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던 13세기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격퇴했던 나라가 동남아시아에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당시 베트남은 리 왕조의 뒤를 이어 쩐 왕조가 수립됐고그 왕조는 대략 200년간 장기 집권했다이 정권이 베트남에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베트남의 명장이자 영웅인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왕의 존재 때문은 아닐까오늘은 베트남의 명장이자 쩐 왕조의 왕이었던 쩐흥다오가 어떻게 몽골의 제1차 침략을 막아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쩐흥다오 동상,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막아낸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혹은 강감찬 장군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칭기즈칸 사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팽창했던 몽골 제국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서방으로 팽창하는데 주력했었다이 과정에서 쿠빌라이칸은 현재 중국의 운남 성의 대리국으로 진격하여 국경을 현재 베트남과 맞대게 되었다당시 쿠빌라이칸은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쩐 왕조는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오히려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에 대한 지휘를 쩐 리에우의 아들 쩐 꾸옥 뚜언(Trần Quốc Tuấn) 쩐흥다오에게 맡겨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몽고군은 남하했을 시기베트남의 일부분을 점령했었다그 이유는 베트남의 군민을 대송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당시 몽고군을 지휘했던 인물은 우량하타이였다우량하타이의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몽고군은 홍강과 로강을 따라 두 길로 나뉘어 남하했는데수도인 탕롱(현재 하노이서북쪽 약 5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1258년 1월 몽고군과 쩐흥다오가 이끄는 베트남 주력군은 홍강과 로강다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비엣찌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1차 침공 당시 몽고군의 진격도, 몽고군의 진격은 매서웠고 초기 베트남군 또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초기 몽고군은 주저 없이 강을 건너 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퇴각하는 베트남군을 따라 진격했다베트남군은 급히 병력을 수습해 탕록 북쪽 푸로(phù lỗ)에서 2차 방어선을 편성했다물론 이 방어선도 몽고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으며베트남군은 탕롱을 버리고 후퇴했다탕롱에 입성한 몽고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몽고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태종의 동생 등 일부 인사들은 송나라로 피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그러나 쩐흥다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시기 베트남군이 사용했던 전투 코끼리,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는 베트남 또한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베트남 이웃나라인 라오스는 한때 코끼리 왕국으로 불렸었다.)

 

당시 쩐흥다오가 이끄는 몽고군은 후퇴하며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몽고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이는 1812년 조국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사용했던 전술이나, 1941년 독소전쟁 초기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하다쩐흥다오의 병력이 후퇴한 이후 몽고군들은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고낯선 풍토병으로 고전하기 시작했다결국 베트남을 침공한 몽고군의 사령관 우량하타이는 베트남에게 화의를 제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1258년 뀌화 전투 당시 게릴라전으로 기습 공격을 했던 베트남군과 우왕좌왕하는 몽고군, 1차 침공 당시 쩐흥다오가 사용한 게릴라 전술은 이후 레러이의 대명항쟁과 응우옌 후에의 대청항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의 게릴라 전술과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까지 이어진다.)

 

전열을 가다듬은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넘어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Đông Bộ Đầu)의 몽고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이는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거둔 승리였다이후 베트남군은 강을 건너 아군 진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리의 기쁨에 겨워 미친 듯이 강둑을 내달리는 베트남군 기병들을 탕롱 성벽 위에서 바라본 몽골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다결국 우량하타이는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철수했다철수하는 길드 순탄치 않았다몽고군은 탕롱에서 국경 사이 중간쯤 되는 옌바이 성 뀌화(Quy Hóa)에서 소수민족인 무엉족 군민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258년 뀌화 전투 재현 모형, 위에 있는 사진과 같다. 게릴라전을 통해 몽고군을 몰아냈던 베트남을 보면, 베트남이 20세기 당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침략을 무찌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각하는 몽고군은 허겁지겁 이동하느라 주변을 약탈할 여유도 없이 지나가 베트남 북부에서는 몽고군이 진짜 불적(부처 같은 적)이었다라는 조롱 섞인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결국 몽고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맺은 뒤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이는 또 다른 침략을 막으려는 베트남측이 벌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차 대몽항쟁의 승리는 베트남 측의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게 여러 가지 소중한 자산을 안겨주었다. 1차 대몽항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몽고군도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으며최선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몽고군의 가장 큰 무기인 공포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웠고그들이 청야전술과 유격전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도 전술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무엇보다 아무리 강한 외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왕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뭉쳐 막아내겠다는 강력한 투쟁 의지를 갖는 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유인선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이산, 2002

