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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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 의혹은 국내에서 제법 얘기가 된 주제다미국의 세균전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북한과 중국에서 조사를 벌이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국제과학조사단 미국이 조선과 중국에서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결론지었다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북한의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으며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 1 28일과 3 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고 밝혔다북한이 미국의 세균전을 규탄한 시점은 1952년 초부터로 확인된다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세균전에 대해 언급하며미국을 비판하는 공개 발언을 했다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니덤 보고서, 국제과학자협회 조사단이 북한에서 조사한 미국의 세균전 관련 공식 문서다.)

 

“1월 28일 적 군용기들은 조선에서 종전에 보지 못하던 세 종류의 벌레들을 이천·동남·농소동·용수동 등 지구에 대량적으로 산포했는바그 첫째 종류의 형태는 검은 파리와 같으며 둘째 종류의 형태는 벼룩과 같으며 셋째 종류의 형태는 빈대와 같다. 2월 11일 적군 비행기들은 철원 지구의 아군 진지에 대하여 벼룩·거미·모기·개미·파리 및 기타의 작은 벌레들이 가득 찬 종이통과 종이 봉지를 투하했다시번리 지구에서는 파리를 대량적으로 투하했으며 또한 평강 지구에서는 벼룩·파리·모기·귀뚜라미들을 대량적으로 뿌렸다.”(박헌영 평전 p.555~556)

 

현재 북한은 미국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엿다고 주장하고 있다아래의 인용문은 북한의 조국전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p.88)

 

미국의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세균전이라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주장했다그가 쓴 <한국의 민중봉기>라는 책에 따르면미국은 1947년부터 생물학전 무기를 개발했고그 당시 메릴랜드 주 데트릭 기지가 미군 세균전의 중심지였으며, 1951년부터 1953년 회계연도에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에 3억 4,500만 달러를 사용했고이는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배치한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었다.(한국의 민중봉기 p.209)

(아랍계 언론 알자지라의 미국 기밀문서 해제)

 

미국의 이러한 세균전 자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실제로 미국은 마루타 부대로 유명한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줬다그를 살려준 주체는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에는 이에 못지않게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 당국이 악명 높은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일본군 장교와 연구자들에게 비밀리에 완전 면책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그 대가로 미군은 만주에서 죄수 3,000명을 상대로 일본군이 실시한 인간 생체실험 관련 자료를 넘겨받았다.”고 나온다.(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5)

 

반면 현재까지의 미국 공식 입장은 세균전이 없었다는 것이다즉 북한과 중국이 지어낸 것이라는게 현재 미국의 입장이다정말 그러한 것일까미국의 공식적 입장과는 달리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북한과 중국 자료 뿐만 아니라 미국의 공식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은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

(세균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폭탄)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매카시즘이 한참이던 1953년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다.

(북한에 투하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

 

그 외에도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은 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이 책은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

 

2010년에는 아랍계 언론인 알자지라(Al Jazeera)’을 통해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한 사실이 문서로 증명됐다알자지라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를 공개했고, 1951년 9월 21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미 합참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특정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음을 밝혔다. 1951년 9월 21일자 문서였으며당연히 미국 측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미국 문서였다.(“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세균전 관련 중국의 프로파간다)

 

2015년에는 미국이 세균전 방법을 일본으로부터 배위 한국전쟁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니덤 보고서가 원본 전문이 최초 공개됐다.”는 기사가 나왔다니덤 보고서는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1952년 작성한 것으로 보고서에는 미 공군이 일제 강점기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에게 기술을 건네 받아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세균전을 치른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이 전문은 조사 내용만 670페이지나 된다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참고자료로 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 일대에 뿌려진 벼룩 사진해당 지역의 주민 사진세균을 뿌리다 잡힌 미군 포로의 수기 진술서미군의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등 세균전을 뒷받침할 증거가 200장 가까이 수록됐다.(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세균전이 없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미국의 기밀문서나 영국의 조지프 니덤 등이 조사한 자료가 보여주는 증거가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존재했고규탄받아 마땅하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안재성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2009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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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3 16일 새벽 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을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 인근에 내려 놓았다미라이 마을에 진입한 병사 30명은 이후 4시간 동안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는 남김 없이 학살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미케(My Khe) 지역으로 가서 양민을 학살했다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고이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 274채가 불에 탔으며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었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인 쌍굴다리, 글쓴이는 작년 겨울과 가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확산시킨 사건이었다이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자행하는 짓들이 바로 이러한 학살극이었음이 드러났다미라이 학살을 통해미국인들은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의 실체와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다이와 같은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완벽히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미라이 학살이 일어나기 18년 전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그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자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 개입했다. 1950년 7월 2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상륙했고, 7월 5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했다즉각적인 지상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7월 19일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붙잡혔다.

