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이야기 6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6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인 이야기 6을 읽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대규모 공습 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독일의 런던 대공습과 스탈린그라드 대공습, 영미 연합군의 함부르크 폭격과 드레스덴 폭격 그리고 미국의 도쿄 대공습까지 여러종류의 폭격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충칭 대공습을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있을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김명호가 쓴 중국인 이야기 6권은 일본군이 충칭을 폭격하던 것부터 시작된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한 이라면 충칭이라는 지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곳임을 알 것이다. 당시 백범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8년부터 1943년 8월까지 5년 동안 218차례의 항공 출격을 감행했고, 총 9,513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출격해 폭탄 2만 1,593발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1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당했다. 즉, 국민당 정부의 수도 충칭은 이와 같은 공습을 경험했다.

중국과 대만의 대립. 사실은 국공내전이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다. 대만으로 옮겨간 장제스는 병사들 중 특공대를 조직하여 중국 본토에 침투시키기도 했는데, 양측이 벌인 교전은 만만치 않았다.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냉전의 흐름 속에서 충돌했다면, 대만과 중국도 그런 충돌이 일어났다.

2009년 10월 31일 한 과학자가 숨을 거뒀다. 그는 ˝중국 우주과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첸쉐썬이다. 중국은 마오쩌둥 집권 시절인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인공위성 로케트 기술은 미국에서 왔다. 천쉐썬은 미국에서 공부한 인물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게 투항한 나치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을 심문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매카시즘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고 난 이후 FBI는 첸쉐썬을 감시했는데, 그게 결국 첸쉐썬을 중국으로 귀국하게 만들었다. 첸쉐썬에게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한 것은 중국 국민당이었지만, 첸쉐썬은 국민당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1964년에 핵폭탄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 다음으로 핵무장에 성공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옌안에 있을 당시 히로시마 원자탄 보도에 대해 믿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 점이 흥미롭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주중미군의 중국 여대생 강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중국 전역을 휩쓸 정도로 커진 문제였고, 적잖은 중국인들이 반미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사건이 커진 이유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강간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주한미군에 의한 범죄가 많이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사건이 묻혀버린 경우가 많다.

1992년 주한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은 이른바 N번방을 능가하는 수준의 범죄를 윤금이에게 저질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를 포함한 언론들의 반응은 ˝윤락녀다˝ 라는 식으로 미군의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에게 제대로된 목소리 조차 못내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니, 이번에 책에서 읽은 국민당의 행태는 조선일보를 생각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중국인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됐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힌다. 중국 근현대사를 하나의 이야기로써 접근하기 가장 좋은 책이다. 사진 자료도 많이 첨부해서 글씨만 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英賢. 2024-02-10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엔 복 꼭 많이 받으시길.

NamGiKim 2024-02-10 23:28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글은 시바타 마사요시 지음, 사상과 정치 경제 연구소 옮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2권, 소나무, 1991.을 참고하여 작성됐습니다.)


루마니아(Romania)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 우리말로 흡혈귀를 뜻하는 벰파이어(Vampire)일 것이다. 아니면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루미니아의 정치인 니콜라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를 들어봤을 것이다. 루마니아는 나라 이름답게, 고대역사에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세 시기에는 투르크계 유목민과 불가리아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몽골 제국의 침공도 받았었다. 14기에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이 나타났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루마니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것은 1848년 이후이며, 1877~1878년 발발한 러시아-터키 전쟁에 러시아 측에 참전하여 승리함으로써 국가의 독립을 이룩했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8월에 협상국 측에 참전하여 독일에 맞서 싸웠지만, 경제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받았다. 1918년 12월 루마니아와 트란실바니아가 통일됨으로써 루마니아는 통일 민족국가가 됐다. 루마니아는 자본주의적 공업 수준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었고, 정치체제는 입헌 군주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 파시스트 정당의 중심세력은 1930년대 초에 힘을 발휘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1938년 1월 루마니아 국왕이던 카를 2세에 의한 친파시즘적인 국가가 형성됐다. 1921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좌익들이 루마니아 공산당을 창당했지만, 당연히 이들은 자국 내에서 탄압받았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헌법을 폐지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었으며, 히틀러를 따라 자신을 총통이라고 칭했다. 즉, 루마니아에는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안토네스쿠가 장악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시점이던 1940년 9월에서 10월 안토네스쿠는 독일군의 루마니아 주둔을 승인했으며, 다음해인 1941년 2월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에 가담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안토네스쿠 또한 다음 날인 23일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을 게시하기에 이르렀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즘 운동에 가담했으며,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초대 서기장이다. 이후 그를 이은 것이 그 유명한 니콜라 차우셰스쿠다.)


