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나라 쿠파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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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에게 주어지는 이름은 언제부턴가 톰이라는 명칭이 제격이었나 보다. 소세키의 이름 없는 고양이도 있었지만 ㅡ 「吾輩は猫である。名前はまだ無い。どこで生れたか頓と見当がつかぬ。」 이 서두만큼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외우고 있다 ㅡ 셰익스피어가 쓴 『리어 왕』의 톰(7년 동안 굶주렸다며[그에 의하면 생쥐를 먹었다] 자진해서 미친놈이 되는 에드거의 분신, 바로 그 톰!)을 거쳐 훗날 실질적인 고양이가 등장하는 《톰과 제리》에서 그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라는 건 다분히 내 머릿속에서만 회전하는 논리라는 것을 밝힌다. 각설하고 『밤의 나라 쿠파』에서는 'cooper'를 왜 '쿠퍼'가 아닌 '쿠파'로 옮겼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가운데, 처음엔 반전(反戰) 소설인가 했다가 나중에는 자살특공대 가미카제를 찬양하려는 술수인 건가 싶었다(소설 속에서 2차 대전이 직접 언급되기도). 어느 쪽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고양이 톰과 만나는 '나'라는 인물이 용병인지 구경꾼인지도 헛갈린다. 소설이 타깃으로 지명하는 것도 미국인지 일본인지 아니면 서양 전체인 것인지도 매한가지. 울타리 바깥에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적을 준비한 다음, 「걱정 마라. 내가 너희를 그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겠다.」라고 말하는 국가 원수의 사례(3S는 등장하지 않음)가 다소 또렷이 다가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다기보다는 어지러이 혼재되어 있을 뿐이다. 확실한 건 이사카 고타로 자신이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소설은 북한의 미사일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밤의 나라 쿠파』가 담고 있는 논의가 전쟁과 정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톰이 살고 있는 나라의 국왕 이름이 칸토(冠人)라는 것은 간 나오토(管直人)를 말하는 건가? 나라 안팎을 가로막는 벽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작가는 센다이[仙台]에 거주하고 있다)와 《진격의 거인》의 믹스처로 보이기도 한다ㅡ 희한하게도 톰의 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 철국(鉄国)은 일본어 적국(敵国)의 발음과도 유사하다. 폐쇄된 공간과 빅 브라더의 존재가 명백한 이 이야기는 다만 동화 같은 분위기를 빌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끝에서 뒤집어지며 삽입된 또 하나의 우스꽝스럽고 놀라운 전개는 애교라고 봐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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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제안들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유나영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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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높은 아편쟁이가(그의 표현대로라면 아편은 '공정하고 교묘한' 물건이다) 살인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ㅡ '유해한 구석이 없는' ㅡ 애호가 혹은 감정가라는 수식어로 치장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특히 19세기 초 런던에서 일어난 연쇄살인범 존 윌리엄스 ㅡ '‘작업 수완이 좋은' ㅡ 사건을 다루며 드 퀸시는 예술적 살인, 살인의 예술성 내지는 미적 감각, 살인을 '작품'이라 명명하고 범인 윌리엄스를 가리켜 예술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윌리엄스가 저지른 두 건의 살인사건 중 첫 번째를 두고는 '예술가의 데뷔작'이라고까지 부르는 등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 맹랑하고 가증스러운 아편쟁이는 (아마도 '아름답고 작품이라 부를만한') 살인의 원칙으로 3가지를 꼽는다ㅡ 신문 독자 패거리들은 피비린내만 충분하면 아무것이나 다 좋아하지만 양식 있는 이들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므로 자신이 '살인의 원칙'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은 실천이 아닌 판단을 조절하려는 목적이라는 토를 달아놓았다. 먼저 그는 살인범의 목표에 적합한 부류로 명백히 피해자가 선량한 사람이어야 하는 동시에 공인(公人)이어서는 안 되며 건강해야 한다고 썼다. 선량한 피해자라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스스로가 되레 살인을 기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공인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교황은 사실상 모든 곳에 편재하므로 일종의 추상적 관념, 즉 현실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병자를 죽이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인 까닭에 건강한 대상을 선택하라는 충고도 곁들이고 있다. (나머지 두 가지 원칙에 관해서는 엉거주춤하게 넘어간다) 드 퀸시는 살인사건 후의 상황을 가정한다. '불쌍한 피살자는 고통으로부터 놓여났고, 악한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자, 그렇다면 그는 이미 우리 손에서 벗어나 탈출했고, 윤리는 제 몫을 충분히 취했으니 이제는 취향과 예술이 개입할 차례인 것이다(p.30)ㅡ 드 퀸시에 따르면 살인자는 살인이라는 예술을 위해 큰 위험을 거저 떠맡는 사람이다. 예컨대 나는 지금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막 찻잔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중인데, 난데없이 「불이야― 불이야!」 하는 고함에 놀라 (동시에 일종의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다급히 일어섰다. 그런데 곧 소방차가 도착하는 바람에 차를 마시다 말고 일어나야만 했던 내 행동에 대한 '보상'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화재를 즐기는 사치를 누리고 거기에 야유를 보낼 자격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저 악랄한 아편꾼의 논리에 근거한다('사람의 마음이 방심했을 때 취하게 되는 자연 발생적인 경향').



