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사례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찾기 쉽다. 특히나, 나무위키를 비롯한,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사이트는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 놓고, 어떻게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네이버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검색해보면, 나무위키식 주장에 영향을 받은 글들이 제법 보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문서들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고자이 학살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고자이 학살을 묘사한 벽화,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물타기에 가깝다.)


고자이 학살은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성 떠이선현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얘기에 따르면 주민 380명을 모아놓고, 한 시간 만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학살을 겪었던 대다수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은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 소속 맹호 부대로 규정하고 있다. 2007년 오마이 뉴스에서 연재했던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한 기사를 보면, 당시 한국군이 어떻게 학살을 벌였는지 나와 있다.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씨, 2016년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도 나왔고, 2015년에 학살을 증언하러 한국을 방문했었다.)


(응우옌떤런씨와 구수정 박사)


(빈딘성 박물관에 있는 고자이 학살 희생자의 사진.)


1966년 2월 26일 아침. 평화로운 베트남의 한 마을에 포탄이 날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헬기가 마을의 하늘을 가득 메웠으며, 녹색 전투복을 입은 한국군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됐고, 모두 380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 베트남 관리는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국군은 주민들을 언덕위에 몰아 놓은 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끈으로 묶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고, 어린이들의 몸을 찢어 손과 발을 나무 위에 내던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고자이 학살이 있던 곳에는 전쟁 이후 마을 주민들이 만든 큰 위령비가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는 희생자 380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침략자 미국에 대한 원한을 깊이 새긴다.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군대가 미제국주의 지도하에 380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학살을 부정하려는 이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지역에 그려진 벽화를 문제를 삼고 있다. 그 이유는 벽화에서 묘사한 한국군의 군복 마크가 한국군의 맹호부대가 아닌 당시 남베트남군이던 레인져 부대의 마크라는 것이다. 한국군의 맹호부대 마크는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이지만, 벽화에 그려진 마크는 당시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인 레인져 부대가 사용하던 흑표범 마크다. 즉 그러한 점을 들어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맹호부대 마크와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 마크, 이걸 가지고 학살 부정론자들은 한국군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며, 이는 나무위키 같은 반공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 함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론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할 뻔한 피해자가 굴뚝 개수를 잘못 기억한다고 해서, 나치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즉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면피용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조사가 아직 이루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건 올바르지 못하다.

(빈안 학살 50주년 추모제)


그렇다면, 학살에 대한 묘사는 과연 거짓이고,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로부터 무고한 것일까? 이러한 얘기는 한국군이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을 보면, 베트남인들이 증언한 한국군에 대한 묘사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의 경험이 있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만 하더라도 제주 4.3 사건에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인물이다. 즉 박정희 정부의 월남 파병은 그러한 연속성을 가진 상황에서 진행된 역사다. 따라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 부정이다.


2016년 방송채널인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을 보면, 빈딘성 박물관에서 해설하는 한 베트남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진은 1965년에 뀌년(Quy Nhon) 항구에 상륙했던 한국군의 모습입니다. 이때부터 빈딘성에서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뀌년하고 빈딘성에 들어온 후, 한국군들은 북베트남군을 다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없애고, 깨끗이 죽인다’는 전략으로 굉장히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한국군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나서 음부에 칼을 꽂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서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군들은 후잉티본 할머니 집의 방공호에 숨어 있던 17명의 주민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후에 이 방공호 안에 침투하기 위해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밀어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제주 4.3 사건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군이 이러한 잔혹행위로부터 무고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자이 학살을 반성했던 참전용사 이우석씨)


(고자이 학살 희생자 380명의 명단)


이후 채명신이 집필한 자서전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도 1966년 당시 한국군의 학살 피해의 그늘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66년 1월에서 3월까지 대략 6주동안 벌인 작전으로 총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걸 빈안 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빈안 학살은 모두 15개 지점에서 벌어진 학살로, 1966년 2월 26일에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그 중 일부다. 채명신 장군은 회고록에서 1966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맹호부대의 번개작전을 회고했다. 아래는 <베트남 전쟁과 나> 288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갑연대의 이번 작전지역인 빈케군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부락은 거의가 베트콩의 전략촌이기 때문에 사살자가 민간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교전 중 사살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작전상 맹호부대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기록된 베트콩 사살 숫자에 비해 노획된 소총 숫자가 불과 4정 밖에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채명신은 민간인이 아니라고 확신적인 발언을 했는데, 채명신 입장에선 학살의 가능성을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콩과 민간인의 구분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전과보고는 정직하지 못했다. 사살된 시신만 가지고 전과를 보고하는 바디 카운트(Body Count) 방식인데, 당연히 여기에는 폭격으로 몸이 산산조각 나거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시체는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적군 사살이 비교적 적게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빈안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수정 박사)


