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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5일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대한민국 해병대 73주년 기념 게시물이 포스팅 됐다. 이 포스팅은 “73년 전 오늘!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을 비롯한 380명의 정예병력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으며, 해병대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고, 북한의 불법공격인 연평도 포격전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해병대가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내세우는 인물은 신현준은 어떠한 인물일까? 오늘은 대한민국 자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이 누구인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힌민국 해병대를 창설한 신현준이 정복 사진)

 

대한민국 해병대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칭송하는 신현준은 일제시대 당시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 요원이었다. 그는 193812월부터 194012월까지, 19434월부터 19448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34개월간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란 무엇인가? 간도특설대는 1938915일 일본이 세운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의 하나로 창설이 결정돼 그해 12월에 탄생한 부대로, 19393월에 정식으로 발족된 부대다. 만주군 산하의 특수부대로는 아사노 부대와 이소노 부대, 회교부대, 오로촌 부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도 이 중 하나다.

(신현준의 행적을 추적한 오마이뉴스 동영상 스크린샷)

 

간도특설대의 창설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집단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당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간도특설대의 존재 목적이었던 것이다. 간도특설대는 193931기 지원병 훈련이 끝난 후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이들은 항일무장세력들을 토벌했다. 당시 만주에는 김일성이 복무했던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들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휘하의 팔로군들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팔로군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도와 활약한 독립군이었다.

(2022년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가 올린 홍보물, 놀랍게도 대한민국 해병대는 친일 매국노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같은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여 친일 매국행위를 하고 있을 당시, 조선과 만주에 있던 뜻있는 젊은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은 1915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하얼빈 보통학교에 편입한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다음해인 19322월 하얼빈 난강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를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르고 입대했다. 17살 때 일본군에 자진입대한 것이다. 신현준은 자신의 회고록인 <노 해병의 회고록>에서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2,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신현준이 복무했던 14사단은 북만주 지역을 전전하며 항일 세력과 전투를 벌였으며, 19341월까지 일본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신현준은 19353월까지 1년간 만주군 5관구 고문부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엔 펑톈 군관학교에 지원해 5기생으로 들어가 193712월 말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이후 박격포 중대, 교도대 등에서 복무하다가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에 관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현준은 박정희와 더불어 광복군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946510일 미군 LST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창군 작업을 급속도로 진행했는데, 신현준은 이 과정에서 남조선해안경비대로 들어가 손원일 소령의 도움으로 해군 장교로 변신했고, 이후 해병대 창설 임무에 관여했다.

(미군과 백선엽, 신현준 또한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 덕분에 대한민국 군에서 해병대 사령관까지 될 수 있었다.)

 

1948년 여순항쟁이 일어나자 신현준은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으며,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95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했으며, 신현준은 대한민국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 4.3항쟁 시기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했으며,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했다.

(신현준 추모제,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꽤나 있는 듯 하다.)

 

이처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은 일제시절 간도특설대에서 친일매국행위를 한 인물이며, 해방 이후에는 제주와 여순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목아래 진압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독립운동가 이현상 사령관이 이끄는 빨치산을 토벌했다. 2022415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러한 인물을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칭송한 셈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한반도 이남의 역사와 현실이다. 과거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며 무수히 많은 독립군을 토벌한 이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통해, 한국전쟁의 제국주의적 모순성은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며, 신현준의 존재는 백선엽과 더불어 이를 입증한다.

 

참고자료

 

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김종훈,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오마이뉴스, 2020.04.06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621448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글>, 2022.04.15.

