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
서민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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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알게 됩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뉴스와 일간신문의 기사, 인터넷 뉴스와 수많은 사이트에서 올라오는 정보, 그리고 요즘은 유튜브를 통한 영상도 다양합니다. 그러한 내용은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중요한 일처럼 보이지만, 곧 잊혀지고, 새로운 뉴스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은 오래전의 일들이 다시 부각되면서 잊혀진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2009년 3월 7일 배우 장자연씨가 서른 살의 나이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인의 자필로 작성된 7장의 진술서가 공개되어 이후 이 문서는 장자연 문건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방송을 통해 알려진 고인의 사망소식과 진술서에 대한 내용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어지는 경찰 수사를 통해서 결과가 발표되면서 사건도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은 의혹을 모두 해소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10년이 지난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고 장자연의 한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라는 청원이 시작되어 한달여 만에 23만건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출범한 '검찰 과거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재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재조사가 시작된 후인 2018년 7월, <PD수첩>에서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고, 방송에서 익명의 여인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그는 제작진이 보여준 사진 속에서 일부를 기억해내면서, 같은해 11월 과거사위의 참고인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잠시 한국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19년, 그가 과거사위 출석과 자신의 책 <13번째 증언>의 홍보를 목적으로 다시 한국으로 왔을 때, 그는 더이상 익명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윤지오입니다.

 

 이 책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은 고(故) 장자연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윤지오와 그의 행적에 대해 소개합니다. 윤지오라는 사람은 단순히 한 사건의 참고인으로 보기에는 그동안 수많은 화제와 사건을 만들었고, 지금은 캐나다로 출국하여 여러 이유를 들면서 한국으로 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2019년 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그가 짧은 활동을 마치고 출국하면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이며, 최근에도 그와 관련된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내용으로는 윤지오가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고 장자연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이후 그는 이 사건을 강조하고 자신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나선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유명해지면서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기를 원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가 한국에 와서 한 일은 단순한 참고인의 증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증언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었고, 유명한 방송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았으며, 그의 진술은 한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러한 순간은 한 사람에게는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빛에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인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했지만, 이러한 내용은 유가족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을 내용이었으며, 또한 그의 발언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의 말과 다른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의로운 사람처럼 세상에 나타났던 한 사람의 증인은 수많은 거짓말과 사기 사건을 남기고 한국을 떠나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며, 이 사건의 끝에는 수많은 피해자를 남겼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윤지오 라는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지나가는 뉴스를 통해서 이름을 듣기는 했지만, 그가 장자연 사건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하면서 문제가 되었는지 관심있게 보지 않았다면 지난 일들의 자세한 전말을 알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윤지오가 남긴 수많은 인터뷰를 비롯한 기록이 등장하고, 단순한 파편과 같은 수많은 일화나 사건을 통해서는 쉽게 보이지 않았을 내용이겠지만, 저자가 정리된 소주제와 설명으로 다시 구성됩니다. 그렇게 정리된 한 권의 책 안에서 다시 배열되면서 많은 사건의 조각과 같은 단서도 그 때는 보지 못했을 이 사건의 실체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생겼을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몇 달 전의 그 때였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결과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처음과 끝에서,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서문을 '윤지오를 잡읍시다!'라고 쓰면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알렸고, 끝부분에서는 '제2의 윤지오를 막으려면'이라는 내용으로 앞으로 다시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이번이 제1의 사건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제2의 사건이 생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의심해보고, 생각해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제2, 제3의 누군가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그 때에도 다시 '아이고, 또 속았구나' 하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마지막 부분 저자의 당부를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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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은 저자 서민 님이 보내주신 책으로 읽었습니다.

 신간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사기의 천국입니다. 사기꾼이 많은 이유는 사기꾼에 대해 제대로 된 응징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검사내전>을 쓴 김웅 검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기꾼은 어지간해서 죗값을 받지 않는다. 사기꾼이 구속될 확률은 재벌들이 실형을 사는 것만큼 희박하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사기는 남는 장사다."
- P7

다른 사기꾼들이 다 처벌을 면하니 윤지오도 그냥 넘어가줘야 할까요? 절대 안됩니다. 일단 윤지오는 고인이 된 장자연을 이용해 돈을 벌었습니다. 고인을 이용하는 것은 그 죄질에 있어서 차원이 다른 범죄이며, 이 과정에서 윤지오는 장자연의 유가족을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매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윤지오가 사기를 친 대상은 전 국민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똑똑한 대한민국 국민이 윤지오의 허술한 사기에 당했다는 게 저는 너무도 분합니다. 윤지오를 잡아와 죗값을 받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공무원이 말했던 것처럼 ‘개 돼지‘일 수도 있습니다.
- P7

