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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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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철저히 내 관심사에 의해 소설을 통제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소설 속에서 주눅 들기를 원망(願望)한다. '소설 = 환상화된 형식'이라면 글쓰기-의지(스크립투리레, scripturire) ㅡ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의지 ㅡ 또한 글쓰기-욕망에 복종할 수밖에 없으니 종국엔 동일 선상에서 환상화된다. 그리고 그 환상이란 심히 걱정스럽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이미 소설-준비로서의 과정에서 중요시되어야만 하는데, 더군다나 바르트에게 글쓰기 욕망은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출발점을 품고 있으므로(p.228)ㅡ 그는 이미 매혹된 주체이자, 소설이 생산성을 띠고 태어난 변이된 산물이라는 정의와 은유 앞에서 반박할 수 없는 가련한 존재이기도 하다(하여 나는 그가 살아서 소설을 기획한다 한들, 소설의 외양을 갖춘 글을 쓴다 한들, '더럽게' 이타적이어서 '더럽게' 재미없는 결과물이 나왔을 거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필기구를 꺼내 메모하고 있는 순간에도 현재는 증발되고 당장의 포착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다(게다가 그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ㅡ 그는 소설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소설 한 편을 만들 '것처럼' 하고 말 것이다…….(p.55) 사실 소설(문학)의 출발이란 모든 연속과 단속 위에서 너무나도 교활한 사물의 법칙에 의해 그 운동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찰나의 현재, 잠정적 휴지에 접어든 한 장면의 파편을 대체 어떻게 기능하게 만들 것인가? 당연히 쓰는 것은 읽는 것과 대척에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읽기를 쫓아내는 것일까?(p.409) 은유를 은유화하고, 결정적으로 실마리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간극을 메울 착상이 제대로 응집되고 서술되는 것은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일이지 않던가? 맙소사. 베케트의 남자들이 줄기차게 읊어대는 대사가 이 진실을 재현하고 있을 따름이다ㅡ 「Nothing to be done.」




……비록 일상 속에 내팽개쳐져 있어도 심각한 죄의식의 회귀처럼 느껴지는 추락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권태의 양면성입니다. 권태를 뒤로하고 글을 쓰지만 글쓰기를 막는 두 번째 권태가(어쩌면 첫 번째 권태가 전환된 것입니다) 작업의 내부에서 솟아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나는 이 '작은' 권태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ㅡ 본문 p.440~441




내가 글을 하나 쓴다면 바르트와 궤를 같이하진 못할는지도 모른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건 읽는 그 순간 현재(성), 즉각성에 관한 모든 의혹을 일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ㅡ 적어도 바르트에겐 그렇다. 그러므로 문학이 일종의 매춘이라는 내 의견이자 확고한 신념과는, 미끼로 사기를 친 뒤 주둥이를 한 대 갈겨서 물고기를 낚는, 전혀 다를 것이다. 물론 '현재'는 '현재적인 것'과 구분되며, 때문에 현재는 생생하고 현재적인 것은 소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맞다.(p.445) 동시에 문학이 가진 욕망이 더욱 생생하고 더욱더 현재적일 수 있다는 것도 맞다. 고삐 풀린 허무감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를지언정 문학은 하나의 부속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개인적 우주를 들이받을 수(도) 있는 까닭이다. 글쓰기-의지와 글쓰기-욕망은 이로써 (비로소) 완성된다(완성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써야만 하는가? 나는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생물인가? 익숙한 감정, 잡동사니, 반복의 공간, 비굴한 생활 전선, 이들 속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글쓰기-의지와 글쓰기-욕망을 증명해야 할 것인가? 심지어 나는 '비현재'와 '비현재적인 것'마저 배제할 수 없는데도! 바르트가 글쓰기(문학)에 접근하려는 방식을 나는 때때로 참을 수 없다(이는 종종 '가독성'과 '단순성'에 관해서도 해당되는데, 본문에서 그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하이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상당량의 글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플로베르에 의해 '절대적 글쓰기'는 본질이 되는가? ㅡ 「나는 한 사람의 인간-펜입니다. 나는 펜에 의해, 펜 때문에, 펜과의 관련 속에서, 펜과 더불어 더 많이 느낍니다.」 ㅡ 전달자가 아닌 주체적 인격을 지닌 작가로서 말이다 ㅡ 그리하여 여기서 '글쓰다'는 자동사가 된다(작가가 무언가를 쓰는 자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냥 쓰는 자라면).