https://www.facebook.com/rokmc.mil/posts/pfbid02KYFe9tErArh42b2KFHkS2wHcMKd6roUyZmPgrqqZyQPxZw2rsPsdQkkC2aB5dd2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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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상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미군정 시절의 남조선 경제는 피폐했다. 19469월 부산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이른바 9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대구 10.1 항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군정 하에서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물가도 폭등했다. 물가는 1944년에 비해 1946년에는 92배나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455월 물가지수가 233일 때 노동자임금지수가 233이었는데, 19465월 물가지수 77,39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는 6,015였다. 19461월 소매로 16kg180원 하던 쌀값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상승하는 초 인플레이션 현상이 미군정 하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미군정에 맞서는 시위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거기다 미군정은 이 땅에 상륙한 시점부터 친일 인사들을 자신들의 정권 하에 대거 등용했고, 최소 80% 이상이나 되는 경찰과 공무원이 친일인사들이었다. 경찰의 경우 그냥 10명 중 9명 이상은 친일경찰들이었다. 이런 모순점들이 격해지면서, 결국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은 미군정이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등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하에서 최소 10(20만 명이라는 수치도 존재한다.) 이상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고, 비슷한 규모의 정치범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수감됐다.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한 모두 국토가 초토화 됐다. 국토 초토화의 원인은 당연하게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모습)

 

1948년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이승만 정부의 경제체제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체제였다. 물론 이승만 정부는 민생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군인 10만 명이 방산비리로 아사하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던 사회가 바로 이승만 정부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50년에 대한민국 국민총생산(GNP)15.1%나 감소했고, 1951년에는 6.1%나 감소했다. 물론 1952년과 1953년부터 차츰 회복세를 보여 성장률 2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던 1954년부터는 5.2% 감소 1955년에는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가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은 정말 놀라울 수준의 규모였다. 전쟁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213.5%를 찍었는데,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최소 4년 동안 평균 4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이른바 원조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만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재정에서 미국 및 외국의 경제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430%, 195544.3%, 195752.9%, 195851.5%에 달했을 정도다. 쉽게 말해 미국 없이는 나라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한 너무나도 가난한 나라였다. 반면 3년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은 비록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유럽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장 자체적으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에 이룩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1960년에는 세계 49위의 경제규모에 달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와 너무나도 비교가 됐다. 즉 이승만 정부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 북한 경제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미국의 원조액은 1958년부터 감소했는데, 이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19578.7%에서 19595.2%, 19602.3%로 떨어졌으며, 물가지수는 1958143%, 1959년에는 146.7%, 1960162.5%수준까지 상승했다. 실업률은 8.2%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6년에 80.5달러, 1957년에는 84.3달러, 1958년에는 85달러였다가 1959년에 84.3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독재 정권은 폭정과 무능 그리고 부패만 일삼았다. 이승만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이러한 배경은 결국 1960년 한국의 4.19 혁명의 원인이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감행하여 집권하게 될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는 101위였던 반면, 북한은 49위였다.

(1950년대 판자촌의 모습)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한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나라였다. 사실상 주한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법한 나라다. 당시 국민들은 미군들이 먹다남은 음식인 이른바 꿀꿀이 죽을 먹었고, 소위 보릿고개를 경험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부대찌개는 사실상 이 시대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가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음식이다. 당시 한국의 거리에는 굶은 아이들과 노숙자가 넘쳐났고, 잘먹고 잘사는 이들은 대다수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빌붙어 먹던 이들과 친일파들이었다. 이승만의 2인자인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하자, 민중들은 그들이 살던 집에 쳐들어갔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귀하던 설탕이 집안 곳곳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시대의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 수준이었으며, 잘해봐야 1973년 신자유주의를 극대화 시킨 피노체트 정부 보다도 훨씬 더 못한 수준이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의 동력을 받은건 사실상 불법적인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이른바 자본주의식 국가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하게 되면서였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들이 침마르게 칭찬하는 이승만식 자유주의 경제는 최빈국 수준의 것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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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 혹은 휴양지로 손꼽히는 제주도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한 현대사를 경험했다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들이 제주도를 군사기지화 혹은 요새화했고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혹한 대학살이 일어났는데그것이 바로 제주 4.3항쟁 혹은 제주도 대학살이다많은 사람들이, 4.3사건을 4.3항쟁이라 부르기도 한다과거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에는 4.3 폭동이라 칭했지만민주화 이후에는 제주 4.3 사건 혹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르게 됐다나 또한 4.3을 제주 4.3항쟁이라 자주 부른다그러나 이 글에서는 제주도에서 자행된 학살에 초점을 두었기에일부러 제목을 제주도 대학살이라 표현했다.