또한 앞에서 말한 민간인 희생을 생각해보더라도, 380명의 민간인이 죽었음에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높다. 당장 1년간 미군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만 보더라도,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지만, 전과보고는 120명의 베트콩 사살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자면,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규정해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일각에서는 고자이 학살 지역에 한국군이 있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지만, 이것은 2017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켄 번즈(Ken Burns) PBS Vietnam War만 보더라도 반박이 가능하다. 아래는 PBS Vietnam War Episode 4에서 나왔던 내용 중 일부다.


“주월미군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2만 명으로 구성된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을 보내, 빈딘성 지역을 휩쓸어 적과 그들의 보급선을 찾아내고자 했다. 먼저 전단을 뿌리고 대형 스피커로 방송하길 “헬기에 사격을 가하면 가혹한 운명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라고 권고했으며, 항복하는 베트콩에게는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고는 공군과 포병대를 불러 마을을 산산조각 냈다. 이 전쟁 최초의 대규모 베트콩 토벌 작전이었다. 공격은 42일간 지속됐고, 미 육군 보고에 따르면 적 2,389명이 죽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기뻐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미군이 화력을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도 북베트남 정규군 대부분이 중부고원 지대로 도망간 것을 우려했다. 이 작전은 민간인 10만 명을 고향에서 쫓아냈다.”


PBS Vietnam War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은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1966년 2월 26일날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주도한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 Campaign) 과정 중 일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고자이 학살은 이 군사작전 중 일부였으며, 군사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이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빈딘성 박물관 해설사의 내용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개했던 삼광작전”과 같은 비슷한 군사작전이 진행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 지도부는 이러한 경험을 일본군과 한국군에서 쌓은 인사들이었으며, 채명신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었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으며, 한국군의 이러한 학살은 과거 일본군에서 벌인 학살과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벌인 학살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봐야한다. 그리고 한국군에 있었다던 광복군 출신들도 엄밀히 따지자면, 양민학살이라는 측면에선 일본군과 크게 차이가 없는 중국 국민당군 출신들이었다. 중국 국민당군 출신이자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한국전쟁 당시 거창 양민학살을 자행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고, 고자이 학살도 한국군에 의한 것이었음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군의 잔혹성을 보인 케이스며, 남베트남군이 했다는 변명은 물타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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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제주도에선 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를 막고자 했다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책은 제주도를 피바다로 물들이는 정책이었고이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숫자가 다소 적게 추산되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며, 6만 명 정도가 이들에 의해 죽었다는 통계도 있고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그 숫자가 8만 명일 수 있다고 2016년 제주도에서 열린 학술 포럼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방문하여 진압군을 사열하는 대통령 이승만, 당시 이승만은 제주도 진압을 명분으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제주도 인구 최소 1/4이 학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학살당한 이들의 수치가 보여주둣이제주도는 1948년부터 1949년 내내 섬 전체가 피바다였다그러나 제주 4.3 사건 당시 크게 얘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그것은 바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 지휘관들의 출신성분이다놀랍게도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주요 지휘관이었던 박진경최경록송요찬함병선유재흥 등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었다일본군 출신인 이들은 일본군에서의 경험 덕분에 진압군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제주 4.3 봉기를 진압했던 이들이 했던 발언)


(현재 제주4.3평화박물관에 있는 묘지)

 

박진경은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에 제주도에 구축된 진지구조와 지형에 익숙했다박진경이 암살당한 이후 부임한 11연대장 최경록은 일본군 지원병 1기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실전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확인된다그는 일본군 제78연대에서 하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뒤 군조 대 일본 육사시험에 합격해남태평양의 뉴기니에서 전투를 하다 종전이 돼 준위로 귀국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1989년 주일대사로써 일본 산케이신문에 기사를 기고 했는데그 기사에는 일본은 자위대의 명칭을 일본국군으로 바꾸고 당당히 군사력을 강화해 아시아의 방파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던 인물이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 사령관이던 유재흥, 놀랍게도 한국말을 잘 못했다고 한다.)


