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는 토벌과 반토벌의 격전지였다. 1931 9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의 마수를 드러냈고중국인과 조선인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저항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를 침략한 이례로중국 공산당 휘하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었다. 1933 11월 일제의 동만 지역 2차 대토벌에만 보병기병포병을 포함한 6,000명의 병력과 전투기가 동원됐으며, 3차 대토벌은 1935년까지 전개됐다만주지역 일본의 관동군 숫자는 1941년 독소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대략 70만 명으로 증가했고, 600대의 전투기도 주둔했다.

(마오쩌둥과 홍군, 대장정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 병력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일제는 만주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음에도만주 지역 관동군은 1945년까지 대부분 주둔하고 있었다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례로 중국 공산당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으며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그 중 한 사람이다김일성만 하더라도 1935년 중국 공산당 병력과 연합한 2,0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6일 동안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심지어 1937년에는 소위 국내 보천보에 잠입하여 소규모의 교전을 치르고 난 뒤무사히 후퇴하기까지 했다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을 이끌던 허형식은 1942년 8월 일본군과 교전을 치르다 전사했다.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무자비한 토벌을 감행했다중일전쟁 발발 1년이 되던 1938년 일제는 그 악명 높은 간도 특설대를 창설하여중국 공산당 휘하의 부대 및 독립군들을 토벌하는 일에 착수했다일제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항일투쟁의 뿌리를 뽑고자이른바 모든 것을 태우고죽이고약탈하는” 삼광작전을 감행하여 무자비한 양민 학살과 토벌을 자행했다삼광작전의 일환으로 일제는 이른바 집단부락이라는 것을 세웠다집단부락은 항일 유격대의 근거지를 철저하게 토벌하고 불태워 버린 뒤 그 주변에 흩어진 농가의 백성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하나의 부락에 수용하는 정책이다이후 비슷한 정책이 제주 4.3 사건 당시 한국 군경과 미군에 의해 사용됐고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전략촌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됐다.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며칠 전 동북항일연군 휘하 병력 600명은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다그 전투가 바로 다샤허 전투다당시 전투에 참가한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웨이정민과 천한장이 지휘했으며전투에 참가한 대다수 인사들은 조선인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동북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포위해 공격했고집단 부락 안으로 밀고 글어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동북항일연군은 이 과정에서 만주국 경찰 및 자위단 병력 다수를 사살했고대략 1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수백명의 병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다샤허 전투에서 전사한 허성숙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다음 날에도 전투가 벌어졌다집단 부락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항일연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이 전투에서는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간도 특설대도 참여했다고 한다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 수비대가 집단부락의 일본인 주검을 수습해 돌아가는 것을 노렸으며, 7대의 트럭에 분승한 토벌대 차량 대열의 선두차가 대낮에 류슈 촌 부근에 미리 파놓은 물웅덩이에 빠져 정착하자 기습 공격을 가했다고 한다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 부대는 간도 특설대 대원 4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멸했다다샤허 전투에 관한 내용은 <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왔다.

 

대사하 전투에서 제3방면군 부지휘관 후국충은 한 개 연대 40명을 인솔하여 양목조자에 매복하고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증원병력으로 오는 100여 명의 일본군과 만주국 경찰에게 불의의 사격을 가하여 적을 무리로 쓸어 눕혔다살아남은 적들은 살구멍을 찾아 황급히 흩어졌다그런데 이 요격전에서 부지휘관 후국충이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1호군 제3방면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수한 군사 지휘관을 잃었다.”

 

출처연변인민 항일투쟁사 p.350~351

 

2일간의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다샤허 전투에서 대략 2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7정을 포함하여 모두 200여 자루의 총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하지만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3방면군의 희생도 컸다부지휘관인 후국충이 전사했고그를 포함하여 14단 정치위원 양형후, 13단 1연의 여자 기관총 사수 허성숙 등이 전사했다이후에도 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타격 대상으로 삼으며 급습했고성과를 거두기도 했다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다샤허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본군 무장자위단원 100명을 포로로 붙잡고식량과 군용물자를 노획했었다최현이 있던 부대는 화전현 한총구에서 집중훈련을 받고 있던 만주군을 습격하여 그 대부분을 포로로 붙잡고 경기관총 7소총 600자루권총 10자루와 기타 군수물자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의 얼굴)

