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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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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8일 노무현 대통령 자이툰 부대를 방문하다.

  매번 책을 읽고 서평을 쓸때마다 사진을 하나씩 찾아본다. 각 책의 내용을 단 하나의 컷으로 표시할 수 있는 사진을 찾아본다. 이 사진을 찾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순간 보았던 기사를 떠올리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신문 기사를 뒤지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간신히 하나식 찾아내곤 한다. 이 책을 읽고 사진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어려움의 성격은 지금까지와는 너무 다르다. 지금까지는 사진을 찾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었다면 이번에는 너무나 많은 사진 가운데 어느 것을 선별하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 속에는 제국주의를 닮아가려는 속성이 너무나 만연해 있다는 의미이다.

  내 조국인 대한 민국은 참 묘한 구석이 있는 나라이다. 미국 사람들도 믿지않는 미국 정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나라이다. 아무리 국민들이 불안에 떨어도 미국 정부가 보증한다면 믿어야 한다, 쇠고기가 그렇게 걱정인데 된장 고추장은 어떻게 먹냐는 말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이 이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 실세들이다. 사회 개혁을 이야기하면 빨갱이로 몰아 붙이고, 빨갱이는 백주 대낮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나라가 2008년의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복잡한 세계 전략과 군사 전략에 대한 이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미국은 6.25의 은인이라 말하는, 그러면서도 쓰러져가는 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명의 편에 섰다가 청나라에 침범당한 조상들의 무지몽매함을 한껏 비웃는 나라,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 민국이다. 너무나 미국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넘쳐난다. 이곳이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의 코리아주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뒤틀린 시각이 아닐 것이다.

  미국 닮기는 영화를 비롯한 문화와 패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을 비롯하여 경제, 군사 분야까지 온 분야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게 있어서 미국은 신의 나라요, 자유주의 국가요, 닮고 싶은 모델이다. 지금까지 정권들은 이것들을 조용하게 숨겨왔지만 이명박 정부는 백주 대낮에 거리낌 없이 한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오죽하면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토니블레어를 제치고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의 새로운 애완견이 되었다고 비꼬겠는가?

  왜 그렇게도 미국을 닮고 싶어 하고 미국 없으면 죽는 줄 아는가? 대한민국 지도층들이 촌놈이기 때문이다. 촌놈이 서울 오면 서울의 번잡함에 압도되어 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촌놈인 한국의 지도층들이 미국을 가까이에서 보고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 거대한 압도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최대한 미국을 닮아가는 것이다. 미국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한미 군사동맹 강화라는 측면에서 미국이 돌려 주겠다는 전시작전권도 돌려받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보수꼴통이 넘쳐나는 이유도 이것이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 미국과의 안보강화, FTA 타결을 위해서는 국민이 어찌 생각하든 쇠고기를 열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가막힌 생각을 대통령과 장관이 갖고 있는 것도 미국을 닮고 싶은 열망이 아니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미국에서 강력한 대선 후보인 오바마가 한미 FTA를 재협상하겠다고 외치는 마당에서도 부시 정권에서  FTA 인준이라는 장밋빛 꿈을 꾸는 정부를 바라보며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온다. 그것이 던져주는 영향력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에는 미국 아니면 죽는 줄 아는 촌놈들이 넘쳐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닮고 싶어한다. 미제국주의를 닮고 그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한류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문화침략, 국익이라는 명목하에 평화재건의 기치를 걸고 파병된 자이툰 부대, 그리고 한나라당의 딴지 걸기에 대한 반격으로 급작스럽게 행해진 노무현 대통령의 자이툰 부대 방문. 이 모든 과정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미 제국주의를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 나 다름이 없다. 제도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도 말이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이 사진을 바라보면서 감격적인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았었는가?

  촌놈들의 제국 주의는 무척 슬플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촌놈은 촌놈이다. 촌놈들만의 삶이 있다. 촌놈들의 삶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촌놈인 줄 모르고 미국을 닮고 싶어하는 갑제형님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는 그렇게 강성으로 밀어 붙이면서도 이상하게 미국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작아지는 사람들이 많은지...