(제주 4.3 70주년 카드뉴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상륙했다해방 이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주적으로 설립됐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아래서 72개의 화학 및 제조업 공장이 제주도에 세워졌는데일제가 패망한 이후 며칠 만에 72개 기업 모두가 접수되어 인민의 자주적인 관리를 통해 운영됐다그러나 이런 자주적인 활동은 미군이 상륙하면서 제지당했다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인 9월 23일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됐고이 인민위원회는 남한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사실상 평화롭게 행정과 치안을 이어나갔었다.

 

1945년 11월 9일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도 제주도 지역은 잘 운영됐고심지어 1947년 10월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는 제주도는 코민테른의 별다른 영향 없이 인민위원회가 평화적으로 통제하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그러나 이런 평화적인 단체와 지역을 피로 물들이고 억압을 행사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을 기반으로 행정과 경찰력을 증원했다이러한 조치는 당연히 제주도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8월 미군정은 제주도를 독자적인 도로 분리했고우익출신 경찰들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증원했다.

(제주 4.3 당시 산간지대로 피한 민간인들)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발발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군과 우익 경찰에 의해 죽고 체포 당하는 일이 생겼다제주도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없었지만, 1947년에 들어서면서긴장이 고조됐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도 3.1절 집회가 열렸다최소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결집했고평화시위가 벌어졌다군중들이 결집하자미군정은 경찰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다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시위군중은 경찰이 탄 말에 인명피해가 생겼고이에 항의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저항했다그러자 경찰은 총을 사용했다경찰이 발포한 총에 최소 6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더 많은 수가 부상 당했다이에 항의하기 위한 차원으로 시위 군중은 일주일 후에 경찰에게 항의 시위를 했고경찰의 또 다른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3.1절 시위로 최소 16명이 살해됐고, 22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미군 소식통은 보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을 선포하여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반공주의적 지원을 강화했고이러한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는 제주도민이 미군정에 맞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그 결과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발생한 전국적 파업에서 제주도는 가장 저항의 격력한 곳으로 변모했다. 1948년 3월 1일에는 이승만과 미국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청년 2,500명이 경찰에게 체포당했고체포당한 젊은이들이 고문당했다거기다 미군정의 무책임하고 살인적인 정책으로 쌀 세금이 폭등했다적어도 1947년보다 5배 이상 쌀 세금이 폭등했다이런 모순과 불합리성이 겹치면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봉기를 일으켰다이렇게 해서 제주 4.3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자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신속했고매우 잔인했다미군 부대가 부산에서 증파됐고경찰 1,700명이 추가로 파견됐다남로당측 봉기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들 간의 전투가 격화됐다초기 전투에서 진압군 측 김익렬과 게릴라 지도자 김달삼은 평화협정을 마련했지만우익 측에서 빨치산을 학살하여 협정은 무효화 돼버리고 유혈은 더 격해졌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주도의 투표 참여율은 당연히 저조했다양측의 교전은 멈추질 않았고학살도 발생했다학살의 절대다수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를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박차를 가했다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저주도 전역을 적성지역으로 설정한 뒤병력을 보내 진압했다계엄령은 1948년 11월 21일에 선포됐다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에 있던 국군 병력이 역으로 봉기하기도 했으며이것이 바로 여순항쟁의 맥락이었다여순항쟁에서도 살인적인 유혈극이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도 제주도에 파견됐다.

(이후 발견된 학살자의 유해)

 

광란의 학살극이 자행됐다특히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으며희생된 민간인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 노인 심지어 갓난아기였다진압측에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며적대지역으로 선포된 마을을 불태웠다그리고 이런 잔혹한 진압을 최종적으로 뒤에서 지휘했던 주체는 바로 이승만과 미군정이었다미군정의 브라운 대령과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경찰총장의 지휘에 있으며 강경진압을 자행했던 조병옥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 등은 제주도민 전부를 빨갱이로 규정해놓고일부를 제외한 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해놓고 학살을 자행했다특히나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학살은 정말 끔찍하고추악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당시 서북청년단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아주 잘 나와있다.

