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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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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말이지만 돌고 돌아 돈이라 했다. 또 책의 저자는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 이 말이 경제적인 진술이라기보다 도덕적 진술이라 했다. 부채란 뭐고 경제란 뭔가. 경제란, 인간들이 (물물)교환을 하려는 타고난 성향을 발휘하는 무대다. 그런데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매개체가 필요한데 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돈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물물교환은 빚으로 재해석되었다. 때로는 지루한 장광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빚이란 건 결국 돈의 시작을 뜻한다는 논리 아래 저자는 애덤 스미스조차 끌어내려 버린다. 그래서 ‘경제의 역사는 바로 부채의 역사’라는 명제가 제시되기에 이른다. 그럼 도대체 부채는 왜 발생하는가? 이 질문에 『부채 그 첫 5,000년』은 (미국식)주류경제학에 반기를 들며 그것이 얼마나 관념적이며 추상적인가를 여지없이 까발린다. 부분적으로 이것이 일관성 있는 논거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빈약한 맹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부채’라는 문제를 고급스럽게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은 칭찬할만하다. 저자의 말대로 상업이란 것이 ‘신뢰’로 시작되었다한들 오늘날 현대의 돈은 사실상 주로 정부 부채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바로 부채는 세계정치의 핵심적 이슈가 되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나 아이티를 보면 그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미국의 외채는 ― 오늘날의 현실은 조금 바뀌긴 했지만 ― 미국 재무부 채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채무국은 늘 있어왔다. 물론 당연히 부채와 함께 말이다. 과연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 자체는 ‘비열한 거래’인가? 채무는,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할 의무이다. 따라서 이때의 돈을 지급할 의무는 정확히 그 양과 부피가 정해지게 되고, 그러므로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으로 여겨질 가능성조차 존재한다. 결국 이 부채는 원금, 이자, 차감잔액(벌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하자)으로 환원된다. 3년 전쯤 전 세계의 경제를 마비시킨 금융위기가 있었고 진정한 문제의 알맹이는 드러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됐다 ― 여기서 우스운 것은, 세계를 대변하는 미국이란 나라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망 온 채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문득 IMF는 경고했다. 이런 식의 메커니즘이 지속된다면 다음에는 어떠한 구제금융도 불가능하다고. 정말이지, 이 책은 금은통화주의와 돈을 하나의 관념적 대상으로 하여 부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뿌리 뽑을 생각인 것 같다. 부채를 진 채무자는 채권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조종하거나 어떠한 처분을 내릴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줄 수도 있다. 이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연설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는 우리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고 식은땀이 등을 적시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용이란 무한히 창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이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금융자본주의의 기본적 구조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지 두려워할 뿐이다. 중세의 ‘시장 포퓰리즘’이란 개념은 모순투성이가 아니었던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애덤 스미스가 창조한 부채가 없는 시장 유토피아는 뛰어난 통찰력에 의해 탄생한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껏 목격한 것은 더없는 음흉한 정치적 속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고 본다. 저자는 부채를 ‘약속의 타락’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때문에 저자가 제기한 문제,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는 흥미로운 역사는 당연하게도 읽어봄직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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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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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생략)



어쩌면 추리소설로서는 꽝일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지지부진한 장광설이라 느끼게 할 만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렇게 따져들기 시작하면 이 책 전체가 장광설일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우부메의 여름』은 이 ‘장광설’이 매력일지도 모른다. 작품 전체를 단단히 감싸 쥐고 있는 건 역시 교고쿠도의 길고도 긴 입바른 소리로 시작되는 발화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 뒤표지의 간단한 카피문구만 보고 내용도 간단하다고 단정하는 건 피해야 할 일이다. 이야기의 외견은 어떨지 몰라도 그 플롯이나 내용인즉슨 시쳇말로 ‘구멍 숭숭 뚫린’ 작품이 아니므로. 전후 새로운 일본이 만들어지는 분위기도 다소 녹아있고, 등장인물들 간의 밸런스나 내용적 밀도의 밸런스, 일상적 세계가 파괴되는 폭발력 또한 기이하면서도 철저하다 ― 특히 내러티브의 농밀함은 흥미롭다 못해 두렵기까지 하다. 20개월 동안의 임신이라는 가히 기담과 괴담을 넘어선 흉물스러운 주제부터가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 읽어나가는 매순간마다 환상(이라 여겨졌던)의 파편들이 모이고 모여,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나의 현상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광경으로 재발견됨에 따라 이야기는 힘을 갖게 되고 또 그만큼 독자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는다.