제가 책을 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운지오를 잊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아직 윤지오가 용기있는 증언자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에겐 정신을 차리라고 일갈하고 싶었습니다.윤지오가 한국에 머무르는 두 달간, 윤지오의 충실한 스피커 역할을 했던, 하지만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는 우리 언론들의 문제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윤지오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 광경을 보고 싶어서지요. 캐나다에 있는 윤지오를 무슨 수로 잡아오냐고요? 윤지오의 말을 따라해봅니다. "책은 ... 분명한 건 이슈는 되니까 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윤지오를 잡아오는 것, 그래서 출판하는 거고." 윤지오를 잡아오라는 국민 여론이 비등한다면, 정부도 가만히 있진 못하지 않을까요? - P7

그래서 말씀드린다. 음모론에 빠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보라고. 어떤 것이든 맹신하지 말고 타인의 말에 귀를, 그리고 머리를 열어두라고.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영논리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이는 계속 등장할 테고, 그 때마다 우리는 ‘아이고, 또 속았구나‘ 라며 머리를 쥐어 뜯어야 하니까 말이다. 책을 읽는 것도 필요하다. 책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므로, 남의 의견에 선동되지 않게 해준다. 그러고 보니 선전, 선동에 우리 사회가 부쩍 취약해진 것도 스마트폰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 게 대세가 된 뒤부터가 아닌가?

윤지오 사건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빈다. 제2의 윤지오가 나오지 않도록. (페이지 254-255)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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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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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반갑습니다. 합본으로 만나는 새 표지로 시작해서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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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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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반갑습니다. 합본으로 만나는 새 표지로 시작해서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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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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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첫번째 질문입니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상연중인 브로드웨이의 극장에서 십대 소년이 다섯 발의 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피의자는 전직 경찰 오토 바우만, 피해자는 애덤 스펜서로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 없는 사이입니다. 그는 이 소년이 제2차 세계대전의 그 '아돌프 히틀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총격을 가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사실이 맞다면 여러분은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그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십대 소년을 아돌프 히틀러라고 생각했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는 조금 더 혼란스럽고 믿기 힘든 과거를 추적하게 됩니다.

 

 1947년 11월, 스무살의 오토 바우만은 패전한 독일의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극비사항인 여러 구의 시체를 보게 된 그는 어느 팀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 팀의 이름은 '아디 헌터'. 영국과 미국에서 지원한 여섯 명의 일급 요원으로 구성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임무는 '아돌프 히틀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부모님과 여동생의 죽음을 보았던 바우만에게 히틀러는 복수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디헌터는 히틀러의 부하인 하인리히 융케를 찾는데 성공했지만, 그가 자폭하는 바람에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난 소년으로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를 찾는데 실패하고 이들은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댈러스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바우만은 신문을 통해서 이전의 아디헌터가 찾던 그 일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이 며칠 사이에 갑자기 사망하고, 마지막으로 커티스 소령이 바로 눈 앞에서 죽게 된 다음부터는 마지막 남은 아디 헌터로 히틀러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히틀러는 이전의 모습과 다른, 20대의 젊은 애덤 휘슬러로 미국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킵니다. 고향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에서는 자본주의 실험이라는 악마적인 사건을 일으킨 다음 사라지고, 과거 그의 부하들을 모아 미국 전체를 뒤흔들 사건을 일으키기로 합니다. 젊은이의 몸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그는 이번에는 미국의 자본을 움직이는 미국 연방 준비은행의 일원에게 접근하여 그의 닿을 수 없는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그의 부하들을 통해서는 또 다른 사람의 결핍과 욕망, 그리고 공포심을 이용합니다. 그들이 다시 시작하는 '긴 칼의 밤'이라는 계획은 이번에도 어느 단계까지는 성공했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두번째 질문입니다.

 

 경찰 오토 바우만은 애덤 휘슬러라는 20대 청년에게 총격을 가하고, 피해자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뇌는 아돌프 히틀러이며, 패전 후 미국으로 건너와서 대규모의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중입니다. 피해자인 휘슬러가 계획한 범죄가 실행에 성공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위험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살해한다면 그러한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총격을 가하여 살해한 바우만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덤 휘슬러, 그러니까 머리속의 아돌프 히틀러는 과거의 부하들과, 남미에서 들여온 막대한 금과 은을 통해서 미국 경제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계획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수학자를 통해서 연쇄살인범과 접촉하고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될 사람들의 살인을 지시합니다. 히틀러가 그의 부하들과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움직이는 동안, 바우만은 혼자서 거대한 악과 같은 애덤 휘슬러를 추적해야 합니다. 위기의 순간,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바우만은 팔에 새겨진 그 번호를 통해서 유태인 단체 회장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이스라엘 모사드의 협조를 받기도 했지만, 이 싸움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마지막 아디헌터인 그의 임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질문입니다.

