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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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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핀천의 글이 처음 번역된 것은 아니지만 이 작가의 글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핀천의 초기작품들을 모아놓은 작품인데다 1편을 빼고는 전부 대학 시절 썼던 작품이라는 단편들은 아주 편하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소설들만을 읽는데 조금 재미가 없다고 생각 되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이 작가의 소설이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책의 앞에 붙어 있는, 약 단편소설 한 편 정도 분량의 작가서문은 다른 책들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작가 서문을 보면 작가가 그 당시 어떤 소설을 쓸 때의 상황과 그 글을 쓰게 된 배경 같은 것들이, 또 작가가 그 작품에 대해 스스로 미흡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스스로 서술하고 있다. 이 작가 서문이 모두에게 좋고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반대로 모두에게 좋지 않고 필요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독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핀천의 작품에 조금이나마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구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로지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이 서문이 빼앗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두 경우다 아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작가 서문을 조금 읽다가 소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은 작가 서문을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고 이것을 작가인 핀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핀천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두고 ‘나는 중년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 실제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인물들은 어리고(실제 물리적인 나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성숙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인물들이 작가의 젊은 시절의 모습들이 어느 정도나마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인물들에게 더 애착이 갔던 것 같다. 그들의 모습이 아직 삶에 서툴고 삶을 알 수 없는 내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소설을 읽으면 이 작가가 이 소설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알아차리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저 문장에서 문장으로 느리게 넘어 가다 보면 그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렇게 읽어 내려가는 문장들이 쌓여 가면서 그 사이 사이에서 풍겨지는 느낌이나 분위기들은 하나로 크게 이어져 소설 전체를 감싸게 된다. 그러면서 이슬비가 서서히 몸을 적시듯, 그의 문장들은 그 문장들이 풍기는 분위기들은 읽는 독자를 서서히, 느리게 적셔나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잘 느껴보면서 그 사이에서 최대한 흠뻑 자신을 적셔 가면서 읽어 내려가기를 권해 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소설들이 정확히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예를 들어「이슬비」에서 주인공이 불현듯 사람들을 따라가 시체들을 건져내는 장면 같은 곳에서 어떤 강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 이미지가 여러 가지들을 불러 낼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 책의 단편들을 보면 인물들이 지내는 장소가 꽤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 장소에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이슬비」에서의 군대나「로우랜드」에서의 쓰레기 폐기장,「엔트로피」에서의 번갈아 보여 지는 아파트 등이 그렇다. 작품들을 읽다 보면 어느 소설에서나 그렇듯 이 장소들은 이 인물들이 물리적으로 거하는 공간인 동시에 어떤 심리적인 공간, 혹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움직이고 생활하는 인물들은 그곳에서 어떤 안정된 상태를 취하고 있다기 보다는 계속 뭔가 껄끄럽고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작가가 이것을 그의 문체로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려는 것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려는 것을 최대한 문장으로 받쳐주는 것 같은 그의 문장 혹은 문체가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은 후 번역된 핀천의 장편도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그 책보다는 처음 핀천을 만나게 된, 핀천 본인이 초기에 쓴 이 책이 내게는 더욱더 오래 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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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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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귀는 아주 깊은 우물입니다.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세요.‘

  소설 속 구동치는 위와 같이 말한다. 나는 이 말이 소설 속 구동치의 대사인 동시에 작가 김중혁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적건 크건간에, 저마다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그 비밀은 이 소설의 인물들처럼 누군가를 헤칠 수도 있고 비밀의 주인인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수도 있다. 저마다 그런 비밀들을 껴안은 채, 때론 그 비밀이 정녕 나에게 진정한 비밀인 것인지도 모른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밀의 주인이 사라진다면 비밀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구동치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딜리팅 하며, 그 사람의 비밀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일을 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 끝에 가 비밀파일들을 다 지우기 전까지, 그 비밀들을 모두 구동치 본인이 껴안은 채 사는 인물이다.

