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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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제주도 동백꽃을 치면 4월에는 꼭 놓치지 말아야할 풍경, 여행지라는 말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4.3의 상징이 붉은 동백꽃이 된 이유를 알면 그 꽃이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


  동백꽃은 질때 벗꽃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툭툭 소리를 내는듯이 통으로 떨어진다. 붉은 동백꽃이 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느 재일 문학가는 4.3이 생각이 나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꽃을 바라보면서 4.3 당시 피해자들의 목이 떨어지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그런단다. 끔찍하다 못해 섬뜩한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처참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일까?


  여러가지 말들이 있다. 남로당의 지원을 받아서 빨갱이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육지 것들이 들어가서 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서북청년단들의 만행은 유명하다. 장모와 사위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하고 죽이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데 서북청년단들이 당시 영락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데, 아직도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없겠지만 말이다.


  4.3을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침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에 의해서 주동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미국에 의해서, 소련에 의해서, 자본주의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외부에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날나라가 토막이 나고, 그들은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에 있던 한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기독교와 공산주의, 지주와 소작인 등 평화롭게 어울리던 마을이 토막이 났다. 친구가 친구의 가족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다시 그들을 학살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에 깊이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하여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외면하고.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서 화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지금까지 서로를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상처 받음과 상처 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서 풀려간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들고 피해자이고, 나도 피해자이다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갈라져 있던 인연의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저승의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그 땅, 외부 세력이 들어와서 지배했던 그 땅, 손님이 주인 행세를 했던 그 땅에 조그마한 유골이나마 묻히는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건네준다. 


  전체적으로는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잘 쓰인 소설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도 만만치 않다. 다만 요섭에게 갑자기 등장했던 샤먼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유골을 담아갈 뼈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의 등장은 굳이 그러한 설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등장한 신비한 인물은 소설의 장르를 판타지로 착각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후로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할지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책은 소설이 가지는 묵직한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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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을 찾아서 - 예수 시대 역사 스릴러
김민석 글.밑그림, 마빈 펜.채색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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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풀어주랴?"


  "바라바를 풀어달라."


  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항상 읽고 묵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감옥에 갇혀서 사형을 기다리던 바라바에게 이 외침은 어떻게 들렸을까? 그리고 풀려난 후의 바라바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교회에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며 바라바의 이름이 예수였다고 한다. 똑같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운명이 갈린다. 한 사람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심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다른 예수는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런데 정말로 바라바는 자유의 몸이 되었을까?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바라바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지금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것이 자신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바라바가 사랑하는 딸을 잃은 후에 운명이 바뀐다. 지금까지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에서 이제는 국가의 안보를 흔드는 테러리스트로 변신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죄가 없는 자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면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던 그가, 자신이 붙잡고 살아왔던 그 체제에 의해서 불행을 겪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형을 기다리던 그가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문득 이 책을 되새김질하면서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이 생각이 났다. 각자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왔던 그들이다. 이름도 없이, 명예도 없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을텐데 어느날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던 체제에 의해서 사랑는 가족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바라바처럼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소리쳐도 도무지 듣지 않는 사회를 향하여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짱돌을 드는 것, 바라바와 같은 실력 행사에 들어가는 것 뿐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들을 향하여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관장사, 시체 장사한다는 국회 의원일까, 아니면 국가 체제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언론일까? 그것도 아니면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던 소시민들이었을까? 


  문득 그들의 입장을 떠올리다보니 의인을 찾아서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의인, 그들의 생각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의인, 대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의인을 찾았던 바라바. 최소한 예수는 바라바에게 있어서 다시 한번 인생을 이어가게 해준 의인이었으리라. 힘들고 어렴고,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를 다시 살게 해준 예수라는 의인! 그 의인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있는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교회가 과연 바라바에게 예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가?

  고난 주간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올라간 예수의 뒤를 바라보면서 어설프게 바퀴달린 십자가를 지고 퍼포먼스를 하지는 말자. 대신 그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지만 상처에 조금이나마 무뎌질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예수의 길을 가자. 그것이 고난 주간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필요한 일이다. 오늘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감리교 모임이라는 네이버 밴드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예배 안내가 올라온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지라도 함께 숨쉬고, 아파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을 갖자. 그것이 이 시대가 찾는 의인이다. 