 

 경찰인 오토 바우만이 애덤 스펜서라는 소년을 아돌프 히틀러라고 생각하고 총을 쏘았지만, 실은 애덤 스펜서는 10대 소년으로 그가 말한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가 총을 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사람을 죽일 의도로 살인의 결과에 이르렀지만, 대상의 착오가 생긴 경우입니다. 살인죄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첫번째와 두번째의 질문에 등장하는 애덤 휘슬러와 오토 바우만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만약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 일을 알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한참 시간이 흐를 때까지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극비라는 것은 공개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일들이니까요. 그리고 세번째의 질문은 이 일이 한 사람의 착오 또는 잘못된 인식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착오에 의해 일어난 일이지만 살인의 의도로 실행한 일로 인해서 결국 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 이야기는 장용민 작가의 신작 <귀신 나방>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남미로 탈출하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기억과 뇌를 이식하여 젊은 이의 몸으로 새롭게 범죄를 일으켜서 미국과 세계에 다시 한번 커다란 사건을 일으키는 가상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귀신 나방>은 책의 본문에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리고 일어난 일들과 연관되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생물입니다. 진짜로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지만, 이 책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는 매우 잘 어울립니다. 전설 속의 괴물처럼 죽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반복하는 소설 속 악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액자식 구성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의 두 가지 시공간을 오가게 됩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퓰리처 상을 수상했지만 무고한 사람의 자살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 전직 기자 크리스틴 하퍼드가 오토 바우만을 만나면서 숨겨두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우만의 이야기를 통해 시작되는 과거 시점은 1947년에서 1960년대까지 계속되는데,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지만 오토 마우만과 애덤 휘슬러라는 서로 대척점에 위치한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오토 바우만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을 휘슬러로 살아있는 히틀러의 기억과 내면을 독자는 읽을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한 조각을 맞춰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야기 밖에 있는 크리스틴은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는 독자와 비슷한 입장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면서 두 가지 시점을 잇고 남은 의문점을 풀어가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2018년입니다. 1947년에서 거의 71년 정도가 지난 시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인1945년에 태어난 사람도 70대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가상의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만약 그 때 아돌프 히틀러가 죽지 않고 도피에 성공했다고 해도, 지금은 살아있을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그 때의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이 남아있지 않고 생존자는 앞으로 계속 줄어듭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전후에 출생했고, 언젠가는 이 일들도 역사책의 기록으로만 남겠지만,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남아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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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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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6월이 되었어요. 언제 그렇게? 벽에 걸린 달력이 벌써 다섯 장 지나간 요즘은 아침에 해가 일찍 뜨고, 저녁에는 늦게 집니다. 오늘은 4시에도 새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어요. 4시는 머릿 속에서는 한밤중, 그런데 조금씩 스미는 빛이 느껴지는 새벽이 되었더라구요. 벌써, 언제, 어느새.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사람은 마음에 큰 근심 있는 사람, 새벽이 될 때까지 밤을 지나 일하는 사람에게는 고단한 시간. 누군가 눈물 흘리는 새벽이라면 차가운 공기에 뜨거운 눈물 닿는 시간이 떠오릅니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은 일천(一千) 글자 미니에세이라는 부제가 있는 책입니다. 한 편의 길이가 다른 에세이보다는 길지 않아서 미니에세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만큼 수록된 글은 많습니다. 크게 5부로 나누어진 내용은 서로 다른 느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부인 <봄비 또는 안개>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꽃, 사물 등을 통해서 이전의 기억과 이어진 이야기를 꺼내고, 2부 <참 쉽죠?>에서는 '참 쉽죠?'라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화가 밥 로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영화의 한 장면에서 생각했던 이야기를, 3부 <장갑을 낀 시인>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일화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보이며, 그외에도 많이 알려진 <호밀밭의 파수꾼>, <자기 앞의 생>,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데미안>과 <롤리타>와 같은 책의 이야기를 하나씩 써 갑니다. 2부와 3부가 책과 영화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면, 4부 <파리의 날개처럼>에 이르면 고전속에 등장하는 명언, 오래된 경구, 그리고 멀지 않은 최근의 이야기 속에서 삶의 자세에 대한 성찰이 나타나고, 마지막인  5부 <먹은 밥은 글이 되고>에서는 앞의 많은 것들을 지나오면서 배우고 깨닫고 남은 것들을 어떻게 좋은 글로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글쓰는 사람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부에서 시작되어 5부에 이르기 까지의 시간은 일상적인 것이 주는 친근함에서 시작해서 책과 영화에서 보았던 한 장면의 느낌을 공유하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지나온 고전과 경구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해보며, 다시 이러한 생각과 감정과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고민한 흔적을 느끼게 합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막막한 새벽을 지나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꽃 피는 거리를 지나는 느낌이, 어느 때에는 바람 부는 해안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읽었던 책과 영화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장면을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꺼내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일천 글자의 짧은 글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면 어느 날에는 무척 많은 이야기가 하고 싶고, 또 어느 날에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날이 있습니다. 쓰기도 쉽지 않지만, 그 중에서 다시 줄이고 줄여서, 더이상 줄일 수 없는 것만 남길 때까지는 지우고 싶지 않은 문장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단어를 줄이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렇게 줄이고 나서 남은 것들은 화가 밥 로스의 "참 쉽죠?"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오기 까지 지나온 많은 새벽이 뜨거운 눈물과 고쳐쓴 종이 위로 지나갔을 것을 생각합니다.

