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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에게 한 것 보다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맥아더 사령부가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대공 방어막이 전혀 없던 이곳엔 지옥이 펼쳐졌다. 그날 미군 B-29 폭격기 70대를 포함한 100대 이상의 항공기가 8만 5,000발의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총 3,017호에 달하는 신의주 공공건물 중 2,100호가 파괴됐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16개의 초등학교와 14개의 중등학교, 15개의 교회와 2개의 병원도 이날 폭격으로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당일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즉,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80%는 여성과 아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했던 참극의 역사였다. 놀랍게도 당시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전쟁 내내 지속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영토는 개전 초기의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러나 1951년부터 전쟁이 다시 38선 인근에서의 전투로 전개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북한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로 미군의 폭격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면서 내세웠던 기준에 따라 보자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700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실제로 미 합동참모본부는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핵 공습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영토 위로 감시 비행 활동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방위에 관한 상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남한의 공군과도 공유했다. 1958년 1월 말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재래식 포 자산으로 방비가 삼엄한 미군 기지를 포격하는 것 말고는 잠재적 핵 공격에 대응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반도의 힘의 균형은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미군 첩보기가 북한 영공을 비행했으며,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 10대 이상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석방된 인질들을 데려왔다. 당시 미국의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행위를 집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1958년부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반공 정부의 프로파간다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과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북한에서 나온 남조선혁명론과 1968년 김신조 사건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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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실을 부정하는 분단Yuji세력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정치검찰파쑈독재정권은 허구한 날 ˝선제타격!˝만 외쳐대고 허상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여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있죠...
 

지난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등 사헬 지역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반제국주의 쿠데타 및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에, 한국의 언론과 서구 언론에도 제법 보도가 됐다. 니제르의 쿠데타 지지 시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순히 러시아 깃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 국기인 인공기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제법 놀랄 것이다. 저 아프리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인공기가 보였으니 말이다. 

(북한의 인공기와 이집트 국기)


사실 북한은 현재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 여러 국가들과의 교류를 쌓은 경험이 있으며,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던 국가에 지원을 한 역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이 그러한 무대였으며, 북한의 제3세계 연대 및 지원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초월했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인지지 표명을 넘어서 물적 인적 지원을 포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1960년 쿠바와 수교를 맺었으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 국제연대회의가 창설되자 이에 참가하여 미국 케네디 정부의 쿠바 해상봉쇄 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북한의 김일성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나세르는 이집트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베트남의 경우는 물적 인적 지원이 더욱 명확했다.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에 이미 수교를 맺었으며, 1957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양을 방문하면서부터 양국의 관계가 강화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김일성은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무너진다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지지합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요청이 오면, 설사 우리 계획에 지장을 받더라도 요구에 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전직 북베트남 공군 소장이 밝힌 2007년 기록에 따르면,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북한 항공기 조종사 87명이 베트남에서 복무했으며, 그중 14명이 전사했고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했다. 더 나아가 베트남의 군 소식통은 그 숫자를 96명의 항공기 조종사를 포함한 384명의 조선인민군 공군 요원이 복무했다고 밝혔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MIG-21기와 전투기 조종사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의 조종사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북한의 지원은 이집트에서도 있었다. 2021년 4.27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에 따르면, 북한과 이집트의 외교수립과 제4차 중동전쟁에서 군사고문단 및 공군 파견도 주목할만하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은 1970년대 초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처음으로 개입했으며, 그 후로 큰 폭으로 개입이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가 그 지역에서 첫 번째로 북한의 주요한 전략적 동반자였다. 사실 이집트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반서방 정권이 들어섰고,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했으며, 1956년에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군에 배치한 3연장 SA-6, 게인플(2K-12)과 1발짜리 SA-2, 가이드라인(뒤쪽) 지대공 미사일, 모두 당시엔 매우 위력적이었으며 지금도 이용되는 무기라고 한다.)


