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현대인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국정역사 교과서는 왜 잘못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자면 책한권을 써도 모자란다. 또한 그런 답을 찾기에는 나의 좁은 식견과 그보다 더 보잘껏없는 지식으로는 감히 생각조차 할수없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근현대사의 중심에 서있는 박정희란 인물에 대한 해석과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다.
역사적 사실및 평가에 대한 기본적 가이드라인은 E.H.Carr 선생이 쓴 ‘역사란 무엇인가’로 하였다. 핵심적인 Carr선생의 역사관점은 이렇다.
첫째, 역사해석자체는 주관적일수 밖에 없다. 과거인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가는 현재를 초월 입장이 될수없고 고로 현재의 사회,문화,정치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 없다.
둘째,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는 과거와 현재간에 상호관계를 통해서만 확립할수있다. 예를 들자면, 알래산드로스가 몇년만 더살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유럽전체의 지도를 바꿔놓았을 것이다. 라는 주장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알랙산드로스의 죽음과 현재 유럽전체 지도 변화사이에 있는 무수한 원인들을 무시한 인과관계이므로 성립할수없다.
반면, 국정원 대선개입은 박근혜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고로, 박근혜의 대통령당선은 불법이였다. 같은 명제는 합리적 인과관계가 성립가능한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인가?
근현대사의 가장 혼란했던 역사 중심에 박정희란 인물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마도 없을것이다.
그럼, 박정희란 누구인가?
박정희(朴正煕,高木正雄,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이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기도 하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신경군관학교를 입학하기 위해 일왕에게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작성하는 친일행위를 하였다. 그 공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57기로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에게 남조선로동당의 동료명단을 실토, 배신함으로써 사형을 면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장기집권을 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을 끊임없이 탄압하였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저격당함에 따라 사망했다. (위키백과)
먼저, 사실(fact)들을 서술해보자.
첫째,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로 “진충보국 멸사봉공”혈서를 썼으며 만주국 육군 제8단 소속이였다.
고로 그가 친일을 했다는 것과 독립군 탄압의 선두에 있던 만주국 제8단 소속이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라 말할수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수 있을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든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을 위해 한가지 예를 들자면,
나의 성은 여흥민씨다. 민씨의 본관은 딱 하나인 여흥(여주)민씨로 명성황후와 같은 본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친일 인명사전에 나와있는 가장 많은 성씨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내가 그것이 싫다고 아버지를 할머니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게 해서 김구 선생과 결혼시킬수도 없고, '나 오늘부터 민씨 안하고 김씨할래' 하면 내 조상들의 죄가 사라지는것도 아니다. 또한,내 잘못이 아니고 과거에 일어난 일이니 우리 가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말라고 할수도 없는 일일것이다.
민씨 집안의 수많은 매국노들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누군가 나에게 민씨집안이 나라를 팔아먹은데 앞장섰으니 그 자손인 내가 반성하고 사과해야한다고 말한다면, 나에겐 그렇게해야할 의무 가있다.
박정희 친일행각도 마찬가지이다. 일어난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은 현재 우리들이 사는 대한민국에서는 모두 똑같이 적용되야하기에 그의 친일행각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며, 그 자손인 박근혜 각하(?)는 그 죄를 사죄해야 마땅하다.
둘째, 사실은 박정희는 남로당 출신으로 여수.순천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 사형선고 받았으며, 백선엽에게 동료명단을 실토, 배신함으로써 사형을 면했다는 것이다.
먼저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한 가입및 사회주의자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려한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朴相熙, 1906년 9월 10일 ~ 1946년 10월 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일제 강점기에 신간회, 1934년 조선중앙일보의 지국장, 1935년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 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구 10.1사건 중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위키백과 발췌)
박상희는 황태성, 박헌영등과 친분이 있는 사회주의 민족주의자였다. 우리는 박정희가 사상적 영향을 그의 친형 박상희에게 어느정도는 받았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의 사회주의자로써의 활동 및 남로당 활동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박정희 개인의 사회주의 사상자체를 비판할순 없다.
그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를 비롯해 여운형, 김원봉, 김약수, 김태영등) )은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박정희의 형을 비롯한)이 한 위대한 독립운동 업적들이 사라지거나 변형되진 않는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로 그가 가졌던 사회주의사상 그자체를 가지고 박정희에 대해 평가할순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박정희가 체포된후 본인의 석방을 위해 동료들을 팔아넘긴 행위는 잘못이다 라고 말할순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 행위를 생존을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위에 언급한 친일파들 역시 생존을 위한 어쩔수없는 선택이니 면죄를 주어야 한다는 식이 되기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