(영화 작은 연못의 포스터, Kill Them All이라는 영화의 문구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을 연상시킨다.)

 

결국 미군은 그해 8월에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후퇴하기 바빴다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이런 사고를 가졌던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고이 과정에서 대량의 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No Gun Ri massacre)이다.

(영화 작은 연못에서 나온 피난민들의 모습, 피난민들은 3일간 쌍굴다리 밑에서 이렇게 학살당했다.)

 

1950년 7월 23일 후퇴하던 미군은 충북 영동군 주곡리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분산 명령)을 내렸다이에 따라 주민들은 짐을 싸서 임계리로 이동했고, 2일 뒤인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지역주민 수백 명(최소 600)을 후방으로 인도해 하가리 하천변 노천에 숙박시켰다다음 날인 26일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노근리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피난을 갔다그러자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이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최소 수십 명은 죽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의 항공 폭격과 기총 사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공기 공격을 피해 쌍굴다리 안으로 달아났다이것이 이날 오후 2~3시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노근리 지역에 있던 미군 제7기병연대는 노근리 철도 언덕과 위쌍굴 앞뒤에 기관총 부대를 배치하여 도망친 민간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그러고 나서 굴다리 밖으로 나오는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쌍굴다리를 포위한 미군들은 굴다리를 나오려는 민간인들은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피난민들은 공포와 갈증배고픔에 떨며 28일 오전까지 이 쌍굴다리에 숨어있어야 했다배고품을 못견딘 아이들이 울면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집중 사격을 했다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근리 학살을 표현한 그림)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29일 새벽까지 무려 60시간 동안 진행됐다이 학살로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와 노인여성을 가리지 않았다겁먹은 피난민들은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미군에게 학살당했다몇 명이 야음을 틈타 쌍굴을 탈출했고쌍굴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20명도 안된 것으로 확인된다. 3일간의 학살로 노근리에서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학살을 마친 미군은 노근리를 떠나 남으로 후퇴했다이것이 바로 후퇴하던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의 시작을 알린 미군의 항공폭격과 기총사격)

 

노근리 학살이 한국 사회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이 되어서다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노근리 학살을 꺼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노근리 사람들은 침묵해야 했다한미동맹과 반공을 외치는 사회는 이들의 아품을 감추려했고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과정에서의 미국 정부의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하지만 미국은 최소한 이에 대한 자료 중 일부는 파괴하지 않았고정보공개법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조 잭먼 등 당시 부대원들이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었으며, AP 같은 언론도 병사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해 노근리의 비극이 알려질 수 있었다이후 노근리 학살 이야기는 2010년 국내에서 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und)’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근리 이야기, 2011년에 출판된 노근리 학살 관련 만화책이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였다그러나 노근리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라이 학살 만큼의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다그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강화되는 시점에 치러진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반전여론이 너무나도 미미했다그리고 전쟁 자체가 원점에서 끝나며 미국인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이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 한국전쟁의 미라이 학살임에도 불구하고많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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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생각에 큰 전환과 충격을 갖다 준 책 한권이 있다그 책은 1950 6 25일에 일어났던 6.25전쟁 즉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국내에 알려준 저작이었다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다. 1960년대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특히 한국전쟁 관련 연구에 많은 노력을 했다또한 1970년대에는 북한을 방문했으며북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다즉 이런 연구를 통해 그가 만든 작품이 바로 한국전쟁의 기원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전쟁의 기원은 영문으로 대략 1,000페이지가 넘는 그의 방대한 연구서이며, 1권과 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의 해방정국을 분석했고, 2권은 1947년 해방정국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까지를 분석했다한국전쟁의 기원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이 받은 충격은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못지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한국전쟁에 관해 깊은 연구를 했던 그의 저서는 국내에서 이적표현물이 되었고이에 따라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 책을 탄압한 이유는 분명했다한국전쟁의 기원이 당시 정부가 제시하는 한국전쟁관과 전혀 다른 해석을 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는 반공주의에 위배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 대해 깊게 연구하며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그는 한국전쟁의 발발 시점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했다는 부분에 중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국전쟁을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찾았다그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도부였던 김일성과 주류 인사들이 193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반면남한 지도부들 특히 군부의 경우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대립구도(친일파vs독립운동가)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보았을 때한국전쟁이 북한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다.

