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승리와 걸프전쟁

(프랜시스 후쿠야먀, 그는 일본계 미국인 학자로서 미국주의를 신봉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미국과 체제 경쟁을 하던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소위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갔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1955년에 세워졌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가입국들 또한 내부 분열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했고, 40년 이상이나 독일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독일은 통일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소련과 수정주의 논쟁을 하던 중국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하게 되었고,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또한 1986년에 도이모이를 추진하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또한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래로 변화를 겪으며 10년 뒤 내전을 겪게 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파괴된 레닌 동상)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반공주의를 표방할 때, 소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리던 국가들은 변화를 겪었다.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은 1991년 결국 연방이 해체되면서 15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한 변화를 거치지 않으려고 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대표적으로 쿠바와 북한이 있었지만, 쿠바는 지속해서 미국의 경제적 제재에 시달렸다. 북한은 1990년대가 되어 소련과 중국에서 오던 지원이 끊겼고, 1994년 김일성 사망과 더불어 대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미국의 경제 제재에 시달리면서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미국과 대척점에 있거나 정치 체제적으로 다른 노선을 추구했던 국가들이 큰 변화를 겪자 미국은 마치 자신들이 승리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본계 미국인 경제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먀(Francis Fukuyama)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굉장히 미국 극우파 편향적이고 오만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것은 소위 미국의 신보수주의라 할 수 있는 네오콘적인 관점으로 매우 미국 중심적이고, 소위 미국식 자유주의 사상의 폭력성과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미국 중심적 보수주의자들이 그리도 찬양하고 숭배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완벽한 체제도 아닐뿐더러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필요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에 이와 같은 변화가 있자 “세계는 유일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의 패권적 질서 아래 놓이게 될 것이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고 보며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그는 걸프전쟁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전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노먼 슈워츠코프)


냉전이 끝나가던 1990년 미국은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 전쟁은 바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걸프전쟁에서 미국과 싸웠던 이라크는 한 때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다.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던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에서 미국은 이라크의 동맹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 이라크에게 무기를 제공했고, 이는 이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미국은 그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그랬던 미국이 1990년에 와서는 이라크와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걸프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 지도)


 

(사담 후세인)


미국이 이라크하고 전쟁을 하게 된 데에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인접국가였던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부터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이에 반발했다. 미국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소위 32개국의 전투부대와 비전투부대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신속한 군사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국적군의 주력은 미국이었고, 그다음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영국, 프랑스가 많은 병력을 지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 패배의식은 1990년에도 사회에 존재했다. 따라서 다국적군을 편성한 미국은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고, 전략 전술도 그 맥락에서 지휘하게 되었다.

(사막지대를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걸프전쟁 당시 최신식 미군 탱크)


걸프전쟁에서의 미군은 참으로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했다. 1991년 1월 17일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장군은 다국적군을 이끌고 이라크군을 섬멸하기 위한 ‘사막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개시했다. 당연히 이 작전의 목적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고, 더나아가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중폭격으로 초토화했다. 이라크에 있는 도로나 교량 수도, 댐 , 전기공급 시설 그리고 유전지대 등과 같은 공공시설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고, 심지어 민간인 거주 지역과 병원 학교까지도 초토화됐다. 이러한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 사막 폭풍 작전은 1991년 2월 28까지 대략 6주 동안 전개되었다. 작전은 약 1000여 시간의 제1단계 공중폭격과 100시간의 제2단계 지상전으로 펼쳐졌다.

(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1991년 2월 28일까지 작전을 끝마친 미국은 신속한 승리감에 도취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을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부시는 아버지 부시다.)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사막 폭풍 작전에서 미군이 거둔 승리를 찬양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겪었던 비참한 실패라는 유령이 마침내 안식에 들어 사라졌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초강대국인 자신들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사실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대상으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군사기술 분야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세계에서 내로라 할만큼 강력한 군대였다. 대략 수십만 이상의 군대와 수천 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던 이라크 육군은 미군이 사막 폭풍 작전을 전개했을 때 100시간 만에 괴멸당했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대략 5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3300대의 탱크와 2100대의 장갑차 그리고 110대 이상의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그에 반해 다국적군은 292명이 전사했고, 31대의 탱크만 잃었으며, 미군은 148명만 전사했다. 쉽게 말해 6주간의 전쟁에서 미군은 이라크군을 사실상 학살하는 정도로 궤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라크의 경제봉쇄와 대량 아사를 옹호하는 매들린 울브라이트)

 

이런 미군의 전과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예상했던 몇몇 군사 전문가들의 예측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전에서 최신식 무기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식 군대를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 사례였다. 특히나 최신식 스텔스 전투기와 같은 최강의 공군력을 동원한 미군의 전술이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강력한 육군을 궤멸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1등 공신이었다. 미국에게 있어 걸프전쟁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극복하게 된 사건이었지만, 이라크 국민들에겐 참혹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미국 CNN 방송에서 인용한 이라크의 인명피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집계를 보면 1991년 6월 사망 10만 명, 부상 30만 명 실종 탈영 15만 명, 포로 6만 명이라고 보도했는데, 전쟁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대상으로 경제제제를 가하며 질병과 기아로 죽은 이라크인은 최소 100만 명 이상을 넘었었다. 그렇게 죽은 100만 명 중 50만 명 이상이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와 유아였다. 미국은 냉전의 승리와 걸프전쟁의 승리를 거두며 이라크에서 이렇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지만,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1996년 5월 12일 CBS 뉴스프로그램의 기자 레슬리 스탈이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의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orbel Albright)와 인터뷰 했을 때 울브라이트는 “이라크에서 5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었고, 이는 히로시마에서 죽은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치이며 그럴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뒤, 이전보다 더 오만해졌고 그런 오만함과 폭력성은 걸프전쟁과 이라크의 경제제제에서 아주 명백히 드러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반공주의 국가 미국