북한은 반서방 노선을 걷던 이집트와의 관계를 1960년대부터 개선하기 시작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전쟁에서 이집트가 서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개전 초기에 최소 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이스라엘은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어렵자 북한은 이집트에게 5,000톤의 식량 원조를 제공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는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다. 사다트 또한, 정권 초기 나세르처럼 소련과 제3세계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원도 받았다. 사다트는 집권 초기 이집트 영토에서 소련군을 내보낸다는 뜻밖의 칙령을 공표했는데, 놀랍게도 북한의 지원은 받았다. 이집트의 방위가 위태로워지고 훈련된 항공기 조종사가 부족해 곤란을 겪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가 조선인민군 분견대 파견을 포함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집트는 이 요구를 수락했고, 북한은 전투기 조종사를 포함하여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북한의 지원은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참모총장 사드 알 샤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의 원조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후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북한의 MIG-21기, 1970년대부터 북한은 이 전투기를 이용했으며 지금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이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고, 나는 해결책을 번뜩 떠올렸다. 3월 6일, 수에즈 전선 순시 차 북한 인민무력부 부상 장송 장군을 호위하는 동안, 혹시 그들이 비행 중대를 파견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지, 그들의 조종사들이 실질적인 전투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당시 북한이 MIG-21기를 운항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논의를 거쳐 4월에, 나는 그 계획을 완결짓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향한 공식 방문길에 올랐다. 그 비범한 공화국에서 매혹적인 열흘 간의 일정을 보내면서, 흔히 제3세계로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자체 자원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 사례가 내게 얼마나 고무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베이징에 잠시 들른 일이 그러했듯 그것은 이 회상록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다수 비행시간 2,000시간 이상으로 경험이 풍부한 북한 조종사들이 6월에 이집트에 도착했고, 7월부터는 실전에 참여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은 머지않아 통신을 감청했고, 8월 15일 북한인들의 주둔을 단언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지도부는 그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외국인 전력 보강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인들은 역사상 가장 소규모 병력이었을 것이다. 조종사 20명, 조종 장치 8대, 통역사 5인, 관리자 3인, 정치고문 1인, 각 1인의 의사와 요리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컸다. 그들은 8월과 9월에 이스라엘군과 2~3차례 조우했고, 비슷한 횟수로 전쟁에서도 접전을 벌였다. 그들이 와준 것은 감동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함이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던 우리 지도부의 인색함에 대해 사과하고자 함이다.”


인용문에 나온 바와 같이, 북한이 보낸 인력은 조종사 20명과 통역사 5명, 관리자 3명, 정치고문 1명 그리고 각각 1명의 의사와 요리사였다. 또한, 앞서 인용한 인용문만이 북한에서 파견한 인력에 대해 고평가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방과 이스라엘의 보고서에도 “참전한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이 그들의 상대인 이집트인들보다 공중에서 훨씬 유능했다.”고 나온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MIG-21기 1대가 이스라엘 F-4E 팬텀기 2대를 대적해 여러 발의 미사일을 요령 있게 잘 피했고, 이스라엘 전투기가 결국 기지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요원들이 조종하는 미그기가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당시 사정상 성급한 훈련과 열악한 지휘 구조 탓에 이집트 지대공 미사일 담당 사병들이 걸핏하면 아군 비행기를 요격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전선 및 전황을 표시한 지도)


(한 유튜버가 만든 제4차 중동전쟁 관련 영상, 심지어 이스라엘이 사라질뻔했다고 표현했다.)


정리하자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조선인민군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집트의 MIG-21기를 운항한 것이 조선인민군이었다. 반면에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직후 이스라엘군 내 조종사 부족 사태로 인해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를 운항한 것은 미군 항공병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군의 최신 기종인 SR-71 전략 정찰 항공기들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에 나섰으며, 전쟁의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파견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맞서는 공중전에서 유일한 비아랍인 전투원들이었고, 미국인들은 이스라엘의 공중전에서 유일한 외국인 조종사들이었다. 즉, 평양과 워싱턴이 각자 상대편에 맞서 중동의 한쪽 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셈이다.

(김일성과 무바라크 대통령, 북한과 이집트의 관계는 1980년대에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전투병력이 미국 항공병들과 직접 격돌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북한의 이집트 지원은 제4차 중동전쟁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공군은 6일전쟁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반환했기에 이집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에도 이집트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집트가 군사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핵을 가진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 측 탄도 미사일의 성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80년대 이집트에는 친미 성향이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집권했는데, 무바라크는 수차에 걸친 평양 방문을 통해 양국 사이에 미사일 개발에 관한 협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이집트의 탄도 미사일 전력은 거의 전부가 북한 측 장비로 이루어지게 됐다.


