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의미 없는 북진통일론과 반공포로 석방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과 워커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진격도 신속했지만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 속도만큼이나 미군의 군사개입 또한 매우 신속했다지난번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파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바빴으며미국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토 90%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그러나 그 시기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라인 즉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면서 인민군 또한 길게 진격하지 못했다미국은 이 전쟁에서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총 15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영국프랑스캐나다호주뉴질랜드터키태국필리핀 등이 이 전쟁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면서 전세는 인민군 쪽에게 불리해졌지만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세운 마오쩌둥(Mao Ze Dong)의 중국군대가 참전하면서 북진했던 연합국은 다시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엔 수도 서울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함락 당했다이렇게 되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1951년 4월 중국공산당 영토인 만주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및 핵폭격 그리고 국공내전 당시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의 반격을 주장했다만약 맥아더의 말대로 만주에 핵공격이 가해졌다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방사능 피해는 이루 해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결국 스탈린의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고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던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가 임명됐다.

 

1951년 봄에서 여름 사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우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그리고 그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다하지만 전쟁초기부터 미국이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해오던 폭격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탄은 네이팜 폭탄을 합쳐 20만 톤 안팎이었지만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된 폭탄개수는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여 66만 7000톤이나 달했다당시 이승만은 미공군이 한국전쟁에서 감행한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미국 전투기가 적의 주요시설을 강타하고 대단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이번 전쟁에서 미국 전투기가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에는 미군 전투기가 행하고 있던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나 비판의식이 1% 존재하지 않는다당시 미국은 주로 북한을 타켓으로 폭격을 감행했지만남한땅 안에서도 비인간적인 폭격을 감행했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게 있어 미국의 폭격 학살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섬멸하는 자유를 위한 반공성전의 위대한 과정이었다.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여기서도 이승만이 주장한 것은 바로 그의 정복주의적 비전인 북진통일론이었다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면서 휴전회담을 주선하는 미국과 북한중국 측에 강력히 반발했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외치던 북진통일처럼 휴전회담 과정에서도 그가 외친 북진통일은 정치적 허세 혹은 무의미한 정치적 구호였다.

(북진통일 시위,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물러날 때까지 항상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휴전문제 그 자체를 문제 삼았었다그리고 그가 외치는 북진통일론을 국민들로 하여금 구호로 외치게 했다. 1952년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대구대전서울에서 학생들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여기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휴전회담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아내려는 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조성훈의 책 <왜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을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승만은 아무런 성과 없이 휴전이 성립되면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그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휴전회담은 거의 2년을 끌었다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는 비무장지대 설치 즉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고두 번째는 양측에 대한 휴전감시기관 설치 문제였으며세 번째는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였다이중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내지는 대치했던 문제가 바로 양측 포로문제였다우선 세계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었다이에 따라 유엔군 쪽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과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고북한과 중국측은 모든 포로가 그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맞섰다따라서 양측의 회담이 난항에 빠졌던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친공포로들,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었다. 이 사진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있는 친공포로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남한에는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가 거의 13만 2474명이 있었고북한에는 한국군 및 유엔군 포로 1만 1559명이 있었다북한측에 잡힌 포로들의 경우 인민군 측이나 중공군 측의 포로 학대 및 고문이 있었다는 일부 증언을 하기는 했지만대체로 큰 반발 없이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적어도 북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국군이나 유엔군 포로가 편이 갈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포로의 대우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편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북한에 있던 수용소의 경우 포로들이 모여 체육대회도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서방측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것을 보면적어도 남한 내의 포로수용소하고는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포로들 끼리 편이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됐다남한 내에 최대 포로수용소 시설인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소위 북측을 따르는 친공포로와 북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공포로로 나뉘었다반공포로의 경우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인민군이 되었다 다시 국군의 포로가 된 사례로 북한과 인민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결국 유엔측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분리해서 수용했지만이들끼리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으며양측은 서로에 대한 반감만 생겨갔다.

(석방된 반공포로들, 수용소에는 소위 인민군과 북한체제를 싫어하는 반공포로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휴전회담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휴전회담은 양측 포로문제로 중단되기도 했었다이러는 도중 휴전회담을 좀 더 앞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사망한 것이다스탈린이 사망하자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휴전회담이 재개됐고포로 송환협정이 조인되었다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반대하여 이 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는데그게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마산대구영천논산부산 등 7개 수용소에 갇혀 있던 3만 7000명의 반공포로 중 2만 7000명을 석방시켰다그러면서 이승만은 한국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협정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라며 엄포를 놓았다이것은 결국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이에 분노한 북한 측은 포로들의 재수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휴전회담 당시 사진, 휴전회담은 2년을 끌었다. 회담을 2년이나 끝 이유에는 양측 포로문제가 항상 있었다.)


