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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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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자아의 끄트머리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철학적 사유. 자못 타자와 자아는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 전반은 우리의 삶과 고밀도로 밀착되어 있다. 사랑, 돈,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포함한 '철학적 시 읽기'. 언급했듯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관통하는 것은 타자와 자아다. 이 거대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타자의 삶을 사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로 하여금 타자의 제스처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 수록된 시들의 그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각성을 하게끔 만들고 있다. (저자가 역설하고 있는)시와 철학은, 묘한 접점을 그리며 평행선을 유지한다. 비슷한 맥락이 전혀 없는 듯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온다. 그러면 일순 거기에서 '철학적 시 읽기'가 진행된다.  

우울氏의 一日 10 

함민복 

 

 

우울씨는 힘껏 밀고 들어가도 

힘없이 흘러내려 귀두를 덮는 포경 

국부를 가리고 사우나탕에 들어선다 

일 센티도 안되는 천 속에서 

음흉하던 성기들이 덜렁거리며 

수증기 속을 오간다 

우울씨는 우선 샤워를 한다 

표피에 덮여 있던 귀두 부분이 붉게 상기된다 

우울씨는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린다 

한증탕에 들어가 모래시계도 한번 뒤집어본다 

우울씨는 깔판을 깔고 앉아 거울을 대한다 

김 서린 거울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거울 속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다 

여러 풍경을 못 하나로 들고 있는 거울 

우울씨는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육감 중 오감이 살해되는 

시각만의 세계 

몸이 가볍게 떠오른다 

물의 영혼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끓는 물 속에서 뒤척이는 몸뚱어리들 

우울씨는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지옥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김 서린 거울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찬물을 거울에 쫘악 뿌린다 

빨리 때를 밀고 사우나탕을 빠져나가야겠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이태리타월에 힘을 주는 우울씨

타자와 자아는 만남과 교류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로 인해 개인의 영민함과 제스처는 집단의 그것으로 대체되고 만다. 인간관계의 거미줄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무너지고 말고 그러면 나는 또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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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0분 나를 멈추는 시간 - 인생을 바꾸는 생활혁명 마음챙김 명상
샤론 샐즈버그 지음, 장여경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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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명상, 명상……. 정말이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 하나를 읽고는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20분 동안 나를 멈춘다는 건, 어찌 보면 그 시간 만큼은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 텔레비전에도 <성질 급한 한국사람>이라는 카피를 내세운 CF가 등장했는데 그게 어디 그저 요즘의 일이었던가.
 


미켈란젤로는 코끼리를 어떻게 조각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큰 돌덩이를 가져와 코끼리가 아닌 부분을 모두 제거할 것입니다.」

ㅡ 본문 p.66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유행일 때가 있었다. 거기서는 <느림의 철학>을 화두로 던지면서 <느림>이란 것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라고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과거 『느림의 철학』을 읽으면서 꽤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만 그 텍스트를 음미하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ㅡ 그 가볍지만 무거운 의미를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면서. 『하루 20분...』은 순서대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읽어나가면 된다. 아니, 아주 조금의 시간을 내어 짤막하게 읽고서 책을 덮는다, 그리고 실제로 한다, <읽기>와 <하기> 중 후자에 나를 던진다……. 「필요한 것이라곤 한 잔의 차와 조명 그리고 음악뿐. 내가 반복해서 외우는 주문은 <집중>과 <단순함>이다.」라는, 이제는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의 말을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명상>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까닭은, 거기에 엄청난 시간과 인내를 투자해야 할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건 투자가 아니다. <나를 쉬게 하는 것>이며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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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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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애초 한 번 읽어서는 텍스트의 혼란스러움에서 허우적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세상에는 슬쩍 한 번 눈길을 줬는데도 무궁무진한 흥미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을 수 없는 책과, 쥐며느리가 곱송그린 몸을 펴듯 느릿하게 읽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눈을 대고 싶은 책이 있는데 『하자르 사전』은 양쪽에 끼인 샌드위치의 꼴로 보인다. 각설하고, 하자르 민족을 이주시킨 것은 동쪽의 수컷 바람이라 해도 그들(의 역사)을 촘촘히 활자로 엮은 것은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사실 <하자르의 얼굴>처럼 이쪽의 텍스트가 저쪽의 텍스트로 변모하는 양상을 곳곳에서 ― 자의든 타의든 ― 엿보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 『하자르 사전』을 읽은 날 밤이 유난히 얇아서 화요일에 서 있는 사람과 수요일에 서 있는 사람이 서로 악수를 할 수 있을 정도(p.66)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아는 어느 노랫말에는 <당신의 하루는 당신이란 배우가 주연으로 연기하는 무대이고 오늘은 어떤 배우가 조연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며 또 지구, 우주, 어디까지가 그 무대의 끝인지도 모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게다가 책의 옐로 북에는 아테 공주가 꿈 사냥꾼들의 수석 사제에게 바쳤다는 시 하나가 등장한다.