(제주 4.3 학살에서 희생된 희생자 분포 지도)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271

 

제주도 대학살에서 벌어진 학살은 무수히 많지만또 다른 대표적인 학살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1949년 1월 17일 제주도 북촌리 근처에서 진압군 2명이 봉기군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군인 2명이 사망하자진압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에 난입하여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근처 밭에서 학살했다이 학살로 최소 4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러한 크고 작은 학살들은 당시 제주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변모했고제주도에 있는 가옥 중 70%가 파괴됐다총 39,285가구가 파손되고 400개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고 한다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진압군에 의해 강간당했고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상 당했다또한 최소 4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당시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피난가기도 했다.

(현재 제주 4.3 평화공원 및 박물관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비)


(제주 4.3 사건 관련한 만화책)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85~90%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좌익들에 의학 보복 살해는 대부분의 경우 우익 경찰과 진압군과 그 일가족에 한해서 벌어졌다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참혹한 무차별 학살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휘를 받는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보통의 경우 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 시민이 학살당한 것으로 본다당시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희생된 이들은 많게는 6만 명까지도 본다그러나 한국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2016년 당시 제6회 제주 4.3 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자료에는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했다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많게는 8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소위 작은전쟁을 통해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그리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인명이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다이런 천인공노할 제주도 대학살을 벌인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을 자행하여 적잖은 제주도민을 예비 검속한 뒤에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이처럼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런 학살극의 중심에는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다이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학살은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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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미군정 통치를 거치면서, 과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들은 친미파가 되어 신분세탁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들은 학계와 정치, 군사, 경찰, 행정, 기업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내에서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그러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단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시킨 주체는 바로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19491월 반민특위는 한 사람을 체포했다. 그가 바로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18996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했으며, 졸업 후 일제 말단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순사부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여 경남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경찰에 있으면서 상승 가도를 달렸는데, 당시 일본인도 달기 힘든 경부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일제가 원하는 데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죽이고 잔인하게 고문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의 악질적인 고문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1927년 일제의 신간회 탄압이 있자, 노덕술은 신간회 간부인 박일향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신간회 탄압 당시에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아 죽은 독립운동가는 3명이나 된다. 노덕술의 고문 방식은 아주 다양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그의 고문은 일본인 형사들도 기겁할 정도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경찰이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28년 반일 학생모임인 혁조회를 적발하여 이들 회장 김규직 등 9명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리고 잡아들여 고문한 9명 중에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이에 동참한 고등학생들을 2차례에 걸쳐 구속하여 모질게 고문했다. 193251ML(Marx-Lenin)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May Day)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노덕술은 그를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구타와 함께 숱한 고문을 했으며, 그가 통영에서 1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잡혔고, 또 고문당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노덕술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나온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노덕술은 1933년에는 경부가 됐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에는 경시자리까지 올랐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식민 지배를 통틀어 21명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악질적인 친일 경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또 부패한 경찰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 이래로 노덕술은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으며, 일제 공훈 기록으로만 따져도 노덕술은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841938년에서 1940년에는 104회에 달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0만 원이나 되는데,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일 인사로 지목되 구금당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으며, 미군정 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는 정책을 실행하게 되면서,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날개를 피게 해줬다. 194646일 우익 거물인사인 송진우 암살범들을 검거한 공로로 노덕술은 경찰 수뇌부에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에 있던 정판사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놀랍게도 이관술은 노덕술에게 일제시대때 총 3번이나 고문을 당했다. 