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시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호찌민 지음, 안경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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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시를 읽으며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안경환이 번역한 <호찌민 시집>을 찾았다. 몇년 전 같은 저자가 번역한 <옥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옥중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8월부터 1943년 9월까지 호치민이 중국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며, 4행시 형태로 남긴 문학작품이다.

감옥생활을 하며, 호치민이 겪은 열악한 감옥사정과 대우 그리고 부당함 등이 시안에 들어가 있다. 시를 읽으며, 일제시대 당시 재판받고 복역하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로써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 억울한이들이 유난히 생각나게 한달까. <옥중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4개월간 배불리 못먹고,
4개월간 잠 한 번 제대로 못자고,
4개월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4개월간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라.˝

이 4행시에는 감옥생활의 열악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분들을 만나서 옥살이 얘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경험을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분들을 만나본적이 있으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알고 있다. 호치민의 <옥중일기>는 혁명투사의 고된 옥살이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같은 저자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이다. 안경환씨가 2018년에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옥중일기>에다가 이후 호치민이 쓴 시와, 글, 편지, 그리고 연설을 추가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호치민이 애국애족 정신이 담겨 있으며, 자유와 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가 시 안에 잘 담겨있다.

한국에서 호치민하면 20세기 공산권 지도자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등과 비교했을때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몇안되는 인물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에 따른 그 영향이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물론 호치민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도 다른 공산권 지도자들보다 좋은 편이다. 아무튼 호치민은 세계가 인정하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그러나 한국에서 호치민에 대한 인식은 베트남의 정치인 정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본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 정도에서 평가가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보면, 그가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못지않게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미국에 맞서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인물이며, 그것도 혁명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호치민을 포함한 지도부는 이미 1945년에 일본을 무찔렀고,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를 무찔렀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참전용사 출신인 미 정치인 콜린 파월도 인정하듯이, 미국에 명분이 너무나도 없는 전쟁이었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 내용 중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관련 시와 베트남 전쟁 당시 새해 연설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아직도 존경하는 데에는 그가 진심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호치민은 자유와 독립의 소중함을 알았고, 진심으로 인민을 사랑했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의 모습이 연기된 것이라 말하지만. 연기라고 하기엔 그가 실천적으로 보인 모습에서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호치민의 사랑은 거짓됨이 없다고 보며,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보이는 호치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인간적인 감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호치민의 말과 행동에는 적어도 진심이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진심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문학작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치민이 서거하기 전, 발표했던 1969년 신년 연설을 인용하겠다.

˝작년의 승리는 찬란했으니,
금년에도 갈수록 전선에서 분명히 대승을 거두리라.
독립을 위해, 자유를 위해,
미국을 깨끗이 몰아내자, 꼭두각시를 쳐부수자.
진군하자!
전사, 동포들이여!
남북이 함께 모여, 새해마다 더 즐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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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지 이제 대략 1년이 흘렀다. 20019.11 테러에 대한 분풀이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20년간 이 나라에서 전쟁을 전개했고, 궁극적으로 패전했다. 전쟁 말기 이른바 2,000페이지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미국 지도부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을 진행했다는 것이 폭로됐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의 거짓과 기만 그리고 위선 속에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항구자유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 이후 몇 개월 동안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숫자는 2만 명을 돌파했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투입했다. 2010년에는 최소 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을 1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군은 이른바 최신식 무기인 드론(Drone)을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대를 폭격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는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정도인데, 이러한 숫자를 합쳐 도합 24만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정확한 추산은 절대 아니다. 지난 2021SBS에서 인터뷰한 탈레반 대변인 수하힐 샤힌은 아프가니스탄 국민 수십만 명이 미점령군에게 살해당했고, 미군 폭격기와 드론 공습에 맞아 죽은 비극적인 사연이 아주 많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의 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전쟁이 끝날 무렵 2001년부터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최소 1조 달러(한화 1,170조 원) 정도에 달하는 비용을 썼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국방부에서 2020년에 발간한 전쟁 비용 보고서에는 8,147억 달러(한화 995조 원)을 사용했다고 나오며, 여기에는 각종 무기와 파병 부대 운영비, 작전 비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반면 미국 브라운대학교 전쟁비용프로젝트 통계에 따르면 대략 20년간 미국은 전쟁비용으로 총 22,610억 달러(한화 2,653조 원)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전쟁비용을 상회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은 6,700억 달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을 상회하는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뿐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침략하여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사용했음에도 전쟁에서 패배했다. 미군은 2,500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당했다.

