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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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한 소설 제목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과거 MBC 다큐멘터리 ‘지구의 눈물’ 시리즈의 「아프리카의 눈물」처럼.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에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2006)와 《로드 오브 워(Lord of War)》(2005)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다른 얘기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 소년병으로 끌려간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강제노역을 하며 발버둥치는 ― 솔로몬으로 나온 디몬 혼수라는 배우는 《콘스탄틴(Constantine)》(2005)에서는 미드나잇이란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드나잇을 떠올리며 솔로몬의 얼굴을 보면 왠지 더 슬퍼진다. 멋들어진 시가를 물고 테이블을 내리치던 카리스마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오로지 아들을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뀌어 드러날 때 말이다 ― 물론 영화상에서의 이미지란 측면에서 느껴지는 것이긴 하지만. 각설하고, 어쨌든, 나는 아프리카에 대해 잘 모른다.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시작하자마자 5쪽 분량의 프롤로그는, 그래서 나와 같은 이들의 정수리에 망치를 때린다, 가차 없이. 4D ― 죽음(death), 질병(disease), 재난(disaster), 절망(despair) ― 의 대륙? 이런 가혹한 시각은 아프리카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인간은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라고 했던 데카르트에 반해 파스칼은 인간을 두고 허영을 가진 심정의 존재라 했다. 나는 후자에 속하고 또 그 말에 찬성한다(파스칼의 다른 논제들은 차치하고). 그가 말하는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 묻은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것일 테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했던 말을 상기해보자.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체 자연과 조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이 책은 왜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며 그것(그들)을 ‘세계사의 미아’라고 했던가. 빈곤, 피 흘림, 왜곡된 사실, 부패한 정부, 자원 강탈, 착취. 특히 전쟁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소년병이 되어 내전에 내몰리는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아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은 살인, 강간, 약탈,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성장한다. (이상한 말이지만)당연히 많은 전과를 올린 이는 반군의 지도자로 크게 되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총알받이가 된다. 사실 이런 ‘아프리카의 혹독한 겨울’에 대해 말하자면 수많은 예가 인용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말한 독재와 폭력의 희생자인 소년병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에 비해 빈곤하지 않은 아프리카 땅 ― 의 자원 ― 을 노리는 세계의 기업들, 마지막으로 그런 아프리카를 잔뜩 왜곡하며 보는 우리의 눈이 있겠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는 남아공의 두 번째 민선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의 연설 「나는 아프리카인이다(I am an African)」는, ‘African’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아프리카 땅을 그들의 아프리카로 오롯이 밝혀주는 느낌이다……! 400쪽이 조금 못 되는 텍스트로 가려졌던 세계를 얼마나 다시 볼 수 있겠냐만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라는 뜨끔한 문장 하나로 시작되는 과거와 현재의 아프리카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우리의 스펙트럼을 뒤틀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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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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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사회를 좀먹는다.’ 서문의 타이틀이다. 그런데 참 애매모호한 것이, 대개 이런 사실은 누구나 다 빠르게 직감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우리의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 이 책의 원제 『The Spirit Level』은 그래서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인류는 지금까지 엄청난 풍요를 누려오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정치판에서도 이런 평등에 관한 쟁점은 와류에 휩쓸리며 오갈 데가 없어 보인다. 평등이란 단어만 나와도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기만 할뿐이지. 많은 선진국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 ― 이 대조되는 두 현상은 중요한 이정표다(p.22). 특히 저소득층의 사회 구성원들이 더 많은 문제를 겪는 이유는, 그들이 처한 환경 자체가 문제를 일으킨다기보다 그들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문제들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사회 ‘밑바닥 계층’에 속하게 되는 것 같다. 수치나 가난이라는 낙인 없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자신 있게 내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애덤 스미스의 강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p.45). 불평등이 매우 강력한 사회 분열 요소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분명히, 불평등은 분열을 낳는다. 특히 시장 민주주의에서의 사회 이동성이란 얼마나 벅찬 일인지! 가정에 있는 물건들이 사회적 계급의 상징으로 사용되고(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아 엘리트가 된다. 그럼 그렇게 자란 상위층은 무슨 일을 할까. 하위층이 상향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지 않던가 ― 알량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엡스타인(Joseph Epstein)이 말하는 우월감이란 이런 것이다. ‘BMW 740i에 앉아 자신이 가난한 속물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 빨간 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내 차 옆에 선 촌티 나는 캐딜락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조용히 음미하는 것이다. 또한 내 딸이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전공할 때, 방금 인사 받은 여자의 아들이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한다는 이야기를 기껍게 들으며 느끼는 조용한 기쁨.’(p.205) 이게 정서적 측면에서 볼 때 문학적으로 느껴진다면 그보다 확실하고 무섭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은 그래프와 수치다. 여기서 가장 취약하고 부족한 것은 ‘평등해지려는 정치적 의지’라고 본다. ……일본이나 스웨덴을 보면 자꾸 슬퍼지는데, 정치판과 기득권(특권)층의 논쟁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을 놓고 벌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더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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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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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에는, 나는 100%까지는 동의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좋은 말 ․ 올바른 말을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된다는 거다. 사실 책에 나온 대로 모든 말을 억지로 고치게 되면 굉장히 어색할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뿌리 깊은 글쓰기』를 읽으며 아, 앞으로는 이렇게 고쳐 말하고 쓰는 게 맞는 거고 당연히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게 아니라, 우리말의 뿌리를 알고 바른 표현을 습득해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본문에서 ‘나무 벤치’를 ‘나무 걸상’으로 다듬는 부분. 당장 이렇게 바꿔버리면 혼란스럽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의미가 잘 흐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저러저러한 ‘미국말’은 이러이러한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정도만 알고 가면 되겠다. 물론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도 있고 거부감 드는 설명도 있다. 「저 같은 사람들이야 ‘싱글 맘’이나 ‘싱글 대디’가 낯설 뿐 아니라 낯부끄러운 낱말이라 느끼지만, 이 나라 구석구석 이 낱말이 두루 퍼집니다. 이 낱말을 쓰는 분들은 더없이 당차고 떳떳하며, 영어로 가리키는 당신들 이름이 번듯하다고 느낍니다.」(p.185) ― 바로 이 부분, 첫 문장은 아무렇지 않게 읽었지만 그다음 말이 우습다. 대체 누가 당차고 떳떳하며 번듯하다고 느끼는가. 물론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싱글 대디’를 ①아버지와 아들네 ②아버지와 딸네 ③아빠만 있는 식구들, ‘싱글 맘’을 ①어머니와 딸네 ②어머니와 아들네 ③엄마만 있는 식구들, 이렇게 바꿔버리면 지금으로선 어색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우리말 표현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쓰기는 버거워 보인다. 그럼 무조건 짧고 간편하게만 고치면 뭐든 괜찮다는 거냐,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취지도 알겠고 이해도 되지만 용납되지 않는 부분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앞서 말했다.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된다’고.

