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이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박정희 시절 피카소를 이름을 크레파스에 넣었다고 처벌받았던 이도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발생한 국민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만 하더라도 2~3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한 땅 전역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이러한 사실을 통해한국전쟁에서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러한 학살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나서도 지속됐으며, 9.28 서울 수복 후에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아래 이승만 정부의 또 다른 양민 학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학살은 미군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했으며특히나 폭격에 의한 학살이 가장 광범위했다한국전쟁 시기부터 현재까지 북한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다그것이 바로 신천양민 학살(Sinchon Massacre)이다.

(현재 북한에서 제시하는 신천양민 학살 민간인 희생자의 수치, 이 숫자는 대략 그 지역 인구 1/4 수준이다.)

 

신천양민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북진하며 전진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학살로 대략 3만 5,000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놀랍게도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그 지역 인구의 1/4이다신천양민 학살은 과거 한국에서 신천 10·13 반공 의거라고도 불렸고현재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로 불리고 있다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북한에 있던 우익 세력인 반공 청년단들이 한 것으로 판단하거나좌익과 우익 갈등 속에서 희생된 것으로 얘기한다반면 북한에서는 이 학살을 미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로 얘기한다신천양민 학살은 양측의 입장과 의견이 판이하게 갈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신천 박물관에 있는 상상화)

 

우선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의 학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현재 북한에서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하고 있고신천에 만들어진 박물관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북한에서는 신천 미점령군사령관인 해리슨과 그 휘하의 미군을 학살의 주체로 지목한다북한의 자료에 따르면미군과 한국군이 들어온 시점부터 후퇴하게 되는 시점까지 신천에서 미군들에 의한 학살이 발생했으며그러한 학살은 매우 야수적이었다고 한다. MBC에서 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신천학살 편을 보면 이들의 증언도 확인이 가능하다한 북측 시민의 증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때 미군 한 놈이 나타나더니뭐라고 지껄이면서사람들을 직접 쏴 죽이면서말하는 것이었습니다옆에 통역 놈이 말하기를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놈이 바로 미국 장교 해리슨이라는 놈이었습니다.”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한 것은 비단 북한 뿐만은 아니었다대표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활동했던 국제여맹 단원들이 그러하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는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한국군 그리고 우익들의 학살과 잔혹행위 등을 조사했었다이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양민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하는 증언들을 기록했다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유엔군 점령 기간 동안 대략 12만 3,000명의 황해도 시민의 학살당했다고 썼다이 수치는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이 제시한 것으로 국제여맹 인사들 중에 가장 우익 성향의 인물이 주장한 것이다펠턴의 주장에 따르면황해도 안악시에서만 1만 9,092명의 주민들이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이는 아마도 당시 북한 측의 제시한 수치와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통해 나온 것으로 확인된다.

(신천양민 학살 희생자의 묘, 이 묘 또한 신천 박물관 근처에 있다.)


(신천양민 학살 당시 양민들이 학살당한 현장)

 

앞에서 제시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즉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이 결코 없지 않았고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뽑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결코 만만치 않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신천양민 학살을 다룬 편에서월남한 생존자들과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의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그러나 당시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은 지명만 기억할 뿐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으며 북진하기 바빴고신천에 주둔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고 한다또한 또 다른 미군은 부대가 지나갔음에도 본인 스스로 그 지명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의 배후로 뽑은 윌리엄 해리슨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며그가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도 있다.

(신천양민 학살을 묘사한 벽화)


(2010년대에 새로 단장한 신천 박물관 일부 모습, 자세히 보면 미군 옆에 하얀색 완장을 낀 우익 치안대도 보인다.)

 

즉 이러한 부분에서 북한의 자료와 미국의 자료가 엇갈리는 점이 있기에 나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이라 결론짓지 않는다그러나 미군 자체가 아예 무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우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온 내용에는 좌우익 양측의 학살이라는 점에 주목했지만중공군과 인민군의 남진 이후 미군이 과연 후퇴시기에 신천을 거쳤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400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미군에 의한 학살 가능성이 후퇴도중 일어났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을 미국이 한 것이라 보는 입장은 이런 점에서 맥락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지목되는 반공 청년단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한 세력이기 때문이며설사 미군 자체가 학살의 배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을 지원하는 주체는 미국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들을 방조한 책임도 크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당시 신천양민 학살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나는 이 학살의 주체가 북한에 숨어 있던 반공 청년단이라 본다사실 반공 청년단의 존재는 맥락적으로 그리 생소하지 않다우선 한국전쟁 시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포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었고양측의 포로 문제는 휴전회담에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또한 북한에서 주장하는 신천양민 학살의 참혹성이나 잔혹성을 따지고 보면제주 4.3 항쟁이나 여순항쟁에서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보였던 행위들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다거기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 중 월남한 이들은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대해서 제법 많이 증언했다그리고 북한 자체도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다만 주된 주체를 미군으로 설정해놓은 것 뿐이다.

