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더 마인호프
울리 에델 감독, 마르티나 게덱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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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독일에서 제작한 영화 <바더 마인호프(The Baader Meinhof Complex)>를 봤다소위 68혁명이라고 하는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구의 젊은이들은 기존의 세계질서와 가치관에 저항했다이런 저항은 무장투쟁이라는 급진적인 혹은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도 표출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와 일본의 적군파가 그러했다고 할 수 있으며이런 움직임은 역으로 대중의 반발을 사기도 했었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 포스터)

 

영화 바더 마인호프는 1960년대와 70년대 서독 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급진적인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영화의 시작은 이란의 왕족 샤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일어난 집회부터 다루고 있다이 집회에서 시작된 충돌을 시작으로 68혁명이라는 흐름 속에서 급진적인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성 해방과 과거사 청산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이들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걸고 자신들 나름의 투쟁에 나섰지만투쟁의 형태가 테러를 동반한 전략으로 흐른다.

 

물론 이들에게는 무장투쟁을 행할 때자신들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었으며최대한 그것을 준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예를 들면 독일에 있는 몇몇 은행을 습격하여 자금을 마련하는데이것은 과거 스탈린이 은행 강도 시절 부르주아 기관을 공격한다는 명분과 비슷했다서독에 있는 미군기지에 이들은 폭탄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데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는 닉슨 정부의 제국주의적 만행의 잔혹함을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들은 이스라엘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독일 언론사에 폭탄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데이것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하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에 의거한 것이었다.

(바더 마인호프의 로고, 로고로 MP5 기관단총을 삽입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들의 무장투쟁 노선이 불필요한 희생을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누군가는 지적할 것이다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테러리스트 조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까나는 이러한 질문을 영화 <바더 마인호프>가 최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하지 않은 채던졌다고 생각한다나중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는 이들이 영화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접했을 때나는 이 영화가 바더 마인호프 조직을 다면적으로 크게 접근했다는 것을 격렬히 느꼈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던 독일의 68혁명 세대, 이들은 실제로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이름을 외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이러한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했다이런 과정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이 존재했다특히나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많은 이들이 미국의 폭력성에 큰 분노를 느꼈음을 보여준다. 68운동의 지도자인 한 사람은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과 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반제국주의 투사인 호치민의 이름을 외친다영화상에서 수많은 독일의 젊은이들이 베트콩의 깃발과 붉은 깃발을 들며이에 동조한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바더 마인호프 일행은 요르단에 가서 팔레스타인 투사들에게 군사훈련을 받는다이 두 가지 국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대미제국주의 문제는 바더 마인호프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무장투쟁에 나섰던 바더 마인호프,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다. 영화 상에서 이들은 주로 자신들이 적으로 선정한 기관을 공격하거나 관련 인사들을 살해했다. 즉 무차별 민간인 살상을 추구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를 단순한 테러조직으로만 보지 않는다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사회주의에 대한 순수한 믿음도 제법 잘 보여준다누군가는 이들을 보고 테러리스트라고 욕하겠으나나는 이들의 순수한 혁명정신도 숭고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멈출 수가 없었다물론 이들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불행이었을 수도 있고불필요한 희생은 당연히 안타깝다그러나 영화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지적하는 무관심’ 그러니까 자유라는 이름하에 당시 팔레스타인과 베트남에서 저질러진 범죄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대다수의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 옹호로 나가지 않았는가이러한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멈출 수가 없었다.

(68혁명 당시 휩쓴 시위현장, 당시 서구사회의 젊은이들은 80년대 한국 학생운동처럼 격렬히 저항했었다.)

 

영화는 시청자에게 바더 마인호프의 양면을 보여줌으로써이들에 대한 해석을 숙제로 남긴다나는 이 영화가 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지혹은 부정적으로 생각할 지 이 두 갈래에서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은 교훈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즉 영화는 한 가지 판단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나는 이점이 아주 긍정적으로 다가온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그들이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졌던 이상과 생각을 함부로 욕할 수 있을까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오랜만에 정말 훌륭한 영화한편 감상했다안본 사람이 있다면이 영화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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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이자 감독인 마틴 쉰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Vietnam American Holocaust’의 리뷰입니다.)

