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의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지도)

 

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중일전쟁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깃발을 세우는 소련군)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이들은 만주와 몽골중국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사할린 이남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기사)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 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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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조선 역사의 첫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돌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이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 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산업 기업소들을 개시하라. 붉은군대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군대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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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핀란드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대략 4개월간 전개된 전쟁이다. 서방의 많은 사학자들이 소련 핀란드 전쟁에 대해 주로 소련의 팽창주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하고 있고, 소련과 스탈린의 정복욕에 기반한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의 진보성을 믿는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소련 핀란드 전쟁에 대한 입장은 무엇일까? 아래에 있는 글은 2013년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출판한 책 중 역사왜곡에 대한 파트 중 하나다.

핀란드의 경우는 다르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직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의 차단과 방어 강화 노력을 시작했다. 핀란드 국경은 레닌그라드에서 불과 32km 떨어져 있으므로 소련 방어를 위해 핀란드-나치 독일 간 기존의 원만한 외교관계와 소련에 맞서 핀란드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대한 군사적 준비를 고려할 때 핀란드와의 협정이 중요했다. 두 국가 사이의 협상은 1939년 10월 12일에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목표는 핀란드가 소련에 맞서는데 이용되는 것이었는데, 핀란드가 다방면으로 지원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소련은 처음에는 핀란드에게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그에 대한 핀란드의 거부 이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선을 이동하여 두배 정도 규모의 영토를 교환하여 해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임대해달라는 역제안을 했다. 핀란드는 이 제안 역시 거절했다. 소련의 제안을 핀란드가 거절한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초래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는 국제 제국주의 진영의 지원에 의존했다. 미국,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맞서는 총체적인 공세뿐만 아니라 원정군을 준비하면서 핀란드에게 아낌없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전쟁을 계속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가 핀란드에 극심한 압력을 가했지만, 군대가 이미 2월에 헬싱키로 들어와 있었던 핀란드와 소련은 1940년 3월 12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은 전쟁을 중단하고 다른 나라를 겨냥한 어떠한 연합에도 참여하지 않을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핀란드는 일부 영토를 소련에 양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중 일부는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은폐되거나 왜곡된다.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을 체결하여 방어선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의 막강한 공격에 맞설 수 있었다. 이 진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댈러스(F- Dallas)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학자조차도 "소련에 대한 독일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고 방위력을 강화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 당시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소련의 이러한 입장은 아주 현실적이었다."며 이 조약의 체결이 소련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윌리엄 엘, 쉬러(William L, Shirer) 역시 다음과 같이 썼다.

"부끄러운 비밀협정이 스탈린에게 숨 쉴 틈을 준 것은, 차르 알렉산더(Czar Alexander)가 1807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레닌이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독일인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처럼 분명했다. 나중에 소비에트 공식 외교사가 강조했던 것처럼, 또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일 러시아가 나중에 독일에 의해 공격을 당했더라면 서구 열강들은 이미 독일 제3제국(Third Reich)에 맞서 돌이킬 수 없는 개입을 했을 것이고, 소련은 1939년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 열강에 맞서 혼자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크렘린은 확신했다. 이 모든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21개월간의 귀중한 시간 덕분에 소련은 당시까지 "무적의" 독일군(Wehrmacht)을 물리칠 수 있었고 소련을 파괴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계획을 박살내, 베를린에 적기(Red Flag)를 게양하며 유럽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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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해체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 소련(Soviet Union)은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국가였다. 1917년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1920년대 공업화를 거치며 강국으로 성장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파시즘을 물리쳤으며, 그 이후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 경쟁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이기에 소련은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였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소련은 개인의 이익과 사적영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국가와는 엄연히 다른 체제였으며, 실제로도 다르고자 했다.

 

반공주의적 산물이 사회전체를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경우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도대체 어떠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알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아마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소련이란 스탈린주의적 폭압 체제, 대숙청으로 인한 2천만 명 학살, 한국전쟁의 주범, 굴라그와 같은 강제 노동이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세계를 적화시키려는 호전적인 국가 등의 이미지일 것이다. 즉 소련이라는 나라는 국방력에 지나치게 투자하여 인민들의 삶과 질적향상은 매우 등한시 한 국가로 착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공주의로 점철된 우익과 서방의 날조된 왜곡이 반영되었다. 물론 소련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재정의 많은 부분을 국방력 강화 및 개발에 투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 미국처럼 공공분야에 있어 많은 부분을 개인에게 맡기고자 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실제로 소련은 헌법과 법률을 통해 사회주의적 권리를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소련이 추구한 권리는 심지어 20세기 말에도 수많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조차 충분하게 실현되고 있지 못한 권리로 여성의 적극적인 경제활동 참여”.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보증”, “근로의 권리”, “주거와 주택의 권리”, “무상의 의료와 교육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 “사회주의 사회가 보장하는 다양한 문화적·예술적인 서비스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권리등이었다. 이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소련 인민이 구가하거나 얻을 수 있었던 권리와 자유였다.