 

 

참 좋고 흥미로운 책이며 아, 그래, 잠깐만 생각해보면 예쁜 우리말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부분적으로 왠지 강요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그러나 화내기 전에 생각해보자. 나는 ‘우리말’을 얼마나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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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하 - 미야베 월드 제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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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한효석의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시리즈 ― 찾아보고 놀라지 말라 ― 는 인두겁의 사회 ․ 문화적 징표를 보여준다. 각 작품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쓸데없는 피부’에 대한 것만은 동일하다. 다음은 한효석 작가의 말. 「5밀리미터만 벗겨도 우리는 고깃덩어리다.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에 자신을 신격화하고 착각하며 남을 지배하려 하다 보면 동물들 사이에서는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마루미의 바다에 토끼가 날면서부터, 이 고깃덩어리들 사이의 카드놀음이 시작된다. 드라마틱하다는 건 이런 거로군.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가 님의 신비가 끝내 신기루로 남을 것임을 짐작했을 땐 좀 너무하다 싶었지만 어차피 그보다는 ‘가가 님과 아이들’의 이야기니까 뭐 그쯤은 봐주기로 했다(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인즉슨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낸 셈. 홑 떨어져있는 가가 님임에도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데, 오히려 외딴집을 둘러싼 바깥의 외딴집들이 더 두려움에 떨게 되고 ― 우사나 호가 시도하는 선문답은 좀처럼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으면서 마루미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다. 그리고, 적어도 라스트신을 향해 갈 때에도 와타베와 우사는 살아있어 주길 바랐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이래서는 ‘민폐 가가’다. 그 때문에 와타베의 르상티망이 과연 제대로 결실을 맺은 것인지, 우사와 호의 텔레파시가 제꺽 잇닿아있긴 한 건지도 의문스러워진다.

