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7월 4일생
올리버 스톤 감독, 톰 크루즈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주의 이 감상평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제 저녁 집에서 영화 ‘7월 4일 생’을 봤다. 아버지께서도 워낙 추천하는 영화고, 톰크루즈가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한 영화이기도 해서 몇 주 전부터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를 보고난 뒤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고,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영화들은 대부분 반전성향의 영화들이 많다. 올리버 스톤이 만든 ‘7월 4일 생’또한 그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7월 4일은 독립기념일이다. 1776년 영국 식민 통치에 반발한 미국인들은 7월 4일에 미국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그 날을 기념하여 미국에서는 7월 4일을 미국의 독립기념일로 잡는다. 이렇듯 7월 4일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조국을 생각하는 날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인들이 의미를 두는 날인 7월 4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참전용사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던 그는 “언젠간 자신도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는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2차대전 참전용사였고, 그의 집안이 다니는 교회 또한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주인공은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거리낌 없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그러나 그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자신의 아버지가 참전했던, 2차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이 아니었다. 1967년 다낭항에서 전투를 치르던 주인공은 미군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목격한다. 그 상황에서 살아있던 아기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후퇴하라는 상관의 명령 때문에 후퇴했고, 거기 있던 갓난아기는 미군의 포격에 죽고 만다. 다낭에서 전투를 치르던 주인공은 크게 부상당했다. 결국 그는 휠체어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격화 됐다. 워낙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던 주인공은 초반엔 반전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베트콩 지지자들로 간주하며 매우 경멸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돌아왔을 당시에는 매우 기뻤지만 둘로 분열되어 있는 미국을 보게 되었고, 초반엔 전쟁 지지자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 정부가 국민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되었고, 그가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던 여자친구를 만나 반전운동에 참가했다가 반전 참전용사들과 반전운동가들을 대하는 미국 정부의 대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미국 정부의 무차별 폭력을 본 뒤 자신이 믿었던 가치관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베트남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하여 PTSD로 고생한다.

온갖 고생과 정신적 충격을 받은 끝에 주인공은 반전운동가가 된다. 주인공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 전 참전용사로써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닉슨의 정책을 비판한다. 닉슨의 재선을 시도하자 그는 연설현장에 찾아가 베트남 전의 진실을 호소한다. 무었 때문에 왔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제가 여기 온 건 이 전쟁이 잘못됐다는 걸 말하기 위해섭니다. 이 사회는 나와 내 형제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나라가 국민들을 기만했습니다. 우린 그 거짓말에 속아 10000km나 떨어진 베트남까지 가서 가엾은 소작농들에 맞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당당한 저항의 역사를 가진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지난 천 년간 투쟁해온 베트남 사람들과 말입니다. 이 정부의 지도자라는 자가 얼마나 역겨운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듭니다. 사람들은 미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떠나라고 합니다. 전 미국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현 닉슨 정부에 대해서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정부는 부패하고 썩어빠진 도둑집단입니다. 저들은 강간범이자 강도입니다. 이제는 묵인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우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진실을 말하려고 여기 까지 왔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미군들을 살해하고 있는 저들에게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닉슨 지지자들은 진실의 불편함을 느끼고 주인공과 일행들에게 “빨갱이”라는 욕설을 퍼붑는다. 영화 ‘7월 4일 생’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고, 어떻게 사회적인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애국심에 빠져있던 일반 미국인이 어떻게 해서 반전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미국 사회의 깊은 반성과 전쟁의 비극, 전쟁이 개인에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미치는 영향 그리고 “우린 잘못된 전쟁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가기 전인 영화 초반에 베트남에서 미군을 지휘하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의 인터뷰가 나온다. “2차세계대전 당시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일본군과 프랑스군에 맞서 싸워 이긴 베트콩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동굴에 사는 건 모두 제거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현실을 그게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그리 깊게 보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베트남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실수를 아주 정확히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영화를 봤다. 영화 ‘7월 4일 생’은 앞으로도 반전을 호소하는 명작으로 기리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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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26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빔 벤더스의 사진집에서 원작자와
뉴욕에서인가 당구를 치는 것을 보고
원작을 찾아본 기억이 나네요.

아무런 대의명분도 없이 시작한 전쟁에서
결국 망신만 당한 두 제국의 민낯을 드러
냈다고나 할까요.