나는 깊이, 다시 말해 완강하게, 다시 말해 계속해서 내가 쓰기 시작한 때부터,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믿고 있습니다. 책 속에 저장되어야 하는 이 욕망을 말입니다. 언어활동의 욕망, 꽤 큰 언어활동의 욕망입니다 (...) 문학이 증언할 수 있을지 모르는 유일한 혁명은 끊임없이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 다시 말해 욕망 속에는 고귀함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더 좋게는 고귀한 욕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나는 왜 그것을 ㅡ 당장, 아직까지 ㅡ 만들지 않을까요?
ㅡ 본문 p. 483~484




그러나 이 극복되지 못함, 대기(待機), 유무한의 기다림이 글쓰기의 또 다른 난점일지도 모른다. 질서와 무질서의 공간인 테이블과 통합의 미덕을 발휘하는 밤[夜]의 시간 그리고 수첩과 필기구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 달린 옷은 차치하고라도, 누군가가 실제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ㅡ 단순히 페달을 밟는다고 해서 저절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이며, 결코 아무것도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p.421) 위기가 있은 뒤 시동(始動) 작업이 있고, 그렇게 된다면 능동적으로 발견되는 것들(멋진 직관)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증거도 증언도 증인도 없는 봉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해진 도식에 맞추고 '상상적 직사각형'을 채워나가면서 말이다. 바르트는 끊임없는 가필을 언급한다. '마요네즈 기법.' 일단 마요네즈가 만들어지면 식용유를 무한히 더 넣을 수 있고, 그 마요네즈 덩어리 앞에는 이런 글이 끝없이 쓰여 있다ㅡ <어딘가에 더하기.> 그러나 이 '끊임없는 필기(혹은 두드리기)'는 그 자체로 끊임없는 리듬의 블랙홀인 것으로, 꽤나 까다로운 조각 모음이 될 공산도 크다. 이 조바심 앞에 무릎 꿇는 당황스러움은 나를 고장 내고 내 글을 고장 나게 하며 내 손에 있는 펜마저 부러뜨려버린다. (바르트는 많은 부분에서 귀엽게 분(扮)해 이를 대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바르트에겐 '영원한 기다림'을 극복할 만한 재간은 없었던 것 같다(그가 죽은 때문이 아니다). 글쓰기-의지, 글쓰기-욕망, 이 고요한 무풍지대이자 거센 와류의 한복판에서 글을 쓰는 것(문학하기)이 어떤 방법론에 의지해 끝맺음을 가져갈 것인지는 그 욕망의 이전과 이후의 변화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문학이란 환상은 좀처럼 확신할 수 없는(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희망과 소원으로 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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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의 시대>
한국과 독일의 사회학자 16명이 모였다. 2차대전 이후의 반공주의가 양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유산 혹은 산물들, 이런저런 균열들을 바라본다. 이데올로기 상의 반공주의, 정치적 문제, 그에 대한 학문적 담론과 논의가 담겨 있다.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
희귀한 동물들의 집합소. 그러나 당연하게도 인간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생존기, 그리고 인간의 생존기.




<혐오와 수치심>
하나의 감정이 법체계에 간섭한다고 했을 때, 그럼에도 혐오와 수치심만큼은 안 된다는 입장. 왜 그런가? 양쪽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척의 도구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저자의 말. 그렇다면 이것은 약자와 강자의 사이에서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판문점 체제의 기원>
판문점 체제. 종전도 아니고 국가가 둘로 나뉜 것도 아닌 휴전 또는 정전 상태에서 태어난 물건. 자유주의적 평화의 역사적 상흔과 변화를 톺아본다.