 

미국이 이러한 전쟁비용을 들어가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세운 정부는 말 그대로 썩어빠진 정부였다. 미국 정부가 임명한 아프가니스탄 친미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을 세계 최대의 아편 공급 국가로 만들어 놓은 잔인하고 부패한 군벌 들 및 부패한 관료들과 손잡고 통치했다. 당연히 민주주의 같은 이상은 전혀 없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탈레반 치하 못지 않게 탄압 받았다. 2004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아편 수요의 87%를 공급했으며, 2009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세계 부패지수는 2위를 기록했다. 따라서 탈레반이 적잖은 아프간인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탈레반의 억압성은 친미정부의 부정부패와 폭력으로 인해 옛날 일이 되고 만 것이다.

 

2009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5위의 최빈국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인 1인단 GDP426달러였으며, 빈부격차는 극심했고, 전체 인구의 68%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인은 전체 인구의 23%였다. 평균 수명은 43세였으며, 인구의 76%가 문맹이었다. 특히 여성의 문맹률은 86%였고, 전쟁 10년째 되던 2011년 학교에 다니는 아프가니스탄 소녀는 전체 비율의 30%도 안됐다. 즉 미국은 이처럼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연간 최소 1,000억 달러 이상의 군사비용을 지출했다. 이 중 아프가니스탄 지역 개발에는 20억 달러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는 소련도 아프간 재건에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친미정부 하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 정부는 대다수 가난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교육할 기회를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 친미정부 하에서도 유아사망률과 산모사망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2009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남녀평등지수 최악의 국가 2위를 기록했다. 사실상 탈레반이 통치하는 것이나 친미정부가 들어선 것이나 여성들의 처지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미군의 군사작전 과정에서도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미군은 탈레반에 대한 소탕전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친미정부 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의 대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이 닥쳤으며, 이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민간인들에게 했던 짓과 일치했다. 또한 미군의 드론 공습으로 적잖은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드론이 투하한 폭탄은 비극적이게도 탈레반 소탕을 빙자하여 민간인을 노렸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지방경찰들은 보호 대상인 시골 주민들을 강간하고 살해하기도 했으며, 국립경찰 또한 구금자들에게 조직적으로 고문했다는 정황이 유엔 아프가니스탄지원단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가 자국 국민에게 자행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으며, 당연히 인권유린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여성해방도 민주주의도 그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미국의 침략 명분은 말 그대로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었을 뿐이다.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탈레반이 승리하자, 국내 언론들은 자극적으로 여성인권을 갑자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가 아주 썩어빠진 정부이며, 인권은 1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국내 언론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미국이 써주는 선전문구를 옮기기 급급했다. 현재 탈레반 정부는 분명 반동적인 정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과 친미정부에게 어떻게든 좋은 명분을 주려는 이들의 모습은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 시작부터 잘못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었으며, 미국의 탈레반 여성인권 운운은 한 마디로 핑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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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더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탈레반을 비롯한 극단주의 무장단체를 도와줬던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요!
1979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회주의(소련)의 확장을 막겠답시고 저런 극단주의 무장단체들(무자헤딘, 탈레반)을 지원했습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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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외 지음, 이희수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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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 위대한 휴머니스트 체게바라

체게바라(Che Guevara)!