 

1940년 1월부터 6월까지 간도성의 옌지허룽왕칭안투 네 현에서만 모두 46회의 집단부락 공격이 존재했다다샤허 전투 이후 만주국 정부는 숨진 특설부대원 16명의 장례식을 밍위에거우에서 성대하게 치르고이들이 숨진 장소에 16용사 전적비를 세워 순국열사로 기렸다이 전적비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철거됐다이처럼 만주에서는 일본군에 맞서 티열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됐다그리고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이들의 투쟁은 분명히 독립운동이었지만대한민국 교과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고문헌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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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Nick Turse의 저서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후에 전투 당시 투입된 미군 탱크)


As U.S, and South Vietnamese forces launched a counterattack to take back the city, another bloodbath commenced. Reporing on the marines as they fought street to street, the CBS television correspondent John Laurence asked Lieutenant Colonel Ernie Cheatham what would happan to innocents trapped between them and the guerrillas. “I'm pretty sure they are civilians that we would consider bad guys right now,” Cheatham replied.

 

Navy ships lobbed 7,679 shells into Hue, and Marine Corps aircraft flew dozens of sorties, dropping napalm and five hundred pound bombs on residential neighborhoods. In all, U.S. forces unleashed an astonishing six hundred tons of bomb, plus barrages from artillery and tank cannons, dismantling the city in a chorus of explosions while ground troops fought street street. “We used everything but nuclear weapons on this town,” said one marine. Another admitted, “A great many civilians must have died in the fighting. If you saw or heard-or thought you saw or heard- movement in the house next door, you didn't stop to knock; you just tossed in a grenade.”

 

At least 3,800 of Hue's citizens were killed or reported missing as a result of the bombardment and battle, and 116,000 people were made homeless. More than three quarters of the city's homes were destroyed or seriously damaged. “Nothing I saw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Vietnam so far has been as terrible, in terms of destruction and despair, as what I saw in Hue,” wrote the correspndent Robert Shaplen. Cheatham, the commmander of the 2nd Battalion, 5th Marines, put it more simply; “We pretty much destoryed the place, I guess.”

 

Source: 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도시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게시하자, 또 다른 유혈극이 일어났다. 미 해병대가 시가전을 벌이는 것을 보도함에 따라,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갖힌 민간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고 치트햄은 대답했다.

 

미해군 군함은 7,679개의 포탄을 후에에 투하했고, 미 해병대의 전투기는 수십차례나 출격했으며 네이팜 폭탄과 500파운드나 되는 폭탄을 인구 거주 지역에 투하했다. 미군은 모두 합쳐600톤의 폭탄과 대포와 탱크 대포로 포격을 퍼부었으며, 지상병력이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엄청난 폭발로 도시를 파괴했다. “우리는 핵폭탄을 빼고는 이 도시에 모든 것을 퍼부었다고 한 미군 해병은 말했다. 다른 해병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전투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면(혹은 보거나 들은 것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곳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수류탄을 던졌을 것이다.”라고 인정했다.

 

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미군의 폭격이나 전투로 죽거나 실종되었고, 11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노숙자가 되었다. 도시의 3/4 이상이 파괴되거나 극심하게 손실됐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동안 내가 본 그 어떤 것도 절망과 파괴 면에서는 후에 도시에서 본 것 만큼 끔찍하지 않았다.”라고 로버트 셰플린 특파원은 기록한다. 미 해병대 제2대대 5연대 지휘관인 치트햄은 좀 더 간단하게 표현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곳을 거의 다 파괴했는걸.”

 

출처: 움직이는 것은 뭐든 죽여라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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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노정협 사무실을 들렸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책 한권을 발견했다. 멕시코 만화작가 리우스가 쓴 <산디니스타 니카라과>. 1980년대 극단적 친미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이란-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을 야기하여,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레이건 정부는 이란과 무기를 거래하고 받은 돈으로 니카라과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당시 콘트라 반군은 1979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려던 세력이었다.

 

콘트라 반군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카터 정부와 레이건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행동에 착수했다. 또한 니카라과 인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정부에게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고, 혁명 정부는 소련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반민중적이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니카라과인의 소수를 이루는 자본가 계급을 대변했으며, 당연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반면 1979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산디니스타 정부는 억압받고 착취 받던 계급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전에도 니카라과의 상황은 비슷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에 진출하여, 그 나라 자원과 국부를 수탈했다. 대표적으로 연합과일회사(United Fruit Company)를 포함하여,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를 사실상 식민 지배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간접적인 식민지배를 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은 반민중적이었다. 친미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때로는 양민을 학살했다.