(신천 박물관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 신천 박물관은 196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들어져 김정일 김정은까지 그 규모를 확장했고, 반미주의 학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신천에서는 천인공노할 학살이 이승만 정부 하에서 발생했다필자는 신천양민 학살을 이승만 정부의 북한 통치 기간에 저질러진 우익들의 양민 학살로 생각한다그런 점에서 소위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북한 민중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마지막으로 미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더 첨언하고 싶다물론 내가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소 부정하는 투로 얘기했지만나는 미군이라면 그러한 짓거리를 저지르고도 남을 주체라 생각한다북한에서 묘사한 신천학살의 참혹성은 실제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벌이던 전형적인 군사작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이들은 민간인의 시체를 베트콩 사살로 처리하고 전과를 과장했다그런 점에서 미제국주의 군대의 잔혹성은 굳이 신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러 근거를 통해 입증이 가능하다.

 

신천양민 학살을 저지른 반공 청년단들은 말 그대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이들이다이들은 북한에서 그런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으며이승만 정부의 북한 점령 2달 동안 수십 만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은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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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소련의 친선을 강조하는 포스터)

 

북한 정부의 수립 과정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 형성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소련군이 해방자를 표방하며 직접 주둔했고소련의 영향력 아래 사회주의자들의 힘이 강화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압박을 받으며 결국 힘이 약화 되었다토지개혁 등 북한의 제반 개혁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막상 북한은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국가 형성전쟁전후 경제 복구 등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북한은 점차 독자 노선을 표방하는 주체의 국가로 부상했다이 차이점은 어디에 연유하는가북한은 위성국가에서 자주국가로 뒤늦게 변모한 것인가아니면 처음부터 자주적인 국가였는가이에 대하여 균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당시 소련의 동아시아와 북한에 대한 정책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간주하여 이곳에 소련군의 역향을 대부분 투여한 다음군사력을 바탕으로 점령정책을 실행하면서 소련에 충성하는 국가들을 세우는 데 깊이 개입했다그에 비해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가급적 미국 등 다른 연합국에 협조하는 가운데 자신의 국가이익을 보장받는다는 수세적인 자세를 취했다소련의 본래 동아시아 구상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의해 통일될 중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일본 점령에의 동참한반도의 신탁통치 참여 등이었다하지만 그 구상은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미국의 일본 단독점령한반도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광범한 반대로 인해 근본적으로 뒤틀렸다결국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의 공상화와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일본의 반공국가화는 소련의 애초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동아시아 내부의 혁명 대 반혁명의 충돌과 이에 대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된 것은 동아시아 내부의 반제국주의 반봉건 국가 건설의 흐름 속에서 국가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소련은 국경을 같이하는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으며이에 북한 지역을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적극적인 원조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있던 일본의 공장과 기업소를 전리품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버리고중요산업 국유화 조치를 통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소유임을 확정해주었다그리고 이들 시설의 재가동을 위해 적극적인 원조를 했으며더 나아가 북한 스스로의 군사력 강화엘리트 양성 등에 체계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1949년에 중국혁명이 달성되자 소련은 동아시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맏형으로 인정해주었으며한국전쟁 때는 직접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이 북한을 후원하게 했다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이후 중소분쟁이 발생하면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3세계와의 관계 확장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처럼 북한 정부는 소련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수립되었으나그렇다고 초기 북한을 단순한 위성국가로 볼 수는 없다북한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율성을 지녔으며소련은 북한의 든든한 후원국가였다북한 집권층은 소련을 비롯한 국제 공산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후 경제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었으며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외압에 대처하면서 1950년대 후반 시점에는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요컨대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출처북한의 역사 1 p.24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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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당사자들은 김일성이 소련 여단 군복을 입은 모습을 즐겨 묘사한 반면일본 상급자의 제복을 빌려 입고 찍은 남한 장교들의 사진은 조직적으로 감추었다아마도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그런 군인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김정일 코드 p.47

 

이 내용은 한국전쟁을 연구한 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저서 김정일 코트(North Korea: Another Country)에 나오는 내용이다북한의 초대 지도자 김일성(Kim Il Sung)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영역이다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6.25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단순한 명제로 결론짓는다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면 그냥 독재자라는 이미지만을 부각시킨다북한에 대한 체제의 성격과 해석은 우리 사회에서 다양할 수 있다나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며그러기 위해선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업도 분명 중요하다 생각한다.