(로널드 레이건, 그는 켈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던 대통령으로 미국 사회를 다시 반공주의적 사회로 만들고자 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재선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그리고 이란 인질 사건 등으로 인하여 카터에게 크게 실망한 미국 국민들은 좀 더 미국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후보에게 매력을 느꼈는데, 그 후보가 바로 전직 영화배우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던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로널드 레이건은 일반투표에서 51%를 얻어 41%를 얻은 카터를 꺾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은 ‘공급 중심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기반한 것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국내의 각종 사회, 경제 문제에서 줄곧 극단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며 보수주의자들의 편에 섰다. 그는 자유 기업 제도와 기업가의 판단을 믿었고, 자유 방임주의만이 경제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하면서 도시 지원, 노인 의료 보장제, 저소득층 의료 보조, 식량 구입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보조금, 학교 급식 등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복지와 사회 보장에 사용되는 예산을 삭감했다. 그는 부유층과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여 그들에게 세금을 삭감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 레이건의 경제 정책이 나름의 효과를 가져와서 1980년 당시 12.4%였던 인플레이션이 1982년에는 7%까지 하락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레이건의 경제 정책으로 혜택을 본 계층은 당연히 미국의 대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이었다.

(스타워즈 계획,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은 스타워즈 계획을 세워 소련을 군사적으로 앞지르고자 했다.)

 

레이건 재벌과 자본가 위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반공주의적 시각에 있었다. 미국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 생각했고, 이를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여 소위 악의 제국 소련에 맞서야 한다는 망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사업’으로 생각했었다.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의 재임 기간 동안 미육군의 광고 예산은 무려 1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또한 그가 추진했던 해군 증강 계획으로 1986년에는 “해군 함대 600대 및 항공모함 15대 확충 계획”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981년 10월 2일 레이건 정부는 미국 전략 무기 시스템 재정비 계획을 발표하며 소련을 대상으로 핵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그가 재임안 8년 동안 군사 지출은 매년 약 1500억 달러에서 3천억 달러로 두배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 예산 총액의 3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 당시 한국측 기사)

 

이렇게 미국이 다시 소련과의 체제 및 군사경쟁으로 대응하자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극심해졌다. 그러던 1983년 3월 레이건은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스타워즈’의 이름을 딴 전략 방어 계획인 ‘스타워즈 계획(Starwars Plan)’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세기 말까지 우주와 지상에 빛이나 빔을 이용하는 지향성 에너지 무기에 공격용 위성과 요격 미사일이 더해지는 다중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소련의 공격 미사일을 요격한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레이건의 망상적 계획은 현실 세계와 영화 세계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적잖은 과학자들로부터도 ‘미친 짓’이라는 비난을 받았었다.

(백무현 작가의 만화 전두환에 나온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의 이면, 로널드 레이건은 이 사건을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용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 사회은 굉장히 많이 반공화 되어가고 있었다. 1982년 6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10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핵무기 반대 시위가 열렸는데, 레이건은 시위하는 사람들을 빚대어 “이는 소련 KGB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며 그들은 미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1983년 8월에는 269명을 태우고 대한민국 김포공항으로 가던 대한항공 비행기 KAL 007기가 소련의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되는 일이 있으면서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대한 적대의식을 좀 더 고취시킬 수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대한항공이 미국을 위해 염탐했다는 얘기도 존재하고, 소련측에서 착륙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비행기의 고도를 올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문점이 남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이 터지자 미국의 레이건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국방 예산을 증가했고, 미국에서는 반소련 감정이 생겨났으며, CIA는 그 사건을 통해 니카라과 정부군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에게 2400만 달러를 지원했다.

(1984년에 개봉한 반소련 영화 레드 던)

 

레이건의 이런 반공적 사상은 미국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사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건드리는 <디어헌터 Deer Hunter>나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와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1980년대에는 반공성향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에 나온 반공영화 3가지를 뽑자면, <레드 던 Red Dawn>과 <람보 시리즈 Rambo> 그리고 <탑 건 Top Gun>을 들 수 있다. 붉은 새벽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 레드 던은 소련의 지시로 이루어진 핵전쟁으로 미국의 대도시가 대부분 초토화된 직후, 평화로운 콜로라도주의 도시를 침공한 저 화려한 소련과 쿠바, 니카라과 연합군을 상대로 학생들이 게릴라 전을 펼쳐 침략자들을 몰아낸다는 허무맹랑한 영화다. 제작비로 420만 달러가 들었던 이 영화는 제작비의 9배 이상인 3837만 달러를 기록하며 나름 흥행했다.

(실베스터 스텔론이 출연한 액션 영화 람보)

 