 

베트남 전쟁은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다. 1960년대부터 1975년까지 대략 15년 동안 이 참혹하고도 잔인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은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전쟁을 수행했다. 물론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미국의 베트남 문제 개입은 대략 30년이나 된다. 베트남 전쟁은 참으로 참혹한 전쟁이자, 추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할 거 없이 대량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사망자는 급증했으며, 사실상 수백만이 죽었다.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근무하며 이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를 맺은 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340만 명의 베트남인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한 마디로 이 전쟁 자체가 미국의 일방적인 베트남인 학살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을 일으키고 행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얻지 못한 채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 내용의 핵심이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된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베트남의 역사는 2천 년 동안 중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 이들은 939년에 중국의 지배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으며, 그 이후에도 중국의 침략에 저항해왔다. 그러던 19세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했고,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면서 베트남의 자원을 갈취해가고, 베트남인들을 차별했으며 폭압적인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던 1940년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했고, 일본은 기존에 있던 프랑스 식민통치 기반을 유지해나가며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 지배했다. 이 기간에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민이었고, 그 베트민의 지도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인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마커스 가비에게 감명 받았었고,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에도 나름의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후 1920년대 모스크바로가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그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놀랍게도 그의 독립선언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비슷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맹국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반대 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를 이어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반공주의적인 인물로써, 베트남의 문제를 냉전의 논리로 접근했다. 그 결과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정책을 옹호했다.

 

베트남 독립을 선포했던 호치민은 1946년 항구도시 하이퐁이 프랑스군의 포격을 받자, 독립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를 몰아냈다. 당시 프랑스는 자신들의 치르고 있던 식민지 전쟁을 냉전의 흐름에 빚대어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포장했고,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베트남 남부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트루먼은 프랑스를 지원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이 개최되었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으로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분단에는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여기서 미국은 바오다이가 통치하던 남베트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남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했고, 80%가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 판단하여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그 결과 남베트남에는 응오딘지엠이 통치하는 무자비한 체제가 들어섰고, 민중들은 이에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남베트남에 창설된 것이 바로 베트콩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던 미국은 존 F. 케네디 대통령때 미군사고문단을 보냈다. 이 숫자는 196316,000명으로 증가했다. 다큐멘터리에선 이를 프랑스 특수부대에서 미국의 그린베레로 바뀐 것이라 표현한다.

 

불교도와 학생 그리고 민중의 시위로 혼란스럽던 남베트남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걸 우려한 미국의 CIA는 응오딘지엠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권을 남베트남에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이 무너질 거라 걱정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면적인 침략을 게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전개과정이었으며, 명백히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사실 1964년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이었다. 이들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북베트남 영해에 구축함을 포함한 함정들을 배치했고,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 침공을 정당화했다. 19653월에는 미지상군이 상륙했고, 그 숫자는 해가 지날수록 더 늘어났다. 미 지상군이 참전하면서 베트남 전쟁의 전개양상은 참으로 추악해지고 잔혹해졌다. 특히나 수색과 섬멸 작전이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자유 사격 지대에선 보이는 생명체는 모든 죽여도 됐다고 한다. 또한 베트콩이라는 의심만 가지고 증거 없이 죽일 수 있었다.

 

사살당한 민간인은 적군으로 바디 카운트가 되었으며, 그러한 위조와 조작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100~150만 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수치에 민간인들도 적잖게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미라이 학살도 사실은 그런 날조된 바디 카운트로 군에 보고되었으며, 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그저 베트콩 사살로 군 기록에 남아있었다. 이 과정에서의 부녀자 강간이나 아동사살이 빈번히 일어났고, 주민들이 살던 마을은 죄다 불에 태워졌다. 문제는 이러고 나면 민간인들이 거주할 곳이 사라졌고, 식량과 집 그리고 가족을 잃은 주민들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베트콩을 지지한 이유도 그러했다. 미국이 전개한 피닉스 작전의 경우도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몰아 학살한 행위였다.