(와다 하루끼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이미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자료들과 해석은 대한민국 사회에 널려 있다반면북한의 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나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한 자료들은 거의 없다더 정확히 말하자면국가 보안법이라는 정치적 영역을 통해 탄압받고 있다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북한을 찬양하고 숭배의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흐름 속에서 북한에 대한 다른 평가를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김일성에 대한 평가도 충분히 그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대표되는 식민지 시기이다일제 지배 35년 동안 적잖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고또 많은 이들이 산화했다한국 사회에서는 소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하는 우파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을 강조한다최근 들어 임정과의 연합을 추진했던 인물 약산 김원봉을 강조하지만편협한 색깔론에 큰 희생양이 되고 있다한국 사회는 조금이라도 사회주의 계열에 있었거나 월북 이력이 있는 인물에 대해선 극도의 발작 증세를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깃발)

 

이는 잘못된 행보다왜냐하면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계열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실 독립운동 세력들 중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추구한 이들이 많았다그리고 이들 대다수가 독립운동가를 이루고 있었으며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또한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공내전에 참가하여중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이런 업적을 달성한 이들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1948년에 탄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독립운동가로서일제시대에는 항일투쟁 그 이후에는 항미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물론 한국전쟁 자체는 그가 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3세계적 관점에서 보면항미투쟁으로 볼 수 있다이는 김일성과 그가 이룬 체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리영희 교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북한에서 묘사한 항일무장투쟁 당시 김일성)

 

김일성은 젊은 시절부터 열혈 반일투사였다그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다중국 공산당에도 입당했으며중국 공산당과의 국제 연대를 통해 공동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193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백두산을 거점삼아 항일 무장병력을 이끌었다그가 이끌던 항일무장조직의 명칭은 구국군’, ‘왕청 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등 다양하다한홍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만주 동부에서 큰 명성과 높은 지위를 지닌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개인적으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전투가 있다그 전투는 바로 1940년의 홍기하 전투다홍기하 전투에서 김일성의 부대는 자신들을 추격해온 일본군 100~150명을 사살했고경기관총 5소총 100여 정탄알 1만여 발무전기 1대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이는 아주 큰 전과라 할 수 있다이 홍기하 전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김일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무것도 안했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이 허황된 주장이라는 것이다그 외에도 김일성이 일본군을 상대로 치른 전투는 무수히 많다이는 와다 하루끼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통해 알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

 

당시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빛나는 붉은 별이었다북한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이력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김일성의 이력은 국내 교과서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왜 그럴까나는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만약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분야에 있어서 당당하다면홍기하 전투 그 자체를 숨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그러니 한국 사회에선 좋든 싫든 임시정부만 언급하는 것이다물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그러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사에서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북조선분국 지도자일 당시의 김일성)

 

앞서 보았듯이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분명 높게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다물론 독립운동사를 김일성 중심으로만 서술해서도 안 될 것이다그러나 그가 항일투사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냐는 문제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1930년대 만주에서 전개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무장투쟁과 더불어재조명 받고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이력이다그리고 그들이 이후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했다는 사실에서항미투쟁적 성격도 제3세계의 시각으로 볼 가치도 충분히 있다그런 시각을 하나의 담론으로 인정하는 것부터가 진정한 학문의 자유다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마지막으로 2011년 브루스 커밍스가 인터뷰에서 주장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딘 애치슨은 호치민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것은 김일성한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김자동(),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와다 하루끼이종석(), 창비, 1992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남성욱석(), 따뜻한손, 2005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간도특설대김효순서해문집, 2014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중국인 이야기 3김명호한길사,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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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 51개 주제로 본 우리민족 절반의 이야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4.27시대연구원 지음 / 도서출판 4.27시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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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판 이후 대학원 준비와 강연 준비로 제법 바쁘지만, 이 바쁜 와중에도 상당히 재밌는 책 한권을 읽었다. 이 책은 소위 북한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1945년부터 올해인 2021년까지의 현대사를 다룬 책으로, 51개의 주제로 북한사를 정리한 책이다. 책의 이름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우리에게 있어서 북한이란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북한의 존재란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되고 판단 되어야할 존재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한국인들 내면에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긍정성은 결과적으로 종북혹은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십상이다.