하지만 나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기도 했다. 내가 무슨 운명에 씐 것인지 고층건물(누가 보아도 떨어진 뒤 살아서 제 발로 일어설 수 없을 것이 자명한 높이의)에서 사람이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뛰어내리는 것을 지척에서 목격한 것이 최소한 두 번 이상이기 때문이다(정말이다). '타의'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동(棟)은 흔히 일컬어지는 복도식 구조인데, 발코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면 상하좌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경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서 몇 년 전 술을 들이켠 초로의 남자 하나가 발코니 난간에 매달리다 결국에는 버티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8층). 이 경우 술이라는 타자에 의한 ㅡ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발생한 ㅡ 사고라고밖에 말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의도(자의)는 손쉽게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달 초 바로 옆 동에서는 드 퀸시가 말한 '멋진 대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사고가 일어났다(순전히 그의 재인용일 뿐이다). 주위로 몰려든 바글바글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집에서 그 상황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주민의 안녕을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소방차는 그다지 빨리 오지 않았다). 드 퀸시는 말한다. 「화재가 사유재산에 일어났을 경우, 우리는 이웃의 재난에 대한 연민에 끌려 첫눈에 그 사건을 구경거리로 취급하는 것을 자제한다 (...) 그리고 어떤 경우든, 재난으로 여겨지는 그 사건에 대해 우선 유감의 뜻을 표하고 난 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주저 없이 그것을 하나의 극적 스펙터클로서 간주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사람의 마음이 방심했을 때 취하게 되는 자연 발생적인 경향'이라는 꾸밈말로 설명한다. 물론 드 퀸시는 뒤에 가서 자신을 제삼자로 꾸며 살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런 불가해한 인간의 심리적 구조의 결함에 그는 상당히 매료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이 과연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 글쎄. 이것은 책의 간기면께 적힌 출판사의 <제안들> 시리즈에 대한 덧붙임과 닿아 있다. 「일군의 작가들이 주머니 속에서 빚은 상상의 책들은 하양 책일 수도, 검정 책일 수도 있습니다. 이 덫들이 우리 시대의 취향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덧)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의 역자는 드 퀸시의 어조를 빌려 (참으로 깜찍한, 정말이지 힘주어 안아주고 싶은!)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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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마니아 -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 최성민.함영준 옮김 / 작업실유령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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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가 느슨한 용법으로 정의 내려져 사용되는 현상(반드시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은 꼴사납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또 낡아 보이기도 하고, 또 친숙/편안하기도 하다. 추억 팔이(재탕)냐 재해석이냐 하는 건 자정(自淨)될 수 있다고 본다. 뭐든지 극에 달하면 순환과 여과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과거, 회귀, 추억, 회상 등의 측면으로 보자면 '옛것'의 쓰임새는 상당히 다종다양해진 동시에 여러 방면으로 흘러넘친다. 이를테면 광고음악으로 7, 80년대 음악을 차용해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든지, 예전의 향수를 자극할 심산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흥행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든지ㅡ 아니면 대놓고 과거를 외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응답하라!'). 어정버정한 라이브 실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맨밴드 코넬리우(어)스(Cornelius)의 앨범을(《Fantasma》와 《69/96》 거의 이 두 장뿐이었지만) 줄기차게 들었던 때가 있었다. 특히 「Brazil」을 들으면 아기자기한 안락함보다는 영화가 먼저 떠올라 서둘러 멈추곤 했지만, 시부야계로 표현되는 폭넓은 요소 ㅡ 당연히 레트로도 포함된다 ㅡ 로 인해 다채롭게 '믹스'된 음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덧붙여 일본 음반 시장이 정말 부러운 것은 '일본반 보너스트랙'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흥미가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키노코 호텔[キノコホテル]을 듣기도 했지만 일본 쪽도 어딘지 모르게 옛날 같지는 않다ㅡ 멤버들의 헤어스타일이 죄다 버섯[키노코; 버섯] 모양이다.)



또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때여서(지금도 집에 모셔져 있다) 공 테이프를 구입해 이리저리 녹음을 하며 가지고 놀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은 윗부분의 구멍을 막으면 재녹음도 가능한 마법의 물건이었다. 적어도 CD-R, CD-RW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특히 라디오가 들려주는 음악, 대개 <골든디스크>나 <음악캠프>가 주를 이루었는데, DJ가 음악 자체를 틀어주지 않거나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면 넋이 나간 듯 앉아있어야만 했다. 언제 어느 채널에서 내가 원하는 노래가 나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지금은 많이 사라진 레코드숍에 공 테이프를 가져가 약간의 돈을 얹어주고 듣고 싶은 팝 리스트를 건넨 후 다음 날 재방문을 하면 따끈따끈하게 녹음된 결과물을 얻어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소위 주옥같은 멜로디는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왔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그렇기 때문에 음악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음악 기술이나 장비 역시 그때의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미국 패권주의의 상징인 영화 《아마겟돈》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우주로 떠나기 전 굴착 전문가 해리의 팀원인 맥스가 NASA 국장에게 위험천만한 임무 수행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저 옛날 게임팩처럼 생긴) 8트랙 테이프의 부활이었다.



