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호황과 경제 대공황

(1920년대 당시 뉴욕)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전쟁을 계기로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경제 호황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유럽과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 미국은 전시에 돌렸던 산업 시설과 같은 기존 인프라가 고스란히 유지가 된 상태에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의 뉴욕 타임즈 스퀘어)

 

1920년대 미국은 소위 ‘풍요와 번영의 시대’라는 말처럼 수요와 공급이 부족하지 않았다. 1920년대를 거치며 미국의 산업 생산은 60%가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3분의 1이나 증가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당시 돈이 있는 미국인들이 파티를 자주 하고 물질적 향락에 심취하여 과잉소비와 낭비를 일삼는다. 이는 1920년대 당시 미국 부르주아 계층의 삶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런 풍요로움 속에서 주식시장에 과잉 투기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 영화화되어 국내에서도 개봉했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이 처럼 1920년대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파티와 과잉소비를 즐겼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가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기술력의 발전이었다. 기술력 발전 결과 그 기술발달로 나온 물질적인 것들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의 발달은 미국인들의 교통을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철, 고무, 유리 제품 공구회사 등의 산업도 활기를 띠게 했다. 가솔린 산업과 도로 건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말엽에는 30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1920년대 미국 사회에선 광고 산업과 영화 소비량이 증가하였고, 신문도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었다. 무엇보다 라디오의 보급을 통해 미국인들은 다른 곳에서도 뉴스를 접함으로써 소식 전달의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1920년대 등장한 신 여성 플래퍼. 1920년이 되서야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정도로 미국 사회는 여성을 억압했었다.)

 

미국 역사에서 1920년대를 표현하는 말 중에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 시대(Jazz Age)’라는 표현이 있었다. 즉 번영과 즐거움의 시대라는 뜻이다. 물론 1920년대 미국사회에선 실업률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와 과잉의 시대’에도 미국 내부의 문제는 많았다. 대표적으로 들자면 여성 문제, 흑인 차별를 비롯한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고질적 문제인 빈부격차의 문제가 그러했다.

 

1920년대 당시 소위 ‘플래퍼(flapper)’ 불리는 신여성이 미국에서 탄생했다. 이들은 다리가 노출되고 몸이 노출되는 비키니를 입었고, 몸을 드러냄으로써 여성적 아름다음을 추구했었다. 이들의 패션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보수주의자와 미국 전통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플래퍼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미국은 그만큼 여성을 성적 혹은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였다. 심지어 미국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이 1920년의 일이었다. 물론 남성들에게 억압당했던 백인 여성들 또한 흑인과 같은 미국내의 유색인종들에겐 차별과 혐오를 보였지만 말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살던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화된 사회에서 살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흑인들은 “자신들이 돌아오면 이전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환영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미국의 흑인들에게 미국사회가 준 것은 극심한 인종차별과 탄압이었다. 1919년엔 귀국한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달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그들이 백인 폭도들에게 살해당해도 신경쓰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흑인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해고시켜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또한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한 혐오나 폭력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KKK와 같은 인종차별 단체가 부활했다. 이들은 비단 남부 뿐만 아니라 북부까지 조직을 확대했고, 1924년에는 단원 수가 450만에 이르기 까지 했다.

(1920~1930년대 당시 뉴욕 노동자들의 삶. 이들은 어떠한 안전 장비 없이 고층 빌딩에서 이런 위험한 식사와 생활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소위 1920년대 미국의 번영은 오직 상층부에만 집중됐다. 대략 600만 가구가 연간 1000달러 이하의 소득을 벌였다. 브루킹즈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상층 0.1%의 가구가 최하층 42%의 총합과 비슷한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매년 약 2만 5000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에 사망하고 10만 명이 평생 장애인이 됐다. 뉴욕 시의 경우 200만 명이 화재 시 비상구가 없는 건물로 신고된 셋집에서 살았다. 즉 이런 빈민층들은 1920년대 번영의 시대에서 소외되었고, 넘치는 공급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할 만한 돈조차 벌지 못했다.

(1929년 검은 화요일을 알리는 뉴스 기사)

(1929년 검은 화요일 당시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1900년부터 1920년까지 대략 1400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다. 1924년 의회는 이들을 제한하는 ‘이민법’을 통과시켰다. 당연히 이 법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같은 백인 이민자들만 선호했다. 동유럽이나 남유럽 그리고 러시아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은 당연히 제한받았다. 특히나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온 이민자는 한 해에 100명을 넘을 정도였다.