2019년에 새 시리즈가 개봉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람보는 1980년대 미국의 반공정서와 베트남 전쟁의 패배 의식을 보여준다. 영화 람보는 전직 그린베레 출신인 람보가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에 억류되어 있던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러 베트남에 침투하여 활약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 등장한 람보는 소련 군사고문단장 프톱스키 중령과 북베트남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는데, 이를 끝까지 극복해낸 람보는 M-60 기관총 두정을 들고 북베트남군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 군사고문단을 몰살시킨다. 주인공 람보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UH-1 헬기가 날라오자 그 헬기에 올라타 병사들을 해치우고 헬기를 강탈해 돌아가 적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포로들을 모두 구출하게 된다. 이런 서사를 보여주는 영화 람보는 198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인들에게 일종에 반공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탑 건)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탑 건(Top Gun)’은 1986년 미군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제작되었다. 인도양 어느 곳에 배치된 미국 항공모함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톰 크루즈는 영화상에서 아주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유혹적이게도 기름을 바르고, 햇볕에 그을리고, 멋있는 가죽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소울 노래를 부르는 매력 넘치는 전투기 조종사다. 거기다 미모가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를 매혹할 정도로 연애 능력도 뛰어나서, 영화상에서 아주 화려하고 로맨틱한 연출까지 보여준다. 그는 작전 중에 전우를 잃지만 이를 극복하고 인도양 어느곳에서 소련제 전투기인 ‘미그기(MiG)’와 공중 대결을 펼쳐 유혈 사태 없이 상대편을 굴복시키며, 금발의 여주인공 품에 안는다. 이렇게 액션과 로맨스, 전투의 화려함까지 보여주며 미군을 홍보했던 영화 탑 건은 미국 내 극장에서 무려 5천만 명 가까지 관람했다. 따라서 미군은 영화 탑 건을 통해 자신들이 적 소련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미국과 전 세계에 홍보하고, 돈까지 벌어들이는 일거양득을 보았다.

영화와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과 미군을 홍보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국제적으로도 많은 군사 개입과 문제를 초래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다른 나라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승리를 얻기도 했는데,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이 그러했다. 1983년 10월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 상공에서 미군의 C-130 공군 수송기의 뒷문이 열렸다. 수송기의 뒷문이 열리자 미국의 특수부대인 SEAL 팀식스 대원들은 강하했고, 예정대로 강하 지점에 도착했다. 로널드 레이건과 국가안보회의 참모진들이 비밀스럽게 준비한 ‘절박한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레나다 침공 당시 미군)

1983년 10월 25일 미국은 1만 명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을 앞세워 인구 11만 명 밖에 안되는 카리브해의 조그마한 섬 그레나다를 침략했다. 이는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극도로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레이건 정부가 “그레나다 내에 있는 미국인 1000명을 쿠바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정당방위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국이 그레나라를 침공한 목적은 쿠바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레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도 미국의 그레나다 침략을 거세게 반대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밝힌 것에 따르면 “미 국무성은 어떻게 해서든 그레나다 침략이 미국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그레나다 의과대학의 미국인 교직원들에게 미 의대생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이야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미군에게 붙잡힌 그레나다인)

미국은 그레나다 침략 과정에서 병원을 비롯한 민간 시설에 무차별 폭격과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대부분의 사상자는 당연히 그레나다인이었고, 대략 1000명 정도의 그레나다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레나다 침공 과정에서 미군측 사상자는 134명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사망자는 19명이었다. 그리고 미군측 사상자 대부분은 아군끼리의 상호총격전으로 부상 또는 사망한 것이었다. 그레나다 침공 과정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과 인명을 구조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타국에 대한 엄연한 침략 행위였다.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지지도가 15%나 상승했으며, 그레나다에서의 승리에 환호했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

그로부터 3년 뒤인 1986년 미국은 리비아를 대상으로 기습 폭격을 감행했다. 그 이유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있어서 리비아의 카다피는 미국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제거하려고 했던 카다피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969년 친서방 왕정 세력들에 맞서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는 물 부족 국가인 리비아에 농업과 산업 개발을 추진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산업 시스템을 소비 경제 국가에서 가능한 생산중심의 자립경제로 변화시켰다. 토지 또한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자본주의식 착취구조인 임금제도를 철폐하고자 했다. 그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9년부터 1975년 사이 총 11만 212 가구의 주택을 건설하여 비어있는 건물에 필요한 가구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리비아 사회에서 차별받던 여성들에게 균등한 교육, 고용, 국가건설의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68~78년 사이 중등교육을 받는 여학생 수가 4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카다피는 전기와 교육이 리비아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었다.

(1986년 리비아 폭격 당시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미군 전투기)

미국이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가 등을 지게 된 것은 1980년부터였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을 거절했던 리비아의 카다피는 결국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1980년 9월 리비아 공군이 리비아 공군기지 부근에서 돌아다니던 미군 정찰기를 격추시키면서 양국의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1986년 초에 일어났던 로마와 비엔나 공항의 폭파사건이 리비아 측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 레이건은 그해 3월 리비아가 자신들의 영해임을 주장하는 수역에 일부러 미 해군함을 침범시켰다. 1986년 4월 서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클럽 폭파사건을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이를 리비아의 테러 행위라 주장하며 카다피를 죽이기 위한 기습 폭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의 카다피를 죽이기 위해 트리폴리와 뱅가지에 무차별 공습을 퍼부었고, 카다피는 살아남았지만, 230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죽거나 다쳤다.

(콘트라 반군)

(이란 콘트라 사건 당시 타임즈 기사)

 

미국을 보수주의화 시켰던 로널드 레이건은 결국 1986년 이란 콘트라 스캔틀을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레이건 정부는 당시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 인질들을 석방하는 데 있어 이란의 힘을 빌렸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무기판매도 진행했다. 18개월간 탱크격파용 토우미사일 1만 2000기와 항공기 파괴용 호크미사일 235기등을 이란에게 판매했고, 그러한 무기판매대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 스스로가 테러국으로 규정한 이란에게 비밀리에 무기를 팔면서 불법적으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행위였다. 거기다 그 시기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며 여러 가지 물자와 무기를 지원했고, 그 무기는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을 학살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란 콘트라 스캔들은 레이건 정부에게 있어 큰 비판점이 되었다.

