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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15년 독립운동사중에 의열투쟁사를 주제로 했던 영화 암살이 천만관객을 돌파했었다.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암살이 흥행한 뒤로부터 대중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보통사람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가 하면 안중근, 김구, 유관순, 윤봉길, 안창호, 이봉창 정도다. 그런 일반인들이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보면서 매우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이들중엔 왜 김원봉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졌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일제시기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잊혀졌던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그는 누구일까?

 

1.김원봉 일대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16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9년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받은 뒤 그해 11월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을 만들었다. 1920,30년대 의열단은 주로 사보타주, 요인암살등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열단이 주도했던 사건 중에는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거도 있었고 그러한 투쟁방식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1926년 김원봉은 장제스가 만든 황포군관학교에서 유학했고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2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고 1938년에는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중일전쟁 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까지 수많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치르던 김원봉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 병사들도 광복군국내탈환작전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빨리 항복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귀국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합류하였다. 1947년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괴한들로 부터 테러를 당하는 일이 적잖게 일어났다. 그때문에 김원봉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그러던 중 당시 수도 경찰청장인 장택상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이용하여 그를 체포한 뒤 고문했다. 악질 중에 가장 악질인 노덕술에게 고문받은 김원봉은 그 모욕을 견디지 못하여 몇일동안 울었고 결국 1948년 월북했다. 1948년 9월 북한정부가 수립됐고 김원봉은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다.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1953년 박헌영 체포로 시작된 남로당 탄압과 1956년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연안파 소련파들이 일으켰던 8월 종파사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1958년 부위원장을 사임했다. 1958년 11월 그는 북한에서 죽었다.

 

2.의열투쟁과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

 

1919년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920,30년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었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김원봉이 전개한 의열투쟁이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상대로 전개했던 의거를 무차별 테러라고 주장한다. 일본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에게 적극협력하는 앞잡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독립투사들의 의거를 테러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테러와 의거를 구분하지 못한 관점일 뿐이다. 일단 김원봉의 이끌던 의열단의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 7가지"가 어떤 것인지 보자.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4.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제거해야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이렇듯 의열단이 만든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주의자, 친일파, 일본제국주의를 이롭게 하는 기업과 정치단체 그리고 일제 경찰 군인에 한해서 였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조선인 일본인 할 거 없이 민간인들을 타겟으로 테러를 일삼지 않았다. 즉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나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민간인 테러를 일으키고 현재 중동지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탄테러와 무차별 살상을 일삼고 있는 IS하고는 엄연히 다른 단체였다. 이런 구분없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들의 거사를 무차별 테러라 칭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이다.

 

3. 김원봉은 과연 북한정권에 의해 죽은 것일까?

 

해방후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 김원봉은 북한에서 고위직을 거쳤고 1953년 북한에서 불어온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숙청시기 살아남았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주도한 연안파 소련파 숙청시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지만 1956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1958년 김원봉은 자신이 있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김원봉의 행적은 1958년 이후 알려진게 없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김원봉이 1958년에 사망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일각에서는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을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길 1958년 북한 고위직에서 내려온 이후 그가 죽었을거라 예상하고 있고 북한정권이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어 죽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고, 북한정권에 의해 간첩혐의를 받고 죽었는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이 진상규명을 해야할 것이다.

 

4. 김원봉은 과연 공산주의자였을까?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계열에서는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빨갱이라 매도한다. 2015년 영화 암살이 떳을때도 수구세력들은 김원봉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했다.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은 박정희식 반공주의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도 매우 부족하고 매우 편향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김원봉은 1920,30년대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1940년대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애초에 의열단 자체가 아나키즘적인 성향이 강했고 약간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없다고는 할 순 없지만 기본 이념은 아나키즘이었다. 일각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인데 솔직하게 얘기해서 김원봉은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악질친일경찰로 알려진 노덕술이 그를 고문했다. 그런 악질 친일매국노에게 고문당한 김원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해방 후 여운형이 괴한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했듯이 김원봉도 괴한으로 부터의 테러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괴한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번 있었다. 즉 김원봉이 월북한 이유는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닌 괴한으로 부터의 위협과 친일경찰 노덕술의 고문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하는 수구세력의 관점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5. 글을 마치며

