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들어 한국에선 소위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많이 주목받았던 것 같다.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이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사회현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공간에서의 남녀차별 및 여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나타난 것도 분명히 있다. 아마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전사회적인 영역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이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방법론에 있어서 시민들에게 충격과 혐오를 준것도 사실이지만, 이 계기를 통해서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연결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좋고 싫고의 단순한 감정을 떠나서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의 한 현상이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급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강력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안티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안티 페미니즘은 원래부터도 일간베스트와 같이 차마 입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반동조직에 항상 존재해 왔지만, 페미니즘의 부상과 더불어 일부 인사들의 주장에 살이 붙어 사상화 되었고, 조직화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올해 봄에 강남역에서 열렸던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집회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급부로 엄청나게 조직하고 세력을 부풀렸지만, 일간베스트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더 타락의 길을 걸었다. 왜냐하면 반공주의라는 극단적 반혁명 사상이 머리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페미니즘=사회주의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심을 드러내고 있고, 좌파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심지어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계승받아 이승만과 그의 반공사상을 내세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반북관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그냥 안티페미니즘=반공주의라는 공식이 대체로 성립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처럼 이번에 강남역에서 혐오집회를 벌였던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 진영은 본질적으로 반동이며, 사회적으로 청산해야할 암덩어리고 우리가 연대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재 주류 페미니즘의 의견을 다 동의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다는 것은 절대 아니며, 그들이 범하는 일부 비과학적 접근은 상당히 경계해야 한다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이쪽 분야에 대해선 학습이 부족하기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각을 적어놓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내 sns 친구들 중에는 페미니스트들도 있고, 안티 페미니즘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양면 다 보려고 하는 쪽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도 있겠으나, 이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선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난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의 진영보다 안티 페미니즘 진영에 반감이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부터가 좌파를 자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치녀'나 '보슬아치' 등등의 단어들을 쓰는 이들 그리고 반공을 내세우는 그들을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리자면 반공을 중심으로 두고 있는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은 당연히 청산해야할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은 동맹세력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있어서 적이고 반동이다! 이들을 분쇄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가 얘기하는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은 실천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그리고 과학적 비판과 더불어 이들에 맞선 투쟁도 당연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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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11-26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페미니즘도 신-신보수주의로 볼수 있지요..

NamGiKim 2020-11-26 13:57   좋아요 1 | URL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겠죠. 어디가 되었든 문화 탈레반이 되서는 안되겠죠.
 

지난 3월 빅터 피게로아가 쓴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아옌데의 생애를 정리한 인물 평전으로 소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혁명적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책이었다. 3번의 대통령 선거 도전 끝에 1970년 칠레의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세계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다.


그는 과거 쿠바의 카스트로와 미래의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가 그랬듯이 억압받고 착취받던 인민들을 위해 미제가 독점하고 있던 여러 생산수단들을 국유화하고,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복지라는 인류가 추구해야할 도덕적 보편 가치들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아옌데가 당선되기가 무섭게 미제는 사회주의 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기가 무섭게 그 나라를 망치기 위해 CIA를 통해 정치공작과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칠레의 슈나이더 장군을 암살하고, 반동세력들에게 자금을 갖다 바치고, 칠레 곳곳에서 상점 방화, 주유소 파괴 등의 온갖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지고 있던 미제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계획하고 저지른 테러 행위였다. 경제제재는 기본이고, 분유가 없어 고통받던 칠레의 유아와 어린이들에게 더 고통을 주기 위해 미국은 분유 수입을 끊어버리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반혁명 시위를 주도했다.


그래도 1972년 아옌데의 지지율이 오르자, 미국은 사회주의 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한다. 그렇게 해서 1973년 9월 11일 미제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반혁명 반동 세력들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탱크로 포위하고 전투기로 폭격한 뒤, 교전에 돌입하여 AK-47를 들고 저항하던 아옌데를 사살했다. 아옌데가 죽은 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수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칠레의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당일 3200명을 경기장에서 학살했고, 그 이후 빨갱이 색출하에 수만 명을 학살했다. 칠레의 산과 바다는 사회주의자들과 죄없는 시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더 나아가 피노체트는 세계 최초로 시도해보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실행했다.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칠레에 적용하여 부익부 빈익빈이 극대화된 사회를 만들었다. 일각에서 말하는 것 처럼 지표적으로야 경제는 성장했다. 대신 일반적인 인민대중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소수의 자본가들이 독점했다. 피노체트가 집권하며 과거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과 역사는 지워져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중가요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와 <벤세레모스(우리는 승리하리다!)>처럼 칠레 민중은 파시즘 정권에 맞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투쟁했고, 2019년에도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강타하는 중이던 2020년 10월 피노체트 헌법을 궁극적으로 폐지했다. 아옌데가 죽기전 했던 연설에서 처럼 그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올해 '피노체트 헌법 폐지'를 통해 증명되었다.


최근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칠레 뿐만 아니라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과 같은 중남미 국가에서 진보세력들이 지지를 받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꿈과 희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악한 군사독재정권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중남미 인민들이 꿈꾸는 사회처럼 말이다 사회주의와 단결한 민중은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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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


(1964년 미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 대한 침략을 강화할 당시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인 보응우옌잡 장군이 디엔비엔푸 전투 10주년을 맞이해서 쓴 글입니다. 최근에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그의 자서전 디엔비엔푸에서 퍼왔습니다.)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역과 동춘 전역은 한마디로 말해 우리 군과 인민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승리들이었다. 이런 위대한 승리는 큰 족적. 즉,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미국 개입주의자들에 대항해 우리 인민들이 수행한 구국을 위한 저항전쟁의 진화 과정에 중요한 변화로 기록되었다. 이는 저항전쟁의 마지막 승리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저항전쟁의 새로운 측면을 분석한 끝에 다음과 같은 사항이 도출되었다.