  우리나라 지도층들이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국가는 미국보다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10권의 군사 대국 가운데 3개가 몰려 있는(북한을 제외하고) 동북아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가실 날이 없을 것이다. 미국 군산복함체들은 이러한 동북아의 위기를 적절히 조장하고 확대할 것이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이미 동북아는 제국주의의 발걸음을 내 딛기 시작했다. 중국 유학생들의 폭동, 일본의 독도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과 중국사이에서도 발생하는 문제가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로 내 몰수도 있다. 게다가 북한이라는 변수가 있으니 전쟁의 위기는 더 커질 것이다. 만일 북한이 남한의 새로운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 위험은 더 커질 것이다.

  촌놈은 촌놈으로 좋다. 욕심을 조금 버리고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정다운 촌놈이 좋다. 욕심부려 제국주의를 닮아간다면 그 길은 결국 북한의 내 동포들을 동포가 아니라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서울이 이미 지방에 해왔듯이. 향후 북한에 남한 사람들이 진출해 "지역경제를 위해 이렇게라도 땅 사주는 것을 고마워하라"는 이동관식의 발언을 거침없이 던질날이 오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제국주의 노선, 강경주의 노선, 민족주의 노선에 침몰하지 말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 무임 승차객들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ps. 뭐랄까? 책이 너무 성의가 없달까?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 생각에는 1만원 정도의 가격을 받는 것이 적절하게 생각될 정도의 편집인데 1만 2천원이다. 이 페이스로 가면 우석훈 시 책에 대해서 반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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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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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보면서 왜인지 도올 김용옥씨가 생각이 났다. 기독교에 대하여 독설을 내뱉으면서 자기의 독설을 무시하지 말라고, 생명력이 다한 기독교가 자기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던 그의 말이 생각이 났다. 매우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기독교에 대하여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 어디서 연유하는지 모르는 교만한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그의 요한복음 강의는 사실 일반 신학자들의 이야기, 아니 4년제 신학대를 제대로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했고 고민하고 있을 법한 이야기의 발꿈치에도 못미쳤기 때문이다. 화려한 언변과 자극적인 이야기들로 청중들의 시선을 잡아 끌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이야기하는 그 의기양양함은 불편하다 못해 가식적이라는 생각까지 불러 일으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만약 그의 강의가 "기독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제시하겠다."는 자신만만한 말에 책임질 수 있을만큼 훌륭한 내용이 있었다면 나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히친스의 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서양판 도올 김용옥씨를 보는 듯 하다. 이미 그의 책 "자비를 팔다."라는 책도 읽어 보았다. 그의 이야기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투적으로 기독교 까기에 몰입헤 있고, 마더 테레사 까기에 몰입해있다. 비판하기가 아닌 "까기"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내가 히친스와 잘 아는 사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내가 마더 테레사보다 더 정치와 종교를 겹합시킨 가증한 사람(히친스의 논리에 의하면)이라 가정하자. 그래도 히친스는 나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나는 마더 테레사만큼 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알리고 유명해지려는 속셈이 조금이라도 없을가? 아니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히친스를 옹호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고 "역시 종교는 나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생각을 단순히 히친스 까기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고 단 며칠만에 이 책을 독파한 나로서는 책을 덮으면서 많은 실망을 느꼈다. 도킨스의 책보다는 무척 읽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못하다. 단순무식하게 전투적일 뿐이다. 노란색 책 표지가 왠지 "이 책은 옐로우 페이퍼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비판하는 종교의 이야기들은 분명 역사적인 사실이다. 내 종교가 기독교라 그런지 다른 것들이야 잘 모르겠다만(물론 여기에 기록된 타 종교에 관한 것들은 알겠다. 타종교에 관하여 무지한 내가 이해했다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이야기가 상식 수준의 이야기를 크게 떠벌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가독교에 관하여 히친스가 짚었던 것들은 결코 독창적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왔던 것들이고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던 것들이고, 그 결론들이 깨어지고 새로운 답을 찾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친스의 책에 관하여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비판을 한다면 "종교는 원래 선한 것을 내놓을 수 없다."라는 원천 봉쇄의 오류를 히친스가 저지를 것이 분명하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관점을 가지고도 히친스의 말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논리가 부실하다는 이야기이다. 종교의 옐로우 페이퍼라 표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쯤되면 알 것이다.