루마니아의 반파시즘 해방운동은 일본학자 시바타 마사요시에 따르면, 총 4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1941년 6월부터 1943년 6월에 걸친 시기로 지하 공산당의 지도 아래 노동자의 사보타지를 주요한 투쟁수단으로 하는 투쟁을 중심으로 인민 각층의 투쟁이 점차 발전하여 반파시즘 민족해방 통일전선의 결성이 준비되던 시기다. 제2기는 1943년 6월부터 1944년 봄에 걸친 시기이며,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간의 통일 행동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안토네스쿠 세력이 고립되는 시기이다. 제3기는 1944년 봄부터 8월까지로 소련군에 의한 루마니아 해방 과정의 개시와 루마니아 인민의 저항운동이 발전하며 무장투쟁도 전개되기 시작하는 시기다. 이를 통해 안토네스쿠 파시스트 세력의 고립화가 정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제4기는 1944년 8월 23일 봉기이며 소련군에 의한 국토 해방의 진전과 결합하여 인민의 반파시즘 민족해방운동이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하여 안토네스쿠 군사 파시스트 독재를 타도하는 데 성공하는 시기다.


1941년 9월 루마니아의 지하 공산당은 “파시스트 점령자와 배신자 안토네스쿠를 비롯환 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루마니아 인민의 통일 민족 전선 강령”을 발표했으며, 이 시기 인민의 저항 운동은 인민의 모든 계급과 계층에 걸쳐서 전개됐다. 특히 독일의 전쟁기계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에서는 공산당원의 주도 아래 특별 사보타지 그룹이 조직됐고, 그들은 항공기 생산을 축소하거나 불량품을 생산했다. 철노 노동자들은 군용 열차를 연착시키거나 정지시키기도 했다. 노동자 파업도 벌어졌는데, 1941년부터 1944년에 걸쳐 183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5만 4,000명 이상이 이 투쟁에 참가했다. 이 중 파업은 39건 정도다.


1943년 2월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변하자 1943년 6월 루마니아에서는 공산당, 농민 전선, 애국자 동맹, 사회민주당 등이 같이 반히틀러 애국전선을 결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이 독일에게 불리해지자, 루마니아 내부에선 안토네스쿠의 친나치 친히틀러적 노선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생겼는데, 이는 한편 좌파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을 흔들리게 했다. 거기다 1943년 독일과 루마니아 사이에 맺어진 경제협정은 독일에 의한 루마니아 경제의 수탈 강화를 불러왔고, 이것은 역으로 반파시즘 진영의 세력 확장에 도움을 줬다.

(게오르기우데지 집권기 나온 노동절 관련 포스터)


1944년 3월 26일 소련 붉은군대 중 하나인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소련-루마니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진입했고, 5월 4일 소련군은 40만 명의 인구와 9,997㎢의 루마니아 영토를 해방했다. 참고로 루마니아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파시스트 진영 국가들 가운데서 최초였다. 따라서 루마니아에는 강력한 독일 파시스트 군단이 포진해 있었고, 루마니아의 최종적인 전면적 해방은 10월 25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44년을 거치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강화됐는데, 그해 8월에 옥중에서 운동을 지도하고 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와 기타 당 활동가들이 탈주에 성공했다.


