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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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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살 생일에도 여전히 ‘늙어가고’ 있는 ‘나’는 드디어 생애 첫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사랑으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 아닌, 90살 노인이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일은 어딘가 새삼스럽다. 소설의 초반부 주인공은 병원에 갔던 과거를 회상한다. 나이 때문에 오는 자연스러운 통증이라는 의사의 말에 주인공은 “그렇다면 나에겐 내 나이가 당연하지 않은 거로군요.”라는 말을 남긴다. 그 후 주인공은 통증 속에서 생활하는데 점차 익숙해지고 자신이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잘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그가 과연 자신의 나이를, 인생을 잘 받아들인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 중 ‘추억’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일생동안 관계를 맺은 창녀들과의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준 첫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읽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열두 살 때 처음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후, 수백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었고 관계 후엔 항상 돈을 지불하였다. 이것은 주인공이 나눴던 사랑을 사랑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사랑을 계속 미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90살을 맞은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자신이 관계 맺어 온 창녀들과의 관계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처음이긴 하지만 역시 몸을 파는 창녀인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을 기억이 아닌,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글을 잡지에 싣기 위해 게재비를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였던 것처럼,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창녀들에게 계속해 돈을 지불했음을, 소녀와 사랑에 빠진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일을 맞이한 주인공은 원고를 넘기기 위해 신문사를 찾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건물 리모델링 소음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이것은 그가 첫사랑에 빠지게 됨으로써 그동안 진정한 사랑을 유예시키려는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지속해왔던 인생의 리모델링을 더 이상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것에 대해 느끼는 소음과 피로함과도 같다고 보았다.

  주인공은 소녀가 일상에 지쳐 잠들어 있는 방에 일상용품들을 하나씩 들여놓으며, 그 방을 소녀가 기거할 만한 곳으로 만들어 나간다. 나는 이것을 환상과도 같은 사랑을, 주인공의 일상에 기거할 수 있도록 애쓰는 행위로 보았다. 그 사랑이 자신의 일상, 생활을 떠나 환상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도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주인공은 확실히 사랑에 빠진 후 그동안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평생 동안 고수해왔던 칼럼의 형식은 만평 형식에서 연애편지 형식으로 바뀌면서 어떤 독자라도 그걸 자신의 연애편지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소설을 얼핏 보면 사랑에 빠져 변한 것이 이런 외적인 것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그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이런 외면의 변화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적 예에 불과함을 느낄 수 있다. 역사적 유품 피아놀라를 팔아버리고, 중고이긴 해도 원래 갖고 있던 것보다 좋은 전축을 구입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90년간 지켜온 자신의 과거를 팔아버리고, 새것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좋은 인생에 대한 태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생일 저녁, 처음 소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행선지를 ‘공동묘지’로 둘러댄 것과 잔돈을 바꾸기 위해 ‘무덤’에서 돈을 바꾼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그 날 저녁 만나게 될 소녀가, 그 소녀와 나누게 될 사랑이 주인공에게 있어 무덤과도 같음을 의미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사랑이란, 그동안의 자신을 묻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로사 카바르카스네는 오랜만에 주인공을 다시 만난 밤, 그를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노 젓는 죄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빗장은 소녀와의 사랑에 의해 풀리게 되고 주인공은 어느새 사랑에 있어 ‘무용지물’을 자처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해오던 일들을 ‘부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타고난 성격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의 말에 나는 그가 그간 돈을 주고 창녀를 사서 잠자리를 나눴던 것 역시 오히려 간절히 사랑을 원했던 마음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인공이 첫사랑을 하게 된 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그동안의 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았다. 사랑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거부해오던 주인공은, 일상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기울이던 노력을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바꾸며 결국은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랑 때문에 죽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남은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창녀들과 돈을 주고 관계를 맺던, 지난 90년의 세월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연스레 앞으로 닥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죽음 또한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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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가는 노래 창비시선 349
진은영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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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은영 시인을 이야기 하면서 ‘시와 정치’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은 첫 시집부터 꾸준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고 이번 시집에서 그 고민은 더 깊어졌다. 이것은 시인이 어떤 정치색을 띈다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으로 시를 써 나갈 뿐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진은영 시인에 대해 쓴 어느 글에서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하며,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라는 말을 이었다.

 

 

   1.