 

실제로 소련은 공업화에 성공했던 1930년대부터 이러한 권리를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시스템 적으로 설립했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이른바 의료혁명과 교육혁명을 겪었다. 이 덕분에 소련인민들은 그 시기부터 무상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인민 AB가 병에 걸려 치료가 필요하다면, AB는 국가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병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권리로써 돈을 지불하지 않고 치료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런 무상의료는 단순히 감기치료만이 아닌 고도의 의료기술이 필요한 것에도 해당되었다. 즉 소련은 이러한 무상의료 서비스가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틀이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소련사회는 해체 이전까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다.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고, 약국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지급됐는데. 아이들 의복에 대한 보조,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도 있었다.

 

소련의 교육혁명은 매우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교육은 인민이 차별없이 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로써 자리매김하였고, 공업화 초기 교육율과 대학진학률은 매우 빠르게 상승했다. 이에따라 소련 전역에서 문맹퇴치운동이 일어났다. 문맹퇴치운동으로 인하여 90%가 넘던 소련의 문맹률은 1%때로 줄어들었으며, 인민들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교육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과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70,80년대 기준으로 소련의 교육시스템은 10년간 무상이었다. 대학교를 가더라도 대학 교육도 무상이었고 대학 다니는 동안에 일종의 수당같은 것을 국가로부터 지급 받는데 한 달에 40루블씩 지원받았다. 이 금액이 계산하면 소련 대학의 기숙사 비용이 1년에 24루블 내면 모두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많은 돈을 수당으로 지급받았던 셈이다.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노동시간을 비인간적으로 늘리는 사회가 아니었다. 물론 스탈린 시절 굴라그를 운운하는 반공주의자들의 얘기는 다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30년대 스탈린시기에도 7~8시간 노동제를 공식적으로 표명했었다. 물론 이 노동제는 193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돌면서 폐지됐다.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련 시절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소련 사회는 노동에 대해 의무이자 권리라는 개념으로서 받아들였다. 소련 시절의 노동시간은 주5일 주40시간이었고. 모성보호도 있어서 임신 여성은 야간 노동이 안되었다.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항상 유급이었다.

 

광산노동 등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퇴직을 좀 더 일찍 할 수 있었으며, 출산휴가도 보장되어 있는데 유급으로 18개월 보장됐고, 출산휴가 끝나면 당연히 원래 하던 일로 복귀가 가능했다. 임금도 노동자, 관리직, 기술직의 구별 없이 비슷하게 지급받았다. 야간, 휴일노동은 강제로 하는 경우가 없고, 하겠냐고 요청 받고 동의해야만 하고, 할 경우에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야간은 50%, 휴일노동은 2배 임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소련은 대중적인 노동자 연금제도를 설립했다. 연금 수급 연령은 여성 55세 남성 60세였다.

 