  조만간 아이들을 데리고 생일이라는 영화를 보러 가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세월호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이렇게 의미있는 고난 주간을 보냄으로 의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의인 흉내라도 내보려고 한다. 부디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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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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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국민학교 시절에 한번쯤은 불렀을 노래다. 언젠가 TV 광고를 보다가 "에이 오바다"라고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교과서에 대한 공익 광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당신을 모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유관순 사진이 나왔던 적이 있다. 아무리 국정 교과서를 밀어 붙이려고 해도 저건 오바라고 생각했다. 유관순을 모를 리가 있나? 맞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유관순 누나를 모를리는 없다. 위의 노래와 함께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된 유관순 누나를 모를 수는 없다. 당연하다. 어린 시절 내 머릿 속에 독립 운동하면 김구보다 유관순이 먼저 떠올랐고, 반공하면 이승복이 떠올랐다. 병천 아우내 장터와 서대문 형무소는 우리에게 유관순을 잊을 수 없는 존재로 각인시켜 놓았다. 


그런데 요즘들어 유관순이 논란이 되었다. 유관순의 훈장 서훈의 등급을 높였다는 것인데, 그 논란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무리 유관순이 대단하다고 해도 신흥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사재를 턴 이회영이나, 김구, 약산 김원봉과 같은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거기에다가 당시 독립운동을 한 여인이 과연 유관순만 있었겠는가? 그런데 유관순이 이렇게 유명해 진 이유에는 김활란과 모윤숙이 있다. 자신들의 친일을 가리기 위하여 이화 출신의 유관순을 발굴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관순과 비슷하게 애국의 아이콘으로 발굴된 사람이 있다. 잔 다르크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 시 프랑스에게 애국과 승리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사람이 잔 다르크이다. 그녀가 아무리 전략을 짜봐야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저 기울어 가는 프랑스를 일으키는데 소비되고 버려진 아이콘일 뿐이다. 잔 다르크의 비참한 말로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실책과 부족함을 커버하기 위하여 발굴되었고, 그리고 쓸모가 없어지자 용도 폐기 된 것이 잔 다르크가 아니겠는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기를 잡아가는 시기와 잔 다르크의 출현, 그리고 그가 받은 신탁은 그녀로 하여금 프랑스 국민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물론 마스코트로 그녀가 발굴된 것을 가지고 그녀가 가지는 의미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가 모든 것을 뒤짚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유관순의 위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태생부터 친일이었던 정권, 그리고 자신의 친일 행각을 가리기 위한 사회회 지도층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유관순은 독립 운동의 마스코트가 되었고,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국정 교과서를 밀어 붙이기 위해 다시 소환 당한 것이며,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을 깎아 내리기 위하여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서훈을 높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서훈을 높이는 것은 그녀보다 더 치열한 독립 운동을 했던 이들의 서훈을 높이는 것과 그들의 공적을 재평가하는 것과 함께 가야 한다.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어린 소녀였다는 이유로 그녀만 원 포인트로 찍어서 서훈을 높이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백년 전쟁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왜 그렇게 앙숙이었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이에 대한 내용이야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봐도 알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적지 않는다. 물론 읽은지 오래 되어서 그것을 다시 떠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닷도 있다. 리뷰를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게으른 탓에 지나왔던 것도 한 몫할 것이다. 그러다가 유관순 논란을 보고 비슷한 잔 다르크를 떠올리게 되었다. 


유관순이 잔 다르크처럼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두서 없이 끄적여 본다. 3.1운동 100년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친일 청산이 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모 의원을 나베라고 부르는 것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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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3 - 동서융합의 세계제국을 향한 웅비 그리스인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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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룬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종말은 찾아온다. 죽음은 모든 것들을 삼키는 가장 강력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마저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 있으니 후계자를 세워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왕으로 칭송받는 알렉산드로스!


