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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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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다, 이해하다, 터득하다, 라는 의미의 일본어 사토루(悟る)를 가져다 쓴 '사토리(さとり)세대'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돈이나 사치뿐 아니라 출세에도 관심이 없는 일본 청년들을 일컫는 말로, 극도의 현실주의적 양상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한국도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三抛)세대,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88만원세대, 이십태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의 이태백 그리고 이것이 변형된 이퇴백까지ㅡ 직장생활을 하는 이십대라 해도 언제 퇴직해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뜻이란다. 1930년대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사회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던 시기에는 대학이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때의 학생들이 요즘 학생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요즘 학생들은 틀에 박혀서, 뭐랄까 관리의 후예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p.55) 시대상 등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이와 같은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예컨대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도로를 점거하고 정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거나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로 한쪽에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앉아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대부분이 욕지거리뿐이고, 더군다나 청년들에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이런 자들은 죄다 20년 전, 30년 전 똑같이 거리로 나와 소리 높였던 사람들이다. 아무리 세대라는 말로 구분지어도 언제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보고 느끼며 성장하기 마련이니 우리는 늘 스스로를 칭찬하는가하면 또 동시에 싫은 소리를 퍼붓고 있는 셈이며, 지금 사토리세대라 불리는 일본의 청년들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투영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이들이 삶에서 찾는 것은 먼 미래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만족을 추구하는데,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소모적이라거나 열망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출산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집을 가지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왔으므로 지금의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여길는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자신을 붕괴시키면서 가족을 위해, 나아가 사회를 위해 다소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찾았으니 말이다.




대학생인 고스케(21세, 남성)는 「내가 선거에 투표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선거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 즉 '높은 분들'이 그들 마음대로 진행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통계적으로 봐도,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정치적 무력감이 높다. 자신의 힘으로는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 80%나 된다.


ㅡ 본문 p.284 (한국이라고 다를까?)