(브루스 커밍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누가 먼저 일으켰느냐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전쟁의 구도와 성격 그리고 맥락을 중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봤다물론 1990년대 동구권 붕괴 이후 박명림 교수나 국내의 몇몇 사학자들이 커밍스 교수의 자료를 반박하는 시도를 감행했고커밍스의 주장이 반박당하기도 했으나이것이 커밍스가 제시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한 완벽한 반박이 된 것은 아니었다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던 2010년 브루스 커밍스는 The Korean War: A History라는 한국전쟁 관련 신간을 출간했고그 신간은 2017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번역됐다물론 이 책에서도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으며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가지고 있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브루스 커밍스가 제시한 민족해방전쟁론은 좌우 할거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그러나 나는 이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완벽한 반박을 하는 반공주의자들을 본적이 없다그저 낡은사관이라는 말만 얼버무릴 뿐커밍스가 제시한 근거(친일파vs독립운동가 등등)를 완벽히 반박하는 사례는 못 봤다오히려 이승만 정부부터 반복된 침략자 김일성이 나쁜거니 한국전쟁은 다 김일성 책임이야와 같은 주장들만 반복될 따름이다이것은 개인적 입장부터 학계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사학 전공자로써 나는 브루스 커밍스의 민족해방전쟁론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커밍스의 민족해방전쟁론은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보면 그 구도는 명확해진다.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은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중국을 상대하는 것이었고대만해협에서는 장제스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를 지원하여 호치민의 독립운동을 막는 것이었다따라서 이런 국제적인 구도에서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며한국전쟁을 김일성과 호치민 그리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국제연대라는 시각에서 연구 성과물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앞으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이쪽으로 깊은 연구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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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전쟁 2년째인 1952년 초 불거졌다그해 2월 22일 북의 박헌영 외무상은 미군이 세균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박 외무상은 세균을 지닌 다량의 곤충이 1월 28일부터 북측 지역 상공에서 미군기로 살포되었다면서 전 세계 인민에게 간섭주의자들의 불법행윌르 조사할 것을 호소했다이틀 뒤인 2월 24일엔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미국에게 세균전 중단을 촉구했다저우언라이 총리는 또 미군 비행기가 2월 29일 이래 중국의 화북과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3월 8일 거듭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당시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표가 유엔 총회에서 북과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 반면 미국의 대표인 벤자민 코헨(Benjamin Cohen) 대사는 그들의 주장은 진실성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미국정부는 이런 불성실하고 경우 없는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부인했다.

(스티븐 엔디콧의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렇게 불븥은 미국의 세균전 논란은 파문을 일으켰다세균(생물할)무기는 1925년 6월 체결된 제네바의정서(Geneva Protocol)에서 화학무기와 함께 이미 전쟁 때 사용이 금지됐다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생체실험을 벌이고 세균전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결국 전쟁범죄로 규정되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은 터인데 다시 불거진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논란이 식지 않자 미국은 유엔을 통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적십자사의 현지 방문조사 등을 제안했지만 북과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세계보건기구는 당시 북·중국과 교전 중인 유엔의 기구였고 또 국제적십자사의 경우 유력 회원인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가스 수용소의 존재를 은폐한 전력이 있었다더욱이 당시 ICRC위원장은 바로 문제가 된 2차 대전 당시의 적십자위원이었다.

(2010년 아랍 언론계 알 자지라에서 방영했던 한국전쟁 세균전 관련 내용 보도)

 

대신 북과 중국은 1952년 3월 29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의회에 중립적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조사단 구성과 그를 통한 현지조사를 제안했다세계평화의회 집행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소련 등 6개 국적의 지명 과학자 7명으로 된 국제과학위원회(위원장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를 파견했다국제과학위는 그해 7월부터 두 달 가까이 중국과 북에서 현지조사를 벌이고 피해자와 목격자그리고 미 공군 포로들을 직접 인터뷰했으며 중국과 북측 보건의료 관계자들도 만났다국제과학위는 현장 방문 결과와 수집 자료 등을 토대로 670(요약문 64쪽과 부록 605)에 이르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 사실 조사보고서(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for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약칭 니덤 보고서라 불린다)’를 작성해 중국에서 발간했다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조사단(국제과학위원회)은 결론적으로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그것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야밤을 통해 비행기로 강남지방으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 야간 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기의 사실로 보아 조사단은 탄저열균을 가진 곤충과 거미는 3월 12일에 요동지방의 이 작은 도시 가까이에 적어도 1대의 미국 항공기에서 적어도 1개의 특수한 용기를 통해 투하되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북조선과 중국의 인민은 실제로 세균병기의 목표가 되었다이들 병기는 목적에 따라 대단히 다종다양한 방법을 구사하는 미군 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이들 방법에는 일본군(저자 주:731부대)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했던 것을 개발한 것도 있을 것이다조사단은 일보일보 전진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그것은 마지못한 가운데 이루어졌다왜냐면 조사단원들은 이런 비인도적인 기술이 세계 인류의 비난을 무시하고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즉각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반발했다메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미국동군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의)온갖 악의에 찬 거짓선전 중에서도 세균전 주장은 미국인들과 자유세계에 대한 가장 터무니없는 경고라고 반박했다.