참고문헌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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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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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비록 새해에는 옆 나라의 쓰나미와 국내에서의 백색테러라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런 일 말고 많은 이들에게 기쁜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참이던 2020년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우연히 인터넷 상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됐다. 지인은 나에게 이 책이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가 쓴 책이며, 북조선 초기 역사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사게 된 나는 몇 년 후 영문판으로 일부분만 읽어봤다. 예를 들어, 토지개혁이나, 선거 그리고 젠더 관련한 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일반적인 책들에서 찾기 힘든 내용이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던 20238월 초 드디어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참으로 기뻤고, 따라서 인터넷을 통해 바로 책을 구매했다.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요즘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독서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하며 완독하니 상당히 기쁘다. 브루스 커밍스 선생이 가르치고 키운 수제자의 책을 이리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지(영어로 Suzy Kim)는 루트거스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북한사를 연구한 인물이며,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글쓴이는 평화운동 국제연대 차원에서 작년 여름에 미국에 갔다왔었다. 그때 워싱턴 D.C에서 접촉한 여성주의 성향의 평화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가 바로 Women Cross DMZ이며, 이 책의 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단체는 사실 국내 언론사에도 많이 실렸는데, 구글이나 네이버에 우먼 크로스 DMZ’ 혹은 위민 크로스 DMZ’로 검색하면 여러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래한국같은 우익 언론사에선 종북단체 혹은 북한의 꼭두각시라 욕하며 혹평 일색이다. 이번에 읽은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2013년 그녀가 쓴 책인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북한사는 역사학 분야에 있어서 아직은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주제 및 분야이며, 또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자 주제다. 물론 우리가 이에 대해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국 그리고 미국 자신의 책임도 크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도 한몫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북한사는 자료의 접근이 많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북한사 연구의 경우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전까지는 비교적 연구가 축적됐다. 이는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영향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측 문서고가 열리고, 한중수교가 성사되면서 중국 측 자료도 비교적 열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미국에서 북한사 연구를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미국 안에 있는 문서고를 통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연구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1980년대에 완성된 커밍스의 연구는 미국 워싱턴 근처에 있는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노획문서를 통해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진을 한 미군은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무수히 많은 문서를 확보하여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여기 담겨 있는 문서들 중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도 많다.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데,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그만큼 자료가 많이 있다.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전쟁 시기 북한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1945년부터 1950년 전쟁 이전까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진행되고 수행된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는 1946년 북한에서 실행된 토지개혁에 관한 것도 있고, 당시 여성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자술서를 비롯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현재는 남한 땅인 인제군이나 양양 그리고 속초 등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시기 강원도 지역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도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많이 있다.

 

김수지의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은 과거 미국이 노획한 북한 측 1차 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 나온 한국 사학계 측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수지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나타나는 인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또한, 김수지는 2010년대부터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젠더의 문제도 북조선의 역사를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사실 젠더 부분에 대해선 많이 모르는 글쓴이 입장에선 책을 통해 많이 배우는 느낌이었다.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강원도 인제군에 집중한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김수지는 1945년 해방 이전 일제 하에서 여성의 문맹률이 90%였는데, 해방 이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질적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의 성과를 언급한다.

 

“1945년 당시 여성의 90%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문맹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큰 문제였다. 이 점에서 문맹 퇴치 운동은 여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했는데, 실제로 [문맹 퇴치] 학교의 학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1948년 인제군 졸업생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3~4배가 더 많았다(<3.11>참조). 글을 읽지 못하는 인제군 주민들[대체로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 남녀]은 거의 모두 한글학교에 다녔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겨울철 농한기에 이루어지는] 4개월 과정이 끝난 후 치러진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62~163.

 

인용문을 보면 북조선에서 실행한 문맹퇴치운동이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고, 그 혜택을 여성들이 많이 보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근거를 통해, 김수지는 북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김수지가 북조선 혁명에서 나타난 여성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내세우면서 정권 초기에 나타난 육아와 보육의 부재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이 북조선 정권 하에서 쓴 자서전 및 책에서 나타난 맥락 생략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북조선 혁명 하에서 진행된 여성 혁명의 성과들 또한 많이 보여줬다. 예를 들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의 가입 비율이나 조직화 등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1118,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이하 '여맹으로 약칭)의 결성과 더불어 여성은 가장 먼저 조직된 단위 가운데 하나였다. 중앙집권화되기 전 마을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성 단체 역시 여맹의 우산 아래 모이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홑어진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1946510일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할 무렵 여맹은 12개 도시 89개군 616개 면에 지부를 두고 총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여맹 회원은 103만 명으로 확대되어 18~61(은퇴 연령) 성인 여성 인구의 3분의 1을 조직한 상태였다. 1947년 무렵 여맹의 회원 수는 150만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농민이 73퍼센트를 차지했다. 노동자는 5.3퍼센트 사무원은 1퍼센트 미만이었으며, 나머지 20퍼센트는 '기타로 분류되었는데 대부분 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87.