과거 일상의 지루함을 달랬던 것은 책이나 잡지, 음반이 고작이었는데, ㅡ 내가 80년대 태생이니 그 이전의 것들을 광범위하게 언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ㅡ 레이놀즈에 의하면 오늘날의 지루함은 다르다. 그 성격은 과포화 상태, 주의 분산, 쉴 새 없음과 연관되는데, 그 이유는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수천 개의 텔레비전 채널, 무수히 많은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 미처 듣지 않은 앨범과 보지 않은 DVD, 읽지 않은 책, 미로처럼 끝없는 유튜브(mp3 불법 복제에 관해 언급했던 마이클 잭슨의 반응이 생각난다)의 아(나)카이브……. 그가 말하는 지금의 지루함이란 결핍에 대한 반응, 관심과 시간을 요구하는 과잉에 대한 반응, 문화적 식욕 상실이다.(p.96) 어쨌건 그래서인지 별다른 새로운 것 없이 2000년대 들어 과거를 끄집어내는 작업들은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21세기가 전 세기의 과거로 북적이고 있는 거다(과연 레트로를 힙스터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아니면 포함관계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빈티지라는 리브랜딩은 여전히 성업 중인데 아카이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만물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그간의 쓸 만한 재료가 많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쓸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한편에서는 카드처럼 '돌려막기' 기술을 펼치지 않으면 레트로는 무의미하게 된다.





레이놀즈가 이야기를 시작하며 21세기 첫 10년을 두고 '재(re)' 시대였다고 털어놓은 것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발매, 재조명, 재결합, 재활용, 재해석, 재조합…… 재탕. 이것은 단순히 몰개성의 발현이라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 어쨌든 그것들을 (완전하지는 않은) 새로운 결과물이라 봐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싫은 건 이런 경우다. 수십 년 지난 앨범들에서 이것저것 끌어와 별로 들을만한 게 없는 '박스 세트'를 만들고, 먼지 쌓인 고전 멜로디를 찾아 피치만 올려 샘플링하고, 아니면 아예 리메이크나 패스티시를 통해 [재]인용을 하면서 원작을 망가뜨리는 것 등. 개중에는 정말 레트로를 향유하려 한다기보다는 현재에 맞서 개성을 부각시키려는 자들도 있다.) 전적으로 내 취향에 근거하자면 스트록스나 화이트 스트라입스(래콘터스), 카이저 칩스는 그런 면에서 아슬아슬한 편이다ㅡ 특히 스트록스의 《Angles》는 언급 자체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고(결국엔 말하고 말았지만). 하여간 스미스 요원처럼 복제의 복제의 복제를 감행해 단순히 '과거 채굴꾼'이 되어서는 버텨낼 수 없다. 아무리 기존의 것을 불러와(혹은 몇십 년 전의 냄새가 나도록 꾸며) 사용한다 하더라도 수용자가 납득할만한 물건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지, 유명해지기도 전에 똥을 싸는 자들이 판을 치면 안 되는 거다ㅡ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Be famous, and the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앤디 워홀]).」



다시 말해 어떤 의미로는ㅡ 2000년대의 소리 풍경을 돌이켜보면 결정적인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장르 대부분은 평형 상태에 안주한 채, 좋게 말하면 완만하고 솔직히 말하면 알아챌 수도 없으리만치 느린 속도로 진화했으며, 오늘날 활동가 대부분은 오래전 선조들이 거둔 성과를 팔아먹고 있는 거다.(p.384-385) '바로 전 유행에서만 벗어나는 유행' 열풍이랄까. 물론 레트로 자체를 싸잡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과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것이라는 망토를 두르고 나와도 쉽게 싫증나는 유행과 그런 조급함이 문제일까(드럼앤베이스와 덥스텝의 사양길[이라 표현해 미안하지만]은 얼마나 빨랐던가)? 그런가하면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음악이 (특히 한국에서) 뿌리내리기란 얼마나 힘든가?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는 대체 언제까지 득세할 것인가? 더군다나 지금은 '과거의 복고'와 '현재의 복고'를 구분해야하기까지 할 판국이며 ㅡ 레트로도 결국엔 과거의 재방문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ㅡ 문화의 다음 단계를 밝히겠다는 소망은 슬프게도 망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덧) 조지 오웰의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학식이 풍부하지만 정신을 과거에 놔두고 온 포티어스라는 인물은 말한다. 「이 친구야!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네.」

사족) 문득 떠오른 건데, 이언 커티스도 2년만 참았으면 그 시대 반항아들처럼 스물일곱이 되어 멋지게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죽음’마저도 레트로 문화에 넣자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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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15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잇 님 글을 읽으니 이 책에 대해 무척 땡깁니다.