 

반면 북은 미군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북은 또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해외보도가 지난 2010년에 나왔다그해 3월 17일 아랍권 위성채널 <알 자지라>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며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실험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1년 9월 21일자 문서를 공개한 것이다이 문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한다미군의 세균전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밝힌 <조선전사> 27권이 출간된 시점이 1981년이다세균전에 관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미군의 비밀문서가 30년 만에 한 아랍계 언론의 탐사보도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살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들)

 

작전단계는 1952년 5월 하순부터였다고 한다특히 이때엔 조산빈더 중부를 횡단하는 한 개의 감염지대를 설정하고 이 지대에 일상적으로 세균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염병을 만연케 하여 우리의 후방공급이 이 감염지대에서 차단되여 전선에 도달되지 못하게 하려는 악랄한 목적을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실행 지도)

 

북은 세균 공격이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한다북은 “1953년 1월 9일 함경남도 혜산군 장락리에는 1평방메타당 1만 마리의 파리거미개미딱장벌레들이 투하되였으며 3월 10일에는 북청군내 19개 리와 신창군의 8개 리함흥시 주변 3개 리에 파리벼룩거미개미 등 12종의 새균독충들이 산포됐고, “2월 14일부터 4월 24일까지 2개월 동안에 평안북도 곽산군태전군녕변구느 정주구느 박천구느 황해도 안악군황주군옹진군금천군토산군재령군 등지에 20여 회에 걸쳐 거미파리모기딱장벌레 등 9종의 세균 독충이 산포되였다고 주장했다.

 

북은 이런 미군의 세균전이 오랜 세균전의 경험을 가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협력 밑에 감행됐다고 본다즉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 침략전쟁에서 미제 침략자들에게 야만적인 세균전 계획 작성을 적극 도와주었으며 일본 령토를 세균전의 공격기지공급기지로 내맡기였을 뿐 아니라 세균무기 연구와 세균탄 제작그리고 세균전 감행방법 등의 경험과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제공해주었다고 단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규탄하는 중국 측 선전물)

 

북은 미군이 화학전도 벌였다고 주장했다주로는 전선과 그 린접 지대들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시작은 “1951년 5월 6일 평안남도 남포시에(미공군기가)일반 폭탄과 함께 독가스탄을 투하한 것이라는데 이로 인해 1,370여 명의 주민이 사망했다고 한다같은해 7월 6일과 9월 1일엔 원산시 풍포리와 황해도 여러 개 지구에 최루성 및 질식성 가스탄이 투하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듬해인 1952년 1월 9일 강원도 문천군 울림면 학성리의 수십 호 농가들에 “5발의 질식성 가스탄을 투하하여 평화적 주민을 즉사시키고 83명을 중독시켰다고 했다또 그해 2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2개월 동안엔 미군 보병부대들이 질식성 및 최루성 가스탄을 41차에 걸쳐 아군 진지에 발사하는 등 화학공격은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강조했다.

 

미국 세균전의 숨은 그림찾기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의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한 국내외 언론과 학자들의 분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선구적 역할을 한 이는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그러자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는데 파월은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파월은 세균전 문제 추적을 계속해 1980년엔 2차 대전 직후 미국 정부가 일본 세균전 전범과 거래한 증거가 담긴 맥아더 사령관 관련 비망록을 입수해 <참여 아시아 학자 회보(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에 폭로하기도 했다여기엔 세계에서 처음 실시된 주요 생물학전 프로그램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었다맥아더와 비망록을 주고받은 이들은 정보 보좌관인 찰스 월러비 소장법률 고문 알바 가핀터 등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세균전 커넥션의 절정은미국이 1947년 마루타로 악명 높은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 출신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를 얻기 위해 그들과 직접 거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이는 2005년 8월 14일 당시 일본 가나가와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이찌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해제 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알려졌다당시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 조건으로 15~20만 엔을 주고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한 것으로 드러났다이 금액은 현재 2000~4000만 엔(약 2~4억원)에 이른다.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전쟁범죄에 대한 사면을 서면으로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이다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는데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두 저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진과도 인터뷰를 했다.

 

국내 연구물로는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1996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에서 10번째 주제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을 다뤄 주목받은 바 있다.

 

출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8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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