(휴전협정에 조인한 각국 대표자들의 서명, 당연히 여기에 이승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면서 휴전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뻔했지만결국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南日사이에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김일성 북한군총사령관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가 각각 자신들의 후방사령부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간 지속되던 한국전쟁도 끝이 났다당연히 이승만은 휴전회담에는 서명하지 않았기에 휴전회담도 미국과 북한만 한 것이 됐다거기다 전쟁 초기 이승만은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기에 한국의 작전권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막고 한국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1953년 10월 1일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 측 전권위원 변영태와 미국 측 전권위원 델러스 사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전문과 6조로 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식, 사진속에는 이승만도 보인다.)

 

① 미 양국은 국제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무력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②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는 양국이 상호 협의하여 외침을 방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③ 양국은 자국의 영토 및 자국의 영토를 위태롭게 하는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무력적 외침에 대처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④ 양국은 상호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공군을 대한민국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⑤ 이 조약은 양국이 각각 자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한다.

⑥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어느 1국이 이 조약을 폐기할 의사가 있을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 지 1년 후라야 폐기될 수 있다.

 

이 조약은 궁극적으로 1954년 1월 13일 양국의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발효되었다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대한민국 영토에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숭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어쨌든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명분은 소위 양국 공동의 적인 북한에 맞서 군사력으로 견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 근거한 것이고이런 시각의 근본은 바로 이승만식의 반공사상에 있다.

(윤금이, 1992년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는 주한미군 병사에 의해 아주 잔혹하게 살해됐다. 당시 주한미군 병사가 저지른 폭력은 올해 이슈가 됐던 N번방을 능가했다.)

 

또한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미군문제는 이루 해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대표적으로 1992년에 일어났던 윤금이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당시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술집 종업원 윤금이는 주한미군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했는데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지만살해된 시신에는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이 저질러졌으며소위 N번방 사건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그랬지만 이런 범죄를 저지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2012년에 한 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도 처벌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평택 코로나 확진자, 2020년 전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에 가장 무능한 나라는 미국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에게도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거나 대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02년엔 소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 하여 두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도 일어났다이것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즉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무수히 많다그러나 더욱 기가막힌 건 한국정부는 미국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어떠한 조치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올해 7월 전 세계적으로 강타한 전대미문의 질병인 COVID-19가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한국사회에도 피해를 줬다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은 현재 확진자 72.5%가 미군이지만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주한미군의 이런 악순환적 구도의 뿌리는 바로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즉 이승만 정부가 심어놓은 반공의 뿌리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를 남겨 이러한 피해에도 확실한 처벌조차 못하는 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1957년 이승만은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서울을 방문하자 매우 환영해주었다. 둘의 반공성향은 일란성 쌍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이승만에게 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투사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또 다른 흑역사를 시도했었다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공십자군을 파견하는 것이었다한국전쟁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는데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다물론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였고이승만의 입장에서 프랑스가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공산주의에 맞서는 성전이었다. 1954년 1월 이승만 정부가 자청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한국군 1개 사단 파병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재검토되었는데당시 이승만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정부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 반공정신의 고취가 파병의 목적이다라고 말했다물론 이 요청을 미국이 거절하면서 실패했지만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서기만 한다면 식민지 해방 전쟁도 결국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되는 이승만의 저급한 인식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전쟁범죄였다.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대다수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단독정부가 탄생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남한내에선 이에 맞서는 저항이 끊이질 않았다지난번 친일의 힘을 빌리다편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면서그 구도는 친일세력 대 독립운동 세력이라는 모순적인 구조가 생기고독립운동 세력이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하는 상황이 됐다여기에 더해 김두한을 두목으로 하는 대한민청이나 월남한 친일지주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깡패 조직은 온갖 노동자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해방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은 대구에서 일어났다. 1946년 9월부터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의 주도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이 한반도 이남에서 시작되었다이 파업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미군정의 극심한 좌익탄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9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 철도종업원 1만 명이 쌀배금임금인상해고반대노동운동자유민주인사 석방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적인 시위는 본격화됐다.