그레코로만 2014-08-15 19:51   좋아요 0 | URL
특히 (거의 다!) 음악 쪽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저 시대 음악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재미는 배가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몰라도 상관없다고 보지만 말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6 10:0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레트로 패러다임 하니깐 느닷없이 니체가 생각나네요. 니체가 오래 전에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미래를 예언하면서 " 패러디가 시작된다 " 라고 말이죠...

그레코로만 2014-08-17 11:28   좋아요 0 | URL
패러디를 독창성의 결여라고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패러디의 가치를 인정하기도 했으니 참으로 선견지명이....!
 
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 위대한 생각 시리즈 2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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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0월 5일, 에밀 졸라가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히기 직전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아직 뚜껑을 닫지 않은 묘혈 앞에서 그를 떠나보내며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사악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모욕의 더미 위에 모두가 우러러볼 높다란 영광의 탑을 우뚝 쌓아 올렸습니다 (...)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의 운명과 그의 용기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졸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진 크고 작은 테러와 살해 위협으로 미루어보건대ㅡ 졸라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이라는 물증 없는 확신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또 드레퓌스 사건이 완결된 마무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에밀 졸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단 <나는 고발한다...!>라는 처절한 격문인데(그 외에 『목로주점』 정도가 있을까) 진실의 최종 관문을 보지 못한 채 수상쩍은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 자신과 드레퓌스,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 그리고 진실을 원했던 이들에게 내려진 불행임에 틀림없다. 『전진하는 진실』은 드레퓌스 사건의 내막,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 그의 생전 인터뷰와 사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으레 [졸라 = 드레퓌스 사건]이란 그림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만큼 언제나 세간에서는 드레퓌스는 단지 희생자일 뿐이며 진정한 주인공은 졸라 자신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명을 쓴 드레퓌스 대위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면 졸라마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한 프랑스 장교가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 앞으로 보낸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포병대 대위는 필체가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그리고 독일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것 때문에) 참모본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다.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시절 언론마저도 이를 묵인하는가하면 한편으로는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혐의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졸라는 1897년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서 일부 언론을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저열하다'며 그들이 추잡스런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들의 신문에는 독물이 섞인 강물이 넘쳐흘렀다. 어쩌면 그런 게 공정성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여기저기에 찔끔찔끔 소심한 평을 하는 것으로 그치면서, 고귀한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다니, 단 한마디도!」ㅡ <르 피가로>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로 중도우파 성향의 보수 색채를 띤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이며, 당시 드레퓌스의 편에 섰지만 보수 독자들의 항의와 구독 철회로 인해 판매 부수가 2만부까지 급감했다(그러나 반드레퓌스파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졸라의 이 기고문이 실리기 하루 전, 당시 내각의 수장인 쥘 멜린(Jules Méline)은 의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 중에 「드레퓌스 사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라고 발언한 터였다. 하지만 지난한 세월이 흐른 뒤 진실은 어렵게 밝혀지고 만다. 졸라 역시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시작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 지 1면에 실린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당시 졸라가 팸플릿으로 제작한 기고문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국의 2013년이 끝나갈 때쯤부터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한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된 이 대자보는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사태 등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을 향한 외침이었다ㅡ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졸라가 꾸짖은) 언론과 같이 당시에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찢는 자들과 함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졸라는 글에서, 학생들을 들고일어나게 했던 고귀한 열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년들은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흉포하고 강한 자들과 맞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행복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운명의 무게를 그릇되게 재는 세상의 불공평한 저울 위에 그대들의 뜨거운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 아,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그대들의 앞에 놓인 고귀하고 원대한 일들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뒤이어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프랑스가 쓰레기 같은 언론이 발표하는 거짓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꼬집었다ㅡ 「프랑스여, 그대의 여론은 (...) 권력의 테이블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탐욕스런 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189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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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분노한 양심의 소리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하는 갈망에 휩싸인 채, 분노와 열정의 이름으로 시위를 하는 그대들은 무리를 지어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가 권력을 남용한 데 대한 항의를 하러 가는 것인가? 삶의 일상적인 비겁함과 정치적 타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순수하기만 한 그대들의 마음속에서 아직 불타오르는 진실과 공정성에의 갈망을 그네들이 모욕했기 때문인가?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행복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운명의 무게를 그릇되게 재는 세상의 불공평한 저울 위에 그대들의 뜨거운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혹은, 과학의 붕괴를 선언하면서 그대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오류투성이의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는 편협한 광신자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인류의 관대함과 자주성을 소리 높여 외치려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고 위선적인 인물의 창문 아래에서, 다음 세기의 미래에 대한 불굴의 믿음을, 정의와 사랑의 이름으로 세상의 평화를 실현하게 될 그대들의 믿음을 큰 소리로 외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인가?
   ㅡ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야유를 퍼부으러 몰려가는 것이오. 평생 동안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몸 바쳐 일해 온 끝에 고귀한 대의를 당당하게 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국 프랑스의 영예를 위해 진실이 밝혀져 과오가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어떤 노인에게 항의하러 가는 것이오!1

