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호황과 경제 대공황
(1920년대 당시 뉴욕)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전쟁을 계기로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경제 호황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유럽과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 미국은 전시에 돌렸던 산업 시설과 같은 기존 인프라가 고스란히 유지가 된 상태에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의 뉴욕 타임즈 스퀘어)
1920년대 미국은 소위 ‘풍요와 번영의 시대’라는 말처럼 수요와 공급이 부족하지 않았다. 1920년대를 거치며 미국의 산업 생산은 60%가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3분의 1이나 증가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당시 돈이 있는 미국인들이 파티를 자주 하고 물질적 향락에 심취하여 과잉소비와 낭비를 일삼는다. 이는 1920년대 당시 미국 부르주아 계층의 삶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런 풍요로움 속에서 주식시장에 과잉 투기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 영화화되어 국내에서도 개봉했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이 처럼 1920년대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파티와 과잉소비를 즐겼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가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기술력의 발전이었다. 기술력 발전 결과 그 기술발달로 나온 물질적인 것들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의 발달은 미국인들의 교통을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철, 고무, 유리 제품 공구회사 등의 산업도 활기를 띠게 했다. 가솔린 산업과 도로 건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말엽에는 30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1920년대 미국 사회에선 광고 산업과 영화 소비량이 증가하였고, 신문도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었다. 무엇보다 라디오의 보급을 통해 미국인들은 다른 곳에서도 뉴스를 접함으로써 소식 전달의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1920년대 등장한 신 여성 플래퍼. 1920년이 되서야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정도로 미국 사회는 여성을 억압했었다.)
미국 역사에서 1920년대를 표현하는 말 중에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 시대(Jazz Age)’라는 표현이 있었다. 즉 번영과 즐거움의 시대라는 뜻이다. 물론 1920년대 미국사회에선 실업률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와 과잉의 시대’에도 미국 내부의 문제는 많았다. 대표적으로 들자면 여성 문제, 흑인 차별를 비롯한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고질적 문제인 빈부격차의 문제가 그러했다.
1920년대 당시 소위 ‘플래퍼(flapper)’ 불리는 신여성이 미국에서 탄생했다. 이들은 다리가 노출되고 몸이 노출되는 비키니를 입었고, 몸을 드러냄으로써 여성적 아름다음을 추구했었다. 이들의 패션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보수주의자와 미국 전통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플래퍼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미국은 그만큼 여성을 성적 혹은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였다. 심지어 미국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이 1920년의 일이었다. 물론 남성들에게 억압당했던 백인 여성들 또한 흑인과 같은 미국내의 유색인종들에겐 차별과 혐오를 보였지만 말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살던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화된 사회에서 살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흑인들은 “자신들이 돌아오면 이전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환영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미국의 흑인들에게 미국사회가 준 것은 극심한 인종차별과 탄압이었다. 1919년엔 귀국한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달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그들이 백인 폭도들에게 살해당해도 신경쓰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흑인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해고시켜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또한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한 혐오나 폭력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KKK와 같은 인종차별 단체가 부활했다. 이들은 비단 남부 뿐만 아니라 북부까지 조직을 확대했고, 1924년에는 단원 수가 450만에 이르기 까지 했다.
(1920~1930년대 당시 뉴욕 노동자들의 삶. 이들은 어떠한 안전 장비 없이 고층 빌딩에서 이런 위험한 식사와 생활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소위 1920년대 미국의 번영은 오직 상층부에만 집중됐다. 대략 600만 가구가 연간 1000달러 이하의 소득을 벌였다. 브루킹즈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상층 0.1%의 가구가 최하층 42%의 총합과 비슷한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매년 약 2만 5000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에 사망하고 10만 명이 평생 장애인이 됐다. 뉴욕 시의 경우 200만 명이 화재 시 비상구가 없는 건물로 신고된 셋집에서 살았다. 즉 이런 빈민층들은 1920년대 번영의 시대에서 소외되었고, 넘치는 공급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할 만한 돈조차 벌지 못했다.
