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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무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최초로 다니자키의 작품을 접한 것은 대학을 다닐 때였다. 주제에 일문학을 전공했던 터라 이것저것 주워서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나름대로 접한 것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의 단편 「문신」을 처음 원서로 읽었을 땐 단박에 '무언가에 홀린 자'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용은 별것 없다. 그것은 미녀의 몸에 문신을 새겨 넣는 것을 꿈꾸는 문신사의 이야기였고, 분량도 매우 짧아 순식간에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외려 문신을 해 받는 입장보다는 바늘을 쥐고 있는 문신 도안가들이야말로 그 순간 일종의 황홀경에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작품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 거죽에 마음껏 손을 노리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환상적인 직업군에 속하는 전능한 실력자라고 말이다. 보라, 저 유명한 곰브리치가 쓴 유익한 미술책의 서론도 이런 두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미술가들이 공공의 미(美)라는 틀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니자키가 공공의 미나 선(善)을 지향했을지 어땠을지는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엄중히 선발된 도안을 대동하고 나타나는 실무자, 유희의 통솔인, 수요자에게 은밀함을 꾸며주는 판타지의 생활인이라는 측면에서라면 그 역시 문신사 세이키치(「문신」에 등장한다)와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다. 평생 여자에 심취해 '우러러볼 만한 존재가 아니면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했던 다니자키 작품의 일관성은 세간에서 악마나 탐미 등의 단어를 붙여 부르기는 하나, 그럼에도(무엇보다)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재미가 있다. 때로는 통속적이라는 둥 저속하다는 둥 다니자키(와 그의 작품들)를 낮추어 보려는 자들도 있긴 한데, 엄밀히 말하자면 '재미'라는 단어조차도 종종 그것을 비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기도 하니 어찌 보면 다니자키는 그저 그렇게 살 팔자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인간의 본질이 어쩌고저쩌고, 내면세계가 이러쿵저러쿵, 사람 하나를 잡아가지곤 신랄하게 까뒤집으면서, 이를테면 조무래기 사기꾼들이 등장하고 쓰레기 같은 자들이 나와서 더러운 짓을 하는데, 아니면 비쩍 마른 주인공이 날이면 날마다 삶이 이렇고 인생이 저렇고 떠들어대는 소설, 이런 소설들만을 자랑스러워하며 떠벌릴 계제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물과 사건에 귀천과 경중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다소 편애의 감정을 실어 말하자면) 에로티시즘과 같은 특정 방식을 통해 다니자키와 다른 작가들을 구분 짓는 것에는 도통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ㅡ 그의 사생활을 찬양하고 싶지는 않으나 작품 일반에 관해서만큼은 그런 생각이다. 여자라는 존재에 미쳐 자신의 눈을 찌르고, 발가락을 물고 빨고, 제 아내를 타인에게 내주는 이야기(실제 작가 본인도 그랬다)는 무분별한 환상이 아닐는지도 모르며, 작품 이력 전체를 통틀어 하나의 주제만을 좇아 악마가 될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지금 문득 손에 잡히지 않는 세상과 죽음이라는 것에 눈을 돌렸던 다자이 오사무가 떠오르는데, 최근 그의 국내 번역 전집이 완간된 참이다, 하여 이 미친 듯한 자의 미칠 듯한 작품들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