난 이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예수와도 같은 얼굴을 한 이 인물은 정말 예수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혁명가였다. 미국의 포악한 독점자본이 착취와 유린을 일삼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체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체는 한손에는 총과 다른 한손에는 의약품을 들고 혁명에 투신했으며, 그의 삶은 19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마감됐다. 그의 마지막 혁명은 분명 실패였다. 혁명가를 두려워한 제국주의 앞잡이와 미국은 그를 총살했고, 시신은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비밀리에 매장됐다. 하지만 체는 전설이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젊은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를 외쳤던 젊은이들은 이들의 위업을 받들어 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규탄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파괴적인 살육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이 미군의 최신식 화력과 무기에 대량학살 당하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호치민과 쿠바의 체게바라였던 것이며, 실제로 서구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체게바라가 총을 들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의대생 체는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제국주의가 저지른 폭력과 억압을 두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연합과일회사를 비롯한 미국의 독점 기업들은 자국의 초과이윤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개처럼 취급했고, 미국에 협력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민중을 착취하며 호의호식했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체는 바로 그걸 묵과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 혁명만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라 굳게 믿게 됐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동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마약과 매춘, 부정부패가 창궐했고, 소수의 자본가들만이 미국의 자본가들과 더불어 부를 독점했다.

쿠바 혁명은 그런 제국주의 체제를 종결시킨 혁명이었으며,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 제국주의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시키고, 치료시키며 집을 주었다. 쿠바의 사례가 성공했듯이, 체는 이러한 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싶어했다. 그래야만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볼리비아에 체게바라가 잠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CIA와 육군 특수부대 그린베레를 투입하여 어떻게든 체를 죽이고자 했다. 미국은 체게바라를 죽였지만, 그의 순고한 혁명 이념까지 억압받고 유린받던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책 <만화 체게바라 평전>은 인간 체게바라가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혁명가가 되는 과정부터, CIA가 동원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는 최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간 중간에 국제정세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체의 인간적인 심오한 고민을 만화의 형태로 잘 담아낸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내가 체게바라를 처음 읽은 건 6~7년 전 군대가기전에 했던 일반휴학 시절이었다. 그때 읽은 <체게바라 자서전>과 어록, 평전 그리고 감상한 영화와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숭고한 신념을 가진 그를 존경하게 됐다.

체게바라가 꿈꾸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아직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체가 가졌던 그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수많은 체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에 있다는 사실은 현재 그곳에 확산되는 반미 반자본주의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체가 목격한 억압받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체게바라의 혁명적 위업과 신념은 여전히 유호하다.

라틴아메리카에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사회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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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43-Plus My Lais of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이 글은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워싱턴과 제3세계 파시즘)』에 나오는 내용의 번역본을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얘기하지만, 1980년대 국내 번역본은 한국군을 동맹군 혹은 용병이라 번역을 했더군요. 그래서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한국군은 1965년 존슨 행정부와의 협정에 의하여 남베트남에 도착해서 1973년까지 주둔했었다.(각주 59) 1965년과 1966년의 뉴스 보도는 미국의 동맹군인 한국군을 ‘용맹’하고 ‘강력하다’고 표현했지만, 1970년 1월에는 그들의 강력함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됐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각주 60)


하지만 1972년이 될 때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당연히 이것 역시도 언론에서는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그 살상은 ‘조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각주 61) 베트남어를 하는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들의 조사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a) 남베트남인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임대군인(rented soldiers)’인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과 규모면에서 비슷한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00여 명 정도가 죽은 각각 별개로 나눠진 12건의 학살사건이 존스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한국군은 이밖에도 20~3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은 수십 건의 또 다른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 밖에 헤아릴 수도 없는 각각 별개의 살인, 강도, 강간, 고문, 그리고 토지 및 민간인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파과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한국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는 총 수천 명 단위에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존스는 이들 ‘연합군’에게 ‘평정된’ 지역 중 임무지역만을 조사했던 것이었다. 