(경제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잃은 미국인들)

 

 

1920년대 미국사회는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과잉과 풍요의 시대였으나, 그 이면에는 여성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그리고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아무튼 이런 경제적 호황은 192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하버트 후버는 당당하게 “빈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후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터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위대한 철학자인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했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은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사태가 터지고 만 것이다.

(배급줄을 선 아이들. 경제 대공황은 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경제대공황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으로 들자면 지나친 부동산 투기 열풍, 경제적 다양성의 부재, 그리고 수요를 생각지 않고 공급에만 충실했던 과잉생산체제를 들 수 있다.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라고도 불린 주식시장 붕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5000개가 넘는 은행들과 수천 개의 회사가 도산했다. 도산하지 않은 회사나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1932년에 들어 대략 25%되는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였고, 고용 노동자들 또한 대체로 불완전고용 상태에 있었다. 1933년에는 150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인이 실직했다. 경제 대공황이 실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집값을 낼 수 없어 ‘후버빌(Hooverville)’과 같은 판자촌에서 살아야 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배급줄을 선 시민들)

 

1920년대 자본가들은 과잉과 풍요속에서 사회에서의 빈곤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돌렸었다. 경제 대공황을 겪였던 하버트 후버 또한 대공황의 과정속에서 빈부격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했다. 그러던 1933년 미국에서 한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그가 바로 FDR로 불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미국의 하버트 후버 대통령. 1929년에 당선된 그는 빈곤의 시대 종결을 주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떠한 반성없이, 빈부격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지극히 자본가적인 스텐스를 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선이 되자마자 ‘뉴딜정책(New Deal Policy)’를 내놓았다. 뉴딜정책은 소위 수정 자본주의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하며 전국부흥법, 농업 조정법 테네시 계곡 댐 건설 등을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생기고 경제도 차츰회복세를 보였고 나름 안정을 되찾아 갔다. 이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국가가 경제 문제에 개입해서 민생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갔던 데에 의미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이 정책을 두고 사회주의화를 추구하는 정책이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뉴딜정책은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긴 했지만, 반란을 혁명으로까지 연결되지 않도록 하층계급을 충분히 원조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흑인들은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었고, 뉴딜정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의 “미국이여, 다시 미국다워져라(Let America Be America Again)”라는 시를 보면 잘 나타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그는 1933년에 당선되어 1945년까지 대통령을 했던 인물이다. 미국 최초로 4선까지 했던 그는 경제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펼쳤다.)

 

나는 가난한 백인, 바보 취급을 받아 구석으로 밀려나 있고,

나는 흑인,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지.

나는 인디언, 살던 땅에서 쫓겨났고,

나는 이민자, 내가 찾는 희망에 매달려 있지.

그리고 발견한 것이라곤 그저 똑같이 낡고 어리석은 계획뿐.

동족상잔과 약육강식뿐.

아, 미국이여, 다시 미국다워져라,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그런 나라로.

(후버 댐. 후버 댐은 1930년대 미국 애리조나와 네바다 주 사이에 건설되었다. 미국 뉴딜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다.)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행한 뉴딜정책은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던 미국 경제를 완벽히는 아니지만, 최소한 생명을 연장해주는 호흡기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공산당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뉴딜정책은 기본적인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괴물같은 체제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한 뉴딜정책은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종식시키지 못했다. 그런 경제 대공황을 돌파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은 1930년대의 국제정세였다.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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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참전(WW1 and United States)

('국민 의무에 대한 호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입대를 강요하던 대표적인 포스터다.)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통하여 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열강들은 시장확보라는 명분하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같은 나라에 식민지들을 건설했다. 이 당시 세계 열강으로 거듭났던 국가는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였고, 이들은 수많은 국가들을 식민지화했다. 따라서 나중에서야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과 같은 나라들은 이에 적잖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7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독일을 통일하면서, 독일 제국도 서구 열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나라들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20세기 초 유럽은 상호 경쟁하는 두 개의 거대한 동맹으로 조직되었다. 하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맺은 삼국협상(Triple Entente)고 다른 하나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Triple Alliance)다. 이런 체제는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위협을 시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Franz Ferdinand)이 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했는데, 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동맹국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으며, 심지어 오스만 제국과 아시아의 일본까지 상대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게 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지도)