이들은 테러로부터 당 조직을 방위하는 데 주의함과 동시에 단기간 내에 모든 당 조직을 재건하고 선전 활동을 강화시키는 한편, 노동자 대중과의 결합을 굳건히 했다. 그와 아울러 군사부를 재편성하고 군대 내에서의 활동을 강화했다. 여러 애국 단체들의 활동을 강화하고 개선시키는 조처들이 취해졌다. 이리하여, 공산당은 당의 통일이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활동이 개선되고 당의 지도적 역할이 고양됐다. 이들은 노동자의 긴급한 요구로써, “8시간 노동제 실현, 급등한 물가 수준에 상응하는 임금의 즉시 인상, 노동조합과 정치단체를 결성할 권리 보장, 언론의 자유, 정치적 신조와 애국 및 반히틀러 투쟁으로 인한 체포자의 즉각적 석방, 노동자 통제하의 사회보장 확립,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실현, 노동자용 저렴한 주택의 실현”등을 내세웠다.


1944년 공산당의 전면적인 활동은 4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전단 살포, 나치에 복무하는 노동현장 결근, 파업, 사보타지 등을 이용하면서, 무장투쟁도 시작했다. 그 투쟁은 단순히 경제적인 투쟁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요구와 결합됐다. 이와 같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더불어 농민들의 투쟁도 발전했다. 루마니아 농민들은 농산물의 공출거부, 납세거부, 작물의 수확 사보타주, 자신들의 지역에 독일군을 배치하는 조치에 대한 항의 등을 수행했다. 지역에 따라선 독일군에 맞선 농민들의 무장투쟁도 전개됐다. 대학 교수, 기술자, 의사, 작가, 예술가 등 인텔리겐치아도 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투쟁에 나섰고, 군대 내부에서도 병사와 장교 사이에 동요가 커지면서 탈영이 속출했다. 

(1944년 8월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한 소련군 탱크)


1944년 초 소련의 원조를 받아 루마니아 국내 공산당 지도하에 빨치산이 조직되고, 이들은 나치 독일과 루마니아 파시즘 세력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참고로 1943년 10월 소련군의 원조를 받아 루마니아 인민군이 편성됐는데, 이는 루마니아 망명자와 포로 중의 지원자들에 의해 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9,589명에 달했다. 이 병력은 제1 루마니아 의용 사단으로 불렸다. 이들은 소련군과 공동으로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3월에는 제2 루마니아 의용 사단이 편성됐는데, 이들의 경우 실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44년 6월 15일 기준으로 보자면, 루마니아에는 대략 6만 명의 독일군 병력이 주둔했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943년 봄에 무장 봉기 준비를 결정했는데, 실행은 1944년 8월에 이르러서였다. 


1944년 8월 5일 루마니아 파시스트인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와 회담하여 독일군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했다. 그로부터 15일 후인 8월 20일 소련군의 진격이 다시 강화됐으며, 대규모 봉기를 결정한 공산당은 23일 국왕에게 안토네스쿠를 포함한 파시스트 각료를 체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안토네스쿠를 포함한 파시스트들이 체포됐다. 파시스트 정부 각료가 체포되었다는 정보에 따라 봉기 세력들은 독일군 기관과 부대를 점거하고 있는 건물을 탈취했으며, 파시스트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다음 날인 24일 수도 부쿠레슈티를 폭격하면서 역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4일 뒤인 28일 부쿠레슈티의 독일군은 섬멸됐다.

(사회주의 시절 루마니아에서 나온 해방기념일 포스터)


1944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부쿠레슈티에서 발생한 시가전을 포함하여 여러 전투에서 루마니아군과 공산당이 주도한 무장 애국대는 독일군 장군 14명, 장교 1,200명 이상을 포함한 53,159명을 포로로 붙잡은 것으로 추정되며, 8월 31일 소련군과 루마니아 제1의용사단은 인민의 손으로 해방된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이후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은 공동작전을 벌여 10월 25일 특히 전투가 격렬했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포함한 전전의 루마니아 전영토를 해방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반파시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특히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44년 국토가 해방된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전후재건과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의 길로 들어섰다. 1946년 11월 19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산당, 사회 민주당, 자유당 분파, 농민 전선, 민족 인민당(애국자 동맹)은 통일 블록을 조직하고 격심한 선거전을 전개했다. 선거 결과에서 통일 블록은 유효 투표의 71.8%, 총 의석 414석 가운데 347석을 획득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민족 농민당은 33석, 자유당은 3석의 의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집권했으며, 공산당은 1947년 말 당원 수 8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특수군사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글쓴이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전황과 여러 사건들을 지켜봐왔다. 전쟁 초기,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전면적인 침공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또한, 침공을 하더라도 친러 계열 주민들이 많은 돈바스 쪽으로만 갈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전쟁은 시작됐고 러시아군은 동부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와 서부에서도 군사작전을 게시했다.


