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지낸 것들 - 나만 위해 아등바등 사느라 무거워진 인생에게
니시다 후미오 지음, 박은희 옮김, 변종모 사진 / 에이미팩토리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Life is BEAUTIFUL, 인생은 아름답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에서 시종일관 짐 캐리가 「B, E, A, utiful!」하고 외치지 않던가! 아스팔트에 붙은 껌에도, 구멍 뚫린 티셔츠에도, 퇴짜 맞은 결재서류에도,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으며 인생이 있다.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1분 1초의 그 순간까지도 누구에게나 마땅히 행복을 누릴 기회는 주어진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 얼굴만이 아니라 어떤 것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를 보면 마치 미친 듯이 전속력으로 경주를 하는 것만 같다. 그러다 문득 내가 목숨을 걸고서 아슬아슬하게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흐르는 물에 내 얼굴을 내밀면 온통 찌그러진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내 얼굴, 내 삶, 내 사람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물을 잔뜩 흐려 놓아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만든 것만 같기도 하다……. 타희력(他喜力). 저자가 이 책에 붙인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힘>이란다. 언젠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한 말이 생각난다. 그것은 이렇다. 「사회적 성공을 자신 개인의 성공으로 돌리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얼마나 당연한 말인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쌓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은 나만의 성공이 아니며 나만의 행복이 아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give보다 take가 앞서는 세상이 된 것만 같다. 상투적인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고작 자기 발등만 쳐다볼 수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타이틀 자체가 ‘사물들’이다. 사물이라면 실질적인 것일 텐데, 그럼 대체 뭐가 실질적인 거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Das Parfum)』에 나오는 ‘길에서는 똥 냄새가, 뒷마당에서는 지린내가, 계단에서는 나무 썩는 냄새와 쥐똥 냄새가 (...) 부엌에서는 상한 양배추와 양고기 냄새가, 환기가 안 된 거실에서는 곰팡내가, 침실에는 땀에 절은 시트와 눅눅해진 이불 냄새가, 거리에는 굴뚝에서 퍼져 나온 유황 냄새와 무두질 작업장의 부식용 양잿물 냄새가, 도살장에서는 흘러나온 피 냄새가...’와 같은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체가 있다면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하는데 냄새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페렉이 말하는 그 ‘사물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불길한 재료와도 같은, 보잘것없고 시시한 보물들처럼, 어지러울 정도로 평범한, 때로는 황홀한 향기를 풍기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박제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날카롭고 매서운’ 형이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전적 의미의 사물들만이 남는다. 

 

『사물들』의 1장을 지배하는 어투가 그저 추측을 하는 것인지 응당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단정을 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수십 수백 가지의 사물들을 비추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앵글로 인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니. 그럼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그들이 숨도 쉬지 않고 창조해낸 ‘나의 사물들이 될 목록’이 아닐까. 자, 그럼 보자.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곳곳에 나타나는 추측형 혹은 미래형의 시제다.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것, 아직은 내가 만지고 소유할 수 없는 것. 이것은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에 두려워하는 형국이 된다. 삶은 팩시밀리로 재단되고 세련된 고급 실크로 꿰매지며 그에 따른 사물들은 애너그램처럼 순서만 바뀌어 같은 모습으로 출현한다. 이렇게 그들은(우리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물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being human’이 아니라 ‘being thing’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거다 ― 페렉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이름보다도 사물의 이름을 몇 곱절이나 많이 드러내 보인다(실제로 제롬과 실비라는 이름이 과연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를 세어 보라). 

 