(독일의 슐리펜 계획)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시기 독일은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을 세워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연합국을 단기간에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독일 제국이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로 진군을 하긴 하였으나, 생각보다 준비를 철저히 했던 프랑스군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 제국군이 독일군을 압박했고, 영국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으로 변모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널리 사용된 기관총)

(탱크, 탱크는 제1차 세계대전때 최초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전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전쟁보다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1000만 명 이상이 죽었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위에서 상술한 산업혁명은 비단 경제적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달만 두고 왔던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으로 발달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량살상을 위한 무기 또한 마찬가지로 대량생산했다. 특히나 전투를 대학살극으로 만든 무기는 바로 기관총(Machine Gun)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분당 몇백 발을 발사하는 기관총은 참호에 배치되어 돌격해오는 보병들을 향해 발사되었고, 기존의 구식전술에 머물러 있던 전략가들은 상대편 진영을 접수하기 위해 기관총이 배치된 전선에 돌격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독일, 영국, 프랑스 할 거 없이 재앙에 가까운 전사자들이 수많은 전투에서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916년 7월에서 11월까지 전개되어 양측 모두 수십만의 병사를 죽게 만든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가 그러했다. 그런 참호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가 바로 장갑으로 덮인 탱크(Tank)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 모두 사용되었던 독가스도 대량의 인명 살상의 원인이었다. 그 외에도 비행기, 잠수함, 기계화된 대형 군함 등과 같은 무기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다.

(솜 전투, 1916년에 있던 솜 전투는 양측 모두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을 묘사한 그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은 표면적으로 중립을 내세웠다. 당시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었다. 중립국 미국은 영국 프랑스와 같은 연합국 측에 많은 물자를 팔았다. 이런 행동은 독일 제국 입장에선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독일은 잠수함 작전을 개시하여 적국과 교역하는 배들을 침몰시켰다. 그 결과 1915년 5월 7일 독일의 유보트(U-Boat)가 1200명의 승객을 수장시킨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Sinking of the RMS Lusitania)’이 일어나기도 했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되어 128명의 미국인이 사망하자, 미국내에선 참전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어쨌든 중립을 표방하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게 그런 불법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러나 전쟁을 지속하던 독일의 잠수함 부대는 지속적으로 미국의 상선을 공격했고,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치머만 전보,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을 참전시키도록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했다.)

 

1917년 4월 6일 마침내 미국은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표면적으로 중립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독일이 비밀리에 멕시코에 보냈던 ‘치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에 있었다. 그 치머만 전보는 독일이 멕시코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보낸 전보였다. 그 전보를 영국이 해독하여 미국에게 알렸는데, 거기에는 미국이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내용이 있었다. 그 전보를 보면 “미국에 대항하여 멕시코와 독일이 손을 잡자는 제안과 19세기 당시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게 해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거기다 그 시기부터 미국은 멕시코와 국경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그 전보는 자국의 팽창을 원하는 미국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유보트의 상선 침몰보다 치머만 전보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병대 포스터)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던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환점이 될 일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편에 서서 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터졌고, 8개월 뒤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러시아는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고자 했고,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Treaty of Brest-Litovsk)’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동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서부전선에 투입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퍼레이드)

 

1917년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해줄만큼의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징병법을 통해 대략 200만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지만, 1918년 봄까지 미군 상당수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래도 적잖은 미군이 1918년에 유럽전선에 투입되었고, 1918년 6월 초 부터는 프랑스군을 도와 파리 근처의 샤토 티에리에서 독일군의 격렬한 공격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미군은 프랑스의 랭스 지역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1918년 9월 26일 아르곤 숲 전투에선 100만 명이 넘는 미군이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아무튼 1918년 중순부터 미군의 지원으로 영국 프랑스 측 연합국은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었고, 1918년 11월 11일 결국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귀국한 병사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자국민에 대한 탄압도 같이 했다. 이는 특히 전쟁에 반대했던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독일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917년 6월 미국의 윌슨 정부는 ‘방첩법(Espionage Act)’ 통과시켜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의도적인 불복종에 항명, 미국 육군이나 해군에서 복무 거부를 야기 또는 시도하거나 미국의 신병모집이나 입대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최고 20년 징역형에 처하도록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방첩법 조항에는 “이 절의 어떤 내용도 정부의 행위나 정책에 대한 논의, 논평, 비판을 제한하거나 한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까지 있었다.