 

베트남 전쟁에선 미국은 대규모의 헬리콥터 작전을 전개했다. 수많은 헬리콥터가 베트남에 배치되었고, 이것은 미국이 화력 면에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을 압도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그러나 이 헬리콥터가 수행한 작전에서도 적잖은 민간인들이 죽었다고 다큐멘터리는 얘기한다. 헬리콥터가 발사한 기관총과 건쉽 그리고 미사일 등은 베트콩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물론 이것도 적군 사살로 얼마든지 군 자료에는 표기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야기한건 당연하게도 융단폭격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략 750만 톤에서 800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남북베트남 할 거 없이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 폭격을 계획했던 인물은 바로 로버트 맥나마라와 커티스 르메이 같은 미국의 관료들이었다. 특히나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선 이런 융단 폭격으로 캄보디아인 80만 명이 폴포트의 킬링필드 이전에 학살당했다고 다큐멘터리는 얘기한다. 한마디로 미국도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에 투하한 폭탄 800만 톤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640개와 맞먹는다고 한다. 커티스 르메이가 자주 표현하던 대로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려고 있다. 다큐멘터리 또한 이러한 폭격에는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시설들 대다수는 민간 시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이러한 민간인 학살 행위는 베트남인들이 미국에 저항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이러한 맹목적인 무차별 폭격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였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그 피해자 대다수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화확무기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고엽제였다. 이 고엽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에 살포되었고, 400만 명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에 노출되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엽제로 최소 수십만 명이 사망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2008년 기준으로 최소 4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특히나 고엽제에 노출되었던 베트남인들 사이에선 기형아가 무수히 많이 태어났으며, 베트남의 국토 또한 이 고엽제로 고통을 받았다. 이 고엽제 투하 또한 미국의 융단 폭격과 더불어 전쟁범죄였다.

 

마틴 쉰 감독이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사례를 들어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행위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 미국이 300만에서 500만을 학살한 책임이 막중하다고도 설명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호치민과 베트남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침략자들과 압제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을 베트남에게 자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의 베트남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다큐멘터리에선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도 보여준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에 침략을 자행한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연설이 다큐멘터리에서 나온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이 계속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본인들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라!”라고 지껄인다. 나는 이러한 존슨 대통령의 연설에 분노를 참기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이 본인들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 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본인들이 그 나라의 독립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아주 뻔뻔스럽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함과 파렴치함은 이처럼 침략전쟁을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5년 뒤인 2008년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미국의 또 다른 침략전쟁이 이라크 전쟁이 베트남 전쟁과 같은 선상에서 많이 오버랩 시키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두 전쟁은 미국의 침략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고, 수많은 사망자가 미국에 의해 나왔다는 점도 일치한다. 거기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개입한 것 또한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과 매우 비슷하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3~5백만을 죽게 만들었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또 다른 백만 명의 이라크인을 학살했다고 규탄한다. 정말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미국의 추악하고 부도덕한 제국주의다.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미국의 학살극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감상하길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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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소치 동계 올림픽 준비와 개최로 바쁘던 2013년과 2014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복잡했다.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선 반러시아 시위가 확산되었고, 2014년에는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에서 대학교 1학년이던 나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점차 러시아와 NATO 간의 긴장 상황으로 가는 것을 직감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모던워페어 시리즈의 내용이 단순히 허구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친누나와 함께 부모님이 지원해준 덕분에 대략 1달간 서유럽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던 도중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러시아가 쏜 미사일로 인해 말레이시아 항공이 격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에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나와 누나는 이런 소식을 들었기에 비행기에 오르기가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물론 무사히 귀국했으니,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점차 소식이 뜸해진 것은 중동에서 ISIS라는 테러 조직이 등장하면서 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는 점차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심을 덜 가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당시 서방의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의 시위대를 옹호하고, 크림반도 문제에 개입했다고 알려진 러시아에 대해 비난하기 일쑤였다. 물론 이것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편향된 보도는 우크라이나는 착한 놈 그리고 러시아는 나쁜 놈으로 만드는 색깔 프레임을 형성했다. 당시 국제 정세를 잘 모르던 나는 이런 편향된 보도에 휩쓸러 갔던 것 같다.