 

오정환천년전쟁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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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그가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에 창설된 의열단의 단장이었으며, 민족혁명당 총서기였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였고, 수많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191110일에 창설된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암살도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김원봉의 의열투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어떤 기관을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면 백범 김구가 했던,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김구가 추진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30년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했던 투쟁들은 김구가 한 것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는 1920년대 당시 의열단 주요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203~6월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한 의거

 

1920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

 

192011월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9월 김익상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2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3월 김시현, 남정각, 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1월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 오세덕 등이 국내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11월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준비했던 경북 의열단 사건

 

1926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출처: 약산 김원봉 평전 p.75

 

그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김원봉은 전개했다. 무엇보다 내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1930~1940년대 당시의 무장투쟁에 있다. 193810월 약산 김원봉은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마오쩌둥 휘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 측의 조선인 부대와 합류하여, 냉전 초기에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 통일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 인민군에 편입됐다.

 

김원봉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한다. 즉 그가 1948년에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고, 그것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반공주의 콤플렉스일 뿐이다. 단순히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써 재조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주장 그리고 사상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일중심적인 사고관이다. 그렇다면, 악질 친일경찰이자 고문왕이던 노덕술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주의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노덕술이나 김창룡 그리고 하판락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은 편향과 역사조작 그 자체일 뿐이다. 설사 그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 업적이 폄하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김구나 이승만 일부를 빼면 거의 없다. 아무튼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유치한 이데올로기 트집을 잡는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약산 김원봉을 존경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원봉은 독립운동 시기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무엇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만주와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원봉은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했다.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사에서 높게 평가받아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따라서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은 좋은 것이며, 비록 우익적 색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약산 김원봉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서 더 높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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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을 뒤에서 쳐다보는 미군)

 

2015년 당시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이른바 국정 교과서 사태를 주도했던 뉴라이트 세력들은 기존 역사교과서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자 했다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의 이승만의 정치투쟁은 건국투쟁이고소련 치하의 공산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켰으며이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만들어졌다.”가 된다즉 한국 근현대사는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고북한은 시작부터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이들은 소위 신의주 사건과 같은 예시를 들며소련군이 폭압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크나큰 오류가 존재한다왜냐하면 그들이 찬양하는 미군정은 매우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으며억압적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는 미국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상한 공식에 빠져 있다그러나 이는 미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경제를 독점하는 과정을 보면허구일 뿐이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미군정 또한 그러했다미군정은 한반도에 상륙하는 시점부터 환영하러 마중나온 시민에게 총격을 가해 몇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그리고 포고령을 발포하여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1945년 9월 점령군으로 서울에 입성한 미군)

 

미군정의 통치는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이것은 미군정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야기된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즉 미군정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일반 노동자 농민은 쌀을 구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으며땅과 자본을 소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익만 증가하는 구조였던 것이다그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봉기 및 저항으로 이어졌으며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에 대해 추수봉기(Harvest Uprising)’이라고 표현했다.

 

추수봉기는 1946년 9월 23일 부산의 철도 노동자 8,000명이 파업을 일으키며 시작됐다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며칠 사이에 파업은 인쇄공전기기사전신 및 체신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산업에 파급되어 총파업으로 이르게 되었고많은 학생들이 이 파업에 가담했다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가담했다한반도 이남 지역을 통틀어총 25만 1,000명의 이 파업에 동참했다한마디로 미군정에 맞선 생존권 투쟁 및 자주권 투쟁이었던 것이다.