   사람들이 죽고 나면 혹은 기록이나 비밀이 삭제되고 나면 그것들은 정녕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특성을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 것들에 서사를, 이야기를 입혀 주는 것이 소설의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비밀을 가지고 있던 구동치의 모습에서 작가 김중혁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작가는 아무리 사소한 비밀, 기록이라도 그것이 그 주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중요한 삶의 이력임을 알고 삶의 고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구동치라는 인물에게 그 비밀들을 지우는 딜리터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이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그것을 지우는 일 역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관심받기 위해 여러 기록들과 비밀들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흔적들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일 것이라 생각한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기억을, 비밀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라면 뒤에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이 그런 기억을, 비밀을 이 세상에서 없애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주인공 구동치는 자신이 사는 악어빌딩을 이야기하며 ‘땅을 깊게 판 다음 음식물 쓰레기와 동물 사체, 곰팡이, 사람의 땀, 녹슨 기계를 한데 묻고 50년 동안 숙성시키면’ 날 것 같은 냄새가 악어빌딩에서 난다고 이야기한다. 이 지독하고 부정확한 냄새는 어쩌면 켜켜이 묻어 두고 싶은 비밀의 냄새이며 우리 삶의 냄새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냄새 안에서 악어빌딩의 인물들처럼 누군가와 부디끼며, 누군가를 의심하며, 누군가를 마음에 품으며 살아간다.

어느 인터뷰에서 김중혁 작가는 절친인 김연수 작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자신이 죽으면 하드디스크를 버려 달라고 이야기 했고 실제 이 대화가 이 소설의 착상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소설을 써내려가는 마음, 그 이유에는 여럿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마음에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위에 인용한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작가 본인일지도 모른다.

 

 

   ‘썼는데, 누군가 지웠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소설 속 구동치에서 작가 김중혁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실제 작가는 인터뷰에서 구동치가 시니컬하고 무심하단 면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쓴 인물 중에서 가장 작가 본인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구동치의 모습에서 김중혁 작가를 본 이유는 이런 캐릭터의 유사함 때문이기 보다는 하는 일의 유사성, 삶을 대하는 태도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끝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보면 한 가운데 ‘썼는데, 누군가 지웠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작가의 말을 보면서 아마 작가는 이 소설을 다 쓴 후 세상에 내보내면서 자신에게서 지운 후 또 다른 새로운 인물을, 이야기를 써내려 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구동치가 하는 일이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는 소설가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겠죠.’라는 김중혁 작가의 말을 읽으며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다 읽은 후 내가 뭘 지우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나의 과거를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생각, 어떤 방향으로 걸어 나갈지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삶을 살든 그 삶은 우리의 기억으로 남게 되고 어떤 모양으로든 이 세계에 흔적들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후회가 적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그 흔적들에 대한 후회도 적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런 생각들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냥 재밌어서 한 장 한 장 넘기기 바쁘고, 이야기를 따라가기 바빴다. 하지만 작가의 말까지 다 읽은 후 책의 뒷 표지에 홀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서서히 찾아 들었다. 김중혁 작가가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삶을 이야기 해줄지 기대가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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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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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작가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로 그와 그의 친구 파울의 우정을 작가가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오래 전 베른하르트는 폐병으로, 파울은 정신병으로 혹은 가족들에게 정신병으로 취급을 당하는 어떤 행동들로 동시에 가까운 위치에서 입원을 하게 됐을 때를 소설의 시작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둘의 우정과 함께 파울의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드러나게 된다. 둘의 우정을, 둘이 얼마나 비슷하고 서로에게 의미 있는 친구였는지를 말해주던 언어로 친구 파울의 병을, 깊어지는 정신병을 말하면서 작가는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으로’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살아간다. 베른하르트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방식이 언어가 될 수 있고 그림을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그림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사물이나 공간이 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이 가진 방식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의 존재를 우리에게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각인시킨다.

  여기서 ‘죽음’이란 것이 이 소설의 파울처럼 정말 물리적인 죽음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그 사람의 존재를 잊고도 아무 영향 없이 살아가는 것 역시 내 안에서, 내 삶에서 그 사람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돼버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베른하르트는 ‘단지 과거에 적어 놓은 메모들 사이에서 파울에 관한 내용을 찾아서 읽는 일에만 집중했다. 길게는 십이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메모의 글을 통해서 그를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내 기억 속에 영원한 현재로 간직하고 싶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실제 이 소설은 ‘나는 그의 무덤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끝나게 되는데 작가는 이렇게 파울의 무덤을 찾아 가지 않고 그와 보냈던 시간들을 한 편의 글로 남기면서 언제까지고 친구의 기억을, 그 존재를 현재에 머무르게 하고 싶어 한다.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장소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오직 떠나온 장소와 도달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한다.’