 

2013년에서 2014년 당시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어나자 한국 언론이 보도하던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친 서방 반러시아의 흐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87년 민주화 이후 탄생했다던 자칭 진보 언론 한겨레에서도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만 대변하는 보도들만 늘어놓았었다. 경향신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동아일보 같은 어용매체들 또한 이 입장을 100% 대변했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사태의 숨겨지고 혹은 알려지지 않은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플래툰‘74일생그리고 ‘JFK’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저자이기도한 올리버 스톤(Oliver Stone)2016년 다큐멘터리 하나를 만들었다. 그 다큐멘터리가 바로 Ukraine On Fire. 이 다큐멘터리는 2013년부터 2014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우크라이나 사태를 중심적으로 파헤친다. 당시 우리가 서방과 국내의 언론 매체를 통해 전파되던 우크라이나 사태의 이면에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그 NATO의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이 존재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미국은 반러시아 시위를 지원했고, 미국과 서방의 지원은 서구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과 재벌 그리고 권력자들의 야합의 산물이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친서방적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를 후원해주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내에서의 친미적인 쿠데타를 획책하기도 했으며, 러시아를 압박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 사태를 이용했다. 유럽 연합의 통합을 지지하는 유로마이단의 시위는 즉 이런 무대에서 진행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부터 반소련 반공주의 그리고 반러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대대적인 참여도 있었지만, 이것을 자신들의 패권정책으로 이용한 것은 미국이었다. 실제로 유로마이단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 중에는 미국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은 이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실제로 미국정부와의 정치적인 커넥션이 강하게 있었다.

 

2013년 말에 시작된 유로마이단 시위는 처음에 평화적이었는데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를 거치면서 폭력적으로 변했다. 시위가 격해지면서 이를 진압하는 경찰측들의 대응이 강경해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사전에 계획된 각본대로 폭력 사태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은 네오나치와의 커넥션이 있거나 이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즉 유로마이단 시위에서 폭력사태를 주도했던 이들은 네오나치였고, 이들은 이후 돈바스 내전이 터졌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일환으로 반군을 진압하는 군대로 활동했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유로마이단 시위의 희생자를 일부러 만들어내고자 했었다. 당연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서방의 언론은 외면했고, 오직 우크라이나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성만 부각시켰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방의 언론 플레이가 한몫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우크라이나와 서방 그리고 나치주의자들의 커넥션은 20세기부터 있어왔던 사실을 다큐멘터리에서 강조한다. 1930년대부터 반소련적인 감정이 강했던 우크라이나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침략자 독일군은 해방자로 맞이했다. 이들 중에는 나치를 환영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가 있었는데, 스테판 반데라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미화하는 스테판 반데라는 대학살자이자 파시스트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반소련 투쟁을 해오던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OUN(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이라는 조직을 이끌었다. 스테판 반데라와 이 조직은 나치에게 적극 협력했고, 나치의 인종정책에도 협력하여 폴란드인이나 집시 유대인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종청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나 스테판 반데라는 폴란드인 집단 인종청소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난 뒤,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체제에 돌입했는데, 여기서 미국은 소련군의 진격을 피해 도망친 스테판 반데라와 그의 조직 OUN을 반공 반소련 조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선 유대인 학살을 포함한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재판했지만,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은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한 OUN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전쟁범죄 사실을 묵과했다. 미국의 CIA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이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반공투쟁을 벌였고, 이런 반공투쟁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관계를 들며 감독 올리버 스톤은 냉전시기 미국이 인도네시아와 쿠바, 칠레, 이란 등과 같은 무수히 많은 나라에서 어떠한 공작행위를 했는지를 암시해준다.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영토로 합병됐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 당시, 서방의 언론과 한국의 언론이 보였던 태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것이었다. 즉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공했다는 것이 당시 서방과 한국 언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수시간에 걸쳐 인터뷰 했던 올리버 스톤은 푸틴의 증언을 들려주는데, 푸틴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크림반도를 침공한 적이 없으며, 어떠한 총성도 어떠한 전투행위도 없었다.