 

이 법이 통과되고 나서 필라델피아에서 찰스 셴크(Charles Schenck)라는 사회주의자가 징병볍과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미국 사회주의자의 아버지 유진 뎁스(Eugene Debs)도 방첩법 위반 죄로 체포됐다. 그 시기 미국에선 “반정부적인 길거리 연설을 막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미국자경순찰대(American Vigilante Patrol)이 생겨 소위 간첩과 정치범들을 만들어 내고, 신고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간첩 혹은 폭도들로 간주받아야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의견은 옳지 않은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이 그 전쟁에 반대한 것은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당시 혁명가 레닌이 그 전쟁을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으로 간주했듯이 미국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리 인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던 혁명가들도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다. 따라서 그들이 반대했던 것은 사회주의자로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저항의 목소리였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백인우월주의자였으며 제국주의자였다. 또한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의 지도교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 혹은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터무니없는 말들을 했다. 다음과 같은 윌슨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럽에 국한된 것이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들과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는 얘기였다. 거기다 미국은 1918년 혁명 러시아에서 백군 반혁명 세력들이 전쟁을 일으키자 사회주의 러시아를 없애기 위해 침략을 자행했고, 기존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식민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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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데브스와 사회주의 운동

 

미제국의 대자본가들편에서 일정부분 다뤘듯이 19세기 미국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과학적, 산업적 그리고 물질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미국의 제임스 록펠러나 엔드류 카네기 J.P 모건과 같은 대자본가 계급이 탄생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1889년에만 보더라도 죽은 철도 노동자가 최소 22천 명을 넘겼다.

(엠마 골드만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다.)

  

당연히 이런 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20세기에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당시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기도 했던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이 그러했다. 그녀는 미서전쟁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잔혹한 스페인에 대한 분노로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끓어 올랐던가! 그러나 전쟁의 연기가 가시고, 죽은 자들이 매장되고,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던 전쟁이 물가와 땅값의 상승이란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즉 가열된 애국심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문득 미국-스페인 전쟁의 원인이 설탕가격이었다는 시실, 그리고 미국 민중들의 목숨과 피와 돈이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몇몇 작가들과 지식인들은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처럼 자본주의 체제를 아주 강력히 비판했다. 대표적으로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소설 정글(The Jungle)이 그러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그 대안으로 주장했던 사상은 사회주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할 방안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예로 들며 이들의 꿈은 헛된 것이라 비웃을지는 몰라도, 당시 그들이 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은 그 이념이 실현됐는지를 떠나서 매우 타당한 이유였다.

(영화 모턴 타임스에서 나온 공장 노동. 찰리 채플린이 출현한 모던 타임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풍자했다. 그 대표적인게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노동이 그러하다.)

 

1930년대 개봉했던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영화 모던 타임스(Modern Times)를 보면 찰리 채플린은 공장에서 기계가 생산하는 것에 맞춰 똑같은 노동을 반복적으로 한다. 그 결과 채플린은 단추만 보게 되면 습관적으로 돌리게 되는데, 당시 기업들은 제조과정을 분업화시켜 노동자들에게 동일 작업을 반복시키며 기계처럼 다루었것을 풍자한 것이다. 실제로 자본가들은 대량생산과 더 많은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기계적인 노동을 시켰다.

(유진 뎁스,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물론 노동자라고 해서 이런 자본가들의 모습에 가만히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인 1890년대에는 해마다 1000건씩 파업이 발생했고, 1904년에만 보더라도 4000건에 이르렀다. 당연히 미국의 법과 군대는 자본가들 편이었지만, 자본가들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적잖은 미국인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1901년에 유진 데브스(Eugene Debs)를 대표로 한 사회주의 정당이 조직되었다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데브스와 그 러닝메이트 에밀 자이델이 나온 선거운동 포스터.)