  히친스가 성경의 논리를 쓰러드리기 위해, 기독교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수없이 많은 내용들은 특별할 것 없는 신학의 한 조류들이다. 이것에 대한 반박학설들도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히친스는 오직 자신의 논리에만 맞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자신의 논리를 보강하는데에 사용했을 따름이다. 이 책에 적힌 이야기들 가운데 70%는 내가 23살 이전에 학교에서 고민했고 이야기하고 설익은 결론을 내렸던 질문들이다. 물론 지금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완전하게 자리잡은 것은 아니다. 내 이성과 판단을 가지고 여전히 돌아보고 답을 모색하고 점검해 보는 과정중이다. 물론 평생 이 작업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마치 자신이 발견한 기독교의 잘못인양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올 선생의 거만한 말투가 떠올랐 반발감이 앞선다. 차라리 이 책보다는 도킨스의 책이 훨씬 진지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히친스는 분명 유대인이지 않을가 생각을 해봤다. 왠지 히친스의 생각을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프로이드의 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친스가 유대인이라면 그는 아버지 살해를 경험한 아들들이 겪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이 책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이라는 완전무결한 존재를 부정한다. 그를 부정해서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 완전 계몽된 존재, 완전무결한 이성적인 존재로 거듭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신을 공격한다. 전투적으로 공격한다. 그리고 그 신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 세운다. 이제 자신을 숭배하는 나르시즘적인 생각을 굳힌다. 자신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공범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왠지 이책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것이다.

  이 책을 읽고 무신론에 빠진 사람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차라리 도킨스의 책을 보라. 이 책을 읽고 무신론에 빠진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이 아닌 감정에 좌지우지된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가볍게 봐라. 책을 덮으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결론은 "히친스는 위대하지 않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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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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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우리 사회가 시끄럽다. 국익이라는 이름하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 되었기 때문이다. 외통부에서 외교적인 마인드로 일을 벌여 놓고 국민에게는 닥치고 처먹으라는 식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국민들이 손에 불을 들고 일어섰다. 촛불을 들고 일어선 민심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좌빨"이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가지고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 내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도무지 밝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배후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정치권만 외면한다. 이 정도면 꼴통도 여간 꼴통이 아니다. 게다가 보수 우익 단체들이 한 목소리 거든다. 거기에는 창피하게도 한기총이 들어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논리로 사람들을 밀어 붙인다. 도대체 어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빨갱이는 지옥에 가고 우파는 천국에 간다는 논리를 무엇인가? 반공이 복음이 되는 이상 야릇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은 전두환 독재 권력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가 억압된다는 것이 순응해야할 논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이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장 단순하지만 명확한 진리가 법보다 상위에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불의에 순응할 때 양심있는 이들이, 소로우 표현에 의하면 '한사람으로서의 다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6월 10일 민주 항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이하여 많은 시민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 위하여 모였다. 고시철폐를 외치고, 이명박 정권 퇴진을 외친다. 전국민으로부면 얼마 안되는 숫자이지만, 분명 이들 가운데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들은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이다. 아니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가 아니어도 좋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모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종식시키고 생존을 효율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제도가 국가라면, 나서서 생존을 위협하는 국가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유의미한 소수를 무시하고 다수의 논리로, 국익의 논리로 몰아 붙인다면 그것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진 국가라 하더라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떼어버리라. 이미 국민재권의 원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왕조 시절에도 왕들은 끊임없이 민심을 살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민심을 살피고 먹을 것을 보장해 주는 왕은 아무리 많은 실정을 한다고 할지라도 민초들에게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민심을 살피지 못하고 독선적으로 흐른다면 민심은 너무나 급격하게 식어버리고 그들의 지지를 거두어 버렸다. 온갖 도덕적인 흠에도 불구하고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으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냈던 민심이 이젠 그들의 지지를 거두어 가고 있다. 인터넷 워리어라 불리던 사람들 뿐 아니라, 열렬한 한나라당 지지층까지 그들의 지지를 거두어 가고 있다. 취임 100일만에 10%후반대의 지지율을 자랑하는 현 정권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그 천심이 촛불을 들었다. 광화문을 밝히는 정도이지만 천심이 막혀 버린다면 이들은 광화문을 밝히는 촛불로 청와대를 태우고, 여의도를 태울지도 모른다. 아무리 외교가 중요하고, 미국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현 정권은 미국의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권이다. 이들이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지 미국이 아니고 미국 축산업자가 아니다.