(대구 10.1 항쟁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에게 살해된 민간인의 시신)

 

파업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체로 개혁적인 것들이었다. “쌀 배급의 증가보다 높은 봉급실업자 및 귀국자들을 위한 주거와 식량공장에서의 작업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또한 민주적인 노동법 제정과 정치범 석방 그리고 반동적 테러의 중지 등의 요구도 나왔었다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장이던 허성택이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에게 보낸 서신에도 앞에서 언급한 요구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 10.1 항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시위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학살한 제주도 양민 시신의 숫자를 보여주는 지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항쟁을 통해 미군정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그러나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바로 강경진압과 폭력동원이었다대구 10.1 항쟁과 같은 시위는 최소 3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명 이상이 경찰에게 체포됐다북한 개성 지역에서만 3,000명이 체포되고서울은 용산 철도 차고에서만 불과 하루사이에 2,000명이 체포당했다또한 전라남도에서만 4천 명이 체포됐다진압 당시 미군정은 주로 국립경찰에 의존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했지만필요의 정도에 따라선 서울측 경찰이나 미군 전술부대를 파견했다그리고 대구 10.1 항쟁에서는 미군 탱크가 출동했다.

 

1946년 10월 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미군과 우익경찰이 군중 6,000명에게 실탄을 사격했다이 과정에서 15명 이상이 죽고 또 다른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명이 체포됐다같은 날 경남 창원에서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10월 11일 경남 진해 근처의 웅천에서는 미군과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었다부산의 경우 10월 9일에만 양측의 충돌로 경찰과 군중 24명이 피살되었고미군정은 전술부대를 투입하여 군중을 진압했다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총파업 및 반미군정 투쟁 과정에서 발생했다당연히 미군정의 강경진압으로 생긴 사망자들이었다.

(존 리드 하지와 이승만)

 

이처럼 미군정의 통치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었다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이런 폭력은 1948년 제주도에서 정점을 찍었다이들은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나자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하고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미군정이 동원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대원들은 독소전쟁 시기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연상시키는 학살극을 벌였다학살은 1948년 중반부터 1949년 말까지 주로 발생했다총 30,000명에서 60,000명의 제주도민이 그렇게 학살당했다제주도민 10명 중 1명 혹은 6명 중 1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켜세우며미군정 자체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려는 뉴라이트들을 보면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미군정은 일부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정권이었지파업을 전개하던 대다수 시민을 위한 정권이 절대로 아니었다미군정이 내세운 이승만도 그러하며이들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따라서 미군정은 절대로 민주주의를 전파한 세력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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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간 존재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국가 베트남 공화국(Republice of Vietnam, Việt Nam Cộng Hòa)이다한국에서는 보통 남베트남으로 자주 불리며영어로는 South Vietnam이라고 불린다남베트남은 1955년에 탄생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분단됐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호치민(Ho Chi Minh)을 지도자로 하며 1945년에 탄생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이 유지가 됐고남베트남에는 1949년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 Quốc gia Việt Nam)이 유지가 됐다.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응오딘지엠)

 

그러나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었다이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소위 국민 투표를 통해 탄생했으며형식적으로 대통령제가 유지됐다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남의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신분적으로 베트남의 상류 계층이었다식민지 시절 그는 식민지 관료였으며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 일본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바꿔 프랑스에 대항하는 약식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창설되자베트민으로부터 협력을 제의받았으나 단번에 거절했다그 이유는 본인의 형 응오딘코이(Ngo Dinh Khoi)가 베트민에 의해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물론 그의 형은 프랑스 식민지 협력자였고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다 그러했다결국 응오딘지엠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서 살았으며그 시기부터 반공사상을 전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엠이 귀국한 것은 1954년 제네바 회담 전후였고바오다이는 그를 베트남국의 총리로 임명했다이에 따라 미국의 노선은 바오다이를 지지하는 것에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이에 따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하며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1956년 이내로 약속됐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실행했다그가 총선을 거부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그 이유는 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그걸 알았기에 지엠도 아이젠하워도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1955년 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미국의 계획대로 지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혹은 지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즉 그렇게 해서 실시된 것이 1955년의 국민투표였고지엠은 국민투표에서 98.2%의 득표율을 얻었다쉽게 말해 부정선거였다당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많았다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으며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휴버트 험프리존 F.케네디 등이 응오딘지엠의 지지파였다이들은 미국의 강경 보수 성향으로 극단적 반공주의자 지엠과 성향이 잘 맞았다.

