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해체된게 단순히 소련 공산당의 관료와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의 문제로만 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한냥 주장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아니 미국과 소련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소련은 제1차세계대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쳤고, 얼마 안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시작된 내전을 겪으며 주요 산업시설들이 초토화 되었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으로 일정부분 경기 회복하고 스탈린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으로 생산력을 올렸지만,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다시한번 초토화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다시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거기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남부를 제외하면 농업을 할 땅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나머지 지역은 북극이다. 괜히 그들이 부동항을 탐낸게 아니다.

반면 미국은 어떤가?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오른 뒤, 1920년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듯이 과잉과 풍요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과잉생산이 1929년 경제대공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과잉생산 체제가 문제였기에 제2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 1941년 진주만 공습 외에는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공업시설과 농업 시설이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지형은 어떤가? 동부에 번창한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업지대, 서부의 광산과 석유생산 그리고 알래스카와 부동항들까지, 지정학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이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자본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지정학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소련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조건이었으면, 툰드라에서 등신짓하다 지들끼리 폭주하여 박살났겠지!! ㅋㅋㅋㅋㅋ 아무튼 이런 넘사벽인 미국과 싸워 대등한 위치에 올랐던 소련이 참 능력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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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해체된게 단순히 소련 공산당의 관료와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의 문제로만 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한냥 주장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아니 미국과 소련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소련은 제1차세계대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쳤고, 얼마 안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시작된 내전을 겪으며 주요 산업시설들이 초토화 되었었다. 신경제정책으로 일정부분 경기 회복하고 스탈린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으로 생산력을 올렸지만,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다시한번 초토화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다시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거기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남부를 제외하면 농업을 할 땅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나머지 지역은 북극이다. 괜히 그들이 부동항을 탐낸게 아니다.

반면 미국은 어떤가?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오른 뒤, 1920년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듯이 과잉과 풍요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과잉생산이 1929년 경제대공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과잉생산 체제가 문제였기에 제2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 1941년 진주만 공습 외에는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공업시설과 농업 시설이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지형은 어떤가? 동부에 번창한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업지대, 서부의 광산과 석유생산 그리고 알래스카와 부동항들까지, 지정학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이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자본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지정학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소련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조건이었으면, 툰드라에서 등신짓하다 지들끼리 폭주하여 박살났겠지!! ㅋㅋㅋㅋㅋ 아무튼 이런 넘사벽인 미국과 싸워 대등한 위치에 올랐던 소련이 참 능력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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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일본 제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소련과의 무력 충돌이었다. 만약 국공합작에 성공한 중국이 소련과 손을 잡고 만주를 공격한다면 이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에서 화려한 승리에 심취해 있던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과소평가하며 무모한 도발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과 소련군과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하산호 전투(Battle of Lake Khasan).

  

하산호 전투는 1938729일부터 911일까지 대략 2주에 걸쳐 벌어졌던 전투였다. 당시 소련의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극동군의 규모는 20개 저격사단, 5개 기병사단 전차 1500, 항공기 1560대 그리고 3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반면 일본 관동군의 전력은 조선군과 만주국 괴뢰군까지 합쳐도 그 절반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의 참모본부 작전과장이던 이나다 마사즈미 대좌는 상부에서 내린 결정안과는 상관없이 하산 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나다는 일본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정예군이기 때문에 소련군의 화력과 숫자와는 상관없이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있었다.

  