(대구 10.1 항쟁,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의 무능과 폭정에 맞서 민중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폭력적이었고, 잔혹했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이쉬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시위는 12월까지 전개되었는데이 과정에서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전국적으로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이때 당시 사망한 주도급 인사 중 한명은 이후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구에서의 항쟁이 우익들과 미군정의 진압으로 끝난 뒤, 1948년 4월엔 제주도에서 대학살극의 신호탄을 알리는 일이 발생했다바로 제주 4.3 항쟁이다제주도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가 친일경찰을 이용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었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친일 경찰에 의한 발포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차올랐고, 48년 이승만 정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단행하려 하자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민들의 요구는 무시하면서 군정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을 파견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당시 이승만과 같은 편이었던 경찰총장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제주 4.3 항쟁 당시 체포된 민간인)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과 우익단체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입에 담기 힘들정도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이들의 무차별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의 대다수는 민간인들이었고여성 노인 아이 그리고 유아도 포함되어 있었다제주 4.3 항쟁은 1954년까지 이어졌고 대부분의 사망자는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사이에 나왔다대략 3만 명에서 4만 5000명의 제주도민이 학살이 피해자가 됐고이중 80% 이상은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제주 4.3 항쟁 당시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그는 이 대학살극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그는 1948년 7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그 계엄령 조치로 인해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순민중 항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제주도에서 광란의 학살극이 벌어질 무렵 전라도의 여수와 순천에선 이승만을 놀라게 할 또다른 일이 일어났다이게 바로 여순민중항쟁이다. 194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에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당시 한국군에는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존재했었다이들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군에 위장입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제주도에 가서 같은 동포를 진압하기를 원치 않았던 제14연대 군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이들은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구성하여 저항에 나섰다더 나아가 이들은 친일군경과 지주들을 재판에 세우고 농민들에게 혁명적 대의에 합류해줄 것을 주장했다.

(학살자 김종원,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잔혹성이 이루 해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으로써 체포된 민간인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 즉 살인을 즐겼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훌륭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진압군을 보냈다여순 봉기를 진압하러간 군대는 이를 아주 잔혹하게 진압했다당시 이승만이 파견한 군대는 과거 친일경력이 있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로서 잔혹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당시 진압군으로 파견된 이승만의 심복 김종원은 민간인들을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그는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은 민간인들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일본도로 베는게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쏴서 민간인을 하나 둘씩 죽였다김종원은 이후 한국전쟁에서도 수많은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대통령 이승만은 그에 대해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라고 할 정도로 아꼈다여순항쟁을 진압하고자 출동한 군대는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을 통해 봉기를 일으킨 측을 진압했고결국 봉기는 진압됐다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우익측의 강경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의 참혹한 양민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이 일어나면서 극에 달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른바 거짓방송을 해놓고 도망쳤다그는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파된 한강다리)

 

서울시민 여러분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거짓방송이었다당시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었는데함락되기 전 이승만은 이런 거짓방송을 해놓고 몇몇 정부 관료들과 도망쳤던 것이다이것도 모자라 인민군의 T-34 탱크의 진격을 막는다는 전제하에 이승만 정부는 피난가는 사람들의 길마저 막아버렸다한국군은 인민군의 T-34 탱크를 막는다는 명분을 들어 한강에 있던 모든 다리들을 폭파시켜 버렸다그바람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이승만 정부는 전쟁 초기에 아주 잔인한 전쟁범죄를 계획적으로 저질렀는데그게 바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하지만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하게 되었고, 10대인 중·고교생이 가입할 정도로 가입절차가 매우 간단했다쉽게 말해 사상적 전향보단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됐다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고 집단학살했다.

(체포당한 보도연맹원, 이승만 정부의 보도연맹 학살로 전쟁 초기 수십만이 학살당했다.)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전쟁 초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극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났다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년 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그 외에도 진해통영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광산 코발트 학살 현장, 이 학살의 현장은 이승만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광란의 학살극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중에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은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가장 악질적인 전쟁범죄였다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짓까지 했다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전역에서 최소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국민보도연맹 학살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학살의 희생자는 많게는 100~12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부터 엄마의 젓을 빨다 검거되어 같이 총살당한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 이런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이런 학살극은 반공 혹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은폐되고 미화됐다.