 

이 책은 그런 사고관에 대한 전면적인 역사적 반박 내지는 저항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혐오와 증오 그리고 조롱은 분명히 하나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사고에는 북한은 무조건적으로 나빠야해!” 혹은 북한의 사회는 매머드나 잡는 수준의 사회로 인식해야만 해.”와 같은 무의식적 감각에 심취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탈북자들이 나와서 거짓말을 일삼는 어용매체들에 의해 손쉽게 나타난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얼마나 알까? 이러한 질문에는 나 자신 또한 손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워낙 정보와 자료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라는 북한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보도나 자료들이 추정과 추측이라는 가정으로만 판단을 해야만 하는 부정확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에 따라 탈북자들의 거짓말과 허위사실이 진실로 포장되기도 한다. 이런 부분에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카가 최근 10여 년간(1961년 기준) 영어사용권 나라에서 생산된 소련관계 문헌들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서방의 반공주의 학계를 비판했던 사실이 오버랩 된다. 책은 첫 페이지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를 발췌하겠다.

 

현실은 북을 적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보거나 심지어 아예 외국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상당하다. 그러다 보니 북의 역사는 아예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고 심지어 왜곡되게 이해한다. 조선일보가 가짜뉴스, 왜곡보도를 일삼아도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모두 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이 만들어낸 분단의식, 피해의식의 반영이다. 북을 제대로 알려고만 하면 고문하고, 잡아가고, 낙인을 찍었던 역사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4

 

북한을 알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었일까? 나는 정치적인 부분에서의 자유왕래와 평화체제 공존 그리고 사상의 탄압을 가로막는 국가 보안법의 전면적인 철폐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외에 필요한 작업은 무엇일까? 나는 소리 높여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의 현대사를 바라볼 필요가 분명 있다고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은 북한의 현대사를 북한의 입장에서 재조명한 책이다. 따라서 책의 시작은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개선부터다.

 

1권은 김일성의 귀국부터 시작해서 재일교포의 역사로 마무리 된다. 남한 측 자료와 북한 측 자료가 출처로 인용되었으며, 북한이 어떻게 자신들의 역사를 보는지, “북은 주장한다.” 혹은 “...이 북의 입장이다.”라는 식으로 서술했다. 예를 들면 한국사회에서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을 보자. 11장의 7번째 주제인 한국전쟁은 왜 조국해방전쟁인가?라는 주제제목을 달고 있다. 책에 따르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전쟁 시기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맞서 투쟁을 벌인 점 그리고 미국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점을 근거로 든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북한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과는 분명 다르다. 왜냐하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경제난을 통해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1950625일에 전면적인 침공을 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나는 냉전 이후 공개된 소련측 기밀문서 자료를 통해 북한이 먼저 시작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시작점을 바라보는 나와 북의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북한의 조국해방전쟁론은 근거가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조국해방전쟁론을 입증할 근거가 분명 있다고 본다.

 

우선 한국전쟁은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와는 상관없이,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저항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탈식민주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띄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 군대의 장성들이 친일 세력들이 많은 반면, 북한의 정체성은 항일독립투쟁에서 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민족해방전쟁 그리고 계급해방투쟁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북한이 한국전쟁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 요약하고 있다.

 

북은 이렇듯 미국의 부정의의 전쟁에 맞선 자기들의 행위를 두고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은 물론, 민족해방전쟁, 반제민족해방혁명, 인민민주주의혁명, 계급투쟁 등 다양한 개념으로 성격을 규정하고 해설하고 있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73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의 경제력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은 반공주의로 무장한 한국사람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북한의 전후 재건은 신속했다. 북한은 과거 소련이 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따라 사회주의 기초 건설은 목표를 초과 달성하며 크게 성공했다. 이 시기 공업 총생산은 1957~1960년 기간에 3.5(목표 2.6, 1957년 기준)로 증가했고, 농업부문도 식량 생산에서 1956년 대비 32% 증가하였고, 1959년 농업 총생산이 140%로 확대됐으며, 소비재 영역에서도 발전과 초과를 이룩했다. 책에 따르면 북한이 전후 재건과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선진적인 발전과 완비된 사회제도를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생산수단의 사회주의화(소유의 집단화)가 빠르게 이뤄진 것은 해방후 반제반봉건 민주개혁과 전쟁을 거치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친일매국노, 지주와 자본가들이 대부분 숙청되거나 월남하여 사회주의화에 반대할 세력이 없어진 상황을 환경적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전시 상황에서 파괴된 농업산업 시설들의 복구를 위한 당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인민대중의 협동화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협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게 더 주된 요인이라고 보겠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139

