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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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을 읽기 시작한지 몇달째!

  처음에는 읽을 수 있겠나 싶었는데 그래도 짬짬이 읽다보니 진도가 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올해가 가기 전에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읽겠다는 생각은 이루어질 수 없겠지만, 그래도 도서목록 엑셀 파일에서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는 쏠쏠하다. 


  중학생 때 산문으로 풀어 놓은 파우스트를 읽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무모했다. 아마도 파우스트, 괴테라는 이름에 혹 해서 있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용이 거의 생각이 안나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에도 간신히 읽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금 읽어도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보다는 조금 더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정도가 근 30년의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일 것이다.


  내용의 구성에 대해서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잘 나와 있으니, 책을 읽었느나 틀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사람은 참고하면 될 것이다. 혹 이 리뷰를 읽고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1권은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이라는 여성과 벌이는 사랑과 비극을 주된 내용으로 다룬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통속적인 로맨스 소설로 읽어도 크게 무리는 없다. 2권은 헬레네와의 관계를 다룬 내용으로, 기본적으로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로맨스도 아니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 그리고 유럽 신화, 성경 등 많은 곳에서 인물을 따왔기 때문에 간혹 이 사람이 누구인가 헷갈릴 수도 있다. 게다가 독일식 발음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더 헷갈린다. 예를 들자면 사이렌(Siren)을 지레느라고 하는 식이다. 1부에 비하여 2부는 조금 더 난해하고 복잡하지만, 구성 자체는 1부가 더 탄탄한 것 같다. 책의 구성에 대해서 대략 이 정도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기본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배경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2부는 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평생 지식을 추구하던 파우스트!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가 든다.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을 맺고 세상으로 나아간 그는 여러가지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사랑, 권력, 명예, 부 등등 그의 쾌락에 대한 욕구는 점점 심해진다.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을 잊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지는 것처럼, 그레트헨에서 시작한 그의 쾌락추구는 급기야는 헬레네까지 이어진다. 현실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젊은이에서 영주로. 그의 영혼을 얻기 위하여 그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메피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태도도 점점 당연한 것이 되고, 보다 강압적인 것이 되어간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철저하게 세속적인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만, 그러한 방황의 시기를 거친 후에 그는 결국 구원을 받는다. 만약 방황이 없었다면, 파우스트는 밋밋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영혼을 가로채기 위하여 오랜 시간 조력해온 메피스토텔레스는 이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가 공들였던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파우스트의 모습은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람들은 흔히 평탄하가 못해 밋밋한 삶을 살기 원한다. 굴곡이 없이 편안한 삶을 살기 원한다. 자신이 그렇게 못살았으면 자기 자식이라고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권력의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리를 저지르는 것도 이런 이유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녀마저도 망치는 길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곽모 의원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자기 아들이 퇴직금과 기타 항목으로 50억을 수령하는 자리를 만들었겠는가? 장모 의원이 거듭되는 음주 운전으로 물의를 빚은 아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조모 전 장관의 가족이 그렇게 언론에 노출되고 재판에 회부되었겠는가?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시키라는 말은 귀한 자식일수록 방황하고 부딪히는 기회를 주라는 말이리라. 참견하지 말고 곁에서 믿고 지켜봐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파우스트는 자녀 교육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주는 육아교육책(?)으로 볼 수도 있겠다. 


  구원이라는 종교적인 말 때문에 반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구원을 성장이나, 성숙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니 너무 괘념치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시대의 정신이라고 해도 쾨테도 결국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았던 사람이니 싫든 좋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독교 용어와 가치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존재임은 분명하다. 연구실을 벗어난 파우스트가 좌충우돌했던 것처럼 괴테도 현실의 삶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 갔음을 기억하시라. 


  난해한 책을 덥으면서 마지막으로 유쾌하게 웃었다. 파우스트의 영혼을 드디어 갖게 되었다고 신나하던 메피스토텔레스가 닭 쫓다가 지붕 쳐다보는 개가 된 장면 때문이다. 난 왜 이 장면을 보면서 영화 콘스탄틴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이 파우스트의 이 마지막 장면을 차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콘스탄틴의 법규를 보면서 열받아 그의 암을 치료하고 다시 살리는 루시퍼의 모습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도둑맞았다고 화를 내던 메피스토텔레스의 모습에 대한 재해석일 것이다. 이래저래 난해하게 시작한 파우스트를 유쾌하게 마무리하게 해준 영화 콘스탄틴을 시간 내서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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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처형(감은사/마르틴 헹엘)
˝그리스도˝=>˝그리스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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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처형(감은사/마르틴 헹엘)
불가피=>불가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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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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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가 시작하면서 페스트를 읽었다. 이어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책도,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모르고 그저 제목에 끌려서 시작을 했다. 아마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유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려온 남자. 이렇게 긴 세월을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게다가 51년 9개월 4일이라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군 입대한 사람들이 제대 날짜를 바라는 정도의 간절함이 없다면 셀 수 없는 시간들이다. 아니다. 그 정도의 간절함을 가지고도 51년 9개월 4일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들을 셀 수는 없으니, 이 정도면 사랑이라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다. 젊은 시절의 뜨거운 열정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셈에 밝아질 무렵에는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문제는 여자는 식었지만, 남자는 식지 않았다는 것이다. 셈법에 눈을 뜬 여인은 열정보다는 안정을 택했고, 열정을 버리지 못한 남자는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해서 안정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한 동네에 살면서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남자의 모습이나, 뻔히 알면서도 애써 무시했던 여인의 모습이나 정상적이지는 않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여인이 택한 남자는 죽었고, 기다리던 남자는 때를 얻었다. 지난 세월동안 이루어 놓은 것을 가지고, 여인 앞에 나타난 남자를 보면서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남자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만났던, 그러나 조금도 정을 주지 않았던 여자들은 그 남자를 바라보면서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작가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해온 결혼 생활은 작가에게 어떤 모습일까?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낸 그 오랜 세월보다 그 울타리를 벗어난 이후에 일어나는 노년의 짧은 사랑이 작가에게는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바라보는 자녀들의 상반된 모습은 또 무엇일까? 작가는 자기의 생각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담담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그 이야기를 풀어갈 따름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콜레라가 창궐하던 콜로비아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제목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고 붙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51년 9개월 4일이라는 그 긴 시간이 오히려 콜레라와 같은 시대라고 느껴진다. 발열과 통증이라는 콜레라의 증세처럼, 남자가 사랑의 열정과 시련의 아픔, 기다림의 통증으로 지내온 그 긴 시간이 콜레라의 시간이기에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고 제목을 정한 것은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문득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와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가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지독한 사랑, 기나긴 인고, 그리고 누군가를 죽기를 기다리는 비인간적인 바람 등을 보면서 참 지독하다라는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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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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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학 전집을 읽기 시작했다. 1권부터 쭉 읽어가다가 재미없는 방법인 것 같아서 방향을 바꿨다. 전집에 포함되어 있는 작가별로 읽어가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면서, 첫번째 작가로 조지 오웰을 택했다. 동물농장, 1984, 그리고 카탈로니아 찬가! 이렇게 읽어보니 작가가 했던 "내 글은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훨씬 분명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렇게 읽으면 어느 책을 읽었는지 나중에는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민음사에서 목록을 뽑아 놓았다. 엑셀파일로 제공해 주는데 읽고서 하나씩 지워서 시트 전체를 빈칸으로 만드는 그 날을 꿈꿔본다.