 

여성 관련한 얘기들 중 글쓴이가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지점을 뽑자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여성의 기억이다. 흥미롭게도 남한에서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것을 보람있게 생각했으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녀평등이었다.

 

여성들 역시 민족 해방 문제를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박선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없으면 여성 권리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더 이렇게 학대를 받고 이렇게 한단 말이야.” 민족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해방 곧 여성해방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수많은 빨치산 여성들이 산에서 보냈던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던 시간으로 설명했다. 누군가의 아내 또는 딸이 아니라 남성 동지들과 동등하게 혁명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빨치산 시절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변숙현은 산에서 보냈던 삶에 대해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 있게 산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 큰 포부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으니까라고 말하며, “보람 있게살았다고 단언했다. 박선애도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없었어요. 왜냐면 너무 우리가 억압당하고 살았잖아. 긍께 이제야말로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맘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 우리도 여성이지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두 여성의 감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는 해방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가족(그것이 친정이든 시댁이든)과 연계된 그 어떤 의무나 책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녀들은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해방공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346~348.

 

이와 같은 김수지의 여성 관련 서술들을 글쓴이에게 젠더적 관점에서 본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줬다. 이 부분에 대한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글쓴이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적인 것 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언급한 부분대로 일정부분에서의 한계나 미흡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절과 비교해보자면, 여성이 혁명과 일상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길이 보다 열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수지가 결론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이후 북조선에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의무교육이 전적으로 무상화됐고, 마찬가지로 의료도 무상화됐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은 전체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며 그들의 부단히 높아 가는 물질적문화적 수요를 더욱 더 완전히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와 복지의 제공은 북한이 실제로 그걸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김수지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일각에서는 남한의 부재한 친일청산 역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오류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책의 5장인 자서전, 혁명의 내러티브파트를 보면,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였거나 부유층으로서 소극적 혹은 적극적 친일에 가담한 이가 어떻게 해방 후 혁명 속에서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표현하는지가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학교에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칭송했던 한 인물의 경우, 혁명 정권이 들어선 뒤 쓴 자서전에서 이를 부끄럽게 간주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으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북한 사회가 친일한 이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회적으로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그러나 이런 기만적인 사실을 이해 못하고 그 교육 이념과 그 정책을 옳다고 인정한 나의 친일적인 사상을 해방된 오늘에 반성하여 볼 때, 너무나 양심의 가책과 무익한 인간 생활을 한 것이 원통하다고 뉘우친 것처럼, 해방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죄책감을 표현하면서 리원갑은 해방 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전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1945815일 우리 조국과 민족의 해방의 날이 우리 조국을 찾아왔다. 소련 군대의 영웅적 투쟁으로우리 민족은 일제의 기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못가지고, 우리 북조선에 진주한 후에도 적극적으로 이 소련 군대에 대한 친절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물론, 로어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방 인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의 모교인 동상인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 일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인제야 나의 과거의 과오와 이제부터의 나갈 방향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조선 민족의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하여 힘써 나갈 것을 교육했다. 이 동안에 상부에서의 지시, 각종 회의, 북조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나갈 길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65월부터 19471월 사이 평안북도 교육국의 추천으로 그에게 북조선로어학교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매달 500원의 장학금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과 기본 용품을 제공받았다 일제가 주도한 식민지 근대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해 왔던 사람들에게 해방 후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을 것이기에, 이 같은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55~256.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무엇보다 1946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에 있다.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하 토지개혁법)’194635일 공표했다. 이 법령에서는 일본 정부 일본 국민과 기관 그리고 일본인에 협력한 조선인 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으며, 지주들이 계속해서 소작을 주고 있던 토지는 면적과 상관없이 몰수됐다.