오늘날의 젊은 세대, 특히 사토리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은 그렇지 않다. 과거에 비해 개인적이고 뚜렷한 보호색으로 자신들을 감싼다. 이 세계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끔 하는 변화를 꾀하거나 몹시도 큰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도전엔 인색하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일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회가 보수 일변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들은 덤덤하고, 철저히 자신의 취향에만 소비하며, 기득권을 무너뜨리려 야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시쳇말로, 하기 좋은 말로 '생긴 대로' 산다. 여러 패러다임을 거친 세상이 이 시점에서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양태에 순응하면서 지내는 까닭인데, 정치적 참여에 소홀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면 금방 설명될 수 있다. 프리터, 내가 일본에서 일 년간 체류하며 본 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이전 세대가 필연적으로 살아온 방식처럼 역시 필연적이다. 물론 일본의 사토리세대와 한국의 삼포세대 혹은 88만원세대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전반적인 상황만 보더라도 일본 청년의 경우 그쪽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우리와는 다르다. 그들이 무언가를 포기한 이후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저 포기하는 수순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고 만다. 그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거다. 여기에 특히 경제적 여건을 간섭시키면 이야기는 간단한 결론으로 끝난다.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나가는 젊은 세대들은 포기할 수는 있으나 그 과정 이후 만족 단계를 찾기가 어려운 까닭이다(여러 가지 지표나 통계만 보더라도). 자신의 개인적 생활에 다소간의 여유자금을 투자하거나 실질적인 취미를 누리기엔 한국의 청년들은 경제적으로도 빈곤하며 시간적으로도 가난하다. 그러니 이런 청년들을 두고 '요즘 사람들' 운운하며 (저자가 표현한 방식을 빌려오자면)'이해력이 좋은 어른'인 척하는 기성세대들은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지금 청년들이 이렇게 빈궁한 상태로 혹은 사토리세대에 편입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가까운 미래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구 하나, 어떤 특정 세대가 곤란한 선에서는 그치지 않는다. 노동을 해, 듣기 좋은 말로 견실한 근로자가 되어(특히 정규직과 같은), 사토리세대 이전처럼 넘쳐나는 노동 인구로 북적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고령화와 더불어 사회전체 나아가 하나의 국가를 정비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의 젊은 세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고령화되어가고 있는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다. 왜 행복한가. 깨닫고, 이해하고, 터득했기 때문에, 즉 사토리(さとり)를 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자신의 만족을 찾아 살기로 작정했다는 뜻일 터다. 그럼 이것을 한국에 대입시킨다면? [포기(혹은 현실을 깨달음) → 자기만족]이란 알고리즘으로 설명되는 사토리세대와는 다르게 전개될지도 모른다. 경제적 기반도 충실하지 못하고 기득권에 저항할 여력 또한 없으니, 지금처럼 계속 '요즘 사람들'이란 말을 들으며 '이해력이 좋은 어른들' 아래에서, 그저 절망의 나라에서 살아가야만 할는지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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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삼바
델핀 쿨랭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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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가 만료된 임시 허가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인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대로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수도 없으며, 그저 공무원 옆구리의 서류철 바깥에서 맴돌 뿐이다. 갈가리 찢긴 접수증도 마찬가지. 왜? 그쪽 역시 유효기간이 끝나버렸으므로. 종이에 찍힌 숫자놀음, 그리고 급여 명세서와 각종 청구서, 은행계좌 출금 명세서와 같은 '생활의 증거들' 없이는,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조차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민국 국장은 널 믿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체류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야.」 삼바가 그의 삼촌으로부터 체류증을 '물려받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분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삶 자체가 없는 것과 같은 의미였을 테니. 더군다나 그가 삼촌의 지하 아파트에서 몰래 자라던 버섯을 낚아채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이미지들(거북이나 연어)보다도 생경함이 없다. 가끔 움츠러들거나 쓰러지기도 하지만 버섯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직립하려고 하는 까닭에. 소설은 외국인 노동자의 업무상재해나 죽음처럼 심각한 양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주자의 모습을 담백하게 스케치함으로써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를테면 그들의 생활상과 '취급'에 분노하기보다 그들이 갖는 심성적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웰컴, 삼바』는 작가 자신이 이민자와 난민을 돕는 시민단체 시마드(cimade)에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탄생한 소설이지만 '벌집'으로 묘사되는 바티뇰의 격리 상설창구라는 낯설기만 한 장소에서의 각양각색 만남들은, 차라리 이것이 허구로 꾸며낸 문장에 불과했으면,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삼바가 구겨진 종이, 음식 찌꺼기, 찌그러진 플라스틱, 과일 껍질, 머리카락 뭉치 등 쓰레기를 분류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바삐 손을 놀릴 땐, 그는 동시에 자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시커먼 얼굴'인 삼바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제 이름은 삼바 시세예요. 그리고 전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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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마니에르 드 부아 Maniere de voir 시리즈 1
세르주 알리미 외 32인 지음, 이진홍 옮김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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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집권하고 각각의 상반된 시선이 쏟아졌다. 기존의 정치세력과 기득권층으로 이루어진 질서를 거부한 유권자의 승리로 보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시리자의 집권을 신민당에 느낀 피로감에서 찾으며 앞으로 그리스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평했다. 글쎄, 모르겠다. 우리가 여태 정의하고 있는 진보 혹은 좌(左)의 의미가 과격, 반(反)자본, 운동권 등으로 점철되었던 만큼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다른 국가들에서와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한국 보수가 '잃어버린 10년'으로 칭하는 시절도, 나는 얄궂게도 그것이 진보정치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한국정치가 좌우로 나뉘어있다 한들 아시모프가 『파운데이션』에서 역설했던 '(그럼에도 불구한)끝없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고, 이념이 아닌 현실의 손을 들어주어도 모자랄 마당에 정치공학 운운하며 악다구니를 써 봐야 별무소용이다ㅡ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특기할만한 점 두 가지,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는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보다 굉장히 파렴치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는 것과 동시에, 꾸준히 좌파와 진보가 기를 펴지 못해왔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보수 =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 어쨌든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개혁, 자율, 민주, 평등, 자유 등에 관한 한 자신들의 담론을 보수의 그것에서 베끼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에 진보는 없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그저 '급진적 선회'에만 쓰였고 자율 역시 '시장의 자율'에 그쳤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인식을 함께해 줄 담화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해야만 한다. 대중이 길을 잘못 들었는가, 아니면 정치가 잘못된 길로만 가는 건가.




진보적 정치 이념과 지향성을 하나의 점으로 규정하려 들면, 각자 생각하는 정답을 각자가 주장하기만 할 뿐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지점을 이내 만나게 된다 (...) '소인은 똑같은 자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인 것이다.

