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에투섬 전투 (Battle of Attu)

2016년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정친 송몽규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송몽규는 “1943년 5월 미군이 알류산 열도 아치 섬(에투 섬)을 점령하고 미군 잠수함 부대가 진격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그냥 넘겼을 것이다. 영화의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송몽규가 아치 섬을 언급하며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도의 위치는 미국 알래스카 근처에 있는 어느 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투이기 때문에 오늘은 에투 섬 전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태평양 일대의 섬들을 점령해나갔다. 일본의 팽창 야욕은 알래스카 일대까지 퍼졌다. 일본이 알래스카 령의 에투 섬을 점령한 것은 1942년 6월이었다. 이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알류트인 42명을 훗카이도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일본군이 이리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이 섬을 점령한 것은 아무래도 미국의 알래스카를 압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과 1943년 2월 과다카날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3년 5월 11일 태평양 전선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에투 섬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1943년 5월 21~22일에는 에투섬에 상륙한 미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일본군 함대가 도쿄만에 모여 에투 섬 쪽으로 출발했지만,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1943년 5월 25일에는 에투 섬 수비대 대부분의 일본군 주력부대가 항복했다. 1943년 5월 29일 잔존부대를 이끌던 야마사키 대령은 부상병들에게 청산가리를 먹게하여 죽인 뒤 잔존병력 140명에게 반자이 돌격(덴노 헤이카 반자이 하며 착검한 총을 들고 돌격하는 자살 공격)을 명령했고, 나머지 140명은 미군을 향해 반자이 돌격을 하다가 전멸당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1943년 5월 30일 에투 섬 전투는 끝이났다.

19일간 지속되었던 에투 섬 전투에서 미군 55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 2350명이 전사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알래스카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세라비 페친님께서 쓰신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라는 책이 나왔을때 이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했었습니다. 지난번 오세라비님이 방송에서 인터뷰한거 보고 이 책 사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오늘 주문했습니다. 솔직히 이런 책도 나와야 한다 생각하고, 충분히 그러한 부분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고, 또 이런 비판도 수용해야한다 봅니다. 사실 전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얘기를 하지도 않지만, 현재 급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는 메갈리아나 워마드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봅니다. 물론 전 성재기 같은 답없은 여혐론자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일베를 싫어하고, 일베에서 쓰는 수준이하의 여혐단어를 굉장히 혐오합니다. 그러나 지난 혜화역 시위때 워마드와 일부 페미니스트(그게 페미니스트 전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들의 시위는 분명 도가 지났쳤죠. 그리고 이 책의 핵심은 혐오를 넘어 연대입니다. 전 이 책의 부제목에 매우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런말 한다고 해서 날 여혐론자로 모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전쟁사에 있어 지배받던 식민지 세력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빛나는 승리와 독립을 쟁취한 전투가 있다. 그게 바로 1954년 프랑스군이 대패한 디엔비엔푸 전투다.

1.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날과 맞추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대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을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중국 국민당군은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베트남을 다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1946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하여 그 나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협상은 쉽지 않았고 1946년 11월 북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에 있는 베트민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호치민을 체포할 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군에게도 매우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민에게 식량과 무기 그리고 탄약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1950년 9월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베트민군은 1951년 프랑스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온갖 물자를 지원받은 프랑스군은 네이팜 폭탄으로 이에 맞섰고 1951년 베트민의 총 공세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비록 1951년 베트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군의 상황이 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자체가 정글전과 게릴라전 위주였고 따라서 프랑스군의 전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1953년 베트민군은 북부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뒤, 라오스까지 진격 하고자 했다. 이에 고심하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베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유인하여 싸우고자 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프랑스군의 준비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숫자를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2만 명에 육박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105mm 견인곡사포를 28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프랑스 공군의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현지공수강하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순식간에 전체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했으며, 즉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지킬 요새를 건축했고,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3. 디엔비엔푸 전투 시작과 승리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베트민군은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베트민의 보 웅우옌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 병력들은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등을 손수 인력으로 옮기거나 혹은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정상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설치를 하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줬다. 당시 베트민 육군은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는데 산악이동중에 타이어가 손상되면 헝겊을 말아 타이어대신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투입된 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약 5만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마침내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1954년 3월 13일부터 베트민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군의 북동쪽 전초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다음날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진지에 가해졌고, 이 진지는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비행장이 폐쇄되자 이제 프랑스군의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 한편 이렇게 프랑스군의 진지 2군데가 차례로 함락되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베트남인들로 이뤄진 징병군이 다음날 자욱한 안개를 틈타 항복해 왔고, 이들이 지키고 있던 옆 진지마저 베트민에게 넘어갔다.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 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그러나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 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갔고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진지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약 1개월간의 전투는 제 1차 세계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 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참호전에 익숙하지 못한 지휘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에게 항복했다.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로써 끝이 났다.