  촛불집회가 과격해 졌다. 애국가와 헌법1조가가 아침이슬로 바뀌었다. 고시철폐 구호가 정권퇴진 구호로 바뀌었다. 이젠 님을 향한 행진곡이 나올지도 모른다. 군대를 동원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 알아두라. 어떤 경우에도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을. 정부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가 억압된다면 국민들은 기거이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말릴지라도 양심이 살아 있는 단 한사람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억압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사람이 다수를 깨울 것이다. 부디 현 정권이 민심을 살피기를 바란다.

PS. 시민의 불복종만 읽어도 좋았을 것을. 뒤에 있는 에세이들은 시민의 불복종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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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 병원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
강주성 지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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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의대생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의대를 졸업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것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의 나라 사람이고 하도 오래전 사람이라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에 의하면 서양 의학의 사조로 존경받는 사람이라더라. 그의 의술에 대한 정의랄까 가치관이랄까 이것을 받아들여서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선서라고 한다. 지금 하는 선서는 원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제네바 협약을 통해 동의를 얻은 선언문을 가지고 선서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위의 사진에 나온 것이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에 엄숙하게 선언한다. "이제 의사로 살면서..."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보았다. 나는당최 남의 나라 사람이고 잘 모르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사라보다 허준이라는 분에게 관심이 더 간다. 고 이은성시의 소설 동의보감 중편 157페이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 아들에게 유의태가 질책하면서 던지는 말이다.

  "의원은 영달하는 길이 아니니라. 의원은 돈 버는 길이 아니니라. 영달을 꿈꾼다면 중국말 열심히 배워 역관이라도 될 것이요, 돈 버는 게 소원이거든 장사꾼으로 풀릴 일......의원은 병자를 보살피는 게 소임이다. 그것이 첫번째 소임이요 둘째도 셋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

  "흙 파먹을 때 흙 파먹더라도 봐줘야 할 병자는 봐줘야 해. 그게 의원이랄밖에......"

  왠지 히포크라테스라는 고상한 사람의 고상한 말보다는 이은성씨가 그리고 있는 유의태란 의원의 투박한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꾸밈이 없기 때문일까?

  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프레시안의 책이라 선택했다. 의약분업을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인다는 말을 듣고 선택했다. 강주성이란 사람을 알고 산 책이 아니다. 그만큼 의료 서비스라는 부분은 나와는 상관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의사들이 매우 거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닥터K, 노구찌, 테루"라는 만화를 보면서 이런 의사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가 겪은 현실은 암담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읽은 TTB리뷰에 보니 손가락 끝에 날카로운 칼을 달고 달을 보라하니 칼이 두려워 손가락만 본다는 표현을 하시던 분이 있더라. 의사이신 것 같더라. 그 분의 입장에서야 의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늘어놓으니 불만일 밖에. 그런데 실상 이 책에는 의사를 비판하는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병원과 제도를 공격하고 있을 뿐이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는데, 내가 알고 있는 의사들, 내가 만난 의사들은 하나같이 거만했다. 행동이 투박하고 거친 것이 아니라 거만하다. 환자의 몸은 고치면서 환자의 마음에는 비수를 꽂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최근의 일이다. 두달이 조금 못된 달을 데리고 변원에 갔다. 배에 가스가 차는지 우유를 자꾸 토하고 먹지를 못해서 말이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걱정하는 아내에게 그 대단하신 산부인과 의사 나으리는 왜 안먹이냐고 숟가락으로 떠서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혼을 내더라. 애가 먹지 못해서 왔는데,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고, 진찰하지도 않고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토하더라도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하더라. 두달 된 딸을 데리고 말이다. 지금가지 내가 만난 의사는 이런 범주를 넘어가지 않더라. 이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촉망받는 전문직 의사의 현주소이다.