아! 나도 젊었을 때 그대들의 카르티에라탱2을 본 적이 있다. 젊음의 자랑스러운 열정과 자유에 대한 열망, 이성을 짓누르고 영혼을 억압하는 무지한 폭력에 대한 증오로 요동치던 그곳! 제정 하에서는 권력에 맞서며 ― 때로는 부당하게 행동할 때도 있었지만 ㅡ 언제나 자유로운 해방 정신에의 추구로 넘쳐나던 그곳! 그곳의 젊은이들은 튈르리 궁3에 아부하던 작가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수상쩍은 교육을 하던 교수들에게는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암흑과 독재의 편에 서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분연히 일어서 맞서 싸울 줄 알았다. 모든 희망이 현실이 되고, 내일은 반드시 이상적인 국가의 승리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던 스무 살, 그 시절이 지녔던 아름다운 열정의 신성한 불길이 타오르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학생들을 들고일어나게 했던 고귀한 열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년들은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흉포하고 강한 자들과 맞서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압제에 시달리는 민족을 위해 다 함께 거리로 나섰다. 폴란드를 위해 그렇게 했고, 그리스를 위해 그렇게 했다. 청년들은 무지한 군중이나 무자비한 독재자의 폭력 아래 고통 받고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들고일어났다. 카르티에라탱이 불타오른다고 할 때면, 언제나 그 뒤에는 오직 패기와 열정만으로 젊은 정의의 횃불을 피워 올리는 청년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라도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마치 강물이 흘러넘치듯 너도나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오늘날 청년들이 들고일어나는 이유가, 반역자 무리에 의해 위협받는 조국, 그 조국이 승전국인 적국에 까발려졌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직관, 진실한 것과 정의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아는 감각과 순수한 영혼을 지닌 그대 청년들에게서 찾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정치적 삶에 처음 눈뜨기 시작했으며, 아직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올곧고 선한 이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아닌가. 오랜 음모와 술책으로 타락한 정치인들, 직업을 핑계로 온갖 타협에 익숙해져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기자들, 그런 사람들이 지극히 뻔뻔한 거짓말에 눈감고, 명백한 진실을 모른 척 외면하는 것은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수하고 순박한 심성을 지닌 청년들이 터무니없는 과오들 속에서 환한 태양처럼 빛나는 투명하고도 명백한 진실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다니, 젊은이들이 벌써 그렇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알고 보면 이보다 간단한 이야기도 없다. 한 장교가 유죄판결을 받았고, 아무도 재판부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증거 위에서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사람과 또 다른 몇몇 사람이 그 판결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재판부는 공개적으로 밝혀진 유일한 증거인 예의 그 증거에 의거해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몇몇 사람들은 죄수의 형4이 그 증거를 조작한 사람을 고발했다고 밝혔다. 그 형은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첫 번째 소송의 재심을 이끌어 낼 새로운 소송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완벽히 명백하며 정당하고 합리적이지 않은가? 여기 어디에 반역자를 구하기 위한 술책과 음흉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건가? 우리는 반역자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이 아닌, 죄를 지은 자가 그 죄의 대가를 정당하게 치르기를 바랄 뿐이다. 그대들은 반역자를 반드시 처벌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진범을 잡아 그대들 앞에 무릎 꿇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약간의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대체 무슨 다른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반유대주의 같은 생각일랑 부디 떨쳐 버리기를. 광포한 편집광처럼 유대인의 음흉한 음모론을 운운하며, 유대인들이 돈으로 매수한 기독교인을 유대인 대신 악명 높은 감옥에 집어넣으려 한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인가 말이다. 터무니없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들은 하나둘씩 모두가 거짓임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양심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문제는 모든 사법적 오판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서서히 위압적으로 그 세를 더해 간다는 데 있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법적 오판은 살아 움직이는 힘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심적인 이들은 진실에 매료되고 사로잡혀 점점 더 진실을 찾는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된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신들의 재물과 목숨까지 걸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있을 수 없다. 나머지는 비열한 정치적 음모와 종교적 책동이며, 중상과 욕설이 넘치는 진흙탕일 뿐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마음속에서 인류애와 정의에 대한 생각이 한순간이라도 더럽혀진다면 그대들은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2월 4일에 열린 프랑스 의회는 '가증스러운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공공의 양심에 혼란을 조장하는 선동가들을 규탄하기 위한' 의사일정을 확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나는 내 글을 읽게 될 다음 세대의 사람들을 위해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러한 표결은 관대함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수치이며,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저들이 '선동가들'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양심과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이 고문 속에서 죽어 가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는 애국적인 신념으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세상에 폭로하여 바로잡고자 했다. 