 

거기다 크림반도의 경우 그 지역 국민의 최소 90%이상이 러시아로의 통합을 원한 결과였다. 러시아가 이 투표에 부정선거로써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크림반도는 예전부터 러시아로의 통합을 원하던 지역이었다. 일각에서는 크림반도에 러시아 해군이 있는 것을 예시로 드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웅적인 전투가 있었던 세바스토폴은 소련 연방이 해체 된 이후에도 계속 러시아령으로 있었던 지역이었다. 즉 서방의 언론은 이러한 사실관계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왜곡했다는 것이다.

 

2014년에 시작된 돈바스 내전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러시아가 먼저 침공한 것이 아니었다. 도네츠크를 포함한 동부 우크라이나의 경우 그 지역 국민들이 러시아로부터의 통합을 원했다. 2014년 도네츠크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 사회주의 공화국과 같은 친러성향의 국가 내지는 공동체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는데, 우크라이나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먼저 벌였다. 이것이 바로 돈바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즉 양측의 교전에 있어서 먼저 시작한 측은 바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였다.

 

그 외에도 올리버 스톤 감독은 이 90분짜리 다큐멘터리에서 우크라이나의 친미 친서방 친네오나치적 성향의 시위대가 어떠한 커넥션이 있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밝혀낸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성향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소련 연방 해체 이후 어떻게 성장했는지도 아주 명확하게 얘기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반공주의자들은 올리버 스톤을 친러시아적 빨갱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리버 스톤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유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정치적인 사건의 다른 이면을 파악하고자 만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런점에서 올리버 스톤이 정말로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어 자막을 패치한 버전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 또한 이 다큐멘터리를 100% 이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70~80%는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재 넷플릭스에는 이 다큐멘터리와 매우 상반된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다. 역시 넷플릭스는 반공주의에서 벗어난 작품은 잘 소개 안하려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단비와도 같은 상식을 알려주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그의 객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시각에 감탄했다. 영어가 좀 되는 이들에게 이 위대한 역작의 감상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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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al of the Chicago 7: The Screenplay (Paperback)
Beto / Simon & Schuster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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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영화 포스터)

 

전 세계에 있어서 1968년은 혁명의 해였다그해 1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는 전 세계를 혁명과 저항의 길로 인도했다프랑스 파리에선 5월 혁명이라 하여 기존의 보수주의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체게바라와 마오쩌둥 그리고 호치민의 초상화가 곳곳에 등장했다이것은 단순히 프랑스뿐만이 아니었다미국과 영국서독이탈리아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네덜란드일본 등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에선 반전운동과 더불어 대통령 선거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구정공세로 거짓말이 다 드러난 린든존슨 정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그 이유는 미국 내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반전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확산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바로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암살당하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온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또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이 과정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리게 되었다시카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정치적 분파를 막론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이게 되었다그러나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시카고 시장이 집회를 불허한 것이었다결국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체포되었고평화롭게 진행하고자 했던 시위는 경찰과 주방위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해산됐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구정공세의 여파로 물러나게 된 이후 공화당 출신 대통령 닉슨은 반전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본보기 삼아 법정에 세우려 했다닉슨 정부와 재판을 담당한 법정은 이미 자신들만의 결론을 낸 상태에서 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8명을 불법시위 주동 및 내란선동으로 구속시키고자 했다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구속된 이들은 서로가 소속이 달랐다한쪽은 1960년대 문화운동 혹은 혁명을 주장하던 국제청년당 즉 히피(Hippie)계열이었고다른 한쪽은 민주사회를 위한 청년학생 모임(SDS) 계열이었으며 또 다른 한쪽은 급진적인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하는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계열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소속 및 정치성향의 차이는 재판을 계획한 측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히피, 이들은 프리섹스, 마약, 너덜너덜한 복장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1960년대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을 담당한 측은 이 사건을 내란음모와 폭력시위 선동으로 몰기 위해 온갖 조작과 음해를 계획했다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재판 과정에서도 끊이질 않았다이들의 치졸한 행위는 특히나 급진적 성향이 강한 흑표당 대표에게 가장 많았다재판 시작부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주지 않고, “변호사가 없는 피고는 발언할 수 없다와 같은 황당무계한 짓도 행한다즉 헌법에 보장된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더 나아가 조작된 경찰 살해사건으로 몰아가기까지 했으며심지어 검사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무자비한 폭력을 재판에서 자행하기 까지 한다이것은 바로 재판을 담당한 판사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톰 헤이든, 영화상에 나오는 톰 헤이든은 SDS의 대표이다. 그는 나중에 4,572명의 미군 전사자 명단을 마지막 공판에서 읽어 내려간다.)

