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종결됐다.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미국은 이른바 베트남 신드롬(베트남 트라우마, Vietnam Syndrome)을 겪었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이른바 미국의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1983년 그레나다를 침공하여, 미국의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자 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은 아버지 조지 부시 또한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하여, 군사작전의 성공을 홍보했다. 그레나다 침공이나 파나마 침공이나, 미국의 개입 명분은 표면적으론 공산주의 세력 소탕이거나 독재자 축출이었다.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 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냉전 말기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후 대규모 군사작전을 동반한 전쟁에 참전했다. 그것이 바로 걸프전쟁(Gulf War)이었다. 1991117일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장군이 이끄는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의 이라크군을 공격했다. 미국 및 31개국이 모인 다국적군의 병력은 54만 명이 넘었고, 1,8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됐다. 작전을 전개하자,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이라크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걸프전쟁 6주 동안 베트남 전쟁 당시 9개월 동안 북베트남에 투하한 양보다 2배가 넘는 레이저 유도 폭탄들을 투하했다. 공중발사순항미사일부터 M1에이브람스 탱크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보다 성능이 훨씬 강화된 B-52 폭격기와 유도미사일까지 걸프전쟁은 미군의 최신식 무기 실험장이 됐다. 6주 만에 이라크군은 10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3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6만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세르비아 어느 도시, 예전에 밀로셰비치쪽 지지자가 만든 영상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영상에선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언급했었다.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적 만행과는 별개로 유고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은 참혹했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은 이라크 육군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이라크 육군은 탱크의 76%, 병력 수송 장갑차 55%, 그리고 포병 전력 90%의 손실을 입었다. 현재까지도 미군의 전쟁범죄로 규탄 받는 죽음의 고속도로(Death of Highway)에서는 최소 수천 명의 병사 및 민간인(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다고 한다. 사망자 추정치는 최소 수백 명에서 최대 1만 명까지도 집계한다.)의 죽음과 더불어 수천 대의 차량도 파괴됐다. 그 외에 당시 미군 공습으로 사망한 이라크 민간인은 람제 클라크의 추산에 따르면 25,000명이나 된다. 반면에 다국적군 사상자는 사망자 148명을 포함하여 300명의 군사상자와 31대의 탱크가 파괴된 수준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 종결 10개월 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붕괴했고, 미국은 냉전의 승리자로써 기억됐다. 그러나 냉전에서의 미국의 승리가 세계 평화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 분쟁에 간섭하고 있었으며, 자국의 이익에 방해되는 존재에게는 악랄한 철퇴를 가하고 있었다. 199310월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색깔혁명 공세와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멈추질 않았으며, 북한의 김일성 정부 또한 미국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음에도 묵살 당했으며 미국은 1994년 전쟁 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했었다. 냉전의 승리는 자본주의 진영의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왔으나. 이것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에 끔찍한 내전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자신의 집을 바라보는 세르비아의 한 여성)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 국제분쟁이었다.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 민간인 학살, 인종청소, 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가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 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학살극을 벌인 나라가 있었고, 이는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NATO 세력들이었다.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 투쟁을 전개했었다. 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 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 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 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많은 종족만 하더라도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 1992()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 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 그해 8NATO는 사라예보를 포위하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했다. 1994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 세르비아는 소위 유엔 피난처였던 스레브니차를 침공하여 수천 명의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미군의 F-117 스텔스 전투기, 천문학적인 비용과 좋은 성능을 자랑하는 미군 전투기다.)

 

1995828일 세르비아측이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된 그 도시다.)의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했다. 이러자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세르비아를 협상 장으로 끌어내 내전을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딜리버레이트포스 작전(Deliberate Force)을 전개했다. 17일에 걸친 이 작전에서 NATO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항시 대기하면서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을 수행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 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이는 걸프전쟁 당시 항공 작전에서 하루 동안 퍼부은 폭탄의 양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보스니아 내전에도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 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 15회나 출격시켰다. 이 중 12회는 효과적으로 150시간 이상 보스니아를 감시했다. 작전 중 프레데터가 입수한 이미지는 세르비아가 사라예보에서 퇴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결국 공습을 지속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 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 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 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년 내전이 다시 발발했다. 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 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324일부터 6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 작전명은 얼라이드포스(Allied Force)였다. 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

(B-2 스텔스 폭격기,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이 폭격기는 이른바 출퇴근 폭격을 수행하기도 했다. ,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한 뒤 다시 본토로 귀국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군사전문가인 이세환(샤를 세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 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 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 스텔스기는 출퇴근 폭격을 수행했다. 18톤의 폭탄을 장착하고 있었고, 폭격 임무에는 스마트탄과 같은 최첨단 폭탄을 사용했다. 그 항공기 1대만 2조원(한국돈 기준임)에 달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가 연합군 헬리콥터 발진기지로 사용됐고, 미국의 루스벨트 항공모함과 프랑스군 항모 포슈가 폭격작전에 동원됐다.