레이건 정부가 추진했던 ‘레이건 독트린(Reagan doctrine)’은 소위 1947년 해리 트루먼이 주장했던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남미의 엘살바도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게릴라들이 인권 유린을 자행하는 호세 두아르테(Jose Duarte)의 우파 독재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자 엘살바도르 독재 정부를 지원했었다. 이처럼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타국의 인권을 짓밟았다. 레이건 정부의 폭력은 니카라과나 엘살바도르 그리고 그레나다와 같은 중남미 국가와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또한 적잖은 국방비 지출로 레이건 정부는 경제적 적자가 급증했었다. 복지분야의 지출은 줄어들었고, 부유층들만 그 혜택을 보았다. 따라서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전형적인 친제국주의적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초코머핀 2020-02-27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런 글 잘 봤습니다 :)

NamGiKim 2020-02-27 18:0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1970년대 미국 사회와 보수주의의 등장

(1975년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전차)


1970년대의 미국 사회는 1950년대나 1960년대의 미국 사회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1950년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아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대호황을 누렸다면, 1960년대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흑인인권운동과 반전운동 그 외의 여러 사회운동이 전개되면서 ‘히피(Hippe)’라고 불리던 젊은이들이 기존의 체제에 반대하여 여러 사회혁명을 추구하며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1970년대 미국은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1960년대에 있던 사회 혁명적 분위기는 조금씩 잠들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정치적인 부분보단 개인적인 문제나 개성에 관심을 두게 된 시대였다.

(1970년대 미국의 청바지 광고, 당시 미국인들은 이러한 것들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나 미국은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대략 80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미국은 1500억 달러나 되는 비용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다. 간접비용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액수가 사용되었다. 1973년에 파리 평화 조약을 맺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미국은 1975년 동맹국이었던 남베트남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반성하지 않았다. 미국의 CIA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비롯한 외국 지도자들의 암살계획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CIA는 쿠바에 가축의 질병을 퍼뜨려서 쿠바 국민이 키우던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다. 칠레에서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대통령 아옌데를 암살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1970년대 중남미에서 적잖은 만행을 저질렀다.

(오일쇼크, 1970년대를 강타한 오일쇼크는 전 세계에 경제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는 미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쟁 말기 미국에서 터졌던 ‘웨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미국인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1974년 중동에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져 미국은 그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오일 쇼크로 인한 석유 가격 급등은 미국 경제의 전 영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은 1972년 3.3%에서 1974년에 11%로 급증했다.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의 경우 무려 3만 8000명의 노동자를 무기한 일시 해고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1970년대 초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전쟁의 패배와 더불어 히피로 대표되던 소위 ‘신좌파(New Left)’ 운동은 점차 힘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과 전쟁에서 졌다는 패배의식이 소위 좌파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970년대 미국인들은 자기 개성에 더욱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70년대 미국에선 조깅이나 다이어트 그리고 건강한 식단과 같은 것들이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종교적인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침술과 같은 동양 의학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낙태가 권리라고 주장하는 한 미국인 여성)


(로데 웨이드 판결에 반대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이렇게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개성에 관심을 두었던 1970년대 미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집단과 세력들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신보수주의 운동(New Right Movement)’이었다. 이들이 앞장서서 활동했던 문제는 1970년대 시작된 낙태 논쟁이었다. 이들은 낙태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며 진보세력들의 입장과 상반되는 견해를 피력했고, 1973년 미국 연방 정부가 임신 3개월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도록 판결을 내렸던 ‘로데 웨이드 사건(Roe v. Wade)’이 있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낙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대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라디오와 TV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인 보수주의를 설파했고, 대중매체를 통한 그들의 선전은 미국인들에게 적잖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낙태 반대 운동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정지키기 운동, 미국 전통지키기 운동등을 하며 일반인들로 하여금 1960년대를 비판하게 만들고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강조했다. 즉 1960년대 소위 히피들일 외쳤던 사회변혁이나 프리 섹스, 여성 해방, 성소수자 해방 등과 같은 가치하고는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이들이 1970년대에는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그들은 대중매체의 이용과 선전을 통해 미국의 중산층 계급의 지지를 끌어냈다.

(지미 카터 대통령, 그는 인권 대통령이라는 말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많은 국제적 개입과 간섭을 했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자진해서 사퇴하자 그 대통령 자리는 제럴드 포드가 이어받았는데,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취임 당시 인권을 증진시키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권이라는 소재를 적대세력인 소련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냉각시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미 카터 대통령을 소위 인권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그는 재임 기간 중 적잖은 실수를 저질렀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호메이니 혁명, 이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이란 인질극 당시 타임즈 기사)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으로 정권을 잡자 그해 10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분노한 이란인들이 미대사관에 침입해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고, 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한 팔레비의 귀환을 요구했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제를 가하면서 풀려나지 않은 인질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래도 석방되지 않자 카터는 인질 구출을 위한 군사 작전을 승인했는데, 그 작전은 헬리콥터 사고로 8명의 사망자만 내고 실패했다. 또한 지미 카터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광적인 대학살을 벌이던 폴포트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 베트남 하노이 정부에 의해 군사적으로 전복당하자 베트남 전쟁에서의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미국의 카터 정부는 베트남에 맞서 폴포트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을 지원하는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다.