저들이 '가증스러운 캠페인'이라고 지칭한 것은, 양심적인 이들이 외치는 진실과 정의의 소리이자,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프랑스를 인류애와 자유와 정의를 구현했던 나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 의회는 분명 범죄를 저질렀다. 학교의 젊은이들까지 타락하게 만들어, 저들에게 속아 판단력을 상실한 채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청년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용감하며 가장 고귀한 것들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니, 이게 어디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12월 7일, 상원에서 열린 회의 후에 언론은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가 무너져 내렸다며 떠들어댔다.5 그렇다, 그가 무너져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마음과 영혼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공화국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고뇌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가 평생 선의의 투쟁을 해 오면서 공화국을 위해 쟁취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 무엇보다 자유가 그 첫 번째였고, 충성심과 정직성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용기 같은 남성적인 덕목들.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물들 중 하나이다. 제2제정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는 독재 권력 하에서 살아가는 민중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불의와 부당함 앞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열기를 억누르며 지내는 것을 똑똑히 보아 왔다. 그는 또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패배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패배의 원인이 전적으로 전제적인 어리석음과 망동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후, 그는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열렬하게 패망의 잔해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프랑스로 하여금 유럽에서의 과거의 지위를 다시 차지하게 하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그는 우리 공화주의 프랑스의 영웅적인 시대를 치열하게 겪어 낸 사람으로서, 전제 군주제를 영원히 몰아내고 다시 자유를 되찾은 데 대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확고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굳게 믿고 있을 터였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각자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인간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되찾을 수도 있고, 또다시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오늘날 그의 주위의 그의 내면에는 폐허가 된 진실과 정의의 잔해만이 존재하고 있다. 진실을 갈망하는 것은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정의를 원하는 것도 죄악이었다. 무시무시한 독재정치의 망령이 다시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입에는 또다시 엄청나게 단단한 재갈이 채워졌다. 오늘날 공공의 양심을 짓밟는 것은 시저의 군화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이들을 규탄하는 의회의 의원들 모두인 것이다. 입을 다물라니! 저들은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입을 강압적으로 다물게 하면서, 군중을 선동해 그들로 하여금 소수의 정의로운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자유로운 논쟁에 대해 이토록 끔찍한 억압이 조직적으로 행해진 적은 없었다. 또한 수치스러운 공포심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면서 용감하기 이를 데 없던 사람들도 점차 비겁자가 되어 갔고, 사람들은 매국노나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더 이상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신을 지키던 몇몇 신문들마저 황당한 소문들로 인해 흥분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앞에서 바짝 엎드린 채 몸을 사렸다. 지금까지 그 어떤 민족도 그들의 이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이처럼 혼란스럽고 혼탁하며 불안한 날들을 지냈던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로서는 오랫동안 그가 보여 주었던 충직함과 위대한 과거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가 아직 인간의 선함과 공정성을 믿고 있다면, 그건 그가 확고한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영예와 노년의 안락한 삶을 위태롭게 한 대가로 3주 전부터 매일같이 진흙탕 속에 내동댕이쳐졌다.6 그처럼 올곧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정직성이 박해를 당하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절망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그의 마음속에 있던 내일에 대한 믿음을 살해했으며, 그의 희망을 독살시켰다. 그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는 이렇게 탄식할 게 분명했다. 「이젠 정말 끝이야. 이젠 아무런 희망도 없어. 그동안 내가 이루었던 선행들은 나와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리는 거야. 이렇게 캄캄하고 텅 빈 세상에서는 도덕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한 거야!」