  

사회주의자 유진 데브스 꿈꿨던 진정한 목표는 사적소유 철폐를 통한 자본주의 체제 전복 그리고 모든 인류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당 후보로 대선에 다섯 번 출마했다. 또한 그가 이끌던 사회당에는 10만 명에 달하는 당원들이 모이기도 했다. 그들은 주로 오클라호마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했다. 그들은 여러 노동 현장에서 자본가들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고, 인종주의에 반대했으며, 남녀 평등을 주장했다. 또한 유진 데브스와 그의 사회당 지지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반전운동에 나섰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들은 워싱턴 DC와 보스턴에서 반전시위에 나섰더가 병사들에게 공격받았고, 많은 인원들이 체포 당하기도 했다. 유진 데브스 또한 1918년 방첩법에 걸려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었다

(미국 공산당, 미국 공산당은 1920년에 창설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제아무리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적색 공포(Red Scare)라 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미국인들에게 퍼뜨렸지만, 사회주의자들을 완벽히 뿌리뽑진 못하였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퍼뜨렸음에도 1920년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이 미국에서 창당되었고, 그들은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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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서전쟁과 제국의 팽창

 

19세기 미국의 역사는 영토 팽창의 역사이기도 하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사들인 루이지애나를 시작으로 1810년대에는 플로리다 1840년대에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현재 미서부 일대까지 확장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저가에 매입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팽창에 나서게 된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 따르면 1798~1895년 사이에 대략 103차례나 미국이 다른 나라의 문제에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도 그러했다.

(알프레드 머핸. 제국주의적 사상을 담은 저서로 미국 각계에 영향을 미친 군인 겸 역사가다.)

미 동부 해안과 인접하다는 지리적인 이점은 물론 풍부한 노동력과 농업에 적합한 기후조건 등을 갖춘 쿠바는 19세기 초부터 미 제국이 눈독을 들여온 곳이었다. 멕시코를 침략하여 그들의 영토를 강탈했던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는 쿠바를 빼앗기 위해 무장게릴라를 침투시키는 등의 공작을 벌이기도 했었다. 1895년 쿠바인들이 스페인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쿠바를 통치하고 싶어 했다. 즉 미국은 쿠바를 독립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닌 지배하고 싶어 했다. 189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 항에서 일어난 폭발로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인 호 침몰로 대략 268명이 죽자 미국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고, 쿠바에 병력을 파견했다. 미서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98년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격침당했다.)

사실 미서전쟁은 이전에 미국이 치렀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그리고 그 이후에 치르게 될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전쟁의 규모도 작았고, 전쟁을 치른 기간도 짧았다. 대략 400명 이상의 미군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총 4개월간 전개되었다. 미서전쟁 당시 미군의 총 사망자가 2500명인데 그중에 2000명 이상이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군 또한 마찬가지여서 사망자 대부분은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일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로 확실히 변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테어도어 루스벨트. 영화 박물관의 살아있다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했던 그는 전형적인 미제국주의자였다.)

미서전쟁 당시 미국 국민들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영화 박물관의 살아있다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미국의 대통령 테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다. 그는 전형적인 전쟁광으로써 “모든 위대하고 훌륭한 민족은 싸우는 민족이었다. 어떠한 평화로운 승리도 전쟁을 통한 최후의 승리만큼 위대하지 않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제국주의자 다운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아주 악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미서전쟁 당시 엘케니 전투에서 흑인 출신 병사들이 스페인 병사들을 격퇴하고 요새를 점령했는데, 그는 흑인들의 공로를 가로챘고, 산후안 전투에서 같이 싸웠던 흑인 병사들을 등지고, 그 전투의 공로를 오직 자신들(백인) 만의 공로로만 치켜세웠다.

(마닐라 만 전투. 미서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했다.)

미서전쟁은 1898년 7월 17일 미군이 산티아고에 있는 총독궁에 성조기를 게양하면서 끝났고, 쿠바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며, 쿠바에 대한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형식적으로 독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미제국주의의 일방적인 쿠바 식민지화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났던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59년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혁명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세울 때 까지 미국의 식민통치는 대략 60년간 지속됐다.