(b) 이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징집연령에 해당되는 남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거나 사이공 정부에 소집되었고 또는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c) 이러한 대량학살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한국군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또는 그러한 기습 공격에 대한 경고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각주 62) 요컨대 한국군이 장악한 전 지역의 민간인들은 그들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d) 이러한 대향학살은 오랜기간 동안 심지어 1972년까지도 행해졌으며 미군당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각주 63) 미국 관리들이 이런 형태의 ‘평정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보였다거나 혹은 이와 같이 빈번하고도 지속적인 만행에 대하여 어떤 징계조치가 취해졌다는 증거는 전혀없다. 사실상 한국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국에게 용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군 당국자는 이를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도 있다. 콜롬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한국군의 그러한 방침은 “수년 동안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보고했다. 미국 관리들이 볼드윈에게 때로는 유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보통은 찬사와 함께 그러한 볼드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e) 미 국방부는 한국군의 지속적인 남베트남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1973년 회계연도 예산을 1억 3,400만 달러로 요구하면서(1965~1973년간의 총액은 17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에서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오웰주의적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안전(각주 65)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닉슨과 웨스트모어랜드 및 평정계획 자체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각주 66)


이러한 형태의 평정작전을 스락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미군 및 미군의 각국 연합군-비단 한국군뿐만 아니라(각주 67)-이 모두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그 같은 만행과 학살이 미군의 노력과 임무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러한 행위는 가난하고 실질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완강히 협조를 거부하는 이민족을 평정한다는 과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항이었다.


각주


(각주 59) 1965년 1월 9일 대략 2,000명이 한국군이 파병됐다. 1965년 4월 20일의 호놀룰루 회담은 그 숫자를 7,250명으로 증가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는 바로 남베트남에 북베트남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처음으로 주의를 끈 때였다. 1965년 6월까지도 국방부는 아직 그런 군대가 남베트남 내에 혹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Chomsky, For Reasons of State, p.122를 보라. 한국군은 1967년 2월의 캄보디아 마을 습격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Chomsky, At War With Asia, p.122를 보라.


(각주 60) Robert M. Smith,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 New York Times (10 January 1970).


(각주 61)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는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 “Korean Troops End Vietnam Combat Role,” New York Times (9 November 1972).


(각주 62)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그들의 행동이 당시 진행되고 있던 어떠한 군사작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닥치는 대로 벌인 학살이었다.


(각주 63) 랜드연구소의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 (1966년)”는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 American Report (28 July 1972)를 보라.


(각주 64) Letter in the New York Times, (25 January) 1970).


(각주 65) ‘안전’이란 미국의 공식 대변인들이 일관되게 베트남에 적용한 또 하나의 오웰주의이며 비슷한 방식으로 이 왕국 전역에 적용되었다. 베트남에 관한 경우 그 말은 사이공의 미국 종속정권이 위협당하지 않는 상태의 지배를 의미했다. 만일 사이공 측이 순전히 무력과 폭력으로 지배를 한다고 하더라도-비록 이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 부락과 주민은 ‘안전’한 것이었다. 만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무력 없이 지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부락과 주민들은 ‘불안전’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3년 6월의 한 국가정보 추산은 “베트남 주민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없었던 프랑스의 무능력을 우울하게 논하고 있는데, 그들 주민은 게릴라에게 프랑스연합군이 와 있음을 경고해 줌으로써, 게릴라들이 방어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베트민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 주민들에게 베트민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 v. I, p. 396.


(각주 66) 자세한 건 “‘Pacification’ by Calculated Frightfulness: The Testimony of Diane and Michael Jones on the Massacres of South Vietnamese Civilians by South Korean Mercenary Troops,” Pacification Monograph Number 2; edited with an Introduction by Edward S. Herman, Philadelphia, 1973을 보라.


(각주 67) 이와 같은 문제는 호주군이 전개한 평정작전에서도 나타났다. 알렉스 카레이(Alex Carey)의 “Australian Atrocities in Vietnam,” Sydney, N.S.W., 1968을 보라.


출처: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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