 

한국전쟁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이승만은 뻔뻔했다그는 전세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부산에 있던 시기 조봉암 장택상 등의 의원이 국민에게 사과해야한다는 말을 했을 때자신은 지은 죄가 없다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한국전쟁은 미군이 UN군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며 국제적인 전쟁의 양상을 띄었다미국은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영국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호주뉴질랜드 등의 나라를 끌어들였고, UN군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은 미군과 더불어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낙동강 전선에 있든 연합국이 반격을 시작하자 그해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서 학살당한 민간인)

 

이승만 정부는 여기서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전쟁 초기 서울을 버리고 떠났던 이승만은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 부역자 색출을 목적으로 또 다시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이러한 무차별 보복 및 학살은 곳곳에서 일어났고여기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또한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숨은 빨치산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여순민중항쟁에서 그랬듯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51년 공식적으로 700명 이상을 학살했던 거창양민학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도 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저지른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었고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의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자국민 9만에서 10만을 아사시킨 이 사건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방산비리였다.)

 

더 나아가 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희대의 방산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그게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한국전쟁으로 기존에 없던 자원과 기반마저 파괴되면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그러나 그런 고통속에서도 정부관리들과 군부는 엄청난 부정부패를 자행했다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다시 인민군 측으로 기울어지던 1950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선이 다시 밀리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서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착복했고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자국군인이 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방위군 사건 주모자의 처형, 부패한 이들은 결국 처형당했다.)

 

이들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결국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서고 1951년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됐으며사건을 일으킨 김윤근 등 4명은 사형해 처해졌다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억 5천만 원의 현금과 5만 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으며그 밖에 귀향 장병의 귀향경비의약품부식비 등이 부정처분되었다김윤근과 같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적으로 모은 돈을 기생집에 가서 뿌리며 놀기까지 했다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방산비리로 인하여 대략 9만 명의 군인이 아사했다.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이승만, 이승만에게 있어 북진이란 자신의 정치생명과도 같은 구호였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까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도했고 저질렀다더 나아가 방산비리로 자국군인 9만 명을 아사시키기도 했다그는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음에도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며도망치지 못한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두 번 죽이는 일까지 했다이처럼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광란의 학살극을 주도하였으며반공 내지는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로 그 모든 광란극을 합리화했다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정권에서 물러나기 전 까지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비젼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이 정복주의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통일비젼은 오히려 전쟁을 끝내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반민특위 해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지원하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이 친일세력의 방해와 공작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문제에 있어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노선을 확실하게 했고,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9479월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UN)에 이관했다. 즉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이 점차 이승만과 친일세력에게 유리해져 갔다는 것이다.

(1947년 유엔 총회 제1차 위원회에 참석한 임병직)

 

유리한 기회를 얻은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을 유엔으로 보내 로비 활동을 지속했고, 19471114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43:0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에 따르면 남북총선거 실시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뜻했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 3달 뒤인 19482월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메논과 모윤숙, 일설에 따르면 친일파 모윤숙은 메논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즉 모윤숙이 허리한번 돌리니 메논이 이승만에게 설득당했다는 얘기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남북한 선거관리 국가로 필리핀, 엘살바도르, 중국, 프랑스, 러시아, 캐나다, 오스트리아, 인도 대표로 구성하고 인도대표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북한의 입북거부와 관련, 남한만의 선거 실시 여부에 대해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의 손에 한국의 장래, 특히 이승만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었다. 8개국 가운데 ~번 국가들은 남한만의 총선을, ~번 국가는 통일정부 수립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메논 의장의 손에 단정 수립 여부의 결정권이 부여되었다. 당연히 이승만은 인도의 메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의지를 작동했다. 친일매국노이자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먹었던 모윤숙은 친일경찰을 등용했던 조병옥장택상과 더불어 메논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극우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이 책은 메논을 건국을 도운 애국자로 묘사한 책이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밤이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메논을 데려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모윤숙은 드라이브를 빙자,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 이승만과 만나게 하고 프란체스카가 전해주는 연명서를 귀로에 메논에게 전하였다. 메논이 유엔총회로 떠난 후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의 이름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메논은 유엔 소총회의에서의 보고서에서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네루가 인도의 국민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할을 옹호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라고 이승만을 극구 찬양하였다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윤숙의 역할이 컸다. 세간에서는 모윤숙의 미인계가 메논을 움직였다고 보았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미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두고 토론 끝에 226일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위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역사적 결의를 하게 되었다.