첫째, 우리는 1953~1954 동춘 기간 전략적 공세에서 전국에 걸쳐 다양한 전장에서 많은 공격을 단행했다. 1950년 국경작전부터 국부적인 반격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우리 정규군은 특히 북부에서 계절 별로, 혹은 정해진 기간 동안 주전장에서 성공적인 공격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이 주전장에서 주도권을 유지했다. 적은 주도권 회복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우리가 이를 무산시켰다. 1953년 추동에서 1954년 춘계까지, 우리 정규군은 북부의 여러 전선뿐만 아니라 제5연합구역을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베트남 의용군은 팟헷 라오스 해방군과 협력하여 북부, 중부, 남부 라오스에서 공세를 펼쳤다. 1953년 우리의 추동 공세 범위는 주전장을 넘어 남부 베트남과 전 인도차이나로 뻗어갔다.


둘째, 추동공세의 제2단계를 진행하던 중, 우리는 주 전선인 디엔비엔푸에서 적의 중요 부대가 방어 중인 가장 강력한 요새전술기지에 대규모 공세를 단행하기 위해 아군 정예부대를 대부분 집중시켰다. 추동작전의 초기 단계만 해도 아군의 작전 경향은 적의 일부를 공격해 소멸시키기 위해 적이 상당히 노출된 전략적 진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반면 디엔비엔푸 작전에서는 적의 병력을 소멸시키고, 적이 난공불락으로 여기던 집단전술기지를 파괴하기 위해 아군 주력부대를 집중시켰다. 이 작전은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셋째, 1953~1954년 동춘 전역에는 작전 형태의 변화가 있었다. 포위전과 북부 전장의 전투를 포함해 기동전이 폭넓게 발전했고, 제5연합구역과 라오스에서 주역을 담당했다. 우리의 작전 형태에도 보다 큰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도, 동춘 전역 초기에도, 우리 통상적인 기동전을 취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전장의 중심점이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우리 군은 새로운 작전형태인 대규모 진지전을 수행했다. 게릴라전은 당시 적 후방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빙찌티엔과 남부에서는 주역을 담당했다. 디엔비엔푸 작전에서 아군은 이전까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위대한 성공을 이룩했다. 이런 성공으로 인해 우리의 저항전쟁은 국부적 반격에서 대규모 전략적 공세로, 북부 전선의 전략적 주도권 확보에서 전국에 걸친 모든 전선의 주도권 획득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요소에서 위대한 디엔비엔푸 승리와 다른 동춘 승리들의 위대한 전략적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디엔비엔푸는 우리 군이 싸웠던 가장 큰 전투였고, 거의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에서 우리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그리고 동 전투는 역사상 약소국이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위대한 숭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는 디엔비엔푸에서 16,0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집단전술기지의 최고사령부를 전부 포로로 잡았다. 거기에는 장군 1명, 대령과 중령 16명, 장교와 부사관 1,749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적 병력으로는 17개 정예 보병대대(7개 공정 대대 포함)뿐만 아니라 3개 포병대대와 약 1개 공병대대가 있었다.


동춘 전역에서 전국에 걸친 전체적인 조사를 한 결과, 우리는 적군 112,000명을 전장에서 퇴출시켰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인도차이나에 있던 모든 적군의 1/4에 해당하는 규모로, 25개 대대를 완전히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디엔비엔푸에서 62대의 미군 폭격기, 전투기, 수송기를 격추시켰고, 다른 전선에서 177대를 격추해 인도차이나에서 적 공군의 상당 부분을 제거했다. 침략전쟁 전반에 걸쳐 프랑스가 그렇게 빨리, 그와 같이 심대한 손실을 입은 경우는 없었다. 적의 입장에서 더욱 통탄할 일은, 패배한 적군의 거의 대부분이 나바르 전략 기동군의 중추로 여겨지던 공정 대대들과 유럽-아프리카 대대 등 최고의 정예부대였다는 점이다. 이런 심각한 손실은 프랑스 원정권 최고사령부의 불안을 야기했고, 장군들과 장병들의 사기를 보다 빠르게 저하시켰다.


북부에서 라이처우와 디엔비엔푸를 해방한 이후, 우리는 처음으로 적을 북서지방에서 내쫓고, 저항기지를 확대했으며, 북부의 모든 산악지역을 차지하고 북부 라오스의 광활한 해방구와 연결했다. 이후 적의 영향력은 홍강 삼각주 일대로 국한되었다. 적이 그토록 원하던 우리 해방구 가운데 하나인 제5연합구역은 크게 확대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떠이응웬 북쪽의 넓은 지역이 해방되었다. 적으로 인한 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일대의 위협도 사라져버렸다. 우리 해방구는 해안에서 시작해 라오스 국경에 이르고, 남부 라오스와 연결되어 남부 인도차이나에 있던 적에게 새로운 위협을 안겨주었다.


북부 삼각주, 빙찌티엔, 그리고 남부의 적 후방지역에 속한 여러 전선에서 게릴라 기지와 게릴라 구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반면 적의 점령지역은 대폭 축소되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도에는 한 개의 점으로 표시되었다. 북부 삼각주에서 적의 통제 지역이 오그라들면서 적 후방지역의 3/4이 해방되었다. 라오스에서는 팟헷 라오스 해방군과 베트남 의용군이 퐁살리성과 남오우강 유역을 해방시켜 북부 라오스의 기지와 중부, 남부 라오스의 해방구를 확장했다. 전국적으로 볼 때, 영토와 인민의 50% 이상이 해방되었다.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대첩으로 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방점을 찍자, 나바르 군사계획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적은 대규모 병력을 상실했고, 새로 보충된 괴뢰군 부대들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적의 입장에서는 디엔비엔푸 집단전술기지 함락이 야기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장 강력한 최고의 방어체계가 격파된 이상 이제 어떤 방어체계도 손쉽게 파괴당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이와 같은 위험 속에서는 나바르 계획에 포함된 전략적 공세 감행을 꿈도 꿀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전쟁상인들이 계산했던 결정적 승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가장 큰관심사는 잔여전력마저 완전히 소멸당하기 저에 프랑스 원정군을 구원할 방안이었다. 1954년 5월 중순, 엘리 장군이 나바르에게 북부 삼각주에서 필요 최소한의 지역만을 점거하고 잔여병력은 북위 18도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정부지침을 전달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적은 비엣찌, 처벤 일대와 남딩, 타이빙, 닝빙, 팟지엠, 부이추를 포함한 삼각주 남부 전 지역에서 도주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적을 추격하게 되었고, 많은 적을 처치했다. 수만 명의 괴뢰군이 탈영해 인민의 편에 가담했다.