 

1912년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점령이 시작된 이래로, 니카라과인들은 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아우구스토 산디노라 불리는 혁명가는 게릴라전을 통해, 점령군 미해병대에 맞서 싸웠다. 미국은 산디노의 게릴라 세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전투기 편대를 조직하여 마을에 무차별 폭격했으며, 기총소사를 퍼부어 죄없는 농민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 300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영웅적인 군사행동으로 찬양받았으며,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았다. 소름끼치게도 이러한 비극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반복됐다.

 

미국 언론들은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에 대한 온갖 흑색선전을 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산디노 부대를 약탈자, 살인자, 악마적 투기꾼들, 강간자들, 침략자들과 같은 수식어로 흑색선전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빨치산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과 남베트남 언론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베트콩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하며 테러리스트라 매도했던 것과 똑같다. 그리고 현재 친미주의자들은 100년 전부터 미국이 했던 이러한 왜곡된 흑색선전을 아무런 검증 없이 믿는다.

 

1930년대 등장한 소모사 정권은 40년에 걸쳐 이른바 3대 세습 독재를 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를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이 3대 세습을 지원했다는 점에 대해선 무비판적이며 무지하다. 아니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전 근대주의적 국가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없다. 미국이 주장하는 소위 인권 타령의 진면목일 것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기준으로 소모사 일가의 전 재사는 미화로 9억 달러였고, 미국 기업의 외자 투자액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당시 니카라과 민중은 세계 최대의 빈곤국중 하나였다.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민중의 문맹률은 74%였으며, 유아사망률은 최소 20%를 넘겼다. 주택 불청결도 70%에 민중의 60%가 영양실조였다. 또한 니카라과의 어린이 80% 이상이 미취학 아동이었다. 쉽게 말해, 니카라과 부자들과 미국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대다수의 민중은 가난에 허덕였다.

 

1948년 한반도 이남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맞서 빨치산들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듯이, 1962년 니카라과에서도 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Carlos Fonseca Amador) 등 소모사 왕조의 독재와 미국 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규모 무장조직 지도자들이 모여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은 18년간의 게릴라 항쟁을 통해, 1979년에 니카라과 전역을 장악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미제국주의 앞잡이 소모사 일단의 반동적 군대를 격파했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이들은 12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자 했으며, 미취학 아동과 치료받지 못한 민중들에게 무상으로 치료해주고자 했다. 이들은 하늘처럼 치솟은 문맹률을 감소시키 위해 학교를 건설하고, 무상교육을 실행하고자 했다. 소모사 친미정권 시기 치솟은 유아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무상의료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권 초기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문맹 퇴치 캠페인에 참여했고, 10개월 만에 문맹률이 많이 감소했으며, 글을 배운 이들이 다시 도시와 농촌의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발췌하겠다.

 

대서양 연안지방의 사람들은 조금 다른 데가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고유의 방언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풍습과 종교가 있었다. 나카라구아의 중심도시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교사, 사회운동가, 의사, 그리고 문맹퇴치 운동원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서 이 지방이 니카라구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출처: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p.134

 

책을 읽으며 니카라과 인민들과 혁명가들의 감동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감동적으로 알 수 있었다. 쿠바와 칠레, 엘살바도르, 베네수엘라 등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항상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옳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자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미국은 너무나도 추악하고 탐욕스럽다. 1950년대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했던 연설처럼, 미국은 너무나도 탐욕스럽고 추악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으로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미국이 제국주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시초인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했던 연설이 기억에 남는다. 1912년부터 1933년까지 21년간 니카라과를 군대로 통치하고 점령한 미국은 잔악무도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필리핀에서 대량 학살을 했듯이, 그리고 니카라과 이후에는 그리스와 한반도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온갖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벌였듯이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그 미국 지지자들이 자행한 온갖 범죄와 만행들이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

 