4.결론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8년간의 전쟁에서 약 7만 명이 전사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난 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함으로써 8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이 났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지배를 받던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전투이자 식민지 지배를 받는 나라가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런 저항정신을 가진 베트남이었기에 미국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2010)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거 알아두어야합니다 2018-08-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엔비엔푸는 마오쩌둥이 사단급에 해당하는 최신무기를
공짜로 제공해주어서 가능한것이었지
그 이전에는 숫제 나무몽둥이로 프랑스 몰아내잔 꼴밖에 안되었음

NamGiKim 2018-08-2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후에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될넘들은 그 당시 프랑스에 부역했죠. 호치민과 지압같은 사람들은 프랑스에 맞서 싸울때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하도록 전비 70%를 댄 것도 미국이었고, 어쨌든 이겨서 몰아낸거니 대단한거지. 난 적어도 그렇다고 봄.
 
공산당선언 범우문고 88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해서 개봉했던 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영화관에서 봤다. 워낙 개봉하는 곳도 적고, 공산주의하면 절대악으로 생각하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고정관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다보니 네이버 영화 평은 영혼없는 알바들의 평테(평점테러)로 도배되어 있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청년 마르크스가 자신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19세기 부조리한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 위대한 선언문인 '공산당 선언'을 쓰기 까지의 스토리를 다뤘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런던에서 책으로 출판한 선언문이다. 이 100페이지 안팎의 선언문은 굉장한 호소력을 가졌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 책을 읽고,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 저항했다. 암울했던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 투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는 실패한 사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사회주의는 마치 "실패한 사상 혹은 불가능한 사상"으로만 간주되고 있는듯 하다. 특히 지금도 메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적 레파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는 더더욱 그런듯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가 다시한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술의 발전이 보여줬다. '4차산업혁명'이 바록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의 종말과 기술이 발전이 온다면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19세기에 쓰인 이 위대한 선언문이 굉장히 낡은 사상이라 폄하한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데로 소련이라는 사회가 막스가 얘기한 사회주의였다면 그말은 보다 현실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련 사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단계에서 멈췄던 사회주의 국가지, 막스가 얘기한 세상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는 자본주의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또한 고질적인 문제가 많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는 과거의 유물 따위가 아닌 현재 서방 자본주의보다 더 좋은 사회를 목표로 해야한다!!

 

공산당 선언이 매우 야만적이었던 19세기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했다면, 21세기 자본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식 천박한 자본주의 혹은 미국식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읠르 공부하기 위해선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것이 필수다.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은 자본론에 비하면 분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처음읽는 이에게는 다소 난해한 용어들이 적잖게 존재하는 책이다. 나 또한 3년전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런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래도 이 책이 나한테 준 호소력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엄청났다. 나와 같은 20대 젊은 이들이 이책을 읽기를 적극 권한다. 마지막으로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꼴들이 지껄이는 문재인 적화통일론, 혹은 ˝현 대한민국은 적화통일되기 일보직전이다.˝와 같은 얘기는 환단고기급 개애소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