  물론 악렉산드로스보다 더 대단한 정복자들이 있다. 칭기스칸이 정복한 영토는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곳보다 더 넓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를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그가 서양 문화의 태동지인 그리스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마케도니아를 그리스라고 보는 것도 우습지만 여튼 그가 속한 곳이 서양인 것은 분명하니 그가 서양 학자들에 의해서 위대한 정복자라고 인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정복자로 인정을 받는 것은 그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일을 이루었고,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갑작스럽게 퇴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혼자서 대단한 일을 이루고 퇴장했으니 더 위대해 보이는 일종의 착시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착시 효과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나라는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냐는 듯이 갈갈이 쪼개지고 갈라져서 쇠퇴하다가 로마에 의해서 멸망을 맞게 된다. 그의 삶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위대한 사람이다, 동서양의 문명을 융화시키려던 선각자였다 말을 한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그렇게 대단한 업적을 이룬 선각자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한 일이 대단하기를 하지만 그는 마지막 방점을 제대로 찍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으로 말하고 싶다. 마지막 방점이 무엇인가? 후계자 선정이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어갈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역사상 해프닝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가 아직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변명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세우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생각과 야망이 사라져 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3권을 읽으면서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자 문득 그가 생각났다. 제 2인자를 세우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 말이다.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견제하다가 결국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러한 그들의 대처가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말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것도,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도, 하다 못해 작은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도 가장 중요한 것은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이룬 창업자들이라도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가지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멀리 중국에는 유표와 원소가 있었고, 가까이 한국에는 정주영이 있지 않은가? 그 대단하던 현대가 후계자 문제로 소위 말하는 왕자의 난을 겪고 그렇게 쇠퇴하여 아직도 뻘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정치 20년을 말한다. 나라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진보 진영에서 20년을 집권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 진영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면서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과거에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뭐하나? 후계자 하나 제대로 못세워서 자유한국당은 황교안이 1위로 당대표가 되지 않았던가? 입당한지 4달도 안되어서 당대표가 되는 우스운 정당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지금 진보 진영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반사 이익을 얻는 것이지 준비를 시키고, 혹은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최고의 전략은 후계자를 세우는 것일텐데 북한만도 못한 현실을 보면서 씁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소한 김정은은 김정일의 노선을 제대로 파악하고 수정할 것과 계승할 것을 분명히하면서 트럼프와 밀당을 하고 있는데 그들을 깔보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글로벌 호구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마지막 책을 알렉산드로스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후계자로 세웠다는 판단 때문일까, 아니면 로마인 이야기와 같이 황제라는 걸출한 인물을 선망하는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여튼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그동안 수고가 많았음은 우리가 인정하고 감사해야할 것이다.


  *알렉산드로수 사후의 이야기가 너무 간략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다. 읽은지 오래 되어서 분명하게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혹은 웃으면서, 혹은 과거에 읽었던 책과 비교하면서 읽었던 부분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책과 비교해서 읽으면 더 자세하게 이 시대를 알 수 있을 것이다.(http://blog.aladin.co.kr/759552125/8233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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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2 -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그리스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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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점은 잘못하면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황금기를 구가했던 아테네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이에 대한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대중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행위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게을리하게 되었을때, 대중적인 인기를 너무 의식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잘 보옂여준다고 하겠다.


  페리클레스 사후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대중의 인기에 영햡하기 위하여 지도자에게 딴지를 걸던 클레온, 능력은 있으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중을 선동했던 알키비아데스 모두 결은 다르지만 포퓰리즘 정치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 대한 내용이야 다른 사람들이 잘 요약을 했을테니 제쳐 두고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적어보려고 한다.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다. 곳곳에서 못살겠다는 말을 한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가? 아마도 인류가 이 땅에 생기고 교환을 한 이후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이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들어 더 시끄러운 이유가 무엇인가? 뚜렷한 목표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의 정책에 대한 청사진도 불분명하고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얼마전 있었던 5.18에 대한 망언이라든지, 남자 3호 김준교의 발언이라든지를 보면서 이에 대한 내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그들은 뚜렷한 정책 없이 그저 떠들어 댈 뿐이다. 청년이 살기 어렵다. 누가 모르는가? 그렇지만 그에 대한 답이 없다. 보수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하는데 정책은 실종도되었다. 그저 문재인 대통통령 안티들을 모아놓은 당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한다. 통일을 외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라고 하면서 통일을 반대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생각이 있는가 싶다.


  그저 누군가의 지지와 인기만 있으면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생명 연장의 꿈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이를 모를리가 없다. 그래도 정치인이라면, 이 바닥에서 굴렀던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생각이 없을리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 얻게 되는 분명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득이 무엇이겠는가? 지지와 인기가 아니겠는가? 과연 이들에게 권력을 쥐어주어야 하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아무리 대단한 정치 체제라고 해도 완성도가 높은 정치 체제라고 해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 하는 사이에 정말 그지 같은 사람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서글프고 아찔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제2의 클레온 제3의 클레온이 등장할 것이고, 알키비아데스같이 무모한 사람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중우 정치와 민주 주의는 정말 한끗차이다.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맡길 것이가 조금 더 고민하게 되고, 투표도 조금더 신중하게 된다. 황금기는 아니지만 우리 나라는 지금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이 길에서 어떤 선택을 택할지는 우리의 몫이고, 그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이를 기억하고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혀현명하나 선택을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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