미군 전투기가 니카라과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을 당시, 혁명군 지도자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저항을 추구했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그의 연설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혁명적이다. 그의 연설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우리는 고립됐다. 조국 니카라과의 대의는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산디노의 상대는 디아즈 정권이 아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제국주의자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의 일부는 그들의 폭격으로 무참히 학살당하고, 제국주의 군대의 총검에 난자당하며 최신식 기관총 앞에 쓰러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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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독일에서 만든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의 초반부를 보면서독의 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서독의 젊은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고경찰은 이를 강경진압으로 대응한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이 쏜 총탄에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에서는 급진적인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창설되기에 이른다당시 서독의 젊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한 이유는 바로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 샤(Pahlavi Shah)가 서독을 방문을 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란의 샤가 도데체 어떤 인물이기에서독의 좌파 대학생들은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던 것일까?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 나오는 1967년 이란 샤의 서독 방문 반대 집회)

 

독소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9월 영국과 소련은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이란을 침공해 강점한 뒤 레자 샤를 해외로 쫓아내고 당시 22살 밖에 안 된 아들 샤를 이란의 왕으로 앉혔다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이이란은 원유가 풍부한 나라였다사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이란의 원유에 눈독을 들여왔고영향력을 확대했었다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은 이란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했다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미국 회사들이 이란의 원유에 눈을 들였다면소련의 스탈린은 이란 북부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이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두려워했다일단 이란의 국경은 소련으로부터 북쪽으로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물론 스탈린은 이란에 영국 및 미국에 허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원유 관련 이권을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2차 세계대전 당시 들어간 군대를 이란에 주둔시켰다반공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대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처칠은 1946년 3월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소위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여소련을 자극했다이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이란 석유회사 브리티시 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은 수익의 84%를 차지하며이란인들에게는 기껏 16%만을 돌려주었다놀랍게도 관련 세금도 이란이 아닌 영국에 납부했으며실제로 이 화사가 본국에 납부한 세금이 이란의 로열티로 가져간 액수의 2배가 넘었다즉 영국이 이란 원유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대다수의 이란인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당시 유전 노동자들은 일당이 50센트도 안 되었으며다른 혜택이나 유급 휴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란의 진보적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

 

이란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1950년이었다이란에 진출한 미국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디 원유에서 얻는 수익의 50%를 주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랑 계약을 맺으면서였다당시 미국은 이란이 중동 원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기 때문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당시 이란의 총리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는 영국 이란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권을 박탈하고자 했다그 외에도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모사데크는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심지어 이란 주대 미국 대사는 본국에 모사데크는 이 나라 국민 95~98%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보고를 올렸을 정도였다그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란 민중은 이에 열광했던 것이다.

 

모사데크가 반기를 들자 역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영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금지하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막았다미국 용인하에 잉글랜드 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이란에 대한 대출 및 거래를 중단했으며이란의 경제는 점차 어려워졌다. 1951년 10월 윈스턴 처칠과 보수당은 선거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처칠은 이란에 대한 군사개입 압력을 높여갔고이에 대한 대응으로 모사데크는 영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추방했다이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가 이란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가 주도한 이란 쿠데타 당시 샤를 지지하는 동원된 군중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는 CIA를 통해 모사데크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했다모사데크는 사회의자가 아니었다다만 좌파 조직인 이란 대중당(Tudeh party)와 관계가 좋았다따라서 미국의 아이젠 하워 행정부는 모사데크를 극단주의자로 봤으며막후에서는 CIA가 비밀공작에 들어갔다. CIA는 이른바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행했다놀랍게도 이 작전의 지휘자는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였다영국 정보부 MI6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이란의 왕 샤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미국의 이란 쿠데타 공작이 시작된 것을 안 모사데크는 샤가 쿠데타 음모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외로 추방했다.

(이란의 왕 샤와 그의 일가족들)

 

미국 CIA의 공작은 치밀하고도 사악했다. CIA는 이란의 언론인종교인군경 간부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한 뒤이들을 통해 CIA의 지시에 따라 반정부 여론을 조장했다심지어 CIA는 이슬람 전사들(Warriors of Islam)’의 폭력까지 돈을 주고 동원했다. CIA가 공작한 쿠데타 역사를 정리한 한 연구서에 따르면 이들은 극렬 테러리스트 깡패 집단이었다. 1953년 8울 루스벨트는 수도 테헤란에 폭도를 풀어 혼란 상태를 만들기 시작했으며우선적으로 모사데크가 공산주의자이며 유대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1953년 이란 쿠데타 관련 포스터)