 

개인적으로 책 1권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국제연대 사업이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제3세계에 대한 북한의 지원과 반미연대는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까지도 북한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심한 한국에서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책에 따르면 북한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와 호치민의 북베트남 그리고 제3세계 진영에 있던 이집트를 지원했다. 이집트에는 북한에서 보낸 고문단이 이집트군을 훈련시켰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도 쿠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명했으며, 북베트남에서는 북한이 보낸 공군 조종사가 미군 전투기 26대를 격추시켰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교수는 베트남 전쟁을 호치민의 독립투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해석했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일성과 호치민은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이였다. 책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북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50년에 국제관계를 맺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독립전쟁에서 상대의 입장을 지지하고 연대를 보냈다. 19577월엔 호찌민 주석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북은 답례로 이듬해인 195811월 김 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해 호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두 나라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인민의 단결과 우애를 강조하였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200~201

 

그 외에도 이 책에서 언급된 여러 내용들은 우리 사회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내용들이 대다수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는 이런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다. 어쨌든 북한 입장에서 북한의 현대사를 보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에 다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책에서 언급되는 북의 조선인민혁명군 한반도 해방 주체설이나 박헌영 미제 간첩설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북한에 대한 논쟁을 파고들면 정말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세부적인 논쟁 및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나는 이 책이 이제야 출간된 사실에 더 중점을 두고 싶다. 이제야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 현대사를 바라보는 책이 나왔다는 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반북주의 한국 사화에 대한 큰 문제의식이다.

 

많은 부분에서 북한 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책이었다. 분명히 얻어가는 점도 많은 책이다. 아직 1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2권도 읽는 대로 서평을 작성할 예정이다. 2권을 읽는 대로 2권에 대한 감상과 문제의식 등을 2권 서평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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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상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환영 소련 련합군'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일본이 항복하기 1주일 전 한반도 북부에서는 전투가 치러졌다전투는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에도 며칠간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으며이들의 진격 속도는 신속했다이들은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놀라운 전략전술을 선보였다이들이 바로 소련군(Soviet Red Army)이다독소전쟁 시기 히틀러에 맞서 4년간 전쟁을 치렀던 소련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소련군의 전술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시점에서 발전했으며, 1943년 쿠르스크 전투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붉은 군대는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룩했다소련군은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에서 승리를 이룩했다히틀러의 자살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그 전쟁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전쟁이었다사실 소련은 1941년 당시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상태였다그러나 독일이 패전한 이후 소련은 일본군과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1극동전선군과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자바이칼전선군 등 크게 3방향에 병력을 극동에 배치했다이에 따라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게 됐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 또한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이에 따라 8월 9일부터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격하게 됐고그 속도도 매우 신속했다만주진격작전 당시 한반도로 진격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치스차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이었는데25군은 소련 극동태평양 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웅기와 나진청진 그리고 나남을 점령했다. 8월 13일 북한의 청진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극동태평양 함대의 지원을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데이 전투에는 이후 북한의 고위직을 보냈던 정상진도 그 현장에 있었다당시 정상진은 소련의 붉은 군대 소속으로 청진시에서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이후 그는 KBS에서 제작한 고려인 다큐에 나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후퇴해온 일본군들이 전부 청진시에 모인 거예요한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걸 봤습니다그때 내가 울었습니다. ‘너희도 우리 앞에 투항하는 그런 때까 있구나’ 느끼고 상당히 감동했습니다네가 유일한 조선 사람이니까 너에게 형무소 열쇠를 줄 테니 형무소 문을 열라고 했어요그래서 형무소 문을 여니까 나오면서 만세를 부르면서 울면서 소련군 만세를 부르고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참 너무나 감개무량했습니다.”