전쟁 초기, 러시아가 수도 키예프를 향해 진격을 하자, 글쓴이는 전쟁이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예상은 완벽히 빚나갔다. 그 시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보도들은 지극히 우크라이나와 서구 중심적이었기에, 글쓴이 또한 서구의 내러티브에 아주 약간은 흔들렸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초기 보도된 민간인 피해에 대한 편향된 보도들은 사람을 충분히 그렇게 세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약간의 흔들림이 완벽히 바뀌게 된 것은 2022년 5월 초에 들은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님의 강연이었다. 이 강연을 들으며, 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떻게 잘못 생각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전쟁 전부터 스테판 반데라나 OUN 등의 우크라이나 나치즘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2013년에 발생한 유로마이단 시위가 CIA에 의해 사주 받은 폭동인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 전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인 Ukraine On Fire를 리뷰한 것이 바로 글쓴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언론들이 편파적으로 보도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주류 언론과 다른 주장을 하다가 블로그와 일부 커뮤니티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어떤 이는 “미국이 이라크 폭격할 때는 그렇게 자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은 이들이 정작 러우전에선 난리를 친다.”고 얘기한 내 글에 대해, “이 정도면 병이다.”라고까지 했었다. 그 외에도 스테판 반데라와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홀로코스트와 인종청소를 벌인 역사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가, “너는 푸틴에게 얼마를 받았냐?”는 조리돌림도 당했다. 물론 이런 욕을 무수히 많이 인터넷상에서 들었다.


이야기를 다시 이해영 교수의 강연으로 돌리자면, 이 강연을 통해 글쓴이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무엇을 목표로한 것이고, 또 어떻게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시켰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특수군사작전에서 러시아는 키예프를 그렇게 맹폭격한 적이 없다.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그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무튼, 그 이후부터 이해영 교수의 페이스북 글들을 유심히 보게 됐고, 더 나아가 한설 장군의 글들 그리고 유튜브에서 러우전에 대해 서구의 왜곡을 까는 영상들을 보다 더 많이 시청하게 됐다. MBC 전 보도국장 박상후의 ‘문명개화’나 벨라루스 교민인 최기영 교수가 운영하는 ‘러시아 학당’,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교민인 안정현 씨의 ‘모스누나’ 그리고 재미교포인 스캇 리의 ‘Scott 인간과 자유’ 등도 같이 보게 됐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2022년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게시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선 그 이유 중 하나인 2022년 초 돈바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한다. 우선 유로마이단부터 얘기하겠다. 2013년 오바마 행정부의 사주로 일어난 유로마이단 폭동은 친러 계열 대통령이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축출하고, 포로셴코를 집권하게 만들었다. 포로셴코 정부는 마이단 폭동에서 자라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을 키웠고, 이들을 군사화 했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무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마이단 폭동으로 집권한 포로셴코 정부는 2014년부터 국가의 예산 지출 방향을 복지로부터 군사력 강화로 바꿨다. 2015년에서 2019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국방비는 17억 달러에서 89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2019년에는 GDP의 6%를 차지하는 수준에 달했다. GDP 비율로 비교해보자면 우크라이나는 서방 선진국에 비해 3배나 더 많은 금액을 군대에 투자한 셈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는 군사력을 강화했고, 이들을 실전에 투입했다. 2014년부터 친러계열 주민들이 돈바스 지역에서 저항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시작된 것이 돈바스 내전이다.