  베른하르트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빈번하게 도시를 바꾸어 살아 왔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냥 ‘자동차에 앉은 채로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행복한 순간은 오직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뿐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이런 성향이 얼마 안 가서 치명적인 광기로 이어질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광기로부터 지켜 주기까지 했다고 고백하게 된다. 베른하르트의 이런 고백을 읽으며 나는 그의 친구 파울의 광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병이 없는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이 자신의 정신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았던 파울의 인생을 보면서 무기를 제조하면서 예술이나 철학 등에는 관심이 없었던 자신의 가문, 가족들을 ‘견디는’ 생존 방식으로 광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의 어떤 고정된 ‘자리’도 견딜 수 없었던 베른하르트처럼 파울 역시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의 가문, 자신의 ‘자리’가 견딜 수 없어 ‘광기’를 통해 전력으로 다른 곳으로 도망쳤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삶의 기나긴 시기에 그를 가르친 것은 결국 정신질환자들이었고, 나를 가르친 것은 폐병 환자들이었다.’

  우리는 삶의 어떤 시기마다 삶의 한 부분 부분을 배워 나가고 그 안에서 성숙해진다.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인 베른하르트와 파울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인물들을 보며 나는 내 자신이 성숙해지는 삶의 시기가 대부분 기쁘고 편안한 시기 혹은 그런 상태에서보다 자신의 가장 어렵고 아픈 부분에서일 때가 많음을 새삼 생각하게 됐다. ‘정신질환자들 사이에서 성숙해지는 것은 폐병 환자들 사이에서 성숙해지는 것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문장을 보면 우리는 결국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고통과 다르지 않게 놓는 것에서 우정 혹은 관계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이 소설에서 베른하르트도 이야기 하듯이, 우리가 삶에서 정말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하지만 파울은 베른하르트에게 그런 의미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며 그렇기에 이런 소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결국 나에게 정말 의미 있는 사람을 만드는 일,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일 그래서 그 사람을 나에게 더욱더 의미있게 만드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이 소설의 두 인물의 우정과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독서란 것이 본래 어떤 답을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이 아닌, 그런 생각들 자체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니 그 질문에 어떤 생각을 내놓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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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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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어 라이프』에 실린 소설들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작은 타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아간다. 현실에서의 우리가 각자의 터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시간 때문에 혹은 어떤 관성 때문에 삶에서 보고도 보지 못했던, 보고도 느끼지 못했던 삶의 장면들은『디어 라이프』안에서 보고 느끼게 된다.

 

 

 

   1.

   “확대경을 보냈으니 돈을 주세요.”

 

 

 

  「코리」에서 코리는 자신과 불륜관계에 있는 하워드에게 이집트에서 엽서를 보낸다. 하지만 그 엽서에는 우리가 흔히 이집트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피라미드도, 스핑크스도 없다. 대신 ‘무너진 피라미드’라 적혀 있는 지보롤터 암벽 혹은 ‘멜랑콜리아의 바다’라는 말과 함께 있는 갈색 들판 같은 것들이 있을 뿐이다. 엽서를 보낸 발신자 코리는 수신자 하워드에게 이런 모습들과 함께 “확대경을 보냈으니 돈을 주세요.”라는 말을 보탠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디어 라이프』에 실린 14편의 소설들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14개의 확대경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워드는 위와 같은 코리의 말에 “확대경에 결함이 있으니 환불해주세요.”라는 농담 섞인 답을 내놓는다. 코리는 이 엽서를 통해 하워드가 있는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그 풍경이 담긴 엽서로 확대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먼 곳에서 보내는 ‘엽서’라는 형식 자체로 하워드에 대한 코리 자신의 마음을 확대해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돈을 달라는 코리의 말은 사실 자신이 보여준 마음에 대한, 그 마음에 맞는 대답을 달라는 얘기와 같다.