 

토지개혁으로 전체 105만 정보가 몰수되었고 25일 만에 98만 정보가 모두 71만 농민 가구에 무상으로 재분배되었다. 토지개혁은 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렸으며, 지주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제 부역자로 규탄받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규탄 받으며 토지가 몰수된 반면에, 북조선 전체 농민 가구의 70%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1946년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토지가 없는 다수의 농민과 빈농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일제 식민지 시기 친일을 했던 지주들은 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일제 시대 당시 지주였던 한 사람이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 것을 보도록 하자.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는 우리의 토지를 모두 하룻밤에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토지개혁 제1조라고 불렀다. 토지는 인민들의 것이 되어야만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토지를 잃었다. 그들은 우리를 집에 머물게하고, 우리 집과교회 사이에 있는세 개의 논을 남겨 놓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논 내가 거머리 밭이라고 부르던 에 발을 담갔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34~135.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자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토지개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 하에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분명히 대조된다. 따라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전혀 하지 않은 집단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던 이남 정부다. 앞서 인용 및 언급한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 또한 김수지가 쓴 책을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그 진싱을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당한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외에도 김수지의 책들은 북한의 선거 제도와 인민위원회 및 각종 단체들의 결성과 과거 일제시기 억압받던 계층들의 참여를 통해, 혁명 하에서 나타난 북조선의 일상들을 보여줬다. 그런 점도 상당히 좋았다. 과거, 억압과 외압으로만 봐왔던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부분을 일상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수지의 말대로 북조선 혁명은 그 자체로 20세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중 선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시행된 급진적 토지개혁을 통해 전례 없이 많은 농민들이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 만큼 매우 폭넓은 대중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매우 급진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은 인민들의 참여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북조선 혁명에서 주체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인민들이었고, 정권 초기 이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혁명적 일상에 반체제적 감정을 품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부 지주 및 기독교 계층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을 일반 민중들의 심각한 불만으로 등치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편견에 대한 반박과 교정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며, 특히 북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적극 추천하는 역작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에 대한 얘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책은 북한 사람들이 당시 소련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한 얘기가 많지 않다. 물론 일반 민중들이 인민민주주의 정권에서 교육받는 커리큘럼을 통해, 이들이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배웠다는 점을 알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어떻게 소련을 인식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아무래도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글쓴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김수지의 경우 당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또 환영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 고 있다. 이 부분은 보충적으로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는 북한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얘기하겠다. 사실 아직까지도 전 사회적 영역에서 북한을 보는 시선은 큰 틀에서 보자면, 왜곡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의 자본가인 일론 머스크가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일론 머스크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남한은 불빛이 많이 있고, 북한은 평양이나 일부 지방도시들 빼고는 어둡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과 주장들은 역사학자인 김수지가 자주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진의 경우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거기다 김수지에 따르면, 북조선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야간 조도가 낮은 유일한 국가가 아니며,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미국과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 이 점에서 프로파간다와 서구식 발전주의의 프레임이 사회에 편향 및 선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아래 김수지가 책에 쓴 내용을 언급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의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이남은 그 주변 지역과 함께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반면, 이북 지역은 수도인 평양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200212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뉴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이후 북조선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밤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남쪽이 빛과 에너지 그리고 활력과 경제 호황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반도 북쪽은 그저 어둡기만 합니다.” 뒤이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비극입니다.” 분명 북조선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된 위성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의 산물인 위성사진은 지구궤도에서 다각도로 촬영한(정확하게 말하자면, 236개 궤도에서 촬영한) 다중 이미지를 합성해 화재나 번개 같은 이상 현상을 보정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거쳐 완성된다. , 럼스펠드의 말처럼 위성사진은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모습이 아닐뿐더러 그 사진 자체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으로 약칭]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 역시 북조선에 대한 어떤 일정한 전제들에 맞춰 사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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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 51개 주제로 본 우리민족 절반의 이야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4.27시대연구원 지음 / 도서출판 4.27시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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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것저것 바쁜 일이 많아서 독서를 다소 게을리한 측면이 있지만, 작년 11월에 읽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권을 펼쳤다. 사실 1권을 읽은 이후 2권을 바로 읽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이 많아서, 지속해서 미뤘었다. 지난번 서평에서도 언급했던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라는 존재에 막연한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라는 존재는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되고 평가되며 판단되어야 할 존재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들 내면에 막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일종에 왜곡된 인식이 편견과 오만을 양산한다고 할 수 있다.