돈바스 내전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아조프 연대와 같은 네오나치 성향의 민병대들이 존재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정규군이 됐다. 돈바스 내전은 8년간 지속됐고, 이 과정에서 최소 15,000명의 친러 계열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일각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추산하기도 한다. 2019년 우크라이나에서 코미디언 출신인 블라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젤렌스키는 유대계 출신에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으로 참전한 사람이기도 했다. 거기다 돈바스 내전의 종식을 약속하기도 해서, 동부계열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젤렌스키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포로셴코보다 더 악랄한 전쟁광이었다.


2021년 2월 젤렌스키는 돈바스 분쟁 지역 근처로 병력과 중화기를 보냈다. 이 병력들은 돈바스를 공격했다. 말 그대로 전쟁 도발행위를 한 것이다. 당시 젤렌스키의 이러한 행동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충돌할 뻔했다. 다만, 러시아가 10만 명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하고 초강경 대응하겠다고 위협을 했기에,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젤렌스키가 이러한 짓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돈바스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서우크라이나의 지지층들을 결집시키고, 러시아 침략의 희생자로 보이도록 그리고 자신의 나라가 러시아의 대유럽 진출을 저지하는 전선으로 보이도록 연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이 젤렌스키의 우크라이나 외교의 핵심이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21년 4월 나토 가입이 안 될 경우 핵무장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그해 봄 NATO군은 30년 만의 최대 규모로 합동 군사훈련인 디펜더 유럽을 실시했다. 말 그대로 러시아를 자극하기 위한 도발이란 도발은 거의 다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2021년 내내 서구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했다는 뉴스를 내보냈지만, 정작 우크라이나가 전체 병력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인 12만 5,000명의 병력을 돈바스 분쟁 구역에 집결시킨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2014년 9월에 체결된 민스크 협정에서 양측은 도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은 철저히 깨졌다.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의해서 말이다. 민스크 협정으로 설치된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우크라이나 ‘특수감독 미션’은 돈바스 내 우크라이나와 분리 공화국 사이의 접촉선을 따라 매일 휴전 위반 사항을 기록했는데, 이기록에 따르면 2022년 2월 16일부터 돈바스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이 기록을 보면, 2월 16일 509회의 정전 위반과 316회의 폭발음이 있었다. 2월 17일부터 22일까지의 기록을 보면, 17일에는 870회의 정전 위반, 654회 폭발음, 18일 1,566회 정전 위반, 1,413회 폭발음, 19~20일 3,231회 정전 위반, 2,026회 폭발음, 21일 1,927회 정전 위반, 1,481회 폭발음, 22일 1,710회 정전 위반, 1,420회 폭발음이 기록됐다.


스위스 정보부 대령 츨순인 자크 보는 이 기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2월 17일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며칠 안에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미스터리다. 그러나 OSCE 일일 보고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16일 이후 돈바스 주민에 대한 포격이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보자면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와 미국의 바이든은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에는 당연히 이러한 점이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서방 언론과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2022월 2월 19일 젤렌스키는 “부다페스트의정서보다 나토 조약 제5조가 더 효과적이라고 믿고 싶다”라고 선언하면서 핵무장 계획을 밝혔다. 이는 당연히 러시아 입장에서 실존적 위협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한국의 언론에는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그저 러시아가 약소국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괴롭힌다는 내러티브로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게시하자 서방은 자신들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리비아에서 어떠한 짓거리를 했는지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전범 푸틴이 약소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내러티브를 광범위하게 퍼뜨렸다. 그래서 전쟁 초기 왜곡된 가짜뉴스들과 우크라이나 오신트들이 아무런 검증 없이, 퍼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정규군화 한 아조프 포함 네오나치 정규병력들이 “침략자 러시아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수호자”로 미화됐다. 물론 언론은 나치가 있다는 사실을 짧게나마 언급하긴 했다. 그러나 자기들 멋대로 우크라이나의 나치즘과 발트 삼국의 나치즘의 문제를 심각하게 왜곡해서 전달했다.


