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된 미국의 독립 혁명
1776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을 비롯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은 영국 당국에 맞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독립을 선포했고,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대략 150년간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렌치-인디언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 원주민 연합에게 영국이 밀렸지만, 나중가서 전세를 역전시킨 영국이 승리했다.)
1763년 7년간 전개되었던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유럽에서도 영국과 라이벌 위치에 있던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 시기에도 북미 대륙에서 영국과 대립했는데, 그게 결국 프랑스 인디언 전쟁으로 확산된 것이다. 프랑스 인디언 전쟁 이후 프랑스는 더 이상 북미 대륙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말이 좋아 승리한 것이지 대략 7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받았던 경제적인 타격이 적잖았다. 따라서 프랑스 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있는 식민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했고, 노골적으로 식민지 문제에 직접적으로 간섭했다. 영국은 전쟁으로 인한 부채 탕감을 위해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산 설탕에 수입 관세를 부과했던 설탕법이나, 식민지에서 지폐 발행을 금지하는 통화법 영국산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법 등이 있다. 특히나 타운센드 법은 식민지 미국인들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불만을 샀다.
(보스턴 학살 이 집회에서 영국군의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당국은 영국 정규군을 식민지에다 영구 주둔시켰고, 1765년에는 반란법을 만들어 식민지인들에게 군대 주둔에 필요한 숙식을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밀수 업자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영국 함대가 아메리카 근해를 순항하도록 했으며 식민지에 임명된 관리가 대리인을 보내는 대신 직접 현지로 가서 근무하도록 강제했으며, 급속히 번창하는 영국 기업과 경쟁할 수 없도록 식민지의 제조업을 영국 당국이 규제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영국 당국의 가혹한 조치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당시 배에 올라간 사람들은 원주민으로 분장하고 영국에서 가지고 온 차를 바다에 던졌다.)
그 결과 영국 당국의 가혹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 1770년에는 항구도시 보스턴에서 항의 집회를 하던 5명이 영국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 일어났고, 1773년에는 영국 정부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수입한 차를 던지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일어났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은 더욱 엄격한 법을 새로 제정하고, 보스턴 항을 폐쇄했으며 식민 정부를 해체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벙커힐 전투 기념탑. 지난 11월 필자가 미국여행 갔을 때 보스턴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미군은 후퇴하면서 전투에서 패했지만, 사상자는 영국측이 더 많이 나왔다.)
영국 정부의 가혹한 통치는 식민지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켰고, 토마스 페인이 썼다는 상식(Common Sense)은 이를 부추겼다. 1774년 식민지인들은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발족했고, 1775년 렉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에서 식민지 군대와 영국 군대 간에 최초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 이후 대륙회의에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하고 토마스 제프슨의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이틀 후에 공표했다. 그게 바로 1776년 7월 4일이었고, 이로써 소위 미국의 독립 혁명이라고 불리는 독립 전쟁(American Independence War)가 시작된 것이다.
(요크타운 전투는 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다.)
영국이 전쟁에서 승산이 가장 컸던 때는 1776년부터 1778년 초까지 계속된 전쟁의 두 번째 국면에서였다. 하지만 영국군은 트렌턴(Trenton), 프린스턴(Princeton)등의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했고, 1777년 뉴욕의 새라토가에서 벌어진 새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도 대패했다. 또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프랑스 군주정과 동맹을 협상했고,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남부로 옮겨간 전쟁에서 영국은 연전연승을 거뒀지만, 대규모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은 미국 측 대륙군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물자와 증원 부대를 차단하고 있는 틈을 타 1781년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83년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명실상부 독립 국가가 되었다.
(미국 제1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 같은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들을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하여 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며, 정부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의 동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언제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이러한 목적들을 깨뜨린다면, 그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 민중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의 개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그리고 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말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여성들을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m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겠으나, 여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에 숨어 있는 진실은 식민지의 신흥 세력들에게 영국을 격퇴하기 위한 지지가 필요했다는 것과 동시에 재산과 권력에 관한 기존의 체제가 심하게 붕괴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식민지 관리로서 영국을 위해 봉사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어떤 인물인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포스터. 이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들은 결국 부르주아 계급이자 지배 계급이었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저서인 미국민중사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미국 건국의 아버즈들을 둘러싼 신화는 지속되고 있다. “한 역사가(버나드 베일린 Bernard Bailyn)”가 최근에 한 말대로 “국가 지도자들에게 책임 있고 인도적인 권력 행사를 요구하는 정치체제의 창설과 특권의 파괴가 그들의 가장 숭고한 열망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아메리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베일린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헌명하고 공명정대한 정부를 위한 기본적 규범을 알고 있었다.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 간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아무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기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훌륭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 즉 당시 지배세력 간의 균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베일린이 말하는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과 마찬가지로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민의 절반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선언서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헌법에서도 부재했으며 새로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초기 미국 여성들이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