 

 길지 않은 글이라서 금방 읽을 것 같았는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천천히 읽었던 이유도, 간결함을 살려 꼭 필요한 것만 남은 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에게나 쉬운 일이지 초보자에게 쉬운 게 어디 있겠나. 보고 말하고 듣기에나 쉽지, 뭐든지 손수 겪어 보면 쉬운 건 세상에 없다. 적어도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려면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너무 쉬워 보이는 밥 아저씨의 그림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흉내 낼 때나 만만한 것이지, 실제 캔버스 앞에 앉는 순간 아득한 절망감에 몸서리치게 된다. 쉬워 보이는 한 가지 길엔 약간의 재능과 함께 언제나 땀이란 수고가 따라다닌다. 참 쉽죠? 이 말은 ‘부단히 노력했지요‘ 라는 말의 에두른 고백임을 그때 알았다.
-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도서출판 아시아, p.64~65,참 쉽죠?

거의 매일 일천 글자 쓰기를 했다. 직장인 일하듯 썼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새벽을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이었다. 육백여 편에 이르렀을 때 쓰기를 중단했다. 소설 쓰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자기복제의 동어반복에서 오는 피로감이 두려웠다.

스무 살 시절, 쓰고 싶다는 욕망은 내게 숨기고픈 부끄러움이었다. 뭔가를 끼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가 말했다. 너는 미스 마플 같아. 그때까지 나는 탐정물을 읽지 않았으므로(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를 잘 몰랐다. 그녀의 독창적인 인물인 제인 마플에 대해서도 알 리가 없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이나 하고, 망원경으로 새나 관찰하는 독신녀 제인 마플. 별일 하지 않는 척, 아무 것도 못 본 척하는 그녀는 시골 마을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요란 없이 꿰차는 노파 탐정이었다.

미스 마플이 될 수도, 그럴 마음도 없었던 나는 다만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심해 보이는 그녀도 멜랑콜리에 젖은 옷소매를 말리기 위해 바람 드는 새벽 창가를 찾는 일이 잦았을 거라고. 단단해 보이는 한낮의 미스 마플일수록 울지 않은 새벽은 드물었을 것이다. 해결하지 못할 숱한 과제 앞에서 눈물짓는 미스 마플이야말로 내 오랜 친구였다.

다섯 장으로 나뉜 미니 에세이는 각각 사람, 생활, 책, 일상, 글과 관련된 것들이다. 딱히 주제별로 분류할 만큼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니 손길 가는 대로 편하게 펼쳐주셨으면 좋겠다. 내 안을 적시던 말들이 누군가의 손톱 끝에 닿아 순간의 꽃물이라도 들일 수 있다면.

-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도서출판 아시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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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8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6-08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부분에서는 막막한 새벽을 지나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꽃 피는 거리를 지나는 느낌이, 어느 때에는 바람 부는 해안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읽었던 책과 영화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장면을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꺼내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 이 글이 잘 쓴 글로 생각되어 몇 번을 읽었습니다.
서니데이 님은 리뷰를 참 잘 쓰십니다.ㅋ

서니데이 2018-06-08 19:23   좋아요 2 | URL
부족한 제 리뷰 여러번 읽어주시고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김살로메 작가님이 멋진 에세이를 써주셔서 저도 조금 더 생생한 느낌을 받았을거예요. 지금은 잘 쓰지 못해도 좋은 말씀을 들으면서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페크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금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