(로널드 레이건, 1950년대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였던 그는 1980년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다는 목적을 가지고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카터가 집권하던 시기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난관이 있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했다. 1978년에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발생했다. 1979년 미국에는 아파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살 수 없는 아이들이 100만 명이나 되었다. 1800만 명이나 되는 17세 이하의 아이들은 치과에 가본적도 없었을 정도다. 미국의 젊은이들 중 특히 흑인 젊은이들 가운데 20~30%가 실직 상태였다. 197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80년 미국에서 공화당 출신 후보 한명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명성을 떨쳤던 배우였고, 제법 인기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사회는 다시 1940,50년대와 같은 반공주의 시대로 귀환했다. 물론 1950년대 미국이 보였던 반공주의 국가보다는 자국민에 대한 사상 탄압의 강도는 약했지만, 확실히 그 시기 미국에서는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애국주의 그리고 반공주의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은 베트남 전쟁으로 패배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미국이 부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실제로 미국은 그 기간 동안 국방비에 많은 지출을 했다. 그 과정에서 반공주의자 레이건은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와 간섭행위를 일삼았다. 대표적으로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과 콘트라 반군 지원이 그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 제국의 중남미 침략사

(미국의 침략 본성을 나타내는 그림.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미국이라는 독수리는 남미에 대한 지배욕을 여러차례 드러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남미 국가들을 제국주의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서부로의 영토 팽창 과정에서 미국은 멕시코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멕시코로 하여금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써 드넓은 멕시코의 영토를 강탈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여 일어났던 아이티 혁명에서 미국은 아이티의 독립에 반대했다. 1898년에 쿠바 영토를 두고 일어났던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에서 승리한 미국은 쿠바에게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주는 척을 하면서 쿠바를 미제국의 경제적 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 외에도 미국은 하와이와 푸에르토리코 괌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기 위해 강탈했고,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해 야만적인 젅쟁을 수행했었다.


미국은 현대식 대포로 일본을 위협하여 무역을 위한 개방을 요구했었고,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여 중국에서 일어났던 ‘의화단 운동’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제국 등과 같은 열강들과 연합하여 진압 군대를 보내 잔인하게 진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기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 볼셰비키 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방해하기 위해 12000명의 미군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상륙시켰다.


1900년대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에 많은 투자를 했던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장악하기 위해 콜롬비아에 대항하는 혁명을 아주 교묘하게 부추겨 파나마라는 ‘독립국가’를 만들어 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 미국은 도미니카공화국의 문제에 개입하여 8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고, 1915년에는 아이티에 개입해서 19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 1912년 니카라과를 침략했던 미국은 니카라과의 보수기득권 세력들과 결탁하여 1933년 아우구스토 산디노에게 쫓겨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실질적인 주인행세를 했었다. 1900년~1933년 사이 미국은 쿠바에 네 차례, 니카라과에 두 차례, 파나마에 여섯 차례, 과테말라에 한 차례, 온두라스에 일곱 차례 개입했다. 1924년 기준으로 라틴아메리카의 20개 국가 가운데 절반의 국가 재정이 미국에 의해 어느 정도 좌우되고 있었으며 1935년에는 미국의 철강과 면화 수출의 절반 이상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판매되는 상황이었다.

(냉전부터 현재까지 미제국의 중남미 국가 침략 및 방해공작을 보여주는 지도)


이처럼 중남미와 전 세계에서 침략과 간섭을 일삼았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중남미에 대한 자본주의적 탐욕주의를 버리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중남미 인민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냉전시기 소련과의 경쟁을 이어나가던 미국은 중남미 지역에서 적잖은 개입을 했다. 라틴아메리카 경제와 국제관계사를 전공한 학자인 존 코츠워스의 계산에 따르면, 1948년에서 1990년 사이에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적어도 24개의 정부를 전복시켰는데, 4건은 직접적으로 미 군대를 동원해서, 3건은 CIA 주도의 반란이나 암살을 통해서, 그리고 17건은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 지역의 군대나 정치세력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대개는 군사적 쿠데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개입 중 미제국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3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54년에 과테말라에서 발생했던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64년 브라질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73년에 일어났던 칠레에서의 사건이었다. 1945년 3월 14년 동안 과테말라에서 독재정권을 유지했던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 총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레발로는 노조 설립 등과 같은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인민의 귄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구했다.


그는 6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비민주적인 제도와 악습 그리고 식민지 자본의 횡포에서 민중을 구하는 데 모든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토지 국유화 강령을 내세웠고 그것은 당연히 남미를 자본주의적으로 지배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United Fruit Company)의 이윤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이런 아르벤스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그 반대세력은 바로 과테말라의 기득권층과 남미민중을 착취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 그리고 그 기업의 이윤을 통해 이득을 보던 미국이었다. 결국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르벤스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 그는 민중의 염원에 따라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했었다.)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과테말라의 군부는 소위 반공법을 제정하여, 아르벤스에 동조하는 양심세력과 가난한 인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무차별 학살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6년 동안 과테말라에선 군부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고문과 학살로 인하여 2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1961년 브라질의 대통령이었던 ‘주앙 골라르트(João Goulart)’는 브라질의 경제회생을 위해 정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기업 소유의 유휴토지를 개발하여 빈곤층 등에게 공급하며, 다국적기업의 과다한 이윤 유출을 억제하여 국민자본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임자인 콰드로스 대통령처럼 비동맹 자주노선을 지향했고 소위 제3세계와의 외교 통상관계를 증대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있던 미국의 쿠바 침공과 쿠바 봉쇄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백만장자의 아들인 그는 결고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친미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의 자주노선이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었다고 느꼈기에 그를 축출하기로 했다.