 

1948년 들어 남북한 정부가 단독정부 수립 방향으로 나서자 임정의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있을 수 없다.”며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협상에 나섰다. 이로인해 1948427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15인 요인회담도 열렸다. 남측 대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 북측에서는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남북회담 또한 결과적으로 무산됐고, 김구를 포함한 남측 대표단은 5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510일 드디어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것이 바로 5.10 총선거였다. 남북협상파와 민족주의계열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된 510총선거의 결과는 71.6%의 투표율로, 당선자는 무소속 85, 이승만의 독촉 55, 한민당 29, 대동청년단 2, 기타 19명이었다.

(38선에서 사진을 찍은 김구,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는 분명 반공주의자였지만, 이승만과 달리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반탁을 외친 것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고, 남북협상은 늦은 선택이었다. 확실한건 1948년 시점에서 그는 분단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총선 당시 이승만과 대립했던 인물 중 최능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해방 후 조만식의 건준 산하 평양치안부장을 역임하다 월남한 그는 친일경찰을 많이 등용하는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미군정청의 수사국장 자리에서 해임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등록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그의 후보등록 서류를 탈취했고, 결국 최능진이 딘 군정장관에게 이승만 측의 등록방해 사실을 항의하여 마감일을 연기하면서 가까스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측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등록된 서류의 추천인을 문제삼았다. 당시 선거법에는 후보 등록에는 200명의 주민 추천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최능진 추천인들을 협박하여 추천 사실을 부인하도록 한 것이다. 최능진은 결국 후보등록이 말소되고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최능진, 그는 이승만의 정적이었다. 결국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한다.)

  

이승만의 찌질함과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01일 수도청 형사대가 최능진을 체포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했다. 구속영장에 의하면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서세충, 광복군 출신인 여수 6연대장 오동기 소령 등과 공모,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었고, 1019일 최능진은 내란음모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시기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풀려난 최능진은 즉시 종전평화통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한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2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최능진을 체포했던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악질 친일파였고, 보도연맹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할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다.

 

1948724일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이 724일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됐다. 이승만은 취임사 말미에 대한민국 307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하여, 때로 상해임정을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취임사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 하는 것은 이승만의 발언마저 무시하는 무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민족청년단)

내무부장관 윤치영(독촉국민회)

외무부장관 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

국방부장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한민당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이 인(전 검찰총장)

문교부장관 안호상(서울대 교수)

농림부장관 조봉암(국회의원)

상공부장관 임영신(여자 국민당수)

사회부장관 전진한(국회의원)

보건부장관 구영숙(무소속)

체신부장관 윤석구(국회의원)

교통부장관 민희식(군정청운수부장)

무임소장관 이윤영(조민당부당수)

무임소장관 지정천(대동청년 단장)

총무처장 김병연(조선민주당)

공보처장 김동성(합동통신사장)

법제처장 유진오(고대교수)

기획처장 이순택(연대교수)

심계원장 명제세(한독당)

고시위원장 배은희(목사)

감찰위원장 정인보(국학대학장)

 

비록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대 내각에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우긴 했었다. 이렇게 해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해방 정국 시기 자신과 결탁했던 한민당을 배제했고, 이것은 양자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초대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유산몰수 유산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실행했는데, 이것은 태생적으로 친일지주들이 많은 한민당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임정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며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의 노력은 이승만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이승만과 결탁했던 친일파들은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상태였고,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남한내에서의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9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특위는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시작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이승만을 반민특위가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신익희와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고문하여 월북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 노덕술은 그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애국자였다. 따라서 그는 노덕술을 옹호하고 비호했다.

 

194922일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위반이라는 말 안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그해 4월에는 노덕술을 포함한 친일경찰 출신들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부탁을 받은 테러시트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그 사건은 미수에 그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충격은 엄청났다. 이렇게 친일세력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측은 5월에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호를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이 남로당프락치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6월에는 이들 외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을 발표하여 노일환·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11명의 의원을 구속했다. 구속된 의원 대부분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국회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등을 제안했던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쉽게 말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빨갱이 몰이 했던 것이다.