715일 하산 호 동남쪽에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대가 소련군의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소련 영내 30m까지 들어오면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련군과 일본군간의 긴장상태가 높아졌고, 720일에는 다시한번 소련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놓였으며, 729일 오전 9시 일본군 순찰대는 소련군 1개 소대가 진지를 구축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결국 일본은 729일 오후 1시 소련군의 진지를 공격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전차까지 투입하자 일본군은 열세에 몰렸다. 다음날인 730일 밤 1030350명 규모의 일본군 1개 대대가 서남쪽에 있는 하산 호에 진격했고, 다음날인 731일 새벽 2시쯤해서 소련군과 다시한번 교전을 벌인다. 이번에는 소련군이 후퇴했다. 81일 소련군은 전차 부대와 3천 명의 병력을 앞세워 하산 호를 공격했고, 항공기 130대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자신들이 목표했던 것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렇게 하산 호 전투가 확대되자 양측은 84일부터 정전 교섭을 시작했고, 일본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811일 모스크바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분쟁은 1905년 러일전쟁 이래 일본이 처음으로 강대국과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대략 526명이 전사하고, 914명이 부상당했던 반면 소련군은 236명이 전사하고 611명이 부상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일본 측 통계에 따르면 소련군 전사자가 일본군 전사자 보다 200명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건 소련군의 전사자도 절대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이 소련군을 완벽히 꺾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관동군은 여전히 소련군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하산호 전투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 결과 1939년 노몬한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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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폭풍 -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
데이비드 M. 글랜츠 지음, 유승현 옮김 / 길찾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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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은 1941622일부터 나치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하는 194558일까지 대략 4년간 전개되었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대략 4년간의 전쟁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잃었고, 160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했으며, 대략 26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책과 <독소전쟁사: When Titan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의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서방세계에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이미지는 만슈타인이나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이 나치 독일 측 장군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다. 따라서 서방세계가 인식하던 소련군은 군사적으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오직 인해전술식 작전을 고수하며 돌격밖에 모르는 군대였다. 여기에는 독일 장군들이 소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관도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편견은 서방에서 만든 대중매체에도 잘 드러난다. 2001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인 에너미 엣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2011년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독으로 유명한 강재규 감독의 마이웨이(My Way)를 보면 소련군들은 아예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전술적으로 굉장히 비효율적인 군대로 묘사된다. 미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Call of Duty)에 나오는 소련군 또한 언급한 영화들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2003년에 제작된 콜오브듀티1에서의 첫 소련군 미션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를 타고 전선에 도착한 알렉세이 이병(게임 주인공)은 소련군 정치장교로부터 고작 5발의 총알을 받은 채 돌격하고, 모신나강 소총이나 탄약을 나눠주는 정치장교는 총이 없는 사람은 총을 든 사람을 따라가라. 그리고 그자가 죽으면 총을 주워서 적에게 사격하라라는 막장스러운 연설을 한다. 그리고 진격하다 보면 후퇴하는 병사를 정치장교가 기관단총이나 기관총으로 총살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참전자들이 이와 같은 서방 매체를 접했을 때, 그들은 서방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매우 분노했고, “자신들은 그 정도로 열악하지 않았고, 굴라그에서 석방시켜 만든 형벌부대도 후퇴한다는 이유로 즉시 처분하는 일은 없었다라고 하며 이에 항의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의 이미지는 반공주의와 러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기독교주의가 결합된 편견 그 자체다. 미군에서 복무하며 소련군에 대해 연구해온 군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이와 같은 서방의 역사 왜곡에 항상 반대했고, 비판해왔다. 이번에 필자가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인 8월의 폭풍<August Storm>은 서방의 학자들과 매체가 만들어낸 신화적 허구를 소련 측 문서를 기반으로 하여 이를 반박한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읽어본 독자라면 아는 사실이겠지만,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소련군은 절망과 후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943년 대규모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군의 개편과 전략 전술의 개편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제병협동 전술의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 이후의 전투와 작전에서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통하여 독일군 종심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붕괴시켰다. 19454월부터 있던 베를린 공방전(Battle of Berlin 1945)에서 50만 명의 붉은 군대가 76만 명의 독일군을 손쉽게 격파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소련군 또한 굉장히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하는 훌륭한 군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58일 나치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이후 소련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추축국 중에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던 일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치러오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의 참전을 여러 차례 요구했었다. 마치 스탈린이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제2 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945년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를 치르던 미군은 예상보다 많은 미군 전사자가 속출한 것에 당황했고, 소련군의 참전도 두려워하게 됐는데, “소련이 조기에 참전하면 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에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걱정 때문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가 이끄는 소련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일본은 극동지역을 팽창하는 것에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대로의 영토 팽창으로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19414월 소련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으며 그 이후에는 만주에서 방어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보다 격해지면서 일본의 대본영은 만주에 있던 상당수의 관동군을 중국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만주지역에서 전략상의 공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주지역 관동군은 1945년 소련군의 공격이 있기까지 대략 70만 대군을 갖춘 대규모의 군대였고, 명실상부 만주지역의 주력부대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멸망시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가 후에 있을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크게 3군데에서 만주 전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배치되는 군대도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이었고, 그다음은 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이었으며, 마지막은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었다. 소련이 계획한 이 작전에는 150만 이상의 병력과 5500대 이상의 전차와 자주포, 27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7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194589일 소련군이 만주전역에서 공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소련군의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전선이 무너지고,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크게 3군데에서 진격한 소련군은 사막 지역과 늪지대 그리고 산맥을 손쉽게 돌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리장성까지 가기도 했고, 치스차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대략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제2극동전선군 중 일부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사할린 이남에 입성했다.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기 3일 전 대본영은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만주의 일부 일본군 부대는 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822일까지 소련군의 진격에 저항했던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들이 그러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8월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의 진격작전은 1주일만인 816일에 끝났다. 