NamGiKim 2018-09-26 21:06   좋아요 0 | URL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정말 제국주의 국가들의 뻘짓이 보이죠. 프랑스도 미국도요
 
서울 1945 - O.S.T.
Various Artists 노래 / 워너뮤직(WEA)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학 동기 형이랑 치맥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동기 형은 나한테 ‘서울 1945’라는 드라마를 추천해줬다. 그 얘기를 들은 뒤 나는 드라마 서울 1945를 보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봤고, 인터넷 다운로드 사이트에 들어가 1화부터 71화까지 전부 다 다운로드 받았다. 그게 2015년 1월이었다. 드라마의 이름을 알려준 형은 “해방전후사를 그럭저럭 잘 보여준 드라마”라고 나에게 얘기해줬기에, 난 그냥 막연히“그런가 보다!!”했다. 드라마 서울 1945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현대사를 보는 관점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서울 1945를 다 본 나는 이후 이 드라마를 3번씩이나 정주행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정주행할 가치가 있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서울 1945는 1930년대 일제시기부터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까지의 해방전후사를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친일파와, 사회주의자들을 역사 속에서 재조명한 수작이다. 단순히 친일파에 대한 비판에서만 멈추지 않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친일파가 되었는지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왜 그 시기에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잘 보여줬다. 무엇보다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잊혀진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과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 졌다.(이 드라마를 통해서 몽양 여운형에 대해 개인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만(예를 들면 인민군 나쁜 놈 국군 정의의 사도?) 보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 드라마를 높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드라마 서울 1945에서 개인적으로 혁명가 최운혁의 삶이 가장 가슴이 아팠고 많은 감동을 줬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법관이 되려다 실패한 인재→소련유학→동북항일연군에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해방 이후 소련군과 함께 입성→이후 서울대학 법학교수로 활동→여운형 노선에 합류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여운형 암살 이후 월북하여 남로당에 입당→남로당 입당 이후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중좌(중령)로 참전 및 법관으로써 활동→1.4후퇴 이후 빨치산으로 게릴라 투쟁을 하다 1951년 8월 체포당한 혁명가 최운혁의 일생이 참으로 많은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 서울 1945는 최운혁의 일대기를 통해 해방전후사와 분단의 비극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선 인간성을 잃지 않는 주인공 최운혁의 모습도 매우 잘 보여준다. 1930,40년대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해방 후 좌우익 연합을 위해 헌신하는 최운혁의 모습,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이 기정사실이 됐음에도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최운혁의 모습, 한국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알자 전쟁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전쟁에 반대하던 최운혁의 모습,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무분별한 인민재판으로 무고한 양민들 까지 죽어나가자 이에 대해 슬픔과 죄책감을 느끼는 최운혁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시대의 지식인이 느꼈을 고뇌를 아주 잘 보여줬다.

혁명가 최운혁의 일생을 보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사회주의를 지지했지만 통일정부수립을 바라다 결국 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갈 수 밖에 없던 그의 운명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드라마 서울 1945를 보고나서 한국현대사를 보는 나의 관점과 인식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사라졌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또한 그 시기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나선 혁명가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으며, 좌우를 막론하고 좌우익 합작과 통일 정부 수립에 나섰던 몽양 여운형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나온지도 이제 12년이 흘렀다. 그러나 서울 1945가 나온 이후로 우리 근현대사를 재조명한 영화들은 좀 있었지만, 드라마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권 교체가 된지 1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서울 1945와 같은 수작이 나올 차례라 본다. 내년에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다룬 드라마가 나온다고 들었다. 좋은 드라마일 거라 기대한다. 비단 약산 김원봉 뿐만 아니라 서울 1945와 같은 한국근현대사를 잘 재조명한 드라마가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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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 감상평: 분단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수작>

(주의 이 감상평은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충일인 수요일 영화 강철비를 봤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나는 영화의 주제가 북한 쿠데타이기에 영화 감상을 하고는 싶었지만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처음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었다. 그러던 중 박사모를 비롯한 몇몇 극우계열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종북좌파 영화’로 간주하는 글을 보았고 그때부터 이 영화를 꼭 봐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올해 3월 집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감상했지만 너무나도 좋은 영화였기에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 6일전인 현충일날 집에서 한 번 더 봤다.