소련사회는 어떤 공장에 관리자나 청소노동자나 똑같이 존중 받고, 똑같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형태였다. 큰 회사의 경우 사택 같은 걸 지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는데, 노동자들은 임금의 3~4%를 지불하고 모든 것들을 무료로 이용했다. 중요한 건 회사에 일하는 동안 거주를 할 수 있는 곳이지 주택을 팔거나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회사 안에는 스포츠시설도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농장을 운영해서 구내식당 식재료로 공급했다. 즉 소련사회는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삶은 인민들에게 구가해줬고, 공식적으로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초기 경제성장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소련은 1920년대후반부터 50년대까지 사회주의 경제 수치를 매우 낮게 잡으려고 했던 서방의 기준으로도 최소 연 12~14%의 성장률을 보였다. 1928년에서 1956년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쏘련의 공업 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하였다. 국민총생산은 연율 15% 이상이나 성장했고, 그 기간 문맹은 일소되었으며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적어도 소련은 1972년까지 연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사회에 대해 지적하는 것 중에 한가지를 뽑자면 소비재 부족과 일상적인 필수품의 부재일 것이다. 물론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 비하면 풍요로움에 있어서 많이 뒤쳐졌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2700만 명의 희생과 국부의 약 1/3이 사라졌음에도 빠른 전후복구와 회복을 보였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동맹이었던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부흥을 절대 돕지 않았고, 오히려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서유럽 경제학제들의 예견을 무색케 했고 제4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전후복구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이것은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배급제를 폐지했던 자본주의 국가 영국보다 6년 내지는 7년이나 빠른 속도였다. 1951년에서 1955년까지 소련의 연평균 식량 생산량은 8859만 톤이었지만 불과 10년 후인 1961년에서 1965년 동안에는 50%가 증가한 13000만 톤을 달성했다. 같은 시기 육류와 유제품 역시 연평균 60%7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따라서 소련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복구를 하면서 굶주리지 않았다. 공업역시 1951년에서 1965년까지 연평균 10.7%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연평균 농업성장률이 4%를 넘어섰고, 농업분야에서도 자립기반이 확보됐다. 1950년대 후반에는 '화학' 공업이 중점으로 육성되어, 합성물질, 석유화학제품, 화학비료 생산 기업이 대규모로 건설됐으며, 이런 전후복구와 경제 성장을 통해 1960년대 소련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 할 수 있었고, 적어도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은 그럭저럭 경제 문제로 크게 고통 받지 않았다.

 

이처럼 소련의 사회주의는 지난 마지막 위기 역시 극복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계속적인 행군을 보증하기에 충분한, 전례가 없는 눈부신 역사적 성과를 집적했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로 하여금 여러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했으며 핵무기 보유량을 삭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사회주의는 경제·산업구조를 발전시켰고, 전 세계 공업생산에서 그 점유율을 1/3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며, 공업과 과학·기술의 많은 분야에서 자본주의를 앞질렀다. 사회주의는 근로인민의 생활수준을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켜 모든 국민에게 무상의 교육과 의료를 보장했고, 문맹과 실업을 근절했으며 고등교육을 받아 숙련기술을 가진 노동자계급을 육성했다.

 

하지만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러한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성공적인 업적은 탐욕, 경쟁,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를 합리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고 말이다. 여기서 로자가 말하는 야만은 바로 자본주의를 뜻한다. 지난 세기 소련해체 이후의 소위 승리했다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 특히 사유화, 공공 부문의 폐지, 개방적 무역정책의 강요, 정부에 의한 모든 형태의 경제계획의 배제, 모든 형태의 국가 보조금·보상금과 사회적 보호의 폐지 등의 신자유주의적경제정책을 이용하여 3세계국가의 경제를 억지로 개방시켰고, 그려러고 한다. 국제자본과 다국적 기업의 전면적 진출을 위한 길을 닦고 있다. 세계은행이나 IMF와 같은 제국주의 국제기관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이들 정책의 목적은 선진 자본주의 중심부로의 잉여가치의 유입을 강화·촉진하는 데에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러한 정책의 논리적 귀결은 이들 국가의 천연자원 및 인적자원에 대한 수탈의 증대, 그들 국가 경제에서의 자본형성 과정의 봉쇄, 그들의 경제발전고정의 전면적인 정지 내지 심지어 퇴행, 그들의 생활수준의 급격한 저하,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대다수 세계 인민의 빈곤·질병·궁핍·노숙자화의 계속적인 증대다.

 

따라서 이런 야만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해야하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생각하고 있고, 또 그 가치를 믿고 있다. 사회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를 빗대며 단순히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로 단순도식화 하는 부르주아지들의 악랄하고 교묘한 선전선동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소련은 비록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지금도 업신여기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믿었고, 실천하고자 했으며 또 어느부분에선 달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소련 사회주의가 가지는 역사적 정치적 인류사적 의미다.

 

참고자료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09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대국굴기, 크레듀, 2007

 

러시아 혁명사 강의, 나무연필, 2017

 

소비에트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레디안, 20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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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나라 소련은 70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라는 제1의 자본주의 경제대국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경쟁을 했던 나라로 냉전(Cold War)을 장식했던 국가였다. 미국하고 경쟁했던 소련이 미국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던 부분은 바로 체제에 있었다. 미국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소련은 집단과 공동체의 이익과 소유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사회였다.