디엔비엔푸의 승리는 1954년 인도차이나에 평화를 재정착시키기 위한 제네바 회담이 준비 중인 바로 그 시기에 달성되었다. 이 승리는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장기간 지속하고 확전시킬 방안을 모색하며 제네바 회담을 유야무야하려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과 미국 개입주의자들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최후까지 투쟁’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의 국제화’ 정책의 주역이었던 라니엘-비도 정부는 투표에서 패했고, 보다 파시스트적 경향이 짙은 망데 프랑스가 주도하는 정권으로 대체되었다. 회담 무산을 위한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프랑스 전쟁상인들의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회담 대표들은 70일에 걸친 협상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표단은 우리 인민과 정부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들은 우리가 평화, 독립, 통일, 민주주의를 원하며, 그러한 가치들을 기본권으로 인식하고, 이를 얻기 위해서는 필요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투쟁할 것임을 설명했다. 우리는 투쟁에 있어 우리 인민의 단결, 사회주의 국가들의 후한 지원뿐만 아니라, 프랑스 인민과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 인민 덕분에 위대한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1954년 7월 21일에 서명된 제네바 협정을 통해 주권, 독립, 통일, 그리고 베트남과 베트남의 인접국인 라오스, 캄보디아의 영토적 일체성 존중에 기반을 둔 평화가 인도차이나에 복원되었다. 거의 1세기에 걸친 국가 해방을 위한 투쟁, 그리고 8년간 지속된 전 인민의 용감한 저항으로, 우리나라의 북부가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협정은 자유 총선거를 통한 베트남 평화 통일의 지침을 부여했다. 제네바 회담의 성공적 귀결은 우리 인민과 평화, 국가독립,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전 세계 인민들을 위한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였다. 동시에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프랑스 전쟁광이자 식민주의자들에게는 뼈저린 패배였다.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동시에 디엔비엔푸 전투는 평화를 위한 위대한 승리였다. 이 승리가 없었더라면 제네바 회담의 결과가 인도차이나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엔비엔푸의 승리를 포함해, 우리가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거둔 승리들은 제국주의를 약회시키고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앞 장에서 기술했듯이, 우리가 거둔 승리의 기본 요소는 호치민 주석이 이끄는 우리 당의 명확한 정치적 군사적 지침, 그리고 1953~1954년간의 건전한 전략적 지도력에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모든 인민이 수행하는 인민전쟁을 이행하기 위해 혁명에 적용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우리는 혁명전쟁에 마르크스-레닌 기본 원칙을 준수했고, 우리나라의 외부 침략자들과 맞선 투쟁의 오랜 전통과 교훈으로 군대를 양성했으며, 사회주의 동맹국들의 유용한 군사적 경험과 무장투쟁을 통해 축적한 우리의 지식을 창조적으로 조합해 활용했다.


1953년 여름,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지원 하에 인도차이나에서의 장기전을 획책했다. 적들은 단기간 내에 자신들의 후방지역에서 수차례 공격을 감행했고, 우리 해방구를 위협하는 데 대규모 전략 기동군을 동원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시켰다. 우리 당위원회는 그와 같이 경험이 풍부하고 공격적인 적을 상대로 혁명과 무장투쟁을 지도하면서 축적된 경험을 통해 선도적인 당의 혁명 정책을 적용하고, 동시에 승리를 위해 목표와 전장 상황을 과학적 분석을 통해 도출했으며, 적의 강약점을 정확히 평가하고, 각 작전마다 우리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평가했다. 우리 당이 결심한 가장 중요한 전술은 전투 지역과 방식을 결정하고, 각 작전을 위해 병력과 화력의 절대적 우위를 창출하며, 상이한 부대 깐 협동 작전을 구사하고, 공세적 포위를 단행하며, 작전 단계를 변경하기 위해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고, 전술기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명확히 가시화되고 영웅적인 전략적 결심이 역사적인 전역에서 명확한 작전 지침과 함께 우리 군과 인민에게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우리가 견지한 필승의 신념은 당의 명확한 정치 노선에 고취되어 그들의 기본적이면서 가장 고귀한 열망, 즉,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한 조국 독립을 목표로 무장봉기한 우리 인민들의 무한한 힘이었다. 이런 신념은 우리나라의 불요불굴의 상무정신, 즉 침략적인 제국주의의 강력한 군대에 맞선다는 대의명분을 갖춘 신생 혁명군의 영웅적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또한, 이런 정신은 당에서 교육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사상으로 제국주의를 타도하겠다는 신념, 모든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정신, 인민과 혁명을 최상의 위치에 놓는 가치관, 그리고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뜻했다.