영화 강철비의 초반 장면은 김정은 정권에 불만을 느낀 인민군내의 불만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부터 시작한다. 북한의 쿠데타는 한반도 정세를 위태롭게 했고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역)과 차기 대통령 김경영(이경영 역)은 어느정도 친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갈등한다. 대통령 이의성은 북한의 군부가 선전포고 한 마당에 미국과의 동맹을 돈독히 하여 전쟁의 길을 택하려고 했고 차기 대통령 김경영은 제2차 한국전쟁의 비극을 막기 위해 헌신을 다한다. 북한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는 북의 최고지도자 그분을 죽이는데는 실패했고 그분은 사실상 중상인 상태에서 은퇴한 북한 고위직 특수부대 요원 엄철우 (정우성 역)의 보호 끝에 남으로 내려와 치료를 받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영화의 전개는 북한의 군부세력은 그분을 죽인 뒤 전쟁을 일으켜 적화통일의 야욕을 채우려하고 오히려 대한민국의 전쟁 반대세력은 그분을 지킴으로써 전쟁의 위협을 막고자 한다. 극중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가 바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 역)다. 극중에서 곽철우와 엄철우는 적대관계에서 점차 친구관계로 변해가고 곽철우는 엄철우에게 위대한 명언을 알려줬다. 그 명언이 바로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의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였다.

영화 강철비의 감독은 이 명언을 통해서 분단의 비극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즉 영화 강철비는 주제는 북한 쿠데타지만 핵심은 분단의 비극인 것이다. 영화 강철비에 나온 명언대로 한반도는 분단이라는 비극아래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고통 받았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 경쟁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둘로 갈라졌고 거기서 편을 갈라 분단을 구축한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에 의해서 다시 한번더 고통 받았다. 1950년 6.25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극중에서도 곽철우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영화 강철비는 작품성도 좋지만 총격전을 비롯한 전투씬 또한 매우 실감났던 것 같다. 2016년에 개봉했던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주인공 혼자서 람보처럼 학살하며 다녔지만 강철비는 그런 영웅주의식 전투장면에서 많이 벗어났고 그 외에 탱크씬, 헬기씬, 비행기 폭격씬 그리고 핵폭탄 씬 등 정말 여러 가지를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이점또한 맘에 들었던 것 같다. 무튼 분단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아주 좋은 영화다. 안본사람이 있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 점수는 10점 만점에 9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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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워 솔저스 : 리마스터링
랜달 월레스 감독, 멜 깁슨 외 출연 / 다일리컴퍼니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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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워 솔저스 감상평>



(주의 이 감상평은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정규전으로서 처음 맞붙었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을 배경으로 한 영화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를 봤다. 영화 위 워 솔져스는 이아드랑 전투에 파병되어 미군을 지휘했던 할 무어(Hal Moore)가 쓴 책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영화에서 주연 혹은 조연으로 비중있게 출연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실존인물이다. 헐리우드사가 1998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했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위 워 솔저스의 전투씬은 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참 리얼하다. 네이팜 폭탄에 맞아 죽어가는 북베트남군, 헬기에서 내려 작전에 투입되는 미군 병사들, 서로가 죽고 죽이는 미군과 북베트남군과의 교전 등 전투 장면과 리얼함에 있어선 위 워 솔져스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실제 있었던 전투와 당시 전투에서 싸웠던 참전용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스토리도 실화에 매우 가까울 정도로 잘 만들었다는 점에선 분명 호평 받을 만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줄거리와 연출을 제치고 이 영화는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비판해야할 영화다.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던 장면들이 매우 많았다. 영화의 첫 시작은 1954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이아드랑 주변 지역을 정찰하던 소규모의 프랑스 군대가 베트민군에 기습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괴멸되고 살아남은 프랑스 병사들은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힌다. 영화 위 워 솔져스는 프랑스군을 포로로 붙잡힌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을 학살해버리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일부러 반 베트남 감정을 심은 뒤 11년 후 미군이 대규모 헬리콥터 작전을 구상하는 장면으로 바꾼다. 미군부대가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한 군대는 주인공 할무어 중령이 이끄는 제1기병사단 제7연대였다. 제1기병사단은 1876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이 지휘아래 <리틀 빅혼 전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던 군대였다. 그리고 제1기병사단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군대이기도 하다. 영화 위 워 솔저스에선 이아드랑 전투에 참전한 제1기병사단의 미군을 마치 “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전우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미군”으로 묘사했다. 마지막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식 영웅주의 결말을 보여줬다.