의식과 무의식, 인간과 요괴라는 평행선처럼 보이는 하나의 선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트릭의 면모를 따라가다 보면 환상이라는 포르말린에 담긴 새카만 눈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필력과 기술적(記述的) 설득력으로 인해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러우면서도 몇몇의 단점은 순식간에 장점으로 온전히 변하고 마는 작품이다 ― 초자연현상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완벽한 밀실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2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임신을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것이 추리소설로서의 발로가 아니라 ‘요괴’와 ‘초자연현상’ 그리고 ‘현실’을 얘기하지 위해 추리라는 외투를 입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작가는 요괴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견 충분히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퍼즐, 심상치 않다(서두에 추리소설로서 꽝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을 한 이유다). 굉장히 어지럽고 불친절하다, ―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항설백물어』나 이『우부메의 여름』이후의 ‘교고쿠도 시리즈’를 봐도, 역시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건 ‘이 세상에 이상한 일 따위는 없다.’ 식으로 끝나버린다 ― 단순히 이렇게만 치부해버린다면 그저 읽는 재미만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글쎄, 이 ‘인식’에 대한 세계관이 환상과 초자연현상에만 의존한다면 분명 그럴밖에. 나로서 이 작품이 좋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러한 기괴함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칵테일파티 효과로 대변되는 인간의 의식이 환상을 뛰어넘는 소재와 맞물려 소름끼치는 이야기로 빚어지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의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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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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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줄거리는 쓰지 않았으니 책 소개란을 참조하면 될 것임) 글쎄, 문득 코난 도일보다 엘러리 퀸을 좋아한다는 말에 눈을 흘기는 장면이 떠오른다(만화『명탐정 코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쩌랴. 나도 엘러리 퀸을 더 좋아하는 것을 ― 조르주 심농과 함께. 19세기 말 셜록 홈스라는 인물의 탄생이 가져온 미스터리의 전성기를 보면, 또 포(Edgar Allan Poe)나 S. S. 밴 다인의 생산물들을 보면, 어쩌면 엘러리 퀸도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데뷔작『로마 모자 미스터리(The Roman hat Mystery)』만 보더라도 처녀작치고는 그런대로 잘 정제되어 쓰인 작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라는 두 사촌형제가 만들어낸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이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이거니와 그들 작품의 작가명으로 동시에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이면서 꽤나 날렵한 뉘앙스를 풍겨낸다. 사실 데뷔작인 이 작품에는 엘러리 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의 아버지 리처드 퀸 경감이 주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결정적 단서 혹은 수사적인 측면에서의 방향성 제시는 그의 아들이자 주인공(게다가 작가와 이름이 같은)인 엘러리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것은 엘러리 퀸 작품들을 꿰뚫는, 연역적이며 가차 없이 논리적인 추리의 면모를 보여준다 ― 그리하여 이『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그야말로 이성과 논리에 천착하고야마는 집요한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다.



“다시 시작하게. 그리고 이 말을 가슴에 새기게. ‘옳은 것을 알기 전에 먼저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  『파리 경찰청장의 회고록』오귀스트 브리용


― 본문 p.145



일단 요는 간단하다. 로마 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의 2막이 끝나기 전, 자신의 자리에서 독살된 채 발견된 시체. 그리고 (어쩌면)거대한 밀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극장에서 사라진 피해자의 실크 모자. 이 모자 하나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게다가 등장인물의 수만 해도 30명이 넘는다!)……. 이렇게 한 두 문장으로 압축해놓으니 상당히 간단한 말이긴 하지만 그 과정은 지극히 논리에 의한, 논리를 위한 수사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 최근 유행처럼 쏟아지는 일본식 사회파 추리소설과는 뒷맛이 다르다. 그래서 작품을 읽는 독자 역시 꼼꼼히 공을 들여야 한다. 자칫 몇 문장을 흘려 읽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읽어왔던 부분은 순식간에 공중 분해되고 피해자의 사라진 실크 모자 또한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체가 등장하고, 몇몇의 용의자가 지목되고, 신문을 하고, 새로운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나고, 난항을 겪고, 범인을 체포하고, 그간의 추리과정을 설명한다 ― 얼마나 기승전결이 뚜렷한 기술(記述)인가……. 나는 위에서 데뷔작치고는 잘 써진 작품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처녀작들이 그렇듯 안정적인 면이 다소 부족할지라도 그 연역적 논리성,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도 모든 것에는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는 명제를 착실하게 진행시켜 독자들에게 미스터리 작품이 지니는 헤게모니를 제대로 흔들어대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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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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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생략)