(노덕술, 노덕술은 악질친일경찰로 무수히 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측에게 체포된 노덕술, 노덕술은 반민특위 활동 당시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애국자라고 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다. 이승만은 심야에 은밀히 반민특위위원장의 공관으로 김상덕을 찾아가 노덕술 등을 석방할 것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차관을 하던 장경근 휘하의 경찰병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른바 6.6 사건이다. 국립경찰의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그들은 조사서류를 탈취하고 요원들을 폭행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방해오 와해되고 말았다.

(반민특위 습격, 1949년 6월 반민특위는 장경근이 지휘하는 경찰에게 사무실이 습격받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도 당연히 이승만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다.)

 

(반민특위후손모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종 권력기관의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민특위 해체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벌 받은 친일파는 단 한명도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포장했다. 또한 이들이 이후 대한민국에 등장할 독재정권의 주구가 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적을 방해했고, 그를 이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또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각한 악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일의 힘을 빌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1945815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815일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발빨리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고,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며 일장기 말소사건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제의 그 어떤 회유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고,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준비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천황이 항복하기 전 자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이 있던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8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한반도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고만장했던 친일파들은 목숨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거기다 몽양 여운형 또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해서 한반도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하여,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갔다. 한반도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대에 서야했다. 그들 중 생계형 친일의 경우 용서받거나 인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악질 친일파들의 경우 처벌받았다.

(얄타회담,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다는 소식은 한반도 이남에서도 전달됐다. 한반도 이북은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일본의 행정체계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여운형의 건준이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지만, 조선 총독부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아베 총독에게 포고문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총독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빅3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그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2일 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 준 것에 대해환영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본인들 스스로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99일 서울에 입성하여 그들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점령군으로써 한반도 이남을 다스리게 된 미군정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겐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큰 비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여운형이나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들은 친일파로서 단죄당할 것이 분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정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던 세력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다. 지난번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귀국하기 전 주일미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와 한반도 이남에서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던 하지 사령관과 일본에서 만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맥아더가 지원해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함께 귀국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그는 기자회견과 귀국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승만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를 떠나 하와이, , 일본 동경 등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얘기해 본 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여기에 나는 우리들의 합동이라는 것을 크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국내 형편은 잘 모르나 차차 알아가면서 여러분과 합동해 가겠다. 특히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오 외교부의 책임자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끝까지 한국의 평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군정부와 아무런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나 여기 온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미군정의 서울 입성, 이것은 또 다른 외세의 지배를 뜻했다.)

 

당연히 그의 회견과 방송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이나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포들의 일심협력과 맥아더, 하지, 아놀드 장군의 고마움안 피력할 뿐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일단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와 힘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0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이 결성됐고, 이승만은 독촉의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것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 200여 개가 모여 구성된 협의체였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지만, 11월 중순 조선공산당 측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고, 결과적으로 독촉은 해체되었다.

 