   “세상의 절반은 삶 절반은 노래”(「세상의 절반」중)

 

   표제작에서뿐만 아니라 시집 안에는 여러 번 ‘노래’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노래가 정확히 어떤 곡조의 노래인지, 어떤 가사를 가지고 있는 노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을 읽은 독자라면 그것이 상관없는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래’는 그저 ‘노래’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정말 그렇다. 굳이 ‘음악’이나 ‘노래’와 같은 시어가 등장하지 않은 시라도 시인만의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언어들이 빚어내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어떤 삶의 노래를 듣게 된다.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

   나머지는 물

 

   세상의 절반은 사랑

   나머지는 슬픔

 

   붉은 물이 스민다

   모래 속으로, 너의 속으로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

 

   세상의 절반은 죽은 은빛 갈대

   나머지는 웃자라는 은빛 갈대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

 

   -「세상의 절반」부분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있다」부분

 

   위의 시들을 읽다보면, 이 시집에서 ‘삶’과 ‘노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라고 하던 시인은 결국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라고 말한다. 이것은 삶(세상)은 들리든 들리지 않든 결국 노래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봄의 능란한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는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훔쳐가는 노래」부분

 

   이 시를 보면 시인은 ‘사랑’의 순간을 어떤 약탈의 순간으로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로 비유한 것이나 사랑을 ‘기계’로 표현한 것,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라고 말하는 목소리 등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삶이 우리로부터 뭔가 훔쳐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약탈의 순간이 사랑의 순간과 겹쳤어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그런 결과의 연쇄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인식론」중)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라고 신형철 평론가가 말했듯,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읽다보면 그 시들을 써나가는 순간에도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잠시도 놓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 혹은 ‘시인’이란 단어를 시 속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나의 둘레를 돌며 어슬렁거리는 녹색 버터의 호랑이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

   -「인식론」부분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를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쳐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중략)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다

 

   (중략)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부분

 

 

   시인은 시에 대해, 아름다운 시에 대해 고민을 멈추지 않지만 그것을 어떤 식으로 단정지어 보여 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인식론」이라는 시를 보면서 나는 ‘몰라요’라는 말에서 오래 서성였다. 이 시에 이 말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몰라요’라는 말은 이 말에 붙어 있는 다른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시의 첫 행인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와 같은 부분에서는 이 ‘몰라요’라는 말 때문에 내가 평서 알던 호랑이 외의 어떤 다른 호랑이의 의미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행 ‘이 시를 몰라요’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어쩌면 시인이 ‘시’를 생각하는 방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를 오히려 모른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인의 다른 시,「아름답게 시작되는 시」를 보면서는 시인이 아름답게 생각하는 시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오래도록 고민 하는 것이다.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는 시인이 오래도록 마주하고 있는 시가 쓰여지기 전의 흰 백지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이 ‘아름답게 시작 된다는 것’의 고민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시인은 이 문장을 시 속에 담담하고 진솔하게 써냄으로써 그것에 대한 가치를, 고민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3.

   “내가 아는 것은 하나 우리가 둘이라는 거”(「우리에게 일용할 코를 주시옵고」)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정치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함께 사느냐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인은 사회에서 소리 없이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까지 시선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

   우리가 둘이라는 거

   하나나 둘 사이에는 슬픔의

   무한소수가

   바퀴벌레처럼 줄지어 지나간다는 거

 

   -「우리에게 일용할 코를 주시옵고」 부분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버린 이들에 대해

 

   (중략)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해

 

   -「고백」부분

 

 