 

 

 

「비는 누구의 머리 위에나 똑같이 내린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ㅡ 하권 본문 p. 338

 

 

 

읽어보면 알겠지만 『외딴집』은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 그 일상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주어진 시대를 백그라운드로, 연기하는 건 개개인이. 그런데 이따금 이 작품을 두고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얘기를 주워듣는다. 에도 시대의 어려운 관직명 때문일 수도 있고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변죽만 울리는 가가 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얘기들은 작품을 읽을 때의 노선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듯싶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잠잠한 드잡이를 맛보고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까. 게다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떤 현대 스릴러물에도 뒤지지 않는 박진감도 엿보이는데 말이지, 그리고 감동도. 앞서 언급했듯 ‘드라마틱하다’는 건 ― 여기서의 방어기제 ― 호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맑음(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호를 보면서, 호의 얼굴 위로 치매에 걸린 우리 할머니가 겹쳐졌다)이 외딴집과 마루미를 무대로 한 수수께끼 같은 원흉에 대립항으로 작용하면서 만들어지는 애달픔에서 파생된다고 본다. 그럼으로 ‘민폐 가가’에서 ‘신(神) 가가’로의 자연스런 연착륙도 이루어진다. 여전히 마지막 맺음은 슬퍼서 싫지만…… 아 씨, 눈물이 다 나네.

 

 

덧) 원제 『孤宿の人』의 ‘人’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마루미에 내리던 비는, 이제 조금은 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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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아비 스타인버그 지음, 한유주 옮김 / 이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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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사서는 여성 재소자 대상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쇼트(short)에게서「나랑 한 번 할래?」소리를 듣거나 속사포 장광설을 자랑하는 프랭크로부터「신을 믿나?」하는 말을 듣는다. 사실 쇼트의 말을 듣는다면 친절하게 윙크라도 찡긋했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홉스의『리바이어던』을 떠올리며 고독하며(solitary), 비루하고(poor), 악랄하고(nasty), 난폭하며(brutish), 짧은(short) 카테고리로 여성 재소자들을 머릿속으로 가름했다. 그가 그녀의 농담에 멋진 리시브를 하지 못한 이유는 거기 있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교도소 도서관 사서로 취직한 주인공은 한마디로 ‘먹물’이었다.「폭력배들이 언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 봤어? 이 새끼들은 일 좀 해야 돼. 일이라도 하는 게 걔들한테도 좋아. 우리는 걔들한테 빚진 거 없어. 걔들이 우리에게 빚을 졌지. 봐, 걔들은 인생을 완전히 망쳤어. 자네는 그들에게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거라고. 자네가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또 그들이 일을 잘해낸다면 그들은 여기서 나가는 날 이렇게 말하겠지. ‘뿌듯한 수감 생활이었어.’ 그러면 된 것 아닌가?」이런 교도관의 말에 분개했다면 주인공 아비는 이미 그들과 같은 수감자가 된 것이리라. 감옥이든 사회든, 세상은 인간의 복수형이 아니던가? 어딜 가나 인간, 인간, 인간이다. 그리고 교도소에는 수감자가 있었다. 교도소라는 공간이 유토피아적 환상을 산산이 깨뜨려버릴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느냐 혹은 그들‘과’ 바라보느냐의 차이가 될 것이므로. 아비가 조금씩 투어(tour)하는 기분으로 교도소에 드나들 때 비로소 그는 ‘교정’이라는 단어가 과거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감옥의 문이 있던 텅 빈 장소처럼 공허한 말이라는 걸 깨달으리라. 재소자들을 보며 아비가 어떤 종류의 감화를 받든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관계가 관찰하거나 관찰당하거나 하는 평행선이 아닌 그저 물음표와 느낌표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일일 테니까(이따금씩 온점도 찍어주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동등한, 그런 권리 ― 아비는 재소자들보다 더 재소자같이 되어간다.「너는 체제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한 거야. 너는 그 체제로 먹고 살지.」주인공 먹물은 과연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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