(4.3 사건 당시 암살당한 박진경을 대신해 부임한 최경록, 이후 주일본대사관을 지냈던 그는 1989년 일본 자위대를 칭송하는 글을 산케이 신문에 실었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 때 이승만의 진압 명령을 거부했던 송요찬의 경우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지원병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다가 조장(상사)까지 진급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다2연대장 함병선도 제주도 토벌작전을 전개한 전임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며낙하산 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일본군 준위 출신이다. 2연대 출신 최갑석은 함병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함 연대장은 국내 전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참가한 군인이었다그는 국군에 들어와서는 여순사건제주4.3사건옹진지구 전투홍천 전투춘천 수복 전투, 6.25전쟁 등 한국군의 전장에는 반드시 그 복판에 있었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일본군 준위와 상사 출신은 사관학교 출신보다 실전 경험이 많고그래서 전쟁의 난국에는 머리 좋은 장교들보다 이들의 용맹성·효용성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함 연대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토벌을 지휘한 유재흥은 일본 육사 55기로 일본군 대위 출신이며해방 이하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유재흥은 대위 시절인 1943년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로 친일파 출신 장교였다주한미대사관은 그를 말과 행동이 너무 일본식이기 때문에 한국적 방식에 적응할 수 없지만동급의 한국군 장교들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 구사하고 이해한다고 평가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 적색지역으로 설정한 곳에서 속출한 희생자들을 나타내는 지도)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 4기로 1947년 9월 10일 졸업한 황인성은 임관과 동시에 동기생 4명과 함께 9연대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1948년 1월 광주의 4연대 지불관으로 전출될 때까지 제주도 주둔 9연대 1소대장으로 근무했다그에 따르면당시 육사에서는 일본군의 보병조전’, ‘작전요무령등을 사용했고미군의 야전교범도 조금씩 번역돼 사용되기 시작했다일본군과 미군의 군사교육이 혼합된 체제였던 것이다.

(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발견된 학살로 희생된 이들의 유골)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제주 4.3 봉기 당시 미군정이 도왔던 토벌군 지휘관들이 일본군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결국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쌓은 전투경험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데 이용됐고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무엇보다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자들 중 90%가 이들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허호준그리스와 제주비국의 역사와 그 후그리스 내전과 제주4.3 그리고 미국선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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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정통성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두고 있으므로, 국군도 독립군 또는 광복군에 정통성을 두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군사에서 군사영어학교나 국방 경비대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있어도 광복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미약하다. 국군은 미군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까지 국군의 고위 지휘관은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이었다. 군은 반민족행위처벌법도 어쩌지 못하는 성역처럼 취급되어 악질 친일 경찰의 도피처가 되었다.

 

주한미군은 1945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광복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초급 장교들을 주로 선택했다. 다음 해 4월에 폐지된 이 학교는 통역과 관련해 군사영어교육에 치중했으나, 국군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 학교 졸업자 110명은 교육 기관 중 임관되어 육군 군번 1(이형근)부터 110번을 부여받아 대개 30대에 별을 달았고, 20대에 별을 단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육군 참모총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군 요직을 독차지했다.

 

미군이 창설한 국방경비대는 정부 수립 후 육군으로 재편되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통신학교, 공병학교, 보병학교, 포병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교육 과정이 확대되면서 1952년에 4년제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열어 11기가 신입생이 되었다. 미국의 육군지휘참모대학을 본뜬 육군대학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미국의 국방대학원을 본떠서 만든 국방대학원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미군은 장교 교육을 시켰다. 각급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야전 훈련장에서도 미군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백선엽처럼 정보장교들이 정보 교육을 받기도 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첫 번째로 정부 수립 직전인 1948811일 이형근, 장창국, 이한림 등 6명이 국군 창설자라는 애칭을 가진 하우스만 대위의 노력으로 포트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했다. 이형군은 1949년 준장 진급(28)과 동시에 주미 대사관 초대 무관 발령을 받았다. 전쟁 발발 직후 33세에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19517월 강문봉 소장(27)과 함께 미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며칠 뒤 유재흥 중장, 양국진·송요찬·이성가·백인엽·함병선·김종갑·박임항·오덕준·백남권 소장과 최경록 준장 등 3명의 준장, 2명의 대령 등 14명이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1951년부터 대규모로 미국에 위탁교육을 보냈다. 19519월에 165명이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들어가기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김종필, 길전식, 강상욱 대위 등도 있었다. 1952년에는 594, 1953년에는 829명이나 갔다. 박정희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현지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의 황국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자료에는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 4,729, 해군 920, 공군 1,503명 등 7,000여명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정부 각 부처 관리들의 미국 유학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고, 같은 시기 도미 유학생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군 지휘관중 자래가 보장되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노태우 대위는 결혼 며칠 뒤인 19596월 결혼식 사회를 본 전두환 대위와 함께 도미해 육군특수전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은 유학생에게 군사교육 못지않게 정신교육을 시켰고,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했다. 위대한 미국을 찬탄해 마지않던 유학생들은 반공정신에 투철했고, 미국의 안보와 국가 이해를 한국의 그것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희박했고, 민족의식 또한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0대 초반에 대장이 된 백선엽, 이형근과 37세에 대장이 된 정일권 사이에 파벌 갈등을 조장해 군을 장악하고자 했다.