저들은 애국심을 모욕하기 위해 프랑스 의회의 마지막 알자스로렌 출신 상원의원인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장 의심 많은 사람들의 불안마저 잠재울 수 있는 인물을 매국노, 반역자, 군부를 모욕한 파렴치한으로 취급하다니! 어쩌면 그는 자신이 알자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열렬한 애국자로서의 명성이 정의의 수호자라는 까다로운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선의를 보장해 줄 수 있으리라고 과신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이 일에 발 벗고 나선 것은, 군부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신속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일을 앞으로 몇 주간 더 질질 끌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애써 보라. 그러면 그사이 그대들은 온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을 것이며,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최하위 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니!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정치인들과 종교계 인사들은 그와 같은 경고를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학생들은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에게 군부를 모욕하고 조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목을 씌워 반역자와 매국노라는 오명과 함께 거친 야유를 퍼붓는 광경을 전 세계에 보여 주고 있다.

물론 나는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일부 청년들이 우리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거리를 소란스럽게 하는 백여 명의 과격파 젊은이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는 만여 명의 성실한 학생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음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백 명의 과격파만으로도 이미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아무리 소수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이 시각에 카르티에라탱에서 그런 소요가 일고 있다니 이 얼마나 섬뜩한 징조인가!

그러니까 반유대주의자 청년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유대주의라는 독이 이미 젊은 두뇌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청년들의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가 그들의 판단력마저 흐려 놓은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머지않아 열리게 될 20세기를 위해 지극히 안타깝고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권선언문이 발표된 지 백 년이 넘은 지금, 관용과 해방의 지고한 행위가 있은 지 백 년이 넘은 지금, 더없이 가증스럽고 어리석은 광신자들처럼 다시 종교전쟁의 시대로 역행하다니! 그것도 어떤 무리들이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탐욕스런 야심을 지키기 위해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 세기에는 더욱더 찬란하게 피어나기를 꿈꾸는 인권과 자유의 구현을 위해 태어나고 자라나야 할 청년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모두가 기다려 온 다음 세대를 위한 일꾼들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반유대주의자라고 칭하면서 모든 유대인들을 말살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기를 열려 하다니! 그것도 우리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종교를 가진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 평등과 형제애가 넘치는 나라에 그런 식으로 첫걸음을 내디딜 수는 없지 않은가! 진정 젊은이들이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우리 모두는 비통한 심정으로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적인 행복에의 기대와 모든 희망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아,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그대들의 앞에 놓인 고귀하고 원대한 일들을 잊지 말기를! 우리는 그대들이 미래의 일꾼으로서, 저물어 가는 세기가 던져 놓은 진실과 공정성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다음 세기의 초석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대들보다 앞서 살아온 우리 기성세대들은 그대들에게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과 모순과 의혹 들을 남겨 놓고 떠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그 어느 세기보다도 열정적으로 진실을 향한 노력과 정직하고 견고하게 수집한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 그리고 그대들이 자신들의 영예와 행복을 위해 계속 쌓아 올려야 할 거대한 과학의 탑의 기반 또한 함께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대들이 더욱더 너그럽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는 젊은 세대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일에 온전히 쏟아붓는 노력으로 우리를 한층 더 넘어설 수 있기를. 마침내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 넘치는 삶의 기쁨을 솟아나게 할, 인간과 대지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위해. 그리하면 우리는 그대들에게 이 자리를 기꺼이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우리를 계승하여 우리가 꿈꾸었던 것들을 실현해 주리라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들에 만족하면서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나 죽음의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그대들의 아버지들이 겪었던 고통과, 지금 그대들이 누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던 끔찍한 전투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지금 그대들이 자유롭다고 느끼며 마음대로 오갈 수 있고, 거리낌 없이 언론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어떤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아버지들이 그 모든 것을 위해 자신들의 지혜와 피를 바친 덕분인 것이다. 독재 정권하에서 태어나지 않은 그대들은 매일 아침 주인의 군홧발에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독재자의 칼날과 사악한 심판자가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철퇴를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의 아버지들에게 감사하며, 거짓에 환호하거나 무지한 폭력과 광신자들의 불관용과 출세주의자들의 탐욕에 장단을 맞추며 그들과 함께 춤추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길 바란다. 이제 독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언제나 정의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가는 동안 그대들의 마음속에서 정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한순간이라도 흐려진다면, 그대들은 온갖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우리의 '민전법'7에 나오는 정의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법전에서 말하는 정의는 사회적 관계만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정의가 존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정의'가 있다. 즉,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재판부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을 전제하는 것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결백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는 그대들의 뜨거운 열정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근사한 기회가 아닌가? 삭막한 이해관계와 인간관계로 뒤얽힌 추잡한 싸움판에 아직 뛰어들지 않은 그대들이 아니라면 누가 분연히 일어나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아직 수상쩍은 어떤 일에도 끼어들거나 연루되지 않은 채 오직 순수한 선의로써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그대들, 청년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인간성과 관대함을 겸비한 젊은이들이 되기를! 설사 우리 생각이 틀리더라도 부디 그대들이 우리와 함께해 주기를! 우리가 그대들을 향해,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이 끔찍한 형벌을 받고 있으며, 분노에 찬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가혹한 형벌 앞에서 단 한순간만이라도 오판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가슴이 미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릴 수 있기를. 물론, 도형장의 간수라면 냉담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 청년들이여, 아직 눈물 흘릴 줄 알고, 불행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세상사에 민감한 그대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어리석은 증오심의 희생양이 된 한 무고한 시민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알면서, 어찌하여 그를 구해 내어 그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는 기사도적인 꿈을 꾸지 않는 것인가? 그대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숭고한 모험에 뛰어들 것이며, 그대들이 아니라면 그 누가 위험하고도 당당한 대의를 위해 이상적인 정의의 이름으로 무지한 민중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그대 젊은이들이 나서서 해야 할 관대하고도 열정적인 일들을 나이 든 우리들이 대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디로 가는가, 청년들이여! 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그대들의 찬란한 스무 살의 용맹함과 희망을 어리석은 분쟁으로 얼룩진 진흙탕 속에 내팽개치려 하는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ㅡ 우리는 인류애와 진실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1 알자스 출신 상원의원 쉐레르-케스트네르(Auguste Scheurer-Kestner)에게 야유를 보내는 민족주의자 학생들의 시위와 그를 향한 욕설과 위협을 말한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확신하고 그의 재심을 위해 노력한 결과 이 '노인'은 온갖 비난과 모진 모욕을 감수해야 했고 상원 부의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2 Quartier Latin, 파리 5구와 6구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대학가. 1968년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3 Palais des Tuileries, 파리 루브르궁 서편, 루브르궁의 남북 갤러리 사이에 있었던 궁전.

4 마티외 드레퓌스(Mathieu Dreyfus),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으로, 공장을 운영하던 실업가였던 그는 동생에게 저질러진 '사법적 오판'을 확신하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동분서주한다.

5 쉐레르-케스트네르가 상원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라는 사실과 그 사실을 확신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거센 비난과 무관심뿐이었다.