 

   비단 이 소설에서만이 아닌, 작가는 소설들의 다양한 장면들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를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삶의 어떤 순간들을 확대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돌리」에서 남편 프랭클린이 돌리와의 시간을 가지는 걸 보고 집을 나온 ‘나’는 혼자 레스토랑 화장실에 들렀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 뒤의 문장들을 보면 그녀가 놀라는 이유는 자신이 너무 늙었고 초라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을 유혹할 어떤 남자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앨리스 먼로는 이 장면 뿐 아니라 어떤 장면에서도 인물의 심리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만의 섬세한 문장들을 통해 인물의 어떤 절망을, 두려움을 확대해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2.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다.’

 

 

   역시 실제의 우리 삶이 그러하듯, 이 책의 소설들은 시작을 하면 어디로 갈지 어느 곳을 통과 할지 모르고 앞으로 간다. 그것은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진데 이것은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기차를 타고 달리는 일과 비슷하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탄 기차가 어느 역을 거쳐 어느 역을 향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표면적인 도착지일 뿐이다. 실제로 인물들은 거기에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는지, 그 일로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집의 첫 소설「일본에 가 닿기를」이란 소설에서 주인공 그레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딸과 함께 기차에 오른다. 도착하는 곳에 그 남자가 있을지 없을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레타는 그 기차에서 그레그라는 남자를 만나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딸이 잠든 사이 그레타는 그레그와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누고는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딸은 자리에 없고 그레타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에 사로잡히며 딸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기차의 칸과 칸 사이, 흔들림이 심한 그 곳에서 딸을 발견한다. 흔들리고 덜컹대는 그곳은 마치 우리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는 어떤 시간 또는 어떤 감정처럼 보인다.

그레타와 딸은 마침내 도착지에서 내리고 그곳에서 하워드와 마주하게 된다. 위에 인용한 장면은「일본에 가 닿기를」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레타는 자신도 모르게 멀어지는 딸의 손을 느끼며 그저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린다는 말은 이 소설의 인물만이 아닌 소설집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처럼 보였다.

 

 

   이 소설 뿐 아니라「자갈」에서 ‘나’는 언니가 물 속에 뛰어든 장면을 떠올리며 자신이 왜 그 때 바로 어른들에게 그 사실을 않은 것인지,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이 기억하고 알고 있는 전부― 그것이 한 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하다고 해도 ―를 가진 채 앞으로 간다. 거기서 ‘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뭐가 어떻든 간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3.

   “그건 사람 때문이 아니야. 어떤 기운 때문이지. 주문에 걸리는 거야.”

 

 

   우리는 살면서 분명 내가 했지만 내가 했다고는 믿기 힘들 일들을 겪기도 한다. 또 내가 했지만 내가 했다고 믿기 싫은 일들을 만나게 된다.『디어 라이프』를 읽다 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떤 것에 이끌려 삶의 궤적이 달라진 인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못하겠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끝까지 감당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설명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실수라는 말뿐.‘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지 못한다. 굳이 어떤 이유를 대자면 그것은 ‘어떤 기운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에 인용된 부분은「아문센」에서 가져온 것이다. 소설에서 ‘나’와 ‘그’는 결혼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지만 ‘그’는 느닷없이 그 결혼을 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고는 그는 그저 실수였다는 말만 남길 뿐이다.

또한 다른 소설「자갈」에서 물에 빠져 결국 죽음을 맞이한 코리는 소설에서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소설 속의 ‘나’도 그 소설을 읽는 우리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밤」에서 ‘나’가 밤마다 느끼는, 동생의 목을 조르고 싶은 것 역시 어떤 이유도 없다. 그저 그것은 ‘일식이나 월식처럼 갑자기 덮치’어 소설 속 인물의 목숨을 뺏기도 하고 삶을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작가 앨리스 먼로는「자갈」이라는 소설에서 닐을 묘사하며 ‘완벽한 체격. 형체를 갖춘 유령’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작가가 닐에게 가지는 이 시선이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혹은 생각하는 시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쩡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실 얼마 되지 않음을 작가는 이런 장면들을 통해 표현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처럼 14편의 소설들을 통해 인간이나 겪어야 하는, 혹은 겪을 수 있는 감정들을 기품 있게 보여준다. 더한 것도 뺄 것도 없어 보이는 그녀만의 언어들을 통해서 말이다.