1962년에 치러진 브라질 총선에서 CIA의 공작을 통하여 극우 성향의 후보들에게 약 2000만 달러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미국은 브라질 내에 퍼지는 반미의식을 막기 위해 학생과 부녀자 단체 등을 동원해 친미그룹을 조직했고, 극우 언론사에 대한 자금지원도 동시에 실행했다. 결국 미국은 1964년 3월 친미성향의 군부 합창의장 브랑코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은 소위 ‘엉클 샘 작전(Operation Uncle Sam)’이라고 명명한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 무기, 연료 등 주요 전략물자를 비밀리에 브랑코 장군에게 지원했다. 1964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골라트 대통령은 우루과이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브라질의 자주적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었고, 그 이후 브라질에선 수천 명의 골라트 지지자들이 공산주의자나 동조세력으로 몰려 체포되었으며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는 진압군의 발포로 무차별 학살당했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그는 세계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싫어하는 미국에게 있어서 그는 제거되야할 대상이었다.)


남미 국가들 중에서 가장 긴 면적을 자랑하는 칠레는 1932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그 구리 생산이 미국계 양대 기업 케니코트구리와 아나콘다 구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1964년 칠레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CIA는 에두아르도 포레이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후보를 물리쳤다. 이후 수년간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반공 그룹들을 지원했고 군사원조 1억 3600만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칠레를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다음가는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미군이 운영하는 기지에선 칠레군 장교 4000명에게 게릴라 소탕 전술훈련을 시켰다.


아옌데는 1970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그는 “부를 재분배하고 통신회사 ITT를 비롯해 칠레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아옌데를 우려한 미국은 그가 당선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1970년 9월 살바도르 아옌데는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하는데 성공했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미국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던 구리광산 등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의료 및 교육 부문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확대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실제로는 CIA에게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혹은 정치 권력에서 축출”하는 작업을 허용했다. 미국 CIA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칠레군 최고사령관 레네 슈나이더(Rene Schneider)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슈나이더의 암살이 CIA의 공작으로 밝혀지자 칠레 국민은 격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의 CIA는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속적인 공작을 감행했다.


아옌데 정권은 결국 친미제국주의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칠레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쿠데타 계획에 따라 미 해군은 그 전날인 1973년 9월 10일 밤 자국 전함들을 발파라이소항에 정박시켜 아옌데 정부와 칠레 인민을 향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들으며 “역사가 반란군을 심판할 것이다. 칠레 만세! 칠레 인민 만세! 칠레 노동자 만세!”라는 말을 남긴 뒤, 피노체트 일당들에게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미국과 결탁하여 아옌데를 사살한 피노체트는 칠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대략 17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따라 칠레의 빈부격차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피노체트는 쿠데타가 발생한 3개월 동안 CIA의 지원을 받아 좌파로 의심되는 사람 수천 명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군사정부 기간 동안 총 3만 5000명이 처형되었다.

(콘도르 작전 풍자 그림, 미국이 진행했던 콘도르 작전으로 수많은 남미 민중이 고문 받고 학살당했으며, 감옥에 갖혔다.)


이처럼 냉전 시기 미제국의 중남미 문제 개입은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지속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후반까지 대략 20년간 소위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을 남미에서 전개했다. 미국은 콘도르 작전을 통해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페루, 엘살바도르 등에서 독재정권 사이에서 행해졌던 국가 간의 공동 첩보 활동, 체포와 납치, 송환, 심문, 고문, 암살, 비사법적 처형 등을 자행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콘도르 작전으로 5만 명에서 6만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으며 대다수가 고문에 시달렸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들은 18년간이라는 기나긴 투쟁 끝에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았다.)


위에서 인용한 과테말라, 칠레, 브라질 등이 그랬듯이 남미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주도하는 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니카라과가 그러했다. 1960년대 니카라과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8년간 미국에 맞서 투쟁했다. 1979년 그들은 니카라과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소모사와 그 일당들을 몰아내어 정권을 잡았다.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게릴라 세력들은 소모사 정권에게 유린당한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배했다. 은행, 광산과 니카라과의 천연자원 등 그 동안 소모사 정권의 부패 근거지였던 자산들도 국유화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문맹률을 12%로 줄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열린 미국의 베네수엘라 경제제제 및 간섭 반대 집회, 지금까지도 수많은 남미국가에선 반미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이런 사태를 좋게 보지 않던 미국은 니카라과 문제에 개입했고,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미제국주의와 그들의 나팔수 세력인 반혁명군 콘트라(Contra)에 대한 군사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미제국은 중남미 민중을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에게 온갖 방해와 악행 그리고 학살과 범죄를 저질렀다. 197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맞보았던 미국은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은 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해 승리의 단비를 맛볼 수 있었다.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Invasion of Grenada)’이 그러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삭매냐 2020-02-20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 전복
은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 전복과
함께 1950년대 미국 CIA가 자랑하는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악질 소모사 부자를 축출한 산디
니스타 투쟁!~

쿠바 혁명에 놀란 미국이 유난히
중미 진보 정권에 경기를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NamGiKim 2020-02-20 13:43   좋아요 0 | URL
쿠바 혁명에서의 충격이 클겁니다. 오죽하면 피그스만 침공과 쿠바 봉쇄까지 했겠습니까.
 

미제국의 추악한 전쟁 범죄 베트남 전쟁

(절규하는 소녀, 이 소녀는 네이팜 폭탄에 화상을 입었다.)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이 얘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United States)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난 지 2년이 지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위에서 언급된 인용문처럼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패배했다. 이것은 1776년 미국이 건국된 이래로 최초로 전쟁에서 패배한 사례였다. 베트남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의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면서도 전쟁을 몇 년간이나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했고, 전쟁은 1975년에 와서야 끝이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고,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왜 패배한 것일까?