(1929년 검은 화요일을 알리는 뉴스 기사)
(1929년 검은 화요일 당시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1900년부터 1920년까지 대략 1400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다. 1924년 의회는 이들을 제한하는 ‘이민법’을 통과시켰다. 당연히 이 법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같은 백인 이민자들만 선호했다. 동유럽이나 남유럽 그리고 러시아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은 당연히 제한받았다. 특히나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온 이민자는 한 해에 100명을 넘을 정도였다.
(경제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잃은 미국인들)
1920년대 미국사회는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과잉과 풍요의 시대였으나, 그 이면에는 여성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그리고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아무튼 이런 경제적 호황은 192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하버트 후버는 당당하게 “빈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후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터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위대한 철학자인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했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은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사태가 터지고 만 것이다.
(배급줄을 선 아이들. 경제 대공황은 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경제대공황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으로 들자면 지나친 부동산 투기 열풍, 경제적 다양성의 부재, 그리고 수요를 생각지 않고 공급에만 충실했던 과잉생산체제를 들 수 있다.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라고도 불린 주식시장 붕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5000개가 넘는 은행들과 수천 개의 회사가 도산했다. 도산하지 않은 회사나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1932년에 들어 대략 25%되는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였고, 고용 노동자들 또한 대체로 불완전고용 상태에 있었다. 1933년에는 150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인이 실직했다. 경제 대공황이 실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집값을 낼 수 없어 ‘후버빌(Hooverville)’과 같은 판자촌에서 살아야 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배급줄을 선 시민들)
1920년대 자본가들은 과잉과 풍요속에서 사회에서의 빈곤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돌렸었다. 경제 대공황을 겪였던 하버트 후버 또한 대공황의 과정속에서 빈부격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했다. 그러던 1933년 미국에서 한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그가 바로 FDR로 불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미국의 하버트 후버 대통령. 1929년에 당선된 그는 빈곤의 시대 종결을 주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떠한 반성없이, 빈부격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지극히 자본가적인 스텐스를 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선이 되자마자 ‘뉴딜정책(New Deal Policy)’를 내놓았다. 뉴딜정책은 소위 수정 자본주의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하며 전국부흥법, 농업 조정법 테네시 계곡 댐 건설 등을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생기고 경제도 차츰회복세를 보였고 나름 안정을 되찾아 갔다. 이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국가가 경제 문제에 개입해서 민생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갔던 데에 의미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이 정책을 두고 사회주의화를 추구하는 정책이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뉴딜정책은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긴 했지만, 반란을 혁명으로까지 연결되지 않도록 하층계급을 충분히 원조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흑인들은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었고, 뉴딜정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의 “미국이여, 다시 미국다워져라(Let America Be America Again)”라는 시를 보면 잘 나타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그는 1933년에 당선되어 1945년까지 대통령을 했던 인물이다. 미국 최초로 4선까지 했던 그는 경제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펼쳤다.)
나는 가난한 백인, 바보 취급을 받아 구석으로 밀려나 있고,
나는 흑인,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지.
나는 인디언, 살던 땅에서 쫓겨났고,
나는 이민자, 내가 찾는 희망에 매달려 있지.
그리고 발견한 것이라곤 그저 똑같이 낡고 어리석은 계획뿐.
동족상잔과 약육강식뿐.
아, 미국이여, 다시 미국다워져라,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그런 나라로.
(후버 댐. 후버 댐은 1930년대 미국 애리조나와 네바다 주 사이에 건설되었다. 미국 뉴딜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다.)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행한 뉴딜정책은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던 미국 경제를 완벽히는 아니지만, 최소한 생명을 연장해주는 호흡기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공산당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뉴딜정책은 기본적인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괴물같은 체제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한 뉴딜정책은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종식시키지 못했다. 그런 경제 대공황을 돌파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은 1930년대의 국제정세였다.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