이런 정신은 장기간의 투쟁 기간 중 단련되고, 또 고양되었다. 특히 1953년 겨울과 1954년 봄에, 제도적인 소작 감소와 토지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한 대중 계몽 정책은 애국심, 계급의식, 혁명에 대한 열정을 군과 인민 속에서 크게 발전시켰다. 군대 내에서는 혁명과 군사 과업에 대한 다양한 정치학습과정을 이수한 후, 적을 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우리 장교들과 병사들의 열망이 고양되었다. 많은 군대가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의 계급적 신분이 이런 과정들을 통해 고양되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가장 어려운 임무를 떠안고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준수하기 위해서 혁명적 열의를 가지고 전선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군은 그와 같은 열의를 안고,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어떤 적도 격멸하여, 어떤 임무도 완수할 수 있었다. 적은 항공기, 전차,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우리 군이 길을 닦고 대포를 진지로 이동시킬 수 없다고 믿었다. 적은 대규모의 병력, 막강한 화력, 견고한 진지와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군이 온전한 상태로 디엔비엔푸에 접근해 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우리 인민군은 계곡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의 다른 전장에서 치른 대규모 전투에서, 잘 단련된 군대만이 보유할 수 있는 불멸의 상징인, 감탄을 자아내는 영웅적 행위들을 수없이 보여주었다. 수많은 장병들이 각 전투에서 승리하고 저항전쟁에서 최후의 개가를 올리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우리의 정찰대는 많은 적을 생포했고, 운전병들은 부상을 입은 채로 운전대를 잡았으며, 우리 위생병과 보급병들은 탄약과 부상자들을 운반하기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고, 통신병들은 통신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비쳤다. 정규군, 지방군, 민병대, 게릴라들은 디엔비엔푸 계곡 외에도 여러 협조된 전장에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수행해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디엔비엔푸 전역과 동춘 전역에서, 우리 인민들은 ‘전선 제일, 승리 제일’이라는 구호 하에 전선에 보급품을 운반하고 군인들 바로 옆에서 함께 투쟁했다. 전국의 우리 인민들은 그들의 능력과 물질적 자원을 다양한 전선에 기부했다. 우리 인민과 군은 수백 km에 걸친 대규모, 장기간의 작전에 보급 지원을 보장하면서, 투쟁에 있어 위대한 영웅적 행위와 단결을 과시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적의 항공기도, 긴 여정으로 인한 난관도, 전시근로자들과 수송 일꾼들의 전진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들은 도로, 소로, 강과 하천을 극복하고 식량과 탄약을 전선으로 운반했다. 새로이 해방된 북서지방의 주민들은 가난했지만, 그들이 내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식량을 기꺼이 군에 제공했다.


많은 짐자전거꾼들은 그들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삼판과 뗏목 사공들은 빠르고 위험한 급류를 수도 없이 건넜다. 병원과 들것 운반에 종사한 사람들은 부상자들을 자기 피붙이처럼 돌봐 주었다. 인민들은 수많은 도로에서, 적기의 기총소사를 받고 시한폭탄의 위협을 받으며 밤낮으로 도로 개통을 위해서 헌신했다. 우리 인민들은 군대에 보급품을 배송하고 함께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실과 바늘처럼 가장 사소한 것들부터 위문품과 위문편지까지 제공해 주었고, 토지 개혁에 동참한 수백만 농민들의 열정도 함께 전달했다. 투쟁에서 발휘된 단결심과 우리 군과 인민의 당, 정부, 호치민 주석의 지도 하에 승리하겠다는 결의는 디엔비엔푸뿐만 이나라 동춘 전역에서 거둔 승리의 결정적 요소였다. 이는 견고한 후방 지역이 혁명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입증했다.


오랜 단결의 전통에 의거, 베트남과 라오스의 군과 인민들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변함없이 싸워왔다. 저항전쟁에서 어느 국가의 승리도 두 국가의 인민과 군이 연합된 노력의 결과였다. 라오스 애국전선의 지도 아래, 팟헷 라오스 해방군은 시작부터 병력과 장비에서 월등한 적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위대한 애국심과 고도의 전투정신이 충만했으며, 라오스 인민들의 사랑과 지원을 받은 해방군들은 차츰 전투력을 갖춰갔다. 그들은 전투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력해졌고, 더 많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저항 기간 내내, 팟헷 라오스 해방군과 우리 의용군은 어깨를 맞대고 생활하고 싸우며, 두 국가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라오스 인민들은 의용군 부대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은 우리의 투쟁을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진영의 전선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날마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진전 상황을 추적했으며, 전쟁을 장기화하고 확대하려는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흉계를 맹렬히 비난했고, 성심성의껏 우리 인민의 투쟁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적에 대한 우리의 투쟁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 고도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지닌 프랑스 인민과 공산당은 우리 인민의 정의로운 전쟁을 모두 지원하여 인도차이나 방면의 전쟁 종결을 위한 애국적인 투쟁에 박차를 가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우리 인민의 정의와 투쟁에 평화, 국가독립, 민주주의, 사회주의 군대의 동조와 지원에 매우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 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디엔비엔푸 대첩과 다른 승리를 이끈 요소들이 있다. 디엔비엔푸 함락과 나바르 군사계획의 완전한 실패 이후, 유명한 군사전문가, 관료, 기자들은 전투에 관해 거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썻고, 실패의 원인에 대하 각자 상이한 견해를 피력했다. 일부는 프랑스 정부 책임이라고 못 박았고, 다른 이들은 나바르의 책임이라고 했다. 이런 열띤 논쟁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바르가 라이처우를 구하고 북부 라오스를 방어하기 위해 디엔비엔푸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미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 전략가와 정치가들은 그를 칭찬했다. 꼬니조차도 디엔비엔푸 공격을 올바른 결정이라고 여겼으며, 만일 그 결정이 실행되면 그는 나싼의 전술기지를 계곡으로 옮길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쌀랑은 ‘디엔비엔푸 공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라니엘도 이 계획을 전적으로 승인함은 물론, ‘나바르의 창조적인 결정은 프랑스나 전 세계에 있는 어느 군사 전문가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평했다.