  이것만이 아니겠지? 이런저런 일로 병원 한번 더 오게 하고, 조금더 비싼 것을 권하고, 무뚝뚝하게 거만한 의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돈 잘버는 직업,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직업, 사회적인 명망이 따라다니는 직업이기에 선호의 대상이 될 뿐이지, 그 안에는 유의태의 일갈은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 의료의 현주소이다. 거기에다 민간보험을 들어도 안심이 안되는 보험제도. 그런데 정부는 시장의 논리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한다. 서비스라는 말 때문이다. 언제 의료가 서비스고, 교육이 서비스가 되었던가? 오랜 세월 우리 나라에서 의료와 교육은 서비스가 아닌 천직이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돈 잘버는 서비스업이 되어 버렸다. 이제 이 서비스업을 더 잘 개발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병원을 영리법인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나마 있는 건보도 유명무실화 하려고 한다. 의료에도 무한 경쟁의 논리를 적용하려고 하고 있다.

  외과의사 봉다리? 종합병원? 내가 보기에 그것은 로맨스 소설이다. 현실은 오히려 하얀거탑에 가깝다. 정치와 돈과 이건이 잔뜩 끼어든 그래서 시장통 같은 곳 이곳이 병원이다.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이제 병원이 어디로 가려는가? 내가 상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앞으로 치료받을 목적으로 범죄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감옥에 들어가면 밥 먹여주기에 범죄하던 시절이 있던 것처럼 감옥에 들어가면 무료로 치료해주는 것을 노리고 범죄를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 목숨을 돈으로 사고 파는 시대,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재산으로 평가받는 시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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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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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관한 일이었다. 졸다가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보고 너무 좋은 나머지 예수님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세 채 짓고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쭉 살지요." 바로 그 말을 하는 순간 산 밑에서는 한 사람이 간질걸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삶에 찌들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데리고 왔고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절망하고 있었다.(눅 9:28~42)

  이 책을 아는 목사님 홈피에서 보았다. 그분이 이 책을 읽고 기록한 독후감이 기억에 남아서 허락받지 않고 무단으로 일부 옮겨 본다.