1123일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했다. 김구를 포함한 임정인물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는 하지가 동원한 환영식이 거창하게 열렸지만, 이들이 귀국할 때는 미군장교 1명과 통역 한명만 마중나올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김구와 같은 임정인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줄 수 있었지만, 김구에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로 칭송받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식됐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평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와 관련 이른바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한국인 250여 명을 구속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승만의 존재가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성은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에 젊은 날의 행적,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임시정부 대통령,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복합되고 부풀려지면서 명성과 함께 신비성을 더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행적이 이런 맥락속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1945916일 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인사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다. 이 한민당은 지주와 친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득권 정당으로 미군정의 구미에 맞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과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중심으로 뭉친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힘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표명했다. 그는 19451221<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극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 분자들은 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노선과 아집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더 심해졌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3상회의 당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필요하다면 5년 더 연장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그보다 더 빨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왜곡돼서 전달되었다. 그 바람에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성립이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연히 반탁을 외쳤고 선동했다. 이승만이 반탁을 외침에 따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 또한 반탁운동에 나섰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오보,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은 동아일보에 의해 왜곡보도됐다. 미국은 신탁통치 연장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진실은 반대로 보도됐다. 결국 이 왜곡된 보도는 왜곡된 반탁운동을 창조해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시위대,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과 이승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쟁이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에서의 좌우갈등은 극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성과물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6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었다.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체제를 만들자는 이승만의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등극한 극우단체와 친일집단은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 극심해졌다. 1946101일에는 대구에서 미군정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친일 경찰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 발언은 이승만이 통일보단 분단과 외세의 결탁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자, 이는 미군정에서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이승만 세력들의 의도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테러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여운형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우익세력들이 여운형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 여운형은 1947719일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73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610월 이범석에 의해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은 이승만의 방계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좌익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승만 주변으로 몰린 친일파들은 각종 정보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범석이 만든 족청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은 이승만을 위해 좌익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각종 경제적 실패로 인해 시위를 하던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공장이나 철도 그 외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경찰과 함께 그들을 진압했다. 여기엔 김두한과 같은 조직폭력배 조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집단은 해방 후 친일지주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행위를 경찰의 비호아래 저질렀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과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 여순항쟁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중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항쟁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권력이 있었다. 일단 그는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미국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이용하여 통일정부수립을 막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또한 그들과 결탁하여 극우세력의 테러 행위을 방관하거나 옹호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끝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맡겼다. 유엔에 맡겨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섰고, 1948815일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과정은 참으로 잔혹하고 혹독했다. 소위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다. 좌익은 씨가 말렸고,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과 같은 곳으로 숨어서 외로운 투쟁을 한국전쟁 이후까지 해나갔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란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악행은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태평양 전쟁 당시 이승만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평가절하했던 이승만은 19321110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건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배려로 19333월 국무의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국제연맹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탄핵당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다. 결국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온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당시 그는 몇 개월 뒤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는데, 쫓겨났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는 급변했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3년엔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침략의 길을 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선 파시스트 히틀러가 민주적인 투표로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세계를 감돌게 됐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파시즘 진영과 민주진영으로 나뉘어 전투를 치르게 됐고,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9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 이 책은 1941년 이승만이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에게 경전급으로 찬양받는 서적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 계속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393월 수도 워싱턴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거듭 요청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했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미국과 일본사이에 곳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됐다. 또한 그는 그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백범 김구는 약산 김원봉을 임정에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주의하면 치를 떨었던 극반공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혐오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인 1941년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한 것에 대해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서술은 어떤면에선 기회주의적 처사였다. 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한 것은 사실 크게 이상한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팽창으로 나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이것은 소위 미영프(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승만이 그 책을 쓰던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즉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었다.

 

1939년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던 이승만은 1941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자기자신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임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대미 외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점까지 절대로 혁명가나 철저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미활동을 전개하게 된 시점은 194112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부터였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승만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승만은 19433월말 하원의원 오브리엔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국무장관 헐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대국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 OSS의 책임자였던 도노반은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와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는 정한경, 이원순, 임병직 등이 그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 이승만이 집권했을 때 외무장관(임병직), 주일대표부 초대공사(정한경),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이원순) 등의 요직을 지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는 주구장창 외교활동을 견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지속중이던 와중에 소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지만, 한편으론 무장투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를 통해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카탈리나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엔젤레스 롱비치 인근에 있는 카탈리나 섬은 CIA의 전신인 OSS를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활용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이 추천한 일부 한인 대원들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년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필자는 고래투어 하는 배에 올랐다가 우연히 카탈리나 섬을 육안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시 이 사연을 선원에게 얘기해주니 흥미로워 했다.)


(서울 1945에서 재현된 OSS 훈련,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71부작짜리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가 전쟁 막바지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받는다.) 

 

 

이승만은 당시 OSS의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로부터 큰 호감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OSS가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여기에는 이후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도 관여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만나 미주에 있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한일 게릴라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넵코(NAPKO) 프로젝트가 수립되었고, 이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관여했다. OSS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권 초기 활동했던 장석윤, 장기영, 유일한 등이 있다. 그들은 1944~1945년 당시 켈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 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즉 이들이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1943년 일본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패배했고, 1944년에는 일본령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3월에는 이오지마가 함락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6월에 오키나와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1945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즉 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발언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강력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체류 중에 여러 차례 반소 반공의 입장을 밝히는 언론 기고를 하였는데 맥아더에게 보낸 것은 이후 자신의 한반도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 (한국-필자)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주리 호에서 공식적으로 치뤄진 일본의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이것이 맥아더로 하여금 이승만을 한국의 반소 친미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의 귀국을 전적으로 돕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끝이 났다. 이승만은 해방의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이제 해방된 한반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5104일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떠나 10일 뒤인 14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거기서 맥아더를 통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를 만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뿐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이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맥아더와 이승만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자 답게 이승만을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던 초기 때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추종하는 나라 미국의 입장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섬기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데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분열을 낳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을 위해선 친일적인 발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