 

탈북자들을 생각해보자. 국내 종편 언론 TV조선과 채널A에서 방영하는 모란봉 클럽이나 이제는 만나러 갑시다를 보면, 북한이라는 존재는 항상 남한이라는 존재보다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서 방송을 진행한다. 이 채널들은 탈북자들을 모아서, 북한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양산해내며, 북한이라는 사회는 마치 인간이 살면 안되는 쓰레기 같은 곳으로 묘사한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adio Free Asia)이 하는 주장들과 똑같다. 대개 이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열악한 배급 사정, 전력 공급이 부재 등, 절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얘기들 뿐이다. 나는 이만갑이나 모란봉 클럽이 양산해내는 북한에 대한 관점이 과거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타국을 악마화하는 수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오는 북한에 대한 내용들을 상당 부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의 나팔수로서, 것 잡을 수 없이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일부 탈북자들이 증언에 더더욱 비판적이다. 예를 들면, 과거 북한군의 광주학살처럼 묘사된 송림 제철소 사건은 나중에 주성하 기자가 조사해본 바로는 상당 부분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을 정도다. 송림 제철소 사건이 한국 사회에서 과장된 이유에는 일부 탈북자들의 증언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비판적으로 보려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에 이어 이번에 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는 그런 거짓말들이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는 한국 사회에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는 책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북한의 현대사를 쉽고, 제법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1권이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를 다뤘다면, 2권은 북한에서 소위 전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선포하던 1980년부터 시작하여, COVID-19가 한참이던 2021년 북한에서 개최한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까지를 다룬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된 북한 현대사 관련 서적들이 1950,60년대 북한 경제발전의 성과를 인정한다면, 1970, 80년대 경제에 대해선 비판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또한,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을 단행한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와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그리고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개혁개방을 한 덩샤오핑의 모델을 비판하는 점도 책을 읽으며 눈에 들어왔던 점이다. , 이 책은 남한학계가 북한의 경제적 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비교 대상으로 삼는 모델을 비판한 것이다. 국내에 나온 책들 중에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비판하는 책은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런 점은 제법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책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남측 학계가 북의 경제건설 노선을 비판하며 비교 대상으로 삼은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이른바 '글라스노스트(개방)',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노선은, 북의 입장에서 보면 흐루쇼프때 등장한 현대수정주의의 연장으로 외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중단의 촉진제였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내세운 이른바 '개혁ㆍ개방' 정책 역시 자본주의화를 수용한 수정주의 경향의 하나였다. 게다가 북은 미국과의 군사적 대치가 상수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수정주의 확산으로 전체 사회주의진영에 악영향을 끼치고,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환경속에서 자체 역량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지속해야 했던 북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합리적 시각이라 하겠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p.24

 

중간중간에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 집필 과정이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소개 및 그 나름의 해석 등도 제법 볼만했다. 책은 <세기와 더불어>가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국내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호치민, 마오쩌등, 아옌데, 카스트로, 체게바라 등의 자서전 및 평전은 있지만, 정작 김일성에 대한 책은 일단 검열부터 하고 본다. 물론 나는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 북한 측 입장에서 쓰인 책들을 막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극우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어긋나기까지 한다. 따라서 책의 주장대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자유롭게 읽혀야 한다.

 

1990년대 북한에서 겪었던 고난의 행군에 관한 서술도 흥미롭다. 물론 나는 고난의 행군 300만 명 아사설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지만, 책에서 체계적으로 아사자 수치를 반박하니 반가울 따름이다. 사실 고난의 행군은 너무나 끔찍한 참사였지만, 실질적인 책임은 의도적으로 경제제재를 가하여 사람들을 굶어 죽게 하여 그 나라를 망치려 했던 미국에 있다고 본다. 1932년에서 1933년 당시 소련 시기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던 홀로도모르에 대해선, 스탈린의 학살이라 우기는 분들이, 정작 미국의 의도적인 고난의 행군 초래는 미국의 학살이 아니라고 보니 참으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책은 미국의 고립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한다.