나바르가 1953년 12월 3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디엔비엔푸를 방어’하겠다는 전략적 결심을 했을 때, 프랑스와 미국의 장군들은 하나같이 ‘디엔비엔푸 집단전술기지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나바르와 그의 부하, 즉 꼬니와 드 카스트리 같은 장군들도 디엔비엔푸 기지가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전술기지라는 데 동의했다. 프랑스 국방장관 플레방, 사회부 장관 마크 자케, 프랑스군 총참모장 엘리도 직접 디엔비엔푸에 와서 집단전술기지의 견고한 방어체계를 칭찬하고, 베트남군 주력을 격멸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이라고 확신했다. 미 태평양 사령관 오다니엘도 같은 생각이었다.


프랑스 최고사령부는 우리 정규군 주력이 디엔비엔푸로 향하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지난 12월까지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만약에 전투가 발발한다면 ‘승리를 100% 보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집단 전술기지에 닥친 위험을 인식하지 못했다. 당시 전술기지에서 철수 건의가 올라왔지만, 나바르와 꼬나는 ‘디엔비엔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방어되어야만 한다’는 입장과 철수는 ‘성공적인 방어를 하고 있다는 긍지에 충만한 방어 중인 군의 사기를 저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처음에 ‘적을 계곡으로 유인할 자신’이 있던 드 카스트리는 나중에 자신감을 상실했다. 그는 ‘전투가 치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2~3개 대대를 증원받는다면 전선을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전술기지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지 않았고, 대신 적들은 북부 라오스에서 우리가 벌인 대규모 작전을 탐지했다. 나바르는 ‘적의 파상공세’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나바르는 정규군을 남베트남에 파견해 아뜰랑뜨 작전을 전개했다. 우리가 디엔비엔푸에 공격을 계속하는 동안 프랑스 원정군 사령부는 많은 계획을 입안 했지만, 결과를 도출할 수 없었으므로 이런 계획은 하나도 실행되지 못했다.


적은 우리의 통신망과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서 타이응웬, 뚜옌광, 옌바이를 공격하려 했다. 우리는 이제 그런 작전이 전개되었다면 적이 우리 보급로를 차단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곳에 숨어있던 우리 주력군이 그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은 디엔비엔푸에서 공중으로 철수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이 계획이 조기에 시행되었다면 적은 주력의 일부만이 격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2월 중순 이후에는 우리가 계곡 주위에 아군 주력을 집중시키고 적의 모든 철수계획에 대해서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항공철수계획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디엔비엔푸에 있던 적들은 막다른 상황에 빠지게 되자, 우리 포위망을 뚫고 북부 라오스로 이동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우리가 라오스로 통하는 모든 도로와 샛길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적이 이 철수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적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 모두 격멸되었을 것이다. 혹여 극소수의 부대가 국경까지 갔다 해도, 북부 라오스의 산악지형에서 소탕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 국무장관 덜레스와 미 육군참모총자 래드포드(Radford)같은 전쟁광들은 라니엘 비도 정부의 요청에 못 이겨, 디엔비엔푸를 구하기 위해 중폭격기를 파견하려고 했다. 만일 미국이 개입에 박차를 가했다면 우리는 더 심한 난관에 직면했겠지만, 이 개입도 최종적으로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미국 정계와 군계에서는 이를 우려했다. 그들은 미국 내 여론을 포함한 전 세계 진보적 인민의 반대를 두려워했고, 인도차이나에 제2의 한국전을 치르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이것이 바로 아이젠하워가, 개입이 미국에게 비극적 종말을 가져올 것이며, 동시에 ‘인도차이나와 동남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개입 강화에 거부한 이유였다. 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입은 추천할 만한 것이 못된. 개입은 전략적 실수가 될 수 있고, 오직 제네바 회의만이 최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군사문제에 매우 정확한 의견을 내놓는 부르주아 군사 전문가들은 나바르 전략에 대한 평가에서 공정부대로 디엔비엔푸를 공격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 실수라고 평했다. 실수는 나바르가 자신의 군대를 과신하고 우리를 경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전문가들은 디엔비엔푸 계곡으로 정예부대를 집중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력군의 상당수를 아들랑뜨 작전 수행을 위해 남쪽으로 돌린 나바르의 해결칙이 전략적 실수였음을 지적했다. 나바르는 자신의 부대를 분산시켰고, 이는 그가 누차 주장하던, ‘반드시 회피해야 하는 전쟁의 원칙’이었다. 이런 분석 자체는 타당하지만, 승리한 뒤에는 누구든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시의 나바르가 군사전략가들처럼 고전적인 전쟁의 개념 하에 상황을 분석하기를 꺼렸는지 ,혹은 혁명전쟁에서 인민군이나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봉기한 모든 인민들이 지닌 거대한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로 인한 침략전쟁은 8년간 계속되었다. 그들은 거의 50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고 2조 2천억 프랑의 전비를 사용했지만, 패배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그들의 전쟁이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적은 모든 인민이 지닌 불요불굴의 정신과 대적했으므로, 아무리 지략이 뛰어난 장군이 지휘하더라도(즉 르클레르, 드 라트르, 나바르, 혹은 그 밖의 어떤 인물도)혹은 어떤 강력한 무기 (즉 박격포, 전차, 중폭격기, 혹은 원자폭탄이라 해도) 프랑스 원정군을 패배에서 구할 수 없었다. 설령 적이 1953년에 디엔비엔푸 계곡으로 가지 않았더라도 머지않은 미래에, 시간과 장소는 달랐다 하더라도 디엔비엔푸의 승리는 존재했을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종국에 닥칠 쓰디쓴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디엔비엔푸에서 우리 인민이 이룩한 위대한 성공과 제네바 회담은 장기간의 저항전쟁에서 우리 당의 노선이 옳았음을 웅변적으로 증명했다.


