런 형태의 ‘평정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보였다거나 혹은 이와 같이 빈번하고도 지속적인 만행에 대하여 어떤 징계조치가 취해졌다는 증거는 전혀없다. 사실상 한국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국에게 용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군 당국자는 이를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도 있다. 콜롬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한국군의 그러한 방침은 “수년 동안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보고했다. 미국 관리들이 볼드윈에게 때로는 유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보통은 찬사와 함께 그러한 볼드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e) 미 국방부는 한국군의 지속적인 남베트남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1973년 회계연도 예산을 1억 3,400만 달러로 요구하면서(1965~1973년간의 총액은 17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에서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오웰주의적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안전(각주 65)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닉슨과 웨스트모어랜드 및 평정계획 자체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각주 66)


이러한 형태의 평정작전을 스락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미군 및 미군의 각국 연합군-비단 한국군뿐만 아니라(각주 67)-이 모두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그 같은 만행과 학살이 미군의 노력과 임무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러한 행위는 가난하고 실질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완강히 협조를 거부하는 이민족을 평정한다는 과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항이었다.


각주


(각주 59) 1965년 1월 9일 대략 2,000명이 한국군이 파병됐다. 1965년 4월 20일의 호놀룰루 회담은 그 숫자를 7,250명으로 증가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는 바로 남베트남에 북베트남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처음으로 주의를 끈 때였다. 1965년 6월까지도 국방부는 아직 그런 군대가 남베트남 내에 혹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Chomsky, For Reasons of State, p.122를 보라. 한국군은 1967년 2월의 캄보디아 마을 습격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Chomsky, At War With Asia, p.122를 보라.


(각주 60) Robert M. Smith,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 New York Times (10 January 1970).


(각주 61)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는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 “Korean Troops End Vietnam Combat Role,” New York Times (9 November 1972).


(각주 62)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그들의 행동이 당시 진행되고 있던 어떠한 군사작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닥치는 대로 벌인 학살이었다.


(각주 63) 랜드연구소의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 (1966년)”는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 American Report (28 July 1972)를 보라.


(각주 64) Letter in the New York Times, (25 January) 1970).


(각주 65) ‘안전’이란 미국의 공식 대변인들이 일관되게 베트남에 적용한 또 하나의 오웰주의이며 비슷한 방식으로 이 왕국 전역에 적용되었다. 베트남에 관한 경우 그 말은 사이공의 미국 종속정권이 위협당하지 않는 상태의 지배를 의미했다. 만일 사이공 측이 순전히 무력과 폭력으로 지배를 한다고 하더라도-비록 이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 부락과 주민은 ‘안전’한 것이었다. 만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무력 없이 지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부락과 주민들은 ‘불안전’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3년 6월의 한 국가정보 추산은 “베트남 주민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없었던 프랑스의 무능력을 우울하게 논하고 있는데, 그들 주민은 게릴라에게 프랑스연합군이 와 있음을 경고해 줌으로써, 게릴라들이 방어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베트민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 주민들에게 베트민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 v. I, p. 396.


(각주 66) 자세한 건 “‘Pacification’ by Calculated Frightfulness: The Testimony of Diane and Michael Jones on the Massacres of South Vietnamese Civilians by South Korean Mercenary Troops,” Pacification Monograph Number 2; edited with an Introduction by Edward S. Herman, Philadelphia, 1973을 보라.


(각주 67) 이와 같은 문제는 호주군이 전개한 평정작전에서도 나타났다. 알렉스 카레이(Alex Carey)의 “Australian Atrocities in Vietnam,” Sydney, N.S.W., 1968을 보라.


출처: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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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17 : 동남아시아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17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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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동남아시아편 감상평

어린시절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킨 책이 있다면, 만화작가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뺄 수가 없다. 초등학교ㆍ중학교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 대한 의문점 하나가 있었다. 왜 이 책은 주로 서구유럽 위주의 나라만 다뤘던걸까? 나는 이 점이 항상 의문이었다.