즉, “이들이 나치에 협력한 건 소련 때문이고, 따라서 지금까지도 일부 극단적인 세력들이 소수로 남아 있으며, 러시아가 프로파간다로 사용한다.”는 내러티브를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옹호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치주의자 스테판 반데라도 옹호했다. 그래서 글쓴이는 전쟁 초기부터 약간은 흔들려도 우크라이나 깃발을 든 반전 평화운동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네러티브는 사실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경찰청이 2018년도에 발표한 것에 의하면 반데라주의 성향 단체가 군소조직 포함하여 3,840여 개 정도로 집계된다고 한다. 이쪽 전문가인 정길선 교수에 따르면, 등록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10,000여개로 추정될 정도다. 말이 반데라주의 성향 단체지 이거 다 네오나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만 500여 개가 넘게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소수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며, 몰역사적인 시각이다.


우크라이나가 패배해가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소위 ‘우뽕’들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범죄 국가이며, 따라서 이들에 맞서 서구가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고 헛소리들을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한다며, 우크라이나 반전 집회를 주도한 인사들은 침략했다는 내러티브에 빠져, 어떻게든 이를 우크라이나 민중들과 엮으며 반데라가 들었던 우크라이나 깃발을 잘만 내세운다. 


그러나 본문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전쟁을 일으킨 주체는 러시아가 아니라, 포로셴코와 젤렌스키 그리고 미국과 서방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들을 키웠으며, 2월 24일 러시아가 침공하도록 돈바스를 포격하여 전쟁을 도발했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비약을 자주 저지른다. 참으로 웃기고 한심한 이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악마화시키며 서구의 무기 지원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2022년 4월에 발생한 부차 학살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4-01-13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국내 기레기들은 우크라이나의 호전적 반공 극우 혐러성향과 나치부역자 숭배행각에 대해서는 절대 보도하지 않는다죠.
 
먼나라 이웃나라 21 : 러시아 1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21
이원복 글.그림, 그림떼 그림진행 / 김영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전근대편 리뷰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는 내가 어린 시절 열심히 읽었던 책 중 하나다. 이원복 특유의 설명은 읽는이의 흥미를 상당히 유발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편이 등장했다는걸 알게된 것은 아마 코로나 초기였을 것이다.

러시아편이 나왔을 당시 읽어보고 싶긴 했지만, 이원복이 뉴라이트라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이 사람 책에 거리를 뒀다. 2년 전 동남아시아 편을 읽었는데, 재밌게 읽긴 했으나 필리핀 역사를 설명한 부분에서 ˝필리핀인들이 미국의 식민지배에 크게 저항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해서 어이없던 적이 있었다.

그런 문제를 뒤로하고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전근대 편을 오랜만에 읽었다. 확실히 만화다보니 읽는 재미는 있다. 그리고 러시아 역사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이들이 읽기엔 비교적 러시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례들을 한국 역사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도 재밌었다. 예를 들어, 예카테리나 여제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농민 봉기를 1894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비유한다던지 뭐 그런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책에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해방 이후 김일성이 고국으로 귀국할 때 타고온 소련군 함선 이름이 푸가초프호다.

사실 이번 장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는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다. 이반뇌제 사후 일어난 일인데, 그의 혈통을 이었다는 이가 나타난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반 뇌제 사후 그의 4번째 아내인 표도로브나 나가야는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죽고 이반 뇌제에 불만을 품었던 신하들에 의해 수도원으로 쫓겨났다.

그가 나은 아들이 죽었음에도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1600년 대 초 드미트리를 참칭하는 이가 기아와 굶주림 속에 빠져 있던 상황에 등장하여 정권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 드미트리는 가짜였고, 자신의 사적 권력욕을 채우다 1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그 드미트리의 이름을 이용한 이가 두번이나 더 등장했다. 물론 이들 모두 기회주의자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관련한 얘기도 흥미롭다. 사실 8~9년 전 러시아사를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조국전쟁에 대해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 만화로 보니 더 쉽게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그 외에도 책은 차이코프스키나 푸쉬킨 등 러시아사의 유명한 인물들도 다수 소개한다.