ㅡ 본문 p.303 「우리가 진실로 진보정치를 원한다면」에서




18세기의 사상가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에 걸린 가장 큰 위험은 구제도인 앙시엥 레짐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이 민주주의를 횡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대담하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한 부유한 계층이 자기들만의 지배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계층이 아니라 국가에서 스스로 모집된 것으로 국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자기들이 대표하는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하다는 근거로 국가가 스스로를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잘 대변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본문 3부 中 「그들은 누구를 대표하는 걸까?」에서) 무슨 무슨 '주의'를 들먹이기에는 진보건 보수건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 특히 좌파의 정체성의 위기는 꽤나 심각한데, (제발 그 빌어먹을 '통합'이란 단어를 좀 갖다 붙이지 않았으면!) 대중과의 연대감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 분열해버린다. 왜 그들은 늘 불가피하다는 볼멘소리를 하는가? 왜 그들은 늘 불완전하다며 징징대는가? 질질 짜기 전부터,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패배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건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항상 마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2년 전쯤 <마니에르 드 부아> 124호에 수록된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의 운명」(본문 수록)에서는 이런 문장도 찾을 수 있다. 「이제 노동자, 피고용인,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간계층을 결집한 거대당이 되어버린 시리자당은 공산당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만큼이나 거대 미디어와 그 충견(忠犬)들도 불편하게 한다.」(p.202) 진보이건 좌파이건 대중은 그들에게 역시 일관성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대중은 그들이 단순히 정체되어있는 현상이나 특권층에게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만을, 위의 인용에서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을, 바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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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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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내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를 한번 보겠다. 이 『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에 부록으로 실린 '고대에서 현재까지 지명 변천 일람표'를 들여다보면 이곳의 지명이 현재 익산군(益山郡)이라 적혀 있고, 또한 '지명해설' 부분에서도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지난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시'로 개편되었으므로 이는 틀린 것이 된다. 이 같은 오류가 또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이 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까닭에 한 번에 모두 톺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역사용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해서 그다음에 생각난 것이 도승지(都承旨)였다. 영화 《광해》에서 주야장천 왕 옆에 붙어있던 그 도승지 말이다. 책에 의하면 그 정의는 이렇다. 도승지란,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의 장관으로 정3품직이며 정원은 1명이고 왕의 측근에 시종하여 전선(銓選)에 깊숙이 관여했다, 고. 한마디로 도승지는 왕의 비서기구인 승정원의 장이라 할 수 있어 오늘날의 비서실장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철저하게 왕을 보좌하는 임무를 띤다). 그렇다면 대동법(大同法)을 보자. 물론 이도 'ㄷ' 항목에 실려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대동법은 각 지방에서 바치는 여러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내게 하는 조세법인데, 토지의 결(結)에 따라 부과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이를테면 소득수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고소득자들이 갖는 심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영화에 함께 거론되는 것으로는 호패법(號牌法)도 있다. 이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고 주서, 성명, 직업, 연령, 본관 등을 기입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 하나만으로도 그 시대에 통용되었던 용어들이 궁금해지고, 또 얼마든지 이 책을 찾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만하다. 아, 끝으로 상참(常參)이 생각난다. 상참이란 매일 아침 대신과 중신 등이 편전에서 국왕을 배알하던 약식 조회. 어딘지 모르게 장관들이 대통령을 쉽게 만날 수 없으며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업무 스타일을 비판하는 지금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그도 그럴 것이 상참은 '매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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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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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식이든 그 비슷한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나로서는 죽었다 깨도 안 될 말이다. 쇼스타코비치, 디터 체흘린의 베토벤 소나타, 힐러리 한, 야니네 얀센, 율리아 피셔, 오토 클렘페러, 이 정도가 내가 가지고 있는 음반인데, 연주에 사용된 악기 구성이 현저하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잘 구분하지도 못한다. 이를테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설명하는 부분에 '서주에 이어 도도도도 하는 거센 멜로디가 나온다'고 쓴 구절이 있다. 나는 그것을 들으면서도 이 부분인가, 저 부분인가,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헤맬 정도다. 이런 내 앞에서 클래식 이야기를 하겠다니, 하는 반신반의의 마음가짐으로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이 양반들, 주전부리를 옆에 놓은 채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지지며 미주알고주알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이따금, 어, 거기, 거기야, 하면서 가려운 등짝을 내미는 것처럼. 몇 곡이라도 모아 책 출간과 함께 음반도 기획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하루키와 더불어 오자와 세이지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클래식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때도 있고 때때로 그건 그래,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지만 희끗희끗한(실은 반백에 가깝다) 아저씨의 사람됨만은, 특히 음악에 관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짐짓 비밀스레 느껴지기도 하는 무대 밖 이야기도 역시 좋은데, 하루키가 그의 소설 속에 음악 이야기를 단 한 문장이라도 쓰지 않는 날이 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실로 그 때문에 알게 된 음악도 꽤 되니 말이다. 물론 종국엔 그런고로 이 책이 만들어졌다고 봐야겠지만……. 만일 하루키가 자꾸만 자신을 문외한이라 칭하지 않고 진행된 일방통행이었다면 모르나, 담백한 제목처럼 클래식 한 소절이라도 들어봤음직한 사람이라면 썩 괜찮은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의 '합'도 나쁘지 않고. 때로는 모호한 부분도 있고 때로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곳도 있어 가만가만 읽다 보면 앞서 말했듯 정말이지 옛날이야기 한 자락을 듣는 것만 같다. 나로 말하면 하루키 스스로 문외한이라 일컫는 것보다도 훨씬 이쪽 이야기에 전무후무한 무(無)지식을 자랑하지만, 클래식은 이런 거야, 이 부분은 이렇게 들어야지, 가 아니라 주먹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실제로 둘의 대담 사이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설렁설렁 읽기만 해도 기분이 묘해지기 일쑤다. 도톰한 이불 속에 들어앉아서라면 더욱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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