그러나 미국편 이후 중국편과 발칸반도 편, 동남아시아, 터키, 오세아니아, 러시아 편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늦게서야 작가가 다양한 국가를 다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원 생활이 바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읽고 싶었다. 그래서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동남아시아편과 러시아편을 대출했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에는 몰랐지만, 이원복씨는 상당히 보수우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이원복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만화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기분은 ˝이원복 실망이다.˝였다. 그가 우리나라의 친일청산 문제나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뉴라이트랑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은 뒤로하고 이번에 동남아시아편을 읽었다. 작가는 미얀마ㆍ태국ㆍ라오스ㆍ베트남ㆍ캄보디아ㆍ말레이시아ㆍ인도네시아ㆍ필리핀ㆍ싱가폴ㆍ브루나이ㆍ동티모르 순으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한다. 이원복 특성상 서문에서 밝히는 소위 대한민국 국뽕적 감상은 여전히 나이브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읽혔다. 내가 잘 모르던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만화를 통해 간략하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법 재미도 있다.

하지만 만화의 구성과 내용에도 적잖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원복 작가는 너무 지나치게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서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원복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빈곤은 엄밀히 따지자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지배다. 이원복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수탈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각국의 빈곤을 식민지 지배 이후에는 단순히 공산독재나 군부독재 그리고 왕정체제에 돌리기 바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달러 제국주의가 그 나라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어떤식으로 잠식해 나가는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만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이원복 작가의 맹신적 오류는 특히나 필리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이원복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가 얼마나 악독하고 잔혹했는지 말 그대로 외면한다. 1901년 미국이 아기날도 정부를 짓밟고, 식민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리핀인들을 짐승죽이듯이 학살한 역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략 100만 명의 필리핀인이 학살당한 것은 완전히 거세당해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에 다시 미군이 들어오자, 필리핀 민중이 미군을 다시 환영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은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맥아더 정부가 친일한 반역자들을 기반으로 필리핀에 친미정부를 세우고, 후크발라합을 포함한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을 잔혹하게 소탕한 역사는 당연히 거세당해있다.

인도네시아 부분도 비슷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수카르노에 대해, 독재로 인기를 잃었다고 이원복은 주장한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나쁜놈으로 묘사된건 미국의 CIA가 1955년 반둥회의를 통해 이른바 제3세계 진영의 축으로서, 반미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수카르노가 친미 독재자 수하르토보다 정당의 다양성을 인정했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 이원복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1965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가 독재정치를 펼치고, 반대파를 억압하고 학살한 부분에 대해 이원복은 마지못해 언급하지만, 그 정부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정부라는 건 언급조차 안한다. 결국 독재를 해서 물러났지만, 그 독재정부를 미국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원조 및 지원했는지는 언급을 안한 것이다.

이원복 교수의 정치ㆍ경제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1. 사회주의 체제는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다.
2.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항상 대안이다.
3. 그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빈부의 문제 및 정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4. 서구의 민주주의가 최선이다.
5. 서구식 자유선거를 안하면 다 독재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틀에 맞춰보려고 하니, 당연히 만화에서도 오류가 생긴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원복 교수의 장점도 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서 만큼우 비판적으로 보고, 이들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인권유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미국 주류사회가 흑역사로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들어 인터넷 상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 남베트남을 찬양하는 넷 인플루언서들이 창궐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원복은 베트남을 다루는 편에서 베트남 전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원복 작가는 베트남 전쟁의 근본적 선상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있음을 얘기하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에게 정당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파기한 미국의 행동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또한 남베트남의 친미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오직 반공주의만을 외치며, 토지개혁을 망친 반면, 호치민이 북베트남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이런 이원복 작가의 시각에 대해, 나무위키는 이상한 논리로 비난하지만, 이원복은 그저 서방의 주류적 시각에서 얘기한 것 밖에 없다. 그 외에도 미얀마나 말레이시아, 싱가폴, 브루나이, 동티모르 등은 내가 많이 모르는 역사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이원복 작가 특유의 전달력은 정말 강력하다. 이원복만이 가지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큰 장점이랄까.

오랜만에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었다. 비록 오류는 많지만, 세계사 지식을 쌓는데 이 책 보다 읽히기 쉬운 책은 없다고 본다. 비록 이원복이 반공주의자여도, 이런 점에선 대단하다고 본다. 조만간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편도 읽을 것이다. 다음에는 러시아편에 대한 리뷰를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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