 

냉전시기 그 냉전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던 한국사회에선 공산주의는 절대로 긍정받을 수 없는 혹은 긍정해서는 절대로 안 될 악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대중들이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좋게 볼 리 만무했고, 소위 서방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거나 과장한 내지는 왜곡해온 소련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대중들에게도 먹혀들어갔다. 1990년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련(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 섬에 살던 한인 1세대 중 한명은 19913월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왔는데, 2일 뒤 기분이 매우 나쁜일을 겪었다. 수십년만에 고국에서 친척을 만났지만, 친척들이 인식하는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천박했기 때문이다.

 

그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사할린 동포)을 마치 감자와 빵만 먹고 사는 즉 못먹고 사는 가난뱅이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 공산주의 국가는 가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소련 시절 일반 인민들의 삶은 절대 빈곤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굶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저 빵과 감자만 먹는 사회가 아니었단 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아주 불행한 국가 취급을 했다. 그리고 이런 편향된 우익적 편견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남아있다.

 

소련에 대한 이와 같은 편견은 비단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한국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소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서구 국가들 또한 소련과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대표적으로 서방세계가 소련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학살, 독재, 강제수용소, 비밀경찰, 언론탄압, 굶주림과 같은 단어들이다.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북한을 볼 때 막연히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익적 편견에 맞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집단이 유럽에 있다. 그게 바로 그리스공산당(KKE)이다.

 

1918년 창당이래로 지금까지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항상 행동으로 실천해왔던 그리스공산당(KKE)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혁명적 업적과 대의를 이어받고자 고군분투하는 단체다. 지난 2013년 그리스공산당에선 소련에 대한 우익들의 왜곡에 맞서 3가지 파트로 나눈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이다. 책의 구성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economy)’, 두 번째는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power)’, 세 번째는 역사왜곡에 대하여(On the falsification of history)’.

 

첫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계획경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를 이루는 요소인지, 그리고 그 계획경제를 통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어떻게 달랐는지 또 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필요한지 거기서 인민들에게 부여되는 경제적 혜택이 무엇인지를 얘기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자본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하면 그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크다. 즉 이렇게 이상적이기에 사회가 발전할 수 없고 생산력이 낮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이 추진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은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서방의 기준으로도 연 최소 14%의 경제성장률과 생산력을 보였으며, 단기간의 발전을 통해 무상복지를 인민들에게 부여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이란 똑같이 분배한다는 개념이라기 보단 인민이 받아야할 하나의 권리로써 의료나 교육 공공시설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개념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모두가 똑같이 월급을 공평분배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선 노동한 만큼에 따라 급여를 받는 사회였다. 즉 더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1930년대 소련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이 일어났다. 책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하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 사회주의 건설 첫 해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노동자들이 조직한 자발적 노동인 공산주의 토요노동(Communist Subbotniks)”이 있다. “공산주의 토요노동은 사회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인 공산주의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했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규율을 장려하고 노동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한 주목할 만한 사례로 1930년대 소련에서 발전한 스타하노프(Stakhanovite) 운동이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 생산에서의 혁신적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운동으로 새로운 기술의 응용에 기초하여 노동 생산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26~28

 

두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 서방과 우익들이 가장 많이 악의적으로 얘기해온 주제로써 거기에 대한 반박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공산당의 독재라던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가 같다던지 하는 우익들과 서방세력들의 악의적인 주장들에 대한 반박 말이다.

 