 

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 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 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국내의 군사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군사작전 첫날만 해도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유고슬라비아의 하늘을 덮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가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측 추산에 따르면, 8,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는데, 폭격 기간 동안 대략 2,5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휴먼라이츠워치는 민간인 사망자가 500명 안팎이라고 낮게 추산했다.

(1999년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중국 대사관)

 

1999424일 폭격에선 베오그라드에 있는 방송국이 폭격을 받아서, 30명의 사상자(이 중 16명이 사망)가 나왔다. 이에 대해,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명백한 테러이자 전쟁범죄라고 주장했다. 또한 57일 베오그라드의 유고슬라비아군 관련 기관을 겨냥했던 합동직격탄 3발이 중국 대사관에 투하되어 중국 대사관측 인사 4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추가적으로 중국 대사관에 있던 세르비아인 14명이 숨지고 2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 위기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2주간 베오그라드에서 폭격이 중단됐다.

(빌 클린턴을 나치에 빚대어 표현한 당시 중국의 반전 시위대)

 

그 외에도 1999412일 세르비아 공화국 남부 그루데라츠카 크리슈라 철교와 통과 중이던 열차가 폭격을 받아 민간인 20명이 사망했고, 414일 코소보 자치주 자코비차에서 알바니아인 난민이 탄 차량 행렬이 폭격을 받아 약 75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57일 세르비아 공화국 니슈 시 중심부 주택가에 클러스터 폭탄이 떨어져 1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일도 있었으며, 531일 세르비아 공화국의 슬르도차에 있는 병원이 미사일 두 발을 맞아 16~17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걸프전쟁 당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은 방사선을 포함한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했다. 열화우라늄탄은 중금속 화학적 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건강 피해를 초래하는 무기였다. , 이러한 무기의 사용으로 사용한 미군 병사는 두통, 현기증, 백혈병, , 간과 장의 불안 등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폭탄 피해자들은 백혈병, , 선천성 장애아 출산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걸프전쟁에서 이러한 무기가 사용되어 미군 군인과 이라크 민간인에게 피해가 생겼는데, 미국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과 1999년 코소보 내전에서도 이 폭탄을 상용했다. 그 결과 NATO군 병사와 현지 주민들도 같은 건강 피해 증상이 나타났다. 오죽하면 이에 대해 발칸증후군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테어도어 루스벨트 항공모함, 이와 더불어 프랑스측 항공모함도 폭격에 동원됐다.)

 

이런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자 NATO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부수적 피해 혹은 오폭이라는 변명을 했다. 비록 민간인 사망자를 낮은 수치로 추산했지만,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러한 민간인 사망 사건이 최소 90건 이상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미국 국방성의 발표는 20~30건으로 축소됐다. NATO는 공습으로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했으나, 여기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은 명확하지 못하다. 거기다 NATO군의 항공부대가 발사한 23,614발의 무기 가운데 8,160발이 정밀 유도병기로 전체에서 34%정도에 해당했다. , 나머지 무기는 무차별 폭격으로 사용될 무기였고, 유도병기들도 적잖은 오폭을 일으켰다.

(1999년 코소보 주변을 정찰하는 미 지상군)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은 3달간의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전쟁 영웅을 만드는 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9327일 오후 815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 베오그라드 북서쪽 3지점 상공에서 공습을 마치고 귀환하던 미 공군 조종사 데일 젤코 중령이 조종하던 F-117 스텔스 전투기가 세르비아 측 방공전력에 의해 격추됐다. 조종사는 격추된 스텔스기에서 탈출했고, 격추 8시간 만에 미군 구출팀에 의해 구출됐다. 비록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 스텔스 전투기중 한 대가 유고 상공에서 격추되었다는 점은 미국 정부에겐 아까운 손실이었을 꺼다. 이후 스텔스 전투기 조종사의 탈출기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 제법 홍보됐고, 이후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도 다큐로 제작됐다.