6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상원 부의장직의 재임 요청을 거부당했다.

7 나폴레옹 1세 때 제정, 공포된 프랑스 민전법('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린다). 법 앞에서의 평등, 취업의 자유, 신앙의 자유, 사유재산의 존중, 계약의 자유 등 프랑스혁명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근대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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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는 1898년 <로로르(L'Aurore)> 지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한다(30만 부 판매)ㅡ 원래는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지만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획기적인 타이틀을 붙였다. 그러고는 군사법원과 판사들의 선입견 그리고 불공정한 판결에 대해 토로하며 다음과 같은 기판력(旣判力)의 모순을 추궁했다ㅡ 기판력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후에 다른 법원에 다시 제소되더라도 이전 재판 내용과 모순되는 판단을 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소송법적 효력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①드레퓌스는 군사법원에 의해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②따라서 그는 유죄이다. → ③그러므로 군사법원은 그가 무죄임을 선언할 수 없다. → ④그런데 에스테라지(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곧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였으니 드레퓌스 대위의 복권은커녕 재심조차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한 당시 국방부장관 등부터도 졸라에게까지 명예훼손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등 정의가 난도질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대위 하나가 순식간에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군적 박탈을 당하고, 또 멀리 유배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재판의 파기가 선언되자 드레퓌스 대위는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같은 해 재차 유죄를 선고받고(유죄 판결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정상참작과 함께 10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또다시 1년 뒤, 당시 법무부장관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는 사면법에 관한 법안을 상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것은 드레퓌스 대위의 완전한 복권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정의는 무척이나 더디게 찾아왔다. 6년이 지난 1906년, 드디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이미 졸라가 죽은 뒤였다). 아나톨 프랑스가 졸라의 장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저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위들을 알게 되었고 기어이 진실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ㅡ 그러나 보라, 적대적 시위가 벌어질 것을 염려해 졸라의 장례식장에조차 참석하지 못할 뻔했던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유해를 국립묘지 팡테옹(Panthéon)으로 이장하던 때 보수 일간지 <르 골루아(Le Gaulois)> 지의 편집인이 쏜 총에 맞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천적 지식인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에밀 졸라는 1900년 드레퓌스의 사면법이 가결되기 직전 그와 처음 만났을 정도로 둘은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일에 침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으니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결정적인 마지막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사실이다.」





▼ 1898년 3월, 졸라의 지지자들은 <나는 고발한다...!>의 발표를 기념하여 메달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1만 683프랑이 모금되어 제작된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메달은 2천여 명의 기부자 명단이 적힌 붉은색 가죽 장정의 노트와 함께 졸라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는 아직 승리자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소감을 밝혔다(훗날 졸라의 부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 앞면에는 졸라의 초상과 함께 <에밀 졸라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에밀 졸라. 1898년 1월 13일>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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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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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키치할 수도 있고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숨겨진) 아주 작은 코드를 언급하지 않은 것에서(놓친 것일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우리를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드는 것들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물론 우리 역시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면 아무리 이런 논의를 해도 그 기계들은 코웃음을 흘리고 있을 테지만)ㅡ 토머스 앤더슨/네오와 사이퍼(배신자)가 공존하는 이 미망(迷妄)의 현실세계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네오의 매트릭스 안에서의 이름 토머스/예수의 부활에 의구심을 갖는 제자 '의심하는 토머스', 탯줄 같은 케이블을 뽑아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네오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육된다'는 점에서의 처녀 잉태, 죽은 네오를 부활시키는 트리니티/trinity(삼위일체), 그들이 타고 다니는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호에서부터 매트릭스 안에서 고치처럼 웅크린 자들의 '인간 발전소'와 같은 모습, 이러한 기독교적 명제와 더불어 불교적 교리까지(휘어지는 숟가락 등). 물론 이것은 영화에 집어넣은 주제들 중의 일부에 그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내가 이걸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말해 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스미스와 교섭하는 사이퍼의 대사다. 만약 우리의 뇌가 나머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커다란 통에 담겨있고 컴퓨터가 전자 충격을 뇌에 보내 이런저런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실제 경험을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고, 또 사이퍼의 배신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자유를 갖고 있으려면, 우리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만약 당신에게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지, 자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27) 이 말은 맑스가, 노동과 그들이 생산하는 자본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작업 시간과 작업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용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도 그들 자신은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유 시장'에서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사이퍼의 선택을 두고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네오마저도 자발적으로 빨간 약을 골랐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만약 예언자(오러클)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 미래 역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나.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본다는 것은, 그것이 발생한 동시에(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발생하지 않았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ㅡ 게다가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다면 모피어스를 배신한 사이퍼의 결심 또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세계가 변화할 뿐이지 그것이 진화나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변화’라는 범주 안에 진화와 진보가 속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수상쩍게 생각한다……. 지젝에 의하면 엘리베이터에 있는 닫힘 버튼은 실제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고물이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높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결국 문은 닫힐 것이므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빨리 움직이도록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참여'에 빠져있다.(p.315)




덧) 영화는 1999년에 만들어진 단 한 편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네오의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W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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