 

해방 이후 6일 뒤인 8월 21일 소련군 상륙 부대는 군항 원산을 점령했고, 8월 24일과 25일 소련의 공수부대들은 산업 중심지인 함흥과 평양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치스차코프 휘하 제25군의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개성에 도달했고, 38도선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진격하여 38도선 이북의 전 지역을 접수했다한반도 이북을 해방군으로써 해방시킨 소련군의 소식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던 이남 지역까지 당연히 퍼져나갔고서울에도 소련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일부 정보에 따르면 소련군이 서울인근까지 잠시 들어왔다 나갔다는 자료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한반도 이남에 진주하게 된 주체는 바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했으며, 8월 26일 평양에 총 사령부를 설치했다그리고 북한 지역의 6개 도, 85개 군, 7개 시(평양진남포청진함흥신의주해주원산)에 경무사령부를 각각 설치했다이들은 일본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기를 접수했으며행정기관경찰서법원은 물론 일본인 소유 대기업철도통신수단은행 등을 관리했다점령군을 표방했던 미군과는 달리 소련군은 자신들 스스로 해방군이라 표현했고군정 초기 조만식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자체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와 협력관계를 구축했다이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자체적으로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지주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했다따라서 한반도 이북 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이 처형과 처벌을 피해 월남했다.

(평양에서 시민들이 환영을 받으며 행진하는 소련군)

 

북한에서도 여러 진보적인 사회 개혁들이 추진되었다해방 이후 귀국하여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1946년 3월 23일 ‘20개조 정강을 발표했다여기에는 일본 통치의 잔재 청산언론 출판 집회 및 신앙의 자유 보장남녀평등 보장, 8시간 노동제의무교육제무상의료 그리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따라서 당시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진보적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며실제로 그러한 성과들이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동일임금, 77일간의 출산 휴가와 소년노동의 금지 등과 같은 정책에서 당시 북한에서 실행된 사회주의 정책의 진보성이 드러난다.

 

토지개혁은 1946년 3월 5일부터 진행됐다토지개혁이 시행됨에 따라 총 100만 325정보 가운데 98만 1,390정보가 72만 4,522가구의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됐다당시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해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세기적 숙망을 가장 훌륭히 풀어주는 인민적인 법령이며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의 농민 문제농업 문제를 가장 철저히 해결하고 농촌경리의 장래 발전을 가장 순조롭게 보장할 수 있게 하는 혁명적인 법령이라고 호평했다이런 토지개혁으로 농촌에서 지주층은 소멸했고소련 군정하에서 만들어진 농민동맹은 108만 3,985명이던 단원의 수가 개혁 후 144만 2,149명으로 증가했다토지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며브루스 커밍스 또한 북한의 토지개혁이 소련이나 중국 베트남에 비해 유혈 없이 성공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선포 당시 사진,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이후 일부 지역에서 소련군의 폭력행위나 약탈 그리고 민간인 강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예를 들면예전부터 조선의 이스라엘이라 불리던 신의주에서는 반공시위가 일어나 소련 군정이 진압한 사례가 존재하며당시 반공시위에 참여했던 한국의 민주화운동가 함석헌의 경우 이에 대해 증언한 바가 있다부녀자의 강간의 경우 초기에는 분명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이들 중 일부는 월남하여 이승만이 참가하는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1946년 1월에 이르러 소련은 헌병을 들여와 군인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했다이에 따라 민간인들을 폭행하거나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소련군은 NKVD에 의해 총살됐다철저한 통제에 들어감에 따라 약탈 및 강간의 사례는 거의 보고가 되지 않았다소련 헌병들이 들어온 후 사태는 안정되었으며 그때부터 소련 관리들의 행위는 항상 정확했으며” 사병들은 철저한 통제하에 들어갔다소련군은 계속 보급물자를 징발했으나 대신 모든 것에 대해 보상받을 수 있는 영수증을 발행했다일각에서는 소련군이 많은 공장을 북한에서 반출했다 하지만실제로는 몇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증거는 없다소련에 의한 만주 공업의 반출을 조사기록한 폴리 위원회(Pauley Commision)는 북한에서의 실제적 반출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미 정보당국은 수개월 동안은 소련에서 중대한 반출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1946년 6월에 이르면 그 이전의 보고가 후퇴하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파괴에 근거했을지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거기다 소련 기술자들이 파괴된 공장들을 재건하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1946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생산이 1945년 수준을 능가하게 되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다.)

 

소련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준 해방군이었다는 사실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물론 일부 안 좋은 사례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나대체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재건을 도왔으며소련 군정 기간 동안 북한 사회에서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이 시행됐다이에 따라 한반도 북부 지역은 당시 미군정이 점령한 한반도 남부 지역보다 민중들이 더 많은 민주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따라서 소련군의 성격은 해방군이었으며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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