   작가가 그려 내고 있는 생을, 인물들을 통과해 나오면서 처음에 나는 ‘놀랐고, 그 다음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고, 이어서 한없이 마음이 놓’이게 된다. 이런 작가가 있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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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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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겠다는 소망은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하나로 만들었다. 그 둘에게는 어떤 틈도 존재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해 보이는 그들의 꿈으로 시작된 생활은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점점 더 균열이 생긴다. 가정의 축을 이루고 있는 부부,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이 간극을 벌이면서 둘 사이에 어떤 틈을 만들어내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에 보면 해리엇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혼전에 성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순수를 지키고 바른 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이 나온다. 나는 해리엇이 남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또 결혼을 함에 있어서 타인보다 한 단계 위에서야 하는 고통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소설에서는 해리엇의 이런 욕망들이 고통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해리엇이 결혼할 때 가졌던 꿈과 이상이 얼마나 허상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그것이 얼마만큼 주체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닌지를 보여주는 반증 같았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결혼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정에 맞지 않는, 자신들의 경제사정에 많이 넘쳐 부모님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집을 장만한다. 그곳에서 해리엇은 남편 데이비드와 아이들을 여럿 낳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것을 계획하고 다짐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고 가족이 균열이 일어나기 전인 시점에도 위 계획은 별로 주체적인 계획이 못 되어 보인다. 위에서도 말했듯, 부모님의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무리를 해서 자신들의 삶의 기반인, 집을 마련한 것이 오로지 자신들이 원해서 한 일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생각된다고 해도, 그것은 타인들의 시선, 세상의 시선 또 남들의 욕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화 된 것이리라 생각됐다.

   해리엇의 남들보다 위에서려는, 고통스러운 욕망의 모습은 나르시시즘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마음이 지치고 텀 없이 아이를 가진 탓에 몸이 많이 망가졌지만 계속해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것을 보면서 비정상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해리엇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는 행동이지만 왠지 현실의 행복과는 뒤틀린 모습 같아 보였다. 힘들지만 다시 또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는 것의 반복은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행동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이를 통해 아이 자체를 보고 그에 따른 기쁨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보다 한 단계 위에 서야 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타인을 자신의 밑에 두는 과정에서 타인의 희생은 어떤 모습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 희생자는 해리엇의 어머니인 도로시라고 생각 한다. 해리엇이 더 많은 아이를 낳을수록 도로시는 지쳐간다. 해리엇의 뒷바라지를 하며, 전에 나온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하기에 도로시는 점점 더 늙고 말라가는 것이다. 해리엇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계획한 것에 따르며 살아가는 도중에 그의 어머니 도로시는 그저 해리엇을 거드는 존재로 희생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해리엇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살 삶의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60페이지를 보면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이야기에서 또한 해리엇의 심리가 나르시시즘과 관련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해준 얘기에서 아이 하나는 숲속에서 길을 읽은 후 연못가에 앉아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물에 비친 소녀는 고약한 미소를 짓게 되고 아이는 그 소녀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들어갈 거라고 느끼게 된다. 남편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해리엇은 자신의 이야기 같아 괴로워한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은 자연스레 나르시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이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들어갈 거라고 느끼는 부분은 데이비드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해리엇의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째 아이를 가지며, 다른 아이들을 가졌을 때와는 다른 몸의 이상을 느끼고 자주 불안해하는 해리엇의 모습은 자신의 행복이 깨지게 될까봐, 자신이 애써 계획하고 만들어온 현실이 깨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읽혔다.