  스페인하면 축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스페인 축구하면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로셀로나의 라이벌 구도가 곧바로 이어진다. 두 클럽이 모두 축구를 잘하는 클럽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상위권에 있는 클럽들을 택하자면 몇 개를 더 뽑을 수 있지만 두 클럽의 경기는 그 어느 팀들의 경기보다 더 치열하고, 열정적이다. 호나우지뉴, 메시, 수아레스, 네이마르, 지단, 호날두, 벤제마 등등 두 팀의 스타플레어어들의 명단은 화려하다 못해 거짓말 같다. 그런 선수들이 뛰나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두 팀의 경기가 치열한 결정적인 이유는 역사와 지역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과거 한국 야구의 해태와 롯데의 경기와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스페인 내전은 유럽의 모든 사상들이 격돌하던 전장이었다. 파시즘, 아나키즘, 공산주의, 민주주의 등 모든 사상들이 격돌했던 장소였으며, 파시즘에 맞서기 위하여 공존할 수 없는 아나키즘, 공산주의, 민주주의가 손을 잡았던 묘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코에 맞서기 위하여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으며, 그 역사는 꽤 오랜 세월 동안 이어졌다. 1973년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요한 크루이프가 밝힌 "프랑코 정권의 지원을 받는 클럽에서 뛰고 십지 않다"는 입단 소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인 프랑코 정권과 싸워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머지않아 이들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리고 만다.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 무기들, 실패한 작전과 이로 인한 희생, 그리고 이들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 이들은 머지않아 크로츠키 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전선에서 배제되고 체포되고, 심지어는 처형되기까지 한다. 어떤 이들은 자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길이었고, 조지 오웰도 여러번의 위기 끝에 영국으로 돌아갔고, 고향에 돌아가서야 비로소 평안을 느끼며 책이 마무리 된다.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에 대한 오웰의 묘사는 이렇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p88~89)


  안전한 곳에서, 평가하고, 비난하고, 헐뜯는 이들은 아마도 나중에 다들 더 안전한 자리에서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오웰이 대신하여 싸웠던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도 있다는 점은,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권력자가 된다는 점은 이 책에 붙은 "찬가"라는 제목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무엇을 위한 찬가인가? 찬가란 말보다 비가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순수한, 그래서 더 어리석은 아마추어 혁명가와 혁명정신, 이들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 무자비한 파시스트, 전선의 뒤에서, 안전한 곳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협상하고, 심지어는 담합하는 정치인들. 과연 이들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을까? 내용이야 어쨌든 결과는 혁명 정신에 대한 배반인데 무엇을 찬양할 것인가? 오웰이 고향에 돌아와 느꼈던 편안함이 그래서 더 씁쓸한지도 모르겠다.


  몇년 전부터 정치권에서, 언론에서 촛불 혁명에 대한 배반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가장 최근에는 이재용 가석방을 두고 촛불 혁명에 대한 배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촛불 정신에 대한 배신 운운하는 사람, 공격하는 사람 가운데 조중동 같은 메이저 신문사와 국민의 힘, 또는 국민의 당 의원들이 있다. 2019년 9우러 윤상현 의원이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했던 질의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오웰이 느꼈던 답답함이 이런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순수하지만 어리석은 모습으로 정권을 바꾸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했다. 진보 언론들도 이젠 됐다라고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 그러나 정말 됐는가? 자화자찬하고 손 놓는 동안 5년이 흘러간다. 그리고 다시 대선이 다가왔다. 바뀐 것이 없는 현 세태를 바라보면서 국민들은 벌써 피곤해진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도, 국민의 힘 대선후보 경선도 안봤으면 좋겠다. 봐야 뭐하나. 똑같은데. 국민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언론들은 또 떠들어 대시 시작한다. 안전한 뒤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과거 모 인사의 "국민 개돼지 발언"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입장에서 국민들을 계몽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직접 전선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슨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존경받는 날이 오기는 할 것인가? 카탈로니아 찬가가 더 씁쓸하게 읽히는 2021년의 한국 상황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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