 

그가 동원한 깡패들은 대중당 당원인 척하면서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이슬람 사원 한 곳을 파괴했다폭도들 중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모사비 호메이니도 있었다나중에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그 호메이니다. 8월 19일 이란의 테헤란은 무정부 상태가 극에 달했다루스벨트는 파즈롤라 자헤이 장군을 CIA가 마련한 은신처에서 빼냈으며자헤디는 당시 이탈리아에 가 있던 샤가 자신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고 선언했다총격전 끝에 쿠데타 음모 세력은 모사데크를 포함한 모사데크 지지자 수천 명을 체포했고일부는 처형했다결국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됐다이후 샤는 테헤란으로 돌아왔으며커밋 루스벨트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왕좌는 신과 나의 백성나의 군대 덕이오그리고 선생 덕이기도 합니다.”

 

이란의 지배자가 된 샤는 이후 25년간 이란을 통치했다샤의 통치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선거 조작이 있었으며,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의 반대파 탄압 책동이 있었다샤가 이란의 통치자가 되자미국은 이 부패한 동맹세력을 위해 돈을 풀었다미국 석유회사들은 이란 원유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지분의 40%를 차지했다미국은 샤에게 금고도 열어줬다쿠데타 성공 2주 만에 미국은 샤에게 긴급원조 6,800만 달러를 제공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이것이 바로 쿠데타를 통한 미국의 친미정부 건설 과정이었다결국 이 친미 정부는 1978년 극단적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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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2003321241,500명의 미군과 3만 명의 영국군,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이 이라크 영토에 진입했다.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단기간에 이라크의 정규 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렸으며, 개전 3주만인 49일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Iraq War)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그로부터 2년 전 미국은 21세기가 시작됨에 따라 9.11테러로 충격을 받았다. 9.11테러는 미국에게 새로운 전쟁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미국은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략했다.

(딕 체니)

 

9.11 테러를 주도한 인물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핵심 인물 19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중 16명은 미국의 중동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바로 중동 여성의 해방과 민주주주의 전파였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허구였다. 미국의 진짜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권 장악을 통한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이란에 대한 군사적 견제였다. 이라크 침공의 목적은 말 그대로 석유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2,590억 배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적대국인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1,120억 배럴로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3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실질 매장량이 4,000역 배럴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다.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전역을 장악한 미국이 우선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라크 측 국영기업들을 해체해 석유 부문을 석유 관련 다국적기업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2004년 딕 체니가 소유주로 있던 핼리버튼은 12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남부 석유시설 재건 계약을 따냈고, 미국은 자신들이 세운 이라크 정부에게 지지부진한 석유화학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딕 체니가 CEO로 있는 기업 핼리버튼)

 

핼리버튼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에서 이윤을 긁어모았다. 이라크에만 4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던 핼리버튼은 200824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윤 대다수는 의문스러운 수의계약을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미군 군납업체 순위 19위에서 1위로 등극했다. 미국 상원 의원 패트릭 레이히 상원이 당시 부통령이자 핼리버튼 회사 소유주인 딕 체니(Dick Cheney)에게 핼리버튼 회사의 부당한 폭리 추구에 이의를 제기하자, 딕 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좆 까 이 새끼야(Fuck yourself)!”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번 돈)

 

핼리버튼과 자회사 KBR은 여러 차례 발주처에 비용을 부당하게 과다 청구했다. 이들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혼란을 통해 막대한 자본과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이라크의 상황은 악화됐다.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인민들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폭탄 테러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교적 교리 갈등도 더 심각해졌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이라크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 전사자가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까지 최소 4,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는 급증하여, 이라크인 65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라크의 여성들은 미군에게 강간당했으며, 양민들은 미군의 직접적인 학살과 드론 공습 그리고 무차별 헬기 사격의 공포와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재생산한 빈곤에 고통받았다.

(영화 바이스)

 

따라서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이렇게 끔찍하고 무책임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놓고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남에게 총을 쏘고도 사과하지 않는 인성을 가진 딕 체니는 당연하게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자신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을 옹호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주 뻔뻔스럽게 잘먹고 잘살고 있다. 딕 체니는 자신의 자본가 동료인 럼스펠드와 콜린 파월을 따라 이승탈출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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