<담바고 문화사>
담배, 담배를 보자. 세금을 뽑아내기 좋은 물건이자 값싼 기호품이었던 담배였다. 그리고 책은 그보다 더 이전을 돌아본다. 신선의 풀, 못된 물건이라는 다양한 인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지만 오늘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은 인식은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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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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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그엔 총 네 개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죠르죠네의 삐딱한 고개, 뒤러의 정면 응시, 로사의 앙다문 입술, 앙소르의 괴물들. 특히 마지막 앙소르의 자화상에는 다종다양한 '것'들이 나오는데 그 기괴한 괴물, 좀비, 해골, 시체, 인간들은 '멀쩡한 앙소르'를 겁먹게 하지 못하며, 멋진 붉은 모자를 쓴 그는 종국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동일시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화상의 주인공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 좀비나 흡혈귀와도 같다. 나ㅡ앙소르ㅡ그들은 거울, 성수(聖水), 십자가나 마늘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들의 두려움은 승진, 실패, 잔고 액수, 자동차, 실직(失職), 안락한 집에 있다. 때문에 문광훈에 의하면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 스스로의 생활을 만들지 못하고 자신의 색채를 찾지 못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있긴 하나, 그의 말대로 끝내 영원히 이 세계에서 똥파리처럼 죽어갈 공산이 클 것이다. 공공의 미덕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예술 체험이 자발적 발의와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렇다. 예술의 진정성이라. 글쎄. 아름다움이 내가 보고 만질 수 있게끔 경험적 산물로써 작용해야 하건만 그 고유하고 일관된(현대사회에서) 방식이 아름다움 자체로 현현되기까지의 시간과 간극을 어떻게 메운다는 건가? 항거의 발현이라는 것이 규범 일탈로 정의되지 않고 예술생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결국 나ㅡ앙소르ㅡ우리가 주체를 이해하고 연마해, 자신과 예술 발현의 관계를 개선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규범의 틀 속에서가 아닌 나 스스로 즐겁고 기꺼워하는 상태에서 말이다.





자유롭다는 건 쾌락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자신의 충동과 욕망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그것도 욕망 자체를 없애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에 충실하지 않으려는 자세도 아닌 유의미한 가능성 속에서? 당연히 자발적 절제와 분별은 우리 정신의 격려와 고취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다소 답답할 수도 있는 것은, 저자의 아내가 토로했던 점과도 일견 맞닿아 있는데, 그것은 미덕이라 부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곧 행복이며 그 아름다움이란 선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한 상태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 대목에서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왜냐. 바로 문광훈 자신도 당당히 털어놓지 않았던가?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고 말이다. 물론 이 문장으로 하여금 똥파리처럼 죽지 않기 위해 이러이러한 논의를 하고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는 해도, 이것을 공론장 한가운데로 들이밀기엔 얼마간의 어려움이 보인다. 그것은 인식 전환과 실천의 문제이며 변화의 핵심이어야 할 나 자신조차도 지독히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ㅡ앙소르ㅡ우리는 이러한 '사회화된 존재'로부터 교정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때때로 심미적 소통은커녕 심미적 고통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리시의 젊은 헨더슨이 아무리 그 여성을 찾아 헤맨다손 치더라도 끝끝내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가? 바로 현실에서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다. 동시에 이 명제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어서, 현실의 나ㅡ예술ㅡ심미의 경험ㅡ아름다움이 반드시 현실적인 것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명제와도 상충하게 된다. 성공하기 전부터 이미 실패한 상태이고, 실패하기 전에 미리 성공의 달큼함을 맛본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독자 된 입장인 내가 이 대결 구도에서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엄숙한 고담준론의 보편성을 압도할 재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정과 부정 사이에서 멀거니 고민하기에 앞서 저자가 먼저 나서서 고민해주고 있으므로 그렇다. 그러니 일단 귀 기울여 들어보자. 심미주의를 선언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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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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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표의문자는 한자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상형문자로서 한자의 외양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한자의 탄생』도 본론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 사례를 짚는다. 看ㅡ 눈(目) 위에 빛을 가리고 사물을 진지하게 응시할 수 있도록 손이 하나 얹혀있단다, 그래서 見에 비해 또 다른 내용이 가미되었다는 것인데, 전자는 차치하고라도 看은 확실히 見보다는 다소의 확장성을 함의하고 있다. 길을 걸으며 볼 수 있는 표지판, 화장실의 남녀를 구분해놓은 그림들, 비상구 팻말의 달려가는 사람, 신호등에서의 걷는 자와 멈춰있는 자. 이것들을 통해 일종의 기호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동시에 얼마만큼의 밀접함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 도형, 그림은 결국 문자화되어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한자는 엄밀히 말해 표의문자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뜻은 물론이거니와 종종 발음을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어랄까, 조탁이랄까, 알파벳이나 히라가나와 같이 일렬로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처럼 조합, 조립의 과정을 거치므로 음절 면에서 절약의 미덕을 보이기도 한다(획수의 많고 적음은 둘째 치고라도).