그 외에도 노덕술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여운형 암살 배후에 있던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약산 김원봉은 19472월 자택에서 볼일을 보던 중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명분은 바로 미군정 포고령 위반이었다. 해방 된 땅에서 악질 친일 경찰이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탄압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노덕술은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자, 노덕술은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를 찾아, 반민특위와 연관된 이들을 사전에 죽이려 했다. 노덕술이 사전에 죽이려 했던 인물들 중에는 김병로나 신익희 그리고 김상덕과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던 반면,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극우 반공주의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백민태라는 인물이 반민특위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은 체포당했다. 노덕술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그를 지원해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대통령 이승만이다. 결국 이승만의 도움으로 그는 풀려났고, 반민특위도 이승만에 의해 해체됐다. 이승만은 노덕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한국전쟁이 있던 1950년 노덕술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중령이 됐고, 육군 제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 주한 미대사 무초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서한에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그랬던 노덕술이지만 1955년 돌연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가 밀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노덕술은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으며, 1960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호의호식 하다가 19684169세의 나이로 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덕술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만든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덕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모순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박처원과 이근안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 친미파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고,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악질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킨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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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는 대통령 이승만. 그에게 있어 북진통일론은 정치적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항상 외치던 구호가 있다그 구호는 바로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다북진통일론은 간단히 말해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한반도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주장이다즉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니대한민국이 북한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이승만 북진통일론의 핵심이다북진통일론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이후 반공국가를 구성한 하나의 핵심적 요소였으며이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무너질 때까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반공주의적 합리화의 수단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해방정국 전후로 분단주의적 사고관을 소유한 인물이었다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맹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실현된 사회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1920년대부터 가지고 있었다그에게 있어 공산주의자는 민족반역자였으며따라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에 협력한 이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이승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관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표출된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자국내에서는 미군정 개시를 전후로 여러 정치단체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당연히 가장 대중적인 조직을 확보한 세력은 여운형을 비롯한 진보세력들이었다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이 설립된 이후 제약을 받게 됐다이런 과정 속에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이 존 리드 하지와 일본 GHQ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일본 도쿄를 거쳐 10월 16일에 귀국했다그는 1945년 10월 4일 미국 워싱턴을 떠나 10일 도쿄에서 4일간 체류하고 14일 일본을 떠나 16일에 하지가 직접 내준 C-47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던 이승만은 당연히 환국과정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이후 귀국 9일 만인 10월 25일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목적은 해방 후 우후죽순으로 확장된 정치단체들을 중핵을 바탕으로 단결시키는 것이었다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인기는 상승했던 것으로 보이며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중심의 세력들에게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형성한 것도 사실이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와해됐다이후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있자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와 더불어 반탁운동을 전개했고이 반탁운동에서 이승만이 결탁한 세력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우익단체들이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도 보이는 북진통일)