 

결국 흑인 인권 운동가인 프레드 햄프턴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장이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 등을 항의하며 법정에서 고함을 질렀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았고이후 슐츠 검사는 그런 실의 모습이 배심원단이 피고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할 것을 우려하여 실을 재판에서 제외시킬 것을 판사에게 요구해 관철시킴으로써재판은 시카고 8의 재판에서 시카고 7의 재판으로 바뀌게 된다이렇게 해서 영화 제목이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8이 아닌 7인 것이다.

(반전운동을 진압하는 경찰과 최루탄 때문에 피하고 있는 반전 시위대)

 

그 외의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신들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입증할 기회를 재판 담당판사는 주지 않는다이것은 바로 이 재판 자체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사실 이들을 폭동 혹은 내란선동으로 몰고 가려고 했던 사법 측은 이들이 폭동을 선동하고 계획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그래서 이들은 정보 및 자료조작과 그들의 녹취된 연설에서의 몇몇 단어들을 꼬투리 잡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어 가려 했다애초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시위는 경찰과 주방위군이 정부의 명령을 받고 폭력을 부추긴 사건이었기에이들의 조작은 갈수록 더 사악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시카고 재판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 당시 사건 담당 판사였던 율리우스 호프먼은 어떻게든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

 

몇 개월간의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SDS 래니 데이비스는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명단을 매일같이 작성해 나갔다그렇게 해서 총 4,752명의 미군 장병 명단을 확보했고, “전 세계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메아리 속에서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SDS의 지도부인 헤이든은 최후변론 과정에서 재판 시작부터 그날까지 베트남에서 전사한 4,752명의 미군 명단을 줄줄이 읽어 나간다.

(극증에서 나오는 재판 당시 모습)

 

영화를 보면서 국내에서 개봉했던 영화 ‘1987’과 변호인이 꽤나 오버랩 됐다배경은 다르지만 국가의 조작과 각본에 의해서 전개된 재판이라는 점그리고 안보라는 핑계로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점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영화상에선 전 세계가 보고 있다(Whole World is Watching)”라는 명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영화에서 얘기하는 전 세계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시카고에서 열린 재판을 생각할 것이다물론 맞는 말이다이 형식재판은 반전운동을 하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사건 담당 검사 리처드 슐츠, 그는 반전 시위대를 싫어하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이 재판 자체가 무리수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본분을 다하면서도 어떤면에선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더 큰 그림을 보자면 이것은 당시 이런 재판을 주도해가며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고 있던 미국 그 자체에 해당되는 얘기이기도 하다영화상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는 이들이 정파를 떠나 민주당 전당대회에 모였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이 자행하고 있던 부도덕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그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었다이런 점에서 생각해볼때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미국이 저지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과 그 자체의 범죄와 부도덕함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히피와 흑표당등과 같은 1960년대에 대해 더 얘기하겠다. 1960년대의 미국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혁명과 저항의 시대였다당시 여성운동을 하던 이들은 보수적인 성적 억압에 맞서 자유연애를 주장했고흑인인권운동을 하던 이들은 말콤X나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을 받아 더 나은 권리와 평등을 주장했다그 외에도 미소냉전에서 전쟁의 무서움과 부도덕함을 알게 된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이러한 변화가 미국사회에서 일어났다영화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꽤나 잘 표현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실화를 한 작품이기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많이 반영된 것도 보였다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운동과 사회 변혁 그리고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는 것이 왜 필요한지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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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전투 : 3부작 '역사의 멈춰진 미래로부터' (3disc)
지니어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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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전투 감상평 : 노동자 민중 권력의 투쟁사를 보며