우리나라는 평화를 갈망했고, 당과 정부는 평화 정책을 열성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침공해 침략전쟁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맞선 우리 인민에게는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불에는 불로 맞서고, 적의 반혁명적 도발에는 혁명적 도발로 맞서는 것이었다. 우리 당의 투쟁적 저항전쟁은 1945년 8월 결의안의 과실을 지키고,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 저항군이 적을 상대하기에 충분히 강해졌을 때만이, 적에게 우리 인민과 국가의 합법적인 이익을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제네바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제국주의자들이 혁명 투쟁의 끈기를 통해 전쟁 계획과 침략 계획을 무산시키고 격퇴하지 않는 한 절대로 자발적으로 철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저항전쟁은 정확하게 무장투쟁의 형태를 갖춘 혁명 국가적 민주 원칙의 연장선이었다. 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을 때, 국가적 요소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우리 당은 국가 해방을 위한 전면적인 혁명은 인민들이 국가적 민주주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제국주의가 봉건주의와 손에 손을 맞잡고 우리 인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자행했으므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과업은 밀접하게 협조되어야 했다. 우리는 국가의 요소들이 낙후한 농업국이었고, 농민이 수적으로 우리의 가장 큰 군대였다. 농민은 노동자 계급 혁명의 주력이었고, 동시에 농촌은 우리가 혁명 행정기관과 기지를 건립하고, 인민전쟁을 개시하며, 장기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인민군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이었으므로, 우리 당은 농민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국에 독립을, 경작자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 하에, 우리 당은 혁명을 위해 전 인민을 동원했다. 당은 우선 노동자와 농민, 혁명세력과 애국세력을 단결시켰다. 그리고 국내에 있는 상이한 소수민족들을 단결시키고 노동자 농민 동맹에 기초한 국가연합전선을 확대했다. 이런 온당한 정치 노선은 전 인민에게 해방전쟁에 기여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우리 당이 ‘전선 제일, 승리 제일’의 구호 하에 전쟁의 후위를 공고화하는 동시에 확장하고, 인민군을 건설하고 강화하며, 애국 인민의 인력과 부를 동원하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올바른 정치노선을 따랐음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전 인민들은 전선을 위한 사업에 헌신했다. 우리 병사들과 인민들이 전국의 다양한 전선에서 다졌던 필승의 신념은 우리 당의 정치노선이 보다 명확하고, 정당하며, 가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 당은 식민주의적, 준봉건적 국가라는 강력한 적을 상대하는 혁명전쟁에서, 마르크스-레닌 이론을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정확한 군사전술을 채택했다. 당은 저항전쟁을 통해 우수성을 입증했고, 우리 인민군은 전투를 치르며 꾸준히 성장했으며, 승리는 연이어 승리를 낳았다. 동춘 전역에서 거둔 일련의 승리는 전쟁 리더십과 마르크스-레닌 군사 노선을 따른 전략과 군사 작전 방향의 표본을 제공했다. 우리는 궁극적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즉 구국과 독립, 자유를 위해 투쟁하기 위해 전 인민의 단결과 노동자-농민 연맹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 당은 항상 베트남 혁명을 세계 혁명의 일부로 여겨 왔다. 국제 상황은 항상 우리나라의 혁명에 영향을 끼쳐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간의 세계적인 군사력 균형은 항상 좌익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소련 붉은 군대가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상대로 거둔 큰 승리들과 중국 혁명의 대성공은 혁명 세력을 반혁명세력에 비해 결정적으로 우세하게 했다. 세계적인 혁명운동이 나타났고, 그 안에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 사회 발전 추세에 있어 주연을 맡았다. 국가 혁명운동은 전능한 혁명적 흐름이 되어, 식민주의 체제의 대부분을 해체하게 했다. 


세계의 군사력 균형이 혁명군에 유리하게 바뀌었을 때, 미국이 주도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자들에 맞설 공세 전략을 수행할 혁명군을 위한 시간이 도래했음은 부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런 공세 전략은 제국주의를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평화, 국가독립,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성공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자들의 가장 취약한 전선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같은 지역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우리 당과 인민들은 무장 투쟁의 형태로 제국주의에 대한 공세 전략을 이행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인민이 그 개개인이 얼마나 약한가에 상관하지 않고 연대, 봉기하여 올바른 정치 노선을 추구하고, 독립과 평화를 위해 결연히 투쟁한다면, 그들은 제국주의자와 식민주의자들의 간악한 침략군을 격퇴할 능력을 이미 보유한 것과 같다.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촉발된 전쟁은 확실히 패배할 것이며, 해방을 위한 혁명은 확실히 성공을 거둘 것이다.