 

김원봉은 남북모두에게 잊혀진 독립운동가다. 한국에서는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를 가지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1인체제가 강화된 이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저자 김삼웅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2007년 평양에 갔을때 애국렬사릉에서 가이드에게 김원봉에 대해 물어봤는데 가이드가 김원봉을 몰랐다고 한다. 오랜세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된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한국에서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부터였다. 그로부터 1년뒤인 2016년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이 개봉했고 요즘 대한민국에선 전반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적폐세력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도하기 급급하다. 최근 경남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참 좋은 일이다. 앞으로 김원봉 선생님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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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2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NamGiKim님께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듯 합니다^^:) 앞으로도 의미있는 독서 좋은 리뷰 기대해 봅니다 !

NamGiKim 2018-04-22 15:40   좋아요 1 | URL
사실 제 전공이 역사입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있어요. 현재는 휴학생입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3학년이고요. 우리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를 보면 잊혀진 인물들이 매우 많은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 역사에서 재조명 받기를 매우 바랍니다. 특히 여운형 선생이나 조봉암 선생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무튼 감사합니다.^-^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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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전기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아내 님웨일즈가 쓴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을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 김산 그는 비록 조선인이었지만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당했다. 억울한죽음이었다. 세월이 흘러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김산도 재조명 되었다. 대한민국의 김산이 알려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하에서 사회주의자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이 공개적으로 출판될수 없었다. 없는 죄도 만들어 민주인사와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던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주의자 김산의 일대기를 공개적으로 소지할경우 빨갱이로 몰리기 만무했을것이다. 한국 진보사상의 아버지 리영희는 1950년대 일본에서 우연히 아리랑을 읽고 감명받아 이 책을 운동권 민주투사들에게 제목을 가린채 유포시켰다. 유신정권하에서는 운동권 내에서 그렇게라도 알려졌지만 1980년대 중반들어서면서 동녘출판사에서 출판할수 있게 되었고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조선의 체게바라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김산의 생애를 읽으며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젊은나이에 의열투쟁과 중국혁명 그리고 항일운동에 참가한 그의 행적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했기 때문인것 같다. 몇몇 수구세력들은 김산을 빨갱이로 매도한다. 그들 눈에는 사회주의 계열독립운동가들은 무조건 다 빨갱이인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무튼 난 아리랑을 읽었으니 기회가 된다면 모택동의 붉은별도 읽어볼 생각이다. 아리랑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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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투쟁 -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7
박명수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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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 1945년 9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까지 약 20일간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송진우 세력이 과연 어떠한 세상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합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박헌영 세력이 편입됨에 따라 좌경화 되었으며 우파세력은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송진우가 주도한 한민당 계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송진우 계열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가 지금현재 북한과 남한의 현실 즉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를 택해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가 됬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경재 10위권을 자랑하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본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과 무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여운형의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된 단체이고 건준의 행적이 과대포장되었다고 얘기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계열이 대거 합류하고 송진우 세력이 건준가담을 거부하면서 건준이 좌경화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편입하며 좌경화가 되기 전 1944년 8월에 만들어진 건국동맹 시절부터 안재홍, 조만식 그리고 임정의 광복군과 일제의 패망을 대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안재홍을 비롯한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도 건국동맹에 가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황이 항복방송을 하기 전 총독부와 협의하여 국내의 치안을 담당했던 세력이 여운형의 건준세력이다. 


둘째 저자는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었고 1949년에 이르면 한민당 계열 인물중 많은 사람들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따라서 한민당계열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독립운동 세력이 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민당에게 있는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저자는 현재북한과 남한의 차이를 여운형의 건준과 송진우의 한민당에서 찾았는데 여운형은 사회주의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에 가까웠고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친일세력이다. 여운형은 한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 하면서 레닌,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도 만나 조선독립을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비록 사회주의에 좋은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적은 있어도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도입하여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자고 했던 적은 해방정국시기에는 없었다. 오히려 조국이 통일되기 위해선 좌우 갈등을 막고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며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여운형이 인민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선택한 빨갱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작년 국정교과서 문제가 이슈화 되기 전에 나온 극우파계열 책으로써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 볼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그러나 왜곡된 부분을 비판없이 받아들이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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