물론 이번 편에서도 내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하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솔직히 이원복 작가가 아프리카인을 묘사할 때, 과거 서구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사 지식이 전혀 없는 이가 접근하기에는 여러모로 유용할 것이다. 다음에 현대편을 읽고 리뷰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 공산당에 대한 강력한 비판 내지는 비난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수민족 문제 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문제고 다른 하나는 티베트 자치구 문제다. 티베트 문제는 서구에서 가장 많이 내세우는 달라이 라마와 이를 지지하는 서구 세력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 됐다. 이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항상 다음과 같다. 티베트는 평화로웠지만,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점령했고, 수많은 티베트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티베트 문제에 대해 단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서방의 악선전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은 서구가 외면하는 티베트 근현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티베트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1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냐트리첸포가 40세대에 걸친 왕정의 시조가 됐고, 거의 1000년 후에 중국과 티베트의 전쟁이 8세기 트르디축텐(36대 왕) 통치 기간에 일어나, 티베트가 중국의 여러 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참고로 티베트의 승리를 기념하는 돌기둥이 20세기 말까지 포탈라 궁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티베트는 네팔이나 인도에 비해 불교가 상대적으로 늦게 전파됐다. 몽골 군대가 티베트에 도달했을 때,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교를 종교로 채택했고, 이에 따라 원 왕조와 만주족의 청 왕조 동안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공식 종교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 모든 티베트인의 10% 가량이 남려 승려였다고 한다. 사회체제는 봉건적이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에 따르면, 티베트는 종교적 중심지로서 자치와 평화를 누렸지만, 1896년 청나라 군대가 침공했다. 처음에는 티베트가 이를 격퇴했으나, 1903년 중국 장군 도살자 팽과 그의 군대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을 도륙하면서 티베트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잔혹함의 문제가 청나라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7세기 초에서 18세기까지 티베트 불교 종파들은 서로 무력충돌을 벌였고, 즉결처형도 빈번히 일어났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인도로 도망쳤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신해혁명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티베트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와 불교도들이 통치하는 봉건사회였다.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티베트가 해방되기 10년 전인 1939년 전국에 약 6,00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소년 4명 중 1명이 승려였다는 얘기도 있다. 달라이 라마가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통치했던 1959년까지 대부분의 티베트 농경지는 여전히 농노들이 관리했으며, 승려와 라마 개개인이 무역과 사업 그리고 사채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회였다.

 

그 중 드래풍(Drepung)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주의 하나로 무려 185개의 영지와 25천명의 농노, 300개의 거대한 목장과 16천명의 목동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의 재산은 대부분 상위 계급의 라마승에게 귀속 되었으며 이들 대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세속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티베트 군사령관은 4천 평방 킬로미터의 땅과 35백 명의 농노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달라이 라마 내각의 회원이었다.

 

티베트에는 규모는 작았으나 정규 군대가 있었다. 이 군대는 일종의 헌병대로 지주를 위한 질서유지와 도망간 농노를 붙잡는 일을 하였다. 티베트의 어린 소년들은 대게 부모로부터 떨어져 사원에서 승려로 양성됐다. 그 시기 승려 타시 세링은 소작농의 자녀가 사원에서 성폭행 당하는 일은 흔했으며 자신도 9세부터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해왔다고 말했을 정도다. 또한, 사원은 빈곤에 시달리는 농부의 아이들을 징집하여 일생 동안 집안의 노예나 춤꾼, 사병으로 일하게 했다.

 

달라이 라마 통치 시기의 티베트에서는 도망친 농노와 절도행위자에 눈알 파내기, 혀 뽑기, 근육, 수족 절단 등의 고문과 사지절단 등의 처벌이 성행했다. 1959년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은 티베트 권력자들이 사용한 고문기구 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는 모든 사이즈의 수갑이 있었는데, 아동용도 있었다. 코와 귀를 자르는 기구, 눈을 파내는 기구, 손목을 자르는 기구를 비롯해 무릎, 종아리, 다리 분쇄기, 불도장 집게, 채찍, 심지어 내장을 파내는 특수 기구도 있었다. 이러한 기구들만 보더라도 티베트 봉건 계급의 통치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던 티베트의 상황은 급반전됐다. 1949년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말이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티베트에 군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95110월까지는 그러했다. 티베트의 지배계급들은 혁명이 성공한 중국에서 지주의 재산이 몰수되고, 빈농들에게 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지배층들은 이를 막기 위해 농노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자행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서 이들에게 탄압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은 1959년 이후로 노예제와 무급 농노제를 철폐했으며, 과거 티베트 지배계급이 일삼던 채찍질, 사지 절단 등의 극단적인 처벌도 없앴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온갖 고문 및 가혹행위들이 금지됐다. 중국 공산당은 살인적인 세금제도를 없앴고, 직업 장려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영향으로 실업률과 노숙자가 크게 감소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대중 교육을 실시하여 사찰의 교육 독점을 없앴으며, 라싸 지역에 하수도와 전기시설을 만들었다.