(데일 젤코 중령, 1999년 폭격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세르비아 방공망에 의해 격추된 스텔스기의 조종사다.)

 

종합해보자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NATO군의 형태로 최신식 폭격을 감행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도중 일어난 인종청소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학살당했다. 그런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갈등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빌미로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고, 또 최신식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장소로 유고슬라비아를 선택했다. 1994년과 1995년 당시 폭격 그리고 1999년의 폭격은 냉전 이후 발달된 미국의 신무기 실험 현장이었다. 물론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 비하면, 미군의 폭탄 실험은 전에 경험한 전쟁에 비해 적은 민간인 사상자를 불러왔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가 되지는 못했다.

 

20019.11 테러 이후 미국이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중동 민간인이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폭격이라는 폭력행위를 얼마든지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해 전쟁범죄라고 규탄하는 목소리도 제법 있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최소 2,000명 이상의 세르비아계 미국인들이 뉴욕에서 반전운동을 전개했었고, 호주 시드니에서도 7,000명이 반전시위를 전개했었다고 한다.

 

러시아 연방의 경우 자신들과 비슷한 혈통을 가진 슬라브 민족을 폭격하는 미국에 대해 분노했다고 한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이를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푸틴 정권이 시작되던 2000년 당시 조사를 보면 81%가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으며, 이는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폭격과 연관이 있었다. 미국의 폭격행위는 1920년대 니카라과 개입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역사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은 무고한 타국 민간인의 피로써 채워졌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도 그러한 역사 중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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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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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로써 앞으로 무조건 읽을 책이다. 완역된다고 하니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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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다. 소위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은 근현대 역사만 보더라도 영국과 소련 그리고 미국의 침공을 차례대로 물리친 나라다. 지난 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탈레반의 승리로 끝이 났고, 현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고 있다. 사실 탈레반은 이미 3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내전을 통해 집권을 했으며, 1996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 즉, 그런 상태에서 미국이 9.11 테러를 빌미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기에,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한국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됐다. 영화를 즐기며 보긴 했으나, 한쪽 편향으로 흐르는 영화적 흐름이 맘에 안든 것과 동시에, 나중에 실체를 알고 나서 영화에서 피해자들로 나오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 가 없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한 9.11 테러 영상을 보여주며 자막을 통해 전쟁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을 2006년으로 되돌려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하러온 이들이 버스타고 가는 보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납치당한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황정민과 현빈이 개고생한다는 것이다. 즉, 영화는 사고친 국민들도 우리 국민들이니까 국가가 구해야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가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자꾸 이 선교사들에 대한 심각한 미화가 되는 점이 많이 우려가 됐다. 이 영화의 실제 모티브가 된 교회는 굳이 가지 말라는 곳 아프가니스탄에 갔고, 거기서도 정말 위험한 전투 지역에 호위 차량 단 한대도 없이 버스 한대만 대여해서 들어가고자 했다. 말 그대로 자살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들을 선교활동가들로만 묘사하기 바빠, 실제 모티브가 되는 이들이 어떠한 사고를 쳤고, 얼마나 편협한 사고관을 가지고 어리석을 했는 짓을 했는지를 전혀 얘기하지 못했다. 대신 신파적 요소, 그러니까 가족이 보고 싶어요와 같은 부분을 넣어서 감정샘을 자극하게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실제 모티브가 되는 사건에 대해 좀 찾아봤다. 당시 탈레반에게 납치됐던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한 짓거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이슬람 사원에 가서 예수 찬송가를 부르고, "이슬람 사원이 제발 무너지게 하소서"와 같이 타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민폐 그 이상의 행동거리를 자행했다. 심지어 고아원에 가서 과자를 주며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에게 예수 찬송가를 부르게 하는 등, 타국에 대한 문화 존중이 전혀 없는 짓거리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내용들을 당시 이들이 싸이월드와 블로그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사실을 전혀 얘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보면 이들에 대한 극심한 동정감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정부의 고생으로 귀국한 이들이 한 짓거리는 전혀 반성없는 행위들 뿐이었다.


심지어 이 교회는 이런 국제 망신적 사고를 저질러 놓고도, 정신을 못 차린채, 2010년대 다시 한번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단을 보내려 했다. 나는 이 점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절대 좋을 수 없다고 본다.