(응오딘지엠과 미국 대사인 헨리 케벗 로지, 지엠은 마치 미국 대사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남베트남에 남아있던 베트민 세력들을 탄압하고 소탕하는 것이었다당시 베트민은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세력이었다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침략을 무찔렀고남베트남 지역에서도 프랑스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다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북베트남의 호치민에게 정통성이 밀렸던 것이다그 이유는 본인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민들이 설치한 선거함을 철거했고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사들을 줄줄이 체포하고 감옥에 투옥했다. 1960년대 초반 기준으로 이미 남베트남에는 수십만의 정치범이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시기 식민당국에 협력한 이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았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북베트남에서 8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월남한 것도 따지고 보면이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이중 60만 명은 가톨릭 세력이었는데이들 또한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식민당국의 대대적인 협력자들이었다즉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들을 정착시켰고남베트남의 군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규모가 늘어났다그리고 이 남베트남군의 장교와 사령관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당국에 협력한 인사들이었다쉽게 말해 이들은 바오다이 베트남국에서 응오딘지엠의 베트남 공화국의 장교와 사령관이 된 것이다즉 미국은 이런 매국노들을 지원하며 민주주의를 교활하게 포장시켰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에게는 정통성이 하나도 없었다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는 2017년 켄 번즈(Ken Burns)의 PBS The Vietnam War(2017)에 대한 비판 글을 개제하며응오딘지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한 선거조항을 담고 있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운명은 와드의 역사서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저자는 프랑스 식민주의를 조국에서 몰아내었던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유일한 설명은 남베트남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1955년에 선거를 거부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제안된 선거만을 언급하는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가 마치 그들이 프랑스 식민통치권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남베트남 정부의 법적 구속력이 없었던 것처럼, 6쪽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일은 미국 그 자체가 선거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다. 1955년 중반 디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1955년 6월 중순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통일 베트남을 위한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있었는데냉전국가인 분단된 독일과 한국의 정책과 일관되게 하기 위해 자유선거를 유지했던 것이었다.”(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Gareth Porter, 2018.03.01.)

 

쉽게 말해 미국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남베트남의 정부가 정통성이 없었다는 것을 책에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매클리어는 베트남 30년 전쟁의 제1막에 해당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마감은 임무 교대를 위한 무대 장치의 전환이었으며, 10년에 해당하는 제2막은 미국이 프랑스의 뒤를 이어 고딘디엠(Ngo Dinh Diem)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99) 응오딘지엠 정부가 정통성이 없음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매클리어는 미국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인용하며미국의 남베트남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와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만난 응오딘지엠)

 

미국은 제네바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입장은 베트남 국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이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실질적인 입장은 6월의 <펜타곤 페이퍼>에 잘 나타나 있다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00)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윤충로 교수는 박사논문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서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으며친프랑스 세력에 저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그의 논문에는 남베트남 군벌 및 친불파 집합체이던 까오다이교나 호아하오교 그리고 베트남 국민당이나 빈쑤옌 등과 같은 세력을 견제했다고 나온다. “1955년 바오다이의 폐위를 거쳐 1956년 4월 호아하오의 지도자인 바꿑(Ba Cut, Le Quang Vinh)의 마지막 무력 저항을 분쇄하고 봉건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이런 프랑스와의 대결이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 그러나 윤충로 교수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낀 세력이 바로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을 한 베트민이었다.”는 사실도 명백히 밝혔다.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또한 당시 지엠은 이중의 압력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다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diệt cộng)반공(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

 

논문에서 윤충로 교수한 인용한 쩐반짜우(Tran Van Giau)의 인용문을 보자.