그럼으로써 또 한 가지의 명제, 예컨대 사물에도 카스트가 존재한다는 것, 수많은 사물들 중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페렉이 그 많던 사물의 나열을 잠시 끝내고 제롬과 실비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터져 나온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질문거리였다’는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사물들이었다’로 대체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 ― 사물들이, 그들의 눈앞에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들을 소유할 수 없다. 존재하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유령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가능한 일일까? 결국 『사물들』은 human과 thing의 대치상황을 만들어놓고, human의 거죽을 모두 벗겨 에코르셰가 될 때까지 thing을 활용한다. 즉 thing은 주체가 되고 human은 객체가 되는 거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그들의 미래, 혹여 경쾌하고 산뜻하게 보일지라도 역시 재차 ‘사물들’로 돌아가고 마는 장면들에서, 그들은 페렉이 구현한 포식자에게 소비되고 만다. 마치 영겁회귀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을 보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Being Digital)』,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그리고 짐 크레이스의 『그리고 죽음(Being Dead)』. 모두 <being>이 들어있으니 이것은 네그로폰테의 저서처럼 <죽음이다>라고 옮길(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럼 <그리고> 앞에는 뭐가 있을까. (아마도)삶이겠지. 그럼 <그리고 죽음>이 아니라 <죽음 그리고>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차피 죽음 뒤엔 삶이고, 삶 뒤엔 죽음이니까 ㅡ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그리고 죽음>은 <죽음이다>, <삶이다>, <그리고 삶> 또는 <그러나 삶>으로 바꿀 수 있다(말장난이 아니다). 드넓은 바다 전체를 소리로 바꾸어 버리는 해저 동굴처럼 노래할 수 있는 남자와, 가는 허리와 완벽한 18세기풍의 등을 소유한 여자, 대담하고 불안정한 딸, 그리고 죽음. 죽음 때문에 그들은 딱정벌레의 햇빛을 망쳤고 게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신선함을 잃어 버렸다. 

 

불교 신자인 그레이엄 콜먼(Graham Coleman)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휴가를 준비하지만, 확실히 다가올 죽음에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내가 의심하는 것 한 가지, <확실히 다가올 죽음>이란 건 대체 그 정체가 뭔가? 뭐가 확실하다는 거지? 죽음은 근본적으로, 모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있다. 예컨대 자유와 자기 상실, 욕망과 거부, 실재와 부재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래서 『그리고 죽음』은 하이데거처럼 읽기 어렵다. 그가 말한 <존재의 목동>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려야 했던가. 하지만 그로 인해 존재와 무(無), 영구적 상태의 불안을 알게 된 점은 기뻐할 일이다. 이것은 <몬다지의 물고기>로 환원되거나 할 수 있으므로. (바슐라르가 말한)<죽은 물>처럼 물은 아름다운 충실한 죽음의 물질, 그래서 물의 거울이 흐려지는 것이고, 추억이 몽롱해지는 그 죽은 물이 된다. 그 물은 조지프와 셀리스를 어루만지는 바리톤 만의 물이며,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리고 죽음>이다. 셀리스의 발목에 닿아 있는 조지프의 손가락을 보고 「우리 아버지의 손을 치우지 마세요.」라고 실비는 말한다. 이것은 <죽음 속에 있는 삶을 데려가지 마세요.>를 의미하며 <삶 속에 있는 죽음을 그저 가만히 놔두세요.>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고 죽음』은 오롯이 이 문장 하나로 축약된다. 「우리 아버지의 손을 치우지 마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물랭의 댄서 매그레 시리즈 10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일정 부분 사건을 조작한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전작 『타인의 목』에서 느낀 굉장히 무모하게 보이는 직감에 의한 수사는 여기에서도 드러나니까. 역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시리즈 첫 편인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는 매그레의 수사 방식을 ‘틈새’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이 『게물랭의 댄서』에서는 ‘카드를 뒤섞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그 줄기도 혼란스럽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게물랭의 댄서인 아델과 『네덜란드 살인 사건』에서의 베이트예가 접점이 보일 듯 말 듯한 묘한 평행선을 그린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고,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가는데 사건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뜻밖인 결말에 왠지 사기당한 기분마저도 들긴 했지만, 매그레의 아내 루이즈가 다시 한 번 등장하면서 보여준 쓸데없는 질투에 그런 것들은 일순 사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목 매그레 시리즈 9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코인의 피포위 의식」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거짓말 

 한밤 치킨게임의 패자는 신속하며 재빨랐으나 

 펄쩍 뛰어오른 백 킬로그램의 파이프에 짓이겨 스러진다 

 캐비아 샌드위치를 먹는 데 필요한 건 탁월한 지성과 날카로운 감각이 아니건만 

 인간의 약점 그것이 외려 거짓말과 거짓말을 낳으면서도 타인의 목은 사수하였다 

 활동하는 無, 로 충만한 단단한 파이프의 주인은 타인의 목과 사형대 위의 남자를 맞바꿔냈으나 꾸역꾸역 넣은 석탄에 화풀이를 하고(아내의 아침 식사는 식어갔음에 틀림없다) 

 비가 온다면 그저 ‘비가 온다’고 쓰는 것처럼 

 자기 안에 갇힌 체코인 역시 ‘망했군!’이면 족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