 

1950년대 말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송요찬과 유재흥 등을 요직에 발탁했다. 그러나 세 명의 대장 중 적어도 한 명은 이승만보다 미국에 마음을 더 두었고,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1960419일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친미적인 송요찬은 4월혁명 후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5.16 군부 쿠데타 후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부부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은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여서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자 예편원까지 냈는데, 뜻밖에도 19612월 미국의 입김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5.16 군부 쿠데타의 성공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미국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19615.16 쿠데타와 197912.12 쿠데타, 19805.17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군부 통치 시대를 열었다.

 

참고자료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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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5일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대한민국 해병대 73주년 기념 게시물이 포스팅 됐다. 이 포스팅은 “73년 전 오늘!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을 비롯한 380명의 정예병력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으며, 해병대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고, 북한의 불법공격인 연평도 포격전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해병대가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내세우는 인물은 신현준은 어떠한 인물일까? 오늘은 대한민국 자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이 누구인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힌민국 해병대를 창설한 신현준이 정복 사진)

 

대한민국 해병대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칭송하는 신현준은 일제시대 당시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 요원이었다. 그는 193812월부터 194012월까지, 19434월부터 19448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34개월간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란 무엇인가? 간도특설대는 1938915일 일본이 세운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의 하나로 창설이 결정돼 그해 12월에 탄생한 부대로, 19393월에 정식으로 발족된 부대다. 만주군 산하의 특수부대로는 아사노 부대와 이소노 부대, 회교부대, 오로촌 부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도 이 중 하나다.

(신현준의 행적을 추적한 오마이뉴스 동영상 스크린샷)

 

간도특설대의 창설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집단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당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간도특설대의 존재 목적이었던 것이다. 간도특설대는 193931기 지원병 훈련이 끝난 후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이들은 항일무장세력들을 토벌했다. 당시 만주에는 김일성이 복무했던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들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휘하의 팔로군들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팔로군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도와 활약한 독립군이었다.

(2022년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가 올린 홍보물, 놀랍게도 대한민국 해병대는 친일 매국노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같은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여 친일 매국행위를 하고 있을 당시, 조선과 만주에 있던 뜻있는 젊은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은 1915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하얼빈 보통학교에 편입한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다음해인 19322월 하얼빈 난강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를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르고 입대했다. 17살 때 일본군에 자진입대한 것이다. 신현준은 자신의 회고록인 <노 해병의 회고록>에서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2,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신현준이 복무했던 14사단은 북만주 지역을 전전하며 항일 세력과 전투를 벌였으며, 19341월까지 일본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신현준은 19353월까지 1년간 만주군 5관구 고문부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엔 펑톈 군관학교에 지원해 5기생으로 들어가 193712월 말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이후 박격포 중대, 교도대 등에서 복무하다가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에 관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현준은 박정희와 더불어 광복군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946510일 미군 LST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창군 작업을 급속도로 진행했는데, 신현준은 이 과정에서 남조선해안경비대로 들어가 손원일 소령의 도움으로 해군 장교로 변신했고, 이후 해병대 창설 임무에 관여했다.

(미군과 백선엽, 신현준 또한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 덕분에 대한민국 군에서 해병대 사령관까지 될 수 있었다.)

 

1948년 여순항쟁이 일어나자 신현준은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으며,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95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했으며, 신현준은 대한민국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 4.3항쟁 시기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했으며,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했다.

(신현준 추모제,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꽤나 있는 듯 하다.)