   시인은 이렇게 세상에,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나 대신’이라는 표현으로 다른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에는 ‘슬픔의 무한소수가 바퀴벌레처럼 줄지어’ 지나간다. 슬픔을 바퀴벌레로 표현하는 일은 흔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금 우리 시대에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줄지어 지나가는 바퀴벌레들을 지켜보는 일처럼 어렵고 난감한 일임을 알고 있고, 타인과 함께 하는 것, 타인을 바라보는 것의 슬픔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집이 해설을 붙이고 나오는 것과 달리 이 시집은 어떤 해설도 없다. 오롯이 시인의 시 자체 뿐이다. 시인은 이에 대해 “시와 노래는 많이 훔쳐갈수록 아름다워지는 법이니까요.”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이 시집에서 어떤 것을, 얼마만큼 훔쳐가느냐는 전적으로 이 시집을 읽는 이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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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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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연 시인은 몇 권의 시집 외에도 <마음사전>과 <시옷의 세계>라는 두 권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두 권은 모두 시인 나름대로 단어들을 정의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들이다. 모든 시인과 소설가들의 머릿속에는 각자 나름의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책으로 내어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작가는 많지 않다. 이것은 곧 김소연 시인이 그만큼 여러 말들에 자신만의 옷을 입히는 걸 즐기고 또 중요하게 여김을 알 수 있다. 위의 책 두 권 뿐 아니라 시인의 이런 특성은 시인의 시집들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표제작에 있는 이 구절은 위와 같은 시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시집 전체에 드러나는,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시인의 태도 혹은 바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위 문장을 읽으면 시의 화자는 현재 죽은 상태가 아닌, 삼각형처럼 죽고 싶어 하는 ‘바람’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상태를 삼각형이라는 눈에 보이는, 선명한 무언가로 표현하고 싶은 것 또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시의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시집 뒤쪽에 실린 발문에서 황현산 평론가는 ‘너의 명증한 수학자가 두뇌의 민첩함과 숨을 멈추고 잠시 죽음 속에 들어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아침마다 「수학자의 아침」을 맞는 것도 그 때문이지.’라고 이야기 한다.

   시집을 다 읽은 후 시집의 제목을 곱씹어 보면 ‘수학자’의 자리는 곧 시인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이라는 낱말에 김소연 시인은 ‘수학자’라는 옷을 입히는 작업을 한 것이고 나는 이 시집 전체가 그 옷을 입히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집의 또 다른 시「새벽」을 보면 시인은 이 시에서 도시를 이야기하며 ‘무서운 짐승을 숨겨주는 무서운 숲이 걷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뒤 이어 ‘그곳에서 해가 느릿느릿 뜨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해가 뜬 후에는 아침의 시가 올 테고 그 시간은 이 시집 전체에서 시인이 원하고 머물고 싶어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웃거리는 햇볕이 방 한 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이 시집에 있어 ‘아침’이라는 시간은 위에서도 말했듯, 중요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먼지가 보이는’ 시간이고,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대는’ 시간이다. 시인은「장난감의 세계」에서 ‘아침에만 잠시 반짝거리는 수만 개의 서리’라고 아침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런 문장들을 통해 우리는 이 ‘아침’이라는 시간이 다른 시간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아침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 나는 그 답을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그래서」부분) 라는 시 구절에서 찾아보았다. 그것은 ‘슬픔’이 머무는 시간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인용한 부분의 아래를 보면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라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듯 시인은 어떤 슬픔의 상태 안에 머물고 싶어 하는데 시를 통해, 아침이라는 시간에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멀어졌지만/ 저것은 출발을 한 것이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해보이려는 태도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은 현재 시인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어 하는 태도이다.

   시 속의 화자들이 이렇게 줄곧 멀리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살 수 없는 세상’에까지 가닿게 한다. 「여행자」의 ‘나’는 ‘살 수 없는 장소’에서 그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햐한 사람이 서있을 자리’에 서서 바깥을 본다. 어쩌면 이 시의 제목인 ‘여행자’의 위치는 ‘수학자’에 이어 시인이 서 있는 또 다른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쏟아진다면」이라는 시를 보면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라는 화자의 고백으로 시가 시작됨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 시에서 더 멀리 가는 것을 ‘아이의 마음’이 되는 것과 같게 이야기 한다. ‘목적 없이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는, 그런 아이의 마음 말이다.

   책날개에 인용된 황현산 평론가의 발문 중 나는 김소연 시인을 두고 ‘지금 한 줌 물결로 저 먼 바다를 연습하고 실천’해 보려한다고 부분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인의 이런 태도 역시 이렇게 현재에서 멀리 가 보려는 마음과 연장선에 놓인다고 여겨졌다.