 

당연히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나치 친위대 출신이자 티베트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중국에 반항했던 티베트인들은 귀족, 유사 귀족 그리고 라마승들이었으며. 이들 귀족과 라마승들은 도로나 다리에서 노동하는 최하층 임무를 맡게 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관광객 도착 전에 도시 청소를 하게 되어 더욱 모멸감을 느꼈다.”

 

중국 공산당은 1961년에 이르러 지주와 라마승들이 소유한 재산을 압수하고 농민들을 수백 개 자치구역으로 재배속했다. 중국은 수십만 에크르에 달하는 토지를 소작인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귀족 소유의 가축도 가난한 목동들의 집산농장으로 보내졌다. 가축사육이 개선되었고 새롭고 다양한 야채와 새로운 품종의 밀과 보리가 도입되었다. 배수시설도 좋아졌다. 이 모든 개선을 통해 자연히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해 일각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인들을 무차별 탄압하고 학살했으며, 그 숫자가 120만 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00~120만 명이 죽었다는 출처는 어디일까? 아래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달라이 라마의 막내 동생이자 측근이었던 텐진 체걀중국점령으로 인해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대대적인 탄압 6년 전인 1953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티베트의 인구는 1274천 명이었다. 다른 인구 조사에서도 티베트의 인구는 약 2백 만 명 정도였다. 만약 중국이 1960년 초에 120만 명의 티베트인을 죽였다면 도시 전체와 대부분 시골지역의 거의 모든 티베트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어야하고, 티베트 땅은 집단 처형장과 공동묘지가 널려 있는 도살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티베트를 공격한 중국 군대는 매우 소규모였으며,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처형만 한다더라도 부족한 숫자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인 1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이후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좀 더 유연하게 했고, 피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1980년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율과 자치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현재 티베트인들은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잔여 수확물을 팔수도 있고, 곡식 재배와 들소와 양의 사육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허용되었고 국경 통제가 완화되어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에 망명한 친척을 만나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냉전 시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중국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만을 희생시켰다. 미국의 전선은 단순히 한반도와 베트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에도 있었다. 1950년대 중반 CIA는 수십 명의 반중국 티베트 투사를 무기와 통신 훈련을 위해 태평양의 사이판 섬으로 보내, 그들이 다시 티베트로 침투하도록 도왔다. 이는 미국이 동유럽과 소련에서 했던 행위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의 극우주의 무장 단체가 냉전 시기 소련에 침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봉건 지배계급들은 타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CIA는 달라이 라마의 비행자금을 지원했다. 1998년 미 국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60년대를 통틀어 CIA가 티베트 망명 단체에 비밀리에 지원한 액수는 년 170만 달러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달라이 라마의 조직은 자체적으로 성명을 내고 자신들이 1960년대에 미국 CIA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아 중국의 모택동 혁명을 음해하기 위한 망명자 무장부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CIA의 지원을 받았던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 세력은 10년간 중국 공산당에 맞서 저항을 하다가 1만 명이 죽었다. 달라이 라마가 CIA에서 받던 연봉은 186,000달러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이 미국에 의해 지원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 한 일은 억압받던 대다수 티베트인들에게 해방을 의미했다. 반면에 미국이 한 일은 민중들을 억압하고 고문하던 봉건세력을 지원한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의 티베트 민중을 해방했으며, 악랄한 반혁명 세력에 맞서 투쟁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서구 제국주의가 티베트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왜곡하고 있는 역사다. 중국 공산당은 분명히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그런 성격은 앞서 언급한 중국 공산당의 티베트 정책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티베트 봉건세력과 미국의 사기극에 속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