 

남부당국은 그 지역의 우리 동포와 모든 애국적이며평화적인 세력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겨우 1년 동안에 그들은 3,000건이 넘는 범죄를 저지르고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적어도 4,000명의 애국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9,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5)

 

응오딘지엠 정권의 멸공 반공 정책은 사실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해가고 있던 프랑스를 잠시나마 몰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지원에 의존한 것이었고그렇기 때문에 과거 반프랑스 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을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이다애초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아무것도 안했으니당연히 정통성이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오딘지엠과 이승만, 1957년 응오딘지엠은 한국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만났다. 이 둘은 사상적으로도 정치 성향도 통치하는 방식도 거의 비슷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맞다이는 낡은 관점이 아니라 응오딘지엠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다애초에 미국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도 남베트남은 미국의 창조물이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였던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 정부에 의해 세워졌고미국 정부에 의해 제거됐다. 1963년 그가 암살당한 것도 CIA가 뒤에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미국이 기존 꼭두각시를 새로운 꼭두각시로 대체한 것일 뿐이다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쓴 <최고의 인재들내용은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그러나 양측의 성격이 구분된 상황에서 미국이 식민주의의 흔적 없이 베트남에 들어간다는 덜레스의 말처럼 순진한 말도 없을 것이다베트민은 선거를 통해서든전복이나 게릴라전을 통해서든 남쪽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그들은 근대 세력이었고그들에 반대하는 남쪽 세력은 봉건주의자들이었다그 상황에서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었다그들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에 강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일깨웠다아울러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를 쫓아내는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베트남 사회에 대의와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식민 지배 아래에서 그들 사회는 분열되었고서로를 불신하며 의지할 가족에게만 충실했다따라서 그들이 연대하는 순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알게 되었다.

 

남쪽은 정반대였다남쪽의 정부 구성원들은 서유럽인들을 상대했고전쟁 때 국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냈다그들은 프랑스에 협력했고전쟁으로 이권을 챙겼다응오딘지엠은 외국에 있어서 어느 편도 고를 수 없었다남쪽에는 옛 봉건 질서가 여전히 존재했는데이는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남쪽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연대하기보다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베트남의 전통은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었다응오딘지엠 정부는 친족 정부였고따라서 지엠이 몰락하던 시기에 오로지 친족만 신뢰했다처음부터 한 베트남 친족만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리더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북쪽은 외국인을 쫓아낸 사람이 이끌었고남쪽은 외국인이 추대한 사람이 다스렸다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주의가 한창인 시기에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명했고지엠은 해방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겁던 시기에 베트민을 인정하지 못하고 망명했다호찌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외국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그래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원하는 농민층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던 것이다지엠은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단 한 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미국의 정치적 필요성과 야망이 만들어낸 미국의 피조물이었다베트남 기준에서 볼 때 그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지엠은 불교 국가의 가톨릭교도이자 남부의 주류 베트남인이었지만무엇보다도 혁명이 휩쓸고 간 국가의 봉건 귀족이었다.”(최고의 인재들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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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를 보았을 것이다. 1985년 6월 1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관객 92만 5천 명이 보았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물론 이 영화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 운동권들의 저항을 억누르고반공의식과 반북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상영된 것이었다즉 캄보디아 폴포트 공산정권의 이런 만행을 보라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전두환 정부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다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관점들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혀들어 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영화 킬링필드는 1975년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Pol Pot, Salot Sar)와 크메르 루주(Khmer Rouge)의 학살과 만행을 다루고 있다영화는 미국의 반전기자 시드니 스켄버그(Sydney Schanberg)와 캄보디아의 디스 프란(Dith Pran)의 우정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따라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본질은 분명했다캄보디아의 만행을 폭로함으로써반공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려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킬링필드의 희생자 유골, 캄보디아는 폴포트 집권 시기 수많은 인명이 학살로 희생됐다.)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자 폴포트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했다그의 정권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통치기간 4년 동안 학살을 자행했다이 학살로 최소 200만에서 300만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즉 크메르 루주 정권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학살로 그만큼의 인명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다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한다실제로 폴포트 집권 시기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80만에서 150만 사이이며사망자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 및 수용소 생활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이 중 실제 즉결 처형으로 사망한 자의 수치는 7만 5,000명에서 15만 명으로 되며나머지 학살굶주림질병과로로 숨진 사람들이 100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폴포트 집권 시기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도시에 살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당했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서적의 80%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됐다그리고 S-21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인 뚜옹슬랭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고그 시설에서만 1만 4,000명이 거쳐 갔으며 이 중 절반이 사형당했다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크메르 루주의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의 국경지대을 의도적으로 침공했으며적잖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살던 베트남인들을 학살했다캄보디아 내의 베트남인들도 그저 베트남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크메르 루주는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그러나 많은 이들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은 알아도 그 이전의 학살은 모른다그 이전의 학살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미국의 닉슨(Nixon) 행정부가 저지른 캄보디아의 제1차 킬링필드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형식적으로 독립을 얻은 캄보디아는 다시 베트남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되는 베트콩 물자를 차단할 목적으로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더 증가했다실제로 1967년 2월 24일 미군남베트남군한국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 크락 크란의 크메르족 마을에 집중 포격을 가한 적이 있었으며미국의 항공기들은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었다.