위대한 디엔비엔푸의 승리를 거두고 평화가 복원된 지 10년이 흘러갔다. 그로부터 중요한 변화들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국에서 일어났다. 우리 당의 영도 하에 북부를 완전히 해방시킨 우리 인민들은 사회주의 혁명과 재건에 종사했다. 우리는 1930년 이래 우리 당에 의해서 확정된 노선을 똑바로 따라갔으며, 자본주의 발전 시기를 거치지 않고 인민의 국가 민주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진보했다. 이 엄청난 변화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봉건주의에 대항하는 장기간에 걸친 격렬한 무장 투쟁의 결과였다. 끊이지 않는 혁명을 통해 인민 민주 권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한 후, 우리가 신속하게 경제회복을 달성하고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전환을 이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골의 진짜 주인인 일하는 농부들은 자신들의 자유 의지로 집단, 협동 작업을 실시했다. 모든 자본주의 산업과 경제가 평화적으로 전환되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가 나날이 발전했다.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착취 정권은 기본적으로 폐지되었다. 사회주의 생산 관계가 수립되었다. 우리 인민들은 사회주의 산업으로의 제1보를 디디면서, 열성적으로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해갔다. 우리 경제는 독립을 향해 꾸준히 향상되어갔다. 대중들의 문화생활이 나날이 향상되었다. 인민 정권이 공고화되고 국방력이 강화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북베트남은 과거보다 큰 진보를 이룩했다. 이와 같은 대단한 성취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혁명 정신을 통해 시험을 받은 노동에 대한 큰 애정과 고도의 근면성을 갖춘 우리 인민들은 북부를 건설하고 방위하며, 이를 국가 통일을 향한 투쟁의 중심이 될 더욱 견고한 혁명기지로 전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인민들은 그들의 남쪽 애국동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적에 대한 그들의 영웅적 투쟁에 동참시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우리 인민들은 제네바 협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평화적이고 독립적이며, 통일된 민주화 체제의 부유하고 강력한 베트남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려야만 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뻔뻔스럽게도 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와 군사 기지로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를 영원히 양분하는 음모를 꾸몄다. 정전협정 조인이래, 남쪽에서는 침략자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 결코 그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미국의 허수아비, 응오딘지엠 정부는 파시스트적 독재 법률로 테러와 집단학살 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 지도자들은 수백 번의 소탕작전을 감행하고, 말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적에 대항하고, 독립, 민주주의, 국가 통일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투쟁에 가담한 비무장 동포들을 체포하고 죽였다. 지난 몇 년간, 미제국주의자들은 군 인사와 전투부대를 유입시키면서 남베트남에 공공연한 간섭을 자행했다. 그들은 수만 톤의 무기를 들여왔고, 수십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의 해방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그들이 ‘특별한 전쟁’이라 부르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한 전장으로 사용하면서 선언되지 않은 전쟁에 불을 지폈다. 우리 남부 동포들도 역시 평화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한 번 혁명 투쟁에 나서면서, 대혁명과 전쟁에 직면했고, 동포들의 합리적인 대응 방안은 전 인민에 의한 정치와 무장 투쟁으로 적에게 원기왕성하게 맞서는 것이었다. 우리 남부 동포들은 봉기했고, 해방을 위한 애국적 투쟁을 전개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기치 아래, 1천4백만 명의 인민들은 그들의 고향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행동 강령과 계획은, 거국적 민주혁명을 끌어내고 미제국주의자들의 신 식민주의를 배격하며, 독립, 민주주의, 평화, 중립성을 획득하고, 조국의 평화 통일을 향해 전진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투쟁노선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목적들은 우리 남부 동포들의 가장 기본적인 열망을 반영했다. 그들은 인종, 종교, 정당과 무관하게 모든 혁명 계급과 애국 인민들의 지원을 획득했다. 전선의 명망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남부인들에 의한 영우적 투쟁은 광범위한 찬성과 세계적인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지향된 올바른 노선을 따라, 우리 동포들은 혁명 투쟁의 창조적 형태를 운용하면서, 용감하고 열렬하게 인민전쟁을 수행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고원지대에서 저지대까지, 정치투쟁은 무장투쟁과 밀접하게 협조되었다. 용감한 정치 군대의 조직 하에, 우리 동포들은 생존, 자유, 독립, 민주주의의 권리를 외치면서 적과 직접 투쟁했다. 게릴라전이 도처에서 조직되고,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용감한 남베트남군은 창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매우 어려운 여건 하에서 싸워야만 했지만, 적에게 계속적인 패배를 안기며 빛나는 무공을 세웠다.


우리 동포들에 의해 촉발된 저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전투력 균형이 우리 쪽에 유리하게 전환되었고, 18개월 내에 혁명 세력을 분쇄한다는 목표 하에 수립된 스탤리-테일러(Staley-Taylor)계획도 무산되었다. 적들이 그리스,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수많은 반혁명 전쟁을 통해 입증된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자랑하던 전략촌 망상형 조직(network)은 떠오르는 정치, 군사 투쟁 운동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졌다.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남베트남의 고문관과 전투병력을 수만 명으로 늘리고, 그들이 자랑하는 최신 전술을 사용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투입했는데, 개중에는 독성 화학재라 불리는 가장 간악한 파괴 수단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제국주의자들은 단기간에, 강 가운데서 두 번씩이나 말을 바꿔 타야 하는 상황을 강요받았고, 결국 두 번이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그들의 군대는 힘을 잃고, 사기가 떨어졌다.


현재, 완강하고 잔인한 미제국주의자들은 남베트남에 군사 개입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 군사 전문가들조차 아무도 이 전쟁이 조속히 종결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은 침략자들에게 쓰디쓴 패배를 선서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미 20년간 투쟁해온 용감한 남부 인민들은 그들의 저항전쟁을 벌이고 있다. 확고한 전투 정신과 비견할 데 없는 영웅심을 견지한 그들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약하다 해도, 어느 민족이 단합해 일어나서, 올바른 정치 노선을 추구하고, 독립, 자유, 평화를 위해 결연히 투쟁한다면, 그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가장 잔인한 침략군을 격퇴시킬 능력이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주의자들이 획책한 어떤 전쟁도 반드시 패배하고, 해방을 위한 혁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 남부동포들의 정의의 투쟁을 최선을 다해 격려하고 있으며, 이를 가장 잔인한 적인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진보 인류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다. 남부 동포들은 이 유용한 지원이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증명할 것이다. 남부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장기적이고 중대한 전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우리의 조국, 베트남은 반드시 통일될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패배할 것이다.


몇 세기에 걸쳐, 그들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서 외부 침략에 대항해 줄기찬 투쟁을 벌여온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들은 그들의 역사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었다.


바익당

치랑(Chi Lang)

동다(Dong Da)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우리는 이제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네.

미래는 우리의 것일세.


호치민 주석이 영도하는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기치 아래, 베트남 인민들은 보다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베트남에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위대한 성공을 이룰 것이다. 국가 통일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전 세계에서, 마르크스-레닌이 불패의 기치 아래, 진보 인류는 항상 전진할 것이다. 잔인무도한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주의자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투쟁중인 모든 억압받는 인민들은 완전히 해방될 것이며 그들 자신의 운명과 국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꼭 성공할 것이다. 인류는 평화와 행복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족쇄를 부수기 위해 일어서고,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는 인민과 국가의 혁명 투쟁의 역사에서, 디엔비엔푸는 항상 영광스러운 군사적 위업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세계적인 몰락을 선도하는 위대한 사건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위대한 디엔비엔푸의 승리는 우리 인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억압받는 국가들에게 보다 더 큰 승리를 향해 나갈 것을 항상 고취시킬 것이다. 