"책의 타이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중에...특별히 자는 한자로 者로 표기 되었다...뜻이야... 사람 자 이지만... 4획은 붉은 색으로 대각으로 틀려먹었다는 듯이 그려져 있고... 나는 사람자가 아니라 어려서 배운데로 "놈 자"자로 읽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결국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라고 읽어지는 나도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끊임없이 이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 주인공인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무례한 녀석들만이 남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파티를 고발하는 책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선교된지 공식적으로 120년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내용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기독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위상을 차지하게 된 예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성장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인간적인, 문화적인 노력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적인, 시대적인 조건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인 욕망들을, 그리고 이로 인해 변질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2007년은 참 시끄러운 해였다. "어게인 1907"을 외치던 해였다. 평양 부흥 운동의 역사가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왠지 나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단발성의 이벤트일뿐이었다. 여러 교파 중에서 장료교측이, KNCC와의 관계에서 한기총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인 이벤트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었다. 단지 이것을 위해 이용당하는 평신도와 일선 목회자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감리교 교단본부에선 "어게인 1907"을 바라보며 "거봐라. 이렇게 큰 거 터뜨릴 거에 대비해서 우린 4년 전에 어게인 1903을 했어야 했다."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평양 대부흥의 촉발이 된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산 대부흥을 너무 쉽게 지나갔다는, 그래서 장로교에게 한방 먹었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안타까움이다. 뒤늦게 감리교에선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장로교와의 기다툼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이 감리교와 장로교의 기세싸움에 이용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왜 기세 싸움이 중요한가? 바로 대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선 교회가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가. 누구나 여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누가 그 주도권을 쥐느냐는 것이다. 주도권을 쥐는 쪽이 막대한 이득을 누리기 때문이다. 권력과의 밀착을 통하여 얻게될 이득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기득권을 빼앗겨 본 경험은 이들로 하여금 더 정권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온갖 비리와 범법 행위에 연루된 이명박 대통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면죄부를 쥐어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진홍 목사의 쪼다 발언일 것이다. "한국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서 한 두가지 범법 행위하지 않았다면 쪼다야. 일을 안했다는 말이지."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창피해지는 발언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온갖 특혜를 누리며,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며 많은 성도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는 너무나 달콤하기에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제한당했기에(내려 놓은 것도 아니고 제한 당한 것이다.) 더 복수의 칼을 갈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휘날리는 이상한 집회, 한국 사람 앞에 모아놓고 마치 백악관에 들리라는 듯이 영어로 기도하는 이상한 목사, 자국 대통령을 시종일관 빨갱이로 매도하는 꼴통 보수들 이 모든 사람들이 결집하여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이 마음 아플 따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은 곧 교회의 실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을 왜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우러러 본단 말인가? 왜 내려가지 못하고 이곳이 좋사오니 하고 주저 앉아 있단 말인가? 한심할 따름이다.

  이곳이 좋사오니 외치는 그 순간에 분명 산 밑에서는 절망의 나락을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한 영혼이 있었다. 마귀에게 잡혀서 불위에 쓰러지고, 물 가운데 몸을 던지는 불상한 어린 영혼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가 좋사오니 눌러앉자 말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사회적인 약자들, 유의미한 소수들을 무시한채 권력에 빌붙어서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는 정치 목사들, 무례한 자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양쪽 모두 예수님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뿐아닌가? 반공이 복음으로 변한 이상한 기독교, 유의미한 소수보다는 권력을 차지한 소수를 더 귀하게 평가해주는 특권주의,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 오만함, 하나님을 믿기 대문에 세상의 법은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오늘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원흉들이 아닌가? 목사를 먹사로 만들고, 끊임없이 예수님 얼굴에 먹칠하고 있는 원흉들이 아닌가? 장로 대통령? 이미 두번의 실패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소리에 귀막은 이명박 정부나 예수님의 소리에 귀막은 정치교회나 똑같이 무례한 者들이다.

  한국 기독교회가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낮아졌으면 좋겠다. 섬기는 모습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 설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설교하면서 세습하는 교회, 하나님만 의지하라 말하면서 세상 권력에 밀착하는 교회, 정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불의를 행하는 교회, "교회는 국가에 순종하라, 성경에 나와있지 않느냐?"라는 오만한 종필이 아저씨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교회, 유신은 하나님의 역사라 말하는 교회.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가 유지된다면 그 교회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실 것이다. 예수님을 다시 교회의 머리로 삼고 그 말씀만 따라가면서 타협하지 않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내 딸은 개독교라는 소리를 안듣고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존경을 받고 신뢰를 받았으면 좋겠다.

PS. 말이 너무 어렵다. 쓸뎁없이 어렵게 쓰는 부분이 많다. 목회자라면 모르겠지만 평신도가 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민중 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책이 어느 순간 어려워졌다. 민중 신학이 아니라 민중 신학의 이름을 빌린 엘리트 신학이다 생각이 들게 되었다. 말이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은 쉬운데 왜 말을 어렵게 썼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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