(B-52 폭격기, 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

 

1969년 3월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이른바 비밀 폭격을 시작했고, B-52를 포함한 미군의 폭격기가 거의 매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거기다 당시 시아누크는 제3세계 블록에 가담하였고캄보디아 국경지대 내에 베트콩 주둔을 허용했다따라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를 폭격했다. 1970년 미국은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론놀(Ron Nol)을 동원해서 캄보디아에서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고베트콩 소탕을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대규모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이에 따라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는데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미군의 폭격과 공군력에 의해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폭격한 캄보디아 지역을 나타낸 지도,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을 폭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1월 캄보디아 정부가 공식 백서를 통해 사진과 날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 사항들을 덧붙여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수천 건의 사건들을 공개했다여기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과 지상공격에 관한 것을 담고 있었다그러나 놀랍게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나 지상공격 이후에 발견된 시체 중 베트콩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즉 이들의 공격이나 폭격으로 죽은 이들은 다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침공을 설명하고 있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은 결국 미군의 철수로 끝났다그러나 강도 높은 폭격은 지속됐다. 1971년 말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의 조사낟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 난민과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고 결론 내리고 난민의 수를 인구 700만 명 중 약 1/3로 추정했다심지어 미국의 정보기관은 마을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중폭격의 가능성이라고 보고했다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파괴행위는 역효과를 만들어 냈다그것은 바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던 크메르 루주의 급부상이었다크메르 루주는 미군의 폭격이 격화됨에 따라캄보디아 내부의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게 됐고이는 결국 론놀 정부군과 크메르 루주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미군의 폭격을 목격한 미국의 통신원 리처드 더드먼(Richard Dudma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폭격과 사격은 캄보디아 농촌 사람들을 급진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으며농촌을 대규모의 헌신적이고 효율적인 혁명 기지로 변모시켰다.”

 

출처여론조작 p.439

 

1973년 초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핀란드조사위원회가 사용한 대량학살(Mass Genocide)’라는 말에 걸맞는 규모로 증가했다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5개월 동안에도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지속됐으며, 8월이 되어서야 폭격이 중단됐다즉 1969년 3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미국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그 결과 캄보디아의 농촌은 폐허로 변했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공포의 장소가 된 프놈펜으로 탈출했다많게는 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도 추정하며,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핀란드 조사위원회는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으로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으며최소 30만에서 많게는 8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서 이에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노엄 촘스키의 주장)

 

공산계 반정부 무장조직 크메르루주는 급속히 세를 불렸다젊은 크메르루주 조직원들의 광신적인 행태에 대한 무시무시한 보도가 꼬리를 이었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장악했다그들은 곧바로 국민들을 상대로 다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그 결과 1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미국의 폭격으로 이미 50만 명이 죽음을 당한 터였다미국은 캄보디아의 주요 우방인 중국과 화해 무드 상태에서 폴 포트가 이끄는 잔학한 크메르루즈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3

 

이처럼 우리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대해 편향적으로 알고 있다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은 기억하고 있지만정작 폴포트의 킬링필드 못지 않게 캄보디아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미국 닉슨 정부의 대량 학살 프로그램은 완벽히 잊혀졌다또한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이유가 미국 때문이라는 사실도 가려졌다왜 그런 것일까그것은 바로 서방 사회가 편향되고 조작된 여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따라서 캄보디아 대량학살을 논할 때미국의 제1차 킬링필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주제며비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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