즉 위 워 솔져스는 이와같은 장면을 통해서 베트남군을 마치 죄 없는 병사나 학살해대는 군대로 만들었고 미군은 그런 병사들에 맞서 싸우는 훌륭한 군대로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한 미군을 침략자 미군을 승리한 영웅으로 만들어버리기 까지 했다. 이런 모든 점을 봤을 때 영화 위 워 솔져스는 1970,80년대 나왔던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풀 메탈 자켓>과 같은 베트남 전 반전 영화들이 만든 기존의 반전성향을 없애고 미국식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만든 미군 선전용 영화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풀 메탈 자켓>이나 <플래툰>과 같은 영화들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다뤘다. 위 워 솔저스는 이런 반전 성향을 희석시켜야 했고 따라서 영화 위 워 솔저스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성향을 희석시키기위해 1965년에 있었던 미군이 승리한 이아드랑 전투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맞붙었던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사자 측면에서 봐도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이 죽었고 북베트남군은 17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아드랑 전투는 베트남 전쟁에서 대규모의 미군과 북베트남군 처음으로 맞붙었던 전투였을 뿐이다. 미군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역사책에서 보면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의 승리자는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승리다. 따라서 이아드랑 전투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자면 미군이 승리한 위대한 전투가 아니라 호치민과 공산당이 이끄는 북베트남 군대가 최신식 군대와 야만적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하여 최신식 무기가 베트남 인민의 저항을 꺽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투일 것이다.



영화 점수는 10점 만점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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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핵소 고지
멜 깁슨 감독, 샘 워싱턴 외 출연 / 기타 제작사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1년전 영화보고 남긴 영화평이다.)

집에서 영화 핵소고지를 봤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연합국 국민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전쟁 영웅은 전투에서 총을 들고 적진을 돌파하여 전략적으로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거나 국가를 위해 적을 많이 사살한 공로로 훈장을 받은 군인들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핵소고지는 전장에서 총들고 적들을 제압한 군인들 뿐만 아니라 주인공 도스처럼 적진 한 가운데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부상당한 동료 병사들을 치료하고 병원으로 이송시켰던 의무병들도 진정한 영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화 핵소고지를 보며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주인공 도스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난 과연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또는 총을 들지 않고 오직 아군동료들과 부상당한 이들을 위해 내 목숨 걸고 그들을 끝까지 살려보내고자 노력 할 수 있었을까?'와 같은 질문들이 내 머리속에서 끊이질 않았으나 아마 자신이 살기 위해 총을 들고 전장속에서 부상당한 이들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주인공 도스처럼 자신의 목숨보다 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하여 수많은 이의 목숨을 구해내기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주인공 도스는 수많은 아군동료와 심지어 적인 일본군 부상병들까지 살려보냈고 적들에게 포위당한 그 상황에서도 살인을 하지 않았다.
주인공 도스의 이와 같은 희생정신을 보여준 영화 핵소고지를 보기를 잘한것 같다.
오랜만에 전쟁영화 중에서 정말 감동적이고 괜찮은 영화를 본 것 같다.

전쟁영화고 배경이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사실상 마지막 결전인 오키나와 전투가 배경이어서[1]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좀 낫선 주제 일 수는 있으나 안본사람은 꼭 한번 보기를 바란다.

나한테 있어서 이 영화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명작중에 하나인것 같다.

[1] 추가적으로 좀 더 얘기하자면 사실 오키나와 전투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중에 하나다. 전황적으론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추축국으로서 연합국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끈질기게 싸운 일본군의 저항에 지친 미군은 오키나와를 수많은 희생 끝에 점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우리 광복군이 대일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민족사적으론 오키나와에도 일본군이 만든 위안부 위안소가 있었고 수많은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본의 군사기지 건설에 동원되었으며 조선에서 학도병으로 끌려온 많은 징용병들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희생당했던 역사가 있다.

따라서 오키나와는 우리 역사에서 잊어선 안될 역사이기도 하다.

영화 점수는 10점 만점에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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