 

북이 1990년대 중후반기를 항일무장투쟁 때 고생이 막심했던 전투 행군에 비유한 것은 그만큼 간고했기 때문인데 난관은 "수백년래에 처음 보는 무서운 자연재해"만이 아니었다. 김 주석 서거 이후 확산된 이른바 '북 조기붕괴설'을 현실화하려 미국은 대북 봉쇄와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이는 소련 해체와 사회주의 시장 붕괴 이후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주요 원료 및 물자 교역마저 가로막아 북의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그런 결과로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됐다는 게 북의 설명이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p.129~13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이 순수히 김일성 시대만을 다뤘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는 김정일과 김정은 시대까지 다루고 있다. 책 내용 중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7.1 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 책에 따르면, 이 조치는 사회주의 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가장 큰 실리를 얻을 수 있는 경제관리방법이라 북에서 일컫으며, 내용의 핵심은 가격조정을 통한 사회주의 분배의 현실화. 전차(버스) 요금과 쌀 값이 급상승했는데, 이에 따라 일반 인민들의 생활비도 대폭 상승시켰다. 그리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는 노동의 특성과 기술 수준, 생산성 등에 따라 차등지급했다고 한다. 책을 통해 7.1조치에 대해 처음 알았다.

 

그 외에도 현재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의 성장과정이나 군 생활, 그리고 김정은 시대의 여러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트럼프의 도발적인 대북 발언이나, 4.27 평화선언 그리고 북미 1,2차 회담 및 2021년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까지 현재 시점의 북한 이야기까지 다루니 흥미롭게 다가왔다. 물론 책을 재밌게 읽었지만,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학시절 1,200여 편의 논문과 담화를 발표했다는 부분이나, 세습 관련 부분에 대한 입장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내 생각과 상반되는 부분들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2권 또한 얻어가는 점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책은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자칫 북한찬양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얘기들 중에는 우리가 북한에 대한 막연한 편견에 빠져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들을 알려준다. 또한, 반공주의자들이 양산한 거짓 자료에 대한 반박도 담고 있다. 한국 사회가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이러한 책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말로는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하면서 정작, 북한 자료는 탄압하려는 이 사회 모순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번에도 북한 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제법 됐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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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하바로프스크 야영지에서 찍은 제88특별여단 대원들의 사진, 사진에는 북한의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있다.)

 

1937년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 이후 김일성은 일본군 부대의 대대적인 추격을 받았다. 1940년 3월 이른바 홍기하 전투(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한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그 이후에도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았다결국 김일성을 포함한 항일연군의 지휘부는 병력을 이끌고 소련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지도자였던 웨이정민(위증민)은 1940년 7월 모스크바 중앙에 서한을 보내 부상자와 연장자를 소련 영내로 보내고 남은 대원은 소부대로 나누어 식량공작에 투입하겠다는 새로운 방침을 보고했다즉 이에 따라서 김일성 또한 부대를 이끌고 소련 영내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1958년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1941년경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투쟁방침을 고쳤습니다한편으로는 혁명의 전도를 예견하고 소련 일대에서 많은 간부를 양성하였으며다른 편으로는 역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대부대 활동을 소부대 활동으로 변경하고 지하투쟁을 강화하였습니다.”

 

1940년 10월 김일성의 부대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1940년 7월 기준으로 김일성이 이끌던 부대의 규모는 대략 340명 정도였다고 한다최소 300명 이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의 훈춘을 떠나 김일성은 소련으로 들어갔다당시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들어간 이들 중에는 조선인 대원 전문섭강위룡최인덕이두익 그리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 등이 있었다.

 

김일성을 포함한 동북항일연군 부대가 소련으로 피신하던 시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정말 암울한 시기였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김일성이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던 시기 나치 독일은 영국을 제외한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을 점령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김일성이 상대하고 있던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고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한 상태였다거기다 1년 뒤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다이처럼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암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항일연군도 큰 타격을 입었다이른바 고난의 행군 과정에서 많은 혁명 동지들이 전사했고김일성 부대가 소련을 떠난 뒤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제3방면군 총지휘자인 진한장이 일본군에게 사살당했고1로군에 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이자 김산의 친구이며 의열단 대원이었던 오성륜도 일본군에게 투항했다안타깝게도 오성륜은 이후 변절하기까지 했다또한 앞에서 서술한 웨이정민도 밀영 속에서 사망했다.

(제88특별여단의 깃발, 러시아어 글자가 들어가 있는게 인상적이다.)