 

   다섯째 아이인 벤을 가진 8개월 째, 해리엇은 브래트 박사에게 가서 유도분만을 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브래트 박사는 이를 거절하게 되고 해리엇은 그에 반응하여 자신을 그저 히스테릭한 환자로 보는 것이냐며 브래트 박사를 비난하게 된다. 벤을 가진 후 점점 더 시간이 흐르고 벤이 세상에 나올 때가 다가오며 해리엇은 자주 불안해하며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벤의 출산이 가까워져 오면서 해리엇은 자신의 말대로 히스테릭한 사람이 된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해리엇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힘들어 하게 된다. 해리엇의 이런 신경증 적인 모습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날 신경증은 그 개인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 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심리적 또는 신체적인 기능장애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되는 것이 통례이다. 체험이 그 개인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따라서도 좌우된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필연적 성질로서는 개인의 원망 또는 욕구의 충족이 거부되는 좌절체험이나 갈등체험에 의하여 자기의 안정성이 심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위기적 상황에 빠지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의미에서 본다면 신경증은 위기상황에 있어서의 일종의 인격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위기적 상황에 의해 야기되며, 또는 위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불안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아의 방위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계상황에 있어서의 거부반응이라고 보는 입장도 이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해리엇은 이전의 아이들을 가졌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경험을 겪으면서, 자신의 앞날에 도래할 불안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에 있어 닥쳐올 위기상황에 있어서 거기서 야기될 불안을 피하기 위해 히스테릭한 부분이 나왔으리라 예상된다. 해리엇이 느낀 이런 불안을 다루는 심리적 방어 기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억압이다. 억압은 모든 인간의 욕구 자체를 비롯해서 심리적 갈등에서 유발되는 긴장이 의식수준으로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는 기본 방어 기제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긴장이나 불안 같은 감정을 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조절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 같은 노력은 심리적인 균형과 현실에서의 적응을 목표로 이루어지는데, 억압만으로 이 목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신경증을 가진 환자들은 정신증 환자들이 보이는 망상이나 환각, 괴상한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만큼 불안정한 정서와 생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신경증 환자들은 현실 감각이 있으며 자기의 증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끼고 이 때문에 증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게 된다.

  소설에서 보면 해리엇은 벤을 가진 상태에서 낮이고 밤이고 걸음을 옮기고 거의 뛰다시피 빠르게 움직인다. 이것은 하루 종일, 몇 달 동안 계속된다. 소설에서 이 부분을 보다보면 해리엇이 그렇게 걷는 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단지 걷고 싶어 걷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걷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걷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증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끼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애를 이런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섯 째 아이 벤을 낳은 후 해리엇과 주변 사람들은 벤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름을 느끼게 된다. 그 사실이 벤이 자라면서 점점 더 명확해지는데 해리엇은 이러한 사실에 힘들어한다. 82쪽을 보면 해리엇이 데이비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 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 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잖아!’ 이에 대해 남편 데이비드는 해리엇에게 그것은 과장한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벤은 점점 더 변해가고 힘이 세져가 해리엇을 비롯한 가족 누구의 통제도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마다 해리엇의 집을 찾아오던 사람들도 이런 벤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집에 발을 들이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데이비드는 그의 부모와 합의해 벤을 수용소로 보내게 된다. 그렇게 보낸 후 분노를 느끼던 해리엇은 날마다 죄의식과 공포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따라 해리엇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게 되고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소설에서는 이것을 그저 악몽을 꾸었다라고만 나와 있고 그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의 회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의식을 통해 억압된 무의식의 것들은 말실수나 증상, 꿈을 통해 회귀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그 중에 나는 꿈을 이 악몽과 연결 시켜 생각했다. 애써 억눌러왔던 벤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꿈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해리엇은 악몽을 꾸고 깬 후에 수용소에 있는 벤을 찾아가게 된다.

 

   수용소에 도착한 해리엇은 오물에 거의 널브러져있다시피 한 벤을 본 후 충격을 받고 다시 집으로 벤을 데리고 오게 된다. 벤이 태어나고 평안이 깨졌던 해리엇의 집안은 해리엇이 데이비드를 수용소에서 다시 데려 온 후 균열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해리엇과 벤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의논 없이 벤을 데려온 해리엇의 행동에 대해 상처를 받고 점점 더 벤을 챙기느라 다른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해리엇과 벤을 가족에서 분리시키게 된다.