디엔비엔푸는 미래 세대들의 가슴 속에 항상 살아있을 것이다.


1964년

하노이

보 응우옌 잡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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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린 제주4.3평화공원.

오늘 저는 제작년 초에 가족과 들렸던 4.3 평화공원을 들렸습니다. 처음 들렸을 때도 매우 슬펐지만, 이번에 다시 들리니 억울하게 학살당한 피해자분들을 생각하게 되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72년전에 좌익소탕이라는 명분아래 저질러진 국가 폭력은 제주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많은 이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곳을 두번째 들리게 된 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독립이 되었죠. 독립된 한국에선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창설됩니다. 여운형이 창설한 이 조직들은 해방 이후 치안과 행정을 담당해나가며 새조국건설을 위해 전진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 미군이 상륙했고, 제주도에도 미군이 상륙했습니다. 제주에 상륙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했고,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경찰들과 관리들을 재등용합니다. 여기서 부터 제주도민들은 점령군의 모습을 보인 미군과 그의 앞잡이 친일세력들을 싫어하게 됩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3.1절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이 탄 말에 인명피해가 생겼고, 이에 항의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저항하다가 경찰에 발포한 총에 몇명이 맞아 죽는 일이 생기죠. 거기다 그 시기에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면서 미소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였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죠.

이런 일이 있자 1948년 제주도에선 남로당 김달삼을 중심으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친일파 청산을 내걸며 봉기를 일으킵니다. 그 날이 바로 1948년 4월 3일이었습니다. 이 봉기에는 당연히 남로당 뿐만 아니라, 친일파와 미군정에 분노한 일반민중들도 참가합니다. 이런 상황이 있자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력과 우익청년단들을 대거 투입하죠.

이렇게 해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당시 미군정 최고사령관 하지가 임명한 브라운 대령은 좌익을 뿌리뽑는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지역에 레드라인을 설정해놓고, 그 범위에 있는 생명체는 싹다 죽이도록 허용합니다. 이에따라 이승만이 파견한 서북청년단과 경찰은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고, 특히 1948년과 1949년 사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일어난 학살은 추악하고도 잔혹했습니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은 최소 3만 명을 넘겼고,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그리고 유아도 포함되었습니다. 임산부 배안에 있던 애와 1,2살 짜리 아이들도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죠. 이런 광란의 학살극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경찰총장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의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과거 좌익 경력이 있던 인물들을 예비검거하며 학살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주도에서의 학살은 1954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종료가 됩니다.

제주도 학살은 엄청난 고통을 남겼습니다. 우선 이 학살로 제주도 인구 10%가 죽었습니다. 코리안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이 반공주의 국가가 되며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런 침묵이 깨진건 87년 민주화가 되면서 부터였고,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와서야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됐죠. 이처럼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된 반공주의는 산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폭력을 저지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제주4.3사건에서의 학살은 과거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와 베트남이 그랬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내전이 일어납니다. 이 내전에서 영국이 빠지자 미국이 개입했죠. 개입한 미군은 소수의 고문단과 최신식 무기 지원을 통해 좌익진영의 그리스 게릴라들을 학살했습니다. 미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지원하에 활동하는 우파와 미군고문단은 소위 자신들이 적대지역으로 설정한 곳에 네이팜폭탄을 투하하고, 이들의 씨를 말렸으며 그 지역마을들을 불태웠죠. 미국의 이런 전략은 그리스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제주4.3은 그리스 내전의 연장선상일수도 있을 겁니다.

그로부터 몇년 뒤 베트남 문제 개입한 미군은 똑같은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들은 소위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지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해놓고, 온갖 최신식 무기와 장비를 동원해서 그 지역을 폭격 및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초토화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베트남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죠.

다시한번 제주4.3평화공원을 들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들릴때 항상 노는것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가 노는 곳에서 과거에 어떠한 국가폭력이 있었는지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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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조치 미이행, 주한미군장갑차에 의한 사망사고

경찰은 미군직접조사로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라!

지난 8월 30일 밤 경기도 포천에서 SUV가 미군 장갑차 후미에 추돌하여 SUV탑승자 4명 전원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 현장은 사진만 봐도 처참하다. SUV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고, 미군 장갑차 역시 무한궤도 일부가 부서질 정도로 큰 사고였다.

미군 장갑차는 도로 위로 나올 때부터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밝은 낮에도 장갑차에는 동행하며 불빛 등으로 이동 사실을 표시하는 콘보이(호위) 차량들이 함께 하는 것이 원칙이다. 더군다나 작전 수행용 장갑차는 차체 색을 어둡게 한다. 그런 상태로 야간에 후미등도 제대로 달지 않고 단독주행을 했다.

사고지점인 영로대교는 평소에도 군용 차량 이외에는 통행량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직선도로이기 때문에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추돌한 SUV의 입장에서는 저속주행중인 장갑차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주한미군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또다시 발생한 것이다.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켜 호위차량들이 있었다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해도 직선도로에서 미군 장갑차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참담한 심경이지만 현재는 사고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보도된 기사를 보면 블랙박스가 사고지점인 영로대교 진입 전 상황까지는 녹화가 되어 있고 진입 후부터 충돌까지의 상황은 기록되지 않는 등 몇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주한미군이 안전수칙을 어기고 위험한 야간주행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 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비슷한 사고가 다시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고를 눈여겨보고 있다. 우리의 높아진 자주의식은 이제 사소한 일 하나도 그냥 두고보지 않는다. 하물며 대한민국 국민 네명이 사망한 대형사고임에도 지금까지 으레 그래왔듯 여러 의혹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넘어가려 하거나 사고의 원흉인 주한미군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불평등한 한미동맹 아래 쌓여온 민중들의 분노와 원통하게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몫까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20년 9월 1일

한국진보연대 자주통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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