(미서전쟁 당시 흑인 병사들. 그들은 전장에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와 같은 백인들에게 멸시당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서전쟁이 벌어짐과 동시에 미국은 1898년 필리핀을 침공했고, 식민지화했다. 미국의 필리핀 침공이 끝났을 때, 최소 20만 명이 넘는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에 의해 죽었다. 미서전쟁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테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가츠라 테프트 밀약을 일본과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차지하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미국은 19세기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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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원주민과 백인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백인세력들이 원주민 문명에 가하는 위협이 점점 커지자, 원주민들도 이에 저항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의 공격은 주로 백인들의 공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이런 소규모 교전 및 전투가 크게 비화되기도 했는데, 남북전쟁 중에 미네소타 주의 동부 수(Sioux) 부족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운디드니 전장에서 말을 탄 버팔로 빌 대위, 볼드윈 장군, 넬슨 A. 마일즈 대위, 모스와 기타 인물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백인 군대는 서부 원주민들과 여러 전선에서 맞부딪쳤다. 가장 치열하고 장기적인 전투는 몬태나에서 벌어졌는데, 미육군은 당시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 요새(Fort Laranie)와 새로운 광산 중심지를 연결한 보즈먼 도로(Bozeman Trail)를 건설하려던 참이었다. 서부에 있던 수족은 백인 군대가 자신의 땅인 버펄로 방목지 중심부를 침입한 것에 분노했다. 원주민들은 위대한 추장 붉은 구름(Red Cloud)의 지휘로 병사와 건설 인부를 무차별 공격 했고, 이후 그 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건 사흘 후의 장면, 전장에 여러 구의 시신 중 일부가 담요에 싸여있다.)


1850년에서 1880년 사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5000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가난이나 질병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의 원주민 인구가 남북전쟁 이전 15만 명에서 1870년 3만 명으로 줄어들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1867년에 일련의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인디언과 빚은 갈등은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요인이 등장해 또 다시 평화를 깨뜨렸고, 1876년 리틀 빅혼(Little Bighorn) 전투로 이어졌다. 원주민은 약 25000명에 달하는 전례 없는 대부대를 이루어 커스터 대령 휘하 연대를 기습 포위해 몰살시키는 전과도 새웠지만, 단합한 전사를 하나로 유지할 만한 정치조직이나 물자가 없었기에 추적을 피해 무리지어 달아나거나 식량을 찾아 흩어졌고, 미국 군대는 그들을 하나씩 추격했다. 미국 군대는 그들을 다코타로 돌려보냈고, 수족은 이내 힘을 잃고 패배를 인정하여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운디드니 사망자들의 집단묘지. 사건이 일어난 지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에 묻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수십 년에 걸친 전쟁과 정부의 탄압은 서부에 남아 있던 원주민 인구를 격감시켰다.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종교적 대상이기도 했던 버펄로도 원래 6천만에서 1억 마리였으나, 1889년에는 100마리도 안 남을 정도로 그 수가 줄어 원주민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같은 종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자신들의 파괴된 생활방식을 애도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고스트댄스(교령춤)’라는 새로운 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 의식은 백인 침략자에게 살해당한 모든 원주민과 버펄로의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원주민의 그런 활동 및 의식행위는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에서부터였다.

당연히 미 정부는 이 고스트댄스를 백인 개척민들 두렵게 만드는 야만적 행위라고 낙인을 찍고 이를 금지했다. 수우족의 이 의식을 목격한 사우스다코타의 파인리지 보호구역에 있는 백인 관리인이 “인디언들이 눈 위에서 춤춘다, 그들은 미쳐버렸다. 우리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전보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미 정부는 수우족의 고스트댄서들을 검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군인들이 두려웠던 350명의 오글라라 수우족들은 식량과 피난처, 말을 주기로 약속했던 추장 레드 클라우드의 보호를 찾아 빅풋의 인도로 배드랜드를 거쳐 가는 242km의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운디드니 강 근처에 피난처를 마련했는데 이미 500명의 군인들이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에서 나온 운디드니 학살.)


운디드니 강 근처에 세운 원주민들의 피난처를 발견한 미군은 그곳을 포위하여 수색했다. 미군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압수하고자 했는데, 그 총을 내놓지 않던 원주민 한명이 병사 한 명을 사살하자, 미군들은 원주민들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과 대포를 발포했다. 운디드니 학살은 대략 30분 동안 일어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대략 300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와 유아를 학살했다. 운디드니는 지옥으로 변했다. 죽고 다친 여자들과 어린이, 그리고 아기들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포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긴 사람들도 있었다. 살아남은 원주민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아기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자신의 책 미국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

 

학살이 끝난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 민간인으로 구성된 매장반이 시체 매장을 위해 학살 현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눈 속에서 146구의 시신을 찾아 커다란 구덩이 안에 던져버렸고 일당으로 시신 한 구당 2불씩 받았다. 운디드니 학살을 기점으로 마침내 원주민들의 평원은 미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서부의 식민지화는 끝이났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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