코난 도일의『주홍색 연구』와는 사뭇 다르다. 이 ‘사뭇’이란 부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표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작품을 관통하는 것이 주홍이란 색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아스카베 가쓰노리의「‘내용이 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색이 내용을’ 양성한다.」는 말이 꼭 그와 같다. 일단 개인적인 아쉬움부터 짚어보자면, 등장인물인 작가 아리스가와가 설정한 X, Y의 범행상 신뢰도와 확신보다는 다소 우연적 요소가 개입된 살인, 유령 맨션에서의 독자를 유린하는 듯한 트릭, 아케미로부터 히무라로 넘어가는 2년 전 사건의 유입 과정 등인데, 이야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유령 맨션에서의 현란한 필치와 몰입도로 인해 앞서 언급한 것들은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전혀)인식되지 않는다. 외려 홈스와 왓슨의 구도와 함께 스미는 붉은 노을 그리고 작가 아리스가와의 1인칭 서술이 어색하지 않게 다가옴으로써 제목과 같이 주홍색으로 점철된 따가운 네온사인처럼 발산되는 붉은 기운이 정체모를 폭발의 결과로 드러난다. 본격이라고는 하지만 그 방법론과는 별개로 상당 부분 새로운 문학적 시도 또한 엿보인다. 하지만 이것들이 맞물려 위에서 말한 ‘아쉬운 점’이 양상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처음부터 망가진 이야기는 깰 수가 없다.’ ―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후나비키 경감의 대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단 유령 맨션에서의 트릭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했으나 애초 두 콤비와 독자가 놓치고 있던 부분, 전체 사건의 인과관계가 ‘망가져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던 모호함, 주홍빛 트라우마에 감춰진 세 번의 살인사건의 연결 고리를 한데 엮어 설명해주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리와 비논리가 그 일련의 논거제시 과정과 끝에 가서 자연스레 합치되는 기묘한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단아한 구성에 익숙한 인물들의 성격패턴이 작용하고 있지만, 시종일관 지속되는 비주얼적인 측면과 (오히려)적은 활동배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작품의 밑바탕을 지탱해 만족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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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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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그의 작품은『투쟁 영역의 확장』에 이어 두 번째인데 ─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소립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 그가 자신을 두고 절망의 전도사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책도 두 번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이야기 속의 다니엘이『신적인 환경』을 우연히 주워 읽고 절규를 토하고서 자전거 공기 주입 펌프를 던져 부숴 버린 것처럼 나도 이 빌어먹을 똥통 같은 텍스트의 지침을 들어가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어떤 하나의 가능성, 다니엘과 다니엘25의 가능성, 신경질적이고 쾌활한 개(폭스)의 가능성, <기존인류>의 증언이 일치할 가능성, (고작)그런 것들 때문에 아주 뻔뻔스럽고 밑도 끝도 없는 이 책을 모조리 읽어냈다. 기본적으로『어느 섬의 가능성』은 몇 개의 시퀀스로 무척이나 불편한 에너지들을 만들고 배설한다. 물론 헛되이 생각을 주물러 대거나 폭력으로 기쁨을 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소설 속 예언자가 삶은 근본적으로 보존 옵션이라고 한 걸 보면 나로서는 앞서 말한 이 작품의 특징이 이야기의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이를테면 영화《나쁜 남자》를 보라. 거기엔 인간의 얼굴을 한 고깃덩어리들이 등장한다. 거기서는 검은 옷을 입은 놈이 흰 옷을 입은 년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려 한다. 여기에는 계급의 논리, 밝음과 어둠의 논리, 착취와 피착취의 논리가 있다. 조금 곱상하게 말하자면 <나란히 서기>의 발로다. 타자와 다름이 없는 나란히 서기. 하나 생각해둘 것은 이것을 이 소설과 <나란히 놓고는> 볼 수 없다는 거다. 왜 굳이 접점이 없는 소설과 영화를 함께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의 한기란 인물은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데 소설의 다니엘은 사랑하지 않고도 섹스하기 때문이다. 내가『어느 섬의 가능성』을 앞의 영화의 <+알파>의 개념으로 보는 것도 그 이유다. 이 책의 앞날개에는 <삶의 고통에 눈감고 살아가려 하는 주인공이 치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을 통해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세계의 폐단이 바로 그것이며 현대인의 고통의 근원 또한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책에서 ─ 앞서 영화 이야기를 했으니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하면 ─ <인간은 결코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단 하나 가능한 그의 운명은 주변에 불행을 퍼뜨려 다른 이들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p.68)는 말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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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부분의 감상문을 적을 때 줄거리를 언급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도 제 글을 보시고 이 책을 읽고 싶으셔서 기본 줄기가 궁금하시다면 출판사 홈페이지나 온라인서점의 책 소개란을 보시면 될 겁니다. 결국 이것은 서평이 아니라 그저 제 감상일 뿐이고 그 감상이 좀 <있어 보이도록> 가장한 두서없고 맥락 없이 쓴 것이며 대체 무슨 수작으로 이따위 글을 썼냐고 물으실 것 같은 자격지심 때문에 이렇게 부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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