소련 사회는 1924년 소련 첫 헌법에서 확립되었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직접적임 참여가 대표적인 단체들에서 간접선거에 의해 수행됐다. 1936년까지 소련에선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공장, 생산단위, 마을에서 노동자권력의 중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대중 조직들의 기능을 통해 이루어졌고, 국가의 법률을 승인하기 위한 절차에선 노동자권력의 중핵 조직들의 회합이 개최되었으며 그 모임에서 노동자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기관들의 작동은 정치활동에서 대중들의 전례 없는 참여를 보여주었다. 1977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가권력의 지역기관(예를 들어, 대표자 소비에트)은 국가 전역에 5만개 이상이 존재했다. 이러한 소비에트에는 220만 이상의 선출된 대표자들, 즉 소련 전체 주민의 대략 1%가 있었다. 11936년 헌법부터 41년 만에 2,500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비스와 콜호즈(집단농장)에 있는 인민의 통제기관 안에서는 노동자 회합에서 2년마다 대표자를 뽑는 선거가 있었고 대략 9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관들에 참여했을 정도다. 즉 소련이라는 사회에는 최소한 이러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의 중심은 노동자 권력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서구식 민주주의를 얘기하면 마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인냥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면에선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포옹한다는 논리로 간혹 나가기도 한다.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 계급이 일반적으로 공산당들이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당들이 자신들을 전복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공산당들에 대해 더 가혹한 수단들을 동원한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그리스에서 그리스공산당(KKE)의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로 점철돼 있다. 공산당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은 노동자 계급의 승리이다. 그리스에서 1929년 엘레우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민주정부는 공산주의를 법률 위반으로 선언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법률로 금지했다. 그리스공산당은 27년 동안(1947-1974) 불법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기간 중 20년은 파시스트나 군사독재 기간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부의 기간이었으며, 그 시절 테러, 고문, 추방, 처형 등이 자행됐다. 최근까지 민주주의의 정점으로서 위선적으로 유럽연합(EU)을 대표했던 의회민주주의와 다당제 체제의 옹호자들이 유럽연합의 많은 국가들에서 공산당들과 청년조직, 공산당의 상징들을 법으로 금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체코 공화국에서 공산주의 청년조직은 최근까지 불법이었다. 부르주아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 내렸다. “공산주의 청년조직 강령에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할 필요성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범죄이다! 폴란드와 어디에서든지 공산주의 상징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존재한다. 발트해 국가(Baltics)는 공산당을 금지하는 반면 나치 친위대(Nazi SS)를 찬양한다.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공식사상을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게 만들어버렸고 파시즘과 공산주의, 반공주의를 자극적으로 동일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합법적인 경우조차도,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선전되는데 많은 장애를 두고 있으며 물론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하에서 부르주아는 공산당들에게 권한을 주는 것을 허용한다.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부르주아 국가에게 공산당들이 그들의 최고의 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법은 노동자들의 권리"이지만 역시 대중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들(파업, 부르주아 정책 등에 반대하여 저항하고 통제되지 않는 조직)은 합법의 경계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공산당은 얼마나 오랫동안 정치사상을 압축한 당의 구호 때문에 공격을 당했던가?”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과 거짓 p.74~76

 

마지막으로 다루는 세 번째 파트인 역사왜곡에 대하여는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항상 악의적으로 왜곡해온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왜곡을 다루고 있다. 서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룰 때 항상 얘기하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나, 폴란드 분할, 핀란드 침공, 카틴 대학살, 베를린 장벽, 헝가리 봉기 등에 대한 서방의 과장 혹은 왜곡을 반박한다. 사실 필자는 이 주제가 가장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여기서 깊게 다루는 역사왜곡은 현재 서구 세력들 구미에 맞게 포장되어 있으며, 소련의 처지를 악마화 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동독과 베를린 장벽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베를린 장벽이나 동독에 관한 것은 지극히 서방과 서독 입장에서 서술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 구도는 대표적으로 동독은 못살고 자유가 없지만, 서독은 잘살고 자유가 없어서 대다수 사람들이 동독을 떠난다인데,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실제로 냉전 초기 동독과 소련의 자료에 따르면 서독에서도 최소 60만 이상이 동독으로 이주를 갔는데, 설사 서방의 논리를 적용하여 그것이 과장된 수치라 할지라도 분명한건 서독에서도 그 체제에 반대되는 사람들이 동독에서의 탈출자 못지않게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서방국가들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스탈린은 1952년 당시 포츠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게 독일의 재통일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한 것은 서구세력들이었다. 1955년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동독이 합류한 것은 1954년 서구 세력들이 제국주의적 목적에 따라 창설된 NATO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을 책은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은 우리가 우익과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근거 출처를 밝혀가며 입증하고 있다. 책을 통해 필자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부르주아적 이익에 따라 의도적으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가치들을 책임지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회가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의도적으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가치를 부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타주의 보단 이기주의와 욕심을 강조하고, 그런 가치들을 폄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91년에 해체됐다. 해체 원인에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작용이 있었지만,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추구했던 가치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자본주의 국가들이 추구했던 가치보다 훨씬 아름답고 인간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련은 냉전시기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혁명의 편에 섰으며, 제국주의자들의 반혁명적 책동을 분쇄시키고자 했다.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 쿠바 혁명에서 소련의 지원은 그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소련 사회가 추구했던 가치는 지금도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남아야 한다. 인민 모두가 무상으로 교육받을 권리,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 공공시설을 이용할 권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끝부분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청년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역사를 공부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전 혁명 세대들의 가치 있는 모든 경험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당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전통을 끌어낸다. 앞으로의 투쟁과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투쟁에서 더욱 더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되도록. 우리는 조직된 인민들의 정당하고 억누를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깃발,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깃발 아래 우리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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