 

이승만의 분단론적 시각은 반탁운동을 거쳐 1946년 제1차 미소공동회의 결렬 이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극명해졌다정읍발언을 시작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분단론적 시각을 아주 명확히 했다이 정읍 발언은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반감을 가지게 됨에 따라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으로 이어졌지만, 1947년 3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되면서이승만은 아시아의 반공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좌우합작운동 실패와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게 되며결국은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이승만은 5.10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전후로 해서 제주4.3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이 발발했지만이는 이승만과 미군정이 벌인 잔혹한 학살극으로 종결됐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분단주의적 사고관을 계승한 통일관을 제시했는데그것이 바로 북진통일론이었다.

 

북진통일론은 1949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됐다당시 이승만은 미국 육군성 장관 로얄과 주한미국대사 무초와의 대담에서 육근을 증편하고 무기와 장비로 무장시켜 짧은 시일 안에 북진을 실행하고 싶다고 언급했다또한 이승만은 “UN이 한국을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기다려서만은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이승만에게 있어 북한도 같은 우리 민족이므로 평화적인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가치였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1949년은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 및 해산과 백범 김구의 암살 등으로 정치적으로 국내에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당시 북한에서는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 38선 전역에서 남한이 4만 9,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432회를 침범했고, 71회의 비행기 침습과 42회 함대 습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반면 남한에서는 “1949년 1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38선 전역에서 북한이 총 7만 625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563회나 침범했다.”고 발표했다이러한 남북한 양측의 발표에서 보여주듯이남북한 모두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이러한 근거는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내전론’ 그러니까 1950년 이전부터 한반도는 전쟁 상태였다는 주장에 합리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철저하게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한국군의 병력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했고공군 창설에 반대했으며기갑 병력 지원은 거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한국군이 북한 측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던 이유에는 미국의 미온적인 군사적 지원 때문이기도 하다박태균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군사지원이 제한된 정책이었던 이유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때문이라고 한다즉 미군의 군사적 무기 지원 없이는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기본으로 깔려있는 미국 측의 계산된 행위였다. 1950년 1월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미국 반공 안보라인에서 제외됐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말 그대로 허구적인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한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그것도 모자라 대통령 이승만은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기만해놓고 몰래 도망쳤다심지어 미국의 즉각적 군사 개입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더불어 남한 영토 90%를 북한이 접수하도록 했다이것은 미국의 즉각적인 항공병력 투입과 지상병력 투입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결과였다물론 이승만에게도 실제로 북진통일을 할 기회가 분명 있었다이것은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더불어 북진을 개시하면서 부터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사회에서 발생했던 휴전회담 반대 시위, 이러한 집회는 이승만 세력이 동원한 어용집회에 가깝다.)

 

그러나 이 북진은 순망치한을 앞세운 중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물거품이 됐다중국 입장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민중의 투쟁” 및 미제국주의 중국 침략 저지였던 한국전쟁은 1950년 12월을 시작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1951년 1월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측 수중에 떨어졌다. 1.4 후퇴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한국과 미국측은 다시 38도선 부근으로 중공군과 인민군을 몰아붙였고,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됨에 따라 북진통일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실행될 수 없었다이에 따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말 그대로 정치적 수사가 됐다이승만은 전쟁 와중에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북진통일을 외치는 어용집회를 동원했다그러한 시도에는 진짜 북진통일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이승만 개인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 휴전협정 성사 1달 전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했던 사건이 그랬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이 성사 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외쳤다놀랍게도 북진통일론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만이 아니라 보수야당과 언론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고 있었던 명실상부하고 확고한 1950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1950년대 한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승만의 자유당 독재가 심화됨에 따라이러한 북진통일론에 상반되는 통일론이 자리잡기도 했는데진보당 후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그러했다그러나 이 평화통일론은 공산주의와 진보를 벌레 수준으로 생각하던 이승만식 반공사회에선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가치관이었다따라서 이승만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

(근래에도 열리는 북진통일 집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현재 한국 사회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결국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던 것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부터였다. 4.19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북진통일론에 저항하는 자주적 평화통일론이 다시 학생들에 의해 제시되기도 했다. “오라 남으로가자 북으로!”로 대표되는 이런 평화통일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주의적 가치관을 지향했던 장면 내각에 의해 탄압받았다그러다 1961년 5.16을 맞이했고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고스란히 유지했으며더 체계화된 반공주의 사회를 형성했다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가 이승만식 북진통일론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관의 영향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다마지막으로 김삼웅이 쓴 이승만 평전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6.25 전쟁 중에 중국 마오쩌둥의 장남이 참전했다가 유엔군 폭격으로 전사하고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의 아들도 한국전에서 전사했다이 밖에도 중국과 유엔 참전국 고위층 자제들이 전사부상자는 더 있었으나한국 정부의 고위층 자제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이승만과 그 세력의 북진통일론이 얼마나 반국민적이고 허구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출처이승만 평전(개정판) p.299~300

 

참고문헌

 

김삼웅독부 이승만 평전책보세, 2012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이한우이승만역사공간, 2014

 

유영옥이승만 대통령의 반공과 통일정책에서의 상징성한국보훈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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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1-11-07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직 권력욕에만 눈멀었던 민족적 수치의 인물이죠. 친일 그리고 부역자들, 기회주의자들과의 반민족적 합작을 통해 출현한 괴물 권력이었어요. 한반도 분단에 앞장섰던 반민족행위자가 북진을 내건것부터가 쇼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겠죠. 성심의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NamGiKim 2021-11-07 10:03   좋아요 0 | URL
북진통일론은 허구에 기반한 정치적 수사.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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