(1945년 호치민의 베트남 독립 선포식)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전투를 치르던 미국은 반파시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조직과 협력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s)는 북베트남 지역에서 반일투쟁을 하던 호치민(Ho Chi Minh) 휘하의 베트민(Viet Minh)과 협력관계를 구축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 조직은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켰고,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에는 옛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들어왔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배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야욕은 1946년에 노골적으로 변했고, 그해 11월 베트남의 항구 도시 하이퐁이 프랑스 군함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6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 일어났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베트민 부대를 상대했지만,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에 맞서 게릴라 전을 전개하여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민을 지원하게 되었고, 소련의 스탈린 또한 호치민의 베트민 정부를 공식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다 1950년에 한국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냉전의 논리로 접근했고 그 전쟁에서 침략자 프랑스를 도왔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1950년 초기에 미국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불했던 전쟁 비용은 1000만 달러였지만, 전쟁이 끝났던 1954년에는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를 초과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의 군사지원을 프랑스에게 했지만, 1954년 5월 7일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가 함락되면서 이는 물거품이 되었다. 1954년 보 응우옌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이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했을 당시 미국은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이라 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의 베트민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응오딘지엠)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가 베트민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도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당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베트남의 문제를 놓고 회담이 열렸다. 거기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다. 이러한 분단에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2년 이내에 베트남 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 선거를 실시한다는 조건”이 바로 그러했다. 당연히 미국은 남베트남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정권을 만들어 놓았고, 자신들이 내세운 응오딘지엠이 이끄는 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던 남베트남은 정통성에서 호치민 정부에게 밀렸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의 지도부와 핵심세력들은 100년에 걸쳤던 프랑스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프랑스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다.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군대의 장교단 중 과거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 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 사람만 있었을 정도였다. 따라서 남베트남 정부는 호치민의 북베트남 정부에게 정통성에서 상대가 안되었고, 이를 안 미국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존F 케네디 대통령)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게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은 부정부패와 독재정치를 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남베트남의 초대 내각을 가톨릭 출신으로만 구성했고, 그의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자관에 앉혔다. 그의 동생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써 함께 했고,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임명했으며,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임명했다. 그 외에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주었다. 초기에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성공적으로 마쳤던 호치민 정부와는 달리 지엠정권은 토지개혁에도 실패했고, 민중의 대다수가 믿는 종교인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알렉산더 켄드릭A. Kendrick이 쓴 <미국의 갈등The Wound Within>이란 책에 의하면, 응오딘 누가 이끌던 남베트남의 비밀 경찰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 7만 5000명을 살해했고 5만 명을 투옥했다. 이러한 탄압에는 전직 베트민 출신도 포함되었고, 당연히 남베트남 민중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베트콩 깃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들)

이러한 응오딘지엠 정권의 폭압 통치가 계속되자 남베트남 민중은 이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1960년에는 북베트남 정부에게 지원을 받는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 즉 베트콩(Viet Cong)이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되면서 남베트남은 무너질 기미가 보였다. 심지어 1963년 6월 11일 남베트남의 고승 틱광둑(Thic Quang Duc) 스님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남베트남 정권은 더더욱 민심을 잃게 되었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혼란의 연속이던 남베트남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사고문단(American Advisor)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1963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900명에서 1만 6000명까지 증가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그린베레(Green Beret)와 같은 특수부대도 파견했고, 라오스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비밀스러운 작전을 전개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군대는 워낙 무능해서 수도 사이공 근처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The Battle of Ap Bac)에서 1500명이나 되는 군대가 300명 안팎의 베트콩에게 대패하는 참사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USS 매독스 호)

 

1963년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남베트남의 혼란이 지속되자 미국 CIA에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졌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이후 ‘두옹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이 남베트남에 들어섰지만, 1965년 응우옌 까오 끼(Nguyen Cao Ky)와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일으킨 쿠데타가 있기 전까지 대략 10번 이상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결국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64년에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영해 통킹만에서 비밀작전을 전개했고,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을 향한 선전포고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을 대상으로한 대규모의 폭격을 계획했고,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의 씨를 말리기 위해 고엽제를 무차별 살포했다.

(B-52 폭격)

(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시골 지역)

(고엽제를 살포하는 미군 항공기)

1965년 2월 남베트남의 도시 플레이쿠(Pleiku)가 베트콩에게 기습당하는 일이 있자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을 전개하여 북베트남을 대상으로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또한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을 연결하는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고 고엽제를 투하했다. 1965년 3월에는 남베트남의 휴양 도시인 다낭(Da Nang)의 미케(My Khe) 해변에 3500명의 미해병대가 상륙했다. 미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말까지 18만 4000명이상이나 되는 미국 정규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고, 1966년 중반에는 30만 명 1967년과 1968년 사이에는 그 규모가 54만 9천명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필리핀 그리고 뉴질랜드가 병력을 파병했다.

(베트콩으로 의심받아 M-16 소총으로 위협받고 있는 한 주민)

(베트남 전쟁 당시 투입된 대규모 헬기 부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작전에 투입된 미국은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ory)’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전을 펼쳐 움직이는 것은 모두 총으로 쏘아죽일 수 있었고, 그들은 얼마든지 베트콩으로 의심이 된다면 민간인을 살해해도 상관이 없었다. 특히나 지상전에서 UH-1 헬기의 지원을 받는 미군은 베트콩이 나타났다 의심이 되면 헬기를 불러 막강한 화력지원을 퍼부었다. 1965년 11월에 있었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에서는 대규모의 공중지원을 받은 미군이 전사자 300명을 내고 1700명 이상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렇듯 미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우위를 유지했다. 1967년까지 이러한 전투가 반복되었기에 미국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믿었다.