 

이처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은 일제시절 간도특설대에서 친일매국행위를 한 인물이며, 해방 이후에는 제주와 여순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목아래 진압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독립운동가 이현상 사령관이 이끄는 빨치산을 토벌했다. 2022415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러한 인물을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칭송한 셈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한반도 이남의 역사와 현실이다. 과거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며 무수히 많은 독립군을 토벌한 이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통해, 한국전쟁의 제국주의적 모순성은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며, 신현준의 존재는 백선엽과 더불어 이를 입증한다.

 

참고자료

 

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김종훈,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오마이뉴스, 2020.04.06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621448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글>, 2022.04.15.

https://www.facebook.com/rokmc.mil/posts/pfbid02KYFe9tErArh42b2KFHkS2wHcMKd6roUyZmPgrqqZyQPxZw2rsPsdQkkC2aB5dd2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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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상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미군정 시절의 남조선 경제는 피폐했다. 19469월 부산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이른바 9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대구 10.1 항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군정 하에서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물가도 폭등했다. 물가는 1944년에 비해 1946년에는 92배나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455월 물가지수가 233일 때 노동자임금지수가 233이었는데, 19465월 물가지수 77,39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는 6,015였다. 19461월 소매로 16kg180원 하던 쌀값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상승하는 초 인플레이션 현상이 미군정 하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미군정에 맞서는 시위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거기다 미군정은 이 땅에 상륙한 시점부터 친일 인사들을 자신들의 정권 하에 대거 등용했고, 최소 80% 이상이나 되는 경찰과 공무원이 친일인사들이었다. 경찰의 경우 그냥 10명 중 9명 이상은 친일경찰들이었다. 이런 모순점들이 격해지면서, 결국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은 미군정이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등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하에서 최소 10(20만 명이라는 수치도 존재한다.) 이상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고, 비슷한 규모의 정치범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수감됐다.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한 모두 국토가 초토화 됐다. 국토 초토화의 원인은 당연하게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모습)

 

1948년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이승만 정부의 경제체제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체제였다. 물론 이승만 정부는 민생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군인 10만 명이 방산비리로 아사하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던 사회가 바로 이승만 정부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50년에 대한민국 국민총생산(GNP)15.1%나 감소했고, 1951년에는 6.1%나 감소했다. 물론 1952년과 1953년부터 차츰 회복세를 보여 성장률 2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던 1954년부터는 5.2% 감소 1955년에는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가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은 정말 놀라울 수준의 규모였다. 전쟁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213.5%를 찍었는데,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최소 4년 동안 평균 4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이른바 원조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만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재정에서 미국 및 외국의 경제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430%, 195544.3%, 195752.9%, 195851.5%에 달했을 정도다. 쉽게 말해 미국 없이는 나라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한 너무나도 가난한 나라였다. 반면 3년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은 비록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유럽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장 자체적으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에 이룩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1960년에는 세계 49위의 경제규모에 달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와 너무나도 비교가 됐다. 즉 이승만 정부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 북한 경제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미국의 원조액은 1958년부터 감소했는데, 이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19578.7%에서 19595.2%, 19602.3%로 떨어졌으며, 물가지수는 1958143%, 1959년에는 146.7%, 1960162.5%수준까지 상승했다. 실업률은 8.2%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6년에 80.5달러, 1957년에는 84.3달러, 1958년에는 85달러였다가 1959년에 84.3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독재 정권은 폭정과 무능 그리고 부패만 일삼았다. 이승만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이러한 배경은 결국 1960년 한국의 4.19 혁명의 원인이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감행하여 집권하게 될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는 101위였던 반면, 북한은 49위였다.

(1950년대 판자촌의 모습)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한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나라였다. 사실상 주한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법한 나라다. 당시 국민들은 미군들이 먹다남은 음식인 이른바 꿀꿀이 죽을 먹었고, 소위 보릿고개를 경험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부대찌개는 사실상 이 시대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가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음식이다. 당시 한국의 거리에는 굶은 아이들과 노숙자가 넘쳐났고, 잘먹고 잘사는 이들은 대다수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빌붙어 먹던 이들과 친일파들이었다. 이승만의 2인자인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하자, 민중들은 그들이 살던 집에 쳐들어갔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귀하던 설탕이 집안 곳곳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시대의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 수준이었으며, 잘해봐야 1973년 신자유주의를 극대화 시킨 피노체트 정부 보다도 훨씬 더 못한 수준이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의 동력을 받은건 사실상 불법적인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이른바 자본주의식 국가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하게 되면서였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들이 침마르게 칭찬하는 이승만식 자유주의 경제는 최빈국 수준의 것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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