라틴 아메리카의 근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 처럼 여러모로 다이나믹하다. 슬픈일도 많았고, 믿기 힘들일도 많았으며, 희망찬 일도 있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하다 그린베레가 이끄는 토벌대에 체포되어 목숨을 잃은 체게바라는 68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서구의 젊은이들은 마오쩌둥과 호치민 그리고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체게바라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확장이 멈추는 것 처럼 보였다. 1959년에 혁명이 성공한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정치공작과 경제제재에 시달렸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CIA의 개입은 더 극심해졌다. 그러던 1970년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는 세계적으로 놀랄 일이 일어났다. 바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영화 칠레 전투는 총 3부작으로 되어있다. 영화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당선되는 시기부터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집권기 3년 동안 노동자 민중이 어떠한 힘을 발휘했는지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옌데 정권은 소위 민주적인 의회제도를 기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가고자 했다. 특히나 미국 독점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던 칠레 구리광산에 대한 국유화 및 교육과 의료 그리고 주거등의 무상복지 정책 실현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례는 그 당시 기준으로 없었다. 영화 초반에는 당시 칠레의 선거 분위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들은 김칫국부터 마시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최종적인 개표결과 좌파의 승리였다.

아옌데 집권 3년 칠레는 참으로 많은 조직들이 활동했다. 당장 좌파만 보더라도 마오주의 성향 단체부터, 사회당, 공산당 그외의 좌파단체가 우후죽순 처럼 퍼져있었다. 우익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부터, 아예 나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파시스트들 그리고 아옌데와 우익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는 기독민주당 등이 있었다. 즉 이것은 다양한 세력들이 칠레에 있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아옌데 정부를 반대했던 우익들의 논리는 확실했다. 사회주의자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가 혼란 스러워졌고, 사회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과 사회의 마비를 초래하는 이유의 대다수는 바로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우익들에게 있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권 초기부터 칠레에선 CIA의 지원을 받은 정치공작과 테러리즘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72년에 있던 어용운수노조의 대대적인 파업도 그것의 연장선상이었다.

우익들과 어용노조는 이런 혼란을 야기시킴으로써 아옌데 정부를 압박했지만, 민중과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왜일까?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사회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왜 아옌데를 선택한 것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아옌데 정부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착취받고 억압받아온 민중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칠레의 일반인민들은 아옌데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이들 대다수는 ˝아옌데가 집권한 이후 경제가 어려워도 우리를 위한 정책을 했고,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이 아옌데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 민중권력은 결국 무너졌다. 그 이유는 바로 닉슨 정부가 계획한 쿠데타 때문이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 세력은 9월 11일에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의 지원을 받는 군대로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아옌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닉슨 정부가 쿠데타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해가며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견딜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이유가 어찌됐든 그들이 칠레에서 저지른 짓은 명백한 테러리즘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인 3부는 제목처럼 칠레 ‘민중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민중가요인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처럼 단결한 민중의 힘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위대했다. 이들의 단결한 힘은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전까지 제국주의와 우익들의 온갖 공작과 음해 그리고 테러리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했다. 영화 보는 내내 이러한 모습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특히 민중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아옌데의 연설은 감동 그 자체다.

영화에서 아옌데 정권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능동적이다. 아옌데 또한 민중들에게 능동적 참여를 호소하여 제국주의와 우익들의 거짓과 왜곡에 맞서 투쟁한다. 사회주의가 왜 옳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았을 때 민중이 가지는 힘과 위력이 어떤 것인지,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단결했을 때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영화상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최근들어 칠레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2019년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힘을 얻었고, 올해 10월에는 신자유주의의 잔재와도 같은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다. 또한 아옌데의 유산이 다시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칠레 전투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생생히 기록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단결한 민중의 힘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무너진 경험이 있었더라도 말이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를 봤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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