 

소련에 도착한 김일성과 그를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은 소련군에게 취조를 받고이른바 1941년 초의 하바로프스크회의를 거쳐 두 개의 야영에 배치됐다현재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당시는 우수리스크가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땀.)과 하바로프스크 북동쪽 7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가의 비야츠코 마을에 A야영(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라고 일본 관헌자료에 나옴)이 만들어졌다당시 김일성이 들어간 곳은 B야영이며 대략 몇 백 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이렇게 만주에 정착한 이들은 단순히 소련에서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일부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남아있는 독립군 잔존세력을 도왔다다만 1941년 일본과 소련의 중립조약이 체결되면서그러한 활동은 매우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와다 하루끼가 쓴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 따르면 1942년에 와서도 이 소부대들은 야영을 출발하여 정찰과 전단살포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당시 부대의 정예 대원이던 조상지는 1942년 2월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됐지만, 1941년에 들어서 동북항일연군에게도 변화가 생기는 일이 나타났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그해 12월에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비록 소련은 이 시점까지 이들이 만주로 다시 돌아가 활동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을 이들을 활용하고자 했다. 1942년 6월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게 대패하고 난 뒤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에게 훈련을 실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실제로 이들을 소련의 붉은 군대에 편입시켰다그것이 바로 제88특별여단이다.

(1945년 가을 북한에 입성하고 나서 찍은 김일성과 소련군 지휘관들의 사진)

 

88특별여단은 1942년 8월 1일 창설됐다88특별여단 소련 붉은군대(Soviet Red Army)의 일원으로 러시아어로는 제88특별저격여단(88 Otdel'naya Strelkovaya Brigada)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여기서는 이 글에서는 그냥 줄여서 제88특별여단이라고 부르겠다이 부대에는 중국인과 몽고인 그리고 조선인과 러시아 소수민족인 나나이족이 같이 근무했으며동북항일연군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김일성 또한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88특별여단의 병력은 초기에 1,500명 정도로 이 중 항일연군 인사는 1,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88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소련장교의 지도에 의해 행해졌으며총검술·실탄사격·전술진공·방수훈련·행군연습·동계 야외 노영훈련·낙하산강하훈련 등이 이루어졌다겨울에는 스키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최소 1,500명 이상이나 되는 제88특별여단에는 항일연군 병사가 다수를 차지했으나이 중 조선인은 최소 120명에서 많게는 4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며 환영했다.) 


최성춘의 <연변인민항일투쟁사>에 따르면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소련과 만주를 왔다갔다하며 항일투쟁을 이어나간 것으로 확인된다. 1942년 5월 12일에는 박덕산소부대가, 5월 29일에는 안길소부대가 그리고 7월 17일 시세영소부대가 연변으로 돌아왔으며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이들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적정찰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갔으며소부대의 이런 활동은 1945년 봄까지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88특별여단이 독자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는 확실한 문서는 없으나이들 중 일부는 소련군에 편입되어 붉은 군대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소련 문서와 주보중(항일연군 지휘간부)의 회고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들 중 일부는 소련의 붉은 군대 대원으로서 1945년 소련의 대일전에 참전했다또 이들 중 일부는 한반도 북부로 진격했으며이른바 해방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5년 10월 연단에 선 젊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당시 많은 이들이 김일성의 존재를 노장이라 생각했으나 너무나 젊은 인물이어서 한편으로는 근거없는 '가짜설'이 유포되기도 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김일성도 호치민처럼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다.”고 주장했다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에 따르면, 1944년 11월 일본의 한 경찰 보고서를 보면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됐으며, “국경지대에서 미국 공군의 공습과 조율하여 철도를 파괴하기 위해 조선-만주 국경을 따라 주요 지점에 정보원을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이른바 인민전선에 따른 반파시즘연합전선 차원에서의 행동일 것이다베트남의 지도자이자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 또한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미국 OSS와 접촉하여 베트민을 훈련시키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김일성을 포함한 사회주의 계열 항일무장독립군들은 많은 이들이 친일을 선택할 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그리고 이들은 이후 1948년에 설립되는 북한 정부의 핵심이 됐다브루스 커밍스의 말대로 김일성과 김책최현최용건 그리고 그 외의 200여 명의 핵심 지도자들은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면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현재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이종석().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비, 1992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와비평사, 2014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지 카치아피카스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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