영화 평을 쓰다보니, 실제 모티브가 된 이들에 대해 길게 비판하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니 기대하고 봤는데, 딱 평타는 한 것 같다. 장엄한 아프가니스탄 사막에 대한 묘사는 충실하다. 그런 영상미는 제법 볼만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영화에서 신파를 벌이는 인질들은 국민이기 이전에 저런 행패를 부린 어리석은 이들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건 꼭 인지하고 영화를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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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8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영화소식 듣고 미화 됐을까봐 우려스러웠는데 역시나 그랬군요. 후기 잘 봤습니다.

NamGiKim 2023-01-28 21:2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리뷰를 남겨봅니다.

2023-02-0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2-05 20:23   좋아요 0 | URL
정확히 어떤 문구죠?

2023-02-06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2-06 13:40   좋아요 0 | URL
아하. 이건 그냥 넣은것 뿐입니다.ㅎㅎㅎㅎㅎ 진짜 그리 생각한다기 보단.
 
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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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옹호할 이유를 못 느끼겠습니다. 네오나치 아조프가 학살한 것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가, 전쟁 터지고 나서 혐러주의를 퍼뜨리는게 옳은 일인가요? 전 이 책 논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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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군더나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오데사에서 노동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노동법을 개악시켜(노동조합 권리 축소 및 박탈 + 노동자의 임금 지불 및 해고 여부를 고용주가 마음대로 결정) 노동자들을 비국민 취급하는 것을 보면...!
 
호찌민 시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호찌민 지음, 안경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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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시를 읽으며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안경환이 번역한 <호찌민 시집>을 찾았다. 몇년 전 같은 저자가 번역한 <옥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옥중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8월부터 1943년 9월까지 호치민이 중국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며, 4행시 형태로 남긴 문학작품이다.

감옥생활을 하며, 호치민이 겪은 열악한 감옥사정과 대우 그리고 부당함 등이 시안에 들어가 있다. 시를 읽으며, 일제시대 당시 재판받고 복역하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로써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 억울한이들이 유난히 생각나게 한달까. <옥중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4개월간 배불리 못먹고,
4개월간 잠 한 번 제대로 못자고,
4개월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4개월간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라.˝

이 4행시에는 감옥생활의 열악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분들을 만나서 옥살이 얘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경험을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분들을 만나본적이 있으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알고 있다. 호치민의 <옥중일기>는 혁명투사의 고된 옥살이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같은 저자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이다. 안경환씨가 2018년에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옥중일기>에다가 이후 호치민이 쓴 시와, 글, 편지, 그리고 연설을 추가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호치민이 애국애족 정신이 담겨 있으며, 자유와 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가 시 안에 잘 담겨있다.

한국에서 호치민하면 20세기 공산권 지도자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등과 비교했을때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몇안되는 인물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에 따른 그 영향이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물론 호치민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도 다른 공산권 지도자들보다 좋은 편이다. 아무튼 호치민은 세계가 인정하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그러나 한국에서 호치민에 대한 인식은 베트남의 정치인 정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본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 정도에서 평가가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보면, 그가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못지않게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미국에 맞서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인물이며, 그것도 혁명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호치민을 포함한 지도부는 이미 1945년에 일본을 무찔렀고,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를 무찔렀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참전용사 출신인 미 정치인 콜린 파월도 인정하듯이, 미국에 명분이 너무나도 없는 전쟁이었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 내용 중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관련 시와 베트남 전쟁 당시 새해 연설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아직도 존경하는 데에는 그가 진심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호치민은 자유와 독립의 소중함을 알았고, 진심으로 인민을 사랑했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의 모습이 연기된 것이라 말하지만. 연기라고 하기엔 그가 실천적으로 보인 모습에서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호치민의 사랑은 거짓됨이 없다고 보며,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보이는 호치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인간적인 감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호치민의 말과 행동에는 적어도 진심이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진심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문학작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치민이 서거하기 전, 발표했던 1969년 신년 연설을 인용하겠다.

˝작년의 승리는 찬란했으니,
금년에도 갈수록 전선에서 분명히 대승을 거두리라.
독립을 위해, 자유를 위해,
미국을 깨끗이 몰아내자, 꼭두각시를 쳐부수자.
진군하자!
전사, 동포들이여!
남북이 함께 모여, 새해마다 더 즐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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