깊은 밤, 잠이 들면
우리는 모두 배우로 변합니다.
우리는 매번 다른 무대에 올라서서
자신의 배역을 공연합니다.
그렇다면 낮에는?
낮에 깨어 있을 때에는 그 배역을 연습합니다.
때때로 자신의 배역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을 때에는
감히 무대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다른 배우들 뒤에 숨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보다 대사도 더 잘 알고
동작도 더 훌륭한 배우들 뒤에.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기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찾아옵니다.
부디 내가 연습을 잘 한 날에
당신의 두 눈이 나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내내 현명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오로지 내가 당신에게 불어 넣고 당신에게서 가지고 오는 것에서 비롯될 뿐인가? 왜냐하면 진실을 열어 보면 언제나 우리가 그 안에 집어넣은 것만큼만 들어 있기 때문에?(p.244)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2인3각 혹은 3인4각을 하며 다리를 절고, 목을 삐끗하고, 결리는 어깨를 부여잡고서 책을 읽을 따름인 것? 인간은 자신의 어제와 내일을 너무나 뒤늦게 발견하기 때문이고 현재는 그 사이에 끼어서 숨을 거두는 중이라서…… 라고밖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이 희한하고 괴상한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간파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 책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두브로브니크에 살던 유대인인 사무엘 코헨이라는 자가 어느 전기에 달아놓은 주석에서 말했듯, <해석하지 않은 꿈은 읽지 않은 편지와 같긴> 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편지는 아직 꾸지 않은 꿈과 같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하자르 사전』에 잊힐만하면 출몰하는, 그래서 이름도 다 외울 수 없는 인물들은 원주상의 어떤 지점에서도 만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의 이야기는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의 기기묘묘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아직도 이 악마 같은 사전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성기에 입을 갖다 댈 수 있을 만큼 몸이 굽은 야곱 탐 다비드 벤 야히아(요하네스 다우브마누스)처럼 뇌 속의 회로가 굽어 있다 ― 물론 그는 <Verbum caro factum est(말이 곧 육신이 된다)>라는 구절을 읽고 죽음을 당했지만 이쪽은 아직 살아있다……. 분명 『하자르 사전』은 <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결정적으로 백색왜성이 초신성을 조우하게 하는 마력의 구절을 감추어 놓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수요일의 카페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아브람 브란코비치가 세상을 떠난 해와 이스탄불의 킹스턴 호텔에서 도로시아 슐츠 박사가 연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해는 293년이란 으스스한 간극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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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과 흥정의 기술 - 절대 손해 보지 않는 마력의 흥정 테크닉 50
스티븐 바비츠키 & 제임스 맨그래비티 Jr. 지음, 유지연 옮김 / 타임비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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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라는 단어를 조금은 가깝게 접하게 됐던 것은 과거 1998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네고시에이터(The Negotiator)》였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협상가가 등장하고,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는 <협상>과 <흥정>이라는 두 개의 명제가 공존하는 동시에, 서로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서 한 손에는 물과 한 손에는 불을 들고 서로 대립한다.

 

 

 

『협상과 흥정의 기술』의 원제는 <Never Lose Again>이다. 제목대로, 거시적이고 큰 범주의 주제가 아니라 저자의 글대로 하면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실전공략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게 또 흥미롭고 재미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란 속담과 꼭 맞을 정도니까. 고로 가슴팍에 단도 하나를 지니고서 상대방의 의표와 허점을 찔러 실제로 이기는 방법(never lose again)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여긴 정가제인가요?」나 「할인되나요?」라는 질문에는 Yes와 No밖에 나올 대답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얼마까지 해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에는 어떨까. 이 말에는 이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첫째, 나는 흥정을 할 겁니다, 기브앤테이크니까 당신이 따라줘야 이 거래를 시작할 겁니다, 라는 의사를 정확히 전달해준다. 둘째, 상대로 하여금 얼마간이라도 할인의 여지가 있다고 즉각 인정하게 만든다. 그럼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상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보자. 첫째, 대답을 피할 방법이 없네. 둘째, 못 깎아준다고 하면 안 살 텐데. 셋째, 사실 한 푼도 못 깎아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저 사람도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넷째, 안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하면 오히려 불신만 초래하는 셈이야. 다섯째, 제일 좋은 전략은 정직하게 대답하는 거야……. 그래서 이 『협상과 흥정의 기술』은 거시적인, 그러니까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 간의 협상이나 옷 한 벌을 살 때도 흥정을 하고, 또 회사원들이라면 연봉 협상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인생은 협상과 흥정의 연속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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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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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눈치 받는 임신한 여사원처럼 가슴에 주홍 글자를 안고 사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딤즈데일 목사와는 달리 놀라운 정신력을 유지한 헤스터의 마지막은 ‘그럼에도 살아간다’이다. 

 

어른이 되면 그런 게 저절로 가슴에 달라붙지 않을까? (펄의 대사, p.243) 

 

발칙하게만 보이는 펄의 이 한마디는 『주홍 글자』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의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처럼 아름답고 쓸쓸한 결말은 아닐지라도 ‘모든 인간의 주홍 글자’를 보여주기 위해 호손은 소설 속의 헤스터에게 분주하고, 강하며, 신비스러운 사명을 부여했다. 이러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사명은 다시 한 번 펄의 대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말장난처럼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주홍빛 A는 폭력적 사회를 대변하는 이미지에서 아서(Arthur) 딤즈데일의 A를 거쳐 아우라(Aura)의 A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로저의 역할이 보여주는 딤즈데일에의 가히 악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멸적 시선으로 인해, 그와 헤스터의 불륜에서 다소간 동정과 연민의 분위기가 연출된다는 점에서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조금은 억지스런 미화도 엿보인다. 로저가 영화 《밀양》의 신애(전도연)처럼 기막힌 일을 당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인가? 그의 시선으로는 헤스터와 딤즈데일의 작태가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나는 로저의 시선으로 해석되는 『주홍 글자』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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