(구정 공세 당시 지도)


(구정 공세 시기 사이공 미대사관에서 벌어진 전투)

그러나 1967년이 지나고 1968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정치 및 군사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전개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전황을 단숨에 역전시켰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땐, 베트콩 측의 결과가 혹독했다. 1달간의 공세 동안 대략 3만 7천 명 이상의 베트콩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1달 동안의 미군 전사자는 2000명 정도였다. 구정 공세는 남베트남에 있던 미군 기자들을 통해서 미국 전역에 생중계가 되었는데, 생중계가 되었던 장면 중에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는 것과 옛 황궁이 있는 후에가 1달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당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장면들이 생중계가 되자 미국에서는 대규모의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반전운동에 나서는 미국의 젊은이들)

결국 미국은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되었고, 베트남에서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린든 B 존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게 옮겨졌다. 구정 공세와 68혁명의 여파로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69년부터 ‘베트남화 정책(Vietnamazation)’을 전개하여 단계적인 철수를 감행했다. 비슷한 시기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콩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으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하고 더 나아가 침공하는 짓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1972년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미소, 미중 데탕트를 의식하여 소위 수백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한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감행했다. 이 공세는 미군의 공군력으로 무력화되었다. 닉슨 정부는 마지막 협박으로 소위 ‘라인베커 작전(Operation Linebecker II)’을 전개하여 하노이와 하이퐁에 막강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부활절 대공세 당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

(라인배커 작전 당시 B-52 폭격기)

(라인배커 작전으로 폐허가 된 하노이)

 

하지만 라인배커 작전에도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1973년 1월 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에 체결하며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부를 완벽히 통일할 계획을 세웠고, 1975년 3월에 이를 실행으로 옮겼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을 궤멸시켰고, 1975년 4월 수도 사이공을 점령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남과 북이 통일되었고,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 측의 승리로 끝났다.

(사이공 미대사관에서 탈출하는 미군 헬기)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격하는 베트콩 측 탱크)

정리하자면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들어왔을 때, 미국은 한때 자신의 동맹 세력이었던 호치민을 버렸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에는 그 전쟁을 냉전식 반공논리로 해석하여 프랑스를 지원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국은 베트남을 분단시켰고, 통일을 위한 총선까지 일방적으로 막았다.

(켈리 중위, 그는 미군 최악의 학살 미라이 학살을 저질렀다.)


(미라이 학살 당시 학살 당한 주민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가 정통성에서 밀리는 것과 민중들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남베트남 정권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 그런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자 1964년에는 통킹만 사건까지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참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1961년 8월 초부터 1971년 10월 말까지 만 10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 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는데, 이는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투하한 셈이었다. 미국은 대략 80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고, 그중 200만 톤을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으며 이러한 무차별 폭격은 대략 200~300만의 베트남 민간인을 죽게 만들었다. 위에서 상술된 라인배커 작전에서도 미군의 B-52 폭격기가 파괴한 것은 민간인 시설이 대부분이었다. 즉 미국은 폭격이라는 행위를 통해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되는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측의 트럭 행렬을 막기 위해 ‘비둘기 작전(Project Pigeon)’이라는 구상까지 계획했었다. 비둘기에 폭탄을 심어 북베트남군 차량을 폭파시킨다는 이 계획은 결국 비둘기가 피아구분을 못해서 실패했지만 말이다.

(미국 신문에 보도된 미라이 학살)

(피닉스 작전 당시 사용된 마크)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군이 전개한 ‘수색과 섬멸 작전’은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베트콩들의 경우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민중과 함께하는 게릴라 전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전쟁에서의 전과을 보고하는 방식은 소위 ‘바디 카운트(Body Count)’였는데, 이는 전투에서 적으로 규정하고 사살한 시체들을 계산하여 전과를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당연히 민간인 사살도 적군 사살로 기록되었다. 전쟁 특성상 게릴라전이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 공론화 되기도 했었는데, 대표적으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 그러했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 소속의 병사 30명은 미라이 지역 근처에서 대략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미군에게 학살당한 504명 중 17명은 임산부, 173명은 어린이 그리고 56명은 유아였다. 미라이 학살은 군에 의해 1년간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 있는 종군기자의 폭로로 그 진상이 규명되었다. 당시 미라이 학살은 군의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 학살이 아닌 적군 사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처럼 미군은 베트남에서 잔인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길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들)

(베트콩을 발로 차는 남베트남군)

 

미군은 소위 ‘피닉스 작전(Phoenix Program)’이라 하여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잡아 구금하고 고문하며 살해하는 작전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소 2만 명에서 2만 7천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 당연히 살해된 민간인이 베트콩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쉽게 말해 죄없는 민간인들이 어떠한 법적 절차없이 베트콩이라는 심증만 가지고 즉결처분당한 것이었다. 당시 피닉스 작전을 폭로했던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베트남을 폭격하는 전투기들)

이처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상상을 초월했다. 네이팜 폭탄이 일상적으로 투하되었던 베트남의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미군이 무차별 살포한 고엽제로 인하여 환경이 파괴되었으며 전쟁 이후 수많은 기형아들이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즉 전쟁의 피해가 전쟁 이후에 태어난 후세대들에게 까지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만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국은 총 5만 8천 명이 전사했고, 26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베트콩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미국의 수많은 전쟁 기계들이 베트남에서 사라졌다. 대략 3700대 이상의 미군 항공기가 파괴되었고, 5000대 이상의 헬기가 파괴되었으며 80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베트남 전쟁에서 파괴되었다.

(반전운동 당시 병사들에게 꽃을 주는 히피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 영웅적으로 잘 싸웠기에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미국 내에서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며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규탄하던 반전 시위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의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은 이 전쟁범죄를 규탄했다. 이러한 규탄의 목소리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나 전투현장에 있던 병사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고, 양심있는 사람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한 행동과 목소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반전운동가들과 베트콩들의 저항정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