 

   전문가와의 상담에서 해리엇은 이런 말을 한다. ‘전 제 자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 말을 믿기를 기대하지 않지만요. 하지만 이건 정말 불쾌한 농담이에요. 난 벤이 태어난 이후 줄곧 벤 때문에 비난을 받아온 것 같아요. 난 죄인처럼 느껴요. 사람들이 내가 죄인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요.’ 이 부분을 통해 해리엇의 심리는 죄의식과 자기비난으로 간 것처럼 보였다. 죄의식이란 기본적으로 양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에고 슈퍼에고의 이론과 연관 지어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리엇이 아무리 벤을 낳은 엄마라고 해도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고 수용소에 다시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리엇의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해리엇에게 도덕적 불안, 즉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는데, 에고와 슈퍼에고는 협력하여 생물학적 욕구인 이드를 통제한다. 이 통제를 방해하는 요소가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 도덕적 불안이라는 것이다.

   해리엇의 이런 도덕적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준 것은 해리엇의 슈퍼에고였을 것이다. 슈퍼에고는 성격의 나머지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리감은 에고와 슈퍼에고와의 갈등, 고통스런 열등감 또는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드러나는 갈등으로 인해 명백한 것으로 여겨진다. 벤에 대한 해리엇의 의식을 그녀의 양심, 도덕과 같은 슈퍼에고가 통제했고 그것은 위에서 말한 분리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해리엇과 벤이 가족에게서 분리되는 모습은 이것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끝이 없어 보이는 다락의 어둠뿐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애는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서는 것을 느꼈고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본능적인. 이성으로는 그 애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포로 온몸이 뻣뻣해졌다.’

 

   이 부분에서 나는 해리엇의 이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녀가 벤에게 느끼는 이성적 감정이 아닌,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을 통해 어쩌면 해리엇은 이드에서는 벤을 통해 해리엇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부분의 바로 밑에 부분을 보면 ‘자신이 인간임을 모르고 멀고 먼 과거로 되돌아간 이 위험한 야생의 다락에서, 그녀는 인간적인 요구를 담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다정하게 말했다.’라는 부분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나는 이드의 영역을 단지 해리엇의 이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 전체의 이드로 확장시켜 볼 수 있었다.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과 의식, 또한 그것들을 통제하는 초자아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인, 158쪽에 보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했다. 「그 불쌍한 사람들. 우리 거기에 가요, 적어도 일주일이라도……」불쌍한 데이비드……. 항상 그런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을 해리엇은 알았다. 때때로 불쌍한 해리엇, 그러나 그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무책임한 해리엇, 이기적인 해리엇, 미친 해리엇……’이라는 부분이 등장한다. 나는 여기서 소설의 초반부와는 다르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해리엇을 밑에 놓고 자신들이 그 위에 서는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를 정신분석 용어로 도입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기의 육체, 자아, 자기의 정신적 특징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가 쏠려 있는 상태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유아기에는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 상태를 1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자라면서 리비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 외부의 대상(어머니나 이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애정생활이 위기에 직면하여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유아기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2차적 나르시시즘이다.

   소설에서 벤의 유아기 때의 모습과 그의 엄마 해리엇의 모습을 통해 이런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벤의 모습을 통해 1차적 나르시시즘을 보여줬다면 벤과 해리엇의 관계를 통해 2차적 나르시시즘의 상태를 보여줬다고 봤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해리엇과 벤의 모습이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고도 보였다. 소설의 앞부분에 보면 벤은 자주 ‘불쌍한 벤’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위의 부분을 읽으며 앞에 벤의 이런 중얼거림이 오버랩 되었다. 결국 벤의 모습은 해리엇에게 있는 부분 중 일부이기도 하면서 인간 모두에게 있는 일부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또한 나는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해리엇이 자기경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것은 죄의식과도 연결 되는 부분일 것이다. 해리엇은 데이비드에게 ‘우린 벌받는 거야. 그뿐이야’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런 죄의식에도 또 나르시시즘에도 어느 정도의 자기 경멸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아이를 가지고 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집에서 보내게 한 것은 나르시시즘의 형태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 안에는 결국 자가 자신을 가학하는 태도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해리엇과 벤의 관계, 이 둘과 다른 가족과의 관계를 보며 인간 전체의 관계로 확장시켜 볼 수 있었고 프로이트의 이론인 이드와 에고, 슈퍼에고의 관계에서도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해리엇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겪게 되는 심리 변화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심리 중 하나이고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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