 

   ‘아슬아슬해, 라고 말하려다, 아름다워, 라고 하지요’

  「격전지」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이것은 곧 시인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은 도무지 슬픔을 모르는 사람들 같고, 더 이상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슬픈 일은 너무나도 많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집 안 「연두의 고통」이라는 시를 보게 되면 이 ‘연두의 고통’은 곧 새잎이 나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벌레가 갉아먹은 하나의 나뭇잎 안에서 ‘격투의 내력’을 읽어낸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은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이라는,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비유와 만나게 된다. 시인은 벌레와 나뭇잎이 서로를 견디며 상처 내며 살아가는 것, 또 연두색의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을 우리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시는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로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만든다’라는 서술어에 오래 눈이 갔다. 사실 벌레가 나뭇잎의 특정 부분을 갉아 먹는 일은 없다. 그저 벌레가 갉아먹는 곳이 나뭇잎이 갉아 먹힌 곳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에서 슬픔을 겪는다. 그리고 그 슬픔으로 어떤 안위를 얻는다. 시집 전체에 은은히 배어 있는 이 슬픔들을 모두 지난 후, 시집을 덮게 되면 어느새 시집 안의 슬픔이 우리 안에 배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슬픔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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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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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소설 속 ‘나’의 무조건적이면서 무모한 사랑에 압도당해 그녀의 사랑에 휩쓸리듯 책을 읽어 나갔었다. 그런 탓에 그녀 외에 다른 인물들, 예를 들면 한 순간 미망인이 되어버린 지빌레나 기찻길에서 끔찍하게 생을 마감한 힌리히 슈미트 같은 인물들은 눈에 담을지언정 미처 마음에 담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게 되니 화자인 ‘나’의 삶이 처음보다 더 폭 넓게 다가오면서 그녀의 삶 속에 있으면서, 그녀의 삶과 다른 듯 닮은 주변 인물들의 삶 역시도 눈에 그리고 마음에 들어오게 되었다.

   주인공 ‘나’를 비롯한 ‘나’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의 바닥에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가 깔려있다. 이로서 소설은 한 국가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처럼 내밀하게, 개인의 역사를 국가의 역사처럼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보여 주게 된다.『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소설의 이런 부분에 대해 ‘독일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격변이 개인의 삶에 가져온 엇갈림과 비틀림을 그녀 주위의 다른 인물들을 통해 포착해 내면서, 이 소설이 그리는 사랑의 사건을 역사의 사건으로 끌어올린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물들은 모두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건 다시 말해 삶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삶의 한 부분으로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어쩌면 삶은,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나’인 그녀의 인생을 따라 가다보니 자연스레 이런 생각에 닿게 된 것이다.

 

 

‘내 사랑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연인 프란츠와 헤어진 후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집 안의 모든 거울을 깨뜨린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연인이 남기고 간 안경을 쓰고 생활하면서 자신의 시력까지 망가뜨리게 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내 사랑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세상은 물론 시력이 망가져 자기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로 망가뜨리는 것. 이별 후에 이렇게 주인공이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또 자신과 자신 스스로의 관계를 부서뜨리는 것은 프란츠가 ‘나’에게는 곧 세상이었으며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에 걸쳐 모니카 마론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수 있지만 특히 이런 사랑을 잃은 주인공의 상태를 말하는 소설 초반에서 그 문장들은 더욱더 아름답고, 슬프며, 그렇기에 말 그대로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동물이군요.”

   이 말은 ‘나’의 사랑인, 프란츠가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이다. 물론 이 문장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나’가 아닌 아주 오랜 전에 멸종해버린 공룡의 화석이지만 나는 이 말이 동시에 주인공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소설 속 거대한 공룡의 화석에 자주 ‘나’의 어떤 부분들을 겹쳐보게 되었다. 아주 오랜 시절을 죽은 채로 보내온 공룡의 화석은 마치 프란츠와 이별한 후 어떤 면에서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중반부를 넘어서 ‘나’가 프란츠와 그의 부인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후 이 공룡화석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라고 이야기하며 이런 공룡성에 대해 ‘원시적인 어떤 것’, ‘격세유전의 폭력성’ 등을 이야기한다. 이런 서술들과 반복해 등장하는 공룡 화석의 이미지는 ‘나’가 하는 사랑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부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어떤 단단하고 아주 원초적이기도 한 복합적인 결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슬픈 짐승’

   나는 이 소설을 읽고 100자 평에 이렇게 썼다. ‘ ‘슬픈’ 상태와 ‘짐승’의 어떤 상태. 이것은 곧 소설 속 ‘나’가 하는 사랑의 상태이며 우리 모두가 사랑할 때의 상태이기도 하지 않을까. ’라고. 그리고 나는 덧붙여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제대로 슬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사랑 속에서도, 삶 속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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