때문에 이런 특성을 살려 상당히 난센스적인 흥밋거리가 파생되기도 한다. 그림에서처럼 나무로 둘러싸인(숲) 곳에 남녀가 둘 있으니 달리 무얼 하겠는가, 하는 의미에서 이 글자는 '뻔할 뻔' 자로 불린다. 물론 이런 한자는 실제로 없다ㅡ 굳이 비교하자면, 한때 좋지 않은 감정일 때 의성어로 쓰곤 했던 '뷁'과 비슷한 맥락이려나. 재미있는 예를 몇 가지 더 들어볼까. 생각(生覺)ㅡ 살면서 깨닫는 것, 택시(宅侍)ㅡ 집으로 모셔다주는 것, 백신(vaccine, 白新)ㅡ 몸을 깨끗하고 새롭게 해주는 것……. 자, 어쨌든 탕누어의 글은 다분히 공리적이지 않기도 한데,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더욱 들여다볼 만하다. 진실로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는가? 그렇다면 갑골과 금문, 상형을 지나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저 옛날사람들의 흔적인 셈이다. 책은 큰 맥락도 훑지만 비교적 세세하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오래전의 갑골문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데, 조금 가혹하게 보자면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을는지 모르나 실로 그 해석이 흥미진진하고 반드시 허황된 것만은 아니어서 일종의 은유의 무서움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보르헤스나 벤야민이 언급된다는 것만으로도, 허탈하면서도 무릎을 치는 재치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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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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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선가는 시간을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는 것'이라 하고, 또 어느 쪽에선 '한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들 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선 시간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가하면 소설 『점과 선』 등에서는 찰나의 몇 분을 이용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ㅡ 에코의 『전날의 섬』은 제쳐두고. 지금, 이전, 다음. 그저 단어에 불과하지만 이것들은 죄다 시간을 단속적으로 분절하며 우리의 통념에 덧댄 안정감을 준다('언제'가 간섭하면 꽤 재미있는 사유가 가능하다). 각각의 순간들ㅡ 손으로 만질 수 없을지라도ㅡ 특히 양적인 측면에서ㅡ 심히 불확실하고 때때로 터무니없이 들리기도 하는 시간(들)ㅡ 그래서 심지어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기도 한다. 때문에 '시간'을 찬찬히 살펴보면 완벽하게 독립적이지도 않고 어느 하나의 일부가 되지도 않으며 어떨 땐 순 엉터리 같기도 하므로, 이것을 전 세계인이 하나의 체계로써 합의해 지켜나가게 되었다는 것 역시  어찌 보면 얼떨떨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면 시간을 측정하겠다고 발명된 시계 또한 매한가지 아닌가? 12진법과 24진법, 60진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요상한 기계는 인간의 시간관념을 지배한 지 오래다ㅡ 물론 시간의 덩어리 '날(日)'은 진법체계가 아니라 달력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물건을 사용해 재긴 하지만. 하여간 우리는 경험적, 감정적으로 느껴왔던 것을 일종의 개념화와 고착화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어놓았다. 눈으로 볼 수조차 없는 것을 측정한다니! 물론 애덤 프랭크에게 시간이란 돌처럼 직접 느낄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접하는 물질세계의 일부이다. 하지만 정말 시간이란 게 있을까? 어쩌면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에게 던져야 할 물음인 것만 같다. 책 말미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금(들)'에 관한 문장 몇 개를 읽으면 이것은 더욱더 짜증스러운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 이어지는 '지금'들을 지나가고 있다…… 시간을 단단히 붙잡을 수 없는 건 시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들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지난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우리의 기억뿐이다ㅡ (끊임없는 '지금'의 배열이라……) 망할, 『시간 연대기』는 철학서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종국엔 '시간'이란 것이 하나의 발명품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먹어 치워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알면 알수록 의미를 잃어간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까? 시간이란 물질세계 혹은 관념을 평가절하하거나 치켜세우고픈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그것을 이용하고 비틀어대는 것은 인간이다. 그것에 관대하다가 종종 자발스럽게 굴기도 하며 지나버린 청춘이라 부르면서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서 말이지, 쳇.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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