즉 단 1주일 만에 소련군은 만주전역으로 진군했고,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 굉장히 신속한 승리였고, 소련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막 테스트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만주 진공 작전 당시 소련군의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루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 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출처: 8월의 폭풍 p.147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은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는 군대였고, 특히나 만주 지역에서 이를 아주 훌륭히 해냈다. 따라서 서방측이 만들어낸 소련군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소련군이 멋지게 성공시킨 만주 지역에서의 진격작전은 왜 서방세계에서 잊혀진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시기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핵무기 경쟁시대를 알리는 냉전의 신호탄이자 일본의 항복과 바로 연결되다 보니 소련의 만주 공세는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냉전시기 소련과 경쟁했던 미국이 이를 홍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소련군의 만주 공세를 재조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책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는 1942년에 태어나 1963년 미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서방 군대의 상징 NATO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었고,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등에서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소련군에 대한 서방의 편향된 시각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를 소련의 입장에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8월의 폭풍이다. 사실 이 책은 1980년대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논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논문을 완성하던 시기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반공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의 행동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은 우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1극동전선군에 있던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25군은 작전 당시 한반도 이북을 해방했던 군대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한반도 이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깊이 가르쳐오지 않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고, 공정한 평가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좀 더 일반화하자면, 기존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강요해오던 일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과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좀 더 폭넓게 보고, 공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할 한국 근현대사 사건 중 하나는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도 포함된다. 필자는 소련군 만주 진공 작전 일인 89일에 맞춰 이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반공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연구 서적을 집필해준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 교수님과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해주신 유승현 역자님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대한민국의 주은식 장군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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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2019-09-0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게 서평을 확인해서 죄송합니다. 서평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NamGiKim 2019-09-03 15:08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다 -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3판 노동자 교양문고 3
마리오 소사 지음, 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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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운동권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Mario Sausa)의 책인 진실이 밝혀지다를 읽었다. 국내에 출판된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서적은 대체로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다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필자로선 이 책의 부제목이 끌려 읽고 싶었었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목차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편은 수용소 군도의 저자인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같이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소련에 대해 비판해온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대략 600만 명이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홀로도모르(Holodomor)에 대한 반박과 대략 12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진 소련의 굴라그(Gulag) 수감자 수치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2편은 스탈린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수치에 대한 반박이 담겼다. 이 책의 마지막인 3편은 영국 보수주의자이자 군사 전문가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 대한 비평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2편의 경우는 필자의 주관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즉 책에서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얘기하듯이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치과 서방에 의해 과장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3편에서 다른 스탈린그라드 비평은 필자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앤토니 비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감안했을 때, 서구식 반동주의를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군인이자 보수주의자이기에 당연히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감했던 파트와 가장 많이 호감을 표했던 파트는 제1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홀로도모르는 절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고,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과의 계급투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한 소련의 농업 조건도 한몫했다. 거기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는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내전을 치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방 학자들이 출처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상자 수치는 사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나치 독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악마화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반공성향이 강했던 영미권 언론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마치 1990년대 북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대다수의 아사자가 생겼을 때 미제와 서방 언론들이 300만 명이 아사했다는 날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판단했을 때,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아사자 수치는 과장됐고,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소련의 까다로운 농업 조건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편에서 지적한 소련의 굴라그 수감자 수치도 마찬가지다. 솔제니친과 로버트 콘퀘스트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굴라그 수감자가 대략 900만에서 1200만 명 혹은 많게는 2000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스탈린시기 가장 많은 수감자 숫자는 최대 250만 명이었다. 이는 순수히 굴라그 사용자만 포함된 것이 아닌, 감옥 및 교도소 그 외의 잡범들이 수용된 수치를 얘기한 것이다. 쉽게 말해 소련 인민의 30%가 굴라그에 수용됐다느니 하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고 날조라는 것이다. 굴라그를 언급하며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 및 감옥 수감자의 수치를 보여준다. 책에서 제시한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에 미국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수감자 55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소련에서의 최대 굴라그 및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도 300만 명이나 더 많은 수치였다. 책에선 언급 안 했지만, 필자는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하는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 흑인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KKK같은 인종 혐오 단체들이 미국을 돌아다니며 유색인종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으며 산사람을 산채로 태워 그 유골을 기념품으로 갖는 린치 따위 행위를 20세기까지 남부에서 하도록 방조한 미국 정부가 과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말이다??

 

물론 필자는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 중에는 분명 무고한 사람도 적잖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악마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보면 스탈린 집권 시기 8시간 노동제를 1930년대 초중반까지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스탈린은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이는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나는 행보다. 당연히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스탈린이 대다수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1930년대 소련의 대학진학률과 극적인 문맹률 감소 그리고 노동자 연금 제도가 입증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소련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큰 의의가 있었던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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