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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관한 일이었다. 졸다가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보고 너무 좋은 나머지 예수님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세 채 짓고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쭉 살지요." 바로 그 말을 하는 순간 산 밑에서는 한 사람이 간질걸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삶에 찌들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데리고 왔고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절망하고 있었다.(눅 9:28~42)
이 책을 아는 목사님 홈피에서 보았다. 그분이 이 책을 읽고 기록한 독후감이 기억에 남아서 허락받지 않고 무단으로 일부 옮겨 본다.
"책의 타이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중에...특별히 자는 한자로 者로 표기 되었다...뜻이야... 사람 자 이지만... 4획은 붉은 색으로 대각으로 틀려먹었다는 듯이 그려져 있고... 나는 사람자가 아니라 어려서 배운데로 "놈 자"자로 읽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결국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라고 읽어지는 나도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끊임없이 이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 주인공인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무례한 녀석들만이 남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파티를 고발하는 책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선교된지 공식적으로 120년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내용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기독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위상을 차지하게 된 예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성장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인간적인, 문화적인 노력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적인, 시대적인 조건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인 욕망들을, 그리고 이로 인해 변질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2007년은 참 시끄러운 해였다. "어게인 1907"을 외치던 해였다. 평양 부흥 운동의 역사가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왠지 나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단발성의 이벤트일뿐이었다. 여러 교파 중에서 장료교측이, KNCC와의 관계에서 한기총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인 이벤트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었다. 단지 이것을 위해 이용당하는 평신도와 일선 목회자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감리교 교단본부에선 "어게인 1907"을 바라보며 "거봐라. 이렇게 큰 거 터뜨릴 거에 대비해서 우린 4년 전에 어게인 1903을 했어야 했다."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평양 대부흥의 촉발이 된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산 대부흥을 너무 쉽게 지나갔다는, 그래서 장로교에게 한방 먹었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안타까움이다. 뒤늦게 감리교에선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장로교와의 기다툼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이 감리교와 장로교의 기세싸움에 이용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왜 기세 싸움이 중요한가? 바로 대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선 교회가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가. 누구나 여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누가 그 주도권을 쥐느냐는 것이다. 주도권을 쥐는 쪽이 막대한 이득을 누리기 때문이다. 권력과의 밀착을 통하여 얻게될 이득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기득권을 빼앗겨 본 경험은 이들로 하여금 더 정권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온갖 비리와 범법 행위에 연루된 이명박 대통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면죄부를 쥐어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진홍 목사의 쪼다 발언일 것이다. "한국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서 한 두가지 범법 행위하지 않았다면 쪼다야. 일을 안했다는 말이지."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창피해지는 발언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온갖 특혜를 누리며,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며 많은 성도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는 너무나 달콤하기에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제한당했기에(내려 놓은 것도 아니고 제한 당한 것이다.) 더 복수의 칼을 갈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휘날리는 이상한 집회, 한국 사람 앞에 모아놓고 마치 백악관에 들리라는 듯이 영어로 기도하는 이상한 목사, 자국 대통령을 시종일관 빨갱이로 매도하는 꼴통 보수들 이 모든 사람들이 결집하여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이 마음 아플 따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은 곧 교회의 실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을 왜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우러러 본단 말인가? 왜 내려가지 못하고 이곳이 좋사오니 하고 주저 앉아 있단 말인가? 한심할 따름이다.
이곳이 좋사오니 외치는 그 순간에 분명 산 밑에서는 절망의 나락을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한 영혼이 있었다. 마귀에게 잡혀서 불위에 쓰러지고, 물 가운데 몸을 던지는 불상한 어린 영혼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가 좋사오니 눌러앉자 말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사회적인 약자들, 유의미한 소수들을 무시한채 권력에 빌붙어서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는 정치 목사들, 무례한 자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양쪽 모두 예수님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뿐아닌가? 반공이 복음으로 변한 이상한 기독교, 유의미한 소수보다는 권력을 차지한 소수를 더 귀하게 평가해주는 특권주의,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 오만함, 하나님을 믿기 대문에 세상의 법은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오늘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원흉들이 아닌가? 목사를 먹사로 만들고, 끊임없이 예수님 얼굴에 먹칠하고 있는 원흉들이 아닌가? 장로 대통령? 이미 두번의 실패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소리에 귀막은 이명박 정부나 예수님의 소리에 귀막은 정치교회나 똑같이 무례한 者들이다.
한국 기독교회가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낮아졌으면 좋겠다. 섬기는 모습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 설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설교하면서 세습하는 교회, 하나님만 의지하라 말하면서 세상 권력에 밀착하는 교회, 정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불의를 행하는 교회, "교회는 국가에 순종하라, 성경에 나와있지 않느냐?"라는 오만한 종필이 아저씨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교회, 유신은 하나님의 역사라 말하는 교회.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가 유지된다면 그 교회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실 것이다. 예수님을 다시 교회의 머리로 삼고 그 말씀만 따라가면서 타협하지 않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내 딸은 개독교라는 소리를 안듣고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존경을 받고 신뢰를 받았으면 좋겠다.
PS. 말이 너무 어렵다. 쓸뎁없이 어렵게 쓰는 부분이 많다. 목회자라면 모르겠지만 평신도가 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민중 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책이 어느 순간 어려워졌다. 민중 신학이 아니라 민중 신학의 이름을 빌린 엘리트 신학이다 생각이 들게 되었다. 말이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은 쉬운데 왜 말을 어렵게 썼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